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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이 알려주신 욕 먹지 않는 법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sasint)

    부처님께서 어느 날, 걸식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그날은 어떤 바라문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라문은 부처님을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너는 육신이 멀쩡하면서 왜 남의 집에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느냐? 네 힘으로 일을 해서 먹고 살아라. 나는 너에게 음식을 줄 수가 없다.”

     

    경전에는 이렇게 점잖은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쌍욕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 사람이 그렇게 거친 욕설을 하는데도 부처님께서는 그 바라문을 보며 빙긋이 웃기만 하셨습니다.

     

    욕하는 데 웃으면 욕하는 사람은 더 화가 나게 마련입니다. 그 바라문은 더 심한 욕을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 표현으로 하면 “웃어?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이 XX야” 수준의 폭언을 했겠지요.

     

    부처님은 잠자코 듣고 계시다가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질문과 바라문의 답변입니다.

     

    “당신 집에 가끔 손님이 오십니까?” “물론 온다”

    “그럼 손님이 올 때 가끔 선물을 갖고 오기도 합니까?” “그렇지”

    “만약에 그 손님이 가져온 선물을 당신이 받지 않으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당연히 선물을 가져온 사람 것이지”

     

    부처님은 다시 빙긋이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나를 욕했는데 내가 그 욕을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욕은 누구 것이 됩니까?”

     

    그 순간 그 바라문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무릎을 꿇고 “부처님 잘 알아 들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집안에 모시고 들어가 좋은 음식을 차려 극진하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 기독교 성자 썬다 싱(1) - 예수님의 현현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썬다 싱은 인도와 티벳 등지에서 복음을 전한 기독교의 성인입니다.

     

    썬다 싱은 예수님이 전한 가르침이 빛을 잃고 많은 교회와 성직자가 제국주의의 조력자로 전락한 시절에 말씀만을 가슴에 품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인도의 사두(수행자)처럼 머리에는 터빈을 쓰고 몸에는 누런 가사를 걸치고 맨발로 걸식하며 인도 전역과 티베트에서 복음을 전한 그가 한평생 의지한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었습니다.

     

    썬다 싱은 1889년 인도 북부 펀잡주 람풀에 있는 부유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시크교도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집안을 돌보고 자녀를 키우는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썬다 싱은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학교는 바로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를 존경했습니다.

     

    종교적 분위기가 충만한 가정에서 썬다 싱은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사원에 다니며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를 외웠으며 베다를 익혔습니다. 요가도 배우고 이슬람 경전인 꾸란도 읽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영국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면서 성경도 접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썬다 싱이 14살 이 되었을 때 그의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썬다 싱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경험한 어떤 종교도 위로가 되지 않자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학교에 다니던 썬다 싱은 믿음을 강조하는 학교와 교사들이 싫어졌고 성서읽기를 거부하고 수업에도 빠지는 등 ‘문제 학생’이 됐습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공립학교로 전학시켰지만 그는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했습니다. 전도를 하던 이들에게 돌이나 오물을 던지기도 하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가량 살던 썬다 싱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고 하늘을 향해 마지막 기도를 시작합니다. “신이 계시다면 나타나 바른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아니면 저는 첫 열차가 지나갈 때 레일 위에 누워 자살할 것입니다.”

     

    썬다 싱은 죽을 결심을 하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죽음의 시간이 조금씩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고 첫 열차가 오면 그는 세상을 떠날 것이었습니다.

     

    새벽 4시쯤 됐을 때 갑자기 방안이 눈부신 빛으로 가득찼습니다. 썬다 싱은 처음에 불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빛나는 광채 속에서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썬다 싱은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마음은 환희심으로 가득찼고 평화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얼마나 엎드려 있었을까 썬다 싱은 고개를 들었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계속)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2)

  • 성 안토니오 “곧 죽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라”

    이미지 출처 : BRIEF (Flickr.com)

    “사람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업적이나 기적을 통해서도 아니고, 더욱이 일차적으로 금욕을 통해서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겸손을 통해서입니다.”


    성 안토니오(또는 안토니우스)는 사막의 성인, 은수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분입니다. 수도 생활의 창시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251년쯤에 이집트 중부 나일 강가에 자리한 도시 헤라클레오폴리스 근처의 코오마(Cooma)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무엇보다 혼자 조용히 있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성인이 스무 살쯤 됐을 때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으나 어느 날 교회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접하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합니다.


    청년 안토니오는 부모님으로부터 상속받은 100헥타르(약 30만 평)의 기름진 땅을 고향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줬습니다. 남은 재산도 처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습니다. 

     

    한 가지 걱정은 여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그조차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여동생을 수녀회에 맡기고 은수자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라는 말씀을 듣고 옷감 짜는 기술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고향 마을 근처의 빈 무덤 동굴에 머물며 노동과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이어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위해 자신이 머물러 있었던 마을 부근의 처소를 떠나 6개월치 식량을 가지고 마귀들의 본거지라고 여겨졌던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버려진 성곽이 있던 피스피르산이 그의 거처가 됐습니다.

     

    성인은 이곳에서 하루 한 줌의 빵과 물 만으로 살았습니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찾아오는 이들조차 만나지 않고 홀로 지냈습니다.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밥 먹듯이 금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은수자로 산 지 2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됐다고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금식이 아니라 겸손”이라는 그의 말처럼 안토니오 성인을 하느님께 이끈 것은 모든 존재에게 친절하고 그런 존재를 자신보다 드높인 겸손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혼자 숨어 지냈지만 그의 신앙과 그가 행한 기적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아픈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줬는데 많은 이들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딸이 사탄에게 시달려 고통스러워한다고 말하자 성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도 당신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서 믿음을 갖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 보니 딸이 나아있었습니다.

     

    312년쯤 안토니오 성인은 더 깊은 사막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곳이 나중에 성 안토니오 수도원이 되는 곳입니다. 

     

    성인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습니다. 언젠가는 들짐승이 와서 농사지은 것을 망쳤는데 성인이 타이르니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인은 어느 날 기도 중에 자신의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봤습니다. 사탄들이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인을 보호하는 빛의 성자들의 도움으로 사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105세인 356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에 앞서 성인은 두 명의 제자를 불러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고 합니다.

     

    “수행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처럼 하라. 사탄을 무서워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숨 쉬고 그분을 믿으며 곧 죽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살라. 나는 이제 떠난다.”

     

    안토니오 성인의 이야기는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성 아타나시오가 쓴 <성 안토니오의 생애>라는 책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이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이 이집트 동부 사막의 와디 아라바 오아시스에 세워져 있는 성 안토니오 수도원입니다. 콥트 정교회의 수도원인 이곳은 성인의 제자들이 세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집트의 그리스도교 수도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3)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Fotorech)

    힐데가르트는 농사와 가축 기르기 뿐 아니라 산과 들에 나는 식물과 관련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식물을 가꾸고 거둬들이며 말리고 보관하는 방법을 일일이 수녀들에게 알려줬고, 식물을 통한 치료법도 연구개발했습니다. 

     

    수녀원에는 약초를 보관하는 방도 만들었습니다. ‘수녀원 약방’이라 불린 그 방에서 힐데가르트는 약초의 효능과 질병 치료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어느 날 한 여성이 끓는 물에 데여 심각한 화상을 입은 아이를 안고 수녀원을 찾아왔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약초로 만든 연고가 담긴 주머니를 상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쳤고 몇 시간이 지나자 상처도 아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보석도 치료에 썼습니다. 보석의 성분이 사람이 지닌 생명에너지(비리디타스 Viriditas)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병이 있으면 그 병을 고치는 방법이 자연 속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양한 곡식은 물론 산과 들에 피어 있는 풀과 꽃과 약초들이 지닌 치유능력을 하느님의 섭리로 봤습니다.

     

    그는 탁월한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쓴 시에 곡을 붙여 찬송을 하고 음악극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만도 120편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힐데가르트는 서양 음악 최초의 작곡가로 꼽히기도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여든의 나이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한 귀족이 세상을 떠난 뒤에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마인츠의 주교성에서 전령이 찾아와 그 귀족이 생전에 나쁜 짓을 저질렀다며 그 사람이 축복받은 땅에는 묻힐 수 없기 때문에 시신을 파내 수녀원 밖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그가 죽기 전에 고해성사를 해 교회로부터 사면되었음을 들어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무덤을 모두 평평하게 만들어 그 사람의 무덤을 찾지 못하게 했습니다.

     

    수녀원에는 영성체 성사 금지 등의 징계가 내려졌지만 힐데가르트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잇따른 탄원서와 그를 아끼던 몇몇 대주교의 도움으로 금지령은 해제됐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쯤 뒤에 힐데가르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에대해서도 자신과 함께 한 수녀들에게 미리 말했다고 합니다. (끝)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1)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2)

  • 영혼의 존재를 탐구하는 과학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Pexels)

    “영혼은 실재하는가?”
    이 논쟁은 수 세기 이상 지속된 난제 중 하나입니다. 

     

    과거부터 영혼의 존재를 믿어온 종교계와는 달리, 과학계에서는 영혼이나 의식을 인간 두뇌의 신경 네트워크 내에서 수행되는 단순한 계산에 의한 것으로 보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해왔습니다. 

     

    그런데 일부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영혼의 존재를 믿고 이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Orch-OR 이론”입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의 로저 펜로즈 교수(Roger Penrose)와 미국 애리조나 대학(University of Arizona)의 스튜어트 해머로프 교수(Stuart Hameroff)는 2014년 3월 영혼의 존재를 뒷받침할 근거로 “조화로운 객관적 파동수축(Orch-OR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영혼은 뇌세포의 미소관(microtube)에 머문다”고 주장합니다. 미소관은 튜블린(tubulin)이라 불리는 단백질로 구성된 매우 가느다란 관입니다. 동식물 세포 내에 존재하는 기관으로, 세포의 골격유지, 세포의 이동, 세포 내 물질의 이동 등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Orch-OR 이론에 의하면, 사람의 뇌는 수많은 양자(quantum)로 이루어진 ‘생물학적 컴퓨터’이며, 사람의 의식은 영혼에 기인한 ‘계산이 불가능한 양자 프로세스’에 기반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자 프로세스란, 두뇌 뉴런 속 미소관 내에서 일어나는 양자 진동을 말합니다. 

     

    미소관은 “튜블린”이라는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튜블린은 ‘확장상태’와 ‘수축상태’라는 두 가지 상이한 상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소관도 같은 상태를 보이는데 이를 통해 이웃한 단백질들의 양자상태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뇌의 전 영역으로 영향이 확산된다고 합니다. 
    이 이론에서는 이러한 연쇄적인 과정을 인간의 정신활동으로 보고, 이 과정의 중심에 있는 미소관을 “인간의 의식이 있는 장소”라고 봅니다.

     

    두 교수는 이 이론에 대해 설명하면서, “Orch-OR 이론으로 20가지를 테스트 해본 결과 6가지가 확인되었으며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Orch-OR 이론은 가장 엄격하고, 포괄적이고, 성공적으로 검증된 이론”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사이언스 채널(Science Channel) 한 프로그램에서 해머로프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심장 박동이 멈추고, 혈액이 흐르는 것이 멈추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그런 상황에서 그 환자의 미소관들은 그들의 양자 상태를 잃게 됩니다. 미소관 내에 있는 양자정보는 파괴되지 않으며, 파괴될 수도 없습니다. 단지, 그것은 우주로 분배될 뿐입니다. (그 상황에서) 만약 환자가 소생되고 회복된다면, 이 양자정보는 다시 미소관으로 되돌아갈 수 있고, 그 환자는 "난 임사체험을 했었지요."라고 말하게 됩니다."

     

    물론 이 이론에는 의문점이 따라 다닙니다. 양자 단위로 인간의 정신활동을 설명하기에는 인간의 두뇌가 너무 크고, 보통 이 정도 크기에서는 양자적 효과는 거의 상쇄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과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이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이 이론은 학술지 생명의 물리학 리뷰(Physics of Life Review) 2014년 3월호에 발표되었습니다.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2)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LoveToTakePhotos)

    "하늘이 열리면서 머리 위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밝은 광채가 쏟아져내렸습니다. 그 빛은 나의 심장 전체와 가슴을 불꽃처럼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시편서, 복음서, 그리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의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계시도 함께 받았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듣는 것을 말로 전하라"라는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계시를 무시했습니다.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심하게 앓아눕게 되자 신의 계시를 거역한 것 때문임을 깨닫고 자신이 본 환상을 글로 쓰기로 결심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디시보덴베르크의 수도원장인 쿠노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일생 동안 스승이며 조언자이자 친우였던 수도승 볼마르의 도움으로 26개의 묵시가 담긴 〈스키비아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키비아스는 ‘길을 알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책이지요.

     

    그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 천사 루시퍼의 타락, 아람과 이브의 원죄, 노아를 비롯한 유대 선지자들의 행적,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초대 교회 순교자들, 앞으로 일어날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 등을 책에 담았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저술을 시작한 지 얼마 뒤에 쿠노는 힐데가르트의 작업을 마인츠의 대주교 헨리에게 보고했고 이는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까지 알려져, 교황은 종교회의를 통해 힐데가르트의 환상에 대해 논의한 뒤 저술을 허락하게 됩니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깨달음을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은 불교의 만다라 못지않게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계시를 받은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고 보석치료와 자연치유에 대한 의학 관련 책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작 범위는 방대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수녀였으나 활동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불의한 일에 대한 비판에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부자들은 물론 교회 권력도 그의 날선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심지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에우제니오 3세 교황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 물어뜯으려고 으르렁대거나 닭처럼 바보같이 한밤중에 꼬꼬댁거리는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부자들에게 가진 것을 굶주린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수녀원을 찾아온 황제를 향해서도 잘못한 일을 꾸짖었습니다.

     

    수도공동체인 수녀원을 관리하는 일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두 개의 수녀원을 세웠고, 이 수녀원은 독립적으로 운영됐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각지에서 그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도왔습니다. 병자와 가난한 이들은 그에게서 특별한 돌봄을 받았습니다. 치유에 관심이 많아 약초 등을 활용한 자연요법을 연구했고, 보석을 통한 치료법도 만들었습니다. 음악도 주요한 치유 도구였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여성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였지만 그는 여성임을 자랑하라고 수녀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수녀들에게 하루에 한 잔씩 포도주를 마시라 고도 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서요. 

     

    힐데가르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디지보덴베르크 수녀원에 사는 수녀님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습니다. 수녀가 되어 함께 살고자 하는 여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녀원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힐데가르트는 새 수녀원을 짓기로 하고 루페르츠베르크라는 산에 새 수녀원을 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1)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3)

  • 서암 큰 스님이 남기신 참된 수행법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truthseeker08)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아래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요,
    그 곳이 바로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불교라네. 

    - 서암 큰 스님 -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1)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Alexa_photos)

    “온 힘을 다해 생명을 보살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응답합니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세요. 여러분 안에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창조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의 원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듯이 신성도 그렇게 만물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빙엔의 예언자로 불리는 힐데가르트가 한 말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한평생 수녀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삶을 산 그에게는 많은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예언자, 신비주의자, 생태주의자, 신학자, 의사, 치유가, 자연주의자, 작곡가, 미술가 등등.

     

    힐데가르트는 1098년 독일 라인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고, 교황권과 황제권이 맞서기 시작하며, 그런 혼란에 대한 대안으로 극단적 금욕을 주장하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형제자매들이 뛰어놀 때 어린 힐데가르트는 꽃과 식물을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모가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면 자신 안에 보이는 그림을 보는 게 재미있고 좋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가 3살 때부터 본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은 특별한 환시였습니다.

     

    부모님은 힐데가르트가 여덟 살일 때 한 수도원에 맡깁니다. 열 번째 아이를 십일조로 바치겠다고 했던 교회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 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신자들과 성직자들 안에 기초를 놓아 주신 불타는 정의가 희미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내가 태어났고 부모님은 탄식하며 나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보내진 곳은 일반 수녀원이 아닌 디시보덴베르크산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백작의 딸로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던 유타가 살고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유타로부터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수도원은 당시 어린 소녀들이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시편 암송, 악보 읽기, 악기 연주 등을 배우면서 수녀가 되기 위한 수련 기간을 거친 뒤 열다섯 살 때 수녀가 됐습니다. 1136년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힐데가르트는 수녀들의 만장일치로 수녀원장이 됩니다.

     

    수도원장으로 헌신하면서도 힐데가르트는 기도와 묵상을 지속했는데 그녀가 42세쯤이었을 때 신비한 환상을 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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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자 없는 선사 수월스님 (3)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terimakasih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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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월 스님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적에만 주로 관심을 갖자 마지막 거처인 오대산 상원사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수월 스님이 스승인 경허 스님을 찾아다녔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경허 스님은 박진사라는 이름으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와 술로 사람들을 만나며 스님도 속인도 아닌 것처럼 지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월 스님은 평안도 강계에서 스승 경허 스님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은 뵙기를 청하는 수월 스님을 만나 주지 않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인해주지도 않았고요.

     

    수월 스님은 정성 들여 삼은 짚신 몇 켤레를 스승이 계신 곳에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수월 스님은 그 뒤 함경북도 회령군의 두만강 부근에서 한동안 생활했습니다. 거기서도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습니다.

     

    가끔씩 강가에서 대비주를 외며 선정에도 들었다고 합니다. 수월 스님이 강가에서 대비주를 외고 있을 때면 물고기들이 물 밖으로 뛰어올라 장관을 이뤘다는 얘기가 전해 옵니다.

     

    수월 스님은 58세인 1912년에는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거처를 옮긴 뒤 3년 동안 소먹이 일꾼으로 일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길가 바위 위에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는 밤새워 만든 짚신을 매달아 뒀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위해 간도로 도망 오는 동포들의 주린 배를 잠깐이라도 채워주고 고단한 원행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월 스님이 살던 간도 지역에는 비적이 많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비적에 맞서기 위해 집집마다 사나운 개를 키웠다고 합니다. 비적을 물어 죽일 정도로 용맹한 개들도 수월 스님 앞에만 가면 순한 양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반겼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수월 스님은 간도 지역 동포들이 지어준 화엄사라는 작은 절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기에서도 누더기를 걸치고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잠을 자지 않았고 아픈 사람을 쉽게 고쳐줬으며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는 등 수월 스님과 관련한 신비한 얘기들은 지금도 그 지역에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수월 스님은 1928년 늦여름 화엄사가 자리한 송림산의 개울가에서 결가부좌를 한 채 입적했습니다. 바지저고리와 짚신 한 켤레를 머리 위에 얹은 채였습니다.

     

    수월 스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 7일 동안 송림산에서는 밤마다 방광의 기적이 일어났고 많은 짐승들이 무리 지어 울었다고 합니다.

  • 그림자 없는 선사 수월스님 (2)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unclel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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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월스님의 출가 전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불교 사전에 따르면 수월 스님은 1855년에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겨 작은 벌레까지 함부로 괴롭힌 적이 없었으니 자신이 돌보던 소를 얼마나 끔찍이 아꼈을  것인지 짐작이 됩니다.

     

    탁발 나온 스님들이 날이 저물면 수월 스님이 있던 방에서 묵고 가곤 했는데 그 인연으로 출가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수월 스님은 당시로는 스물 아홉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홍성군에 있던 천장암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천장암은 경허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한동안 보림 수행을 했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불교 그리고 스승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때 천장암에는 경허 스님의 속가 친형인 태허 스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습니다. 수월 스님은 태허 스님을 만나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됐습니다.

     

    태허 스님은 경허 스님을 수월 스님의 법사로 지정해 가르침을 받도록 했습니다. 수월 스님은 절에서 말없이 일만 했다고 합니다. 다른 점은 법사인 경허 스님이 가르쳐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낮이나 밤이나 일할 때나 밥을 먹을 때도 수월 스님은 다라니를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태허 스님이 외출했다 밤늦게 천장암에 돌아오던 길에 신비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 때 천장암 입구에는 방앗간이 있었는데 불빛이 새나오는 것을 보니 누가 일을 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했습니다. 물레방아에 물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는데 방아 찧는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허 스님은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물레방아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지만 방앗공이는 위에서 멈춰 있었고, 그 아래 돌확 속에 수월 스님이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일을 하다 지쳐 잠이 든 것이지요. 태허 스님이 깜짝 놀라 수월 스님을 끌어내자 그제야 방앗공이가 확으로 떨어져 방아를 찧기 시작했습니다.

     

    태허 스님은 그로부터 얼마  뒤 수월 스님에게 절 일을 잠시 쉬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수월 스님은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이레째 되는 날 천장암이 있던 마을에서 갑자기 “불이야”하는 외침과 함께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습니다. 천장암 쪽에 불길이 보였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달려나와보니 불길은 천장암 쪽에서 솟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게 집을 불태우는 불이 아니라 수월 스님의 몸에서 뿜어나온 빛입을 알게 됐습니다.

     

    그 불은 수행자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빛, 방광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수월 스님은 3가지 특별한 힘을 얻게 됐다고 합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았으며, 잠을 자지 않아도 됐고, 아픈 사람을 금새 치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월 스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찾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수월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천장암을 떠나 금강산과 지리산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수월 스님의 삶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를 했고, 밤이면 고요히 선정에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월 스님을 찾았지만 눈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수월 스님은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수월스님 진영. 이미지 출처 : 불교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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