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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운조사(4) - 드디어 참 스승을 만나다

    봉암사로 돌아온 조사는 환적암(幻寂庵)에 머물며 불철주야 용맹 정진을 이어갑니다. 침식도 잊고 부처님께 오직 참 스승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기도나 참선 중에 온갖 이상한 현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납니다. 별의별 환상들이 다 나타났습니다. 환상은 현실처럼 생생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여자가 요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눈앞에 황금 덩이기 놓이기도 하고, 호랑이가 입을 딱 벌리고 다가오기도 하고,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기도 했습니다. 도적이 방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가 천상에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온갖 진귀한 음식들로 차려진 밥상이 불쑥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조사는 이러한 환상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리따운 여자의 요염한 자태를 보아도 무덤덤했습니다. 황금은 돌로 보였습니다. 호랑이가 나타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구렁이가 몸을 감아도 징그럽지 않았습니다. 도적들이 대갈통을 부수어버리겠다 호령하며 방망이를 휘둘러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산해진미를 보아도 먹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눈앞에서 온갖 환상들이 나타났다 스러지기 일 년여, 조사는 그저 고요한 마음으로 정진을 이어갈 뿐이었습니다. 

     

    어느 해 질 녘이었습니다. 웬 미치광이 중이 비틀걸음으로 환적암을 찾아왔습니다. 너덜너덜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온몸의 부스럼에서 진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옷과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부지깽이라도 들어 바로 쫓아냈겠지요? 하지만 조사는 이 비렁뱅이 노인을 안으로 맞아들여 극진히 봉양합니다. 

     

    그런데 이 거지 스님의 행패가 아주 고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툭하면 욕설을 퍼부으며 조사를 마구 때렸습니다. 조사는 그래도 화가 안 났습니다. 어떤 때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조사에게 칭찬의 말을 해댔습니다. 그래도 조사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조사의 마음은 그저 잔잔한 호수같이 고요할 뿐이었습니다. 

     

    거지 스님과 같이 지낸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밤중에 거지 스님이 조용히 조사를 불렀습니다. 

     

    “너는 정말 마음을 잘 비웠구나. 못살게 굴어도 화를 안 내고 칭찬을 해도 좋아하지 않으니 마음이 참으로 훌륭하게 닦이었구나. 틀림없이 크게 득도할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네가 부처님께 그토록 애타게 기원한 것이 무엇이더냐?" 

     

    조사는 이 노인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고 대답했습니다. 

    "참 스승님을 만나 부처님의 법을 잘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또 물었습니다. 

    “부처의 법을 배워 무엇 하려고?” 

     

    “생사를 뛰어넘는 대도를 이뤄 가없는 중생들을 구하고자 하옵니다.” 

     

    노인의 입에서 한없이 자비로운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내가 네 스승이 되면 어떻겠느냐?" 

     

    그 순간 조사는 이 노인이 자기가 그토록 만나옵기 간절히 바라던 큰 스승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조사는 거듭거듭 큰절을 올렸습니다. 

     

    “불감청이어든 고소원이외다. 부디 저를 제자로 삼아주소서.” 

     

    조사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렸습니다. 

     

    “일어나라. 너는 이미 내 제자다.” 

     

    노인이 따사롭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개운조사(3)-분주히 다니면서 신발만 닿게 하다

    "개운조사(2) 보러가기(클릭)"

     

     

    그러나, 자애로운 은사님 밑에서 연달이 피붙이들을 여의여야 했던 상처를 어루만지며 생사고락을 넘을 수행의 기초를 닦아나가는 것마저도 잠시, 조사가 입산한 지 1년 후 혜암 선사께서 열반에 드십니다. 참으로 조사의 삶에서 삶의 풍파를 막아주는 어른들의 안락함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요. 

     

    죽음을 이기는 방법을 배우고자 산으로 들어왔는데 이제 스승마저 돌아가시니 이제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은사 스님을 잃은 조사의 입에선 연신 장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 뼈 마디마디마다 무상함이 절절히 새겨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출가수행자의 몸으로 언제까지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조사는 그 후 다른 스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6년 동안 봉암사에서 경학과 참선 공부를 이어갑니다. 한 권 한 권 경학을 떼고 한 번 참선에 들면 밤을 넘기기가 일쑤……. 시간이 흐를수록 수행은 깊어갔지만 조사의 마음 한 켠 아쉬움은 달래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봉암사에서는 죽음을 초월한 스님도, 죽음을 이기는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스님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죽음을 넘어 자유자재한 삶에 이른 큰 스승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싶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러한 열망은 점점 더 깊어지고……, 조사는 마침내 스스로 스승을 찾아 봉암사를 떠납니다. 조사의 나이 19세 되던 해였습니다.

     

    조사는 이후 11년 동안 만행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조사가 찾던 스승은 없었습니다. 세월만 쉼 없이 흘러 어느덧 조사의 나이 서른, 어느 날 조사는 홀연 “공연히 쇠신만 닳게 하면서 분주히 돌아다니네.”라는 옛 선사의 시를 읽게 됩니다. 꼭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 길로 봉암사로 돌아옵니다.

     

     

    "개운조사(4)"에서 이어집니다.

  • 티베트의 탁월한 자녀 교육법 3가지

    나라마다 아이들을 올바로 키울 수 있는 훌륭한 교육 전통이 있습니다.

     

    그 전통은 출세를 목표로 하는 현대 교육과는 아주 다릅니다.

     

    티베트의 자녀교육법이 그렇다고 합니다. 대한 불교조계종 대원사 현장 스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전하고자 합니다. 

     

    티베트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기를 세 단계로 나눈다고 합니다. 7세까지가 1단계, 14세까지가 2단계, 21세까지가 3단계입니다.

     

    처음 7세까지는 암탉이 알을 품듯이 키우라고 합니다. 그저 사랑하고 보살피기만 하라는 것이지요. 

     

    아이는 이때 부모로부터 받은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게 아닐까 합니다. 

     

    다음으로 14세 까지는 원수처럼 키우라고 합니다. 선악을 구분할 줄 알고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도록 엄격히 교육한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단계인 21세까지는 친구처럼 키우라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 돌보고 의지하고, 주고받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지낸다는 것이지요. 부모가 자녀를 독립적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다면 세상 어느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 개운조사(2) - 나이 아홉에 4번의 죽음을 겪은 효자

    "개운조사(1) 보러가기(클릭)"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개운조사만큼 신비로운 일화를 많이 남기신 고승도 없을 것입니다.  

     

    조사는 1790년 경상북도 상주군 개운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속성은 김 씨였고 모친의 성은 양 씨 셨는데, 조사께서 모친의 태에 들 때 부모님께서 ‘태양 같은 금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 합니다. 

     

    조사는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천애 고아가 됩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어요.  

     

    다행히도 조사는 외삼촌댁에 몸을 의탁하게 되는데, 자식이 없던 외삼촌 부부는 어린 조카를 친자식처럼 정성껏 기릅니다. 하지만, 외숙과 외숙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속세의 행복을 맛보는 것도 잠시, 외삼촌께서 갑자가 돌아가시고 외삼촌의 3년 상이 끝나자마자 외숙모마저 세상을 뜨게 되니 그때 겨우 조사의 나이 아홉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천지 아래 붉은 몸뚱이 하나, 혈혈단신이 되고 만 것이지요. 

     

    조사는 혼자서 외숙모의 3년 상을 치렀습니다. 산소 앞에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까지 했다고 해요. 이 모습을 본 이웃 사람들은 조사의 효심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조사를 ‘양효동(楊孝童)’이라 불렀습니다. 외삼촌의 성이 양 씨이니, 마을 사람들은 조사를 ‘양 씨의 효자 아들’로 여긴 것이지요. 

     

    채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부모님과, 부모님과 진 배 없었던 외숙부모님을 차례로 여읜 조사의 외로움과 슬픔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것이었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길은 없지만 삶은 참으로 무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없을까요. 조사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에끼 이놈!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호통뿐, 조사는 어느새 마을에서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조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답을 찾지 못한 의문을 가슴에 깊이 품곤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물었습니다. “죽지 않는 길은 없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스님 한 분이 대답을 해 주십니다. 먼 옛날 ‘싯다르타’라는 태자가 어느 날 왕궁의 동서남북 사대문 밖으로 유람 차 나갔다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삶을 직시하고는 왕의 자리도 버리고 출가하여 큰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출가가 뭐예요?”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 중이 되는 것을 말한다.” 

     

    스님의 대답에 조사의 마음은 두둥실 부풀어 올랐습니다. 비로소 앞길에 광명이 비치는 기분이었을까요? 얼마나 기뻤던지 마치 ‘새 장에서 벗어난 새’와 같았다 합니다.  

     

    외숙모의 제사를 마치지 마자 조사는 바로 문경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찾아갑니다. 혜암 선사(慧庵禪師)를 은사로 모시고 머리를 깎으니, 그때 조사의 나이 열세 살이었습니다. 

     

    봉암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의 하나로, 보우국사를 비롯한 수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한 수행도량입니다. 오늘날에도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면 일반인에게 산문을 열지 않고 철저하게 청정한 수행 기풍을 이어오고 있지요. 

     

    조사는 바쁜 행자 시절, 짬만 나면 봉암사 마애불을 찾았습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 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 가지를 받치신 마애불의 묵묵히 내려앉은 눈동자를 따라가노라면 유리알처럼 맑고 찬 계곡물이 햇빛에 찬란하게 부서졌습니다. 그 빛을 받아 환하게 밝으신 마애 부처님 앞에서 조사는 오랜만에 어버이의 품에 안긴 듯 다사로움을 느꼈습니다. 밝고 환한 마애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 마냥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연달아 어버이를 여읜 슬픔도 씻겨 가고, 그 물을 따라 흐르면 영원히 생사의 고락을 벗어나는 길이 보일 듯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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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운조사(1) - 바위에 주먹으로 새긴 글씨 '동천(洞天)'

    경북 상주군 화북면 우복동 길가에 ‘동천’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습니다. ‘동천’은 흔히 신선이 살 만큼 경치 좋은 곳을 이르는 말이지요.  

     

    신기하게도 이 바위에 새겨진 글자의 총 길이와 바위 둘레의 길이가 오장(五丈)으로 같아 ‘오장비(五丈碑)’라고도 불립니다. 

     

    동천 바위 아래 표지판의 설명에 의하면 이 글씨는 조선 4대 서예가 중의 한 분으로 특히 초서에 능통하셨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31-1586)이 각자한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 글씨는 또한 18세기 상주에서 태어난 고승 개운조사가 새기신 것이라 회자되기도 하지요.  

     

    아마도 그것은 바로 개운조사께서 주석하신 『유가심인 정본수능엄경 환해산보기(瑜伽心印正本首楞嚴經環解刪補記)』(이하 ‘정본수능엄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으로 ‘동천(洞天)’이란 글자를 쓰고 

    손톱으로 ‘한좌(閑坐)’라는 글귀를 새기니 

    돌이 물렁한 흙처럼 부드러워서 

    나의 현명(顯名)을 받아들이네 

    맑은 물 흐르는 반석(磐石) 위에 

    용자(龍子)를 놀게 했노라. 

     

    조사께서 바위를 물렁한 진흙처럼 주물러 ‘동천’ 두 글자를 새기고 맑은 물 흐르는 반석 위에 용으로 하여금 놀게 하였다는 이곳은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도장산 자락을 흐르는 쌍룡계곡을 말합니다.  

     

    충주에서 문경으로 가는 이화령 터널을 빠져나와 가은과 농암을 지나면 쌍룡계곡에 닿지요. 직진하여 쌍용터널을 지나면 상주 화북면이고, 터널 앞에서 왼쪽으로 용추교(龍椎橋)를 건너 도장산(道藏山)에 안기면 개운조사가 머물며 『능엄경』을 주석하신 심원사(深源寺)에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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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설거사, 파계 또한 깨달음의 길

    부설 거사에 얽힌 이야기는 수행에 승속이 따로 없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신라 때 고승인 부설 거사의 삶과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북 부안 내변산 월명암에 전해오는 한문 필사본 <부설전>에 담겨 있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은이는 구전되던 부설 거사의 이야기를 소설체로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부설은 출가승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출가했다 파계한 승려입니다. 부설 스님은 신라 때 불국사의 승려였다고 합니다. 스님은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부설 스님에게 당혹스런 인연이 생겨납니다. 지리산, 천관산, 능가산 등지에서 수도하고 오대산으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묘법을 얻고자 만행을 떠나는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김제시 부근을 지나던 세 도반은 불심이 깊다는 집을 수소문해 하룻밤을 지내게 됐습니다. 구무원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하룻밤 신세지고 떠나려했지만 비가 몇 날을 계속해서 내려 하는 수 없이 며칠을 묵게 됐습니다.

     

    스님들이 머무는 동안 불심이 깊었던 구무원은 스님들에게 자주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에게는 재색을 겸비한 묘화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묘화 낭자도 스님들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며칠 뒤 비가 그치고 부설 거사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묘화 낭자가 부설 거사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부설 거사에게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득도를 위해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에게 혼인을 해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부설 거사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묘화 낭자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차 도통하여 많은 중생을 구하실 스님이 작은 계집 하나 구해 주지 못한다면 어찌 큰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묘화 낭자는 혼인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목숨을 끊겠다고 했습니다. 자살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 딸을 보고 구무원도 부설 스님에게 매달려 애원했습니다. 부설 스님은 묘화 낭자의 목숨을 건 호소에 하는 수 없이 그녀와 혼인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도반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때 부설 스님은 도부재치소(道不在緇素) 도부재화야(道不在華野) 제불방편(諸佛方便) 지재이생(志在利生)라는 게송을 들려주며 도반들을 떠나 보냅니다. 

     

    도라는 것는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하얀 옷에 있는 것이 아니며, 번화로운 거리와 초야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이 하고자 하신 뜻은 중생을 이롭게 제도하는 데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부설 스님은 거사가 됐습니다.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뒤 아들과 딸을 얻어 등운과 월명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비록 파계하고 집안을 이뤘지만 부설 거사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바닷가에 지은 초막에서 지낼 때나 나중에 내변산에 지은 암자에서 살 때나 늘 수행에 몰두했습니다.
     

  • ‘카페 교회’ 운영하는 목사님

    서울 상일동 주택가 골목에는 에클레시아라는 작은 카페가 있습니다.

     

    이 카페의 주인이자 바리스타이며 유일한 직원은 양광모 목사님(바로세움정립교회) 입니다.

     

    양 목사님은 일주일에 6일은 카페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미사리의 공장 건물 2층에 있는 15평 남짓한 예배당에서 20여 명의 교인들과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어로 ‘밖으로 불러 모으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교회를 가리킬 때 씁니다.

     

    양 목사님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분입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양 목사님의 목회 생활은 순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서울 이문동 동안교회와 지구촌교회 수석 무목사를 거쳐 교인수 1000명이 넘는 정릉제일교회 담임목사를 맡았습니다. ‘잘 나가는 목사’라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양 목사님은 늘 괴로웠습니다.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교회에 손가락질하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자체가 불신받고 있었습니다.

     

    양 목사님은 2012년 부임 2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내려놨습니다. 대안이 될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를 찾아가는 5년의 여정을 담은 책 ‘고백 에클라시아’(선율 펴냄)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떠오르는 행복의 시작이었지만 위기의 현실을 극복하고 어두운 미랠르 밝게 비출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

     

    올바른 목회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고 영성을 고양시켰습니다.

     

    양 목사님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건강한 교회”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서점 겸 카페의 형태로 출발한 미국의 세이비어 교회를 모델로 삼아 카페 교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2012년 카페 에클레시아의 문을 열었고 같은 해 바로세움정립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들른 사람 가운데 바리스타인 목회자의 말 한 마디가 필요한 이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페 운영을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과 커피 품질 평가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목회자 이기 전에 자영업자로 시장 조사와 매장 운영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2012년 문을 연 카페의 운영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수입은 카페를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해 결국 택시 운전대를 잡는 ‘투잡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는 자신이 섬겼던 교회의 교인을 만날까 노심초사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목사와 택시운전사를 대하는 것은 너무도 다름을 뼈저리게 느꼈겠지요.

     

    양 목사님은 택시 운전을 통해 모든 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섬기는 법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또 낮췄을 것입니다.

     

    2년 쯤 시간이 지나자 카페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페운영을 하면서도 당연히 주일 예배는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은 불교신자인 한 단골손님의 도움으로 2015년에 마련했습니다. 

    그 손님이 자신이 운영하는 미사리 식품공장 건물 2층에 15평 짜리 예배당을 마련해준 겁니다. 

     

    가수 노영심씨는 카페 에클레시아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저에게 카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공간입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여전히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제게 하나님과의 끈만은 놓지 않게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표현도 못하고 말도 예쁘게 하지 못하고 투정만 부리는 저지만, 마음속에 목사님과 사모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항상 느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버티며 이겨 내고 있습니다. - 단톡방 에클레시아 멤버 노영심." (<고백 에클레시아>, 37쪽)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2)

    "하늘이 열리면서 머리 위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밝은 광채가 쏟아져내렸습니다. 그 빛은 나의 심장 전체와 가슴을 불꽃처럼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시편서, 복음서, 그리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의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계시도 함께 받았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듣는 것을 말로 전하라"라는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계시를 무시했습니다.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심하게 앓아눕게 되자 신의 계시를 거역한 것 때문임을 깨닫고 자신이 본 환상을 글로 쓰기로 결심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디시보덴베르크의 수도원장인 쿠노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일생 동안 스승이며 조언자이자 친우였던 수도승 볼마르의 도움으로 26개의 묵시가 담긴 〈스키비아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키비아스는 ‘길을 알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책이지요.

     

    그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 천사 루시퍼의 타락, 아람과 이브의 원죄, 노아를 비롯한 유대 선지자들의 행적,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초대 교회 순교자들, 앞으로 일어날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 등을 책에 담았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저술을 시작한 지 얼마 뒤에 쿠노는 힐데가르트의 작업을 마인츠의 대주교 헨리에게 보고했고 이는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까지 알려져, 교황은 종교회의를 통해 힐데가르트의 환상에 대해 논의한 뒤 저술을 허락하게 됩니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깨달음을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은 불교의 만다라 못지않게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계시를 받은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고 보석치료와 자연치유에 대한 의학 관련 책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작 범위는 방대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수녀였으나 활동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불의한 일에 대한 비판에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부자들은 물론 교회 권력도 그의 날선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심지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에우제니오 3세 교황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 물어뜯으려고 으르렁대거나 닭처럼 바보같이 한밤중에 꼬꼬댁거리는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부자들에게 가진 것을 굶주린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수녀원을 찾아온 황제를 향해서도 잘못한 일을 꾸짖었습니다.

     

    수도공동체인 수녀원을 관리하는 일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두 개의 수녀원을 세웠고, 이 수녀원은 독립적으로 운영됐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각지에서 그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도왔습니다. 병자와 가난한 이들은 그에게서 특별한 돌봄을 받았습니다. 치유에 관심이 많아 약초 등을 활용한 자연요법을 연구했고, 보석을 통한 치료법도 만들었습니다. 음악도 주요한 치유 도구였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여성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였지만 그는 여성임을 자랑하라고 수녀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수녀들에게 하루에 한 잔씩 포도주를 마시라 고도 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서요. 

     

    힐데가르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디지보덴베르크 수녀원에 사는 수녀님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습니다. 수녀가 되어 함께 살고자 하는 여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녀원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힐데가르트는 새 수녀원을 짓기로 하고 루페르츠베르크라는 산에 새 수녀원을 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1)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3)

  • 서암 큰 스님이 남기신 참된 수행법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아래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요,
    그 곳이 바로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불교라네. 

    - 서암 큰 스님 -

  • 그림자 없는 선사 수월스님 (2)

    "위대한 스승들 - 수월스님 (1)" 보러가기(클릭)

     

     

    수월스님의 출가 전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불교 사전에 따르면 수월 스님은 1855년에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겨 작은 벌레까지 함부로 괴롭힌 적이 없었으니 자신이 돌보던 소를 얼마나 끔찍이 아꼈을  것인지 짐작이 됩니다.

     

    탁발 나온 스님들이 날이 저물면 수월 스님이 있던 방에서 묵고 가곤 했는데 그 인연으로 출가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수월 스님은 당시로는 스물 아홉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홍성군에 있던 천장암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천장암은 경허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한동안 보림 수행을 했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불교 그리고 스승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때 천장암에는 경허 스님의 속가 친형인 태허 스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습니다. 수월 스님은 태허 스님을 만나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됐습니다.

     

    태허 스님은 경허 스님을 수월 스님의 법사로 지정해 가르침을 받도록 했습니다. 수월 스님은 절에서 말없이 일만 했다고 합니다. 다른 점은 법사인 경허 스님이 가르쳐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낮이나 밤이나 일할 때나 밥을 먹을 때도 수월 스님은 다라니를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태허 스님이 외출했다 밤늦게 천장암에 돌아오던 길에 신비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 때 천장암 입구에는 방앗간이 있었는데 불빛이 새나오는 것을 보니 누가 일을 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했습니다. 물레방아에 물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는데 방아 찧는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허 스님은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물레방아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지만 방앗공이는 위에서 멈춰 있었고, 그 아래 돌확 속에 수월 스님이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일을 하다 지쳐 잠이 든 것이지요. 태허 스님이 깜짝 놀라 수월 스님을 끌어내자 그제야 방앗공이가 확으로 떨어져 방아를 찧기 시작했습니다.

     

    태허 스님은 그로부터 얼마  뒤 수월 스님에게 절 일을 잠시 쉬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수월 스님은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이레째 되는 날 천장암이 있던 마을에서 갑자기 “불이야”하는 외침과 함께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습니다. 천장암 쪽에 불길이 보였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달려나와보니 불길은 천장암 쪽에서 솟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게 집을 불태우는 불이 아니라 수월 스님의 몸에서 뿜어나온 빛입을 알게 됐습니다.

     

    그 불은 수행자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빛, 방광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수월 스님은 3가지 특별한 힘을 얻게 됐다고 합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았으며, 잠을 자지 않아도 됐고, 아픈 사람을 금새 치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월 스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찾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수월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천장암을 떠나 금강산과 지리산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수월 스님의 삶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를 했고, 밤이면 고요히 선정에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월 스님을 찾았지만 눈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수월 스님은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IMAGE|73|center|수월스님 진영. 이미지 출처 : 불교닷컴]]

     

    "위대한 스승들 - 수월스님 (3)"로 이어집니다. 보러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