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ALL : 생각

Contents List 3

  • 박미현 터치포굿 대표, 쓰레기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사회적 기업가

    박미현 터치포굿 대표이사. [이미지 : 유튜브 캡쳐]

    박미현 터치포굿 대표는 ‘버려지는 자원과 버리는 마음을 터치하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합니다. 

     

    터치포굿은 현수막이나 광고판 등 짧은 시간 쓰이고 버려지는 자원을 재활용하는 업사이클링과 환경 교육이 주요 사업입니다. 업사이클링은 재활용품에 디자인을 도입하거나 기능을 높여 가치를 더한다는 뜻입니다. 

     

    박 대표가 터치포굿을 만든 것은 지구촌을 위협하는 쓰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플라스틱이나 비닐에 재활용 로고가 표시된 것은 말 그대로 모두 재활용이 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지요..

     

    그는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500이라는 숫자를 자주 얘기합니다. 500년은 플라스틱이 썩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박 대표는 이를 ‘인간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가장 긴 숫자’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자녀의 자녀의 자녀가 태어나서 온통 플라스틱 쓰레기로 뒤덮인 세상을 접하고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을 찾아 책임을 물으려고 해도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그런 세월이 500년입니다. 그렇게 오랜 생명을 지닌 플라스틱이 지구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박 대표는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 하지만 당장 주위에 널린 것들을 처리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업사이클링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한 2008년 터치포굿을 만든 이유입니다. “쓰레기가 더 이상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순환고리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이지요.

     

    자동차 범퍼를 잘게 쪼개 만든 ‘버즈 줄넘기’ 페트병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든 담요, 선거현수막으로 만든 손가방, 이면지로 만든 포스트잇 등 터치포굿은 그 동안 쓰레기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마법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특히 지난해에 만든 업사이클 블록은 터치포굿의 재활용 ‘열정’이 담긴 상품입니다. 텃치포굿은 플라스틱은 종류가 다양하고 안에 기름기가 끼여 있는 등 처리 비용이 많이 들어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업사이클로 재활용을 시도했습니다. 

     

    터치포굿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산업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식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일이죠. 이를 위해 기업이나 기관 등을 대상으로 쓰레기 재활용을 위한 솔루션을 제공하거나 아이들을 위한 환경교육을 진행합니다.

     

    박 대표는 터치포굿 브랜드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RmfkW-FWkh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버려지는 자원으로 좋은 상품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하고 싶어요”

  • 119REO, ‘은퇴’한 방화복으로 암투병 소방관 돕는 회사

    119REO에서 방화복으로 만든 가방 [이미지 : 119REO 홈페이지]

    

    소방관들이 입는 방화복은 수많은 화재현장에서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쓰이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그런 귀한 존재이지만 수명이 다하면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방화복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회사가 있습니다. 119REO입니다. 이 회사는 ‘은퇴’한 방화복으로 가방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가방 판매 수익금은 암 투병 중인 소방관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쓰인다고 합니다.

     

    119REO는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미션을 적어 놓았습니다.

     

    ‘암 발병에 노출된 소방관들. 151명의 소방관이 투병 중입니다. 119REO는 암 투병 중인 소방관을 돕습니다.’

     

    119REO는 방화복을 업사이클링 해 가방을 만듭니다. 방화복의 법적 내구연한은 3년입니다. 이 기간 동안 방화복은 평균 354번 현장에 출동하고 ‘퇴역’하게 되는데 그 숫자가 1년에 1만 벌가량 된다고 합니다. 

     

    방화복은 고강도의 신소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방 현장에서는 기능이 부족하지만 일상용품의 소재로는 여전히 뛰어난 성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활 방수 기능은 물론이고 불에도 잘 훼손되지 않는 방염 기능을 갖추고 있지요.

     

    119REO는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해 백팩 손가방 등을 만듭니다. 상의 16조각, 하의 10조각으로 이뤄진 방화복을 손으로 분해해 세척한 뒤 손으로 직접 자르고 이어붙이고 꿰매 가방을 만듭니다. 방화복의 ‘부활’은 가방에 그치지 않습니다. 파우치, 클러치 백, 인형, 팔찌, 열쇠고리 등도 방화복을 소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회사는 지금까지 방화복으로 만든 가방 등을 팔아서 얻은 수익금의 50%인 1500여만 원을 암 투병 소방관에 기부했습니다.

     

    이승우 119REO 대표가 이 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2017년 소방관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언론을 통해 접한 뒤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소방관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도울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소방관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재향소방동우회에서 김범석 소방관의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김범석 소방관은 2006년부터 8년 동안 수많은 현장을 누비며 350여 명의 생명을 구한 소방관인데 2014년 6월 혈관 육종암이라는 희귀 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질병과 직무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고 김 소방관의 아버지는 공무상 상해를 인정해달라고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대표는 암 투병 중인 소방관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돕겠다는 생각에 119REO를 만들었습니다. REO는 Rescue Each Other의 약자로 서로를 구하자는 뜻을 담았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한 방화복이 업사이클링으로 다시 태어나 정부 지원 밖에서 고통받는 소방관들을 돕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 ‘청년 소방관’ 오영환의 도전, “가장 절박한 사람이 정치해야”

    민주당이 ‘청년 소방관’ 오영환씨를 영입했습니다.

     

    오씨는 2010년 서울 광진소방서 119 구조대원으로 소방관 생활을 시작해 10년 가까이 구조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출동한 횟수만 2천 번이 넘는다고 합니다.

     

    구급대원으로 일했던 시절에는 심정지 등으로 거의 죽을 뻔한 이들을 응급처리로 살린 경우에 수여하는 ‘하트세이버’ 배지를 6차례나 받았습니다.

     

    소방관들의 현실과 처우 개선을 위한 행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소방관의 이야기를 담은 책 <어느 소방관의 기도>를 펴냈고 소방공무원 국가직화를 위한 광화문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암벽 여제’로 불리는 김자인 선수의 배우자로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고 JTBC의 길거리 강영 프로그램 ‘말하는대로’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오씨는 민주당 입당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치에 꼭 한 번 묻고 싶었다”며 “국민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예산을 포퓰리즘이라 비난하고 퍼주기라고 말하는 정치가 우리 국민의 안전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평생을 소방관으로 살고 싶었지만, 누군가 국민 생명과 안전에 관해 필요한 법과 제도, 예산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가장 절박하게 공감해 본 사람이 정치를 해야 더 절박하게 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민주당의 요청을 받아들인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소방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찰, 군인 등 현장에서 근무하는 제복 공무원들이 당당하고 마음껏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키우는 데 헌신한 부모님 같은 분들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어서 고교시절부터 소방관을 꿈꿨다고 합니다.

  • 이석로 방글라데시 꼬람똘라 병원장, 빈민촌서 25년 '인술'

    25년.

     

    이석로 방글라데시 꼬람똘라 병원장이 방글라데시에서 의료 봉사로 보낸 시간입니다.

     

    이 원장은 1994년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뒤 꼬람똘라병원 의사 모집 공고에 지원했습니다.

     

    그가 자원봉사를 신청한 이유는 군 면제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남대 83학번인 그는 키가 153cm로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면제 판정을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 같으면 인생에서 ‘3년을 벌었다’고 좋아했겠지만 이 원장은 다른 이들이 군 복무를 하는 기간 동안 봉사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처음 방글라데시로 떠날 때 딱 3년 동안만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해 18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떠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태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가 일하는 꼬람똘라 병원은 한국해외의료선교회인 콤스(KOMMS)가 1992년 설립한 병원입니다.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차로 2시간 걸리는 빈민촌에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건강보험이 없고 진료비는 비싸 가난한 사람들은 의료혜택을 거의 받지 못합니다. 병을 안고 살면서 키우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세워진 병원이라 꼬람똘라는 진료비의 1/10만 받습니다. 그 돈을 부담하기도 어려운 사람은 무료로 치료해줍니다. 하지만 치료를 위해 돈을 ‘강제로’ 맡아두기도 합니다.

     

    결핵 환자 치료가 그랬습니다. 결핵은 오랜 기간 약을 먹어야 완치가 되는데 이곳 환자들은 증세가 완화되면 병원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원장은 결핵 치료 환자에게 보증금으로 1000타카(약 1만4천 원)를 받았습니다. 대신 병이 다 나으면 돌려줬습니다.

     

    이 원장은 병원에 필요한 의료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급여도 대폭 삭감했습니다. 연봉이 3만 달러와 퇴직금 조로 쌓아두는 돈이 1만 달러였습니다. 하지만 이 원장은 2만 달러만 받겠다고 하고 나머지 돈으로 외과의사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 원장은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알고 2009년에는 백내장 수술에 특화된 안과도 개설했습니다. 2018년 한 해에만 1300여 명이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교육 기회를 얻기 어려운 여성을 위해 3년제 간호학교도 설립해 학생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고 있고 장학사업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 이 학교에서 100여 명의 간호사가 배출됐습니다.

     

    25년간 그가 쏟은 땀방울과 정성으로 현재 꼬람똘라 병원은 8개의 진료과와 50병상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해마다 8만 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원장은 고교 시절 공대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누나의 권유로 의대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대학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고민도 많았다고 합니다. 돈과 명예 대신 다른 길을 찾고자 했던 고민이 그를 방글라데시로 이끌었습니다.

     

    이 원장은 25년간의 봉사활동을 한 공로로 올해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아산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막노동으로 3남 2녀를 키운 부모님에게 늘 죄송하다는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상이 부모님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가난한 이를 치료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겉치레를 다 버리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소박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것이지요.

  • 마음으로 고친 병

    한때 신경성 위염으로 고생을 했었습니다. 입사 준비로 스트레스가 많을 때였습니다. 남들이 다들 가고 싶어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제 가치관에 맞는 곳에 다시 도전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던 회사는 2년 넘게 사람을 뽑지 않았습니다. 서른을 눈앞에 둔 때라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때는 많은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나이 제한을 뒀습니다. 대부분 만 30세로 지원제한을 뒀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속이 쓰리기 시작했습니다. 신트림이 나오고 위에 뜨끈뜨끈한 액체가 내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위 내시경을 하자고 하더군요. 난생 처음 위 내시경을 했습니다. 지금보다는 관이 굵어서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옆으로 누워서 연신 구역질을 하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인간으로서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시경을 다시는 한 적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신경성 위염이라면서 약을 처방해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약을 먹어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 김치를 물에 헹궈서 먹을 정도로 매운 반찬을  피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골라서 먹었지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취준생(취업준비생)으로 속병까지 난 제가 딱해 보였던지 친구들이 치료비로 쓰라며 20만 원을 보내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운 벗들입니다.

     

    그 돈을 들고 한의원을 찾았습니다. 한의사 선생님도 신경성 위염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다고 하자 그 한의사 선생님이 빙긋이 웃으며 다음과 같은 처방을 했습니다.

     

    “신경을 끊으면 낫습니다. 위가 좋지 않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세요”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지? 곰곰이 생각을 하다 한의사 선생님의 처방대로 위장에 신경을 쓰지 말아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껏 먹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 뒤로 더 이상 신경성 위염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야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면서 이해가 됐으나 당시에는 증세가 사라지니 내가 언제 신경을 썼었냐는 듯이 그저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 김치찌개 식당 사장이 된 신부님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님은 김치찌개 집 사장님입니다. 서울 성북구 정릉시장 안 건물 2층에 있는 ‘청년식당 문간’이 신부님의 식당입니다.

     

    2018년 5월 문을 연 ‘문간’은 시장통 안의 여느 식당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값싸고 맛있는 김치찌개로 유명합니다. 칼칼한 국물에 듬뿍 썰어 넣은 김치와 큼지막한 두부, 돼지고기, 햄, 떡국떡 등이 푸짐하게 들어 있는 정통 김치찌개가 ‘문간’의 대표 메뉴이지요.

     

    맛이 좋지만 김치찌개 값은 3000원에 불과합니다. 2016년 개업했을 때 가격 그대로입니다. 게다가 밥과 샐러드는 무제한으로 제공됩니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이면 이 식당은 자리가 꽉 찹니다. 하루 손님은 80~90명가량 된다고 합니다. 중고생과 대학생, 청년들이 절반 가까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일반인들도 찾아옵니다.

     

    올해로 사제 생활 20년째인 이 신부가 식당을 연 이유는 인천에 있는 한 수녀원을 찾았을 때 그곳에 있던 수녀로부터 한 청년이 고시원에서 굶어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서였습니다. 

     

    당시 이 신부가 속한 글라렛 선교 수도회에서 청년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청년들을 위한 식당을 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도회에 제안했고 승낙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가 2016년 3월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당 운영에는 문외한이라 이 신부는 오랜 ‘스터디’를 통해 ‘창업’을 준비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많은 조언을 듣고 꼼꼼히 준비했습니다. 식당 운영 경험은 물론 청년들을 이해하기 위해 관련 활동을 하는 이들도 만났습니다.

     

    지속 가능한 식당을 만들기 위한 방안도 고민했습니다. 김치찌개 값을 3000원으로 정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월세, 요리사 인건비, 재료비 등을 따져보니 지속 가능하려면 최소한 3000원은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하루 운영비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기부받은 식재료로 메우고 있습니다.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것이 어떠냐는 조언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무료급식소에 자주 가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밥값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 신부 자신도 “고민과 불안함과 실패와 좌절 같은 그런 것들을 안고 경험하고 지냈던 시기가 있었다"라고 합니다. 그는 서울 명문대 공대에 들어갔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편의점에서 끼니를 주로 때워야 했습니다. 

     

    그때 이 신부는 대기업에 취직해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96년 겨울방학 때 피정에서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걸 깨닫고 사제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합니다. 피정은 가톨릭 신자들이 일정 기간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에서 묵상과 자기 성찰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신부는 몇 가지 꿈이 있습니다. 요리 실력을 쌓아 주방에 ‘진입’하는 것이고 ‘문간’ 같은 식당을 체인점으로 늘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청년들이 문간에서 힘을 얻고 갔으면 좋겠다. 본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신부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하느님, 이 식당에 (배고픈) 청년들을 보내주십시오. 그들을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매 순간 기도한다고 합니다. 테이블을 닦으면서, 음식을 나르면서도 그의 이 신부의 기도는 이어집니다.

    

  • 불교의 간화선

    한국불교의 주류는 선종입니다. 이는 수행법으로 참선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은 간화선을 정통 수행법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이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돼 가섭존자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뒤 달마대사에 의해 중국으로 건너갔고 조계종이 그 맥을 이었다고 합니다.

     

    조계종이라는 이름도 간화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조계’라는 이름은 간화선 수행의 중심이었던 중국 조계산에서 따왔습니다.

     

    조계산은 달마대사의 법맥을 이은 육조 혜능 대사가 주석하며 제자들을 기르던 곳입니다. 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의 초조(初祖)로 추앙받는 달마 대사의 법맥이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간화선은 간단하지만 간단치 않은 수행법입니다. 방법은 말 그대로 화두를 보는 것입니다. 화두를 본다는 것을 대개 화두를 든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간화선을 화두선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렇다면 화두(話頭)란 무엇일까요? 우리말로 풀이하면 말 머리라는 뜻입니다. 화두는 거칠지만 간단히 말하면 참선, 즉 명상을 할 때 잡념에 빠지지 않고 집중을 하도록 해주는 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두에는 종류가 많습니다.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대략 1700여 가지가 된다고 합니다.

     

    명상을 할 때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쓰는 도구는 많습니다. 하지만 화두는 아주 독특한 도구입니다. 화두를 드는 사람에게 의문을 갖게 해서 그 의문에 집중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화두를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말이되 말이 아닌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화두는 ‘이뭣고’ 입니다. 중국어로는 시심마(是甚麼)라고 합니다. 일생을 간화선 보급에 매진하고 있는 인천 용화선원의 송담 스님이 주로 권하는 화두가 이뭣고입니다. 송담 스님은 이뭣고 화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놈,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놈, 욕하면 성낼 줄 아는 놈,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놈, 눈으로 보면은 저것이 꽃이다 새다 나비다 아는 놈, 귀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알고, 혀로 맛볼 줄 알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알고, 그러할 줄 아는 놈이 다 사람마다 다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주인공인데, 그 놈을 찾는 것입니다. 그 주인공이 분명히 이 몸뚱이에 따악 주재하고 있으면서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들을 줄도 알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모든 육체적인 작용, 정신적인 작용을 하는, 차로 말하면은 운전사와 같은 그러한 주인공이 있는데,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고로 시작해 나중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 놈이 뭣고 이렇게 바로 그 이뭣고 하는 그 놈을 다시 되돌려 찾는 것입니다."

     

    화두선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처음 시작하는 분들은 호흡과 함께 화두를 드는 방법을 많이 씁니다. 이 하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뭣고 하면서 숨을 내뱉는 것입니다. 화두를 꾸준히 들다 보면 나중에는 멈춰 있을 때나 움직일 때 심지어 잘 때도 이뭣고 라는 화두가 끊기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이뭣고 외에 유명한 화두는 무자 화두입니다. 무자 화두는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질문한 데 서 나왔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개도 불성이 있느냐고 묻자 조주 선사는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 스님은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습니까?"라고 되물었고 조주 선사는 "다만 업식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 대화에 들어 있는 의문에 집중하는 게 무자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유명한 화두인 뜰 앞의 잣나무(庭前 栢樹子)도 조주 선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조주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사는 중국에 선을 전한 달마 대사를 뜻합니다. 이 또한 화두를 드는 사람에게 의문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還我本來面目)이라는 화두도 유명합니다. 부모조차 태어나기 이전에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의문을 갖도록 하는 게 이 화두입니다.

     

    화두선을 가르치는 선사들은 수행자가 화두를 들고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선사들은 화두를 들기 위해 세 가지의 마음을 갖추라고 합니다.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그것입니다. 이를 간화선의 삼요(三要)라고 부릅니다.

     

    대신심은 화두 공부를 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공부를 해나가겠다는 자세를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대신심은 자신은 물론 일체중생이 본래 성불해 있다고 믿는 것도 포함합니다. 삼라만상 안에 똑같이 불성이 깃들여 있다는 믿음입니다. 

     

    대분심은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고 불퇴전의 의지를 다지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물론이고 과거의 많은 조사들과 선승들이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고 대자유인이 되었는데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자기반성에서 시작해 반드시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 분발하겠다는 뜻을 확고히 세우는 것입니다.

     

    대의심은 화두를 철두철미하게 의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이 화두를 통해 깨달음의 길을 밝혀주셨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간절하게 의심하는 것입니다. 크게 의심을 하게 되면 생각으로 의심을 갖는 게 아니라 저절로 의심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의심을 의단이라고도 합니다. 

  • 마음이 물질임을 깨달은 순간

    20년쯤 전입니다. 한 수련단체에 다니며 몸과 마음을 닦아 나갈 때였습니다.

     

    일 때문에 어떤 분의 장례식을 멀리서 지켜보게 됐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알기는 했으나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게 저라는 사람은 그저 일로써 아주 가끔 만나야 하는 수십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분이 일했던 공공기관의 앞마당에서 장례식이 진행됐습니다. 저는 한 100미터 가까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멀리 서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장례식장 한가운데서부터 파문이 생겨 주위로 퍼져나갔습니다. 물 위에 돌을 던졌을 때의 파문처럼 말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파문은 점점 커져 제가 서 있는 곳까지 다다랐습니다. 더 놀란 일은 그 파문이 저를 스치고 지나가자 제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 겁니다. 어떤 슬픈 감정도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자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뒤로 오랜 시간 그 일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본 것이 무엇일까. 그게 본 것일까 아니면 느낀 것일까. 저는 유족들의 슬픔이라는 마음이 물질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마음이 물질이라는 걸 체험한 순간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세상을 향해 사랑과 축복의 에너지를 보낼 때면 제가 만들어낸 물질적 에너지가 전달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신비하고 놀라운 일 아닌가요?

    

  • 교황, 가톨릭 교리에 ‘생태에 대한 죄악’ 포함 검토

    프란치스코 교황 [이미지 : 바티칸 뉴스 유튜브 캡쳐]

    프란치스코 교황이 환경을 파괴하거나 보호하지 않는 행위를 ‘생태에 대한 죄악’으로 가톨릭 교리에 담는 것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바티칸뉴스, 라이프사이트뉴스 등에 따르면 교황은 15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형법학회(AIDP) 총회에서 “우리 모두의 집인 생태계가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에 생태계의 보호에 반하는 행동을 ‘생태에 대한 죄악’으로 규정해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도입해야 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지난달 열린 아마존 주교 시노드의 제안에 따른 것입니다. 시노드란 교회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회의를 뜻합니다.

     

    아마존 시노드에서 발표한 문서에는 ‘생태에 대한 죄악’을 하느님과 미래 세대에 대한 죄로 정의했다고 교황은 전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연설에서 공기, 토양, 수질 등의 대규모 오염을 초래하거나 동식물 군의 대규모 파괴 등 생태적 재앙을 일으키거나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는 행동은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교황은 이날 행사에 참석한 형법 전문가들에게 전쟁이나 오염을 통한 의도적인 생태계 파괴 행위를 ‘평화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형법 전문가들에게 지구를 보호할 수 있는 적절한 법적 보호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 이영표 전 국가대표 선수가 양말 사업을 하는 이유

     스타트업 기업인 '삭스 업(Socks up)'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이영표 전 국가대표 선수 [이미지 : 꿈 스페인 유튜브 캡쳐]

    이영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가운데 한 명입니다. ‘헛다리짚기’ 드리블로 전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요.

     

    그 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독일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 캐나다 밴쿠버 화이트캡스 등 세계 유명 축구 클럽에서 활약했습니다.

     

    은퇴한 뒤에는 KBS 축구 해설위원으로 경기 결과를 족집게처럼 맞히는 ‘예언’으로 시청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축구가 삶 그 자체였던 이영표 씨는 지금 전혀 낯선 분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의 일터는 하는 곳은 사회적 기업들의 성지인 서울 성수동 소셜 벤처 빌딩입니다. 스타트업인 ‘삭스 업(Socks up)’의 대표가 그의 직함입니다. 삭스 업은 양말이나 풋 크림과 같은 풋 웨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삭스 업’은 축구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넘어졌다 일어날 때 혹은 프리 킥이나 코너킥을 차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양말을 끌어올리는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이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이들을 돕고 ‘삭스 업’ 시키고 싶었는데 기부를 받아서 하는 것은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삭스 업은 홈페이지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양말을 끌어올리게 되는 인생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이 순간들을 ‘SOCKSUP MOMENT’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SOCKSUP MOMENT는 당신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순간일 수도 있고,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묻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삭스 업 모멘트는 언제인가요? 누군가의 SOCKSUP MOMENT를 한 켤레의 양말로 구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단순한 양말 한 켤레를 넘어, 여러분의 일상 속 크고 작은 ‘순간’들을 일깨워주는 작은 상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의 글처럼 삭스 업은 누군가의 스토리를 한 켤레의 양말로 만들어 그 양말을 신는 사람에게 힘과 위안을 주고 한 사람의 SOCKSUP MOMENT가 다른 사람의 SOCKSUP MOMENT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탄생한 상품이 유명 힙합 아티스트 코드쿤스트의 편지로 디자인한 양말입니다.

     

    코드쿤스트는 무명 시절 자신을 알리고 싶어 미국의 유명 래퍼인 조이 베데스에게 메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당연히 답장이 없었지요.

     

    그는 실망하지 않고 베데스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등 주변 인물들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편지를 읽은 매니저가 그의 음악을 베데스에게 들려줬고 그는 코드쿤스트를 당장 로스앤젤레스로 초청했습니다. 그렇게 코드쿤스트는 유명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삭스 업은 코드쿤스트가 베데스에게 보낸 편지로 디자인 한 양말을 만들었습니다.

     

    [[IMAGE|638|center|삭스업에서 제작한 코드쿤스트가 베데스에게 보낸 편지로 디자인한 양말 [이미지 : 삭스업 홈페이지] ]]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올라 있는 ‘SOCKSUP MOMENT - Footprint Project VOL1’은 누군가에게 SOCKSUP MOMENT를 주기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사는 17세 소년 사킬레 미콴다입니다. 그는 축구가 자신의 인생이라고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고 프로 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년입니다.

     

    그가 사는 우스터는 케이프타운에서 동쪽으로 130km 떨어진 작고 가난한 마을입니다. 우스터는 꿈도 희망도 없이 깡패가 되거나 마약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서 프로 입단 테스트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삭스 업에 100통 가까운 편지를 보냈습니다.

     

    2018년 5월 삭스 업은 그를 초청해 테스트 기회를 줬습니다. 안타깝게도 불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미콴다의 표정은 밝았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회가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는 억울함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미콴다는 자신도 남에게 기회를 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고 합니다.

     

    이 대표는 독실한 기독교 인으로 다른 이들을 돕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는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인 컴패션의 한국 홍보대사도 맡고 있습니다. 컴패션은 1952년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한국의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만든 국제기구입니다. 그 자신도 여섯 가정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에 삭스 업을 시작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건 여러 가지가 있어요. 먹고, 자고, 입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어요. 사람은 영적 존재니까 희망이 있어야 해요. 먹는 것은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만,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희망이에요. 저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절망에 빠진 누군가,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삭스업 무브먼트’의 기본 취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