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ALL :

Contents List 3

  • 아침이면 동이 나는 빵집의 비밀

    미국 캘리포니아 실 비치(Seal Beach)에는 오전 10시도 되기 전에 그날 만든 도넛이 다 팔리는 가게가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8시도 되기 전에 도넛이 동이 납니다. 

    도넛 시티라는 이름의 이 가게는 1979년 캄보디아에서 이민 온 존 찬(Chhan)과 스텔라 찬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데 28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문을 열었을 정도로 성실한 운영으로 동네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가게의 도넛 매진 사태는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이 이뤄낸 작은 기적입니다. 

     

    도넛 시티의 단골인 돈 카비올라는 어느 날 가게를 들었다가 스텔라가 자리에 없자 존에게 물었습니다. 

     

    “아내분은 안 보이시네요?” 

     

    존은 아내가 뇌동맥류로 쓰러져 요양원에 입원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온몸이 마비됐다는 겁니다. 

     

    스텔라는 9월 22일있었던 결혼식에 참석했다 어지럼증과 방향감 상실을 호소했고, 병원에서 뇌동맥류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스텔라는 한동안 의식이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2주가 지나서야 의식을 찾았고 말문이 트였다고 합니다. 

     

    존은 아내의 재활을 돕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없었지요. 

     

    카비올라는 도넛 가게에 다녀온 뒤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이 계속 생각났다고 합니다. 

     

    “맞아. 우리가 도넛과 빵을 일찍 다 사주면 존이 아내 곁을 지키게 도와줄 수 있잖아.” 

     

    카비올라는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 존과 스텔라의 사연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부의 사연을 알게 된 동네 주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도넛 시티를 찾았습니다.  

     

    평소 새벽 4시 30분에 일을 시작해 오후 3시까지 가게 문을 열었던 존은 9시에서 10시면 도넛과 빵을 다 팔고 아내에게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빵이 일찍 다 팔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존은 이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많은 이웃이 찾아와 빵을 서너 박스씩 사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수험생 울린 엄마의 ‘통장편지’

    어머니가 딸에게 쓴 통장편지 일부. 이미지 출처 : 트위터

    한 어머니가 수험생 딸에게 쓴 ‘통장편지’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습니다. 

     

    최근 수능을 치른 한 학생은 자신의 트위터에 어머니로부터 선물로 받은 통장을 찍어 올렸습니다. 

     

    학생의 어머니는 수능 100일 전부터 1만 원씩 저축하면서 최대 7자까지 적을 수 있는 입금 메시지에 4~7자씩 글을 적어 ‘통장편지’를 완성했습니다.  

     

    선물을 받은 학생은 트위터에 “엄마가 수능 100일 때부터 1만 원씩 모아서 통장을 만들어 줬다”면서 “읽다가 눈물 펑펑 쏟았다”라고 적었습니다.  

     

     

     

    다음은 ‘통장편지’의 내용입니다. 

     

     

     

    수능 백일 파이팅. 수능 끝나고 놀아. 너는 빛나는 존재. 사랑스러운 우리 딸, 네가 선택하는 그 모든 것들이 너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그리고 행복한 너의 삶을 스스로 가꾸어 나가길 바란다.  

     

    그러니 수능이 끝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를 꼭 안고 토닥거리며. 그동안 고생했다. 괜찮다. 모두 다 괜찮다. 애쓰고 애썼다. 그걸로 충분하다. 사랑하는 예쁜 우리 딸 삶의 시작은 지금부터니까 하고 싶은 거 모두 다 하렴. 

     

    바른 인생관, 바른 인간관, 바른 세계관, 중요한 삶의 가치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고 삶의 무게나 삶의 의미 등 진지한 고민을 공유하고픈 나의 바람을 알아주길 바란다. 좀 더 성숙해진 이야기들을 나눈 후에 너를 독립시켜야 내 맘이 편할 듯싶구나. 미래는 그리하여 그 의미를 갖는다 하니 자신의 힘으로 멋진 인생을 이루길 바란다. 

     

    You're my present. 선물 같은 너를 만나서 엄마는 정말 행복해. 늘 건강해서 다행이었고 잘 자라줘서 참 고맙다. 더할 나위 없이 묵묵히 잘 커 준 예쁜 우리 딸아, 지금도 충분히 예쁘고 예쁘다. 어젯밤 앨범을 함께 보며 추억해보니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시간의 소중함, 추억의 소중함을 느꼈단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자. 

     

    누구나 각자의 인생이 있단다. 뒤돌아볼 때 후회 없는 선택은 별로 없단다. 그러니까 진정한 행복을 찾는 선택을 하길 바란다. 언제나 너의 뜻을 존중하고 이해하니, 너는 늘 당당하게 웃음 넘치는 00이가 되기를.

  • 故 이태석 신부, 남수단 교과서에 실리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인술을 펼치다 세상을 떠난 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남수단의 국정교과서에 실렸습니다. 

     

    남수단 교육부는 지난 9월 이 신부님의 삶을 수록한 교과서를 펴냈는데 2019년 새 학기부터 일선 학교에 보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슈바이처’라고 불린 이 신부님의 삶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3쪽, 중학교 시민권 과목에 교과서에 2쪽에 걸쳐 소개됐습니다. 

     

    교과서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사제가 되어 남수단의 가난한 이웃들과 사랑을 나눈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그는 남수단에서도 열악한 지역인 톤즈에 작은 병원을 세웠고, 하루 300명의 환자를 돌봤다. 학교를 지어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80여 개의 마을에 백신을 공급하기도 했다”  

     

    “그의 병원은 가톨릭과 개신교, 무슬림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을을 파괴한 군인들도 치료를 받았다”  

     

    남수단 정부는 이 신부님을 기리기 위해 2015년부터 신부님의 삶을 교과서에 싣는 것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뎅뎅 호치 야이 남수단 교육부 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교과서에 실을 수 있어 큰 영광”이라며 “의사·음악가·선교사로서 10년 넘게 희생과 봉사를 몸소 실천하신 이 신부님의 삶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산이 고향인 이 신부님은 어릴 적 집 근처의 성당을 놀이터로 삼아 자랐습니다.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셨다고 합니다.  

     

    이 신부님은 성당에서 벨기에 출신 다미안 신부를 다룬 영화를 보고 사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부근의 한 섬에서 한센인을 돌보다 자신도 같은 병에 걸려 49세에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인제대 의대에 진학한 이 신부님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졸업 뒤 사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2001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이 신부님은 곧바로 남수단 톤즈로 떠났습니다.  

     

    이 신부님은 그곳에서 전쟁으로 인해 다치고 굶주리고 병에 걸린 이들을 치료하고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 방청객 모두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판사

    미국 대공황 때 있었던 일입니다. 

     

    1935년 1월 어느 추운 겨울밤에 뉴욕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나이 든 여성이 법정에 나와 판사 앞에 섰습니다. 빵 한 덩이를 훔쳐 절도죄로 기소된 그 여성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떨군 채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판사가 그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빵을 훔친 것이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절도죄라는 것을 모르셨나요?"

     

    그 여성은 고개를 들고 판사를 보며 답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습니다. 사위가 가족을 버렸고 딸은 병이 들어  어린 두 손자가 굶고 있습니다. 너무 어린아이들입니다"

     

    나이 든 여성이 말을 마치자 법정이 술렁였습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빵 가게 주인은 단호했습니다. 

    “판사님,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저 여성을 처벌해야 합니다.”

     

    판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잠시 후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본 법정은 10달러의 벌금형에 처합니다."

     

    판결을 마친 뒤 판사는 주머니에서 10달러 지폐를 꺼내 자신의 모자에 담았습니다.

     

    “이 돈은 벌금입니다. 그리고 나는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여성처럼 가난한 이웃이 빵을 훔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함에도 무관심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무관심에 대한 벌입니다.”

     

    순간 방청석은 침묵에 쌓였습니다.

    판사의 모자가 방청객들에 넘겨졌고 모두가 기꺼이 벌금을 냈습니다. 

    판사는 10달러의 벌금을 뺀 나머지 돈을 그 여성에게 전달했습니다.

     

    재판정을 나서는 여성의 빰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판결을 내린 판사가 피오렐로 헨리 라과디아입니다.  그는 공정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우호적인 명판결을 많이 내린 판사로 이름났습니다. 

     

    후에 시민들의 추대로 뉴욕시장이 돼 세 번이나 연임하며 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고 합니다. 시장 시절에는 뉴욕의 지하경제를 주무르고 있던 마피아 소탕작전을 성공적으로 벌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그가 사망하자 뉴욕시는 퀸스에 설립된 공항을 라과디아 공항으로 이름 지어 그를 기렸습니다. 

  • 예수님의 사랑법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우화등선한 선인 김가기

    우리 말속에는 수련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 보이는 말이 많습니다. ‘기가 막힌다’, ’기분이 좋다’ ‘기운이 난다’ 등등. 말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우리말 곳곳에 녹아있는, 기와 관련한 말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선도수련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됩니다. 당연히 높은 경지에 이른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분들의 삶을 담은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조선조 초기 고대 역사 특히 단군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역사 책을 갖고 있을 경우 엄벌에 처했을 정도로 관련 서적을 모두 거둬들여 불태웠고, 일제도 식민통치를 위해 민족정기를 북돋울 수 있는 서적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들어 주목을 받고 있는 김가기(金可記) 선인에 대한 기록은 소중한 자료로 생각됩니다. 

     

    물론 그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중국의 선도 관련 서적인 <속열선전> 당나라 때 심분이 쓴 <속선전>, 원나라 조도일이 편찬한 <역세진선체도통감람> 등에 김가기 선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지난 2001년에는 중국 섬서성(陜西省) 종남산 자오곡에서 김가기 선인의 삶을 담은 석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자오곡은 김가기 선인이 살던 곳으로 중국 산서성 종남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계곡인데 절경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계곡은 현지인들이 금선봉이라고 불리는 산봉우리 아래에 있으며 소나무 숲이 해를 가릴 정도로 우거져 일반인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곳이라고 합니다.

     

    속열선전과 비석에 담긴 글에 따르면 김가기 선인은 신라 사람으로 38대 원성왕 때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인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한 뒤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최치원 선생도 빈공과를 통해 당나라 관리가 됐지요. 

     

    김가기 선인은 성품이 침착하고 도를 닦는 것을 좋아했으며 사치스러운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박학다식해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용모는 단정하고, 말과 행동거지에서는 깊은 멋이 풍겼다고 전해옵니다.

     

    김가기 선인은 그렇게 3년을 살다 사신으로 본국인 신라로 돌아갑니다. 고향 땅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김가기 선인은 얼마 뒤 다시 당나라로 돌아와 종남산으로 들어가 황제가 불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찾지 않는 깊은 산중에 띠풀로 엮은 집을 짓고 손수 꽃을 심고 과수를 많이 길렀습니다.

     

    기록을 보면 김가기 선인은 남몰래 덕을 베푸는데 힘썼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청하는 게 있으면 거절한 적이 없었으며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도 매사에 정확했다고 합니다. 

     

    김가기 선인의 삶은 결국 수행이라는 게 주위 사람에, 자신을 길러준 만물을 이롭게 하는 일을 힘써하는 것임을 나타내주는 것 같습니다.

     

    선인으로 칭송받은 분인 만큼 수련도 하셨을 것입니다. 기록에는 복기(服氣)를 통해 몸을 단련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복기란 기를 먹는다는 뜻으로 호흡수련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늘 향불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때가 많았으며 도덕경과 신선경을 외우고 익히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짓고 남을 돕는 일에 힘쓰던 김가기 선인은 당나라 선종 11년(867년) 3월 당나라 황제에게 소를 올립니다. 황제는 그분이 올린 글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신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자와 영문대의 시랑이 되어 내년 2월 25일에 하늘로 올라가야 하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종은 이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내시를 보내 그에게 궁에 들어올 것을 권했으나 김가기 선인은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옥황상제의 조서를 보자고 해도 다른 신선이 관장하므로 인간 세상에는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선종은 김가기 선인이 고집을 꺾지 않자 궁녀 네 명과 내시 두 명을 보내 시중들게 하였으나 김가기 선인은 이를 물리치고 혼자 생활하며 그들을 바깥채에 살도록 했다고 합니다.

     

    내시와 궁녀들은 혼자 사는 김가기 선인의 방에서 밤마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창문 틈으로 몰래 들여다보니 김가기 선인이 용과 봉황 위에 앉은 선관(仙官), 선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점차 나라 안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김가기 선인이 말한 2월 25일이 다가왔습니다.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조정의 여러 사대부를 비롯해 상인, 공인 등 온갖 사람들이 산골 계곡인 자오곡을 가득 메웠습니다. 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오색구름이 피어나고 학이 길게 울었습니다. 계곡 주위에는 봉황이 날고 생황이나 퉁소 소리 같은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펴졌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많은 선인들이 내려와 김가기 선인은 모시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김가기 선인의 삶 특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 그대로 우화등선했다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가기 선인의 신비한 삶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분의 삶의 태도입니다. 

     

    기록에 짧게 나타나 있지만 사람들이 찾아와 청하는 게 있으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는 구절은 만나는 사람, 대하는 사물을 끊임없이 분별하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만나는 사람, 접하는 사물 모두에 깃든 하늘을 보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모두가 이로운 방향으로 아낌없는 도움을 줬을 김가기 선인의 삶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삶을 살고 있는가.

  •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 헬퍼스 하이

    TV나 인터넷을 보다보면, 오랜기간 꾸준히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근근히 살아가는 일반적인 서민들, 심지어 우울증, 자살충동 등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 등 삶에 여유가 없을 것 같은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봉사활동을 통해 행복감, 충만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심지어 우울증, 자살충동을 봉사활동으로 이겨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학자들은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고 부르고 과학적 근거가있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가장 큰 멘토링 조직인 '빅브라더즈 빅시스터즈(Big Brothers Big Sisters)'의 창립자인  앨런 룩스(Allan Luks)는 1992년 "봉사활동을 통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할 수 있으며, 이를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라고 자신의 저서 '선행의 치유력(The healing power of doing goods)'를 통해 밝혔습니다.

     

    룩스는 봉사활동을 하면 사람들이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를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남을 도우면서 몸과 마음에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오는데, 이를 '헬퍼스 하이'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일정 시간 이상 달리기를 한 후 얻는 쾌감을 일컫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에서 따왔습니다.  

     

    룩스가 33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들은 자원봉사를 시작했을 때 자신의 마음 상태가 점차 좋아졌다고 답변했습니다.

     

    대상자의 50%는 기분이 매우 좋았고, 43%가 활기가 넘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내면의 온기를 느꼈다고 응답한 이들이 28%가 됐고, 22%는 마음이 침착해지고 우울함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이 줄어들었다는 사람이 13%나 됐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는 사람도 1% 있었습니다. 

     

    '헬퍼스 하이'의 과학적 근거가 밝혀진 것은 2003년 미국 미시건 대학교 연구팀에 의해서였습니다.

     

    연구팀은 70세 이상 423쌍의 장수하는 부부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장수하는 이유에 대해 5년간 관찰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연구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장수하는 부부는 꾸준히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면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구팀은 사람들이 남을 도우면서 '엔도르핀'의 수치가 보통 때 보다 3배까지 높아지고, '옥시토신'의 분비가 증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엔도르핀은 사람이 행복함을 느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고, 옥시토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감과 유대를 높이는 호르몬입니다. 이 호르몬들은 수면을 돕고 만성통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구팀은 남을 돕는 행동이 체내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까지 낮추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앨런 룩스는 "그동안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영혼에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에 의해 (남을 돕는 행위가) 신체와 정신건강에도 좋은 것이 입증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남을 돕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건강이 좋을 확률이 10배 높다"라고 말했습니다.

     

    남을 직접적을 돕지 않더라도, 남을 돕는 것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는 것 만으로도 신체가 건강해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하버드 의과대학 연구팀은 1996년 132명의 하버드 학생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과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해 실험했습니다.

     

    연구팀은 학생들의 세균침입을 막는 가장 강력한 항체인 IgA의 수치를 조사한 뒤, 테레사 수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영화를 보여주고 수치 변화를 비교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의 영화를 본 학생들의 IgA수치가 처음 확인했던 IgA수치보다 확연하게 높게 나타났습니다. 반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 영화를 본 학생들은 IgA 항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연구팀은 "이 영화의 특징인 자비에 대해 학생들이 계속 곰곰히 생각해봤기 때문이다."라고 원인을 설명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연구결과에 일생을 봉사와 사랑으로 보낸 마더 테레사의 이름을 따 '마더 테레사 효과(The Mother Teresa Effect)'라고 이름붙였습니다.

  • 네덜란드의 치매마을 호그벡

    이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 없는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andreahamilton264)

    네덜란드에는 치매마을로 알려진 호그벡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비영리단체 비비움(Vivium)이 운영하는 이 마을은 몇 년 전 CNN에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IMAGE|165|center|호그벡 마을의 광장. 이미지 출처 : 드 호그벡 홈페이지]]

     

    치매 요양병원 간호사였던 이본 반 아메롱겐은 치매 환자도 여느 사람처럼 평범한 삶을 살며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2009년 이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늙는 게 자연스럽듯이 치매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호그벡 마을은 그런 철학에 따라 운영됩니다.

     

    우선 이곳에 사는 이들을 환자가 아닌 거주민으로 불립니다. 의사와 간호사 모두 가운을 입지 않고 거주민 또한 환자복을 입지 않습니다.

     

    [[IMAGE|164|center|caption]]

     

    호그벡에는 1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20여 개의 주택에 모여 삽니다.

     

    이들이 사는 집은 네덜란드의 여느 가정집과 다르지 않습니다. 집을 사거나 지을 때 자신의 취향을 반영하든 이곳의 주택들도 개성을 존중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모든 주민을 위해 맞춤형 주택을 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입주 전에 보호자가 ‘주민’의 과거 삶에 대한 설문조사를 적어내면 적합해 보이는 거주 공간을 추천 받게 됩니다.

     

    [[IMAGE|166|center|내부 인테리어. 이 외에도 다른 컨셉의 인테리어들이 있다. 이미지 출처 : 드 호그벡 홈페이지]]

     

    주민들은 자신의 생활 습관에 맞게 삽니다. 요양 병원처럼 정해진 식사 시간이나 취침 시간은 없습니다. 가족들의 방문도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호그벡에는 네덜란드의 여느 마을과 다름없는 다양한 생활 시설이 들어서 있습니다. 식당을 비롯해 미용실, 슈퍼마켓, 영화관, 카페 등등. 다른 점은 물건을 사거나 시설을 이용할 때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이 마을은 세금으로 운영됩니다. 주민들은 소득 수준에 따라 한 달에 500유로에서 최대 2500유로를 주 정부에 냅니다. 네덜란드의 경우 나라에서 주는 기초연금이 800유로가 넘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부담 없이 마을 주민이 될 수 있습니다.

     

    호그벡 마을은 의료진을 포함해 250명 가량의 운영진이 꾸려갑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을 조력자로 생각합니다. 주민들이 겪는 작은 불편을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도와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운영진 가운데 상당수는 치매 환자를 돌볼 수 있는 과정을 마친 지역 주민들입니다.

     

    처음 호그벡 마을을 만들 때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그벡 마을로 인해 주민들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외부인의 방문도 늘어 지역 경제가 활성화됐다고 합니다.

  • 피터 노먼, 올림픽보다 더 위대한 선수

    [[IMAGE|157|center|caption]]

     

    1968년 멕시코에서 열린 올림픽을 전설로 만든 것은 단 한 장의 사진이었습니다.

     

    육상 200m 시상식 사진입니다. 1등과 3등을 차지한 흑인 선수는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치켜 올렸습니다.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항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두 사람이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며 곧바로 선수촌에서 쫓아냈습니다.

    시상대에 섰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그 때부터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이 됐습니다.

     

    하지만 두 선수 옆에 얌전하게 서 있던 백인 선수를 기억하는 사람은없습니다.

    은메달을 받았던 호주 출신의 백인 선수 피터 노먼이 그의 이름입니다. 

     

    시상식 전에 두 사람이 퍼포먼스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한 노먼은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밝히고 두 선수에게 까만 장갑을 구해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함께 팔을 들지 않았지만 노먼은 정의를 상징하는 올림픽 배지를 착용했습니다.

     

    호주는 백인 우월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가 득세하던 곳이었습니다. 백인이 아닌 사람의 이민을 제한하는 정책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나라를 조국으로 둔 피터 노먼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지만 칭찬 대신 혹독한 ‘응징’을 당했습니다. 호주는 그에게 상을 주는 대신 차기 올림픽 출전권 박탈이라는 징계를 했습니다.

    노먼은 백호주의를 저버린 ‘배신자’로 낙인찍혀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간신히 학교 체육 교사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흑인 인권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노먼은 함께 시상대에 섰던 두 흑인을 비판하면 복권시켜주겠다는 제안도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대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에 삶을 바쳤습니다.

     

    노먼은 200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도 호주 정부는 그를 외면했습니다.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장례식에 참석해 관을 들고 애통해했습니다.

    카를로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두 사람은 약간의 좌절을 맛봤지만 노먼은 자신의 조국인 한 나라와 맞서 고독한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라고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IMAGE|159|center|피터 노먼(가운데)이 토미 스미스, 존 카를로스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이미지 출처 : 피터 노만 페이스북]]

     

    노먼이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난 2012년 호주 올림픽 위원회는 드디어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했고 그의 인권운동에 대한 공헌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노먼의 이런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흑인인권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인 멕시코 올림픽 시상식 사진에서 그저 “위대한 흑인 선수 옆에 있는 백인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노먼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시상식 사진이 조형물로 만들어질 때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비워두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섰던 자리에서 “위대한 흑인 선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두 흑인 선수 못지 않게 노먼도 위대한 선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IMAGE|158|center|1968 멕시코 올림픽 당시의 시상식을 본떠 만든 조형물. 노먼의 의사를 존중해 2등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있다. 이미지 출처 : San Jose State University 홈페이지]]

  • 20대에 '수백명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다.

    "전 우리 모두가 이 세계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 하나로 20대에 '수백 명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블링크나우(BlinkNow) 재단의 창립자인 매기 도인(Maggie Doyne)은 네팔의 내전으로 고아가 된 49명의 아이들의 법적 후견인입니다. 

    또한, 네팔에 코필라 벨리 스쿨(Kopila Valley School)이란 학교를 세워, 380명 이상의 아이들을 무료로 교육시키는 등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도인이 자신의 삶을 네팔의 아이들을 돕는 데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2006년, 네팔을 여행하다 두 소녀를 만난 것이 계기였습니다.

     

    당시 18살이었던 도인은 장래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도인은 자신의 미래를 찾기 위해, 자아성찰 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세계를 여행하기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도인은 네팔에서 라코라(Lacora)라는 매우 어린 소녀를 만납니다.

     

    라코라는 네팔의 고아 중 한명이었습니다.

    라코라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하루종일 무거운 짐을 버스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머리에 이고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은 겨우 하루에 1~2달러였습니다. 

    네팔 고아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그는 "이 아이들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같은 인류로서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도인은 히마(Hema)라는 소녀도 만납니다.

    당시 6살이었던 히마는 마른 강바닥에서 돌을 깨고 그것을 팔아서 얻은 몇 루피의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고아였습니다.

    "전 세계의 고아는 도울 수 없겠지만, 이 아이 한명은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도인은 히마의 학비, 교복, 교재비 등을 지불하면서 그녀가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히마를 도우면 도울수록, 도인의 마음속에는 다른 고아들도 돕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싹텄습니다. 

    날이 갈 수록 도인은 고아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집, 마음껏 배울 수 있는 학교,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마을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7년, 도인이 19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블링크나우(BlinkNow) 재단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12살부터 18살까지 6년간 용돈으로 조금씩 모아뒀던 5000달러와 함께, 전 세계에서 기부를 받아 코필라 벨리(Kopila valley)의 땅을 일부 구입했습니다.

     

    그 해에 도인은 그곳에 '코필라 벨리 어린이의 집(Kopila Valley Children's Home)'을 열었으며, 네팔의 고아들을 한명 두명 입양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에는 코필라 벨리 스쿨(Kopila Valley School)을 세웠으며, 이후 병원, 자매의 집 등 아이들이 질병, 범죄 등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시설들을 차례로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도인의 노력은 조금씩 전 세계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에는 '25 세 이하의 젊은이들이 지역 사회와 세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사람'을 선정하는 두 섬씽 어워즈(Do Something Awards)에서 대상을 받아 10만 달러를 수상했으며, 2013년에는 포브스(Forbes)의 교육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2014년에는 달라이 라마가 선정하는 '알려지지 않은 자비의 영웅(Unsung Hero of Compassion)'으로 선정됐고, 2015년에는 CNN에서 선정한 '올해의 영웅(Hero of the Year)'에 뽑혔습니다. 

     

    "이 아이들을 만났음에도 아이들을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사는 것 보다는, (아이들의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서든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 당시에 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방법인지,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등등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이러한 삶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인은 자신의 집에서 49명의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도 재밌고, 그 곳이 자신을 위한 조그마한 파라다이스라로 합니다.

     

    도인은 현재의 코필라 벨리 캠퍼스를 대체할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엔지니어, 건축가, 개발자 및 환경 전문가 팀이 지속 가능한 녹색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고 있으며, 그 넓이는 1만 2140 제곱미터 (약 3672평)에 달합니다. 새로운 캠퍼스의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직업 센터까지 있으며, 500명의 학생들을 위한 18개의 강의실로 이뤄집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음식을 식량을 제공할 농장과 과수원도 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아이들을 도우려는 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 수록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와 사람을 돕는 데 있어서는 모든 이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인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교육을 잘 받았고, 자유롭고, 능력이 있고, 안전하다면, 당신의 힘을 당신과는 달리 가지지 못한 우리 인류 가족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전 우리 모두가 이 세계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