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ALL : 기도

Contents List 3

  • 두 ‘문파’의 탄생 비화

    아주 먼 옛날 부지국이라는 나라에 성인이 계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성인을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출가해서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이들도 있었지만 생업을 꾸려가면서 열심히 수행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제자들을 덕으로 품어 안았고 성품은 물론 생활환경까지 고려해 가르침을 폈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스승님,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데 하루에 두 끼 정도면 충분하다 하셨는데 그렇다면 아침 점심 저녁 중에 어느 끼니를 걸러야 하는지요?”

     

    성인은 그 제자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서 밤늦게 식당 문을 닫은 뒤 저녁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까지 먹는다면 전날 밤에 먹은 음식이 소화되기도 전에 또다시 음식을 먹게 되어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연히 아침을 먹지 않아야 한다. 아침에 수행할 때 배가 부르면 정신이 흐트러지니 절대 아침을 먹지 않도록 해라. 이 가르침은 네게만 주는 것이니 다른 이들에게 절대 말하지 말고 혼자서만 지키도록 하라.”

     

    어느 날 또 다른 제자가 스승을 찾아와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스승님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데 하루에 두 끼 정도면 충분하다 하셨는데 그렇다면 아침 점심 저녁 중에 어느 끼니를 걸러야 하는지요?”

     

    그 제자는 농부였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와 일찍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동트기도 전에 들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을 일찍 먹기 때문에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농사일을 할 때 힘에 부쳐 건강을 해칠 수도 있었습니다.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반드시 아침을 먹어야 한다. 배가 든든해야 잡념이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다만 아침을 먹기 전에 반드시 네 배를 채워주는 음식을 하늘처럼 섬기는 마음을 길러라. 들에 나가서 농사를 지을 때도 곡식을 하늘처럼 섬겨라. 대신 점심은 굶어라. 다만 참은 끼니가 아니니 가능하면 챙겨 먹어라. 이 가르침은 특별히 네게만 주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절대 얘기하지 말고 혼자서만 지키도록 하라.”

     

    두 제자는 스승이 자신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줬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수행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두 제자를 따르는 이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아침을 먹지 않던 제자는 혼자서만 지키라고 한 스승의 말을 잊고 자신을 따르던 이들에게 아침을 절대로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신을 굳게 믿고 따르는 제자 몇몇에게만 스승의 비밀한 가르침이라고 알려줬습니다.

     

    아침을 꼭 챙겨 먹던 제자 또한 혼자서만 지키라고 했던 스승의 말을 잊고 자신을 따르던 이들에게 반드시 아침을 챙겨 먹으라고 했습니다. 신심이 깊은 이들이 이유를 물으면 스승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가르침이라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두 제자가 전한 ‘특별한’ 가르침은 점점 퍼져 나가 아침을 먹지 않는 이들은 아침을 먹는 이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을 먹는 이들 또한 아침을 먹지 않는 이들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자신들이 특별한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는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며 두 제자가 이끄는 ‘모임’은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심지어 잘못된 법을 전하고 있다며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제자마저 세상을 떠난 뒤 두 ‘모임’은 아예 담을 쌓고 교분조차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을 판단할 때 모두 아침을 먹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 택배기사용 간식함 만든 아파트

    경기도 수원시의 한 아파트의 각 동에는 택배기사들을 위한 간식함이 비치되어 있다. [이미지 : KBS News 유튜브]

    택배기사들을 위해 간식함을 만든 아파트가 있습니다.

     

    경기도 수원시 한 아파트의 각 동 경비실 입구에는 두유, 건빵 등이 든 수납장이 있습니다. 택배기사들을 위한 ‘간식 창고’이지요.

     

    입주자 대표회의가 마련한 수납장 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습니다.

     

    “입주민을 위해 애써주심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잠시라도 피곤함을 잊으라고 간식을 준비했으니 드시고 힘내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단지 내 안전운행과 안전사고에 유의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택배기사를 위한 간식 비용은 아파트 주민들이 운영하는 자선 모임에서 기부를 받아 마련한다고 합니다.

     

    입주자 대표회의에서는 새벽 배송을 하는 기사들이 끼니를 거르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 간식함 설치를 논의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이전부터 택배기사에게 음료수나 건강음료를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사연은 이전에 여기에 살던 주민이 약속 때문에 방문했다 단지 입구에 설치된 간식함을 보고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품격 높은 아파트”라고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서 알려졌습니다.

     

    [[IMAGE|699|center|택배기사를 위한 간식함 위에 붙어있는 메시지 [이미지 : KBS News 유튜브] ]]

  • 네덜란드의 치유농장 후버 클라인 마리엔달

    후버 클라인 마리엔달은 네덜란드의 케어팜 중 하나로, 정서적 안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이미지 : 유튜브 캡처]

    자연이 현대인의 치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자연의 그런 힘을 이용해 몸이나 마음이 아픈 이들을 치유하는 농장을 케어팜(Care Farm)이라고 부릅니다.

     

    네덜란드 후버 클라인 마리엔달(Hoover Klein Marieendal) 농장이 대표적인 케어팜입니다. 후버 클라인 마리엔달은 마리엔달의 작은 농장이라는 뜻입니다.

     

    이 농장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남동쪽으로 100km 떨어진 아르헴의 교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농장이라고 불리지만 이곳은 깔끔하게 정돈된 현대식 농촌과는 거리가 한참 있어 보이는 곳입니다. 담장은 아예 없고 마당에는 닭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당나귀도 어슬렁거립니다. 어디가 들판인지 밭인지 구분도 잘 되지 않습니다. 

     

    이곳이 여느 농장과 다른 점은 이용객들의 치유를 위해 운영된다는 점입니다. 매일 20~25명의 ‘이용객’이 이곳을 찾아 여러 가지 활동을 합니다. 케어팜에서는 치유를 위해 방문하는 이들을 환자 대신 이용객(클라이언트)라고 부릅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치매나 자폐 환자들입니다. 장기간 실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이나 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도 이곳을 찾습니다.

     

    텃밭에서 농작물을 가꾸기도 하고 농장의 동물들과 들판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요리를 하거나 예술 활동을 하기도 하지요. 빵과 커피를 앞에 놓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10여 명의 직원과 4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케어팜을 운영합니다.

     

    후버 클라인 마리엔달은 농업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가진 와게닝겐(Wageningen) 대학의 얀 하싱크(Jan Hassink) 박사가 2007년에 만들었습니다. 상처받은 도시인들이 주거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만든 도시형 케어팜이라고 합니다.

     

    케어팜 이용은 농장에서 정서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서를 갖고 지역 행정기관을 찾아가면 사회복지담당 직원이 판단해 치유농장을 연결해줍니다. 정부에서는 반나절에 35유로(약 4만5천원)를 지원한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케어팜은 농업과 복지를 합친 개념으로 1995년 등장했는데 현재 약 1400개나 운영되고 있으며 연간 2만 명이 케어팜을 이용한다고 합니다.

  • ‘청년 소방관’ 오영환의 도전, “가장 절박한 사람이 정치해야”

    민주당이 ‘청년 소방관’ 오영환씨를 영입했습니다.

     

    오씨는 2010년 서울 광진소방서 119 구조대원으로 소방관 생활을 시작해 10년 가까이 구조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출동한 횟수만 2천 번이 넘는다고 합니다.

     

    구급대원으로 일했던 시절에는 심정지 등으로 거의 죽을 뻔한 이들을 응급처리로 살린 경우에 수여하는 ‘하트세이버’ 배지를 6차례나 받았습니다.

     

    소방관들의 현실과 처우 개선을 위한 행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소방관의 이야기를 담은 책 <어느 소방관의 기도>를 펴냈고 소방공무원 국가직화를 위한 광화문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암벽 여제’로 불리는 김자인 선수의 배우자로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고 JTBC의 길거리 강영 프로그램 ‘말하는대로’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오씨는 민주당 입당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치에 꼭 한 번 묻고 싶었다”며 “국민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예산을 포퓰리즘이라 비난하고 퍼주기라고 말하는 정치가 우리 국민의 안전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평생을 소방관으로 살고 싶었지만, 누군가 국민 생명과 안전에 관해 필요한 법과 제도, 예산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가장 절박하게 공감해 본 사람이 정치를 해야 더 절박하게 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민주당의 요청을 받아들인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소방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찰, 군인 등 현장에서 근무하는 제복 공무원들이 당당하고 마음껏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키우는 데 헌신한 부모님 같은 분들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어서 고교시절부터 소방관을 꿈꿨다고 합니다.

  • 이석로 방글라데시 꼬람똘라 병원장, 빈민촌서 25년 '인술'

    25년.

     

    이석로 방글라데시 꼬람똘라 병원장이 방글라데시에서 의료 봉사로 보낸 시간입니다.

     

    이 원장은 1994년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뒤 꼬람똘라병원 의사 모집 공고에 지원했습니다.

     

    그가 자원봉사를 신청한 이유는 군 면제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남대 83학번인 그는 키가 153cm로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면제 판정을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 같으면 인생에서 ‘3년을 벌었다’고 좋아했겠지만 이 원장은 다른 이들이 군 복무를 하는 기간 동안 봉사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처음 방글라데시로 떠날 때 딱 3년 동안만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해 18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떠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태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가 일하는 꼬람똘라 병원은 한국해외의료선교회인 콤스(KOMMS)가 1992년 설립한 병원입니다.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차로 2시간 걸리는 빈민촌에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건강보험이 없고 진료비는 비싸 가난한 사람들은 의료혜택을 거의 받지 못합니다. 병을 안고 살면서 키우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세워진 병원이라 꼬람똘라는 진료비의 1/10만 받습니다. 그 돈을 부담하기도 어려운 사람은 무료로 치료해줍니다. 하지만 치료를 위해 돈을 ‘강제로’ 맡아두기도 합니다.

     

    결핵 환자 치료가 그랬습니다. 결핵은 오랜 기간 약을 먹어야 완치가 되는데 이곳 환자들은 증세가 완화되면 병원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원장은 결핵 치료 환자에게 보증금으로 1000타카(약 1만4천 원)를 받았습니다. 대신 병이 다 나으면 돌려줬습니다.

     

    이 원장은 병원에 필요한 의료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급여도 대폭 삭감했습니다. 연봉이 3만 달러와 퇴직금 조로 쌓아두는 돈이 1만 달러였습니다. 하지만 이 원장은 2만 달러만 받겠다고 하고 나머지 돈으로 외과의사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 원장은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알고 2009년에는 백내장 수술에 특화된 안과도 개설했습니다. 2018년 한 해에만 1300여 명이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교육 기회를 얻기 어려운 여성을 위해 3년제 간호학교도 설립해 학생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고 있고 장학사업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 이 학교에서 100여 명의 간호사가 배출됐습니다.

     

    25년간 그가 쏟은 땀방울과 정성으로 현재 꼬람똘라 병원은 8개의 진료과와 50병상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해마다 8만 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원장은 고교 시절 공대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누나의 권유로 의대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대학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고민도 많았다고 합니다. 돈과 명예 대신 다른 길을 찾고자 했던 고민이 그를 방글라데시로 이끌었습니다.

     

    이 원장은 25년간의 봉사활동을 한 공로로 올해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아산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막노동으로 3남 2녀를 키운 부모님에게 늘 죄송하다는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상이 부모님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가난한 이를 치료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겉치레를 다 버리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소박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것이지요.

  • 폐지 판 돈 기부 27년째 이어가는 할아버지

    지난 5일 장광래(75) 할아버지가 천안시 중앙동 행정복지센터에 100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기부해 화제가 되었다. [이미지 : MBCNEWS 유튜브]

    폐지를 팔아 생활하는 70대 할아버지가 27년째 기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천안시에 따르면 지난 5일 중앙동에 사는 장광래(75) 할아버지가 행정복지센터를 찾아 100만 원 상당의 온누리상품권을 기탁했습니다. 어려운 이웃에 전달해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온누리상품권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네의 폐지를 수거해 판 돈 가운데 일부를 모은 돈으로 구매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폐지를 팔아서 받은 돈을 들고 은행을 찾는다고 합니다. 적은 돈이지만 할아버지가 통장에 꼬박꼬박 입금하는 이유는 갖고 있다가 써버릴까 걱정해서라고 합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연말이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줬고, 생활비가 부족한 이웃에게는 생필품을 사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올해로 27년째입니다.

     

    할아버지는 아침이면 초등학교 앞에서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를 돕는 봉사활동도 한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천진난만한 애들이 고맙다고 인사하고, 또 어떤 때는 사탕도 하나씩 줄 때도 있어요.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라며 자신이 오히려 얻는 게 많아 기부를 멈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삶, 신독(愼獨)

    지난 14일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향년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미지 : LG 공식 홈페이지]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족은 ‘허례허식’을 삼가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도 비공개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빈소를 공개하지 않고 조문은 물론이고 조화까지 사양했지만 인연 있는 정재계 인사 수십 명이 굳이 빈소를 찾을 정도로 고인이 남긴 족적은 큰 것 같습니다.
     
    구 명예회장은 생전에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부자가 되기 위해 바르고 부끄러움 없는 생활 자세”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를 위해 고인은 서울 여의도 LG 사옥 집무실에 신독(愼獨)이라고 쓴 휘호를 걸어 놓고 늘 마음에 새겼습니다.
     
    신독은 대학에 나오는 군자필신기독야(君子必愼其獨也)의 줄임말입니다. 군자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늘 올바르게 처신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는 LG가 내세우는 ‘정도경영’의 바탕이 됐을 것입니다. 
     
    고인은 신독을 바탕으로 기업 경영의 원칙도 세웠습니다. 
     
    “사사로운 이해를 떠나 공사를 엄정히 구분하면서 기업을 이끌어 나가고, 항상 정당한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기업을 운영한다면 사회는 결코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근검절약하고 절제된 생활을 영위하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부는 이 사회로부터 점차 존경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신독이라는 삶의 철학은 구 명예회장의 검소하고 소탈한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의 검소함은 가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구 명예회장은 회고록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 “나는 주로 구태회 숙부의 옷을 대물림해 입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조부께선 학용품도 하나 다 써야 새것 하나를 꺼내 주셨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배우고 자라서인지 구 명예회장은 재벌의 총수이지만 어느 동네에서나 만날 수 있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구 명예회장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고동색 카디건과 검은 뿔테안경은 20년 쓴 물건들입니다. 은퇴한 뒤 사용할 컴퓨터도 계열사에서 쓰던 것을 가져다 쓸 정도로 근검절약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15일 자신의 트위터에 “회장님께서 1980년대 정부청사 인근 허름한 식당에서 일행과 수행원도 없이 혼자 비빔밥을 드시던 소박한 모습을 몇 차례나 봤다. 회장님의 그런 풍모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을 키웠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고인은 각지의 공장을 방문할 때도 불필요한 의전을 삼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LG그룹에서는 오너 경영인이 방문했을 때 간부들과 직원들이 도열해서 맞는 일이 없습니다. 
     
    구 명예회장은 가족에게도 엄격했습니다. 힘 있고 돈 많은 이들의 대다수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궁리할 때, 고인의 네 아들은 모두 육군에서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습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는 신독의 삶을 살았기에 구 명예회장은 물러날 때도 알았습니다.  그는 1995년 LG를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넘겨주고 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자연 속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에서 자식에게 경영을 물려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구 며예회장은 낙향한 곳에서도 버섯 재배를 연구하고 된장, 청국장, 만두 등 전통음식의 맛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에는 늘 마음을 썼습니다. 1991년 사재 2억 원을 출연해 LG복지재단을 만들어 소외계층을 지원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 상남이라는 호를 지은 것입니다.
     
    구 명예회장은 문중에서 항렬이 낮지만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습니다. 아저씨뻘 되는 이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이들이 자신을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남이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상남은 경남 진양군 지수면 고향집 앞에 있는 작은 다리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고인은 삶처럼 떠나는 길도 소탈했습니다. 
     
    유족은 빈소를 공개하지 않았고 화장 뒤 묻힐 장지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문상객도 2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화도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것만 받고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나라의 대표가 보낸 것이라 그마저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 배고파 우유 훔친 ‘장발장’ 부자에 일어난 기적

    '현대판 장발장'이라 불릴 정도로 가난한 부자(父子)를 도운 이재익 경위(왼쪽)와 박춘식씨(가운데). [이미지 : 인천 중부경찰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19년 동안 감옥에 갇힙니다.

     
    우리 시대에도 ‘장발장’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장발장은 다행히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많은 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지난 15일 오후 4시쯤 30대 A 씨와 10대 아들이 인천시 중구의 한 마트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다 붙잡혔습니다. A씨가 아들이 멘 가방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을 CCTV로 본 직원이 이들을 붙잡았고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지요.
     
    이들의 가방에서 나온 물건은 우유 2팩과 사과 6개, 음료수 몇 병 등 금액으로 따지면 1만 원 정도 됐습니다.
     
    경찰이 출동했을 때 A씨는 두 손을 앞에 다소곳이 모은 채 직원에게 연신 "용서해 달라"라며 머리를 숙였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다"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A씨는 택시 운전을 했지만 당뇨와 갑상선 질환으로 6개월 동안 일을 못해 끼니를 때울 돈조차 없어 물건을 훔치게 됐다고 했습니다. 집에서는 홀어머니와 7살 둘째 아들이 먹을 것을 구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털어놓았습니다.
     
    사연을 들은 마트 주인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경찰도 이들 부자를 훈방조치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경찰관들은 이들을 돌려보내기에 앞서 근처 식당에 먼저 데리고 가서 따뜻한 국밥을 대접했습니다.
     
    식당에서는 한 시민이 2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고 식당을 나갔습니다. 아들이 돌려주려고 달려나갔지만 그 시민은 한사코 아이에게 돈 봉투를 맡기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경찰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의인은 국내외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박춘식(66)씨로, 당시 창밖에서 ‘사건’을 지켜본 뒤 식당까지 따라가 돈 봉투를 전했다고 합니다.
     
    현장에 출동했던 이재익 경위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아침 점심을 다 걸렀다고 부자가 그러니까요…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딨습니까”라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경찰은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A씨의 일지라를 알선하고 B군은 무료급식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부자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당장 마트 주인부터 이들 부자에게 쌀과 식료품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여러 시민들이 사과, 식료품, 생필품 등 물품을 구입한 뒤 부자에게 전해달라며 맡기고 갔고 어떤 이들은 계좌로 돈을 입금하기도 했습니다. 도울 방법을 묻는 문의 전화도 이어졌습니다.
     
    A씨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가장으로서 일을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애들한테 가장 미안하다”면서 식당에서 현금 봉투를 주고 간 사람을 꼭 찾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서로 알지도 못하는 데 그렇게 해주셨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맙다"라고 했습니다.

  •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Pie Jesu(자비하신 예수님)

    오늘은 세계최고의 뮤지컬 작곡가로 손꼽히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Pie Jesu(자비하신 예수님)를 소개합니다.

     

    그가 작곡한 레퀴엠인데 위령 미사에 사용하기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을 절도로 감미로운 선율을 갖고 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Pie Jesu,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sempiternam requiem.

     

    자비하신 예수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리베라 소년 합창단과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버전을 함께 소개합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레퀴엠이지만 노래를 들으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평화기 깃들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 김치찌개 식당 사장이 된 신부님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님은 김치찌개 집 사장님입니다. 서울 성북구 정릉시장 안 건물 2층에 있는 ‘청년식당 문간’이 신부님의 식당입니다.

     

    2018년 5월 문을 연 ‘문간’은 시장통 안의 여느 식당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값싸고 맛있는 김치찌개로 유명합니다. 칼칼한 국물에 듬뿍 썰어 넣은 김치와 큼지막한 두부, 돼지고기, 햄, 떡국떡 등이 푸짐하게 들어 있는 정통 김치찌개가 ‘문간’의 대표 메뉴이지요.

     

    맛이 좋지만 김치찌개 값은 3000원에 불과합니다. 2016년 개업했을 때 가격 그대로입니다. 게다가 밥과 샐러드는 무제한으로 제공됩니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이면 이 식당은 자리가 꽉 찹니다. 하루 손님은 80~90명가량 된다고 합니다. 중고생과 대학생, 청년들이 절반 가까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일반인들도 찾아옵니다.

     

    올해로 사제 생활 20년째인 이 신부가 식당을 연 이유는 인천에 있는 한 수녀원을 찾았을 때 그곳에 있던 수녀로부터 한 청년이 고시원에서 굶어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서였습니다. 

     

    당시 이 신부가 속한 글라렛 선교 수도회에서 청년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청년들을 위한 식당을 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도회에 제안했고 승낙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가 2016년 3월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당 운영에는 문외한이라 이 신부는 오랜 ‘스터디’를 통해 ‘창업’을 준비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많은 조언을 듣고 꼼꼼히 준비했습니다. 식당 운영 경험은 물론 청년들을 이해하기 위해 관련 활동을 하는 이들도 만났습니다.

     

    지속 가능한 식당을 만들기 위한 방안도 고민했습니다. 김치찌개 값을 3000원으로 정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월세, 요리사 인건비, 재료비 등을 따져보니 지속 가능하려면 최소한 3000원은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하루 운영비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기부받은 식재료로 메우고 있습니다.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것이 어떠냐는 조언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무료급식소에 자주 가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밥값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 신부 자신도 “고민과 불안함과 실패와 좌절 같은 그런 것들을 안고 경험하고 지냈던 시기가 있었다"라고 합니다. 그는 서울 명문대 공대에 들어갔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편의점에서 끼니를 주로 때워야 했습니다. 

     

    그때 이 신부는 대기업에 취직해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96년 겨울방학 때 피정에서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걸 깨닫고 사제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합니다. 피정은 가톨릭 신자들이 일정 기간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에서 묵상과 자기 성찰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신부는 몇 가지 꿈이 있습니다. 요리 실력을 쌓아 주방에 ‘진입’하는 것이고 ‘문간’ 같은 식당을 체인점으로 늘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청년들이 문간에서 힘을 얻고 갔으면 좋겠다. 본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신부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하느님, 이 식당에 (배고픈) 청년들을 보내주십시오. 그들을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매 순간 기도한다고 합니다. 테이블을 닦으면서, 음식을 나르면서도 그의 이 신부의 기도는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