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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우리명산 답산기

Contents List 3

  • 우리명산 답산기-조화롭지 않은 서울의 왼쪽 산과 오른쪽 산

    북한산

    ● 청룡(靑龍)·백호(白虎)의 결함

    서울의 백호(白虎; 오른쪽 산줄기)인 인왕산은 높이가 북악산과 비슷하다 (338미터), 북악산이 훤칠하고 늘씬하게 생긴 반면, 인왕산의 생김새는 중후하고 묵직하다. 인왕산도 바위산인데 집채보다 큰 바위들이 의연한 자태로 앉아 있다.

     

    서울의 청룡(靑龍;왼쪽 산줄기)인 낙산은 가지런히 길게 뻗은 산이다. 모양새가 퍽 아담하고 온화하다. 높이는 120여 미터쯤 된다.

     

    백호와 청룡을 따로 놓고 볼 때는 둘 다 큰 흠이 없다. 생김새도 별로흉하지 않고 크기도 괜찮다. 그런데 두 산의 조화에 문제가 있다. 백호 (인왕산)가 청룡 (낙산)에 비해서 너무 높고 큰 것이다.

     

    풍수학에선 청룡은 장손(長孫; 맏자손), 백호는 지손(支孫)과 여손(女孫)으로 본다. 청룡이 강하면 장손이 잘 되고, 백호가 강하면 지손이나여자들이 잘 된다. 그러니 청룡과 백호 둘 모두 튼튼하고 잘생겨야 모든자손이 골고루 복을 누린다.

     

    서울은 청룡에 비해서 백호가 너무 크고 높다. 높이가 무려 세 배에달한다. 백호가 청룡을 위압하는 형상이다.

     

    무릇 도읍터는 청룡 · 백호가 모두 좋고 힘이 비슷해야 모든 국민이 골고루 잘산다. 어느 한편이 너무 강하고 다른 편이 약하면, 가진 자만 너무 많이 갖게 된다. 권력도, 부(富)도 고르게 나눠지기 어렵다. 한양에도읍한 이후, 한 번도 모든 백성이 평등하게 살아보질 못했다. 하긴 그이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조는 장자(長子)가 세습하는 사회였다. 그런 사회에서 장손에 해당되는 청룡이 빈약하니 이것도 큰 문제였다. 자연히 장손이 제 구실을못하게 되고, 지손이 장손을 몰아내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조선조의 왕 중에서 장손으로 왕 노릇을 제대로 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선조와 정조 둘뿐이다. 그나마 선조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크게 위태로웠다. 또 정조는 단명했다.

     

    장손으로 왕위에 올랐던 이들은 거의가 단명했거나 비극적인 최후를맞았다. 세종의 아들 문종은 병약하여 왕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일찍 죽었다. 그의 아들 단종은 삼촌 수양대군한테 죽음을 당했다. 세조의 아들예종도 단명했고, 적자 (嫡子)가 아닌 성종이 예종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의 맏아들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의 맏아들 인종도 단명했다. 효종의 맏아들이었던 현종, 숙종의 맏아들 경종 이들도 단명했다.

     

    장자세습사회에서 장손이 자꾸 꺾이니 이씨왕가는 평안한 날이 별로 없었다. 혈육 간에 다툼이 잦았다. 서로 죽이는 비극까지 일어났다.

     

    왕가(王家)에 골육상쟁이 끊이질 않으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애꿎은 백성들이 더 큰 고초를 겪었다. 벼슬아치들은 그들대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다. 백성들을 평안하게 살리려는 노력은 제껴두고 권력다툼에 더 골몰했다. 이긴 자는 온갖 혜택을 누리고, 진 자는 비참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겨레는 둘로 갈라져 원수지간처럼 싸운다.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갖고, 없는 자는 너무 가난하다. 그러니 서로 더 많이 가지려고,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서려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삼한산림비기〉는 왕가에서 일어날 골육상쟁까지 예언했었다. 〈삼한산림비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북악산 아래에다 궁궐을 지으면) 지손(支孫)들이 왕위를 이어가게 된다. 골육상쟁의 변(變)이 자주 일어나리라. 6, 7대 이후에는 적통(嫡統)이 끊겨 서손(庶孫)이나 방계 (傍係) 자손이 왕위를 잇는다.

     

    서울을 둘러싼 산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산은 안산인 남산이다. 남산은 모양이 깨끗하고 단정하다. 옛 풍수가들은 남산의 형국을 누에형으로 보았다.

     

    누에는 뽕을 먹고 산다. 그래서 조선조에는 남산의 기운을 더욱 충만하게 만들려고 한강 남쪽에다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곳이 잠실이다. 잠실이란 지명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남산에도 흠이 있다. 너무 높은 것이다.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경복궁이나 서울 시내 중심가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주산이 주인이라면 안산은 손님에 해당된다. 또 주산은 우리 나라, 안산 · 조산은 외국이다. 주산이 임금이라면 안산은 신하가 된다.

     

    안산은 너무 높아도 안 좋고, 낮아도 못 쓴다. 너무 높으면 터의 지기(地氣)를 억누른다. 낮으면 앞이 허해져서 좋은 정기가 흩어진다. 올려다보지도 내려다보지도 않는 적당한 높이로 솟아올라야 좋다. 그런데 남산은 고개를 들어올려다 봐야 할 정도로 높다.

     

    안산이 너무 높아 위압감을 주면, 신하가 임금을 억누르는 형상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치게 된다. 또 외국의 압박도 받게 된다. 조선조에는 세 왕이 쫓겨났다. 외국의 침략을 다섯 차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 일제침략)나 받았다. 결국 왜적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하극상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이 쫓겨난 것은 백성들의 뜻이었으니 하극상이 아니고, 박정권은 하극상으로 태어

    났다가 또 하극상으로 무너졌다. 그 다음 정권도 박정권처럼 등장했다.

     

    조선조에는 왕이 바른 정치를 하려 해도 신하들 때문에 뜻을 제대로 못 폈다. 광해군과 정조가 그랬다. 또 조선조는 개국 초부터 사대주의 정책으로 중국을 받들었다. 한 번도 외세와 당당하게 맞서보질 못했다. 지금도 외세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우리 겨레가 둘로 갈라진 것도 외세 때문이었다.

     

    남산은 또 전체 모습이야 괜찮지만, 골짜기의 형상이 좀 흉하다. 예언서 감결〉은 이르기를, 남산이 해산하는 여자의 음부(陰部) 같이 생겨서, 한양 말년에는 음란한 풍속이 세상을 어지럽히리라고 했다.

     

    이 예언도 맞는 것 같다. 연극, 영화, 드라마, 광고, 코메디 모두가성(性)을 내세우지 않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고 여긴다. 타락한 자본주의 문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오직성 뿐이라는 환상에 자꾸 빠져들게 만든다.

     

    성을 사고 파는 환락가의 모습은 꼭 소돔과 고모라' 같다. 소돔과 고모라는 타락으로 인해 멸망했다. 폼페이우스도 그랬다. 서울의 미래는어떨까.

     

    남산에는 터널이 뚫렸다. 그 바람에 음란한 풍조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선지자의 예언처럼 잘못된 성문화가 온 국민의 정신을 흐리게 만든다.(계속)

  • 우리명산 답산기-북한산3 산 기운과 우리 역사

    ● 한양 천도와 북한산의 기운

     

    이성계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한양땅을 둘러보았다. 북한산의 한 지봉(支峯)인 북악산 아래 자리잡은 한양땅은 도읍터가 될 만한 곳이었다. 북한산, 북악산의 기상은 매우 웅장했다. 만백성을 다스리는 왕자(王者)의 위용을 연상케 했다. 이성계는 곧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한양땅이 조선조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양땅의 지기가 우리 겨레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우리 겨레가 겪은 불행과 행복, 고통과 평안, 슬픔과 기쁨 대부분이 한양땅의 지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럼 한양땅에 서린 지기는 어떤 것일까.

     

    한양땅의 지기를 논할 때는 가장 먼저 북한산에 관해서 얘기해야 한다. 북한산은 한양땅의 주산(主山)인 북악산의 모산(母山)이기 때문이다.

     

    북한산의 주맥(主脈)은 정상인 인수봉과 백운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뻗었다. 이 주맥을 따라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치솟아올랐는데, 대부분 바위봉우리다. 그 바위빛이 백설처럼 새하얘서, 푸르른 하늘 초록빛 나무들과 선명히 대조를 이룬다. 이 모습이 참 깨끗하고아름답다.

     

    북한산 연봉들은 거의가 다 끝이 뾰족하고 몸통이 날렵하다. 붓이나불꽃처럼 생긴 봉우리가 많다. 인수봉 하나만이 중후하게 생겼는데, 인수봉의 형상은 선비나 도인이 쓰는 굴건 (모자)이다.

    남산 쪽에서 북한산 연봉들을 바라보면 완연한 불꽃의 형상을 하고 있다. 흡사 커다란 불길이 너울너울 타오르는 모습이다. 북한산처럼 이렇게 불꽃같이 생긴 산을 풍수학에선 화성(火星)이라 부른다.

     

    화성의 산이 맑고 수려하게 생기면 학문, 문필, 예능의 기운이 크게감돈다. 이 기운으로 훌륭한 관리, 학자, 문인, 예술가들을 배출한다.총명하고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도 많이 나오게 된다.

     

    한데 화성의 산이 흉하게 생기면 전쟁, 투쟁, 화재, 전염병 등의 악기(惡氣)가 서린다. 이 악기가 흉악한 사람들을 배출한다. 또 갖가지 흉한화를 불러온다.

     

    그럼 어떻게 생긴 산이 수려하고, 어떤 모양이 흉한 것일까. 풍수학에서는 산봉우리가 반듯하고 단정해야 수려하다고 본다. 모양이 비뚤어지면 흉하게 여긴다. 깨진 데가 있거나, 우악스럽게 생겼어도 흉하게 본다.

     

    북한산 연봉 중에서 제일 수려하게 생긴 봉우리는 인수봉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수봉은 매우 중후하고 온화하며 후덕한 자태를 지녔다.반듯하게 우뚝 서 있는 형상이 성현군자나 대도인의 풍모를 연상하게 한다.

     

    인수봉은 그 색깔도 새하얗다. 마치 하얀 옥(玉)으로 다듬어 놓은 조각품 같다. 이렇게 빛깔이 곱고 깨끗하며 생김새가 단아하니, 인수봉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 넘친다.

     

    인수봉의 형상은 타원형에 가깝다. 타원형의 봉우리를 풍수학에선 목성(木星)이라 부른다. 곧게 자란 나무처럼 훤칠하게 생겼기 때문이다.목성의 산봉우리가 수려하면, 그 기상으로 현군(賢君)과 성현(聖賢),훌륭한 학자와 도인 등이 나온다. 선인 (仙人)도 배출한다. 도읍지에 이런 봉우리가 있으면, 현인군자와 빼어난 수도인들이 많이 나와 그들이 나라의 풍속을 아름답게 가꾼다.

     

    한데 인수봉은 원래의 한양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그 아름다운 기운을 크게 떨치지 못했다. 참 아쉬운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얘기하겠다.

     

    북한산 연봉(連峯) 중에서 인수봉 다음으로 잘생긴 봉우리는 백운대다. 백운대는 모양이 반듯하며, 끝이 뾰족한 삼각형의 봉우리다.

     

    백운대처럼 삼각형으로 생긴 봉우리를 풍수학에선 자기성 (紫氣星) 이라 부르며 매우 귀하게 여긴다. 자기성에도 군자의 기상, 대학자, 문필가의 기상이 감돈다. 이 기상으로 현군과 고인달사(高人達士), 깨끗한 선비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런데 백운대 역시 인수봉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한양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백운대에 서린 빼어난 기운이 한양땅으로 크게 뻗치질 못했다. 그 점이 아쉽다.

     

    북한산의 다른 봉우리들은 백운대나 인수봉에 비해 수기 (秀氣 ; 수려한기운)가 너무 부족하다. 모양새가 하나같이 비뚤어졌는데 그게 가장 큰흠이다. 뾰족뾰족한 봉우리들이 쓰러질 듯 기우뚱한 자세로 서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또 이 불안감만큼 흉한 기운을 내뿜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끝이 뾰족한 화성의 산이 흉하게 생기면 전쟁·투쟁 · 화재로 인한 재난을 불러온다. 그로 인한 화도 생겨나며,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 거칠고 난폭한 사람들을 배출한다.

     

    도습지의 진산(鎭山)이 이렇게 생겼으니 포악한 자들이 득세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게 된다. 더구나 이 흉한 봉우리들은 원래의 한양땅 바로 뒤에 있다. 그래서 백운대나 인수봉 기운보다 이 봉우리들의 기운이 한양 땅으로 훨씬 강하게 뻗쳐온다.

     

    이 흉한 기운 때문에 우리 겨레는 오랫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부덕한 압제자가 자주 백성을 억압했고, 권세가들이 횡포를 부렸다. 때론 외적이 침노하여 우리 강토와 겨레를 짓밟았다.

     

    사악한 무리가 강성한 기세를 떨치니 참된 사람, 정인군자(正人君子)는 숨어지낼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는 밝은 임금, 지혜로운 신하가 드물었다. 그러니 백성들이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계속)
     

  • 우리명산 답산기-북한산2 도읍터의 기상

    북한산

    ● 도선국사의 예언

    북한산 기슭에 도읍이 세워지기 훨씬 이전부터 선지자들은 북한산에 감도는 도읍터의 기상을 알아보았다. 그이들 중 어떤 이들은 개성의 지기(地氣)가 다하여 고려조가 망한 뒤에 도읍이 북한산 아래로 옮겨가리라는 예언까지 했다. 북한산 밑에 도읍을 세우게 될 왕조가 이씨왕조라는 것까지 예언한 선지자들도 있었다.

     

    고려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륭에게, 당신의 아들이 삼국을 통일하고 새 왕조를 세울 것'이라고 얘기해준 도선국사도 그것을 예견했었다. 왕륭은 도선국사와 헤어지기 전에 왕씨왕조가 얼마 동안 유지되겠느냐고 물었다. 도선국사는 처음에 “천 년은 가리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아득히 먼 곳에 가물가물 보이는 북한산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 저 백악(白岳; 북한산) 때문에 5백 년 밖에 못 가겠소.”

     

    그후 도선국사는 북한산을 찾아갔다. 북한산을 둘러보고 지금의 왕십리 근방을 지날 때였다. 도선국사의 눈앞에 문득 5백 년 후에 일어날 일이 영화의 화면처럼 선명하게 스쳐갔다. 조선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 모습이 보였다. 무학대사가 도읍터를 찾아 왕십리 일대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도선국사는 석공을 불러 돌장승과 석비를 세웠다. 그리고 석비에다 '왕십리(往十里)'라는 글자를 새기게 시켰다. 왕십리. 십 리 (十里)를 더 가라는 뜻이다. 훗날, 5백 년 뒤에 도선국사가 보았던 대로 무학대사가 왕십리를 찾아왔다. 이씨왕조의 새 도읍터를 잡기 위해서였다. 무학대사는 왕십리 일대를 헤매다가, 이곳 노인들한테서 옛날에 도선국사가 '왕십리’라는 글자를 석비에 새겨두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무학대사는 도선국사의 선견지명에 새삼 탄복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서북쪽으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오른 인왕산과 북악산이 무학대사의 눈길을 강하게 끌었다. 이 두 산에 매우 비범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기상이 엄청나게 강했다. 무학대사의 발길이 끌려가듯 그곳으로 향했다. 과연 인왕산과 북악산 아래에 왕자(王者)가 머물 도읍터가 있었다.

     

    인왕산과 북악산은 북한산 남쪽 줄기에 솟아오른 산들이다. 둘 다 북한산의 지봉(支峯) 이다.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의 높이가 해발 837미터에 이른다. 해발 천미터가 넘는 산이 수두룩한 우리 나라에선 그리 높은 산이라 할 수 없다.

     

    한데 북한산 근처엔 북한산보다 높은 산이 없다. 북한산 홀로 드높이 솟아 있다. 북한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위로 올려다봐야 할 산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가까이에 낮은 산들만 있고, 북한산보다 높은 산들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용문산 같은 산은 북한산보다 2백여 미터쯤 높지만 오히려 낮게 보인다.

     

    가까운 곳에 높은 산이 없으니 눈에 잡히는 시야가 매우 넓다. 동쪽으로는 강원도의 산들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서해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남쪽에는 충청도의 산들이, 북쪽에는 북한의 산들이 가물가물 보인다. 시야가 사방 수백 리에 이른다. 그만큼 기상도 크고 강하다. 과연 한나라를 이끌어갈 힘이 서려 있다.

     

    수도는 한 나라의 머리이며 심장부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며, 권력이 집중되는 곳이다. 또 나라의 중요한 정책들이 모두 수도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도읍터에 서린 지기(地氣)는 모든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미친다. 국민의 생활, 나라의 역사와 운명이 도읍터의 지기에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수도의 지기가 좋으면 그만큼 국민들이 복되게 살고, 나쁘면 나쁜 만큼 불행을 겪는다.

     

    조선태조 이성계도 도읍터가 나라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잘 알았다. 그는 새 왕조를 세우자마자 서둘러 수도를 옮기려고 애썼다. 개성은 이미 지기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여기서는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성계는 신하들에게 어서 좋은 도읍터를 물색하라고 재촉했다. 신하들은 북한산 아래 옛 한양땅과 신촌일대, 그리고 계룡산 신도안을 후보지로 추천했다. 처음에는 계룡산이 이성계의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함께 친히 계룡산을 둘러보았다. 계룡산은 왕자(王者)가 머물 만한명산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이성계는 수도를 계룡산으로 옮기리라 결심하고 개성으로 돌아왔다.돌아오자마자 신하들한테 자신이 결심한 바를 통고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새 도읍 건설공사를 시작했다. 한데 많은 신하들이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는 데에 반대했다. 그들은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계룡산이 도읍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이성계는 결국 신하들한테 설득당하여 계룡산 천도계획을 포기했다. 건설공사를 중지시키고 새 후보지를 물색했다.

     

    많은 신하들이 북악산 아래 한양땅을 천거했다. 일설에는 무학대사가옛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어 한양 천도를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한양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이씨왕조의 도읍터가 되리라예언했던 곳이다. 이 예언은 세간에 은밀히 떠돌았다. 고려왕조도 이를알고 두려워했다.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씨가 한양땅에 도읍을 정하려면 왕씨왕조가 망해야 했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언에 이르기를, 고려조 다음에는 이씨가 북한산 아래에다 새 도읍을 세운다 했으니, 고려조가 오래 가려면 이씨가 받을 한양땅의 지기를 없애야 했다. 고려왕조는 한 가지 묘책을 짜냈다. 그 묘책이란 다름 아니라, 한양땅에 오얏나무를 잔뜩 심었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베어내는 것이었다. '이'자는 오얏나무 이(李) 자이다. 그래서 오얏나무를 많이 심으면, 그 오얏나무들이 이씨왕조한테 돌아갈 한양땅의 지기를 대신 입게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고려왕조는 이 묘책을 실행에 옮겼다. 오얏나무 묘목들을 많이 심었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모두 베어냈다. 몇 년에 한번씩 애꿎은 오얏나무들만 숱하게 죽어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