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ALL : 생각

Contents List 3

  • 가슴이 먹먹해지는 초등학생의 시

    한 초등학생이 쓴 시가 읽을 때마다 큰 울림을 줍니다. 

    부안여중에 다니는 이슬(14)양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며 ‘가장 받고 싶은 상’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2016년 전라북도 교육청 공모전에서 동시 부문 최우수상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받고 싶은 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짜증 섞인 투정에도

    어김없이 차려지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상

     

    하루에 세 번이나

    받을 수 있는 상

    아침상 점심상 저녁상

     

    받아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해도

    되는 그런 상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못 보았을까?

    그 상을 내시던

    주름진 엄마의 손을

     

    그때는 왜 잡아주지 못했을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을까?

     

    그동안 숨겨놨던 말

    이제는 받지 못할 상

    앞에 앉아 홀로

    되뇌어 봅시다.

    "엄마, 사랑해..."

    "엄마, 고마웠어요"

    "엄마, 편히 쉬세요"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엄마상

    이제 받을 수 없어요.

     

    이제 제가 엄마에게 

    상을 차려 드릴게.

    엄마가 좋아했던

    반찬들로만

    한가득 담을게요.

     

    하지만 아직도 그리운

    엄마의 밥상

    이제 다시 못 받을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울 엄마 얼굴(상)
     

  • 기독교 성자 썬다 싱(4) - 신비체험을 남기고 사라지다

    썬다 싱은 22세인 1911년부터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합니다.

     

    기독교 전통이 거의 없는 인도와 티베트에서 썬다 싱의 전도 활동은 쉽지 않았습니다. 복장을 보고 사두로 여겨 존경을 표하던 사람들도 그가 기독교인임을 알고 나면 외면했습니다. 

     

    굶주림이 일상이었습니다. 추위에 몸이 얼고 더위에 지쳐 주저 앉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썬다 싱은 인도 대륙을 횡단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박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경찰이 그를 감옥에 가둔 채 거머리 때를 풀어 놓기도 했고, 시체가 썪고 있는 우물에 던져져서 팔이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썬다 싱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발길은 티베트로도 향했습니다. 서른살이 될 때까지 티베트 방문을 위해 열 번이나 히말라야를 넘었습니다. 

     

    썬다 싱은 기독교의 본고장이던 서구 여러 나라에도 전도를 위해 방문했습니다. 1920년과 1922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아일랜드,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을 다니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썬다 싱은 기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기도 중에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체험도 했다고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썬다 싱이 경험한 상태를 입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썬다 싱이 신비현상을 체험한 것은 1922년 티베트에 가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눈으로 길이 막혀 꼼짝 못하게 되어 기도를 하던 중 자신이 천사들 무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자신이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에 온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썬다 싱은 이를 시작으로 이런 신비 체험을 자주 하게 됐습니다. 

     

    썬다 싱은 영안으로 보이는 존재에게 궁금한 점을 묻기도 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며 영혼은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썬다 싱이 영안으로 본 존재들로부터 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죽음은 잠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질병이 없다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오는 데 아무런 고통도 없습니다. 마치 몹시 피곤한 사람이 깊이 잠드는 것처럼 인간은 죽음이라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죽음은 너무나 뜻밖에 찾아오기 때문에 죽은 이들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들어간 것을 알아채기조차 힘듭니다. 그들은 충분히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이 육체가 아니라 영체이며 자신이 물질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옮겨온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죽을 때 무지각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죽은 뒤에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사납고 무서운 악마들의 얼굴을 보고 말도 못하고 공포에 떨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이들의 죽음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을 맞으려고 오는 천사들과 거룩한 영들을 보고 극도의 행복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때 먼저 죽은 사람들도 그를 영계로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썬다 싱은 1924년 또 다시 티베트로 향했으나 얼마가지 못해 돌아오게 됩니다.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영양실조 상태였고 폐결핵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2년 동안의 서구 전도 여행으로 피로도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의사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썬다 싱은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몸을 추스리면서 글과 편지를 통해 전도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28년 썬다 싱은 다시 티베트로 향합니다. 하지만 며칠 뒤 길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다 상인들에 구출돼 돌아옵니다.

      

    이듬해인 1929년 그는 다시 티베트에 가겠다면서 길을 나섭니다. 그 뒤로 썬다 싱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으러 나섰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썬다 싱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1)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2)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3)

  • 과일 장사 노 부부 전 재산 400억 원 기부

    노 부부가 한평생 모은 전 재산 400억 원을 대학교에 기부했습니다.

     

    김영석(91) 할아버지와 양영애(83) 할머니 부부는 과일 장사로 시작해 모은 돈 400억 원을 맏아들이 졸업한 고려대학교에 모두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200억원 상당의 서울 청량리 소재 토지 5필지와 건물 4동을 우선 내놓고, 앞으로 200억원 상당의 토지 6필지와 건물 4동을 추가로 기부한다고 합니다. 

     

    실향민인 김영성 할아버지는 강원도 평강군 남면이 고향인데 15살에 부모를 여의었다고 합니다. 17살 때 월남해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고 양 할머니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두 분은 식모살이, 식당일 등을 하다 1960년대에 서울 종로5가에서 리어카에 과일을 놓고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푼 두 푼 돈을 모았습니다. 

     

    전차를 탈 수 있었지만 50전 하던 차비가 아까워 매일 새벽에 뛰어 다녔다고 합니다. 된장과 보리밥만 15년을 먹었습니다. 

     

    부부는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으로 몇 년 뒤에 가게를 냈습니다. 

     

    장사 규모가 커지고 종잣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대출을 받아 1976년 청량리에 상가 건물을 샀고, 이후 빌린 돈을 갚아나가면서 주변 건물 몇 채를 더 샀다고 합니다. 

     

    두 분에게는 아들 둘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 모두 미국에 이민가서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식보다는 좋은 곳에 모은 재산을 쓰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처럼 형편이 어려워 배우지 못하는 학생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양영애 할머니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열심히 벌어서 형편이 되면, 쓰고 남은 돈은 기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기부하기 전엔 기부가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 ‘카페 교회’ 운영하는 목사님

    서울 상일동 주택가 골목에는 에클레시아라는 작은 카페가 있습니다.

     

    이 카페의 주인이자 바리스타이며 유일한 직원은 양광모 목사님(바로세움정립교회) 입니다.

     

    양 목사님은 일주일에 6일은 카페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미사리의 공장 건물 2층에 있는 15평 남짓한 예배당에서 20여 명의 교인들과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어로 ‘밖으로 불러 모으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교회를 가리킬 때 씁니다.

     

    양 목사님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분입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양 목사님의 목회 생활은 순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서울 이문동 동안교회와 지구촌교회 수석 무목사를 거쳐 교인수 1000명이 넘는 정릉제일교회 담임목사를 맡았습니다. ‘잘 나가는 목사’라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양 목사님은 늘 괴로웠습니다.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교회에 손가락질하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자체가 불신받고 있었습니다.

     

    양 목사님은 2012년 부임 2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내려놨습니다. 대안이 될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를 찾아가는 5년의 여정을 담은 책 ‘고백 에클라시아’(선율 펴냄)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떠오르는 행복의 시작이었지만 위기의 현실을 극복하고 어두운 미랠르 밝게 비출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

     

    올바른 목회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고 영성을 고양시켰습니다.

     

    양 목사님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건강한 교회”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서점 겸 카페의 형태로 출발한 미국의 세이비어 교회를 모델로 삼아 카페 교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2012년 카페 에클레시아의 문을 열었고 같은 해 바로세움정립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들른 사람 가운데 바리스타인 목회자의 말 한 마디가 필요한 이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페 운영을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과 커피 품질 평가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목회자 이기 전에 자영업자로 시장 조사와 매장 운영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2012년 문을 연 카페의 운영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수입은 카페를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해 결국 택시 운전대를 잡는 ‘투잡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는 자신이 섬겼던 교회의 교인을 만날까 노심초사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목사와 택시운전사를 대하는 것은 너무도 다름을 뼈저리게 느꼈겠지요.

     

    양 목사님은 택시 운전을 통해 모든 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섬기는 법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또 낮췄을 것입니다.

     

    2년 쯤 시간이 지나자 카페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페운영을 하면서도 당연히 주일 예배는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은 불교신자인 한 단골손님의 도움으로 2015년에 마련했습니다. 

    그 손님이 자신이 운영하는 미사리 식품공장 건물 2층에 15평 짜리 예배당을 마련해준 겁니다. 

     

    가수 노영심씨는 카페 에클레시아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저에게 카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공간입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여전히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제게 하나님과의 끈만은 놓지 않게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표현도 못하고 말도 예쁘게 하지 못하고 투정만 부리는 저지만, 마음속에 목사님과 사모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항상 느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버티며 이겨 내고 있습니다. - 단톡방 에클레시아 멤버 노영심." (<고백 에클레시아>, 37쪽)

  • 지혜로운 딸이 부자 아빠를 가르치다

    부와 가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국 출신의 명상가인 제이 셰티가 올린 동영상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어느날 한 부자가 어린 딸을 자그마한 외딴 마을에 데리고 갔습니다. 

     

    딸이 가난을 겪어보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라서였습니다. 가난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마음먹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겠지요.

     

    부자 아빠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한 그 마을의 작은 농장에서 딸과 함께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들을 도우려 노력하면서 말이죠.

     

    돌아오는 길에 아빠가 딸에게 물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보거나 배운 게 있니?”

     

    딸은 “아주 굉장한 여행이었어.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라고 답했습니다.

     

    아빠가 다시 딸에게 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 알았지?”

     

    그러자 딸은 “그럼”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자 아빠는 자신이 기획한 여행이 딸에게 삶에 필요한 큰 교훈을 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이번 여행을 통해 배운 게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개 한마리를 키우는데 그들은 네 마리를 키워. 

     

    우리는 마당 한가운데 풀장이 있는데 그 분들은 끝이 없어 보이는 호수를 갖고 있어. 

     

    우리는 정원을 밝히기 위해 조명을 설치했지만 그 가족은 별빛을 조명삼아 지내. 

     

    우리집 창문에서 보면 빌딩만 보이지만 그집에서는 멋진 일몰을 볼 수 있었지. 

     

    우리는 음식을 사먹지만 그분들은 자신들이 먹을 것을 직접 길러.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담장을 세웠지만 그분들은 언제든지 자신들을 도울 친구와 마을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아.”

     

    부자 아빠는 할말이 없었습니다.

    딸이 아빠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아빠,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지를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
     

  • 20대 건축학도가 개발한 재활용 텐트

    여러 날 동안 열리는 축제에서 많은 이들이 팝업텐트를 치고 잡니다.

     

    축제가 끝난 뒤에는 상당수 텐트가 그대로 버려집니다. 1년 동안 이렇게 버려지는 텐트가 1천만 개가 넘는다고도 합니다.

     

    절친인 네덜란드의 두 건축학도 얀 포르테인(Jan Portheine)과 우트 코머(Wout Kommer)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를 다니던 두 사람은 졸업작품으로 바닷가에 골판지를 소재로 오두막집을 지었는데 우연히 축제 때 많은 텐트가 버려지는 것을 보고 골판지로 텐트를 만들기로 했다고 합니다.

     

    골판지 텐트 회사 회사 카텐트(Kar Tent)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이 만든 골판지 텐트는 화학소재를 쓴 텐트 못지않게 튼튼합니다. 400Kg의 무게를 견딜 수 있습니다. 비가 와도 문제가 없습니다. 코팅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코팅에는 화학물질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3년 가까이 연구해 방법을 찾았습니다. 일반 골판지보다 밀도가 높고 두 배 가까이 두꺼운 골판지를 써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카텐트는 자체 중량의 4배가 넘는 물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골판지 텐트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설치가 간편합니다. 몇 분 안에 텐트를 칠 수 있습니다. 

     

    두꺼운 천정과 벽은 뜨거운 햇빛을 차단해 일반 텐트보다 실내가 훨씬 더 시원합니다. 골판지는 빛을 통과시키지 않기 때문에 낮에도 푹 잘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진 카텐트는 책이나 포장 상자로 재활용될 수 있습니다

     

    텐트는 처음 삼각형 모양에서 현재 오각형으로 진화했습니다.

     

    텐트 하나 가격은 49.95 유로, 우리 돈으로 6만 5천 원 정도입니다.

     

    행사를 후원하는 기업들은 골판지 위에 회사 로고를 적어 마케팅을 하고 참가자들은 그림, 글씨, 디자인 등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만의 텐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카텐트는 현재 유럽 85개 축제에 공급되고 있습니다.

     

    2015년 네덜란드의 한 음악축제에서 처음 선을 보인 골판지 텐트는 지난해에만 6만 개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카텐트는 지난해 세계적 디자인 상인 레드닷 어워드(RedDot Award)를 받기도 했습니다.

     

    설립자인 얀 포르테인은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올바른 생각을 갖고 올바른 일을 하려 한다면 당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 기독교 성자 썬다 싱(2) - 성자 마하리쉬 만나다

    예수님의 현현은 썬다 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습니다. 썬다 싱은 그 순간부터 평생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시크교도인 아버지와 가족 친지들은 썬다 싱의 그런 변신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해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은 썬다 싱에게 싸준 점심밥에 독약을 넣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썬다 싱은 성공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 일을 도우며 틈날 때마다 고요히 묵상을 했습니다.

     

    그렇게 33일이 지난 뒤 썬다 싱은 사두로서 길을 나섰습니다. 사두는 인도에서 집을 떠나 길에서 생활하는 수행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듬해 썬다 싱은 코드갈이라는 곳에서 스토크스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청빈한 삶을 살고자 인도에 온 사람이었습니다. 썬다 싱은 그와 2년 동안 동행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가르침을 알게 됐고 이를 통해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습니다.

     

    썬다 싱은 전도 여행 중에 귀한 만남을 가집니다. 그가 힌두신들이 자주 나타난다고 알려진 성산 카일라스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돌십자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힌두교의 성산에 십자가라니.

     

    그는 십자가의 ‘주인'을 찾아 주변을 다니다 몸의 균형을 잃고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지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얼마를 지났을까 의식을 되찾고 보니 큰 동굴 입구에 백발로 전신이 뒤덮인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노인의 모습은 기괴했습니다. 머리카락과 수염과 눈썹이 길게 자라 온몸과 얼굴을 덮고 있어서 얼핏 봐서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야생 곰이나 전설의 히말라야 설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마하리쉬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성자는 당시 자신의 나이를 318세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원래 이슬람교도였으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수회 신부인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조카  제르나우스자비에르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첫 만남에서 그는 썬다 싱에게 함께 기도하자면서 자비에르가 줬다는 양피지 신약성경을 꺼내더니 썬다 싱에게 산상수훈을 읽어줬습니다. 마하리쉬는 이 양피지 성경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썬다 싱에게 선물로 줍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하리쉬는 그동안 썬다 싱이 겪은 일들을 직접 본 듯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표범과 함께 밤을 지낸 일, 산길에서 굴러떨어진 일 등등.

     

    마하리쉬는 썬다 싱에게 천국과 지옥, 삶과 죽음, 죽음 뒤의 세계 등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썬다 싱은 마하리쉬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웠고 텅 빈 마음에 사랑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베푸는 일에는 머뭇거림이 없었습니다.

     

    썬다 싱이 열 번째 히말라야를 넘을 때였습니다. 티베트 사람 한 명과 길을 가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폭설로 산길이 모두 막힌 데다 눈보라가 쳤습니다.

     

    두 사람은 길을 가다 눈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사람은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썬다 싱은 그 사람을 업고 가자고 했지만 동행인은 그러다가 우리도 함께 죽는다며 혼자 길을 재촉했습니다.

     

    썬다 싱은 그 사람을 들쳐 업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길을 헤쳐나갔습니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몇 시간을 지났을까 길에서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봤습니다. 얼어 죽은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함께 길을 갔던 티베트 사람이었습니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사람을 업은 썬다 싱은 힘이 들어 몸에 열이 났고 그 열기가 얼어서 죽어가던 사람에게 전달되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썬다 싱도 힘은 들었지만 몸에서 나온 뜨거운 열기로 히말라야의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이지요.(계속)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1)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3)

  • 요셉의원, 큰 병원보다 더 큰 병원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서울 영등포역 근처 쪽방촌 한가운데 자리한 요셉의원은 성경 말씀처럼 ‘지극히 작은 자들’을 무료 진료하는 곳입니다.


    병원에는 하루에 1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옵니다.


    대부분 노숙인이나 행려병자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감기약 한번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진료받을 곳이 없어 병을 키우기 일쑤인 외국인 노동자들도 이곳을 찾습니다.


    병원 운영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듭니다. 서울카톨릭사회복지회 부설인 요셉의원은 의료인 외에 후원자와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단식하며 하루에 500원씩 모은 돈을 보내주는 버스 기사, 후원금을 내기 위해 미국에서 온 본, 시주 받으러 왔다가 후원금을 내도 간 스님까지 많은 분들이 요셉의원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는 분들은 몸이 병들었지만 마음이 더 아픈 분들이 많습니다.


    의사나 간호사는 물론 자원봉사자들은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데 더욱 신경을 씁니다.


    한 목욕 봉사자는 악취가 진동하는 환자의 발에 입을 맞추고 온몸을 깨끗이 씻기고 닦았다고 합니다. 세상 누구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 자신의 발에 따듯한 입술이 닿았을 때 그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IMAGE|174|center|caption]]

     

    요셉의원은 2008년 세상을 떠난 고 선우경식 박사가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 1987년 세운 무료병원입니다.


    1969년 가톨릭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킹스브룩 주이스 메디컬 센터에서 내과학을 전공한 선우 박사는 귀국한 뒤 한림대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1983년부터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진료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7년 선우 박사는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아예 병원을 세웠습니다. 요셉의원의 시작입니다. 개원 첫 달 1000만 원의 적자가 날 정도로 병원 운영이 어려웠지만 선우 박사는 직접 나서서 쌀을 얻어오고 의약품을 기부받았습니다.


    선우 박사가 요셉의원을 만든 것은 처음 의학을 공부할 때 사람을 살리는 데 의술을 쓰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한 알입니다.


    퇴근길에 길가에 쓰러진 환자를 데리고 가 치료하면 그렇게 마음을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선우 박사에게 어느 날 병마가 찾아옵니다. 2006년 위암 수술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병원을 찾았던 그는 2008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영등포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선우경식 박사의 뒤를 이은 사람은 신완식 박사입니다.


    감염내과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가톨릭의대 교수였던 신 박사는 여의도성모병원 내과 과장으로 ‘잘 나가던’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신 박사는 2009년 정년을 6년 앞두고 월급 한 푼 없는 요셉의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전문의가 됐을 때 개업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힘들게 공부했으니 세상과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라고 몇 번을 당부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그때 다시 생각났다고 합니다.


    신 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요셉의원에서 가슴으로 웃는 법을 알았고 세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찾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요셉의원에서 참 행복을 찾은 이들이 많습니다. 600여 명의 자원봉사자와 1만 1000여 명의 후원자들이 그들입니다.


    한 여중생은 요셉의원 소식지에 쓴 글에서 “커다란 병원보다 더 큰 병원”이라고 적었습니다.


    요셉의원 홈페이지에 원장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습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라”

  • 행복의 문이 닫혀도, 다른 문들이 열립니다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들이 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닫힌 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우리를 위해 열린 문을

    보지 못합니다.

     

                             - 헬렌 켈러 -

  • 기독교 성자 썬다 싱(1) - 예수님의 현현

    이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 없는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썬다 싱은 인도와 티벳 등지에서 복음을 전한 기독교의 성인입니다.

     

    썬다 싱은 예수님이 전한 가르침이 빛을 잃고 많은 교회와 성직자가 제국주의의 조력자로 전락한 시절에 말씀만을 가슴에 품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인도의 사두(수행자)처럼 머리에는 터빈을 쓰고 몸에는 누런 가사를 걸치고 맨발로 걸식하며 인도 전역과 티베트에서 복음을 전한 그가 한평생 의지한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었습니다.

     

    썬다 싱은 1889년 인도 북부 펀잡주 람풀에 있는 부유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시크교도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집안을 돌보고 자녀를 키우는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썬다 싱은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학교는 바로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를 존경했습니다.

     

    종교적 분위기가 충만한 가정에서 썬다 싱은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사원에 다니며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를 외웠으며 베다를 익혔습니다. 요가도 배우고 이슬람 경전인 꾸란도 읽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영국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면서 성경도 접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썬다 싱이 14살 이 되었을 때 그의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썬다 싱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경험한 어떤 종교도 위로가 되지 않자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학교에 다니던 썬다 싱은 믿음을 강조하는 학교와 교사들이 싫어졌고 성서읽기를 거부하고 수업에도 빠지는 등 ‘문제 학생’이 됐습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공립학교로 전학시켰지만 그는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했습니다. 전도를 하던 이들에게 돌이나 오물을 던지기도 하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가량 살던 썬다 싱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고 하늘을 향해 마지막 기도를 시작합니다. “신이 계시다면 나타나 바른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아니면 저는 첫 열차가 지나갈 때 레일 위에 누워 자살할 것입니다.”

     

    썬다 싱은 죽을 결심을 하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죽음의 시간이 조금씩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고 첫 열차가 오면 그는 세상을 떠날 것이었습니다.

     

    새벽 4시쯤 됐을 때 갑자기 방안이 눈부신 빛으로 가득찼습니다. 썬다 싱은 처음에 불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빛나는 광채 속에서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썬다 싱은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마음은 환희심으로 가득찼고 평화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얼마나 엎드려 있었을까 썬다 싱은 고개를 들었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계속)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