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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묵조사 (5) - 복을 걷어찬 조카

    한 번은 누이동생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끼니를 잇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진묵조사는 7월 칠석날 조카 내외를 찾아갔습니다.

     

    “오늘 밤 자정까지 일곱 개의 밥상을 차려라. 특별히 칠성님들을 모셔다가 복을 지을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주마.”

     

    조카는 삼촌의 신통력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아는지라 그 말을 믿고 음식을 장만하여 일곱 개의 밥상을 차렸다고 합니다.

     

    밤 12시가 되자 진묵조사가 일곱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보니 자기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같이 땟국물에 절은 지저분한 옷에 눈에는 눈곱이 달렸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한 명은 언청이요, 한 명은 곰보, 나머지는 절름발이, 곰배팔이, 장님, 귀머거리였습니다.

     

    ‘어떻게 저런 거지 영감들만 데리고 왔담?’

     

    조카 내외는 덕을 보기는 틀렸다고 생각하여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내외가 부엌에 들어가 탕탕 그릇 소리를 내며 소란을 피우자, 밥상 앞에 앉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사람까지 일어서려고 하자 진묵조사가 붙잡았습니다.

     

    “저를 봐서 한 숟갈이라도 드시고 가십시오.”

     

    그 말을 들은 마지막 사람은 밥 한술, 국 한 숟갈, 반찬 한 젓가락을 집어먹고 떠났습니다.

     

    모두 떠나 버리자 진묵조사가 안타까워하면서 혀를 찼습니다.

     

    “쯧쯧, 복 지을 인연을 이렇게 차버리다니 참 한심한 사람들일세. 그나마 마지막 분이 세 숟갈이라도 잡수셔서 앞으로 3년은 잘 살 수 있을 거다.”

     

    다음날 조카가 돼지 한 마리를 사게 되었는데 시세보다 많이 싸게 사 왔습니다. 그 돼지가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고, 몇 달이 지나자 집안에는 돼지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부유하게 잘 살던 조카는 어느 날 돼지우리에 불이 나서 모든 재산이 몽땅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인연을 귀하게 여기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는 일화입니다.

  • 청소가 직업인 그림 작가 김예지

    <저 청소일 하는데요?>의 김예지 작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청소에 업을 두었다는 독특한 이력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조금 다르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행복합니다.”

    <저 청소일 하는데요?>(21세기북스)라는 책 표지에 쓰여 있는 글입니다. 이 책이 화제가 된 것은 김예지라는 작가의 특이한 이력 때문입니다.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안정적 직장을 다니던 작가는 26살 때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청소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올해 30대에 들어선 작가가 지난 4년여 동안 청소 일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와 자신이 느낀 감정을 담은 책입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젊은 사람이 청소를? 작가는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들며 “시선 때문에 포기하지 말라"라고 조언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만화나 삽화 등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직장은 그에게 그런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불안 장애가 있던 작가는 싫어하는 사람을 매일 만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때 오랫동안 요구르트 배달을 해 온 어머니가 청소 일을 함께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합니다. 그래서 26살의 젊은 작가는 어머니와 함께 사무실, 병원, 학원 등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막상 해보니 가성비가 좋았다고 합니다. 수입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되고, 작업을 위한 시간도 확보가 됐고 무엇보다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고 틈날 때 커피 믹스를 타서 마시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김 작가가 청소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힘이 됐다고 합니다. 그는 책에서 어머니로부터 ‘남과 비교하지 않기’ ‘자식을 깎아내리지 않기’ ‘항상 나를 생각해주기’ 등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네가 필요하고 맞다고 생각하면 남의 시선보다는 네게 맞는 방향으로 가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낸 후 고등학생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어떻게 견디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고 합니다.

    “이기지 못했어요. 이겼다기보단 견뎠어요. 마음으로 이기고 싶었지만 사실 이기질 못하더라고요. 신경은 쓰였지만 견뎠던 것 같아요.”

    김 작가는 앞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게 꿈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생계가 해결될 때까지는 청소 일을 계속하겠다고 합니다.

  • 동방정교회의 대수도자 시소이스 성인

    시소이스 성인은 동방정교회의 수도자로,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항상 겸손을 강조했다. [이미지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시소이스 성인은 동방정교회의 수도자로 겸손을 강조한 수도자로 유명했습니다.  

     

    이집트 출신인 시소이스는 사막의 성자로 불리는 안토니우스 성인의 뒤를 따라 한평생 금욕주의 수도자로 겸손되게 살았습니다.  

     

    그가 머문 곳은 안토니우스 성인이 일궈놓은 수행터로 이집트 사막의 한 동굴이었습니다. 성인은 이곳에 머물며 60년에 걸친 수도 생활을 통해 높은 영적 성취를 이뤘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많은 이의 병을 낫게 했으며 영혼을 정화했습니다. 죽은 아이를 기도로 살려냈다고도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했지만 늘 자비와 친절로 다른 이를 대했고 사랑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특히 겸손을 강조했습니다.  

     

    한 수도자가 어떻게 하느님을 항상 기억하며 살 수 있겠느냐고 묻자 시소이스 성인은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낮은 자리에 둔다면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겸손을 지닌 사람은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충족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회개의 중요성도 거듭 언급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죄를 지은 이가 회개하는 데 일 년이면 되느냐고 묻자 시소이스 성인은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형제가 온 마음으로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사흘 만에 받아주실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자신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세상을 떠날 때조차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리에 누웠을 때 주위에 몰려온 제자들은 성인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는 것을 봤습니다.  

     

    수도사들은 성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성인은 안토니오스 성인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들이 보인다고 답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인의 얼굴은 더 빛이 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수도사들은 누구와 말씀을 나누고 계시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성인은 자신의 영혼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온 천사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간청하고 있노라고 답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신부님은 회개할 일이 없지 않느냐고 묻자 성인은 나는 회개를 시작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마치자 성인의 얼굴은 더욱 빛났고 주위 사람들은 눈이 부셔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어 번개와 같은 빛이 번쩍이더니 아름다운 향기가, 그러고 나서 번개와 같은 빛이 번쩍이면서 성인은 세상을 떠났고 아름다운 향기가 그곳을 감쌌다고 합니다.

  • 개운조사(5) - 스승의 가르침과 이적

    그날 밤 노인은 조사를 데리고 희양산 중턱에 올랐습니다. 노인이 발걸음을 멈춘 곳에는 넓은 마당만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달빛이 낮처럼 밝았는데 바위 앞이 훤하게 트여 쾌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바위를 가리키며 스승이 일렀습니다.  

     

    “인재가 땅의 기운을 받아 명당의 자리에서 나는 것처럼 수행도 그러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바위 위에 올라서자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담한 암자 하나가 저절로 생긴 것이었습니다.  

     

    조사는 이 암자에서 스승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신이한 이적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끼니때가 되면 먹거리가 저절로 생겼고, 목마르다 싶으면 물이 생겼습니다.  

     

    조사의 신심은 100배나 솟구쳤습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지복의 환희심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조사가 할 일은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에 전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다만 한 가지, 아만(我慢)에서 벗어나 마음을 조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고 아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용맹 정진한 지 7일째 조사는 마침내 간혜지(乾慧地)를 증득합니다.  

     

    간혜지는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이 공통으로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의 첫 번째 단계를 말합니다. 온갖 욕망이 겉으로 일어나지 않고 욕망에 따른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경지가 간혜지입니다.  

     

    욕망은 잠재의식 속에만 남습니다. 탐진치(貪瞋癡,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삼독의 습기는 다했으나 아직 지혜가 부족하기에 마른 지혜 즉 건혜지라 일컫는데, 선정으로 이 부족한 지혜를 보충합니다. 

     

    조사가 간혜지를 얻자 스승이 책 두 권을 내려 줍니다. 그것은 <정본수능엄경> 과 <유가심인록>이었습니다. 

     

    “내가 보현존사(寶賢尊師)에게 구결로 받은 신해수증(信解修證)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진중하게 받들어 간수하라.” 

     

    조사는 공경하게 삼배를 올리고 스승이 내리시는 책을 받잡아 정수리 위로 올렸습니다.  

     

    다시 좌복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스승께서 말씀으로 전해주시는 대승(大乘)의 오묘한 경지를 하나하나 터득해나갔습니다. 

     

    스승은 내리고 제자는 받들고……. 전승이 끝나자 조사는 다시금 공손히 일어나 스승 앞에 100배를 올렸습니다. 사은의 절을 마치자 스승이 제자의 손을 어루만지며 작별의 말을 합니다. 

     

    “나는 이제 간다.” 

     

    말을 마치자 스승은 몸을 솟구쳐 새처럼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조사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한 배 한 배 스승이 사라진 허공을 보며 조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경히 100배를 올렸습니다.  

     

    스승을 전송하고 돌아오니 그동안 머물던 암자도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 개운조사(3)-분주히 다니면서 신발만 닿게 하다

    "개운조사(2) 보러가기(클릭)"

     

     

    그러나, 자애로운 은사님 밑에서 연달이 피붙이들을 여의여야 했던 상처를 어루만지며 생사고락을 넘을 수행의 기초를 닦아나가는 것마저도 잠시, 조사가 입산한 지 1년 후 혜암 선사께서 열반에 드십니다. 참으로 조사의 삶에서 삶의 풍파를 막아주는 어른들의 안락함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요. 

     

    죽음을 이기는 방법을 배우고자 산으로 들어왔는데 이제 스승마저 돌아가시니 이제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은사 스님을 잃은 조사의 입에선 연신 장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 뼈 마디마디마다 무상함이 절절히 새겨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출가수행자의 몸으로 언제까지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조사는 그 후 다른 스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6년 동안 봉암사에서 경학과 참선 공부를 이어갑니다. 한 권 한 권 경학을 떼고 한 번 참선에 들면 밤을 넘기기가 일쑤……. 시간이 흐를수록 수행은 깊어갔지만 조사의 마음 한 켠 아쉬움은 달래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봉암사에서는 죽음을 초월한 스님도, 죽음을 이기는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스님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죽음을 넘어 자유자재한 삶에 이른 큰 스승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싶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러한 열망은 점점 더 깊어지고……, 조사는 마침내 스스로 스승을 찾아 봉암사를 떠납니다. 조사의 나이 19세 되던 해였습니다.

     

    조사는 이후 11년 동안 만행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조사가 찾던 스승은 없었습니다. 세월만 쉼 없이 흘러 어느덧 조사의 나이 서른, 어느 날 조사는 홀연 “공연히 쇠신만 닳게 하면서 분주히 돌아다니네.”라는 옛 선사의 시를 읽게 됩니다. 꼭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 길로 봉암사로 돌아옵니다.

     

     

    "개운조사(4)"에서 이어집니다.

  • 암환자가 쓴 자신의 부고기사

    이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 없는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IMAGE|188|center|caption]]

     

    소냐 토드는 38세인 201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죽음에 너무나 아파했지만 그는 하늘나라로 떠나기에 앞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에 대해 직접 쓴 부고 기사를 통해 귀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 누군가 그 부고 기사를 페이스북에 올렸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줬습니다. 다음은 소냐 토드가 남긴 자신의 부고 기사입니다.

     

     

     

    “제 이름은 소냐 토드입니다. 38세 때 암으로 죽었지요. 저는 자신의 부고 기사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대개 부고 기사는 제가 생각한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부고 기사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함께 모여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연대기처럼 나열하거나 세상을 떠난 이의 삶을 빛나는 누군가의 삶과 시적으로 연결 지으려고 노력합니다. 죽은 사람들이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의 화신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감 없이 사실 그대로 제 삶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때로 성공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력했습니다.

     

    제가 가끔 어처구니없는 말과 농담을 내뱉고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저는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제가 늘 옳은 일을 하거나 옳은 말만 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삶을 끝낼 때 여러분들이 정말 후회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상처를 준 아주 작고 단순한 일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저의 부고 기사를 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는 제 삶에서 도움을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멋지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저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보살펴주고 함께 웃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알게 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축복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있어서 제 삶이 가치가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저를 생각하고, 저를 추모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학교나 교회 또는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십시오.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나아졌다고 말하세요.

     

    담배는 끊으세요. 음주운전, 절대 안 됩니다.

     

    텔레비전과 같은 전자제품을 끄고 집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아이들의 희망과 꿈에 대해 얘기하세요.

     

    비록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용서하세요.

     

    조금이라도 그럴 힘이 있다면 오늘도 누군가를 미소 짓게 만드세요."

  • 히말라야의 선인 라히리 마하사야(1)

    <<히말라야의 선인 라히리 마하사야와 그의 아내 이야기>>

     

     

    라히리 마하사야(Lahiri Mahasay, 1828-1895)를 아시나요? 마하사야는 전설의 요기 바바지의 가르침을 받은 히말라야의 선인(仙人)입니다. 

     

    오늘날 구도자들이 행하는 수행 방편 중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크리야 요가(Kriya-Yoga)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초반 출간된 파라마한사 요가난다(Paramahansa Yogananda, 1893-1952)의 자서전을 통해서 크리야 요가가 소개되지요. 그런데 마하사야는 바로 요가난다의 사조(師祖)입니다. 

     

    마하사야는 생전 20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이 유크테스와르(Swami Yukteswar Giri, 1855-1936)이고, 유크테스와르의 14명의 제자 중의 한 명이 요가난다입니다. 

     

    요가난다는 미국에서 진아실현회(SRF)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통신과정으로 크리야 요가를 배울 수 있게 하지요. 그런데 크리야 요가는 바바지가 전생에서 자신의 제자였던 라히리 마하사야를 히말라야 산속의 한 동굴로 이끈 뒤 그에게 전수해 준 것입니다. 

     

    마하사야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세속에서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스리마티 카시 모니’라는 여자와 결혼도 했습니다. 그런데 카시 모니는 자기 남편이 성자였다는 것을 전혀 몰랐어요. 단지 가난하게 살면서도 돈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남편이 늘 못마땅할 뿐, 그로 인해 바가지도 종종 긁었다고 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카시 모니는 남편과 함께 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납니다. 자기 머리 위에 아름다운 천사들이 떠 있는 꿈을 꾼 것이었어요.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더욱 놀라운 장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가부좌를 튼 채 방 한가운데에 떠 있고, 그를 둘러싼 천사들이 그를 향해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찬란한 광경에 넋이 나간 카시 모니는 여전히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하사야는 아내를 향해 “여인이여, 꿈이 아니다. 영원히 꿈을 깨라. 영원히”라고 말하며 서서히 방바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제서야 꿈이 아니고 현실임을 깨달은 아내는 감격에 겨워 남편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곤 그동안 남편을 구박해 온 자신의 행실에 대해 용서를 빌며 남편을 스승으로 모시겠노라 약조를 올리지요. 그러자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천사들도 오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날 이후 마하사야는 아내와 각방을 썼습니다. 매일 낮이나 밤이나 제자들과 같이 지내며 성자의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카시 모니는 남편을 빼앗긴 기분이었습니다. 비록 남편을 스승으로 모시겠노라 다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하사야는 스승이기 전에 자기의 남편이었습니다. 게다가 대 성취자와 함께 산다고 해서 먹고사는 모든 일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카시 모니 가슴엔 또다시 불만이 차곡차곡 싸여 갔고, 참다 참다 어느 날 그녀는 마하사야에게 또 이렇게 쏘아붙입니다. 

     

    “당신은 온종일 제자들하고만 함께 있어요! 처자식은 어떻게 할래요?! 제발 돈 좀 버세요!”

     

    마하사야는 한동안 아내를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추었어요. 아내는 순간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러다가 영영 남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과 회한에 떠는 카시 모니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때, 텅 빈 방 안에서 갑자기 커다란 음성이 울려 나옵니다.

     

    “그대는 그게 얼마나 헛된 일이라는 걸 모르는가? 또 나같이 형체가 없는 존재가 어떻게 재물을 모은단 말인가?”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겨우 정신을 차린 카시 모니는 제발 모습을 보여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남편의 모습을 다시는 못 볼까 봐 너무나도 두렵다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나는 여기 있네.”라는 말이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드니 남편의 모습이 보이는데,  남편의 머리는 천장에 닿아 있었고 눈은 타오르는 불길 같았습니다. 카시 모니는 또다시 남편의 발밑에 엎드려 하염없이 흐느꼈습니다. 마하사야는 흐느끼는 카시 모니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내렸습니다. 

     

    “오직 성스러운 풍요만을 찾아라.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마라. 마음의 보화를 얻으면 필요한 물질은 저절로 생긴다.”

     

    그리고는 한 제자가 그녀에게 필요한 재물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정말로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들을 위해 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 우화등선한 선인 김가기

    우리 말속에는 수련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 보이는 말이 많습니다. ‘기가 막힌다’, ’기분이 좋다’ ‘기운이 난다’ 등등. 말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우리말 곳곳에 녹아있는, 기와 관련한 말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선도수련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됩니다. 당연히 높은 경지에 이른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분들의 삶을 담은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조선조 초기 고대 역사 특히 단군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역사 책을 갖고 있을 경우 엄벌에 처했을 정도로 관련 서적을 모두 거둬들여 불태웠고, 일제도 식민통치를 위해 민족정기를 북돋울 수 있는 서적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들어 주목을 받고 있는 김가기(金可記) 선인에 대한 기록은 소중한 자료로 생각됩니다. 

     

    물론 그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중국의 선도 관련 서적인 <속열선전> 당나라 때 심분이 쓴 <속선전>, 원나라 조도일이 편찬한 <역세진선체도통감람> 등에 김가기 선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지난 2001년에는 중국 섬서성(陜西省) 종남산 자오곡에서 김가기 선인의 삶을 담은 석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자오곡은 김가기 선인이 살던 곳으로 중국 산서성 종남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계곡인데 절경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계곡은 현지인들이 금선봉이라고 불리는 산봉우리 아래에 있으며 소나무 숲이 해를 가릴 정도로 우거져 일반인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곳이라고 합니다.

     

    속열선전과 비석에 담긴 글에 따르면 김가기 선인은 신라 사람으로 38대 원성왕 때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인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한 뒤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최치원 선생도 빈공과를 통해 당나라 관리가 됐지요. 

     

    김가기 선인은 성품이 침착하고 도를 닦는 것을 좋아했으며 사치스러운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박학다식해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용모는 단정하고, 말과 행동거지에서는 깊은 멋이 풍겼다고 전해옵니다.

     

    김가기 선인은 그렇게 3년을 살다 사신으로 본국인 신라로 돌아갑니다. 고향 땅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김가기 선인은 얼마 뒤 다시 당나라로 돌아와 종남산으로 들어가 황제가 불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찾지 않는 깊은 산중에 띠풀로 엮은 집을 짓고 손수 꽃을 심고 과수를 많이 길렀습니다.

     

    기록을 보면 김가기 선인은 남몰래 덕을 베푸는데 힘썼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청하는 게 있으면 거절한 적이 없었으며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도 매사에 정확했다고 합니다. 

     

    김가기 선인의 삶은 결국 수행이라는 게 주위 사람에, 자신을 길러준 만물을 이롭게 하는 일을 힘써하는 것임을 나타내주는 것 같습니다.

     

    선인으로 칭송받은 분인 만큼 수련도 하셨을 것입니다. 기록에는 복기(服氣)를 통해 몸을 단련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복기란 기를 먹는다는 뜻으로 호흡수련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늘 향불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때가 많았으며 도덕경과 신선경을 외우고 익히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짓고 남을 돕는 일에 힘쓰던 김가기 선인은 당나라 선종 11년(867년) 3월 당나라 황제에게 소를 올립니다. 황제는 그분이 올린 글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신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자와 영문대의 시랑이 되어 내년 2월 25일에 하늘로 올라가야 하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종은 이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내시를 보내 그에게 궁에 들어올 것을 권했으나 김가기 선인은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옥황상제의 조서를 보자고 해도 다른 신선이 관장하므로 인간 세상에는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선종은 김가기 선인이 고집을 꺾지 않자 궁녀 네 명과 내시 두 명을 보내 시중들게 하였으나 김가기 선인은 이를 물리치고 혼자 생활하며 그들을 바깥채에 살도록 했다고 합니다.

     

    내시와 궁녀들은 혼자 사는 김가기 선인의 방에서 밤마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창문 틈으로 몰래 들여다보니 김가기 선인이 용과 봉황 위에 앉은 선관(仙官), 선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점차 나라 안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김가기 선인이 말한 2월 25일이 다가왔습니다.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조정의 여러 사대부를 비롯해 상인, 공인 등 온갖 사람들이 산골 계곡인 자오곡을 가득 메웠습니다. 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오색구름이 피어나고 학이 길게 울었습니다. 계곡 주위에는 봉황이 날고 생황이나 퉁소 소리 같은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펴졌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많은 선인들이 내려와 김가기 선인은 모시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김가기 선인의 삶 특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 그대로 우화등선했다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가기 선인의 신비한 삶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분의 삶의 태도입니다. 

     

    기록에 짧게 나타나 있지만 사람들이 찾아와 청하는 게 있으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는 구절은 만나는 사람, 대하는 사물을 끊임없이 분별하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만나는 사람, 접하는 사물 모두에 깃든 하늘을 보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모두가 이로운 방향으로 아낌없는 도움을 줬을 김가기 선인의 삶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삶을 살고 있는가.

  • 성 요한의 가르침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얻으려면

    어떤 일에서도 즐거움을 바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갖기를 원한다면

    어떤 것도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성취하려면

    어느 것도 성취하길 바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알려거든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 기독교 성자 썬다 싱(4) - 신비체험을 남기고 사라지다

    썬다 싱은 22세인 1911년부터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합니다.

     

    기독교 전통이 거의 없는 인도와 티베트에서 썬다 싱의 전도 활동은 쉽지 않았습니다. 복장을 보고 사두로 여겨 존경을 표하던 사람들도 그가 기독교인임을 알고 나면 외면했습니다. 

     

    굶주림이 일상이었습니다. 추위에 몸이 얼고 더위에 지쳐 주저 앉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썬다 싱은 인도 대륙을 횡단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박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경찰이 그를 감옥에 가둔 채 거머리 때를 풀어 놓기도 했고, 시체가 썪고 있는 우물에 던져져서 팔이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썬다 싱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발길은 티베트로도 향했습니다. 서른살이 될 때까지 티베트 방문을 위해 열 번이나 히말라야를 넘었습니다. 

     

    썬다 싱은 기독교의 본고장이던 서구 여러 나라에도 전도를 위해 방문했습니다. 1920년과 1922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아일랜드,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을 다니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썬다 싱은 기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기도 중에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체험도 했다고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썬다 싱이 경험한 상태를 입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썬다 싱이 신비현상을 체험한 것은 1922년 티베트에 가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눈으로 길이 막혀 꼼짝 못하게 되어 기도를 하던 중 자신이 천사들 무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자신이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에 온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썬다 싱은 이를 시작으로 이런 신비 체험을 자주 하게 됐습니다. 

     

    썬다 싱은 영안으로 보이는 존재에게 궁금한 점을 묻기도 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며 영혼은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썬다 싱이 영안으로 본 존재들로부터 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죽음은 잠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질병이 없다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오는 데 아무런 고통도 없습니다. 마치 몹시 피곤한 사람이 깊이 잠드는 것처럼 인간은 죽음이라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죽음은 너무나 뜻밖에 찾아오기 때문에 죽은 이들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들어간 것을 알아채기조차 힘듭니다. 그들은 충분히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이 육체가 아니라 영체이며 자신이 물질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옮겨온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죽을 때 무지각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죽은 뒤에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사납고 무서운 악마들의 얼굴을 보고 말도 못하고 공포에 떨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이들의 죽음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을 맞으려고 오는 천사들과 거룩한 영들을 보고 극도의 행복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때 먼저 죽은 사람들도 그를 영계로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썬다 싱은 1924년 또 다시 티베트로 향했으나 얼마가지 못해 돌아오게 됩니다.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영양실조 상태였고 폐결핵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2년 동안의 서구 전도 여행으로 피로도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의사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썬다 싱은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몸을 추스리면서 글과 편지를 통해 전도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28년 썬다 싱은 다시 티베트로 향합니다. 하지만 며칠 뒤 길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다 상인들에 구출돼 돌아옵니다.

      

    이듬해인 1929년 그는 다시 티베트에 가겠다면서 길을 나섭니다. 그 뒤로 썬다 싱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으러 나섰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썬다 싱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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