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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년 전 외상으로 먹은 홍합탕 한 그릇 값이 되돌아오다

    최근 신촌지구대는 미국 뉴욕에 사는 한 70대 노인으로부터 2000달러(약 226만 원) 수표와 함께 ‘존경하는 신촌파출소 소장님께’로 시작되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사연을 보니, 미국에 사는 장 모 씨는 1970년대 중반 강원도 농촌 마을에서 서울 신촌으로 유학을 와서 생활하였는데, 어느 겨울밤 아르바이트를 하고 귀가하던 중에 신촌시장 골목을 지나게 됩니다. 마침 골목 시장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합탕을 팔고 있었는데, 배고픔과 추위에 못 이겨 홍합탕 파는 아주머니에게 “지금 돈이 없는데 한 그릇만 주시면 내일 아침 돈을 가져다드리겠다.”라고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아주머니는 선뜻 뜨끈한 홍합탕 한 그릇을 내줬고, 장 모 씨는 허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돈이 없던 그는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장 모 씨는 군에 입대하게 됐고 전역 후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장 모 씨는 홍합탕 한 그릇의 빚을 마음 한구석에 항상 담고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편지에서 “이제 삶을 돌아보면서 너무 늦었지만, 선행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에 돈과 함께 이런 편지를 보낸다”라고 하면서 “지역 내에서 가장 어려운 분께 따뜻한 식사 한 끼라도 제공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다”라고 부탁했습니다.

     

    돈과 편지를 받은 신촌지구대는 2000달러를 환전하여 신촌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에 전달하였습니다. 이 협의체는 지역 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노인, 장애인 1인 가구 등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서대문구 산하 단체입니다.

     

    황영식 신촌지구대장은 “기부자의 의사에 따라 가장 어려운 분들에게 연말에 따듯한 음식을 대접해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어려운 시기에 이런 기부문화가 더욱 퍼져 많은 분들이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 추수감사절 만찬 44년, 노숙인의 ‘시장’ 마티 로저스

    이미지 : Today Youtube

    미국 뉴욕 브롱크스에 사는 마티 로저스는 무려 44년 동안 노인들과 노숙자들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로저스는 남부 브롱크스에서만 66년째 살고 있는데, 브롱크스 지역사회에서는 그를 ‘마티 시장’ 그리고 ‘성 마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서 로저스는 그가 다니는 ‘순결한 수태 교회’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44번째 추수감사절 만찬을 준비해왔습니다.

     

    처음 만찬은 노인들을 위해서만 준비되었지만 곧이어 노숙을 경험하고 있는 분들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들이 문에 들어서면 환영의 인사와 함께 이름표를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호텔지배인처럼 ‘음식을 드시겠어요?’ ‘여러분들 모두 다 괜찮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그들이 파이 조각들을 먹으러 모일 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더는 배불러 못 먹겠다.’”

     

    이런 만찬의 전통은 작년 팬데믹 상황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특별 만찬의 ‘테이크아웃’ 버전으로요. 올해는 ‘테이크아웃’과 ‘배달’ 두 가지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로저스의 두 아이인 조와 마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만찬과 지역사회의 봉사를 해왔습니다.

     

    “내가 아마도 5살 무렵이었을 거예요. 철자법도 몰랐을 때니까요. 그런데 웨이터가 되어 사람들의 테이블을 다니며 그들이 주문한 것을 그렸어요.”라고 조 로저스는 회상했습니다.

     

    “작은 칠면조를 그렸고... 혹은 크랜베리 소스를 의미하는 상징기호를 창조해냈습니다.”

     

    그는 “나에게 추수감사절은 항상 25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큰 명절이었어요. 항상 그래왔죠.”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아버지가 남매에게 공동체 봉사의 정신을 심어줬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참된 기부의 정신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배웠으며 사람들을 존엄과 존경으로 대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 우리명산 답산기-서울의 앞산 관악산의 흉기와 요풍

    북한산

    서울의 조산(朝山)인 관악산은 매우 흉하다. 또 너무 높다. 관악산의  높이는 해발 632미터다. 주산인 북악산보다 290미터쯤 높다. 게다가 거리가 가까워 더욱 높게 보인다. 아주 위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도읍지의 조산이 이렇게 위압적인 자세로 앞에 우뚝 서 있으니 외국의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악산도 북한산처럼 화성(火星)의 산이다. 관악산 연봉들은 모두 끝이 뾰족뾰족하다. 전형적인 화성이다.

     

    그런데 관악산 연봉들은 하나같이 쓰러질 듯 기울어 있다. 뾰족뾰족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옆으로 기우뚱하게 비뚤어진 형상이 흡사 톱날처럼 보인다. 이 모양이 아주 흉하다. 관악산 자체로는 그리 흉한 산이 아닌데, 한양땅인 서울 중심가에서 볼 때 그렇게 안 좋은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화성의 산이 흉한 모습이면 전쟁 · 살육·전염병·화재·가뭄 등의 화를 불러온다. 또 조산은 외국에 해당된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외적의 침략으로 인해 많은 고초를 당했다. 왜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것도 이 관악산에서 뻗쳐오는 흉기 때문이었다.

     

    삼한산림비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관악산이 남쪽에서 엿보니, (이씨왕조가) 일어날 때는 남쪽 도둑으로 인해 왕업(王業)을 이루게 된다. 그 중간에는 남쪽 도둑이 크게 쳐들어와 백성이 도탄에 빠진다.

     

    이 예언대로 이성계는 남쪽 도둑인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인망을 얻어 새 왕조를 세웠다. 또 왜적이 침략하여 우리 강토를 짓밟고 우리 겨레를 도탄에 빠뜨렸다.

     

    그럼 무학대사의 주장대로 인왕산 아래에다 궁궐을 세웠다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무학대사가 궁궐터로 잡은 데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거기가 세종문화회관 뒤쪽이 아닌가 싶다. 세종문화회관 뒤쪽으로 몇백 미터쯤 가면 작고 아담한 산봉우리가 나온다. 이 산은 인왕산의 한 지봉(支峯)인데 생김새가 퍽 아름답고 단아하다. 이 산봉우리 아래에다 궁궐을 지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주산이 단정하게 잘생겨서 밝고 어진 임금이 많이 나왔으리라. 백성들도 훨씬 평화롭게 살았을 것이다.

     

    이 경우, 한양의 청룡(왼쪽 산줄기)은 북악산이 되고, 백호(오른쪽 산줄기)는 남산이 된다. 또 낙산이 안산 (바로 앞산)이 되고, 조산(朝山; 앞에서 멀리 떨어진 산)은 불암산이다.

     

    북악산은 남산보다 80미터쯤 더 높다. 청룡이 백호보다 튼튼하고 높으니 장자세습사회에 잘 어울린다. 인왕산 아래에다 궁궐을 지었더라면 장자가 꺾이는 일이 드물었을 것이다. 왕권이 안정되고, 왕위를 놓고 골육다툼을 벌이지도 않았으리라.

     

    또 남산은 북악산보다 약간 낮지만, 그래도 상당히 튼튼한 편이다. 높이만 좀 낮을 뿐 크기는 비슷하다. 그래서 권력이나 부가 훨씬 고르게 분배됐을 것이다. 너무 호사스럽게 사는 자도 너무 비참하게 사는 이도 없었으리라.

     

    낙산은 한양땅을 둘러싼 산들 중에서 가장 낮은 산이다. 이렇게 낮은 것이 청룡 역할을 할 때는 문제가 되지만, 안산 역할을 할 때는 오히려 더 좋다. 높이가 아주 적당하다. 게다가 모양도 참 깨끗하다.

     

    낙산의 형상은 옥대(玉帶)다. 옥대는 임금의 허리띠다. 궁궐의 안산이 옥대니 금상첨화다.

     

    낙산은 생김새가 단아하고 온화해서, 인왕산 밑에 궁궐을 세웠더라면, 마음이 어질고 맑은 신하들이 많이 나와 임금을 도왔을 것이다. 그이들이 좋은 정치를 하여 백성들이 한결 평안하게 지냈으리라. 외세의 압박도 당당히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산인 불암산은 더욱 아름답다. 불암산의 높이는 해발 508미터다. 관악산보다 좀 낮다. 게다가 관악산보다 멀리 떨어져 있어 위압감을 전혀 안 준다.

     

    불암산의 형국은 송갓 (소나무 껍질로 만든 갓)을 쓴 스님의 형상이라 한다. 생김새가 후덕하며 의연하다. 도가 높은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요히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도읍지의 조산이 이렇게 아름다우면 외국과의 관계도 좋아진다.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평화롭게 지낸다. 외국의 군대가 아니라, 훌륭한 도인들이 자주 찾아와 친선을 도모하게 된다. 그래서 삼한산림비기〉는, 궁궐을 인왕산 아래에다 세우고 동향으로 앉히라 했던 것이다.

     

    경복궁터가 지닌 또 한 가지 큰 흠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가 움푹 들어간 것이다. 풍수학에선 산봉우리 사이가 이렇게 움푹 들어간 것을 요풍(回風) 이라 부른다. 요풍이 있으면 그곳을 통해서 흉한 기운이 뻗쳐온다.

     

    요풍의 흉기는 방향에 따라 다른 작용을 한다.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의 요풍은 경복궁에서 서북방 (西北方)인 술건방 (戌乾方)에 자리했다.

     

    술방 (戌方; 서북서)에 요풍이 있으면 흉악한 도적과 악질(惡疾)로 인한 재난이 침범한다. 광인과 흉포한 사람도 배출한다.

     

    한 나라로 볼 때 흉악한 도적은 외적이다. 〈삼한산림비기〉는, 서북쪽이 허하여 북쪽 오랑캐가 두 번 쳐들어 오리라 예언했다. 우리 나라를두 번 침략한 북쪽 오랑캐는 여진족이다.

     

    건방(乾方)에 요풍이 있으면 남자들이 단명하게 된다. 조선조의 왕들이 단명한 이유 중 하나가 이 요풍이다.

     

    인왕산과 남산 사이에도 요풍이 있다. 인왕산 줄기는 덕수궁과 남대문일대에서 납작 엎드렸다가 남산에 이르러 다시 우뚝 치솟았다. 그 바람에 요풍이 생겼는데 이 요풍은 남방인 병오정방(丙午丁方)에 있다. 남방의 요풍은 화재와 전쟁의 화를 불러온다.

     

    또 요풍 때문에 백호줄기가 중간에 끊긴 형상이 되어 더욱 안 좋다.청룡·백호가 중간에 끊기면 어려서 요사(夭死)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백호가 그렇게 되면 부부간에 불화가 잦고, 이혼하는 사람도 많이생긴다..

     

    옛날에는 이곳에 성곽이 있어서 결함을 보완해 주었었다. 그런데 성이없어지는 바람에 더욱 흉하게 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