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ALL : 기부

Contents List 3

  • 떼제, 청년들의 영혼의 쉼터

    떼제공동체에서 기도 중인 청년들. 이미지 출처 : 플리커 (TaizéBirmingham), 퍼블릭 도메인

    “우리가 지금 온 대륙의 젊은이들과 함께 신뢰의 순례를 해 나가는 것은 평화가 얼마나 시급히 필요한지를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물음에 답하려고 노력할 때 평화를 이룩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사는 곳에서 신뢰를 간직하고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이해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떼제공동체 창설자 로제 수사)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분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하늘색 십자가를 본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둘기가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상징한 이 십자가가 공동체의 상징 떼제 십자가입니다. 

     

    [[IMAGE|198|center|떼제공동체를 상징하는 푸른 십자가. 출처 : 위키미디어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roix_de_Taiz%C3%A9.jpg), CC BY-SA 라이센스]]

     

    1940년 8월 한 청년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동부 프랑스 부르고뉴 남부 지방의 작은 마을 떼제(Taize)를 찾았습니다. 그 해 6월 14일 프랑스 파리가 함락된 지 두 달쯤 되는 때였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청년 로제는 전쟁이라는, 사람이 벌인 가장 잔인한 행위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화해와 일치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꿨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해 전쟁을 막고 인류가 한 가족처럼 지내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떼제를 찾은 이유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바로 그곳에 그런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도망자를 숨겨주는 일이었습니다.  

     

    로제에게 가장 먼저 눈에 뜨인 사람들은 나치 독일의 점령지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껴 도망 나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반대의 처지에 놓인 독일군 포로들을 맞았습니다. 젊은이들의 영성 공동체 떼제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떼제가 공동체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9년입니다. 로제와 뜻을 함께 하는 일곱 명의 청년들이 찾아와 독신 생활과 물질적 영적 재산의 공유 등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종신서원을 하면서 공동체 식구들이 생겼고 1952년에는 떼제의 규칙이 만들어집니다. 어떤 기부나 헌금도 받지 않고, 가족의 상속도 받지 않으며, 스스로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하고 나눔을 실천한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평생 단순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차츰 그들의 뜻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공동체에는 지금 공동체에는 20여 개 나라에서 온 1백 명가량의 수사들이 살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출신도 있고, 개신교회 출신도 있습니다. 

     

    떼제에는 1950년대 말부터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로제 수사를 비롯한 공동체 식구들은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이 머물면서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 정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때부터 손님맞이는 떼제의 주요한 부분이 됐습니다.  

     

    지금은 1년 내내 유럽은 물론 다른 대륙에서 찾아온 젊은이들이 떼제를 찾습니다. 한 주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요일에서 다음 일요일까지 1주일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떼제의 정신을 경험합니다.  

     

    이들은 1962년 세워진 ‘화해의 교회’에서 하루 세 차례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기도를 하고 소그룹으로 나눠 대화하는 시간도 갖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아지자 몇 해 전부터 가톨릭 국제공동체인 성 안드레아 수녀회와 폴란드의 우술라 수녀회에서 ‘젊은 순례자’들을 맞는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젊은이들과의 모임은 떼제공동체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사들은 유럽은 물론 다른 대륙을 찾아다니며 크고 작은 모임을 이끕니다. 이는 지구촌에 믿음에 바탕한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신뢰의 순례’입니다. 이들 모임에서 떼제공동체 수사들은 젊은이들이 자기가 사는 바로 그곳에서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도록 돕고 격려합니다. 

     

    가장 큰 모임은 떼제공동체가 매년 말 유럽에서 여는 ‘테제 유럽 젊은이 모임’(Taize European Youth Meeting)입니다. 하지만 이 행사에는 유럽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만 명의 젊은이들 참여합니다. 2004년 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행사에는 8만 명의 젊은이들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올해 행사는 12월 28일부터 2006년 1월 1일까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립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오지만 떼제는 자신을 중심에 두는 법이 없습니다. 떼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직은 하나도 없습니다. 대신 동네, 마을, 도시, 교회, 성당 등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속한 곳에서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떼제공동체가 세계 곳곳을 찾아가며 벌이고 있는 ‘신뢰의 순례’는 그런 젊은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획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1979년 다섯 분의 수사들이 파견되어 서울 화곡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26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한국의 교회와 젊은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화해와 일치의 지구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떼제공동체. 이들의 꿈이 자랄수록 지구촌에는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 옛 ‘국민 신발’ 고무신, 동티모르 아이들의 희망이 되다

    고무신은 한때 ‘국민 신발’이었습니다. 

     

    종류는 그리 다양하지 않았지요. 검정 고무신, 흰 고무신,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동 고무신 정도가 종류의 전부였습니다.  

     

    운동화가 생산되면서 고무신은 한동안 가난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 아이들에 운동화를 사줄 때 가난한 집 아이들은 고무신을 신어야 했습니다.  

     

    그런 고무신이 동티모르 빈곤층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신발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동티모르는 산골마을로 갈수록 환경이 열악합니다. 고산지대의 아이들은 맨발로 산길을 다니며 커피콩을 줍고 두 시간을 걸어 등하교를 합니다. 발을 다치는 아이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이런 아이들을 돕기 위해 대구의 사회복지법인 가정복지회가 동티모르 어린이들에게 고무신을 보내는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착한고무신 보내기 프로젝트입니다. 

     

    도움을 주고 싶은 분은 월 1만 원씩 정기후원을 하거나 1켤레 당 3~5천 원 하는 고무신을 직접 사서 가정복지회로 보내주면 됩니다. 

     

    ‘착한고무신’은 동티모르 현지의 비영리 알롤라재단을 통해 어린이에게 전달됩니다.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린 이우영 작가는 착한 고무신을 손에 든 ‘기영이’를 캐릭터로 기부했고 대구에 본사를 둔 베트남 음식 프랜차이즈 ‘더포’는 계산서에 ‘기영이’ 스티커를 붙이면 1000원을 더 결재해 그렇게 모은 돈으로 ‘착한고무신’을 사서 보내고 있습니다. 

     

    고무신을 받은 아이들은 너무 좋아한다고 합니다. 가정복지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고무신을 신고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정복지회는 착한고무신 프로젝트를 아이들의 교육사업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입니다. 

     

    동티모르는 우리나라 강원도 크기의 작은 섬나라입니다. 인구 절반이 하루 0.88달러로 생활하고 5세 이하 어린이 절반이 체중미달을 겪고 있으며 초등학교에 다니는 비율도 56%에 불과한 곳입니다. 

  • 故 이태석 신부, 남수단 교과서에 실리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인술을 펼치다 세상을 떠난 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남수단의 국정교과서에 실렸습니다. 

     

    남수단 교육부는 지난 9월 이 신부님의 삶을 수록한 교과서를 펴냈는데 2019년 새 학기부터 일선 학교에 보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슈바이처’라고 불린 이 신부님의 삶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3쪽, 중학교 시민권 과목에 교과서에 2쪽에 걸쳐 소개됐습니다. 

     

    교과서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사제가 되어 남수단의 가난한 이웃들과 사랑을 나눈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그는 남수단에서도 열악한 지역인 톤즈에 작은 병원을 세웠고, 하루 300명의 환자를 돌봤다. 학교를 지어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80여 개의 마을에 백신을 공급하기도 했다”  

     

    “그의 병원은 가톨릭과 개신교, 무슬림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을을 파괴한 군인들도 치료를 받았다”  

     

    남수단 정부는 이 신부님을 기리기 위해 2015년부터 신부님의 삶을 교과서에 싣는 것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뎅뎅 호치 야이 남수단 교육부 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교과서에 실을 수 있어 큰 영광”이라며 “의사·음악가·선교사로서 10년 넘게 희생과 봉사를 몸소 실천하신 이 신부님의 삶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산이 고향인 이 신부님은 어릴 적 집 근처의 성당을 놀이터로 삼아 자랐습니다.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셨다고 합니다.  

     

    이 신부님은 성당에서 벨기에 출신 다미안 신부를 다룬 영화를 보고 사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부근의 한 섬에서 한센인을 돌보다 자신도 같은 병에 걸려 49세에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인제대 의대에 진학한 이 신부님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졸업 뒤 사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2001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이 신부님은 곧바로 남수단 톤즈로 떠났습니다.  

     

    이 신부님은 그곳에서 전쟁으로 인해 다치고 굶주리고 병에 걸린 이들을 치료하고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 20대에 '수백명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다.

    "전 우리 모두가 이 세계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 하나로 20대에 '수백 명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블링크나우(BlinkNow) 재단의 창립자인 매기 도인(Maggie Doyne)은 네팔의 내전으로 고아가 된 49명의 아이들의 법적 후견인입니다. 

    또한, 네팔에 코필라 벨리 스쿨(Kopila Valley School)이란 학교를 세워, 380명 이상의 아이들을 무료로 교육시키는 등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도인이 자신의 삶을 네팔의 아이들을 돕는 데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2006년, 네팔을 여행하다 두 소녀를 만난 것이 계기였습니다.

     

    당시 18살이었던 도인은 장래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도인은 자신의 미래를 찾기 위해, 자아성찰 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세계를 여행하기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도인은 네팔에서 라코라(Lacora)라는 매우 어린 소녀를 만납니다.

     

    라코라는 네팔의 고아 중 한명이었습니다.

    라코라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하루종일 무거운 짐을 버스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머리에 이고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은 겨우 하루에 1~2달러였습니다. 

    네팔 고아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그는 "이 아이들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같은 인류로서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도인은 히마(Hema)라는 소녀도 만납니다.

    당시 6살이었던 히마는 마른 강바닥에서 돌을 깨고 그것을 팔아서 얻은 몇 루피의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고아였습니다.

    "전 세계의 고아는 도울 수 없겠지만, 이 아이 한명은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도인은 히마의 학비, 교복, 교재비 등을 지불하면서 그녀가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히마를 도우면 도울수록, 도인의 마음속에는 다른 고아들도 돕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싹텄습니다. 

    날이 갈 수록 도인은 고아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집, 마음껏 배울 수 있는 학교,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마을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7년, 도인이 19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블링크나우(BlinkNow) 재단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12살부터 18살까지 6년간 용돈으로 조금씩 모아뒀던 5000달러와 함께, 전 세계에서 기부를 받아 코필라 벨리(Kopila valley)의 땅을 일부 구입했습니다.

     

    그 해에 도인은 그곳에 '코필라 벨리 어린이의 집(Kopila Valley Children's Home)'을 열었으며, 네팔의 고아들을 한명 두명 입양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에는 코필라 벨리 스쿨(Kopila Valley School)을 세웠으며, 이후 병원, 자매의 집 등 아이들이 질병, 범죄 등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시설들을 차례로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도인의 노력은 조금씩 전 세계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에는 '25 세 이하의 젊은이들이 지역 사회와 세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사람'을 선정하는 두 섬씽 어워즈(Do Something Awards)에서 대상을 받아 10만 달러를 수상했으며, 2013년에는 포브스(Forbes)의 교육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2014년에는 달라이 라마가 선정하는 '알려지지 않은 자비의 영웅(Unsung Hero of Compassion)'으로 선정됐고, 2015년에는 CNN에서 선정한 '올해의 영웅(Hero of the Year)'에 뽑혔습니다. 

     

    "이 아이들을 만났음에도 아이들을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사는 것 보다는, (아이들의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서든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 당시에 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방법인지,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등등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이러한 삶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인은 자신의 집에서 49명의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도 재밌고, 그 곳이 자신을 위한 조그마한 파라다이스라로 합니다.

     

    도인은 현재의 코필라 벨리 캠퍼스를 대체할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엔지니어, 건축가, 개발자 및 환경 전문가 팀이 지속 가능한 녹색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고 있으며, 그 넓이는 1만 2140 제곱미터 (약 3672평)에 달합니다. 새로운 캠퍼스의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직업 센터까지 있으며, 500명의 학생들을 위한 18개의 강의실로 이뤄집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음식을 식량을 제공할 농장과 과수원도 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아이들을 도우려는 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 수록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와 사람을 돕는 데 있어서는 모든 이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인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교육을 잘 받았고, 자유롭고, 능력이 있고, 안전하다면, 당신의 힘을 당신과는 달리 가지지 못한 우리 인류 가족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전 우리 모두가 이 세계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좁쌀명상 - 괴롭힘 탈출법

    우리의 참모습은 참나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지구에 소풍 온 사람입니다. 삶이 끝나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돌아갑니다. 지구에서 지내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를 보살피고 최선의 길로 안내하십니다. 주위에는 수호천사가 늘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겉모습과 달리 우리 안에는 하늘나라에 있을 때의 모습인 참나가 있습니다. 예전의 성인들은 참나를 그리스도, 부처, 진아 등으로 불렀습니다. 참나는 영원불멸합니다. 우리의 삶이 끝나면 우리 안의 참나는 하늘나라로 돌아갑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을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과 수호천사님에게 맡기십시오. 그 분들이 우리를 최선의 길로 안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명상을 위한 준비

     

    조용한 장소를 찾아 자리에 앉습니다. 의자에 앉아도 되고, 바닥에 앉아도 됩니다. 바닥에 앉을 때는 벽을 등받이처럼 해서 앉으세요.

    누워서 해도 괜찮습니다. 누울 때는 두 다리를 어깨 넓이처럼 벌리고 두 팔도 몸에서 15~30도 떨어지게 바닥에 내려 놓고 손바닥이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 자세가 우리 몸을 가장 이완시킬 수 있는 자세입니다. 불편하면 베개를 쓰셔도 괜찮습니다.

    연습을 꾸준히 하면 시끄러운 지하철이나 서 있을 때도 할 수 있게 됩니다.

      

     

    1. Relaxing

     

    눈을 감고 다음과 같이 호흡을 합니다.

    숨은 내쉬기부터합니다. 숨을 편안하고 길게 내쉽니다. 억지로 길게 내쉬면 가슴이 답답해지니 편안한 만큼만 내쉽니다. 들이마시는 숨은 저절로 들어오게 내버려 둡니다.

    처음 몇 번은 숨이 거칠 수가 있습니다.

    숨이 들어온 뒤 내쉴 때 길고 편안하게 내쉽니다. 숨을 내쉬면서 온몸에 힘을 뺍니다.

    들이마시는 숨은 저절로 들어오게 두시고 내쉴 때 온몸에 힘을 뺀다고 생각하며 길고 편안하게 내쉽니다. 이 때 얼굴에는 미소를 짓습니다. 자신이 행복했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바라봤을 때, 아니면 아기의 웃는 모습이나 개나 고양이의 귀여운 모습을 봤을 때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습니다.

     

     

    2. 참나 떠올리기

     

    이제 우리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몸 참나가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닮은 하지만 황금빛으로 빛나는 몸이 우리 안에 있음을 생각하고 떠올려 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사에 찌든 나는 사라지고 참나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여러 번 속삭여 줍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온 천사다.”

    이제 우리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하느님과 수호천사들이 우리에게 사랑과 축복을 쏟아부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 축복과 사랑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괴롭히거나 해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하늘에서는 눈부신 햇살같은 사랑과 축복의 에너지가 쏟아져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행복에 잠겨 봅니다.

     

     

    3. 좁쌀 떠올리기

     

    이제 눈을 감은 채로 한 손을 떠올립니다. 손바닥 안에 우리를 괴롭히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의 모습은 좁쌀만큼 작습니다. 그리고 그 색깔은 아주 새카맣습니다. 그의 존재는 너무 작아서 나 자신을 절대 해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은 하늘의 축복과 사랑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바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아주 작고 힘없는 작은 좁쌀만한 크기의 그 사람이 보입니다. 1분 동안 그 상태로 잠시 머뭅니다.
     
    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함께 소풍 온 천사입니다. 그의 안에도 나와 똑같은 참나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두운 에너지에 물들어 그를 잊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아주 작은 좁쌀 같은 그의 몸 안에 있는 찬란히 빛나는 참나를 떠올려 봅니다. 그 빛이 점점 커져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어둠을 몰아내는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합니다. 1분 동안 그런 기쁨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4. 깨어나기

     

    눈을 뜹니다. 눈을 뜬 채로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얘기합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온 천사다. 하느님과 수호천사들이 나를 보호하고 있고, 어느 누구도 나를 해치지 못한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천사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모든 존재들에게 축복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런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겠다고 다짐합니다.

  • 과일 장사 노 부부 전 재산 400억 원 기부

    노 부부가 한평생 모은 전 재산 400억 원을 대학교에 기부했습니다.

     

    김영석(91) 할아버지와 양영애(83) 할머니 부부는 과일 장사로 시작해 모은 돈 400억 원을 맏아들이 졸업한 고려대학교에 모두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200억원 상당의 서울 청량리 소재 토지 5필지와 건물 4동을 우선 내놓고, 앞으로 200억원 상당의 토지 6필지와 건물 4동을 추가로 기부한다고 합니다. 

     

    실향민인 김영성 할아버지는 강원도 평강군 남면이 고향인데 15살에 부모를 여의었다고 합니다. 17살 때 월남해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고 양 할머니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두 분은 식모살이, 식당일 등을 하다 1960년대에 서울 종로5가에서 리어카에 과일을 놓고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푼 두 푼 돈을 모았습니다. 

     

    전차를 탈 수 있었지만 50전 하던 차비가 아까워 매일 새벽에 뛰어 다녔다고 합니다. 된장과 보리밥만 15년을 먹었습니다. 

     

    부부는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으로 몇 년 뒤에 가게를 냈습니다. 

     

    장사 규모가 커지고 종잣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대출을 받아 1976년 청량리에 상가 건물을 샀고, 이후 빌린 돈을 갚아나가면서 주변 건물 몇 채를 더 샀다고 합니다. 

     

    두 분에게는 아들 둘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 모두 미국에 이민가서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식보다는 좋은 곳에 모은 재산을 쓰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처럼 형편이 어려워 배우지 못하는 학생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양영애 할머니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열심히 벌어서 형편이 되면, 쓰고 남은 돈은 기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기부하기 전엔 기부가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 타임지 표지 장식 음바페 “존중, 겸손, 평정이 좌우명"

    겸손한 천재 음바페(파리 셍제르망)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타임지는 12일 ‘축구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러시아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우승을 이끈 19살의 축구천재 킬리안 음바페를 표지에 실었습니다.

     

    축구 선수가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것은 리오넬 메시, 마리오 발로텔리, 네이마르 등 3명에 불과했고, 10대 축구선수로서는 음바페가 처음입니다. 

     

    재치 있고 의미 있는 제목을 다는 타임지는 메시에게는 ‘왕 레오(King Leo)’, 네이마르는 ‘제2의 펠레(The Next Pele)’라고 표시했습니다. 

     

    축구계 안에 만연한 인종 차별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표지에 실은 발로텔리의 경우엔 ‘마리오의 의미(The Meaning of Mario)’란 제목을 달았습니다.

     

    타임지는 음바페를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메시와 호날두 시대를 이을 차세대 리더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음바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타임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축구 인생을 이끌어 줄 좌우명이 존중, 겸손, 평정심이라고 밝혔습니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모두 겸손하고 사람들을 존중한다며 자신도 그런 선수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아프리카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 교외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음바페는 가진 것을 벌써부터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있기도 합니다.

     

    음바페는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하자 당초 약속대로 출전 수당과 보너스 전액인 30만 유로(약 4억 원)를 어린이를 위한 자선단체들에 기부했습니다. 


    그가 기부한 단체 가운데 하나인 프르미에 데 코르데 재단의 세바스티앙 뤼팽 대표는 프랑스 일간 르 파리지앵과의 인터뷰에서 음바페가 틈날 때마다 재단을 찾아와 어린이들과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습니다. 

     

    음바페는 아이들보다 더 즐겁게 노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뤼팽 대표는 덧붙였습니다.

     

    이 재단은 투병 중인 아동이나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의 스포츠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음바페는 자신이 나고 자란 파리 외곽 봉디의 청소년 25명을 러시아 월드컵에 자비로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카메룬 출신 아버지와 알제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지 가정 2세입니다. 저소득층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파리 외곽 봉디에서 유소년 축구클럽을 다니면서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겸손하고 가슴 따뜻한 천재 음바페는 축구사를 새로 쓰고 있습니다.

     

    16살에 프로에 데뷔한 음바페는 2016~2017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4경기 연속 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그로부터 올해까지 그는 프랑스 1부 리그 우승 2회, 컵대회 우승 2회를 경험했습니다. A매치를 포함한 개인 통산 득점은 68골로 같은 나이 때 메시의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무엇보다 세계 축구를 이끌고 있는 메시와 호날두도 못 이룬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습니다. 게다가 결승전에서 골까지 넣었지요. 10대 선수가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은 것은 1958년 펠레 이후 60년 만입니다.

     

    음바페가 속한 파리 생제르맹은 지난해 음바페 영입에 2400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축구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이적료입니다.

     

    생제르맹은 1조 원을 줘도 음바페를 팔지 않겠다며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음바페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내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음바페는 누구나 자신처럼 꿈을 이룰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꿈을 믿는다면 언젠가 여러분 중 누군가가 지금의 제 자리에 있을 겁니다.”

  • 요셉의원, 큰 병원보다 더 큰 병원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서울 영등포역 근처 쪽방촌 한가운데 자리한 요셉의원은 성경 말씀처럼 ‘지극히 작은 자들’을 무료 진료하는 곳입니다.


    병원에는 하루에 1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옵니다.


    대부분 노숙인이나 행려병자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감기약 한번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진료받을 곳이 없어 병을 키우기 일쑤인 외국인 노동자들도 이곳을 찾습니다.


    병원 운영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듭니다. 서울카톨릭사회복지회 부설인 요셉의원은 의료인 외에 후원자와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단식하며 하루에 500원씩 모은 돈을 보내주는 버스 기사, 후원금을 내기 위해 미국에서 온 본, 시주 받으러 왔다가 후원금을 내도 간 스님까지 많은 분들이 요셉의원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는 분들은 몸이 병들었지만 마음이 더 아픈 분들이 많습니다.


    의사나 간호사는 물론 자원봉사자들은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데 더욱 신경을 씁니다.


    한 목욕 봉사자는 악취가 진동하는 환자의 발에 입을 맞추고 온몸을 깨끗이 씻기고 닦았다고 합니다. 세상 누구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 자신의 발에 따듯한 입술이 닿았을 때 그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IMAGE|174|center|caption]]

     

    요셉의원은 2008년 세상을 떠난 고 선우경식 박사가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 1987년 세운 무료병원입니다.


    1969년 가톨릭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킹스브룩 주이스 메디컬 센터에서 내과학을 전공한 선우 박사는 귀국한 뒤 한림대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1983년부터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진료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7년 선우 박사는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아예 병원을 세웠습니다. 요셉의원의 시작입니다. 개원 첫 달 1000만 원의 적자가 날 정도로 병원 운영이 어려웠지만 선우 박사는 직접 나서서 쌀을 얻어오고 의약품을 기부받았습니다.


    선우 박사가 요셉의원을 만든 것은 처음 의학을 공부할 때 사람을 살리는 데 의술을 쓰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한 알입니다.


    퇴근길에 길가에 쓰러진 환자를 데리고 가 치료하면 그렇게 마음을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선우 박사에게 어느 날 병마가 찾아옵니다. 2006년 위암 수술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병원을 찾았던 그는 2008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영등포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선우경식 박사의 뒤를 이은 사람은 신완식 박사입니다.


    감염내과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가톨릭의대 교수였던 신 박사는 여의도성모병원 내과 과장으로 ‘잘 나가던’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신 박사는 2009년 정년을 6년 앞두고 월급 한 푼 없는 요셉의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전문의가 됐을 때 개업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힘들게 공부했으니 세상과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라고 몇 번을 당부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그때 다시 생각났다고 합니다.


    신 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요셉의원에서 가슴으로 웃는 법을 알았고 세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찾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요셉의원에서 참 행복을 찾은 이들이 많습니다. 600여 명의 자원봉사자와 1만 1000여 명의 후원자들이 그들입니다.


    한 여중생은 요셉의원 소식지에 쓴 글에서 “커다란 병원보다 더 큰 병원”이라고 적었습니다.


    요셉의원 홈페이지에 원장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습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라”

  • 홍콩 대표 영화배우 주윤발 8000억 대 전 재산 기부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이 8000억 원대의 재산을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주윤발은 최근 홍콩의 한 영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전 재산인 56억 홍콩달러(약 8100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최근 영화 홍보를 위해 대만을 방문했을 때 팬들 앞에서도 같은 다짐을 했습니다.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주윤발은 1980년대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으로 홍콩 누아르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대표 배우입니다. 
    그 뒤에도 '와호장룡', '황후화', '캐리비안의 해적-세상의 끝에서', '리플레이스먼트 킬러' 등 중화권과 할리우드의 여러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주윤발은 많은 팬을 갖고 있습니다. 연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윤발은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달 용돈으로 12만 원을 쓰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버스를 타고 다닙니다. 개인 차량도 없습니다. 

     

    휴대폰이 고장 나기 전까지 17년 동안 썼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고 서민들이 가는 식당을 즐겨 찾기 때문에 홍콩 시민들은 그와조우할 때가 많습니다. 주윤발은 시민들의 사진 촬영 요구에도 늘 기쁘게 응합니다. 

     

    팬들은 주윤발의 말과 행동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것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고 평온한 태도로 사는 것입니다. 내 꿈은 행복해지는 것이고 보통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윤발의 아내 천우리롄도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1987년 주윤발과 결혼한 그는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남편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출연료를 투자해 자산을 늘렸을 뿐 아니라 주유발의 기부활동을 돕기 위해 단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두 부부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 1000일 동안 친절을 베푼 사업가에 찾아온 변화

    무려 1000일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친절한 행동’을 해온 여성이 있습니다.

     

    영국의 다니 세이브커(Dani Saveker)는 2016년 1월 1일부터 ‘누군가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행동’을 1000일 동안 꾸준히 했습니다. 

     

    세이브커가 1000일 동안 베푼 친절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날은 지인의 출산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보내기도 했고, 어떤 날은 모르는 사람의 차 문에 과자와 좋은 말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 두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SNS에서 처음 본 불행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물을 보내기도 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그들을 도우러 가기도 했습니다. 어린이 병원을 비롯한 다양한 기관에 기부도 했습니다.

     

    1000일 동안 친절을 베푸는 일을 이어갔지만 처음부터 진심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소기업 컨설팅 회사 GLAS(Global Life Alignment System)의 대표인 그는, 우연히 ‘친절함이 성공적인 리더십의 핵심요소’라는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사회에서 친절함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매일 빠짐없이 친절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연구를 위해 시작한 행동이었지만 그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고 사심 없이 베푼 친절이 누군가에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1년 후, 그는 ‘단순한 연구’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베풀기로 결심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친절’은 예외 없이 모두에게, 어떤 기대도 없이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을, ‘자신이 먼저 시작하는 것’입니다. 친절은 나이, 성별 및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비즈니스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세이브커는 자신의 친절이 다른 이들에게 ‘나와는 다른 누군가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최고로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친절을 받은 사람이 그 결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세 자녀도 친절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면서 그것은 시험 결과가 좋은 것보다더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세이브커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매일 친절함을 베푸는 행동’을 하기를 바라며 한가지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지난 9월 26일, 그녀가 친절을 베푼 지 1000일째를 기념해 ‘친절함을 격려하는 팩(Inspire Kindness Packs)’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팩에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 같은 ‘친절을 베풀 때 매우 유용한 아이디어’가 포함된 키트가 두 개 들어있습니다. 두 개의 키트 중 하나는 구매자 가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수 있습니다. 팩의 구입 비용은 6.95파운드(한화 약 1만 300원)이며, 수익은 모두 정신건강 자선단체인 헤드 투게더(Head Together)에 기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