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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디언 전통 피리, 물소리 그리고 새의 지저귐

    마음을 고요히 하는 데 음악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인디언 전통악기와 새소리 물소리가 어우러진 다음의 연주를 듣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게 되고 고요해집니다.

     

    집안일을 할 때나 심지어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 들어도 좋습니다

  • 이석로 방글라데시 꼬람똘라 병원장, 빈민촌서 25년 '인술'

    25년.

     

    이석로 방글라데시 꼬람똘라 병원장이 방글라데시에서 의료 봉사로 보낸 시간입니다.

     

    이 원장은 1994년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뒤 꼬람똘라병원 의사 모집 공고에 지원했습니다.

     

    그가 자원봉사를 신청한 이유는 군 면제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남대 83학번인 그는 키가 153cm로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면제 판정을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 같으면 인생에서 ‘3년을 벌었다’고 좋아했겠지만 이 원장은 다른 이들이 군 복무를 하는 기간 동안 봉사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처음 방글라데시로 떠날 때 딱 3년 동안만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해 18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떠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태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가 일하는 꼬람똘라 병원은 한국해외의료선교회인 콤스(KOMMS)가 1992년 설립한 병원입니다.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차로 2시간 걸리는 빈민촌에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건강보험이 없고 진료비는 비싸 가난한 사람들은 의료혜택을 거의 받지 못합니다. 병을 안고 살면서 키우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세워진 병원이라 꼬람똘라는 진료비의 1/10만 받습니다. 그 돈을 부담하기도 어려운 사람은 무료로 치료해줍니다. 하지만 치료를 위해 돈을 ‘강제로’ 맡아두기도 합니다.

     

    결핵 환자 치료가 그랬습니다. 결핵은 오랜 기간 약을 먹어야 완치가 되는데 이곳 환자들은 증세가 완화되면 병원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원장은 결핵 치료 환자에게 보증금으로 1000타카(약 1만4천 원)를 받았습니다. 대신 병이 다 나으면 돌려줬습니다.

     

    이 원장은 병원에 필요한 의료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급여도 대폭 삭감했습니다. 연봉이 3만 달러와 퇴직금 조로 쌓아두는 돈이 1만 달러였습니다. 하지만 이 원장은 2만 달러만 받겠다고 하고 나머지 돈으로 외과의사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 원장은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알고 2009년에는 백내장 수술에 특화된 안과도 개설했습니다. 2018년 한 해에만 1300여 명이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교육 기회를 얻기 어려운 여성을 위해 3년제 간호학교도 설립해 학생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고 있고 장학사업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 이 학교에서 100여 명의 간호사가 배출됐습니다.

     

    25년간 그가 쏟은 땀방울과 정성으로 현재 꼬람똘라 병원은 8개의 진료과와 50병상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해마다 8만 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원장은 고교 시절 공대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누나의 권유로 의대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대학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고민도 많았다고 합니다. 돈과 명예 대신 다른 길을 찾고자 했던 고민이 그를 방글라데시로 이끌었습니다.

     

    이 원장은 25년간의 봉사활동을 한 공로로 올해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아산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막노동으로 3남 2녀를 키운 부모님에게 늘 죄송하다는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상이 부모님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가난한 이를 치료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겉치레를 다 버리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소박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것이지요.

  • 골든 레트리버의 절친은 햄스터와 새 8마리

    사진만 봐도 미소가 절로 돕니다.
     
    브라질에 사는 한 골든 레트리버와 동물 친구들의 사진은 보는 이에게 행복감을 줍니다.
     
    세상 없이 착해 보이는 골든 레트리버의 이름은 밥입니다. 그리고 그의 절친은 햄스터 한 마리와 8마리의 새들입니다.
     
    밥과 친구들의 사진이 올라오자 SNS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5만 3천 명을 넘었고 페이스북 계정에 좋아요를 누른 이들 숫자도 1만 2천 명이 넘었습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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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록의 살아있는 전설 본 조비의 특별한 레스토랑

    존 본 조비는 평소 사회공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1년에는 자선식당 '소울 키친(The Soul Kitchen)'을 오픈하기도 했다. [이미지 : JBJ Soul Kitchen SNS]

    존 본 조비는 1980년대를 풍미한, 록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본 조비의 리더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이들을 돕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는 2006년에 본 조비 소울 재단(JBJ Soul Foundation)를 설립해 가난한 이들과 무주택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 재단이 하는 대표적인 일은 가난한 이들이 공짜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무료 식당 ‘소울 키친(Soul Kitchen)’의 운영입니다. 이 재단은 2011년 10월에 뉴저지주 레드뱅크에 첫 번째 식당을 열었고 두 번째 식당은 2016년 톰스 강 근처에 열었습니다. 이 지역은 2012년 허리케인으로 큰 피해를 입은 곳입니다.

     

    본 조비는 이 식당을 찾는 이들이 자존심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는 데 신경을 많이 씁니다. 돈을 내고 사 먹는 손님이나 공짜 밥을 먹는 손님이나 모두 이 식당에서는 환대를 받습니다. 밥값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값을 치르고 싶은 사람은 대신 20달러를 기부하면 됩니다.

     

    메뉴는 3가지 종류로 단출하지만 맛이 좋고 영양가도 풍부합니다. 소울 키친에서 쓰는 식재료는 직접 재배한 유기농산물을 쓰기 때문입니다.

     

    11월 기준으로 소울 키친은 10만 5천 끼를 제공했습니다. 이 레스토랑 웹사이트에 따르면 식사를 마련하는 데 들어간 비용의 54%는 기부금으로 마련했고 나머지 46%는 자원봉사자들이 벌어서 댔다고 합니다.

     

    ‘본 조비 재단’은 식당 운영 외에 필라델피아에서 집 없는 노숙인들을 위해 집을 짓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이 주택은 가난한 젊은이와 퇴역군인에게도 제공됩니다.

  • 마음으로 고친 병

    한때 신경성 위염으로 고생을 했었습니다. 입사 준비로 스트레스가 많을 때였습니다. 남들이 다들 가고 싶어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제 가치관에 맞는 곳에 다시 도전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던 회사는 2년 넘게 사람을 뽑지 않았습니다. 서른을 눈앞에 둔 때라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때는 많은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나이 제한을 뒀습니다. 대부분 만 30세로 지원제한을 뒀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속이 쓰리기 시작했습니다. 신트림이 나오고 위에 뜨끈뜨끈한 액체가 내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위 내시경을 하자고 하더군요. 난생 처음 위 내시경을 했습니다. 지금보다는 관이 굵어서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옆으로 누워서 연신 구역질을 하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인간으로서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시경을 다시는 한 적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신경성 위염이라면서 약을 처방해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약을 먹어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 김치를 물에 헹궈서 먹을 정도로 매운 반찬을  피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골라서 먹었지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취준생(취업준비생)으로 속병까지 난 제가 딱해 보였던지 친구들이 치료비로 쓰라며 20만 원을 보내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운 벗들입니다.

     

    그 돈을 들고 한의원을 찾았습니다. 한의사 선생님도 신경성 위염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다고 하자 그 한의사 선생님이 빙긋이 웃으며 다음과 같은 처방을 했습니다.

     

    “신경을 끊으면 낫습니다. 위가 좋지 않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세요”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지? 곰곰이 생각을 하다 한의사 선생님의 처방대로 위장에 신경을 쓰지 말아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껏 먹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 뒤로 더 이상 신경성 위염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야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면서 이해가 됐으나 당시에는 증세가 사라지니 내가 언제 신경을 썼었냐는 듯이 그저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 폐지 판 돈 기부 27년째 이어가는 할아버지

    지난 5일 장광래(75) 할아버지가 천안시 중앙동 행정복지센터에 100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기부해 화제가 되었다. [이미지 : MBCNEWS 유튜브]

    폐지를 팔아 생활하는 70대 할아버지가 27년째 기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천안시에 따르면 지난 5일 중앙동에 사는 장광래(75) 할아버지가 행정복지센터를 찾아 100만 원 상당의 온누리상품권을 기탁했습니다. 어려운 이웃에 전달해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온누리상품권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네의 폐지를 수거해 판 돈 가운데 일부를 모은 돈으로 구매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폐지를 팔아서 받은 돈을 들고 은행을 찾는다고 합니다. 적은 돈이지만 할아버지가 통장에 꼬박꼬박 입금하는 이유는 갖고 있다가 써버릴까 걱정해서라고 합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연말이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줬고, 생활비가 부족한 이웃에게는 생필품을 사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올해로 27년째입니다.

     

    할아버지는 아침이면 초등학교 앞에서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를 돕는 봉사활동도 한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천진난만한 애들이 고맙다고 인사하고, 또 어떤 때는 사탕도 하나씩 줄 때도 있어요.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라며 자신이 오히려 얻는 게 많아 기부를 멈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 93세 산타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수제 장난감 300개

    펜실베니아주에 거주하는 에드 하긴보탐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나무 자동차 장난감 300개를 펜실베니아 주경찰에 기부했다. [이미지 : 펜실베니아 주경찰]

    할아버지는 올해도 나무 장난감을 만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든 자동차 장난감입니다. 무려 300개나 됩니다. 
     
    폭스뉴스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미국 펜실베니아주 페이에트 카운티에 사는 에드 히긴보탐 할아버지는지난 12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경찰서에 나무로 만든 트럭 장난감 300개를 기부했습니다.
     
    경찰은 이들 장난감을 피츠버그 지역의 유치원이나 다른 유아 관련 기관에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순찰 대원인 로버트 브로드워터에 따르면 에드 할아버지는 이런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올해 나무 장난감 트럭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에드 할아버지는 1990년대 초반 은퇴한 뒤부터 나무 장난감을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선물로 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20년 넘게 이 일을 해온 것이지요.
      
    그는 언론에서 자신을 산타클로스라고 부르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지난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좋아서 하는 일일뿐 산타클로스 놀이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에드 할아버지는 주위의 거듭된 ‘과찬’조차도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는 한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무 장난감을 만들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라며 “그런 일을 하는 게 산타클로스라면 나는 지금 산타클로스가 분명하다"라고 말했습니다.

  •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삶, 신독(愼獨)

    지난 14일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향년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미지 : LG 공식 홈페이지]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족은 ‘허례허식’을 삼가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도 비공개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빈소를 공개하지 않고 조문은 물론이고 조화까지 사양했지만 인연 있는 정재계 인사 수십 명이 굳이 빈소를 찾을 정도로 고인이 남긴 족적은 큰 것 같습니다.
     
    구 명예회장은 생전에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부자가 되기 위해 바르고 부끄러움 없는 생활 자세”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를 위해 고인은 서울 여의도 LG 사옥 집무실에 신독(愼獨)이라고 쓴 휘호를 걸어 놓고 늘 마음에 새겼습니다.
     
    신독은 대학에 나오는 군자필신기독야(君子必愼其獨也)의 줄임말입니다. 군자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늘 올바르게 처신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는 LG가 내세우는 ‘정도경영’의 바탕이 됐을 것입니다. 
     
    고인은 신독을 바탕으로 기업 경영의 원칙도 세웠습니다. 
     
    “사사로운 이해를 떠나 공사를 엄정히 구분하면서 기업을 이끌어 나가고, 항상 정당한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기업을 운영한다면 사회는 결코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근검절약하고 절제된 생활을 영위하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부는 이 사회로부터 점차 존경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신독이라는 삶의 철학은 구 명예회장의 검소하고 소탈한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의 검소함은 가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구 명예회장은 회고록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 “나는 주로 구태회 숙부의 옷을 대물림해 입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조부께선 학용품도 하나 다 써야 새것 하나를 꺼내 주셨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배우고 자라서인지 구 명예회장은 재벌의 총수이지만 어느 동네에서나 만날 수 있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구 명예회장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고동색 카디건과 검은 뿔테안경은 20년 쓴 물건들입니다. 은퇴한 뒤 사용할 컴퓨터도 계열사에서 쓰던 것을 가져다 쓸 정도로 근검절약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15일 자신의 트위터에 “회장님께서 1980년대 정부청사 인근 허름한 식당에서 일행과 수행원도 없이 혼자 비빔밥을 드시던 소박한 모습을 몇 차례나 봤다. 회장님의 그런 풍모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을 키웠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고인은 각지의 공장을 방문할 때도 불필요한 의전을 삼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LG그룹에서는 오너 경영인이 방문했을 때 간부들과 직원들이 도열해서 맞는 일이 없습니다. 
     
    구 명예회장은 가족에게도 엄격했습니다. 힘 있고 돈 많은 이들의 대다수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궁리할 때, 고인의 네 아들은 모두 육군에서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습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는 신독의 삶을 살았기에 구 명예회장은 물러날 때도 알았습니다.  그는 1995년 LG를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넘겨주고 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자연 속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에서 자식에게 경영을 물려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구 며예회장은 낙향한 곳에서도 버섯 재배를 연구하고 된장, 청국장, 만두 등 전통음식의 맛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에는 늘 마음을 썼습니다. 1991년 사재 2억 원을 출연해 LG복지재단을 만들어 소외계층을 지원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 상남이라는 호를 지은 것입니다.
     
    구 명예회장은 문중에서 항렬이 낮지만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습니다. 아저씨뻘 되는 이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이들이 자신을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남이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상남은 경남 진양군 지수면 고향집 앞에 있는 작은 다리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고인은 삶처럼 떠나는 길도 소탈했습니다. 
     
    유족은 빈소를 공개하지 않았고 화장 뒤 묻힐 장지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문상객도 2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화도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것만 받고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나라의 대표가 보낸 것이라 그마저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 배고파 우유 훔친 ‘장발장’ 부자에 일어난 기적

    '현대판 장발장'이라 불릴 정도로 가난한 부자(父子)를 도운 이재익 경위(왼쪽)와 박춘식씨(가운데). [이미지 : 인천 중부경찰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19년 동안 감옥에 갇힙니다.

     
    우리 시대에도 ‘장발장’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장발장은 다행히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많은 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지난 15일 오후 4시쯤 30대 A 씨와 10대 아들이 인천시 중구의 한 마트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다 붙잡혔습니다. A씨가 아들이 멘 가방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을 CCTV로 본 직원이 이들을 붙잡았고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지요.
     
    이들의 가방에서 나온 물건은 우유 2팩과 사과 6개, 음료수 몇 병 등 금액으로 따지면 1만 원 정도 됐습니다.
     
    경찰이 출동했을 때 A씨는 두 손을 앞에 다소곳이 모은 채 직원에게 연신 "용서해 달라"라며 머리를 숙였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다"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A씨는 택시 운전을 했지만 당뇨와 갑상선 질환으로 6개월 동안 일을 못해 끼니를 때울 돈조차 없어 물건을 훔치게 됐다고 했습니다. 집에서는 홀어머니와 7살 둘째 아들이 먹을 것을 구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털어놓았습니다.
     
    사연을 들은 마트 주인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경찰도 이들 부자를 훈방조치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경찰관들은 이들을 돌려보내기에 앞서 근처 식당에 먼저 데리고 가서 따뜻한 국밥을 대접했습니다.
     
    식당에서는 한 시민이 2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고 식당을 나갔습니다. 아들이 돌려주려고 달려나갔지만 그 시민은 한사코 아이에게 돈 봉투를 맡기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경찰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의인은 국내외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박춘식(66)씨로, 당시 창밖에서 ‘사건’을 지켜본 뒤 식당까지 따라가 돈 봉투를 전했다고 합니다.
     
    현장에 출동했던 이재익 경위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아침 점심을 다 걸렀다고 부자가 그러니까요…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딨습니까”라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경찰은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A씨의 일지라를 알선하고 B군은 무료급식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부자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당장 마트 주인부터 이들 부자에게 쌀과 식료품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여러 시민들이 사과, 식료품, 생필품 등 물품을 구입한 뒤 부자에게 전해달라며 맡기고 갔고 어떤 이들은 계좌로 돈을 입금하기도 했습니다. 도울 방법을 묻는 문의 전화도 이어졌습니다.
     
    A씨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가장으로서 일을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애들한테 가장 미안하다”면서 식당에서 현금 봉투를 주고 간 사람을 꼭 찾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서로 알지도 못하는 데 그렇게 해주셨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맙다"라고 했습니다.

  • '얼굴없는 화가' 뱅크시, 노숙인을 산타로 만들다

    '예술 테러리스트' 뱅크시가 의자 뒷편의 벽돌담에 루돌프를 그려, 노숙인이 마차에 누운 산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미지 : 뱅크시 인스타그램]

    영국의 유명 예술가 뱅크시가 노숙인을 산타로 만들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숙인이 자고 있는 벤치 뒤의 벽에 사슴 두 마리를 그려 그 노숙인이 마치 '마차에 누운 산타클로스'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지요.

     

    BBC에 따르면 뱅크시는 영국 중서부 도시인 버밍엄 지역의 한 의자에 누워 있는 노숙인 뒤편의 벽돌담에 흰색으로 사슴 두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뱅크시는 이 벤치에 누워 있는 노숙인 라이언의 영상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습니다. 12일 오후 6시 현재 이 영상 조회 수는 340만이 넘었습니다.

     

    영국 출신의 뱅크시는 파격적인 행위로 이름난 예술가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칭하는데, 그에 맞게 자신의 작품에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세력과 자본가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지난해 경매에 붙여진 자신의 작품 ‘풍선과 소녀’가 든 액자 안에 분쇄기를 설치해 15억 원에 낙찰되자 분쇄기가 작동해 잘려 나가도록 해 또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그림의 가격은 당초 20~30만 파운드(2억 7천만~4억 4천만 원)으로 추정됐지만 막상 경매를 해보니 수수료를 포함해 104만 2천 파운드(15억 4천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하지만 경매 진행자가 낙찰을 알리는 봉을 내리치자 경고음 같은 소리와 함께 그림이 액자 밑을 통과하면서 긴 조각들로 찢어졌습니다. 경매를 진행한 소더비는 물론 현장에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 충격적인 상황에 당혹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