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ALL : 예언

Contents List 3

  •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스베덴보리(3)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안내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여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뒤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중간영계를 거쳐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중간영계를 천국행이나 지옥행이냐를 가르는 심사가 이뤄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중간영계는 지구의 모습과 너무 흡사해 사람들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잊을 정도라고 합니다. 중간영계에서 죽은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기도 합니다.

     

    중간영계에서 머무는 동안 사람들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지구상에서 다른 이의 눈에 하찮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삶을 살았더라도 천국의 마음을 갖고 살았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반대로 남들 눈에 아무리 고상하고 이타적인 삶을 산 것처럼 보였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명예나 권력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 사람의 모습은 점점 지옥에 사는 악령들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본래모습이 드러난 뒤에 사자들은 일정한 교육을 받은 뒤에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이 각각 세 개로 나눠져 있다고 했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착하게 산 사람들이 가는 제1천국이 맨 아래에 있고, 그 위에 제2천국과 제3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방문했을 때 제3천국은 아직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옥도 제1지옥, 제2지옥, 제3지옥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지옥에 사는 영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하느님으로 여기는 이들로 서로를 괴롭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았습니다.

     

    제1지옥에는 악령이 제2지옥에는 악마가 제3지옥에는 악귀가 삽니다. 이들의 형상은 지구상에 있는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흉측하고 기괴하며 섬뜩하고 무섭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지구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영인들 모두 지구에 사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기 위해 애쓰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구는 천국의 천사와 악령 즉 선과 악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전장터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가기가 생각보다 쉽다"고 했습니다. 왠만큼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천국에 가느냐, 그 천국에서 어떤 집에서 사느냐의 기준은 오직 한 가지, 얼마나 이타적인 삶을 살았느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천국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구상에서의 삶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지구상에서의 100년도 안 되는 삶이 영원한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가기 위한 덕을 쌓거나 잘못을 회개하는 것 모두 오로지 지구에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기회는 지상에만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죽음도 '예언'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죽는 날을 밝힌 방식은 독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한번도 만난 일이 없던 존 웨슬리라는 목사에게 편지를 써서 그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자신이 1772년 3월 29일 영계로 '이주'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만나려면 그 전이 좋겠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실제 그는 자신이 '예언'한 그날 그 시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삶과 그가 체험한 천국과 지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믿음이 없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대해 비판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 천국에 가기 위한 6가지 삶의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셋째. 매사에 양심을 지켜라.

    넷째,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

    다섯째, 자기 생명까지 희생하는 사랑은 사랑의 극치이다.

    여섯째, 마음의 참 평화를 확인하라.

    천국에 가려면 지상에서의 삶을 천국 사람들처럼 살라는 말입니다. 끝.

  •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스베덴보리(1)

    엠마뉴엘 스베덴보리는 스웨덴 사람은 17~18세기를 살다 간 인물입니다. 

     

    그는 1688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웁살라 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습니다. 아이작 뉴턴과 같은 반열에 올랐고 현대의 인물에 비교하면 아인슈타인급에 해당하는 과학자였지요.
     

    하지만 그는 57세에 과학자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하게 되면서 그동안 쌓아 온 모든 것을 버리고 신학자이자 종교인, 신비가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와 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계의 진리를 알고 보니 이는 학문이 아니라 인류의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 특별한 소명은 내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천, 수만 배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체험을 했기에 자신이 과학자로서 평생 쌓아온 업적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가게 됐을까요?

     

    스베덴보리는 1743년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꾸던 꿈과 너무도 다르고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꿈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야 그 꿈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알게 됐지만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한 지 2년 쯤 지난 1745년 스베덴보리는 영국 런던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단골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스베덴보리는 강렬한 빛줄기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 빛 속에서 사람 같은 인물이 서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다음날 밤 자신의 방에서 잠을 청하던 스베덴보리는 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전날 식당에서 경험한 것처럼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전날처럼 빛 속에서 한 신비한 인물도 보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신비한 인물이 자신을 하느님이 보낸 사자라고 밝혔다는 겁니다. 그 신비한 인물은 자신이 스베덴보리를 영적인 세계로 안내할 테니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세상 사람`

     

    그때부터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영적 세계에 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영적인 몸을 통해서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스베덴보리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때 육신에서 분리된 스베덴보리의 영적인 몸은 천국, 지옥 등 영적 세계를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몸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을 '죽음의 기술'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음의 기술'은 동양에서도 전해 내려오는 얘기입니다. 한국 전통 심신수련법을 이어가고 있는 국선도에서는 고차원의 수련을 하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얼령'을 몸밖으로 내보내 영적인 차원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중국 도가의 그림을 보면 몸 안에 그 사람과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몸이 있는데 이를 국선도에서는 얼령이라고 부릅니다. 이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얼령을 띄운다고 하고, 중국 도가에서는 이를 양신출태(陽神出胎)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얻게 된 능력은 아마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스베덴보리는 그 뒤 영적인 세계를 넘나들며 경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몸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몸 밖에 나온 영적인 몸은 육체까지 지배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합리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기술'이 사실임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그는 스웨덴 국왕 앞에서 이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스웨덴 국왕은 스베덴보리를 불러 세상을 떠난 한 장군을 만나 그가 남긴 비밀 유서의 내용을 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 장군은 스베덴보리가 만나본 적이 없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궁궐에서 소파에 누운 채 '죽음의 기술'을 통해 세상을 떠난 장군을 만나 그로부터 유서 내용을 듣고 돌아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세상을 떠난 장군으로부터 들었다는 말과 국왕이 갖고 있던 비밀 유서의 내용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이밖에도 스베덴보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스톡홀름에서 큰 화재가 난 사실을 맞췄고, 한 귀족 부인의 죽은 남편을 만나고 돌아와 그가 남긴 귀중한 문서가 든 비밀서랍의 위치를 찾아주기도 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이런 일화들이 알려지면서 스베덴보리의 영적 체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죽음의 기술'을 통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원불교 지도자의 정치 예언

    2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원불교 교무로 출가한 친구와 정치 얘기를 나눴습니다.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서민들을 보살피는 정치인이 많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개탄했지요.

     

    그 친구는 원불교의 큰 스승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며 그런 시대가 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2020년대가 되어야 좋은 정치인들이 많이 나온다. 그때가 되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라 공심(公心)을 가진 이들이 정치를 하려고 할 것이다.”

     

    정치가 실망을 줄 때마다 원불교의 큰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그런 정치가 시작되기를 고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국정 농단 사건까지 겪으면서 그 ‘예언’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면 그 말씀이 실현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우선 공심을 가진 국회의원들의 숫자가 늘었습니다. 개인의 영달보다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이 꽤 많습니다. 국회의원직에 연연하지 않고 출마를 포기하는 이들의 모습에서도 그런 게 느껴집니다.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이득을 보는 게 어려워진 점도 정치권의 물갈이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감시의 눈길이 많아졌고 수사기관도 예전보다 권력의 눈치를 덜 봅니다.

     

    앞으로는 이권을 노리고 수억 원이나 수십억 원의 공천헌금을 내고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415 총선을 앞두고 여야 각 정당이 영입하는 인재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고위 공직자 출신이나 이름난 이들 대신 평범한 사람들이 영입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영입한 30대 소방관 오영환씨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유한국당도 체육계 미투1호로 알려진 김은희씨를 영입했습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여전히 국회의원직을 출세하는 자리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고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힘있는 이들의 편을 드는 정치인들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원불교 큰 스승이 말씀하신 ‘예언’이 머지 않아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공심을 가진 이들이 그득한 국회의사당을 꿈꿔봅니다.

  • 이영표 전 국가대표 선수가 양말 사업을 하는 이유

     스타트업 기업인 '삭스 업(Socks up)'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이영표 전 국가대표 선수 [이미지 : 꿈 스페인 유튜브 캡쳐]

    이영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가운데 한 명입니다. ‘헛다리짚기’ 드리블로 전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요.

     

    그 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독일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 캐나다 밴쿠버 화이트캡스 등 세계 유명 축구 클럽에서 활약했습니다.

     

    은퇴한 뒤에는 KBS 축구 해설위원으로 경기 결과를 족집게처럼 맞히는 ‘예언’으로 시청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축구가 삶 그 자체였던 이영표 씨는 지금 전혀 낯선 분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의 일터는 하는 곳은 사회적 기업들의 성지인 서울 성수동 소셜 벤처 빌딩입니다. 스타트업인 ‘삭스 업(Socks up)’의 대표가 그의 직함입니다. 삭스 업은 양말이나 풋 크림과 같은 풋 웨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삭스 업’은 축구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넘어졌다 일어날 때 혹은 프리 킥이나 코너킥을 차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양말을 끌어올리는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이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이들을 돕고 ‘삭스 업’ 시키고 싶었는데 기부를 받아서 하는 것은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삭스 업은 홈페이지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양말을 끌어올리게 되는 인생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이 순간들을 ‘SOCKSUP MOMENT’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SOCKSUP MOMENT는 당신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순간일 수도 있고,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묻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삭스 업 모멘트는 언제인가요? 누군가의 SOCKSUP MOMENT를 한 켤레의 양말로 구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단순한 양말 한 켤레를 넘어, 여러분의 일상 속 크고 작은 ‘순간’들을 일깨워주는 작은 상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의 글처럼 삭스 업은 누군가의 스토리를 한 켤레의 양말로 만들어 그 양말을 신는 사람에게 힘과 위안을 주고 한 사람의 SOCKSUP MOMENT가 다른 사람의 SOCKSUP MOMENT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탄생한 상품이 유명 힙합 아티스트 코드쿤스트의 편지로 디자인한 양말입니다.

     

    코드쿤스트는 무명 시절 자신을 알리고 싶어 미국의 유명 래퍼인 조이 베데스에게 메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당연히 답장이 없었지요.

     

    그는 실망하지 않고 베데스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등 주변 인물들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편지를 읽은 매니저가 그의 음악을 베데스에게 들려줬고 그는 코드쿤스트를 당장 로스앤젤레스로 초청했습니다. 그렇게 코드쿤스트는 유명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삭스 업은 코드쿤스트가 베데스에게 보낸 편지로 디자인 한 양말을 만들었습니다.

     

    [[IMAGE|638|center|삭스업에서 제작한 코드쿤스트가 베데스에게 보낸 편지로 디자인한 양말 [이미지 : 삭스업 홈페이지] ]]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올라 있는 ‘SOCKSUP MOMENT - Footprint Project VOL1’은 누군가에게 SOCKSUP MOMENT를 주기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사는 17세 소년 사킬레 미콴다입니다. 그는 축구가 자신의 인생이라고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고 프로 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년입니다.

     

    그가 사는 우스터는 케이프타운에서 동쪽으로 130km 떨어진 작고 가난한 마을입니다. 우스터는 꿈도 희망도 없이 깡패가 되거나 마약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서 프로 입단 테스트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삭스 업에 100통 가까운 편지를 보냈습니다.

     

    2018년 5월 삭스 업은 그를 초청해 테스트 기회를 줬습니다. 안타깝게도 불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미콴다의 표정은 밝았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회가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는 억울함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미콴다는 자신도 남에게 기회를 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고 합니다.

     

    이 대표는 독실한 기독교 인으로 다른 이들을 돕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는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인 컴패션의 한국 홍보대사도 맡고 있습니다. 컴패션은 1952년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한국의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만든 국제기구입니다. 그 자신도 여섯 가정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에 삭스 업을 시작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건 여러 가지가 있어요. 먹고, 자고, 입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어요. 사람은 영적 존재니까 희망이 있어야 해요. 먹는 것은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만,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희망이에요. 저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절망에 빠진 누군가,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삭스업 무브먼트’의 기본 취지예요."

    

  • 진표율사(1) - 개구리 울음 소리에 출가를 결심하다

    진표율사는 신라시대 고승으로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시조입니다. 처절한 수행을 통해 미륵보살의 수기(부처님의 예언)를 받은 이후 많은 이적과 법회를 통해 민중을 일깨우고 가르쳤습니다. 중국 <송고승전>에 전기가 실려 있고, <해동고승전>에 출가 당시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성덕왕 때(718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진표율사가 11살 때의 일입니다. 친구들과 놀던 소년은 논둑에서 개구리 30마리를 잡아 산 채로 버들가지에 꿰어놓고 물에 넣어둔 뒤 산으로 갔습니다.

     

    다음 해 봄날이었습니다.

     

    “개굴개굴, 개굴개굴…….”

     

    소년의 귀에 처연한 개구리울음소리가 들려와 가보니, 예전의 그 장소에서 개구리들이 꿰미에 묶인 그대로 살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산 생명을 해를 지나도록 괴롭혔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은 소년은 불도에 뜻을 두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진표율사는 12살에 출가하여 금산사에서 숭제 스님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숭제 스님이 혜안으로 보니 진표는 석가모니 부처 다음에 오실 미륵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수행자였습니다. 스님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10년 넘게 수행을 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당나라 선도스님 밑에서 공부하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현신께 직접 5계를 받았다. 너도 미륵보살께 지성으로 참회하고 용맹 정진하여 직접 계를 받도록 하여라.”

    “얼마나 부지런히 수행해야 스님처럼 그렇게 계를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이라도 되는 일이다.”

     

    진표스님은 자신도 그렇게 부처님의 계를 받고 싶다는 간절한 서원을 했습니다. 스님은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변산에 있는 불사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변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의상봉에 올라가면 깎아지른 절벽 아래 한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아슬아슬한 좁은 길이 있고 서너 평 될 만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앞이 탁 트여 마치 구름 속에 앉은 것 같고 신성한 기운이 어려 있는 이곳에서 진표율사는 자나 깨나 미륵부처님께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습니다.

     

    (계속)

    

  • 히말라야의 성자 밀라레빠(3) - 마르파의 가르침과 수행의 길

    나중에 마르파는 마음이 누그러져 밀라레빠를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밀라레빠가 오자 마르파는 여러 제자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분노에도 신성한 분노가 있다. 내가 나의 영적인 아들 밀라레빠에게 행한 것이 그런 분노였다. 내가 밀라레빠를 아홉 번 크게 절망시켰으면 그의 모든 죄업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다메마의 동정심 때문에 죄업이 약간 남았지만 여덟 번의 큰 고난을 겪어 큰 죄는 벗어났다. 이제 내 심장처럼 소중히 여기는 가르침의 세계로 밀라레빠를 입문시킬 생각이다.”

     

    그날 밤 제단에 공물이 놓인 뒤 밀라레빠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마르파는 요가의 여러 단계와 방법, 그리고 체계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밀라레빠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처음부터 나는 네가 훌륭한 제자임을 알았다. 너는 스승님이 내게 은총으로 하사하신 제자다.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모든 시련을 순종과 인내심으로 견디었으니 훌륭한 자격을 갖춘 제자들을 많이 두게 될 것이다.”

     

    밀라레빠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뒤 로닥탁냐라는 바위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머리 위에 등불을 밝히고 정진하였습니다. 11개월이 지나 마르파가 찾아와 동굴의 문을 허물게 하고 그동안 수행하며 생각한 것을 물었습니다. 밀레르빠는 노래를 불렀고 그것을 들은 마르파는 기뻐하였습니다.

     

    해탈을 염원하는 자들에겐 이 몸이

    자유와 축복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그릇이지만

    죄업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보다 낮은 존재 상태로 끌어내리는 사슬입니다.

    이승의 삶은 위로 오르거나 아래로 내려가는 사닥다리입니다.

    현재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며

    현재의 선택에 따라서 미래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니

    현시점에서의 올바른 선택이 가장 중요합니다.

     

    밀라레빠는 몇 년 동안 더 가르침을 받으며 관정의례를 받고 나로파가 예언한 장푹동굴로 갔습니다. 동굴 속에서 지내는 동안 밀라레빠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꿈속에서 허물어진 집이 보였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여동생은 외톨이가 되어 방랑하고 있었습니다. 밀라레빠는 연로한 어머니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스승에게 잠시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아, 그렇게 하여라. 그러나 네가 집에 간다고 해도 살아계신 어머니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너와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준 가르침은 신성하여 세속적인 허영으로 변질되면 신들의 분노가 있으니 주의해라. 나중에 네가 너의 제자들을 만나게 되면 정성을 다해 돌보고, 진리의 빛을 찾도록 힘껏 도와라.”

  • 동방정교회의 대수도자 시소이스 성인

    시소이스 성인은 동방정교회의 수도자로,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항상 겸손을 강조했다. [이미지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시소이스 성인은 동방정교회의 수도자로 겸손을 강조한 수도자로 유명했습니다.  

     

    이집트 출신인 시소이스는 사막의 성자로 불리는 안토니우스 성인의 뒤를 따라 한평생 금욕주의 수도자로 겸손되게 살았습니다.  

     

    그가 머문 곳은 안토니우스 성인이 일궈놓은 수행터로 이집트 사막의 한 동굴이었습니다. 성인은 이곳에 머물며 60년에 걸친 수도 생활을 통해 높은 영적 성취를 이뤘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많은 이의 병을 낫게 했으며 영혼을 정화했습니다. 죽은 아이를 기도로 살려냈다고도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했지만 늘 자비와 친절로 다른 이를 대했고 사랑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특히 겸손을 강조했습니다.  

     

    한 수도자가 어떻게 하느님을 항상 기억하며 살 수 있겠느냐고 묻자 시소이스 성인은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낮은 자리에 둔다면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겸손을 지닌 사람은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충족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회개의 중요성도 거듭 언급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죄를 지은 이가 회개하는 데 일 년이면 되느냐고 묻자 시소이스 성인은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형제가 온 마음으로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사흘 만에 받아주실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자신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세상을 떠날 때조차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리에 누웠을 때 주위에 몰려온 제자들은 성인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는 것을 봤습니다.  

     

    수도사들은 성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성인은 안토니오스 성인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들이 보인다고 답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인의 얼굴은 더 빛이 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수도사들은 누구와 말씀을 나누고 계시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성인은 자신의 영혼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온 천사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간청하고 있노라고 답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신부님은 회개할 일이 없지 않느냐고 묻자 성인은 나는 회개를 시작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마치자 성인의 얼굴은 더욱 빛났고 주위 사람들은 눈이 부셔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어 번개와 같은 빛이 번쩍이더니 아름다운 향기가, 그러고 나서 번개와 같은 빛이 번쩍이면서 성인은 세상을 떠났고 아름다운 향기가 그곳을 감쌌다고 합니다.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3)

    이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이 없는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Fotorech)

    힐데가르트는 농사와 가축 기르기 뿐 아니라 산과 들에 나는 식물과 관련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식물을 가꾸고 거둬들이며 말리고 보관하는 방법을 일일이 수녀들에게 알려줬고, 식물을 통한 치료법도 연구개발했습니다. 

     

    수녀원에는 약초를 보관하는 방도 만들었습니다. ‘수녀원 약방’이라 불린 그 방에서 힐데가르트는 약초의 효능과 질병 치료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어느 날 한 여성이 끓는 물에 데여 심각한 화상을 입은 아이를 안고 수녀원을 찾아왔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약초로 만든 연고가 담긴 주머니를 상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쳤고 몇 시간이 지나자 상처도 아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보석도 치료에 썼습니다. 보석의 성분이 사람이 지닌 생명에너지(비리디타스 Viriditas)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병이 있으면 그 병을 고치는 방법이 자연 속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양한 곡식은 물론 산과 들에 피어 있는 풀과 꽃과 약초들이 지닌 치유능력을 하느님의 섭리로 봤습니다.

     

    그는 탁월한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쓴 시에 곡을 붙여 찬송을 하고 음악극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만도 120편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힐데가르트는 서양 음악 최초의 작곡가로 꼽히기도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여든의 나이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한 귀족이 세상을 떠난 뒤에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마인츠의 주교성에서 전령이 찾아와 그 귀족이 생전에 나쁜 짓을 저질렀다며 그 사람이 축복받은 땅에는 묻힐 수 없기 때문에 시신을 파내 수녀원 밖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그가 죽기 전에 고해성사를 해 교회로부터 사면되었음을 들어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무덤을 모두 평평하게 만들어 그 사람의 무덤을 찾지 못하게 했습니다.

     

    수녀원에는 영성체 성사 금지 등의 징계가 내려졌지만 힐데가르트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잇따른 탄원서와 그를 아끼던 몇몇 대주교의 도움으로 금지령은 해제됐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쯤 뒤에 힐데가르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에대해서도 자신과 함께 한 수녀들에게 미리 말했다고 합니다. (끝)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1)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2)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2)

    "하늘이 열리면서 머리 위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밝은 광채가 쏟아져내렸습니다. 그 빛은 나의 심장 전체와 가슴을 불꽃처럼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시편서, 복음서, 그리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의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계시도 함께 받았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듣는 것을 말로 전하라"라는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계시를 무시했습니다.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심하게 앓아눕게 되자 신의 계시를 거역한 것 때문임을 깨닫고 자신이 본 환상을 글로 쓰기로 결심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디시보덴베르크의 수도원장인 쿠노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일생 동안 스승이며 조언자이자 친우였던 수도승 볼마르의 도움으로 26개의 묵시가 담긴 〈스키비아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키비아스는 ‘길을 알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책이지요.

     

    그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 천사 루시퍼의 타락, 아람과 이브의 원죄, 노아를 비롯한 유대 선지자들의 행적,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초대 교회 순교자들, 앞으로 일어날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 등을 책에 담았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저술을 시작한 지 얼마 뒤에 쿠노는 힐데가르트의 작업을 마인츠의 대주교 헨리에게 보고했고 이는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까지 알려져, 교황은 종교회의를 통해 힐데가르트의 환상에 대해 논의한 뒤 저술을 허락하게 됩니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깨달음을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은 불교의 만다라 못지않게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계시를 받은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고 보석치료와 자연치유에 대한 의학 관련 책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작 범위는 방대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수녀였으나 활동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불의한 일에 대한 비판에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부자들은 물론 교회 권력도 그의 날선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심지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에우제니오 3세 교황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 물어뜯으려고 으르렁대거나 닭처럼 바보같이 한밤중에 꼬꼬댁거리는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부자들에게 가진 것을 굶주린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수녀원을 찾아온 황제를 향해서도 잘못한 일을 꾸짖었습니다.

     

    수도공동체인 수녀원을 관리하는 일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두 개의 수녀원을 세웠고, 이 수녀원은 독립적으로 운영됐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각지에서 그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도왔습니다. 병자와 가난한 이들은 그에게서 특별한 돌봄을 받았습니다. 치유에 관심이 많아 약초 등을 활용한 자연요법을 연구했고, 보석을 통한 치료법도 만들었습니다. 음악도 주요한 치유 도구였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여성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였지만 그는 여성임을 자랑하라고 수녀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수녀들에게 하루에 한 잔씩 포도주를 마시라 고도 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서요. 

     

    힐데가르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디지보덴베르크 수녀원에 사는 수녀님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습니다. 수녀가 되어 함께 살고자 하는 여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녀원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힐데가르트는 새 수녀원을 짓기로 하고 루페르츠베르크라는 산에 새 수녀원을 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1)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3)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1)

    “온 힘을 다해 생명을 보살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응답합니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세요. 여러분 안에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창조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의 원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듯이 신성도 그렇게 만물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빙엔의 예언자로 불리는 힐데가르트가 한 말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한평생 수녀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삶을 산 그에게는 많은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예언자, 신비주의자, 생태주의자, 신학자, 의사, 치유가, 자연주의자, 작곡가, 미술가 등등.

     

    힐데가르트는 1098년 독일 라인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고, 교황권과 황제권이 맞서기 시작하며, 그런 혼란에 대한 대안으로 극단적 금욕을 주장하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형제자매들이 뛰어놀 때 어린 힐데가르트는 꽃과 식물을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모가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면 자신 안에 보이는 그림을 보는 게 재미있고 좋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가 3살 때부터 본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은 특별한 환시였습니다.

     

    부모님은 힐데가르트가 여덟 살일 때 한 수도원에 맡깁니다. 열 번째 아이를 십일조로 바치겠다고 했던 교회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 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신자들과 성직자들 안에 기초를 놓아 주신 불타는 정의가 희미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내가 태어났고 부모님은 탄식하며 나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보내진 곳은 일반 수녀원이 아닌 디시보덴베르크산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백작의 딸로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던 유타가 살고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유타로부터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수도원은 당시 어린 소녀들이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시편 암송, 악보 읽기, 악기 연주 등을 배우면서 수녀가 되기 위한 수련 기간을 거친 뒤 열다섯 살 때 수녀가 됐습니다. 1136년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힐데가르트는 수녀들의 만장일치로 수녀원장이 됩니다.

     

    수도원장으로 헌신하면서도 힐데가르트는 기도와 묵상을 지속했는데 그녀가 42세쯤이었을 때 신비한 환상을 겪게 됩니다.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