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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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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을 밝히는 미소명상

    나눔은 평화입니다. 

     

    촛불을 나누면 어둠이 물러납니다. 

    내 밥을 덜어 이웃과 나누면 세상의 슬픔이 사라지지요. 

    미소를 나누면 평화가 깃듭니다. 

     

    미소로 밝히는 세상, 

    이렇게 연습해 보시지요. 

     

    - 먼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머뭅니다. 

    - 몇 차례 숨을 쉬며 숨결을 고르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세요. 

     

    - 이제 눈가에 환한 미소를 지어 봅니다. 

      눈길이 어질어지고 부드러워진다는 상상을 하십시오. 

     

    - 이제 입가에 환하고 잔잔한 미소를 지어 봅니다. 

      부처님의 미소, 예수님의 잔잔한 웃음, 아기들의 티없는 미소를 떠올리셔도 좋지요. 

      그럼 얼굴 전체가 환하게 펴지는 것을 실감하시게 될 겁니다. 

     

    - 이제 가슴에 아주 환하고 빛나는 미소를 지어 봅니다. 

      가슴속의 모든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들이 다 녹아 사라져, 뭔가 부드럽고 환한 것들로 채워지는 

      실감을 해 보셔요. 

     

    - 이젠 내 몸, 내 존재 전체가 빛나며 부드러운 미소 그 자체라고 여겨 보세요. 

      그 미소가 온 누리에 잔잔히 퍼져 나가 온 세상이 환해지고 다들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그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 그대 눈길과 입과 얼굴과 가슴과 존재 전체가 미소로 머물 때 

      그것이 바로 평화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가 이웃에, 세상에 스며 듭니다. 

     

    자주 그렇게 머물러 보세요. 

    현관문을 열기 전, 친구들을 만나기 전, 길을 나서기 전….

  • 겨울산을 품을 걸으며

    맨몸으로 우뚝 서 있는 겨울산 품을 걷습니다.

     

    발소리를 내기도

    뒤척이기도 조심스러운 저,

    깊은 고요.

     

    나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 본래의 겸손한 모습이고

    계곡의 물도 더 이상 크게 소리 내지 않습니다.

    제 속살을 드러내 더 장엄해진 진면목을 대합니다.

    꽁꽁 감싸고 있는 제 모습이 문득 누추해집니다.

     

    참 이상도 하지요?

    이즈음 산에 오는 이들도 대체로 혼자입니다.

    여럿이 떼를 지어 왁자한 일이 드무니

    산과 '나'가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서로의 몸과 속을 다 드러내고 마주하는 이 통쾌함.

     

    살면서 더러는 겨울의 산과 나무처럼 침묵할 일임을 깨닫습니다.

    말도 여의고 노래도 여의고 나 스스로를 여의면

    저 깊이를 알 길 없는 고요에 머물 수도 있음을 배웁니다.

     

    오늘,

    갑사 계룡의 깊은 침묵과 서늘한 평화를 전합니다.

     

    잠시 머물러

    깊어지소서.

  • 평화는 어디서

    먼저 건네는 인사에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말에서

    살풋한 미소 한 자락에서

    고요한 들숨 날숨에서

    품어 안는 가슴에서

    비켜서는 발걸음에서

    내려놓는 그 마음에서

     

    온다, 마음의 평화

    피어난다, 세상의 평화

  • '스며듦의 삶, 스며듦의 교육'

    변화는 더디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자극과 충격 보다는, 평화와 사랑이, 너그러움과 충만함이 서서히 스며들도록 기다리는 것이 좋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변화는 더딥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그것이 근원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자극과 충격이 당장은 그럴듯해 보여도 그건 잠시뿐입니다. 

     

    하여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아이들을 오랫동안 지켜보아야 합니다. 

    '스며듦'은 그래서 기다림입니다. 

    가장 자비롭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표정으로, 말씨로, 눈빛으로, 손길로, 숨결로 

    오래도록 우리의 그들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의 말씀대로 

    '내 존재의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하여 

    우리의 평화와 사랑이, 너그러움과 충만함이 

    서서히 스며들도록 

    오래 기다려야 할 일입니다. 

     

    긴 호흡으로, 먼 시선으로……..

  • 제 밥을 덜게 하소서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교육받아야 합니다.“

     

    나눔 단체 JTS의 생각입니다.

    아, 진실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무슨 군더더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신영복 교수의 말씀도 떠오릅니다.

    “…창 밖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달콤한 잠을 잘 권리가 없다……“

     

    ARS라도 누르는 마음, 그것이 사랑 자비의 실천이겠지요.

    나눔의 평화!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제 밥을 덜어 그들과 나누게 하소서.”

  • “엄마, 친구가 하늘나라 갔대”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 코너에 12월10일에 실린 글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금요일 오후였다. 다른 것이라고는 늘 비가 오는 이곳 캐나다 밴쿠버의 겨울답지 않게 무척이나 화창하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처럼 비가 갠 주말을 어떻게 즐길까 고민하며 아들을 맞으러 학교에 갔다. 학교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학부모들. 멀찍이 바라봤을 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때 학교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활짝 웃으며 다가가는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평소 금요일이라면 주말에 놀 생각에 더 활짝 웃으며 나오던 아이가 아니었던가. 아들은 나를 보자마자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진짜 슬픈 소식이었어. 진짜, 진짜, 진짜 슬픈 소식이야. 그 친구가 하늘 나라에 갔대."

     

     

     

    [[IMAGE|228|center|caption]]

     

    느닷없는 비보

     

     

    그 친구라 함은, 지난 학년부터 아들과 한 반이었던, 9월에 시작된 새로운 학년에 첫 짝궁이었던 그 친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근무력증을 앓고 있어 휠체어에서 생활했고, 옆에는 장애학생 지원 선생님이 늘 함께 했지만, 아들의 그 친구는 학교생활에 대부분 참여했었다.

     

    통합교육이 원칙인 이곳 캐나다에서 아이들은 조금 더 몸이 불편한 학생들과 생활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이 친구도 학급 활동에 늘 함께 했다. 지난해 그 친구의 생일 땐 반 전체에서 작은 축하파티도 열었었다. 반에서는 혼자 책을 읽기 힘든 이 친구에게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읽어주곤 했는데 두어 달 전 아들은 자신이 책 읽어줄 차례라며 영어발음을 연습해 갔었다. 몇 주 전 자원봉사로 따라간 현장학습 때도 장애학생 지원 선생님과 함께 참가했던 아이였다.

     

    내게도 충격이었다. 순간 눈물이 쏟아졌고, 먹먹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주친 선생님들의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아들과 같은 반 친구들 중 몇몇도 눈가가 촉촉했다. 아이를 픽업하러 온 부모들 중 몇 명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마음이 조금 추스러지자, 아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들에게는 처음 겪는 상실. 그것도 2년 동안 같은 반을 했던 친구가 10살의 나이에 하늘나라에 간 것을 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아들에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담임선생님이 건넨 종이

     

     

    아들이 비보를 접한 것은 등교하자마자였다. 교실에 들어온 담임선생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몇몇 친구들은 곧바로 눈물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어 담임선생님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종이를 꺼내며 아이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 종이를 둘게요. 수업 도중에라도 마음이 힘들고 슬픈 기분이 들면 언제든지 가져다가 쓰고 싶은 것을 아무 거나 쓰세요. 그림을 그려도 되고, 하늘나라에 간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도 되고, 너무 슬퍼서 화가 나면, 화나는 마음을 표현해도 돼요. 그리고 수업 중에 갑자기 눈물이 나거나, 도저히 수업에 집중이 안 될 땐 도서관에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울고 와도 돼요."

     

    아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이날 그 어떤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수업에 집중하라거나, 이럴 때일수록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도, 그 친구를 위해서 우리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느꼈을 심리적 충격을 이해해주고 그 슬픔을 충분히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함께 울어줄 뿐이었다. 선생님들 역시 슬픔을 숨기지 않았다.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오늘은 마음이 너무 슬퍼서 수업하기가 힘들다"고 아이들에게 털어 놓았고, 지원 나온 대체교사가 이날 수업시간에 함께 했다.

     

    상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심리적으로 깊은 충격과 슬픔을 남기는 경험이다. 특히, 어린 시절 생애 처음으로 겪는 상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여러 차례 맞닥뜨리게 될 또 다른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해 준다.

     

    상실을 맞닥뜨릴 때 정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슬픔을 충분히 표현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 안에서 밀려오는 슬픔을 힘들다고 해서 부인하거나 '괜찮다'고 포장해 버리면, 그 슬픔은 마음 더 깊은 곳으로 꽁꽁 숨어들어간다. 숨어든 슬픔은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오랫동안 일상을 방해하곤 한다.

     

    이런 면에서 선생님의 대처를 듣자 안심이 되었다. 이날 아들과 반 친구들은 수시로 종이를 가져다가 슬픔을 표현했고, 도서관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한바탕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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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장선생님의 메일 한 통

     

     

    그리고 그날 오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교장선생님은 전체 학부모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다시 한 번 비보를 공식적으로 전했다. 그리고 당부했다.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이 다른 이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뜻을 존중해 달라고. 유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말이다. 

     

    이어 교장선생님은 학교는 신속히 밴쿠버 교육청의 위기지원팀(VSB Critical Support Team)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교육청의 위기지원팀은 학교 공동체에서 재난이나 구성원의 죽음 등 정신적인 상처를 남기는 일이 발생했을 경우, 심리적 문제를 비롯한 각종 어려움들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한다.

     

    학생뿐 아니라 슬픔에 빠진 선생님들도 돕고, 때로는 대체 인력을 파견하기도 한다. 충격과 슬픔에 빠진 학교를 체계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제든 아이들이 들를 수 있도록 상담센터를 열어 두었고, 학교와 교육청 소속의 상담사들이 도움을 제공할 채비를 마쳤다고 알렸다.

     

    또한 교장선생님은 강조했다. 이번 일로 인해 아이들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물을 때 주의 깊게 들어주고 정직하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나아가 학교에서도 언제든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 묻고 이야기 하며, 슬픔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집에서도 함께 해달라고 당부했다.

     

    교장 선생님이 보낸 메일을 보니 여전히 먹먹한 나의 마음이 조금은 따스해지는 듯 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터부시하지 않고, 삶의 일부분으로 죽음을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자세, 상실을 경험할 때 생기는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 유가족들을 존중하는 태도, 공동체 차원에서 상처를 극복해 가려는 노력. 아들의 학교는 가슴 아픈 상실을 경험할 때 반드시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차근차근 해내며 애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모습들은 친구를 잃은 경험이 나와 내 아이를 비롯, 그 친구와 가까워 충격과 슬픔이 더 큰 몇몇만이 스스로 감당해내야 할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은 시린 마음 한 켠에 훈훈함과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물론, 아무리 함께하고 서로 위로하더라도 상실을 경험해내는 것은 분명 힘들고 아픈 일일 것이다. 그 충격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육청까지 나서 함께 슬픔을 나누고 도우려는 모습들을 보니 이를 통해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그리고 학부모들도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애써 축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며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분명 이 슬픔을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친구가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길, 유가족들에게도 평화가 함께 하길 기도드린다.
     

  • 떼제, 청년들의 영혼의 쉼터

    떼제공동체에서 기도 중인 청년들. 이미지 출처 : 플리커 (TaizéBirmingham), 퍼블릭 도메인

    “우리가 지금 온 대륙의 젊은이들과 함께 신뢰의 순례를 해 나가는 것은 평화가 얼마나 시급히 필요한지를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물음에 답하려고 노력할 때 평화를 이룩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사는 곳에서 신뢰를 간직하고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이해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떼제공동체 창설자 로제 수사)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분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하늘색 십자가를 본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둘기가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상징한 이 십자가가 공동체의 상징 떼제 십자가입니다. 

     

    [[IMAGE|198|center|떼제공동체를 상징하는 푸른 십자가. 출처 : 위키미디어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roix_de_Taiz%C3%A9.jpg), CC BY-SA 라이센스]]

     

    1940년 8월 한 청년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동부 프랑스 부르고뉴 남부 지방의 작은 마을 떼제(Taize)를 찾았습니다. 그 해 6월 14일 프랑스 파리가 함락된 지 두 달쯤 되는 때였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청년 로제는 전쟁이라는, 사람이 벌인 가장 잔인한 행위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화해와 일치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꿨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해 전쟁을 막고 인류가 한 가족처럼 지내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떼제를 찾은 이유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바로 그곳에 그런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도망자를 숨겨주는 일이었습니다.  

     

    로제에게 가장 먼저 눈에 뜨인 사람들은 나치 독일의 점령지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껴 도망 나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반대의 처지에 놓인 독일군 포로들을 맞았습니다. 젊은이들의 영성 공동체 떼제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떼제가 공동체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9년입니다. 로제와 뜻을 함께 하는 일곱 명의 청년들이 찾아와 독신 생활과 물질적 영적 재산의 공유 등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종신서원을 하면서 공동체 식구들이 생겼고 1952년에는 떼제의 규칙이 만들어집니다. 어떤 기부나 헌금도 받지 않고, 가족의 상속도 받지 않으며, 스스로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하고 나눔을 실천한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평생 단순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차츰 그들의 뜻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공동체에는 지금 공동체에는 20여 개 나라에서 온 1백 명가량의 수사들이 살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출신도 있고, 개신교회 출신도 있습니다. 

     

    떼제에는 1950년대 말부터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로제 수사를 비롯한 공동체 식구들은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이 머물면서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 정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때부터 손님맞이는 떼제의 주요한 부분이 됐습니다.  

     

    지금은 1년 내내 유럽은 물론 다른 대륙에서 찾아온 젊은이들이 떼제를 찾습니다. 한 주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요일에서 다음 일요일까지 1주일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떼제의 정신을 경험합니다.  

     

    이들은 1962년 세워진 ‘화해의 교회’에서 하루 세 차례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기도를 하고 소그룹으로 나눠 대화하는 시간도 갖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아지자 몇 해 전부터 가톨릭 국제공동체인 성 안드레아 수녀회와 폴란드의 우술라 수녀회에서 ‘젊은 순례자’들을 맞는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젊은이들과의 모임은 떼제공동체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사들은 유럽은 물론 다른 대륙을 찾아다니며 크고 작은 모임을 이끕니다. 이는 지구촌에 믿음에 바탕한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신뢰의 순례’입니다. 이들 모임에서 떼제공동체 수사들은 젊은이들이 자기가 사는 바로 그곳에서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도록 돕고 격려합니다. 

     

    가장 큰 모임은 떼제공동체가 매년 말 유럽에서 여는 ‘테제 유럽 젊은이 모임’(Taize European Youth Meeting)입니다. 하지만 이 행사에는 유럽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만 명의 젊은이들 참여합니다. 2004년 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행사에는 8만 명의 젊은이들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올해 행사는 12월 28일부터 2006년 1월 1일까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립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오지만 떼제는 자신을 중심에 두는 법이 없습니다. 떼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직은 하나도 없습니다. 대신 동네, 마을, 도시, 교회, 성당 등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속한 곳에서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떼제공동체가 세계 곳곳을 찾아가며 벌이고 있는 ‘신뢰의 순례’는 그런 젊은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획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1979년 다섯 분의 수사들이 파견되어 서울 화곡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26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한국의 교회와 젊은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화해와 일치의 지구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떼제공동체. 이들의 꿈이 자랄수록 지구촌에는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 떼제공동체의 묵상음악, Laudate Omnes gentes

    음악에도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곡을 만든 이, 글을 쓴 이,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하는 이.

     

    세계 젊은이들의 영혼의 안식처인 떼제 공동체의 음악이 그렇습니다. 테제 공동체의 마음,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Laudate Omnes Gentes Laudate Dominum(세상의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양하라)

     

    노래를 들으며 잠깐 묵상기도를 해보시길.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노래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유튜브 화면 위에 커서를 놓고 마우스 오른쪽을 클릭한 다음 Loop를 클릭하면 반복 재생이 가능합니다.

     

     

  • 농민빚 대신 갚는 인도 영화배우

    인도의 인기 영화배우가 농민의 은행 빚을 대신 갚아줬습니다.

     

    영화 <블랙>과 <위대한 캣츠비> 등에 출연한 인도의 인기 영화배우 아미타브 바찬(76)은 사재를 털어 1398명의 은행 빚을 갚았습니다. 

     

    그가 농민의 빚을 갚기 위해 쓴 돈은 4000만 루피, 우리 돈으로 약 6억 4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바찬이 도와준 농민들은 바찬의 고향인 인도 북부의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찬은 올해 초에도 자신이 살고 있는 마하라슈트라 주 농민 350명의 빚을 갚아줬습니다.

     

    그는 블로그를 통해 “농민들이 겪고 있는 부담 중 일부를 덜어주고 싶다”면서 “그 바람이 이뤄질 때 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온다"라고 선행의 이유를 밝혔다.

     

    인도는 수십 년간 가뭄, 지하수 고갈, 시설 부족, 생산성 저하 등으로 농업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수만 명의 농민이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빚을 내야 하는 농민이 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어려움 때문에 1995년 이후 최소 30만 명 이상의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찬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가운데 한 명으로 19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는 지난 2015년 8월 미국 경제지 포브스에 ‘세계에서 소득이 가장 많은 남자배우’ 7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포브스가 당시 밝힌 그의 1년 수입은 약 3350만 달러(약 378억 4500만 원)였습니다. 

  • 기독교 성자 썬다 싱(2) - 성자 마하리쉬 만나다

    예수님의 현현은 썬다 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습니다. 썬다 싱은 그 순간부터 평생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시크교도인 아버지와 가족 친지들은 썬다 싱의 그런 변신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해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은 썬다 싱에게 싸준 점심밥에 독약을 넣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썬다 싱은 성공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 일을 도우며 틈날 때마다 고요히 묵상을 했습니다.

     

    그렇게 33일이 지난 뒤 썬다 싱은 사두로서 길을 나섰습니다. 사두는 인도에서 집을 떠나 길에서 생활하는 수행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듬해 썬다 싱은 코드갈이라는 곳에서 스토크스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청빈한 삶을 살고자 인도에 온 사람이었습니다. 썬다 싱은 그와 2년 동안 동행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가르침을 알게 됐고 이를 통해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습니다.

     

    썬다 싱은 전도 여행 중에 귀한 만남을 가집니다. 그가 힌두신들이 자주 나타난다고 알려진 성산 카일라스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돌십자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힌두교의 성산에 십자가라니.

     

    그는 십자가의 ‘주인'을 찾아 주변을 다니다 몸의 균형을 잃고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지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얼마를 지났을까 의식을 되찾고 보니 큰 동굴 입구에 백발로 전신이 뒤덮인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노인의 모습은 기괴했습니다. 머리카락과 수염과 눈썹이 길게 자라 온몸과 얼굴을 덮고 있어서 얼핏 봐서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야생 곰이나 전설의 히말라야 설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마하리쉬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성자는 당시 자신의 나이를 318세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원래 이슬람교도였으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수회 신부인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조카  제르나우스자비에르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첫 만남에서 그는 썬다 싱에게 함께 기도하자면서 자비에르가 줬다는 양피지 신약성경을 꺼내더니 썬다 싱에게 산상수훈을 읽어줬습니다. 마하리쉬는 이 양피지 성경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썬다 싱에게 선물로 줍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하리쉬는 그동안 썬다 싱이 겪은 일들을 직접 본 듯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표범과 함께 밤을 지낸 일, 산길에서 굴러떨어진 일 등등.

     

    마하리쉬는 썬다 싱에게 천국과 지옥, 삶과 죽음, 죽음 뒤의 세계 등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썬다 싱은 마하리쉬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웠고 텅 빈 마음에 사랑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베푸는 일에는 머뭇거림이 없었습니다.

     

    썬다 싱이 열 번째 히말라야를 넘을 때였습니다. 티베트 사람 한 명과 길을 가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폭설로 산길이 모두 막힌 데다 눈보라가 쳤습니다.

     

    두 사람은 길을 가다 눈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사람은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썬다 싱은 그 사람을 업고 가자고 했지만 동행인은 그러다가 우리도 함께 죽는다며 혼자 길을 재촉했습니다.

     

    썬다 싱은 그 사람을 들쳐 업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길을 헤쳐나갔습니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몇 시간을 지났을까 길에서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봤습니다. 얼어 죽은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함께 길을 갔던 티베트 사람이었습니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사람을 업은 썬다 싱은 힘이 들어 몸에 열이 났고 그 열기가 얼어서 죽어가던 사람에게 전달되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썬다 싱도 힘은 들었지만 몸에서 나온 뜨거운 열기로 히말라야의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이지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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