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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자들의 시대19-최상승의 경지는 가장 낮은 마음

    두 사람이 선정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장보러 갔던 식구들이 돌아왔다. 혜원일 보고 모두들 매우 반가워했다.

     

    "언니, 아휴, 더 젊어졌네요. 십대 소녀 같아요! 공부가 아주 잘됐나 봐요."

    지법 스님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녀는 혜원이보다 10살 정도 아래였다. 긴 얼굴과 커다란 두 눈이 서글서글한 부위기를 자아냈다. 용모처럼 성품도 시원시원했다.

     

    "어쩜 이렇게 예뻐졌어. 선녀가 다 됐네."

    박보살은 혜원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녀는 지현 스님보다 위였다. 마흔 여덟인데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흰머리가 꽤 많았다. 그래도 개심사에 온 뒤로는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달덩이처럼 둥그런 얼굴과 온순한 눈빛이 후덕하게 보였다.

     

    윤처사와 혜원인 서로 초면이었다. 지현 스님이 인사를 시켰다. 윤처사는 쉰셋이었다. 키가 작았으나 체격이 단단했고 활기가 넘쳤다. 흰머리가 얼마 안 보였다. 얼굴은 네모 반듯했고, 조그마한 눈에서 맑은 광채가 뿜어 나왔다. 당차면서 지혜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곰보였다.

     

    윤처사, 윤석칠도 필섭이처럼 벽운 선생의 도반인 호산 스님에게서 풍수학을 배웠다. 그는 본래 심마니였다. 정을 나누는 여자는 있으나 약초를 캐며 혼자 살았다.

     

    그는 산중에서 우연히 호산 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호산 스님은 그에게 풍수학과 불법을 가르쳤다. 다가오는 새 시대, 후천시대에 대해서도 많은 얘길 해주었다. 그런 다음 지난 봄에 그를 개심사로 데려왔다.

     

    윤처사와 박보살, 지법 스님, 이들 세 사람은 아직 벽운 선생을 모른다. 하지만 이들도 벽운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될 사람들이었다. 혜원인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오후였다. 불공드리러 왔던 신도들이 돌아가고, 개심사 식구들은 법당에서 정진중이었다.

    모두들 고요히 앉아 있는데 젊은 남자 여덟이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여덟 명 다 감색 도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성큼성큼 법당 문 앞까지 왔다. 박에서 안을 잠시 기웃거리더니 안마당으로 내려가 서성거렸다.

     

    이들이 오자 개심사 경내의 기운이 약간 달라졌다. 이들한테서 탁하고 거친 기운이 뿜어 나왔다. 그 때문에 지극히 순수했던 정기가 많이 흐려졌다. 그러나 법당 안의 기운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없이 맑고 평화로운 기운이 가득 감돌았다.

     

    혜원인 진작부터 심안으로 사내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아랫마을을 지나 개심사 입구로 들어섰을 때부터였다. 그들은 이틀 전 묘법대로 몰려왔던 남자들이 사형제들이었다. 그들의 공력은 묘법대로 몰려왔던 남자들의 사형제들이었다. 그들의 공력은 묘법대에 왔던 패보다 훨씬 높았다. 그네들 문중에서 최고의 고수들이었다.

     

    지현 스님이 인기척을 듣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들이 지현 스님에게 인사를 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지현 스님이 그들에게 물었다.

     

    "주지 스님 좀 뵈려고 합니다."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얼굴이 해맑고 안광이 강렬한 젊은이였다. 말투는 정중했다.

     

    "제가 주집니다. 왜 그러시죠?"

     

    "아, 저희는 수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묘법대에서 며칠간 공부 좀 했으면 하는데요. 허락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묘법대엔 지금 다른 분이 공부중이십니다. 그분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저희도 가지 않습니다. 다음 기회에 다시 오시지요."

     

    지현 스님의 말에 사내들은 실망스런 낯빛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냥 물러간 게 아니었다. 그들은 개심사 경내를 벗어나 급히 묘법대로 향했다.

     

    혜원인 밥당에 앉아 심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현 스님이 법당으로 되돌아와 다시 선정에 들자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리로 진기를 끌어내린 다음 묘법대를 향해 바람처럼 달려갔다.

     

    혜원인 길로 가지 않고 숲속으로 들어가 산비탈을 타고 올라갔다. 그녀가 지나치는 데마다 나뭇가지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녀는 사내들보다 한참 앞서 묘법대에 이르렀다.

     

    명천인 여전히 굴속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혜원인 굴 앞 평지에 앉아 사내들을 기다렸다. 이윽고 사내들이 근처에 왔다.

     

    사내들한테서 날카로운 흉기가 뿜어 나왔다. 혜원이 타심통으로 사내들의 마음을 얼른 헤아려 보았다. 사내들은 혜원일 만나면 가차없이 공격할 계획이었다.

     

    사내들이 가까이 오자 나뭇가지 사이에서 노닐던 새들이 바짝 긴장했다. 지저귀지도 않고, 날갯짓도 멈췄다. 혜원인 그들이 다치게 될까봐 심언법을 써서 그들에게 머릴 피하라고 일렀다. 새들은 혜원이가 마음으로 전하는 말을 알아듣고 멀찌감치 날아갔다.

     

    혜원인 명천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공력의 반으로 굴앞을 막았다. 나머지 반으로는 마당에 기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모아 선정에 들었다.

     

    선정에들며 양신을 밖으로 내보냈다. 혜원의 양신은 20여 미터쯤 되는 허공 위에 혜원과 똑같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사내들의 눈에는 그 양신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묘법대로 올라온 사내들은 선정에 든 혜원에게 의혹에 찬 눈빛을 보내면서 잽싸게 그녀를 둘러쌌다. 혜원이 그들의 포위망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형세였다.

     

    "여보세요!"

     

    한 사내가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혜원을 깨우려 했다. 혜원인 미동도 않고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여보세요!"

     

    사내가 더욱 큰소리로 불렀다. 혜원인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또 다른 사내가 혜원에게 접근하려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세 걸음을 옮기고는 튕기듯 뒤로 미끄러져 나갔다. 혜원이 만들어 놓은 기막에 밀렸던 것이다.

     

    그러자 사내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올렸다. 양손에다 공력을 최대한 모은 다음 동시에 혜원일 향해 힘껏 내뻗었다. 그들의 공력을 맞고 혜원의 기막이 약간 흔들렸다. 그렇지만 뜷리지는 않았다.

     

    사내들이 내뿜은 공력이 기막에 반사되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나무 몇 그루가 그 공력을 맞았다. 나뭇가지가 세차게 흔들리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혜원은 자신의 몸을 잊고 의식을 오로지 양신에게 집중했다. 혜원 자신과 양신 속으로 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기막이 더욱 견고해졌다.

     

    여덟 명의 협공을 받고도 혜원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고 사내들은 깜짝 놀랐다.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재빨리 두 사람씩 짝을 이뤄서 다시 공격했다. 이번에도 기막은 뚫리지 않았다. 혜원인 잠든 사람처럼 고요히 앉아 있었다.

     

    사내들은 네 사람씩 짝을 이뤄 온 힘을 다해 세 번째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공격도 허사였다. 사내들이 날린 장력이 사내들 쪽으로 되돌아왔다. 사내들은 탈진한 데다가 강한 장력까지 맞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났다. 사내들은 무척 괴로워했다. 곳곳의 혈도가 막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 때, 혜원이 얼른 양신을 거둬들이고 선정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재빨리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차례차례 돌아가며 그들이 몸에 자신의 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사내들은 그제야 기운을 되찾았다. 막혔던 혈도가 풀리고, 온몸에 생기가 돌았다. 숨이 트이며 맑고 시원한 기운이 공기과 함께 쑥쑥 들어왔다.

     

    "최고의 무공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 되려고 할 때 얻을 수 있어요. 누굴 이기려고 하는 사람은 최상승의 경지에 못 올라요. 눈에 안 보이는 미물중생까지 하늘처럼 섬겨 보세요. 그러면 무상의 공력을 얻을 거예요."

     

    혜원이 여덟 명 모두에게 자신의 진기를 불어넣어 주고 나서 타이르듯 말했다. 사내들은 고개를 푹 꺾었다. 너무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서들 돌아가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항상 정도를 따르세요."

     

    혜원인 보살의 웃음처럼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사내들을 둘러 보았다 한없이 온화한 혜원의 말에서 사내들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밑으로 내려갔다.

     

    "안녕히 가세요."

     

    혜원이 인사를 했으나 단 두사람만 돌아서서 혜원에게 목례를 건넸다. 두 사람 다 눈빛이 깨끗했다. 삿된 사람들 같지 않았다. 혜원인 타심통으로 두 젊은이의 마음을 보았다. 그들은 의롭지 않은 일에 동참한 걸 괴로워했다. 자신들의 처지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또, 혜원이 한 말을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있었다.

     

    혜원인 문득 그들과 자신 사이에 깊은 인연이 있다고 생각했다. 숙명통으로 그들의 미래를 보았다 언젠가 그들이 자신을 찾아와 도반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모습도 보였다.

     

    바깥 세상에서는 무협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여파로 특이한 무술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꽤 생겨났다. 그들 중 일부는 산으로 들어와 무예를 닦았다. 오직 남을 제압하기 위해 닦는 무술은 사도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초능력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도 매우 높아졌다. 신통한 초능력의 비법을 소개한 책들도 많이 출간되었고, 그것을 지도하는 단체들도 생겨났다. 그저 신통한 능력이나 얻으려는 사람들도 사도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사도가 창성하는 시대이니 두 젊은이는 이 시대의 탁류에 휩쓸려 헤매는 것이었다. 하나 그것은 또 그들이 전세에 지은 인과의 과보이기도 했다. 과보를 다 받은 뒤에 정도를 밟게 될것이 분명했다.

     

    혜원이 두 젊은이를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마음으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었다. 그 내면의 소리는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 같았다.

     

    혜원일 부른 것은 나무들이었다, 묘법대 주변의 나무들이 사내들이 내뿜은 장력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했다. 외상은 별로 없었다. 나뭇잎이 떨어진 것뿐이었다. 그런데 내상은 심했다.

     

    혜원인 마음으로 자신의 진기를 나무들에게 보내 주었다. 혜원의 몸에서 깨끗한 진기가 뭉클뭉클 안개처럼 솟아나와 나무들을 휘감았다. 얼마 안 되어 나무들의 내상이 말끔하게 나았다. 그러자 멀찍이 피했던 새들이 돌아와 마음껏 지저귀며 날아다녔다.

     

    산란해졌던 묘법대의 기운이 전처럼 맑게 정화되었다. 명천인 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여전히 선정에 들어 있었다. 그는 모든 번뇌를 여의고 순수한 빛의 세계에 머물렀다. 혜원인 명천을 남겨 두고 개심사로 내려왔다.

  • 성자들의 시대18-우주와 하나라는 느낌

    청련사 주지로 있는 동안에는 선방(禪房)과 강원(講院)을 세웠다. 강원에서는 50 여 명의 학인(學人)들이 불경을 공부하고 선방에서는 40여 명의 수좌(首座)들이 참선 수행중이었다.

    청련사를 큰 수행 도량으로 만든 다음에 개심사로 옮겼다. 이것은 벽운 선생의 뜻이기도 했다.

    지현 스님이 처음 왔을 때 개심사는 아주 퇴락한 절이었다. 그녀가 서둘러 불사를 일으켜 면모를 새롭게 바꿔 놓았다.

     

    벽운 선생은 지현 스님더러 개심사를 3,40 명 정도가 거처할만한 도량으로 만들어 놓으라고 일렀었다.  쓸모가 있다는 것이었다. 지현 스님은 여름까지 그 일을 마무리했다.

    이제 살림을 맡은 사판승(事判僧)으로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거의 다 끝냈다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에겐 수행 정진민큼 기쁘고 즐겁고 신나는 일이 없었다. 젊어서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수행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 참, 내가 산에 올라가면 여기 살림은 어떻게 하지? "

    지현 스님은 살림 걱정을 했다. 사판승 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버릇이었다.

    " 언닌 산에서 오래 안 계셔도 될 거예요. 그동안 지법 스님이 맡으면 되지요. "

    "걔가 잘할 수 있을까? "

    개심사엔 식구가 많지 않아 살림의 규모도 작았다. 그러나 도와줘야 할 곳이 많았다. 고아원, 양로원, 주변의 불우한 사람들에게 보시를 자주 했다. 지현 스님은 또 민주화 운동을 하는 스님들을 남몰래 후원했다. 이런 일들을 지법 스님이 제대로 해낼지 걱정이었다.

     

    " 염려 마세요. 그런 걱정도 다 공부에 큰 장애가 돼요. 번뇌잖아요. 언니가 공부를 잘하시면 지법 스님도 따라서 지혜가 열려요. 스승님께서도 보살펴 주실 거고요. "

    혜원의 말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몸에 밴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 참, 언니. 채소들을 살려야죠. "

    " 그럴까. "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 언니, 양동이하고 분무가 있어요? "

    " 있어. "

     

    지현 스님이 양동이와 분무기를 가져왔다. 혜원인 양동이에다 물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손에 진기를 가득 모은 뒤에 물 속에다 손을 집어 넣었다. 진기가 물 속으로 스며들었다.

    혜원인 이 물을 분무기로 채소밭에 골고루 뿌렸다. 그러자 반 시간도 안 돼 시들어 가던 채소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축 늘어졌던 잎새들이 생동생동 일어섰다.

     

    " 아니! 벌써 살아나네! 이게 웬일이야! "

    지현 스님은 이 신기한 광경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물주기가 끝난 뒤 그녀는 혜원이더러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물었다.

     

    " 물에 충만한 생긱를 마시고 채소들이 금방 기운을 차린 거예요. 이제 병균들도 잎을 괴롭히지

    않고 그 생기만 먹게 돼요. 그러다가 없어지지요. "

    " 그것들도 기운이 왕성하면 번식을 많이 하지 않을까? "

    " 아니에요. 번식하려는 욕망이 사라져요, 중생들이 자손을 퍼뜨리는 것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에요.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무서워서 대를 이으려고 하지요. 온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느낌이 들면 죽음이 안 무서워요. 그래서 깨달은 이들이 자손을 가지려는 욕망을 완전히 떨칠 수 있어요.

    미물중생도 마찬가지예요. 무한한 평화를 느끼면 번식을 안 해요. "

    " 채소뿐 아니라 병균들까지 큰 복을 누리네. "

    " 그래요. "

     

    지현 스님은 혜원의 법력(法力)에 감격했다. 혜원일 이렇게 이끌어 준 스승 벽운 선생에 대한 외경심도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채소밭을 둘러봤다.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잡아먹고 먹히는 싸움이 숨가쁘게 전개되던 곳이 우주적인 평화에 휩싸였다. 여기가 바로 극락정토요 선경이었다. 삼라만상을 다 부처로 보고, 이 세상 어디나 불국토(佛國土)로 보라고 이르시던 벽운 선생의 가르침이 새삼 실감났다.

     

    두 사람은 채소밭에서 돌아와 사시(巳時; 오전 10시) 예불을 드렸다. 지현 스님이 먼저 법당으로 들어가 가사장삼을 차려 입었다.

    혜원이 청수(淸水)를 떠가지고 막 법당으로 향할 때였다. 그녀의 눈에 법당 위로 거대한 빛기둥이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둥근 원통형의 찬란한 빛줄기가 하늘 높이 뻗쳤다.

    이 빛줄기는 점점 커졌다. 법당 앞마당과 그 양쪽에 마주 선 요사채까지 빛기둥 안으로 들어갔다. 개심사 경내가 모두 눈부신 광채로 화했다. 개심사 터에 깃들인 빼어난 정기가 활짝 피어 오른 것이었다.

     

    혜원이 법당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물을 올리고 절을 드린 다음 고요히 앚아 있었다. 지현 스님은 종부터 쳤다. 은은한 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개심사의 빼어난 정기도 종소리에 실려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혜원의 심안에 온갖 중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 학, 노루, 멧돼지, 뱀, 물고기...., 갖가지 중생들이 개심사의 정기에 휩싸였다. 개심사에 치솟아 오른 빛기둥이 그들을 향해 빛을 뿜엇다. 그들은 모두 개심사와 인연이 깊은 중생들이었다.

    혜원인 잠시 후 심안을 닫고 선정에 들었다. 육체의 몸이 사라져 허공으로 화하고 티 하나 없이 맑은 정신만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활짝 열린 기공을 통해 우주의 진기가 바람처럼 드나들었다.

     

    지현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웠다, 그러나 혜원의 귀에는 목탁 소리도 염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20 분쯤 지났다. 혜원의 몸이 가부좌를 튼 채 허공에 떠올랐다. 부처님이 앉아 있는 높이만큼 떠오르더니 그대로 허공에 머물렀다. 지현 스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염불을 멈췄다.

    둥그런 원광이 나타나 혜원일 둘러쌌다. 부처님의 원광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 순간, 지현 스님은 시원한 바람처럼 맑고 청량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몸과 마음과 정신에 묻은 온갖 때가 말끔히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날아갈 듯 가뿐했다.

     

    지현 스님도 얼른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단전에 의식을 집중했다. 단전에 야구공만한 허공이 생겼다. 그리고 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단전의 허공은 자꾸 커져 갔다. 야구공에서 축구공으로, 축구공에서 커다란 풍선으로 커졌다.

    나중엔 몸 전체가 허공으로 화했고, 단전이 진기로 가득 채워졌다.

     

    지현 스님과 혜원인 3시간쯤 뒤에 선정에서 깨어났다. 지현 스님이 눈을 떴을 때엔 혜원의 몸이 마룻바닥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녀를 둘러쌌던 원광도 보이지 않았다. 지현 스님은 자신이 보았던 그 신기한 광경에 대해 물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매우 무더운 날씨였다. 그런데 지현 스님은 조금도 덥지 않았다. 원래 더위를 많이 탔는데,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자꾸 몸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살 속까지 시원했다. 발걸음도 예불을 드리기 전보다 훨씬 더 가벼워졌다. 지현 스님은 혜원의 도력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 성자들의 시대17-공덕이 원만해야 공부에 성공한다

     

     

    <개심사 주지 지현 스님>

     

    개심사(開心寺)는 관음봉 서쪽 기슭에 오롯이 깃들여 있었다.

    개심사 쪽에서 본 관음봉의 형상은 신선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풍수가들은 개심사 터를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 ; 신선이 책을 읽는 형국)의 명당이라고 했다.

    개심사 바로 앞에는 네모 반듯한 봉우리가 솟아 있다.

    이것은 책을 올려놓는 서대(書臺)였다.

    서대 뒤에는 꼭 책을 펼쳐 놓은 것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다.

    또, 그 뒤쪽에는 여러 겹의 산줄기가 30리 밖까지 펼쳐져 있다.

    이 산줄기들의 생김새는 구름과 흡사했다.

    그러나 개심사 터는 신선이 구름 위에 앉아 책을 읽는 형국이 분명했다.

    옛날에 어느 풍수의 달인이 개심사에 들러 무릎을 치며 이런 얘길 했다고 한다.

    " 천하의 보배가 여기에 숨어 있구나. 보물 중의 보물이로다.

     신선이 책을 익는 형국이니 훌륭한 도인들이 쏟아져 나올 명당이다.

    때가 되어 아름다운 지기가 활짝 피어나면 수천 수만의 도인이 구름처럼 몰려와

    모두 크게 깨우치리라. "

    혜원이 개심사 가까이에 다다르자 전과는 아주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개심사 일대의 지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난 겨울보다 몇 배 더 청정했다.

    산굽이를 돌아 막 경내로 들어서서 보니 개심사 건물들이 은은한 광채에 휩싸여 있었다.

    " 아, 참으로 좋은 정기가 활짝 피어나는구나. "
    혜원이 미소를 지으며 문득 옛 풍수가가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녀의 심안에 숱한 사람들이 깨달음의 길을 찾아 개심사로 오는 광경이 스쳐 갔다.

    머지 않아 드디어 옛 사람의 예언이 실현될 것이었다.

     

    개심사 주변에는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느티나무, 팽나무. 굴참나무 등이 커다란 숲을 이뤄 햇빛을 막아 주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는 갖가지 새들이 지저귀고 다람쥐들이 뛰어놀았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흘러내렸다.

    걔심사 주지 지현 스님은 채소밭에 잇었다.

    " 언니, 뭐하세요? "

    지현 스님은 혜원이 보다 몇 살 위였다. 그들은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 어! 동생! 어쩐 일이야? "
    지현 스님은 활짝 웃으며 혜원에게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 스승님께서 보내셨어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

    혜원이 지현 스님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 덕분에 잘 지내.  정말 반갑다.

    식전에 까치들이 울어대더니만 동생이 오려고 그랬나 보네. "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걸었다.

    " 밭에서 뭘 하셨어요? "

    " 배추하고 무를 갈았는데 병이 심해. 

    병균도 살아 있는 중생이니 농약을 뿌릴 수도 없고..... 올해 채소 농사는 실패하겠어.

    어려운 신도들한테도 나눠 주려고 많이 심었는데 우리 김장 담기도 어렵겠네. "

    " 어떻게 병들었나 한번 볼까요? "

    혜원인 채소밭으로 들어가 보았다. 손바닥만한 배추들이 대부분 병들어 있었다.

    잎새마다 누런 점이 얼룩얼룩 보였다. 병균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 언니, 좋은 방법이 있어요. 약을 안 주고도 살릴 수 있겠어요. "

    혜원이 뭔가 잠깐 생각해 보고 말했다.

    " 어떻게? "

    " 물만 있으면 돼요. "

    " 그냥 물로? "

    " 네. 이따가 해볼게요. "

    " 그럼, 그래 봐. "


     

    지현 스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혜원에게 무슨 묘방이 있나 보다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절 쪽으로 갔다. 혜원인 먼저 대웅전에 들러 참배를 한 다음 요사채로 내려왔다.

    절에는 지현 스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 모두 어디 갔어요 ? "
    " 응, 법성인 강원으로 떠났어. 지법이하고 박보살하고 윤처사님은 장보러 운강에 갔고,

    내일 불공이 있어서. 

     참, 동생 아침 공양 들었어? "

    지현 스님은 혜원이 아무것도 안 먹고 진기만 마시며 사는 줄 아직 몰랐다.

    " 전 안 먹어도 돼요. "

    " 안 먹어도 돼다니. 가서 차려 올게." 

    지현 스님은 밥상을 차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괜찮아요, 언니. 전 요새 아무것도 안 먹어요. 그런 지 꽤 됐어요. "

    " 그래? 벽곡을 하는구나. 동생, 공부가 아주 잘됐나 보다. 크게 깨우쳤나 봐."

    지현 스님은 눈을 크게 뜨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외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혜원을 쳐다보았다.

    " 깨우치기는 요. 아직 멀었어요. 기운이 좀 찼을 뿐이에요. "

    " 아무나 벽곡하나. 이제 보니 동생 얼굴이 더욱 맑아졌네.

     환해. 빛이 서려 잇어. 서기(瑞氣)가 뿜어 나오네. 도가 아주 높아진 게 틀림없어. 

    지현 스임은 머리까지 설레설레 흔들며 감탄했다.

     도반이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 그녀를 무척 기쁘게 만들었다.

    " 부끄러워요. 자꾸 그러지 마세요, 언니. "

    혜원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

    " 그럼 차나 끓일까? 

    " 그만두세요. "

    " 마시지도 않는구나."
    " 그렇게 됐어요. 한데 언니, 다른 식구들에겐 제 얘기 하지 마세요. "
    " 염려 마. "

    " 언니, 여기 큰일들은 거의 다 끝났죠? "

    " 기와 불사와 대웅전 단청은 마무리했어.

    요사채 수리도 모두 끝냈고. 크게 손볼 곳은 없어. "

    " 이제 일을 놓고 용맹정진하실 때가 됐나 봐요.

    스승님께서 언니를 백학봉으로 데려오라 하셨어요. "

    " 그래? 어제? "

    " 아흐레 후에요. 저더러 그때까지 여기서 지내라 했어요. "

    " 아이고, 바라고 바라던 소원이 이워졌네. "

     

    지현 스님은 너무나 좋아했다.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지현 스님의 상호(相好)는 보살상이었다. 너부죽하면서 상이 아주 복스럽게 붍어 있었다.

    눈빛은 맑고 온화했다. 활짝 웃으니 틀림없는 보살상이었다.

    그녀는 발써부터 수행에만 전념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중(門中)의 사형제들이 놓아주질 않았다.

    사형제들은 포용력이 커서 모든 사형제들한테 사랑받는 그녀가 주지직을 맡아 주길 워했다.

    개심사와 청련사는 종단에 속한 절이 아니고, 지현 스님네 문중에서 세운 도량이었다.

    지현 스님의 사조(師祖) 스님이 창건했다. 그후 계속 지현 스님네 문중에서 관리해 왔다.

    지현스님은 문중을 위해 자신의 공부를 뒤로 미뤘다.

    대신 사형제들이 수행에 전면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잘했다.

     

    벽운 선생도 그걸 바랐다.

    먼저 공덕을 충분히 닦은 다음에 용맹정진하라는 것이었다.

    공덕이 원만해야 공부에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