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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빌 게이츠가 지혜를 얻는 비밀 ‘씽크 위크’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 [이미지 출처 : 플리커 Steve Jurvetson (www.flickr.com/photos/jurvetson/4368494308), CC BY 2.0 라이센스]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로 20년 이상 세계 1위 부자에 올랐습니다. 

     

    30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출연해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을 만들어 세계 최고의 공익사업가 반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생각하는 주간(Think week)을 갖는 이로도 이름이 나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1년에 한 두 번씩 북서 태평양에 인접한 삼나무 숲 속의 작은 2층 집에 머물며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시간을 보냅니다. 

     

    이 때만큼은 가족과도 떨어져 지냅니다. 빌 게이츠 판 무문관이라고 할까요.

     

    씽크 위크를 통해 빌 게이츠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회사 경영과 관련한 생각을 정리한다고 합니다. 회사나 재단을 통해 세계로부터 쏟아지는 수많은 제안도 검토합니다.

     

    [[IMAGE|260|center|빌 게이츠의 아이디어 비결 중 하나는 바로 1년에 1~2회 갖는 '생각주간(Think week)'이다. 이 기간에 그는, 문명과 고립된 숲 속의 작은 집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나 회사 경영 등에 대해 생각한다. [이미지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지 출처 : 게이츠노트] ]]

     

    빌 게이츠는 1995년의 씽크 위크에서 IT 기업 역사상 가장 통찰력 있는 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짧은 글 인터넷 물결(Internet Tidal Wave)을 씁니다.

     

    그는 이 글을 토대로 마이크로소프트 임직원들에게 다가오는 인터넷 서비스 물결이 기술과 산업 전반에 지각 변동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브라우저를 개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태블릿PC도 씽크 위크에서 구상했다고 합니다.

     

    [[IMAGE|261|center|마이크로소프트사의 태블릿PC는 빌 게이츠의 '생각주간'에서 나온 아이디어 중 하나이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

     

    빌 게이츠가 생각주간을 보내는 공간은 특별한 게 없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한 빌 게이츠의 ‘무문관’은 특별한 게 없습니다. 자신에게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책들이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고, 다른 벽에는 빅토르 위고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다이이트 음료가 들어 있는 작은 냉장고가 거의 유일한 전자제품이구요. 하루 두 끼를 먹으며 빌 게이츠가 하는 일은 생각하고 읽고 쉬는 것입니다. 

     

    빌 게이츠는 씽크 위크의 효과를 깨달은 뒤 마이크로소프트의 간부들도 1년에 2주씩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 1640억 로또 당첨 부부, 당첨금 50명에게 기부하다

    유럽의 로또인 유로밀리언에 당첨된 코놀리 부부. 코놀리 부부는 당첨된 금액을 가족, 친구, 자선단체 등에 나눠주기로 결심했다. 이미지 출처 : 야후뉴스 캡쳐

    새해 첫날 유로밀리언 로또에 당첨돼 1500만 파운드를 받게 된 부부가 당첨금을 지인과 자선단체들에 나눠주겠다고 밝혀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북아일랜드에 사는 프랜시스 코놀리(52)와 패트릭 코놀리(54) 부부는 4일 수도 벨파스트 외곽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첨금 1640억 원을 가족과 친구, 자선단체들에 나눠주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프랜시스는 “당첨금으로 우리 부부의 미래뿐 아니라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싶었다"라며 “새해 첫날 당첨된 사실을 안 뒤 사흘 동안 당첨금을 나눠주고 싶은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한 일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부는 당첨을 확인한 순간 대략 50명의 이름이 떠올랐다면서 그들이 우리가 돈을 전했을 때 지을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남편인 패트릭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겐 멋진 아내, 멋진 가족, 멋진 친구들이 있습니다. 돈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행복합니다. 삶으로부터 이미 충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IMAGE|257|center|유로밀리언에 당첨된 코놀리 부부가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코놀리 부부는 당첨된 금액을 가족, 친구, 자선단체 등에 나눠주기로 결심했다. 이미지 출처 : BBC뉴스 캡쳐]]

     

    부부는 얼마를 나눠주기로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자원봉사자를 위한 온라인 미디어에서 일하다 퇴직한 프랜시스는 “은퇴 뒤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면서 “이제는 뭔가 할 수도 있게 된 만큼 상담 치료에 관한 박사학위를 따고 싶다"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부부는 로또 당첨금을 나누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번에 돕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오면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 불교 강의하는 푸른 눈의 신부 교수님

    서명원 베르나르도 신부는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불교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처럼 그는 매일 1시간 가량 참선을 한다. [이미지 출처 : 경상북도 유튜브 캡쳐]

    25년 이상 불교 수행을 하는 푸른 눈의 외국인 신부가 있습니다. 예수회 소속으로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불교를 가르치는 서명원 베르나르도(64) 신부입니다. 

     

    개량 한복을 자주 입고 다니는 베르나르도 신부는 매일 1시간가량 참선을 합니다. “중심을 잃어버릴 수 있어서”라는 게 이유입니다. 

     

    그는 참선을 시작한 시기를 1996년 12월 말이라고 또렷이 기억할 정도로 참선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학자로서 20여 년간 성철 스님의 선사상을 연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난 2015년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과 열반 20주년을 맞아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퇴옹성철, 이 뭣고?>(서강대 출판부)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조계종 법사로서 2007년부터 북미와 유럽에서 간화선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으로 귀화한 그는 불어를 주로 쓰는 캐나다 퀘벡주,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 등에서 참선을 가르칩니다.

     

    베르나르도가 세례명이지만 그에게는 천달이라는 법명도 있습니다. 법명을 주신 분이 천주교 신자여서 하늘 천 자에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라는 점에서 통달할 달자를 합해지었다고 합니다. 

     

    불교 경전 구절 가운데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내라)을 가장 좋아한다는 베르나르도 신부는 법명대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고 싶은 것이 희망사항이라고 합니다.

     

    종교와 종교 갈등에 대해 베르나르도 신부는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2018년 부처님 오신 날에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종교라면 궁극적인 목적지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죽음을 벗어난 생사에서 하나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 목적지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는 상호 상생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서로를 비판할 때 조심스럽게, 아소카 황제가 기원전 3세기경에 인도를 다스리셨을 때 말씀하신 대로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 종단을 그만큼 비판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기술, 고요한 택시

    코액터스에서 개발한 어플리케이션 '고요한 택시'가 설치된 택시(이미지 출처 : 코액터스)

    택시는 운전기사와 승객의 소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승객이 말한 목적지를 알아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에게 택시 운전은 도전 불가능한 영역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만든 소셜벤처 코액터스((CO:ACTUS))가 애플리케이션 ‘고요한 택시’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앱은 택시 승객과 운전기사가 태블릿PC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게 만든 앱입니다. 앱을 쓰기 위해서는 승객과 운전기사를 위한 태블릿PC가 필요합니다. 승객용 좌석에 설치된 태블릿PC에 하고싶은 말을 입력하면, 운전석 근처에 설치된 태블릿PC에 그대로 전송돼 화면에 나타납니다.

     

    [[IMAGE|251|center|코액터스에서 개발한 어플리케이션 '고요한 택시'. 이 어플이 깔린 태블릿 PC를 통해 승객과 운전기사가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코액터스)]]

     

    앱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실제 청각장애인 기사가 택시를 운전하는 게 가능하겠냐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코액터스의 꿈은 실현됐습니다. 작년 5월 경주에서 택시를 몰기 시작한 지 한 달 된 청각장애인 택시기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태블릿PC를 설치했습니다. ‘고요한 택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어 서울의 한 택시회사에서도 8월 청각장애인을 기사로 고용했습니다. 서울 지역 청각장애인 1호 택시의 주인공은 이대호(50)씨와 최철성(47)씨입니다. 두 사람 모두 보청기를 사용해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 2급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울시의 택시운전자격 시험을 통과했고 올해 8월 한 택시회사에 채용됐습니다. 특히 최 씨는 운송업 20년 경력의 베테랑으로 택배차량, 패스트푸드 배달 차량 등을 몬 경험자입니다. 

     

    서울 지역에서 시작된 ‘고요한 택시’는 다른 지역으로도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코액터스는 12월 말까지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 일할 청각장애인 택시 운전기사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IMAGE|249|center|청각장애인 택시운전원 양성을 위해 코액터스를 설립한 청년사업가 송민표 대표(이미지 출처 : 송민표 대표 페이스북)]]

     

    코액터스는 동국대 컴퓨터공학과 4학년인 송민표 대표가 만든 회사입니다. 송 대표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동아리 ‘인액터스’에서 활동하면서 코액터스의 사업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그는 청각 장애인이 장애인 가운데 두 번째로 많지만 취업률은 지적장애인에 비해 20%가량 낮다는 것을 알고 청각장애인의 취업률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는 해외 차량 호출 서비스 업체인 우버에서 청각장애인 운전사를 고용하는 것을 보고 앱을 구상했습니다, 우버는 승객과 운전자가 앱으로 대화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 글을 써서 대화를 했는데 송 대표는 이를 모두 애플리케이션에 담았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도록 돕는 IT솔루션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시작했지만 코액터스의 창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뜻은 좋지만 사업화가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이 많아 자금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송 대표는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는 공모전에서 창업 자금을 모았고, SK 청년비상 창업경진대회 등 각종 대회에 참가해 여러 차례 상을 받았습니다. 서울 중구 언더그라운드 피치 대회에서는 1위를 차지해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창업팀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 올해 100세 된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말하는 삶의 지혜

    “나이가 드니까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집니다. 남을 위해 살았던 것만이 보람으로 남습니다.”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님이 하신 말입니다. 김 교수님이 올해 100세를 맞았습니다. 

     

    100년은 간단치 않은 세월입니다.  

     

    김 교수님은 1920년 평남에서 태어나 윤동주 시인과 함께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셨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마지막 대중 강연을 들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를 살아오신 김 교수님이 세월을 통해 얻은 삶의 지혜를 소개합니다. 

     

    다음은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김 교수님을 인터뷰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4살, 15살 때 건강이 너무 나빴어요. 건강 때문에 중학교도 못 가고 인생이 끝날 것 같은 데 하나님께 건강을 주시면 주시는 동안은 내 일보다는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건강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일하기 위한 건강이지 건강을 위한 건강은 별로 생각을 안 합니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 좋아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곧 끝나버리고 마는데 일을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언제나 돈이 따라와요. 

     

    경제는 일을 사랑하는 개인과 사회에 주어지는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는 개인이나 사회는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수입보다는, 소유보다는 일을 사랑하는 것, 그다음에 또 하나는 일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돈 벌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명예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접촉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조금 더 행복해지고 지금보다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그것에 제게는 일의 목적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교훈이 바로 그거죠. 그러니까 일의 목적은 내 주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조금 더 행복해졌다, 좀 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그 이상의 목표를 나는 없다고 봐요. 

     

    젊었을 때는 누구나 즐겁게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장년기에는 일을 성공하는 게 목표죠.  

     

    그런데 나무도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어야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생도 60이 넘으면 사회를 위해서 열매를 맺어줄 나이가 됐거든요.  

     

    내 인생에 목표가 있다 하면 아까 얘기한 그대로 내가 있기 때문에 주변의 여러분들이 좀 더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내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그 목표죠."

     

    김 교수님은 인생의 황금기를 65세에서 75세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나이로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그 나이가 되어서야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개운조사(4) - 드디어 참 스승을 만나다

    봉암사로 돌아온 조사는 환적암(幻寂庵)에 머물며 불철주야 용맹 정진을 이어갑니다. 침식도 잊고 부처님께 오직 참 스승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기도나 참선 중에 온갖 이상한 현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납니다. 별의별 환상들이 다 나타났습니다. 환상은 현실처럼 생생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여자가 요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눈앞에 황금 덩이기 놓이기도 하고, 호랑이가 입을 딱 벌리고 다가오기도 하고,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기도 했습니다. 도적이 방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가 천상에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온갖 진귀한 음식들로 차려진 밥상이 불쑥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조사는 이러한 환상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리따운 여자의 요염한 자태를 보아도 무덤덤했습니다. 황금은 돌로 보였습니다. 호랑이가 나타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구렁이가 몸을 감아도 징그럽지 않았습니다. 도적들이 대갈통을 부수어버리겠다 호령하며 방망이를 휘둘러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산해진미를 보아도 먹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눈앞에서 온갖 환상들이 나타났다 스러지기 일 년여, 조사는 그저 고요한 마음으로 정진을 이어갈 뿐이었습니다. 

     

    어느 해 질 녘이었습니다. 웬 미치광이 중이 비틀걸음으로 환적암을 찾아왔습니다. 너덜너덜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온몸의 부스럼에서 진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옷과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부지깽이라도 들어 바로 쫓아냈겠지요? 하지만 조사는 이 비렁뱅이 노인을 안으로 맞아들여 극진히 봉양합니다. 

     

    그런데 이 거지 스님의 행패가 아주 고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툭하면 욕설을 퍼부으며 조사를 마구 때렸습니다. 조사는 그래도 화가 안 났습니다. 어떤 때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조사에게 칭찬의 말을 해댔습니다. 그래도 조사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조사의 마음은 그저 잔잔한 호수같이 고요할 뿐이었습니다. 

     

    거지 스님과 같이 지낸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밤중에 거지 스님이 조용히 조사를 불렀습니다. 

     

    “너는 정말 마음을 잘 비웠구나. 못살게 굴어도 화를 안 내고 칭찬을 해도 좋아하지 않으니 마음이 참으로 훌륭하게 닦이었구나. 틀림없이 크게 득도할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네가 부처님께 그토록 애타게 기원한 것이 무엇이더냐?" 

     

    조사는 이 노인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고 대답했습니다. 

    "참 스승님을 만나 부처님의 법을 잘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또 물었습니다. 

    “부처의 법을 배워 무엇 하려고?” 

     

    “생사를 뛰어넘는 대도를 이뤄 가없는 중생들을 구하고자 하옵니다.” 

     

    노인의 입에서 한없이 자비로운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내가 네 스승이 되면 어떻겠느냐?" 

     

    그 순간 조사는 이 노인이 자기가 그토록 만나옵기 간절히 바라던 큰 스승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조사는 거듭거듭 큰절을 올렸습니다. 

     

    “불감청이어든 고소원이외다. 부디 저를 제자로 삼아주소서.” 

     

    조사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렸습니다. 

     

    “일어나라. 너는 이미 내 제자다.” 

     

    노인이 따사롭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조지 클루니가 13년째 이 회사 광고를 하는 이유

    조지 클루니가 13년째 광고를 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는 광고입니다. 바로 커피 회사 네스프레소이지요. 

     

    조지 클루니가 이 회사 광고를 오랫동안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주위에서는 네스프레소가 함께 진행 중인 남수단 프로젝트를 이유로 듭니다. 

     

    클루니는 수단 내전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수단은 20년에 걸친 내전으로 200만 명 가까운 이들이 사망하고 4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생겨난 나라입니다. 클루니는 2000년대 초반부터 여러 차례 수단을 찾아 그곳의 참혹한 현실을 알리는 다큐를 만들었습니다. 2012년 3월에는 워싱턴 주재 수단 대사관 앞에서 수단 정부군의 민간인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클루니는 수단인을 돕기 위해 자신이 광고모델로 있는 네스프레소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커피 농장을 되살려 농민들의 자립을 지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네스프레소는 클루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남수단 커피산업 재건을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입니다.  

     

    [[IMAGE|239|center|남수단 재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커피를 재배 중인 농부들. 이미지 출처 : 네스프레소 유튜브 캡쳐]]

     

    네스프레소는 2013년부터 비영리단체 테크노 서브와 함께 700여 명의 농부들에게 종자를 보급하고 재배기술을 가르쳤습니다. 커피 가공 공장도 세웠습니다. 또 시장가 보다 30~40% 비싼 가격으로 원두를 샀습니다. 네스프레소는 2020년까지 250만 달러를 투자해 커피를 재배하는 농부를 8000명까지 늘릴 계획입니다.  

     

    조지 클루니와 네스프레소의 ‘콜라보’는 광고주와 모델의 관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클루니는 네스프레소 지속 가능성 경영 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합니다. 네스프레소는 2003년부터 열대우림 연맹과 함께 지속 가능한 커피 농사를 위한 지원을 해오고 있습니다.  

    클루니는 오래전부터 행동하는 ‘개념 배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환경, 인권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행동을 무척 중요시하지요.  

     

    네스프레소 외에 클루니는 스위스 친환경 에너지 회사인 벨레노스 클린파워의 이사로 재생에너지 보급을 위한 활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그 자신 환경이나 인권 관련 재단에 기부를 이어가고 있고 전기차를 사서 몰고 다닙니다. 

     

    조지 클루니는 그런 행동을 통해 삶의 가치와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나는 해피엔딩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 여정을 믿는다”

  • 거울 11만 개를 닦은 할아버지

    7년 동안 도로 위의 반사경을 11만 개를 닦은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대만 타오위안 시에 사는 장 시유숑(Zhang Xiuxiong) 할아버지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매일 새벽 4시면 집을 나섭니다. 도로 위의 반사경을 닦기 위해서입니다. 

     

    장 할아버지는 반사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오토바이를 몰고 갑니다. 오토바이 뒤에는 사다리와 밀대, 손걸레가 늘 실려 있습니다.  

     

    그는 공책에 일기처럼 매일 반사경을 닦은 작업일지를 적었습니다. 닦지 않은 곳, 닦은 지 오래 지난 곳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책에 적힌 기록을 보면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닦아 온 거울은 11만 개. 한 해 평균 1만 6천 개에 달합니다.  

     

    그가 반사경을 닦는 일을 시작한 것은 8년 전 목격한 교통사고 때문입니다. 굽은 길에서 마주 오던 차량이 상대방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정면으로 충돌했고 여러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장 할아버지는 사고 현장에서 거미줄이 잔뜩 낀 반사경을 발견합니다. 반사경이 제구실을 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바로 다음날부터 반사경을 닦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높은 곳의 반사경을 닦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진 적도 있고, 외진 곳에서 야생동물의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할아버지의 반사경 닦는 일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남을 위해 선행을 하니 신이 덜 다치도록 해주신 것 같습니다. 거울을 닦는 동안 내 마음이 거울처럼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 이태석 신부의 수단 제자, 한국에서 의사됐다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뒤를 이을 의사가 탄생했습니다.  

     

    이 신부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도왔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한국에 와서 의사가 됐습니다.  

     

    인제대 의대 졸업생인 토마스 타반 아콧(33) 씨는 올해 초 이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21일 제83회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해 의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토마스는 2019년부터 인제대 부산백병원에서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과정을 거친 뒤 남수단으로 돌아가 이 신부님처럼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토마스와 한국과의 인연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토마스는 교육과 의료봉사를 위해 남수단의 가난한 마을에 온 이 신부를 만났고 복사단원(천주교에서 사제의 미사 집전을 돕는 평신도)으로 미사 집전을 도왔습니다.  

     

    [[IMAGE|173|center|'남수단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故 이태석 신부. 토마스씨는 故 이태석 신부를 만나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캡쳐]]

     

    이 신부가 진료를 다닐 때도 곁에서 도왔습니다. 붕대를 감아주거나 상처를 소독할 때 환자를 잡아주는 등 보조 역할도 했습니다.  

     

    이 신부는 그런 토머스를 눈여겨보다 2008년 한국에 귀국한 뒤 한국에서 공부할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제안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언어 장벽을 넘을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부모님의 격려에 힘입어 토마스는 2009년 12월 한국에 왔고 연세대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 공부에 힘을 쏟았습니다. 

     

    토마스는 한국어 가운데 특히 속담이 재미있었다고 말합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속담으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를 꼽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국에 온 지 한 달쯤 뒤에 이 신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토마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었습니다. 임종 하루 전 병실을 찾았을 때 산소마스크에 의지해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이 신부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이 신부가 선종한 뒤 토마스는 그의 뜻을 이어 2012년 김해시에 있는 인제대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한자까지 섞인 의학 용어를 익히는 것은 외국인인 토마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농구를 하며 땀을 흘리거나 개그콘서트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학업 스트레스를 날려보냈다고 합니다.  

     

    의사 고시도 한 번에 붙은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낙방했을 때 잠깐 힘들기도 했지만 스스로 ‘노력파’라고 부를 정도로 끈기 있게 공부해 올해 마침내 의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토마스는 외과 전문의가 되려고 합니다. 수단에 가장 필요한 의사가 바로 외과 의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엄마, 친구가 하늘나라 갔대”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 코너에 12월10일에 실린 글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금요일 오후였다. 다른 것이라고는 늘 비가 오는 이곳 캐나다 밴쿠버의 겨울답지 않게 무척이나 화창하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처럼 비가 갠 주말을 어떻게 즐길까 고민하며 아들을 맞으러 학교에 갔다. 학교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학부모들. 멀찍이 바라봤을 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때 학교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활짝 웃으며 다가가는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평소 금요일이라면 주말에 놀 생각에 더 활짝 웃으며 나오던 아이가 아니었던가. 아들은 나를 보자마자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진짜 슬픈 소식이었어. 진짜, 진짜, 진짜 슬픈 소식이야. 그 친구가 하늘 나라에 갔대."

     

     

     

    [[IMAGE|228|center|caption]]

     

    느닷없는 비보

     

     

    그 친구라 함은, 지난 학년부터 아들과 한 반이었던, 9월에 시작된 새로운 학년에 첫 짝궁이었던 그 친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근무력증을 앓고 있어 휠체어에서 생활했고, 옆에는 장애학생 지원 선생님이 늘 함께 했지만, 아들의 그 친구는 학교생활에 대부분 참여했었다.

     

    통합교육이 원칙인 이곳 캐나다에서 아이들은 조금 더 몸이 불편한 학생들과 생활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이 친구도 학급 활동에 늘 함께 했다. 지난해 그 친구의 생일 땐 반 전체에서 작은 축하파티도 열었었다. 반에서는 혼자 책을 읽기 힘든 이 친구에게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읽어주곤 했는데 두어 달 전 아들은 자신이 책 읽어줄 차례라며 영어발음을 연습해 갔었다. 몇 주 전 자원봉사로 따라간 현장학습 때도 장애학생 지원 선생님과 함께 참가했던 아이였다.

     

    내게도 충격이었다. 순간 눈물이 쏟아졌고, 먹먹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주친 선생님들의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아들과 같은 반 친구들 중 몇몇도 눈가가 촉촉했다. 아이를 픽업하러 온 부모들 중 몇 명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마음이 조금 추스러지자, 아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들에게는 처음 겪는 상실. 그것도 2년 동안 같은 반을 했던 친구가 10살의 나이에 하늘나라에 간 것을 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아들에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담임선생님이 건넨 종이

     

     

    아들이 비보를 접한 것은 등교하자마자였다. 교실에 들어온 담임선생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몇몇 친구들은 곧바로 눈물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어 담임선생님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종이를 꺼내며 아이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 종이를 둘게요. 수업 도중에라도 마음이 힘들고 슬픈 기분이 들면 언제든지 가져다가 쓰고 싶은 것을 아무 거나 쓰세요. 그림을 그려도 되고, 하늘나라에 간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도 되고, 너무 슬퍼서 화가 나면, 화나는 마음을 표현해도 돼요. 그리고 수업 중에 갑자기 눈물이 나거나, 도저히 수업에 집중이 안 될 땐 도서관에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울고 와도 돼요."

     

    아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이날 그 어떤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수업에 집중하라거나, 이럴 때일수록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도, 그 친구를 위해서 우리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느꼈을 심리적 충격을 이해해주고 그 슬픔을 충분히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함께 울어줄 뿐이었다. 선생님들 역시 슬픔을 숨기지 않았다.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오늘은 마음이 너무 슬퍼서 수업하기가 힘들다"고 아이들에게 털어 놓았고, 지원 나온 대체교사가 이날 수업시간에 함께 했다.

     

    상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심리적으로 깊은 충격과 슬픔을 남기는 경험이다. 특히, 어린 시절 생애 처음으로 겪는 상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여러 차례 맞닥뜨리게 될 또 다른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해 준다.

     

    상실을 맞닥뜨릴 때 정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슬픔을 충분히 표현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 안에서 밀려오는 슬픔을 힘들다고 해서 부인하거나 '괜찮다'고 포장해 버리면, 그 슬픔은 마음 더 깊은 곳으로 꽁꽁 숨어들어간다. 숨어든 슬픔은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오랫동안 일상을 방해하곤 한다.

     

    이런 면에서 선생님의 대처를 듣자 안심이 되었다. 이날 아들과 반 친구들은 수시로 종이를 가져다가 슬픔을 표현했고, 도서관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한바탕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IMAGE|229|center|caption]]

     

    교장선생님의 메일 한 통

     

     

    그리고 그날 오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교장선생님은 전체 학부모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다시 한 번 비보를 공식적으로 전했다. 그리고 당부했다.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이 다른 이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뜻을 존중해 달라고. 유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말이다. 

     

    이어 교장선생님은 학교는 신속히 밴쿠버 교육청의 위기지원팀(VSB Critical Support Team)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교육청의 위기지원팀은 학교 공동체에서 재난이나 구성원의 죽음 등 정신적인 상처를 남기는 일이 발생했을 경우, 심리적 문제를 비롯한 각종 어려움들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한다.

     

    학생뿐 아니라 슬픔에 빠진 선생님들도 돕고, 때로는 대체 인력을 파견하기도 한다. 충격과 슬픔에 빠진 학교를 체계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제든 아이들이 들를 수 있도록 상담센터를 열어 두었고, 학교와 교육청 소속의 상담사들이 도움을 제공할 채비를 마쳤다고 알렸다.

     

    또한 교장선생님은 강조했다. 이번 일로 인해 아이들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물을 때 주의 깊게 들어주고 정직하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나아가 학교에서도 언제든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 묻고 이야기 하며, 슬픔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집에서도 함께 해달라고 당부했다.

     

    교장 선생님이 보낸 메일을 보니 여전히 먹먹한 나의 마음이 조금은 따스해지는 듯 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터부시하지 않고, 삶의 일부분으로 죽음을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자세, 상실을 경험할 때 생기는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 유가족들을 존중하는 태도, 공동체 차원에서 상처를 극복해 가려는 노력. 아들의 학교는 가슴 아픈 상실을 경험할 때 반드시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차근차근 해내며 애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모습들은 친구를 잃은 경험이 나와 내 아이를 비롯, 그 친구와 가까워 충격과 슬픔이 더 큰 몇몇만이 스스로 감당해내야 할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은 시린 마음 한 켠에 훈훈함과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물론, 아무리 함께하고 서로 위로하더라도 상실을 경험해내는 것은 분명 힘들고 아픈 일일 것이다. 그 충격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육청까지 나서 함께 슬픔을 나누고 도우려는 모습들을 보니 이를 통해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그리고 학부모들도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애써 축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며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분명 이 슬픔을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친구가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길, 유가족들에게도 평화가 함께 하길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