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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화등선한 선인 김가기

    우리 말속에는 수련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 보이는 말이 많습니다. ‘기가 막힌다’, ’기분이 좋다’ ‘기운이 난다’ 등등. 말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우리말 곳곳에 녹아있는, 기와 관련한 말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선도수련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됩니다. 당연히 높은 경지에 이른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분들의 삶을 담은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조선조 초기 고대 역사 특히 단군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역사 책을 갖고 있을 경우 엄벌에 처했을 정도로 관련 서적을 모두 거둬들여 불태웠고, 일제도 식민통치를 위해 민족정기를 북돋울 수 있는 서적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들어 주목을 받고 있는 김가기(金可記) 선인에 대한 기록은 소중한 자료로 생각됩니다. 

     

    물론 그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중국의 선도 관련 서적인 <속열선전> 당나라 때 심분이 쓴 <속선전>, 원나라 조도일이 편찬한 <역세진선체도통감람> 등에 김가기 선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지난 2001년에는 중국 섬서성(陜西省) 종남산 자오곡에서 김가기 선인의 삶을 담은 석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자오곡은 김가기 선인이 살던 곳으로 중국 산서성 종남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계곡인데 절경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계곡은 현지인들이 금선봉이라고 불리는 산봉우리 아래에 있으며 소나무 숲이 해를 가릴 정도로 우거져 일반인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곳이라고 합니다.

     

    속열선전과 비석에 담긴 글에 따르면 김가기 선인은 신라 사람으로 38대 원성왕 때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인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한 뒤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최치원 선생도 빈공과를 통해 당나라 관리가 됐지요. 

     

    김가기 선인은 성품이 침착하고 도를 닦는 것을 좋아했으며 사치스러운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박학다식해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용모는 단정하고, 말과 행동거지에서는 깊은 멋이 풍겼다고 전해옵니다.

     

    김가기 선인은 그렇게 3년을 살다 사신으로 본국인 신라로 돌아갑니다. 고향 땅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김가기 선인은 얼마 뒤 다시 당나라로 돌아와 종남산으로 들어가 황제가 불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찾지 않는 깊은 산중에 띠풀로 엮은 집을 짓고 손수 꽃을 심고 과수를 많이 길렀습니다.

     

    기록을 보면 김가기 선인은 남몰래 덕을 베푸는데 힘썼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청하는 게 있으면 거절한 적이 없었으며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도 매사에 정확했다고 합니다. 

     

    김가기 선인의 삶은 결국 수행이라는 게 주위 사람에, 자신을 길러준 만물을 이롭게 하는 일을 힘써하는 것임을 나타내주는 것 같습니다.

     

    선인으로 칭송받은 분인 만큼 수련도 하셨을 것입니다. 기록에는 복기(服氣)를 통해 몸을 단련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복기란 기를 먹는다는 뜻으로 호흡수련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늘 향불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때가 많았으며 도덕경과 신선경을 외우고 익히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짓고 남을 돕는 일에 힘쓰던 김가기 선인은 당나라 선종 11년(867년) 3월 당나라 황제에게 소를 올립니다. 황제는 그분이 올린 글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신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자와 영문대의 시랑이 되어 내년 2월 25일에 하늘로 올라가야 하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종은 이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내시를 보내 그에게 궁에 들어올 것을 권했으나 김가기 선인은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옥황상제의 조서를 보자고 해도 다른 신선이 관장하므로 인간 세상에는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선종은 김가기 선인이 고집을 꺾지 않자 궁녀 네 명과 내시 두 명을 보내 시중들게 하였으나 김가기 선인은 이를 물리치고 혼자 생활하며 그들을 바깥채에 살도록 했다고 합니다.

     

    내시와 궁녀들은 혼자 사는 김가기 선인의 방에서 밤마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창문 틈으로 몰래 들여다보니 김가기 선인이 용과 봉황 위에 앉은 선관(仙官), 선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점차 나라 안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김가기 선인이 말한 2월 25일이 다가왔습니다.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조정의 여러 사대부를 비롯해 상인, 공인 등 온갖 사람들이 산골 계곡인 자오곡을 가득 메웠습니다. 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오색구름이 피어나고 학이 길게 울었습니다. 계곡 주위에는 봉황이 날고 생황이나 퉁소 소리 같은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펴졌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많은 선인들이 내려와 김가기 선인은 모시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김가기 선인의 삶 특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 그대로 우화등선했다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가기 선인의 신비한 삶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분의 삶의 태도입니다. 

     

    기록에 짧게 나타나 있지만 사람들이 찾아와 청하는 게 있으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는 구절은 만나는 사람, 대하는 사물을 끊임없이 분별하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만나는 사람, 접하는 사물 모두에 깃든 하늘을 보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모두가 이로운 방향으로 아낌없는 도움을 줬을 김가기 선인의 삶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삶을 살고 있는가.

  • 달라이 라마의 아침기도문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을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보다도

    더 뛰어난 존재로 여겨

    최고의 목적을 이루려는 결심을 지니고

    나로 하여금 언제나 중생을 사랑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언제나 나 자신을 가장 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내 가슴 속 깊이

    그들에게 애정과 존경을 보내게 하소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번뇌가 마음 속에 들어오는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려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그것에 맞서 물리치게 하소서.

     

    악한 본성을 가진 이들이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행동에 사로잡혀

    고통받는 것을 보면

    마치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다른 사람들이 질투심에서 나를 비난하고 

    터무니없이 욕을 퍼부어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패배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승리를 주게 하소서.

    큰 기대를 품고 

    내가 은혜를 베푼 사람이 

    나를 심하게 상처 입힐지라도

    나는 그를 거룩한 영혼의 친구로 여기게 하소서.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나의 어머니인 모든 중생에게

    행복과 이익을 함께 바칠 수 있게 하소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주는 모든 것을 

    남몰래 내가 대신 받을 수 있게 하소서.

     

    그들로 하여금

    세속의 여덟 가지 이해 관계에서 생겨난 

    생각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이 환상임을 깨닫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집착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하소서.

     

     

    출처 : 달라이 라마의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변한다> 중에서

  • 부설거사, 파계 또한 깨달음의 길

    부설 거사에 얽힌 이야기는 수행에 승속이 따로 없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신라 때 고승인 부설 거사의 삶과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북 부안 내변산 월명암에 전해오는 한문 필사본 <부설전>에 담겨 있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은이는 구전되던 부설 거사의 이야기를 소설체로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부설은 출가승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출가했다 파계한 승려입니다. 부설 스님은 신라 때 불국사의 승려였다고 합니다. 스님은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부설 스님에게 당혹스런 인연이 생겨납니다. 지리산, 천관산, 능가산 등지에서 수도하고 오대산으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묘법을 얻고자 만행을 떠나는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김제시 부근을 지나던 세 도반은 불심이 깊다는 집을 수소문해 하룻밤을 지내게 됐습니다. 구무원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하룻밤 신세지고 떠나려했지만 비가 몇 날을 계속해서 내려 하는 수 없이 며칠을 묵게 됐습니다.

     

    스님들이 머무는 동안 불심이 깊었던 구무원은 스님들에게 자주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에게는 재색을 겸비한 묘화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묘화 낭자도 스님들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며칠 뒤 비가 그치고 부설 거사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묘화 낭자가 부설 거사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부설 거사에게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득도를 위해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에게 혼인을 해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부설 거사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묘화 낭자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차 도통하여 많은 중생을 구하실 스님이 작은 계집 하나 구해 주지 못한다면 어찌 큰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묘화 낭자는 혼인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목숨을 끊겠다고 했습니다. 자살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 딸을 보고 구무원도 부설 스님에게 매달려 애원했습니다. 부설 스님은 묘화 낭자의 목숨을 건 호소에 하는 수 없이 그녀와 혼인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도반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때 부설 스님은 도부재치소(道不在緇素) 도부재화야(道不在華野) 제불방편(諸佛方便) 지재이생(志在利生)라는 게송을 들려주며 도반들을 떠나 보냅니다. 

     

    도라는 것는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하얀 옷에 있는 것이 아니며, 번화로운 거리와 초야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이 하고자 하신 뜻은 중생을 이롭게 제도하는 데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부설 스님은 거사가 됐습니다.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뒤 아들과 딸을 얻어 등운과 월명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비록 파계하고 집안을 이뤘지만 부설 거사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바닷가에 지은 초막에서 지낼 때나 나중에 내변산에 지은 암자에서 살 때나 늘 수행에 몰두했습니다.
     

  • 가슴이 먹먹해지는 초등학생의 시

    한 초등학생이 쓴 시가 읽을 때마다 큰 울림을 줍니다. 

    부안여중에 다니는 이슬(14)양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며 ‘가장 받고 싶은 상’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2016년 전라북도 교육청 공모전에서 동시 부문 최우수상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받고 싶은 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짜증 섞인 투정에도

    어김없이 차려지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상

     

    하루에 세 번이나

    받을 수 있는 상

    아침상 점심상 저녁상

     

    받아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해도

    되는 그런 상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못 보았을까?

    그 상을 내시던

    주름진 엄마의 손을

     

    그때는 왜 잡아주지 못했을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을까?

     

    그동안 숨겨놨던 말

    이제는 받지 못할 상

    앞에 앉아 홀로

    되뇌어 봅시다.

    "엄마, 사랑해..."

    "엄마, 고마웠어요"

    "엄마, 편히 쉬세요"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엄마상

    이제 받을 수 없어요.

     

    이제 제가 엄마에게 

    상을 차려 드릴게.

    엄마가 좋아했던

    반찬들로만

    한가득 담을게요.

     

    하지만 아직도 그리운

    엄마의 밥상

    이제 다시 못 받을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울 엄마 얼굴(상)
     

  • 기독교 성자 썬다 싱(4) - 신비체험을 남기고 사라지다

    썬다 싱은 22세인 1911년부터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합니다.

     

    기독교 전통이 거의 없는 인도와 티베트에서 썬다 싱의 전도 활동은 쉽지 않았습니다. 복장을 보고 사두로 여겨 존경을 표하던 사람들도 그가 기독교인임을 알고 나면 외면했습니다. 

     

    굶주림이 일상이었습니다. 추위에 몸이 얼고 더위에 지쳐 주저 앉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썬다 싱은 인도 대륙을 횡단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박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경찰이 그를 감옥에 가둔 채 거머리 때를 풀어 놓기도 했고, 시체가 썪고 있는 우물에 던져져서 팔이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썬다 싱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발길은 티베트로도 향했습니다. 서른살이 될 때까지 티베트 방문을 위해 열 번이나 히말라야를 넘었습니다. 

     

    썬다 싱은 기독교의 본고장이던 서구 여러 나라에도 전도를 위해 방문했습니다. 1920년과 1922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아일랜드,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을 다니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썬다 싱은 기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기도 중에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체험도 했다고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썬다 싱이 경험한 상태를 입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썬다 싱이 신비현상을 체험한 것은 1922년 티베트에 가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눈으로 길이 막혀 꼼짝 못하게 되어 기도를 하던 중 자신이 천사들 무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자신이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에 온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썬다 싱은 이를 시작으로 이런 신비 체험을 자주 하게 됐습니다. 

     

    썬다 싱은 영안으로 보이는 존재에게 궁금한 점을 묻기도 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며 영혼은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썬다 싱이 영안으로 본 존재들로부터 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죽음은 잠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질병이 없다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오는 데 아무런 고통도 없습니다. 마치 몹시 피곤한 사람이 깊이 잠드는 것처럼 인간은 죽음이라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죽음은 너무나 뜻밖에 찾아오기 때문에 죽은 이들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들어간 것을 알아채기조차 힘듭니다. 그들은 충분히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이 육체가 아니라 영체이며 자신이 물질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옮겨온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죽을 때 무지각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죽은 뒤에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사납고 무서운 악마들의 얼굴을 보고 말도 못하고 공포에 떨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이들의 죽음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을 맞으려고 오는 천사들과 거룩한 영들을 보고 극도의 행복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때 먼저 죽은 사람들도 그를 영계로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썬다 싱은 1924년 또 다시 티베트로 향했으나 얼마가지 못해 돌아오게 됩니다.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영양실조 상태였고 폐결핵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2년 동안의 서구 전도 여행으로 피로도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의사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썬다 싱은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몸을 추스리면서 글과 편지를 통해 전도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28년 썬다 싱은 다시 티베트로 향합니다. 하지만 며칠 뒤 길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다 상인들에 구출돼 돌아옵니다.

      

    이듬해인 1929년 그는 다시 티베트에 가겠다면서 길을 나섭니다. 그 뒤로 썬다 싱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으러 나섰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썬다 싱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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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성자 썬다 싱(3) - 마하리쉬가 전해준 사후 세계

    이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다음은 마하리쉬가 썬다 싱에게 전해 준 가르침입니다. <천국과 영의 시계>라는 책에 실려 있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영안이 열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다

     

    어느 날 동굴 안에서 기도를 할 때였다. 누군가 나의 눈을 만져주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때 영안이 열렸다. 

     

    동굴 안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가득했다. 하늘의 군대와 천사들이 천국에서 내려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들 뒤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얼른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경배를 드렸다. 주님께서 나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충성스런 나의 종아 지금 너에게 결단코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주노라. 너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육체 가운데 살리라. 때가 가까웠다. 이후부터 너는 지상의 나의 교회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낼지니라. 이것은 너의 특별한 봉사가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끝난 뒤 나는 새로운 심령 곧 죄와 모든 오염에서 깨끗하게 된 심령을 받았다. 나는 즉시 새롭게 태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으로써 세계 각지를 찾아 신방을 하다

     

    그때 많은 성도들이 나의 거듭남과 내게 부여된 특권을 축하해줬다. 몇몇 성도들은 그때부터 항상 내 곁에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여 중보하고 찬송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편을 노래하고 거룩한 말씀을 묵상한다.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독특한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영으로써 세계 여러 지역을 신방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야 중보 기도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영으로써 신방을 할 때 나의 육신은 동굴 안에 그대로 누워있게 된다.”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기도한다. 나는 이 놀라운 교통을 믿을 뿐 아니라 날마다 나 자신의 영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영혼을 통해 세상 곳곳을 다녔고 천국에도 다녀왔다.

     

    주님의 충실한 종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수호천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 천사는 항상 종의 곁에 있으면서 연약하고 절망적인 순간에 구원자가 되고 힘이 되어준다. 영안이 어느 정도 뜨여진 극소수의 사람들은 천사를 볼 수 있고 영계를 어렴풋이 나마 보며 성도들과의 교통을 이해할 수 있다.

     

     

     

    선한 영과 악한 영, 그리고 천국

     

    거의 모든 영들은 세상 어느 곳이든 가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선한 영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제한을 두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본성이 죄로 물든 인간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로부터 나는 냄새는 그들에게 혐오감과 함께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

     

    반면 악한 영은 사람의 일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려고 한다. 악한 영의 본성은 바로 죄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욕망이 채워진다. 따라서 악한 영은 인간들이 악한 일을 하도록 해 그들이 자신들처럼 지옥에 속하게 만들 때 기뻐한다. 

     

    나는 프랑스에서 살다 21살로 세상을 떠난 한 여성을 따라 천국에 가봤다. 내가 처음 본 것은 하늘 높이 치솟은 웅장한 집이었다. 집의 소재는 지상에 존재하는 물질이 아니었으며 무한한 것도 유한한 것도 아니었고, 존재는 하지만 투명한 상태였다. 비어 있는 것도 있었고 건설 중인 것도 있었으며 기초만 다져진 것들도 있었다. 하나님의 종들을 위한 집인데 그들의 영적 진보에 따라 완성된다.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

     

    사람이 죽음 뒤에 겪게 되는 현상은 크게 세 가지로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하다. 

     

    첫 단계에서는 죽은 뒤에는 천사들이 나타나 죽은 이의 몸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사람은 자신이 존재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란다. 

     

    두번째 단계에서 죽은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두 개의 길을 보게 된다. 하나는 밝게 빛나는 길이고 하나는 어둠에 쌓인 길이다. 선한 영은 자연스럽게 밝은 길로 이끌려 간다. 하지만 악한 영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에 어두운 길로 달려간다.

     

    세번째 단계에서 영들은 자기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에 대해 듣게 된다.

     

    영들은 세 가지 등급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두 가지 등급의 영은 천국이나 지상의 어느 곳이든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죄와 접촉하는 것은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들이 지상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다른 한 등급의 영은 거주 지역이 제한된다. 이들은 천국의 특정 지역에 머물면서 가르침을 받는데 교육을 마치기 전까지는그 지역을 떠날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오른편에 매달려 있던 강도에게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말씀하신 낙원이 바로 영혼들이 교육을 받는 장소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다. 하지만 그분은 굉장히 가련한 모습으로, 또는 겸손한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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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페 교회’ 운영하는 목사님

    서울 상일동 주택가 골목에는 에클레시아라는 작은 카페가 있습니다.

     

    이 카페의 주인이자 바리스타이며 유일한 직원은 양광모 목사님(바로세움정립교회) 입니다.

     

    양 목사님은 일주일에 6일은 카페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미사리의 공장 건물 2층에 있는 15평 남짓한 예배당에서 20여 명의 교인들과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어로 ‘밖으로 불러 모으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교회를 가리킬 때 씁니다.

     

    양 목사님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분입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양 목사님의 목회 생활은 순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서울 이문동 동안교회와 지구촌교회 수석 무목사를 거쳐 교인수 1000명이 넘는 정릉제일교회 담임목사를 맡았습니다. ‘잘 나가는 목사’라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양 목사님은 늘 괴로웠습니다.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교회에 손가락질하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자체가 불신받고 있었습니다.

     

    양 목사님은 2012년 부임 2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내려놨습니다. 대안이 될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를 찾아가는 5년의 여정을 담은 책 ‘고백 에클라시아’(선율 펴냄)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떠오르는 행복의 시작이었지만 위기의 현실을 극복하고 어두운 미랠르 밝게 비출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

     

    올바른 목회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고 영성을 고양시켰습니다.

     

    양 목사님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건강한 교회”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서점 겸 카페의 형태로 출발한 미국의 세이비어 교회를 모델로 삼아 카페 교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2012년 카페 에클레시아의 문을 열었고 같은 해 바로세움정립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들른 사람 가운데 바리스타인 목회자의 말 한 마디가 필요한 이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페 운영을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과 커피 품질 평가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목회자 이기 전에 자영업자로 시장 조사와 매장 운영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2012년 문을 연 카페의 운영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수입은 카페를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해 결국 택시 운전대를 잡는 ‘투잡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는 자신이 섬겼던 교회의 교인을 만날까 노심초사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목사와 택시운전사를 대하는 것은 너무도 다름을 뼈저리게 느꼈겠지요.

     

    양 목사님은 택시 운전을 통해 모든 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섬기는 법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또 낮췄을 것입니다.

     

    2년 쯤 시간이 지나자 카페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페운영을 하면서도 당연히 주일 예배는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은 불교신자인 한 단골손님의 도움으로 2015년에 마련했습니다. 

    그 손님이 자신이 운영하는 미사리 식품공장 건물 2층에 15평 짜리 예배당을 마련해준 겁니다. 

     

    가수 노영심씨는 카페 에클레시아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저에게 카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공간입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여전히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제게 하나님과의 끈만은 놓지 않게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표현도 못하고 말도 예쁘게 하지 못하고 투정만 부리는 저지만, 마음속에 목사님과 사모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항상 느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버티며 이겨 내고 있습니다. - 단톡방 에클레시아 멤버 노영심." (<고백 에클레시아>, 37쪽)

  • 라벤더가 불안 우울 증세 개선하는 기전 밝혀져

    라벤더는 진정 작용이 있어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불안, 우울 증세를 개선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날롤이라는 성분이 뇌의 흥분 작용을 억제해 잠을 잘 자게 만들어준다고도 합니다. 

     

    다만 라벤더가 심장 박동을 늦춰 혈압을 낮추기 때문에 저혈압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라벤더의 어떤 점이 불안을 진정시켜줄까요?

     

    라벤더의 냄새가 그런 작용을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일본 가고시마 대학의 가시와다니 히데키 생리학 교수 연구팀은 라벤더에 포함된 리날롤이 냄새를 통해 코의 후각 신경을 자극해 뇌세포의 GABAA 수용체가 활성화되면서 진정 효과가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라벤더 냄새가 기도에서 혈관으로 흡수되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후각 신경이 직접 뇌의 GABAA 수용체를 자극한다는 겁니다.

     

    가시와다니 교수는 쥐 실험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가시와다니 교수 연구팀은 쥐의 불안 행동을 유발하는 상황을 만든 뒤 리날롤 증기를 쏘이자 불안 행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쥐의 후각 신경을 없애자 리날롤 증기를 쐬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후각 신경이 직접 뇌의 GABAA 수용체를 자극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가시와다니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이 내용은 '행동 신경과학 최신 연구'(Frontiers in Behavioral Neuroscience) 최신호에 실렸습니다.

  • 20대 건축학도가 개발한 재활용 텐트

    여러 날 동안 열리는 축제에서 많은 이들이 팝업텐트를 치고 잡니다.

     

    축제가 끝난 뒤에는 상당수 텐트가 그대로 버려집니다. 1년 동안 이렇게 버려지는 텐트가 1천만 개가 넘는다고도 합니다.

     

    절친인 네덜란드의 두 건축학도 얀 포르테인(Jan Portheine)과 우트 코머(Wout Kommer)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를 다니던 두 사람은 졸업작품으로 바닷가에 골판지를 소재로 오두막집을 지었는데 우연히 축제 때 많은 텐트가 버려지는 것을 보고 골판지로 텐트를 만들기로 했다고 합니다.

     

    골판지 텐트 회사 회사 카텐트(Kar Tent)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이 만든 골판지 텐트는 화학소재를 쓴 텐트 못지않게 튼튼합니다. 400Kg의 무게를 견딜 수 있습니다. 비가 와도 문제가 없습니다. 코팅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코팅에는 화학물질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3년 가까이 연구해 방법을 찾았습니다. 일반 골판지보다 밀도가 높고 두 배 가까이 두꺼운 골판지를 써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카텐트는 자체 중량의 4배가 넘는 물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골판지 텐트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설치가 간편합니다. 몇 분 안에 텐트를 칠 수 있습니다. 

     

    두꺼운 천정과 벽은 뜨거운 햇빛을 차단해 일반 텐트보다 실내가 훨씬 더 시원합니다. 골판지는 빛을 통과시키지 않기 때문에 낮에도 푹 잘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진 카텐트는 책이나 포장 상자로 재활용될 수 있습니다

     

    텐트는 처음 삼각형 모양에서 현재 오각형으로 진화했습니다.

     

    텐트 하나 가격은 49.95 유로, 우리 돈으로 6만 5천 원 정도입니다.

     

    행사를 후원하는 기업들은 골판지 위에 회사 로고를 적어 마케팅을 하고 참가자들은 그림, 글씨, 디자인 등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만의 텐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카텐트는 현재 유럽 85개 축제에 공급되고 있습니다.

     

    2015년 네덜란드의 한 음악축제에서 처음 선을 보인 골판지 텐트는 지난해에만 6만 개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카텐트는 지난해 세계적 디자인 상인 레드닷 어워드(RedDot Award)를 받기도 했습니다.

     

    설립자인 얀 포르테인은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올바른 생각을 갖고 올바른 일을 하려 한다면 당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 히말라야 기슭 작은 인도 지방 UN상 받다

    히말라야 자락에 있는 인도의 시킴(Sikkim) 주가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주는 2018 미래정책상(Future Policy Award)을 받았습니다.


    미래정책상은 지구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정책을 펴고 있는 곳에 주어지는 상입니다.


    FAO는 시킴 주가 세계 최초로 유기농 100% 달성 지역이 됐다는 것을 주요한 수상 이유로 들었습니다.


    인구 64만 명의 이 작은 주에는 농업인이 6만 6천여 명인데 이들은 2003년 유기농업 추진을 선언한 뒤 13년 만에 100% 유기농으로 전환했습니다.


    여기에는 주 정부의 역할이 컸습니다.


    주 정부는 2003년 유기농 100% 달성지역 추진을 선포한 뒤 단계적으로 화학비료 지원을 중단하고 농민을 대상으로 유기농 관련 교육을 대대적으로 시행했습니다.


    농민들이 유기농업을 기피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농사짓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제초제 대신 손으로 잡초를 없애느라 “손톱이 자랄 겨를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유기농업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 정부는 흔들림 없이 유기농 전환을 추진했습니다.


    2009년 마침내 농가들이 적극 호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농민들은 자체 유기농 인증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현재 시킴 주에서는 민관이 함께 운영하는 유기농 인증기관이 있습니다. 


    시킴 주는 2014년 화학비료와 농약을 주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법률을 공포하기도 했습니다. 농축산과 관련한 법률에도 같은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주 정부는 주 경계선에서 트럭을 하나하나 점검합니다. 법을 위반할 경우 최고 5년형에 처해집니다. 


    유기농업 100%를 달성한 뒤 시킴 주에는 관광객이 크게 늘었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이 늘면서 농산물 판매 걱정도 없다고 합니다. 


    아시아뉴스는 시킴 주의 수상 소식과 함께 이 지역이 100% 유기농 지역이 된 뒤 관광객과 농산물 판매가 늘어 농민들의 소득이 크게 늘었다고 보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