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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악의 미세먼지, 독소 배출 도와주는 음식

    미세먼지가 며칠째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미세먼지는 지름이 10㎛ 이하의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작은 먼지 입자를 말합니다. 사람의 폐포까지 깊숙하게 침투해 각종 호흡기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초 “재난에 준하는 특단 대책”까지 요구하고 나섰지만 원인이 복합적이고 단기간에 개선이 어려운 만큼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당분간은 마스크 착용, 외출 자제 등 각자가 미세먼지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경을 쓰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음식을 신경 써서 먹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중금속이 몸에 쌓이는 것을 막고 배출을 도와주는 음식들이 있습니다. 서울시 미세먼지정보센터의 추천 음식을 일부 소개합니다.  

     

     

    1.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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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산화 성분 폴리페놀의 일종인 탄닌이 면역력을 강화시키고 중금속을 배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단 탄닌은 철분 흡수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식사 후 30~60분이 지난 후에 마시는 게 좋습니다. 

     

     

    2. 고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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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어에 함유된 아연은 중금속이 몸에 쌓이는 걸 막아줍니다. 또 오메가3 지방산은 기도의 염증을 완화시켜서 호흡기 질환 개선에 도움을 줍니다. 특히 호흡 곤란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어 폐 질환이 있는 분들은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릴 때 먹으면 좋습니다. 

     

     

    3.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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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는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식이섬유가 풍부한 알칼리성 채소로 혈액을 맑게 해줍니다. 미나리는 독소 배출을 도와주는 데 특히 매연과 먼지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 중금속을 몸 밖으로 배출해주는 효능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금속 배출 효과를 높이려면 충분한 물과 함께 섭취해 장운동을 증가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4. 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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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역을 비롯해 파래, 톳, 매생이 등 해조류는 바다에서 나는 해독제로 불립니다. 식이섬유인 알긴산이 풍부해 몸속에 쌓일 수 있는 미세먼지와 중금속 등을 배출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단, 물에 오래 담그거나 데치지 않고 먹는 게 좋습니다. 

     

     

    5. 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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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에는 매운맛 성분인 알리신과 비타민 B1이 있어 항염증 작용을 합니다. 덕분에 기관지의 염증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조직을 잘게 부숴 먹는 게 좋기 때문에 양념으로 충분히 넣거나 오래 씹어 먹는 게 좋습니다. 

     

     

    6. 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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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은 기침을 삭이는 데 좋고 미세먼지 속 세균이 활성화되지 못하게 막아주기도 합니다. 껍질에 먹는 게 좋지만 속껍질이라도 함께 먹도록 합니다. 

     

     

    7. 브로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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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세먼지로 인한 체내 염증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고 식이섬유가 풍부해 배변작용을 좋게 해 노폐물을 배출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줄기째 먹는 게 좋습니다. 

     

     

    8.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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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에 들어있는 루테올린은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 미세먼지를 잡는 데 탁월합니다. 배 껍질에 루테올린이 더 많으니 깨끗이 씻어 껍질째 갈아서 먹으면 좋습니다.

  • 영하 50도의 추위를 녹인 손길

    미국 유명 토크 프로그램인 <엘린 디제너러스 쇼>에 한 여성이 출연했습니다.

     

    이 토크 쇼는 2017년 방탄 소년단이 출연해 많은 이들에 알려진 프로그램으로 유명인들이나 특별한 사람들이 주로 출연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이날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캔디스 페인은 시카고 남부 지역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는 어찌 보면 평범한 여성입니다.

     

    페인이 이 특별한 프로그램에 초대받은 이유는 그가 최근 벌인 선행이 알려지면서였습니다.

     

    페인은 이달 초 시카고 지역의 체감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떨어지자 노숙인들이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호텔방을 얻어 이웃에 사는 노숙인 100여 명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는 엘린 디제너러스 쇼 출연해 “체감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로 직장도 임시 휴업을 했는데 뉴스를 보다 노숙인들이 이 추위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호텔방을 구하기로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IMAGE|329|center|캔디스 페인은 노숙인들이 체감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호텔방을 구했다고 엘린 디제너러스 쇼에서 밝혔다. [이미지 : 엘린 디제너러스 쇼 유튜브 캡쳐]]

     

    페인은 자신의 남자 친구도 한때 노숙인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노숙인은 게으르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오해가 있는데 한 달 치 월급이 끊기는 것만으로 누구나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숙인들을 위해 호텔을 잡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얘기도 털어놓았습니다. 대부분 호텔이 자신이 노숙인들을 위하 방을 잡고자 한다고 밝히자 예약을 거부했다며 앰버인(Amber Inn)에서 다행히 방 30개를 예약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노숙인들을 호텔로 옮기는 과정에서 힘을 보태는 이들도 나타났습니다. 페인은 시카고 도심 남쪽의 노숙인 70명을 호텔로 데리고 가는 방법을 고민하다 자신의 SNS에 트럭이나 미니밴이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 글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운전 봉사를 하겠다고 했고 호텔비에 보태겠다는 이들도 나타났습니다.

     

    이를 통해 노숙인 70명에게 하룻밤의 피난처를 제공하려던 페인의 계획은 122명의 노숙인이 5일 동안 호텔에서 머무는 아름다운 결말을 낳았습니다.

     

    페인이 처음 도움을 주려던 노숙인들은 프로판가스를 켜놓고 시카고의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폭발 사고가 나자 소방당국이 가스통을 모두 압수하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됐습니다.

     

    페인이 호텔 숙박을 제공한 122명의 노숙인 가운데는 임산부와 어린이, 장애인,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환자도 포함돼 있었다고 합니다.

     

    캔디스 페인은 자신이 베푼 선행에 보답도 받았습니다. 엘런 디제너러스쇼를 후원하는 월마트로부터 5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은 것이지요.

  • 탑승객을 감동시킨 네 달 된 아기 엄마의 배려

    네달 된 아기와 비행기를 탄 엄마의 작은 배려가 승객들을 미소 짓게 했습니다.

     

    데이브 코로나가 2월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면 자신과 같은 비행기에 탄 한 여성이 200개의 작은 비닐 봉지를 승객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귀마개와 사탕이 든 작은 봉지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준우라고 합니다. 태어난 지 네 달 됐어요. 오늘 나는 엄마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이모를 만나러 가요. 비행기를 타는 건 처음이라 조금 걱정되고 무섭기도 합니다. 제가 울거나 시끄러울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조용하도록 노력할게요. 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래요. 그래서 엄마가 작은 봉지를 준비했어요. 제가 너무 소란스러우면 귀마개를 사용하시기를 바래요.”

     

    아들 이름으로 쓴 메모에서 엄마가 200개의 ‘사탕 봉투’를 나눠준 이유가 짐작됩니다. 준우의 엄마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아이가 보채거나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까 걱정했겠지요. 10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 동안 다른 승객들이 준우 때문에 불편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승객들은 갑작스런 선물을 보고 처음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봉투 위에 붙은 메모지를 읽고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페이스북에 이 사연을 올린 코로나는 준우 엄마의 마음 씀씀이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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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탄소년단 만든 방시혁 대표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

    지난 26일, 방시혁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동문 자격으로 축사를 하고 있다. 방 대표는 이 축사에서 자신의 행복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미지 출처 : 서울대학교]

    방탄소년단을 키워낸 방시혁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졸업 축사가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방 대표는 26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동문 자격으로 축사를 했습니다. 방 대표는 이 학교 미학과 출신입니다.

     

    많은 언론에서 방 대표의 축사 내용을 부조리에 대한 분노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실제 그는 이날 축사에서 부조리에 분노하고 맞서 싸워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바란다고 졸업생에게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방 대표의 행복론입니다. 방 대표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이 행복이라고 정의한 소소한 일상의 한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다음은 방 대표가 후배들에게 주는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여러분 스스로가 어떨 때 행복한지 먼저 정의를 내려보고, 그러한 상황과 상태에 여러분을 놓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정의하지 않은, 남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정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시간에 소소한 일상의 한순간 한순간들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무엇이 진짜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지 고민하십시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남이 정해준 여러 가지 기준들을 좇지 않고, 일관된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십시오. 본인이 행복한 상황을 정의하고, 이를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소명이 되어 여러분의 앞길을 끌어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여러분의 행복이 상식에 기반하길 바랍니다.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고 본인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 바깥세상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유지하고, 자신과 주변에 대해 애정과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관심 속에서 여러분의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것들을 해결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상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자신의 행복을 좇는 것은 세상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학교의 졸업생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방시혁 대표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 전문입니다. 

     

    존경하는 오세정 총장님, 여러 교수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이신 졸업생 여러분들과 가족, 친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 방시혁입니다.

     

    오늘은 날씨조차 여러분들의 졸업을 축하하듯 화창한 것 같습니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교의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다는 건 무한한 영광이기에 총장님의 축사 제안을 덜컥 수락해 버렸지만 사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정할 수 없는 기성세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또 무엇보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첫걸음을 내딛는 여러분께 해드릴 유의미한 이야기가 제게 있는지 우려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졸업 축사란 것은 결국 연사가 졸업생에게, 혹은 선배가 후배에게, 자신이 인생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꼰대’스러움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오늘은 최대한 솔직한 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제 자랑도 좀 하게 될 것 같고, 제 삶의 여정 중 여러분과 맞닿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198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공부를 조금 한다고 하면 법대를 가는 게 당연히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1지망도 법대였습니다. 법학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때의 저는, 어떤 열정도 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목표와 성공의 요건에, 별 자의식 없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력고사는 다가오고, 점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재수를 각오하고 법대를 쓰느냐, 법대를 포기하고 안전하게 서울대를 가느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습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렸듯 법학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재수는 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법대 다음으로 커트라인이 높은 과를 가려니까, 뭔가 되게 없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과들을 뒤지다가 미학과를 발견했습니다. 법대를 기대하셨던 어른들의 반대는 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떨어지면 재수는 없다’라고 반 협박조로 (대응해) 무사히 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미학과가 저와 너무 잘 맞았다는 것입니다. 미학이 뭘 하는 학문인지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수업들이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원래 예술도 좋아했었고 탁상공론을 좋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미학과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중학교 때부터 해왔던 음악은 뒷전으로 밀렸고 음악을 직업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게 됐습니다.

    그랬던 제가 어쩌다 음악 프로듀서가 되었을까요? 사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많은 분들께서 서울대생이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까지는 대단한 에피소드나 굉장한 결단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시는데, 사실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런 결정적인 순간은 없었습니다. 그냥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음악을 하고 있었다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정말 허무하죠?

    저는 그렇게 허무하게, 뭔가에 홀린 듯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1997년부터 직업 프로듀서의 길에 들어서 박진영 씨와 함께 JYP라는 회사를 창업하고, 그 후 독립해서 지금은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프로듀서로 살고 있습니다. 우스운 게, 독립한 후에도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왜 회사를 차리겠다고 생각했는지 선택한 이유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서두부터 제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제 인생에 있었던 중요한 결정들, 훗날 보면 의미심장해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것. 때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사실 큰 그림을 그리는 야망가도 아니고,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도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구체적인 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에 따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저와 방탄소년단,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행보를 보면 이런 말이 믿기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에서 2년 연속 톱 소셜 아티스트상을 수상했고, 4만 석 규모의 뉴욕 시티필드 공연을 순식간에 매진시켰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래미 어워드에 시상자로 초청받으면서 또 하나의 ‘최초’ 기록을 세웠습니다. 외신에서는 감히 ‘유튜브 시대의 비틀즈’라는 과찬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재 전 세계 주요 지역 스타디움에서 월드투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까지 올라가게 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저는 영광스럽게도 빌보드가 뽑은 25인의 혁신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저희 회사 역시 엔터테인먼트 업계 혁신의 아이콘이자 유니콘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마 뉴스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접하셨을 때 이런 성공 뒤에는 분명 원대한 꿈이 있었거나, 방시혁은 엄청난 야심가여서 큰 미래를 그려놓고 이를 차근차근 실현해가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야심은 둘째치고 꿈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실 겁니다. 매번 하고 싶은 것들을 아무렇게나 하고 그렇게 선택하다 보니 어쩌다 이 자리까지 왔다? 물론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잠깐 바꿔 볼게요.

    여러분! 저는 꿈은 없지만 불만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이 표현을 찾아냈는데 이게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 같습니다. 오늘의 저와 빅히트가 있기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분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불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는 타협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 더 잘 할 방법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튀기 싫어서, 일 만드는 게 껄끄러우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게 싫어서, 혹은 원래 그렇게 했으니까, 갖가지 이유로 입을 다물고 현실에 안주하는데요. 전 태생적으로 그걸 못 하겠습니다. 제 일은 물론, 직접적으로 제 일이 아닌 경우에도 최선이 아닌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게 되고 그럼에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만이 분노로까지 변하게 됩니다.

    아마도 ‘위대한 탄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의 멘토로 저를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참가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분노를 폭발시키는 제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굉장히 많이 비호감이었죠? 그때 이후 그런 형태의 분노 표출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고, 이제는 그렇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지만 그 모습이 제가 ‘불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설명하기에 좋은 예인 거 같아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그런 저의 성정은 제 작업과 제가 만든 회사의 일에도 똑같이 발휘됐습니다. 최고가 아닌 차선을 택하는 ‘무사안일’에 분노했고, 더 완벽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데 여러 상황을 핑계로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는 관습과 관행에 화를 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를 가장 불행하게 한 것은 음악 산업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산업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불공정과 불합리가 팽배한 곳이었습니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이 세계를 알아가면서 점점 저의 분노는 더 커졌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이용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곡가로 시작해 음악 산업에 종사한 지 21년째인데, 음악이 좋아서 이 업에 뛰어든 동료와 후배들은 여전히 현실에 좌절하고 힘들어합니다. 음악 산업이 안고 있는 악습들, 불공정 거래 관행, 그리고 사회적 저평가. 그로 인해, 업계 종사자들은 어디 가서 음악 산업에 종사한다고 이야기하길 부끄러워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여전히 음악 회사를 일은 많이 시키면서 보상은 적게 주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객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케이팝 콘텐츠를 사랑하고, 이를 세계화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팬들은 지금도 ‘빠순이’로 비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아이돌 음악을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업계와 사회가 나서서 찬양하고 최고의 예우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왜 이런 대우를 하는지, 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고 화가 납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며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우리 아티스트들은 근거 없는 익명의 비난에 힘들어하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우리 피, 땀, 눈물의 결실인 콘텐츠 역시 부당하게 유통되거나 저평가되며 부도덕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수단이 되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분노하게 되고 이런 문제들과 싸워 왔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저는 혁명가는 아닙니다. 다만, 음악 산업의 불합리, 부조리에 대해서 저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외면하고 안주하고 타협하는 것은, 제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닙니다. 원대한 꿈이 있거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제 눈앞에 있고 저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그 분노가 제 소명이 됐다고 느낍니다. 음악 산업 종사자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온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화를 내는 것. 아티스트와 팬들에 대해 부당한 비난과 폄하에 분노하는 것. 제가 생각하는 상식이 구현되도록 싸우는 것. 그것은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 한 음악에 대한 저의 예의이기도 하고, 팬들과 아티스트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이기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제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 같습니다.

     

    저는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일 학업과 업무에 시달리던 고단한 몸을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뽀송뽀송한 이불 속에 들어갈 때 행복하지 않나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복한 것들도 있지만,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행복한 상황도 있을 겁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여러분 스스로가 어떨 때 행복한지 먼저 정의를 내려보고, 그러한 상황과 상태에 여러분을 놓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저의 경우는, 두 번째 행복의 정의에 입각해서, 저의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특히 우리의 고객인 젊은 친구들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더 나아가 산업적으로는,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킴으로써 음악 산업을 발전시키고 종사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하는 것.” 그래서 그 변화를 저와 우리 빅히트가 이뤄내는 게 저의 행복입니다.

     

    자, 이제 돌아갑시다.

    제가 앞에서, 저는 구체적이거나, 커다란 꿈이 없다고 했죠? 맞습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어떤 기업이 될지, 방탄소년단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심지어는 제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에 대해서도 그림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저의 모습을 외부에서 보면 커다란 꿈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듯 보일 겁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저와 제 주변 사람들, 제가 봉사해야 하는 고객들의 행복까지 빚어낸 매우 이상적인 상황으로 보일 겁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듯, 이런 시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저는 별다른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니 많은 분들께 위로와 행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제 꿈이 아니라 제 불만이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꿈 없이 살 겁니다. 알지 못하는 미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쓸 바에, 지금 주어진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음악 산업이 처한 수많은 문제들을 개선하는 데 매진할 것이며, 방탄소년단은 아시아 밴드, 혹은 케이팝 밴드의 태생적 한계라고 여겨지는 벽을 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겁니다. 저 역시 이런 일을 수행하는 데 부끄럽지 않게 끊임없이 반성하고 제 자신을 갈고닦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큰 꿈이 없다고 구체적인 미래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정의하지 않은, 남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정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시간에 소소한 일상의 한순간 한순간들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무엇이 진짜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지 고민하십시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남이 정해준 여러 가지 기준들을 좇지 않고, 일관된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십시오. 본인이 행복한 상황을 정의하고, 이를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소명이 되어 여러분의 앞길을 끌어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여러분의 행복이 상식에 기반하길 바랍니다.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고 본인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 바깥세상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유지하고, 자신과 주변에 대해 애정과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관심 속에서 여러분의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것들을 해결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상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자신의 행복을 좇는 것은 세상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학교의 졸업생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두서없는 저의 축사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대학이라는 일생에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정을 잘 마무리하신 여러분, 다시 한 번 격하게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될 인생의 다음 단계들을 행복 속에 잘 살아내시고 10년 후, 20년 후에, “내가 제법 잘 살아왔구나”라고 자평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제 묘비에 “불만 많던 방시혁, 행복하게 살다 좋은 사람으로 축복받으며 눈 감음”이라고 적히면 좋겠습니다. 상식이 통하고 음악 콘텐츠와 그 소비자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그날까지, 저 또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갈 겁니다. 격하게 분노하고, 소소하게 행복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 부모와 교사가 함께 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

    해와달 어린이집의 아이들이 교사들과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이미지 : 해와달 어린이집 유튜브 캡처]

    이윤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대표적인 일이 교육입니다. 

     

    지난해 어린이집에서 문제가 생긴 이유도 일부 원장들이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사업으로 생각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공동육아에서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공동육아는 부모들이 출자금과 조합비 등을 마련해 어린이집을 직접 운영하는 시스템입니다. 

     

    서울 상도동에 자리한 해와달공동육아사회적협동조합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2002년 개원한 이곳은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영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IMAGE|316|center|서울 상도동에 자리한 해와달공동육아사회적협동조합(이하 '해와달')은 부모들이 출자금과 조합비 등을 마련해 어린이집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이미지 : 해와달 어린이집 유튜브 캡처] ]]

     

    ‘해와달’에 아이를 맡긴 부모들은 어린이집 재정과 시설 운영 전체를 책임지기 때문에 교사들은 아이들의 생활과 교육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마련한 재원은 전적으로 아이들을 위해 쓰이고 어린이집 재정 현황은 해마다 조합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됩니다. 

     

    공동육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해와달’ 어린이집은 부모와 교사는 물론 자연까지 교육 공간에 끌어들여 아이를 함께 키웁니다. 어린이집 커뮤니티 카페에는 ‘자연과 함께 놀아요, 어우러져 함께 살아요,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해요, 부모도 더불어 성장해요’라고 교육 방침을 적어 놓았습니다. 

     

    [[IMAGE|314|center|'해와달'은 자연까지 교육 공간으로 활용해 아이들을 교육한다. 아이들은 나들이와 바깥놀이를 통해 자연과 함께 정신적, 육체적으로 밝게 성장한다.  [이미지 : 해와달 어린이집 유튜브 캡처] ]]

     

    ‘해와달’은 오전 7시 30분에 문을 엽니다. 부모들이 일찍 출근하는 가정을 위해서입니다. 교사들은 일찍 온 아이들을 품에 안고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집에서처럼 뒹굴거릴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간단히 아침을 함께 먹기도 하고요. 

     

    9시 30분까지 아이들이 모두 등원하면 체조와 동요 부르기로 아침을 시작합니다. 이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들이와 바깥놀이가 진행됩니다. 

     

    12시에 어린이집으로 돌아와 유기농 먹거리로 만든 점심을 먹고 1시부터 3시 30분까지는 낮잠을 잡니다. 3시 30분에 일어나 간식을 먹고 오후 활동을 하고 나면 어느덧 하루 일과가 끝이 납니다. 

     

    부모들의 사정에 따라 아이들은 5시 30분부터 집에 갈 수 있습니다. 7시 30분까지 어린이집을 운영하기 때문에 늦게까지 남아 있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IMAGE|313|center|'해와달'에 등원한 아이들이 교사들과 함께 체조를 하고 있다. [이미지 : 해와달 어린이집 유튜브 캡처] ]]

     

    '해와달'이 여느 어린이집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교사와 아이들 사이의 특별한 소통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아이들이 선생님이라는 말 대신 별명으로 교사를 부릅니다.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입니다.  

     

    부모들도 아이 교육에 적극 참여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회의를 통해 부모들과 교사는 아이들의 교육을 함께 고민합니다. 부모들은 1년에 3번 일일교사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해와달’과 같은 공동육아는 1994년 ‘신촌우리어린이집’으로 우리 사회에 첫 선을 보였습니다.  
    고민은 그전부터 시작됐습니다. 1970년대부터 빈민 탁아 운동을 한 이들이 만든 ‘공동육아연구회’와 ‘해송 어린이 걱정 모임’이 오랜 연구와 논의를 거쳐 ‘공동육아’를 시작한 것이지요.  

     

    공동육아는 현재 사단법인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으로 발전해 우리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는 일을 펼치고 있습니다.

  • 말기암과 싸우는 소녀, 경찰 되다

    이미지 : KHOU 11 유튜브 캡쳐

    지난 7일 미국 텍사스주 프리포트 경찰서에서 아주 특별한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이날 아비가일 아리아스라는 6살 소녀가 명예경찰로 임명됐다고 합니다. 아바가일은 평소 경찰이 되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이날 꿈을 이룬 것입니다. 

     

    이날 열린 행사가 특별한 이유는 아비가일이 소아암 말기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비가일이 ‘몸 안에 살고 있는 나쁜 놈”이라고 표현하는 암은 복부에서 시작해 폐까지 전이되어 의료진이나 가족은 기도 외에는 더 할 일이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IMAGE|308|center|아비가일 아리아스(6)가 경찰 복장을 입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소아암 환자인 그녀는 텍사스주 프리포트 경찰서의 명예경찰로 임명되었다. [이미지 : KHOU 11 유튜브 캡쳐] ]]

     

    아비가일이 싸우고 있는 윌름즈종양은 소아암의 일종으로 생존율이 80~90% 가까이 되지만 재발하면 생존율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아비가일은 암이 재발했습니다. 

     

    프리포트 경찰서장은 지난해 12월 경찰서에서 열린 ‘산타와의 팬케이크’ 행사에서 아비가일을 처음 만났습니다. 레이 경찰서장은 그날 경찰이 되는 게 꿈이라는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듣고 명예경찰 임명식을 해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날 열린 명예경찰 임명식에서 아비가일은 경찰 유니폼, 의무장비, 벨트 등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프리포트 경찰서 소속 경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경찰 선서도 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나쁜 놈들’과 꼭 싸워 이겨서 경찰이 되는 꿈을 이루겠다"라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IMAGE|309|center|명예경찰 임명식에서 아비가일이 경찰 선서를 하고 있다. [이미지 : KHOU 11 유튜브 캡쳐] ]]

  • 아름다운 삶을 위한 기도문(작자 미상)

    날마다 하루 분량의 즐거움을 주시고 

    일생의 꿈은 그 과정에 기쁨을 주셔서 

    떠나야 할 곳에서는 빨리 떠나게 하시고 

    머물러야 할 자리에는 영원히 아름답게 머물게 하소서 

     

    누구 앞에서나 똑같이 겸손하게 하시고 

    어디서나 머리를 낮춤으로써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눈물이 많게 하시고 

    생각을 빛나게 하여 웃음이 많게 하소서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는 잘못을 참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닫게 하고 

    기다림이 기쁨이 되는 인내이게 하소서 

     

    용기를 주소서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용기를 주시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음악을 듣게 하시고 햇빛을 좋아하게 하시고 

    꽃과 나뭇잎의 아름다움에 늘 감탄하게 하소서 

     

    누구의 말에나 귀 기울일 줄 알고 

    지켜야 할 비밀은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의 참 가치와 모습을 올바로 알게 하소서 

     

    사람과의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되 

    그 사람의 좋은 점만 기억하게 하소서 

     

    나이가 들어 쇠약하여질 때도 

    삶을 허무나 후회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지혜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을 좋아하게 하소서 

     

    삶을 잔잔하게 하소서 

    그러나 폭풍이 몰려와도 쓰러지지 않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성숙하게 하소서 

     

    건강을 주소서 그러나 내 삶과 생각이 

    건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질서를 지키고 원칙과 기준이 확실하며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도록 하시고 

    성공한 사람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언제 어디서나 사랑만큼 쉬운 길이 없고 

    사랑만큼 아름다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늘 그 길을 택하게 하소서

  • 나를 향한 주문

    태산같이 고요하기를
    바람처럼 자유롭기를
    꽃잎처럼 부드럽기를
    햇살같이 따스하기를
    불꽃같은 사랑이기를

  • 청소가 직업인 그림 작가 김예지

    <저 청소일 하는데요?>의 김예지 작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청소에 업을 두었다는 독특한 이력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조금 다르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행복합니다.”

    <저 청소일 하는데요?>(21세기북스)라는 책 표지에 쓰여 있는 글입니다. 이 책이 화제가 된 것은 김예지라는 작가의 특이한 이력 때문입니다.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안정적 직장을 다니던 작가는 26살 때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청소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올해 30대에 들어선 작가가 지난 4년여 동안 청소 일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와 자신이 느낀 감정을 담은 책입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젊은 사람이 청소를? 작가는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들며 “시선 때문에 포기하지 말라"라고 조언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만화나 삽화 등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직장은 그에게 그런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불안 장애가 있던 작가는 싫어하는 사람을 매일 만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때 오랫동안 요구르트 배달을 해 온 어머니가 청소 일을 함께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합니다. 그래서 26살의 젊은 작가는 어머니와 함께 사무실, 병원, 학원 등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막상 해보니 가성비가 좋았다고 합니다. 수입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되고, 작업을 위한 시간도 확보가 됐고 무엇보다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고 틈날 때 커피 믹스를 타서 마시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김 작가가 청소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힘이 됐다고 합니다. 그는 책에서 어머니로부터 ‘남과 비교하지 않기’ ‘자식을 깎아내리지 않기’ ‘항상 나를 생각해주기’ 등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네가 필요하고 맞다고 생각하면 남의 시선보다는 네게 맞는 방향으로 가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낸 후 고등학생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어떻게 견디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고 합니다.

    “이기지 못했어요. 이겼다기보단 견뎠어요. 마음으로 이기고 싶었지만 사실 이기질 못하더라고요. 신경은 쓰였지만 견뎠던 것 같아요.”

    김 작가는 앞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게 꿈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생계가 해결될 때까지는 청소 일을 계속하겠다고 합니다.

  • 진묵조사 (4) - 모기도 감동한 지극한 효심

    진묵조사가 일출암에 머물 때의 일화입니다.  

     

    진묵조사는 어머니를 일출암 아랫마을 왜막촌으로 모셔왔습니다. 출가한 수행승의 처지로 한 집에 모실 수는 없으나 절 가까이에서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에는 어머니가 밤잠을 제대로 못 주무실 정도로 모기가 많았습니다. 그때 진묵조사는 모기를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 그 뒤로는 마을에서 모기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조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정성스럽게 장례를 모시고 제문을 지어 올렸습니다. 

     

    "열 달 동안 태중에 품으신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슬하에 삼 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도 잊을 수 없습니다. 

     

    만 년에 또 만 년을 더하여도 자식 마음에는 부족한데 

    백 년 생애도 못 채우셨으니 어머니 수명은 어찌 이다지도 짧습니까? 

     

    표주박 하나로 걸식하는 이 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규중에 혼자 남은 누이는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제단에 올라 불공을 마친 스님들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앞산 뒷산 첩첩한 이 산중에 어머니 혼은 어디로 떠나셨습니까? 

     

    아! 애달프기 한이 없습니다.” 

     

    진묵조사는 만경들판에 어머니 묘를 모셨는데 마침 근처에 사는 논 주인이 오가며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해 풍년이 들어 농사가 잘 되자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모두 함께 나서서 어머니 묘를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진묵조사의 어머니 묘에 향불을 올리면 소원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 하여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하며, 후손이 없어도 향불이 꺼지지 않는 자리라 하여 풍수가들이 들르는 코스라고 합니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지극했던 진묵조사의 효심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