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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자들의 시대12 -명천의 개안

    그는 힘이 용솟음쳤다. 거대한 분수처럼 솟구치는 힘을 어디엔가 써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하늘 높이 뛰어오르고 산봉우리를 번쩍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승께서 옆에 계시니 함부로 힘자랑을 하지 못했다.

    "명천아, 폭포물이 못 떨어지게 한번 막아 보거라."

    명천의 마음을 헤아리고 벽운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예, 스승님."

    명천은 못을 사이에 두고 폭포와 정면으로 마주섰다. 그리고 단전으 진기를 손으로 보낸 다음

    서서히 팔을 앞으로 뻗었다. 명천의 손에서 강한 공력이 뿜어 나와 폭포수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물줄기가 반으로 끊겼다. 아랫부분은 못으로 떨어져 내리고 윗부분은 얼어붙은 듯이

    그대로 있었다.

    명천은 또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그와 동시에 물줄기도 거꾸로 올라갔다.

    손을 내리자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물줄기가 도로 내려왔다.

    "됐다. 잘했다. 공력이 크게 좋아졌구나."

    명천이 손을 거둬들였다.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굉음이 울렸다.

     

    '초막으로 돌아가자."

    두 사람은 초막으로 올라왔다. 백령자는 초막의 지붕 위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었다.

    백령자의 몸에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그 광채는 한 줄기로 모아져서 명천이한테로 뻗쳐 갔다. 명천의 마음은 더욱 아늑해졌다.

    자신이 우주 삼라만상과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자기가 우주의 품안에 안겨 있으면서

    동시에 온 우주를 품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때였다. 벽운 선생의 눈에 보덕봉의 맑은 정기가 활짝 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빛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보덕봉의 왼쪽에 솟아오른 선인봉과 오른쪽의 옥녀봉에서도 빛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세 빛기둥에서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양이 초막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초막의 앞쪾에는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가물가물 펼쳐져 있었다.

    정남쪽으로 아득히 먼 곳에 지리산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 지리산에서도 찬란한 빛이 뿜어 나와 초막으로 뻗쳐 왔다.

    초막 일대는 사방에서 밀려온 맑디맑은 정기에 휩싸였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도 진기가 충만해 있었다.

    지극히 청정한 기운이 명천의 몸 속으로 쏴아쏴아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이 명천의 마음 깊은 데 깃들인 번뇌의 찌꺼기들을 말끔하게 닦아 냈다.

    벽운 선생과 명천이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명천아, 너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느냐?"

    벽운 선생이 다정하게 물었다.

    "예?'

    명천이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먹기 전처럼 삼라만상을 보고 싶지 않느냐?"

    "그럴 수 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

    명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 될 수 있다. 오늘부터 그 공부를 하자."

    "스승님, 정말 제 눈이 다시 떠질 수 있습니까?"

    "아무렴, 되고말고."

    "어떻게 하면 그리 되는지요?"

     

    "삼라만상은 하늘에서 나왔다. 하늘은 형체가 없는 세계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진공이다.

    네 마음과 정신이 진공으로 돌아가면 곧 하늘과 하나가 된다. 하늘은 우주 삼라만상을 낳았으니,

    만물 안에 하늘이 깃들여 있다. 하늘의 빛은 만물중생을 환히 비춰 준다.

    하늘 마음을 길러라. 네 마음이 진공으로 화할 때, 너는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천리 만리 밖, 우주 저쪽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천안통을 얻는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다. 이제 그때가 되었느니라. 오늘부터는 오로지 몸과 마음을 진공으로 만드는 공부에

    전념해라. 외공은 그만해도 되겠다. 자, 지금 시작해 보자."

    명천이 벽운 선생 앞에서 선정에 들었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상념들을 떨쳐내고

    가슴의 중단전에 의식을 모았다.

    "살갗으로 숨을 쉬면서 네 몸과 마음이 서서히 흩어져 진공으로 화한다고 생각해라.

    먼지처럼 흩어져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모여 형체를 갖춘다고 상상하거라. 이것을 되풀이해라."

    명천인 밖으로 향했던 감각 기관의 문을 닫고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이깊이 잠겨들었다.

    어느결에 코로 쉬던 숨이 끊겼다. 피부의 기공들이 활짝 열리며 그리로 공기가 드나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조금씩 희미해져 허공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처음엔 구름이나 안개로 뭉쳐 놓은 것처럼 보였다가, 작은 입자들이 풀어지면서 형체가 없어졌다.

    나중엔 몸이 있던 자리가 푸르른 하늘의 일부로 변해 버렸다.

    그런 뒤에 또 몸이 나타나는 광경을 상상했다. 먼저 푸르른 허공에서 먼지 같은 입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한데 엉기어 사람의 형체를 갖췄다. 형체가 살과 뼈로 이뤄진 몸이 되었다.

    명천인 상상 속에서 거듭거듭 자신의 몸을 없앴다가 다시 만들어 내곤 했다.

    벽운 선생과 함께 있으니 한 점의 번뇌도 범접하지 않았다. 일체이 흐트러짐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명천이 상상으로 자신의 몸을 허공에 흩뿌린 다음이었다.

    명천의 의식 속에는 티 하나 없이 푸르른 허공만 남아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명천아, 눈을 떠라."

    벽운 선생의 음성이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려 왔다. 

    명천이 화들짝 놀라며 퍼뜩 눈을 떴다.

    마주 앉은 벽운 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방바닥, 벽,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안통을 얻은 것이었다. 벽운 선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명천인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30년 가까이 암흑 속에서 살았는데, 갑자기 몰 수 있게 되다니

    영 믿기지 않았다.

    "뭐가 보이느냐?"

    "스승님이 보입니다. 스승님께서 웃고 계십니다. 맞는지요?"

    "그렇다."

    "스승님 옷이 누더기로 보이네요. 맞는지요?"

    "맞다."

    "스승님!"

    명천은 감격에 겨워 벌떡 일어나 벽운 선생한테 큰절을 올렸다.

    '됐다. 그만 앉거라. 이제 너는 천안통이 열렸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볼 수 있다.

    지금 해가 어디에 있는지 보거라."

    명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니다. 그럴 것 없다. 여기 그냥 앉아서 보거라."

    명청은 해를 생각했다. 옥녀봉 위로 막 해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옥녀봉 위에 있습니다."

    "옥녀봉은 어떻게 생겼느냐?"

    "타원형의 꼭대기가 둥그렇습니다."

    "선인봉은 어떻게 생겼느냐?"

    옥녀봉과 똑같은데 그보다 약간 큰 봉우리가 보였다.

    "옥녀봉하고 똑같습니다. 옥녀봉보다는 조금 더 높고 큽니다."

    "보덕봉은?"

    "네모 반듯합니다."

    "보덕봉 맞은편에는 무엇이 있느냐?"

    "아, 엄청나게 많은 산줄기가 줄줄이 늘어서 있습니다. 까마득하게 먼 곳까지 보입니다.

    맨 뒤에 왼쪽으로 높은 산이 있고요."

    "그 산이 지리산이다."

    "예? 정말입니까?"

    명천인 감개무량했다.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앉아서 자신의 고향 지리산을 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자, 나가서 다시 보거라."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명천인 마당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안에서 본 것과 똑같은 훙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붕 위에 앉아 이쓴 백령자의 모습도 보였다.

    백령자가 명천을 향해 날아왔다. 명천이 백령자를 품어 안났다.

    백령자의 날개를 쓰다듬어 주면서 자신이 천안통을 얻은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명천아, 이제부턴 오로지 네 몸을 진공으로 변회시키는 공부만 하거라.

    번뇌를 떨치고, 오로지 네 중단전만을 지켜봐라. 그만 하거라. 번뇌를 떨치고,

    오로지 네 중단전만을 지켜봐라. 그리고 신통력은 꼭 필요할 때만 써야 한다.

    함부로 쓰면 삿된 기운이 침범하여 사도에 빠진다.  명심해라."

    벽운 선생은 이 말을 남기고 계룡산을 떠났다.

     

    닷새 만에 운학산으로 돌아온 벽운 선생은 백학봉 초막에서 한동안 필섭이네와 함께 지냈다.

    백령자도 초막을 떠나지 않았다.

    청령자는 백령자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련에 전념했다. 행공을 하거나 명상에 잠기는 게 일과였다.

    사냥을 나가는 횟수는 반으로 줄었다. 이제 이틀에 한 번씩만 나갔다.

     

    석주와 필섭이도 식욕이 점차 줄어들었다.

    단전에 진기가 충만해져서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되었다.

    두 사람은 심신의 변화를 많이 겪었다.

    단전에서 후끈후끈한 열기가 생겨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돌아다녔다.

    몸이 떨리기도 하고 전에 앓았던 곳이 무척 아프기도 했다. 한번 통증을 느끼고 나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여러 가지 환상도 보였다. 자기 몸 속이 환하게 들여다보일 때도 있었다.

    어떤 날은 바깥 세상 모습이 영화처럼 눈앞에 스쳐갔다.

    벽운 선생은 그런 현상들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일렀다.

    "수행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이상한 일들이 다 생긴다. 마음, 정신, 몸의 변화가 기기묘묘하다.

    신통한 능력도 많이 얻게 된다. 하나, 그런 것에 빠지면 안 된다.

    정도는 오직 하나,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여의는 것이다.

    어느 날, 벽운 선생은 아침 일찍 청령자와 백령자를 데리고 어디론가 출타했다.

    초막에는 석주와

    필섭이 둘만 있었다.

     

    점심나절이었다. 행공을 마치고 잠시 쉬는 참인데 낯선 여자들 셋이 백학봉에서 내려왔다.

    티셔츠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제법 큰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여자들은 초막 마당으로 내려오자마자 손을 합장하고 사방을 향해 허리굽혀 절을 올렸다.

    평범한 등산객이 아닌 것 같았다. 운학산에는 등산하러 오는 이가 별로 없었다.

    한달에 두세 팀이 올까말까 했다. 산이 깊고 길도 좋지 않아서 여자들끼리 온 적은 더구나 없었다.

    필섭인 이 여자들이 혹 무당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여자들의 얼굴에선 무당들 특유의 신기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합장 배례를 마친 다음 석주와 필섭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두 분께선 여기서 사시나 보지요?"

    얼굴이 갸름하고 하얀 셔츠를 입은 여자가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그녀가 말할 때 강한 기운이 풍겨 왔다. 필섭인 가슴께가 후끈 달아올랐고,

    석주의 등허리는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예, 그렇습니다. 어디서들 오셨습니까?"

    필섭이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상제봉 밑에서 왔습니다. 두 분께선 수도하시는 분들이지요?"

    여자의 얼굴은 아주 맑았다.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잡티가 전혀 없었다.

    크고 아름다운 눈에서는 서글서글한 빛이 뿜어 나왔다.

    '글쎄, 수도랄 것까진 없고, 그냥 수양이나 하면서 지냅니다."

    필섭인 처음 보는 이 여자가 왠지 무척 낯익게 느껴졌다.

    언젠가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보기만 한게 아니라,

    가까이 지낸 사람 같았다.

    "실은 저희도 수도하는 사람인데요, 여기서 한 이틀 쉬어 갔으면 하고 왔거든요,

    몇 년 전에 여길 한번 와봤는데 참 좋더라고요, 야영 준비를 다 해왔어요.

    두 분 공부하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허락해 주세요."

    "그렇게 하십시오."

    필섭인 망설이지 않고 쾌히 승낙했다.

    수도하는 사람들이라니 반가웠고, 왠지 이 여자한테 친밀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석주의 의사를 묻지는 않았으나 석주도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여자들은 마당 한켠에다 텐트를 쳤다. 필섭이와 석주가 도와주었다.

    야영 준비를 끝내고 짐을 정리한 뒤 필섭이네와 여자들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여자들의 이름은  보화, 보연, 보옥이라 했다.

    필섭이네한테 맨 먼저 말을 걸었던 여자는 보화였다.

    "보자 돌림이시군요. 그럼 모두 자매간 되십니까? 보화 씨가 막내신가요?"

    필섭이 보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보화는 다른 두 여자보다 대 여섯 살 아래로 보였다.

    "친자매는 아니지만, 자매나 마찬가지예요. 우린 도반들이고 오랫동안 같이 살았어요.

    그리고 제가 제일 위예요. 얘들은 동생들이에요."

    보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제일 앳되게 보이시는데요. 실례지만 지금 몇이세요?"

    "호호, 저 나이 많아요. 서른넷이에요."

    "그러세요?"

    필섭인 깜짝 놀랐다. 스물대여섯쯤으로 짐작했는데,

    10년은 더 젊어 보이니 수행이 깊은 모양이라 생각했다.

    "공부를 참 많이 하셨나 봅니다. 수도를 시작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스물한 살 때부터니까 벌써 만 13년 됐네요."

    "동생분들은요?"

    "저보다 5년 늦게 입도했어요."

    "무슨 도를 닦으십니까? 불도를 닦으시나요, 선도를 공부하시나요?

    "저희는 후천대도에 입문했습니다."

    "후천대도요? 처음 들어 보는데요."

    필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천시대, 후천개벽이란 말은 많이 들어 봤지만,

    후천대도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후천개벽 얘긴 들어 보셔겠죠?"

    "그런 얘기 가끔 들었습니다."

    "우리 도는 후천시대를 여는 큰 도예요.

    저희 스승님께서 천명을 받아 세상에 널리 펼치고 계십니다."

    보화는 자신있게 말했다. 평소 후천개벽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지내던 터라 필섭인

    호기심이 생겼다.

    "저희 스승님께선 하늘 같으신 어른이세요. 하늘과 한몸이라고나 할까요.

    말세의 구세성인에 관해서도 많이 들어보셨겠네요?"

    "예, 구세주가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있더군요."

    "사람들은 말세의 구세주를 정도령, 자하진주라 부르지요. 미륵이 하강한다고도 하고요.

    자기가 정도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모두 가짜예요. 저희 스승님 한 분만이

    바로 진짜지요."

    "예?"

    필섭이 또 깜짝 놀랐다. 그의 눈에 강한 의혹의 빛이 감돌았다.

    석주도 눈을 크게 뜨고 보화를 쳐다보았다. 

    필섭인 언젠가 벽운 선생한테 말세의 구세주가 어떤 분인지 여쭤 본 적이 있었다. 

    벽운 선생은 그분이 선계의 대성자라고 했다. 그분께서 언제 세상에 나오시느냐고 재차 물으니까

    너희 생전에는 나오실 거라며 그런데 너무 마음을 쓰지 말라 일렀다.

    지금은 오로지 마음과 몸을 닦는 데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벽운 선생 말씀으로는 구세 성인을 한번 뵙는 것만도 무한한 광영이었다.

    그런데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화 씨의 스승이 구세성인이시라고요? 그분께선 언제 선계에서 나오셨습니까?"

    "선계라니요?"

    "제가 듣기로는 구세성인께선 선계의 큰 스승이시라 하더군요."   

  • 류인학의 우리명산 답산기-서울의 한복판에 흐르는 한강


    ● 상처투성이가 된 서울의 지맥 (地脈)

    지금 서울의 산줄기들은 성한 것이 거의 없다.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찼고, 길을 내느라 파헤쳐진 곳이 많다. 터널도 많이 뚫었다. 온통 상처투성이다. 주산인 북악산 꼭대기까지 차도를 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백호인 인왕산 능선에도 차도가 생겼고 청룡인 낙산은 집들이 꽉 들어섰다. 청룡·백호가 이렇게 상처를 심하게 입으면 사고로 불의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아진다.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기도 어렵다.

     

    지금 우리 나라가 그렇다. 갖가지 사고로 죽는 사람이 일 년에 수십만명은 될 것이다. 낙태로 죽어가는 아기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해마다 백오십만 명이나 되는 아기들이 죽는다고 한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얘기다.

     

    형제간에 남남처럼 무정하게 지내는 사람도 점차 늘어간다. 이혼율도 해마다 급증한다. 어제까지 살을 섞으며 부부로 살던 사람들이 돌아서면 남남이 되고 만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은 억울하게 온갖 슬픔과 고통을 겪는다.

     

    이 모두가 산천을 함부로 망가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비극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참 가난하게 살았다. 그 시절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데 불과 30년 사이에 엄청나게 부유해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풍수학에선 물을 재물로 본다. 원래의 한양땅에는 물이 적었다. 도읍지 한복판으로 청계천 하나가 흘렀을 뿐이다. 게다가 청계천은 수량이 너무 빈약했다. 도읍지의 수세 (水勢)가 이러니 물산(物産)이 풍부해질 수가 없었다. 청계천의 수량이 풍부했으면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서울은 급격히 넓어졌다. 어느덧 한강변까지 집들이 들어찼고, 곧 시가지는 강을 건너 영등포 쪽으로 계속 확대되었다. 그 바람에 한강이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한강은 청계천보다 백 배는 더 큰 물이다. 이 한강물에 서린 물산의 기운이 활짝 꽃피면서 우리 나라가 갑자기 부유해졌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경제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물은 모름지기 안아주듯 휘감아돌아야 좋다. 휘도는 안쪽에 좋은 정기가 모인다. 바깥쪽은 정기가 흩어져버린다.

     

    한강의 전체적인 모습은 덕소 근방에서 임진강과 만나는 지점까지 반원형이다. 북한산을 멀리서 휘감아도는 형상이다.

     

    한강은 서울 복판에서 두 번 크게 휘돈다. 지세가 한강에 휘감긴 것처럼 생긴 데가 세 곳이 있다. 성동구 자양동 일대와 용산구 이촌동 일대, 그리고 강남의 압구정동 일대가 그곳들이다.

     

    압구정동 앞에서는 중량천과 한강이 합류한다. 그래서 물산의 기운이 더욱 커진다. 압구정동에 부자들이 모여 살고 소비문화가 극성을 떠는 것도 이 한강의 수세(水勢) 때문이다.

     

    그런데 압구정동에서 보면, 한강물이 정동방(正東方)인 묘방 (卯方)에서 흘러와 정서방 (正西方)인 유방 (酉方)으로 빠져나간다. 이게 참 안 좋다. 물이 묘유방 (卯酉方)이나 자오방(子午方; 정북방과 정남방)으로 직통하면 음란한 기운이 창성해진다. 압구정의 소비문화, 압구정의 성풍속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한강에 서린 물산의 기운이 활짝 피어나면서 물질주의가 온 나라를 휩쓸었다. 투기 바람이 기승을 부렸고, 투기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나라의 풍속을 타락시켰다. 사람들의 정신은 옛날 가난했던 시절보다 훨씬 더 빈곤해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 나라 뿐이랴. 온 세계가 물질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우는 나라들은 왕성한 물산의 기운으로 강국이 되었다. 영국은 런던 한복판에 흐르는 테임즈 강의 기운이 크게 발하여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일본은 동경 앞바다에 서린 물산의 기운으로 엄청난 부국이 되었다. 미국은 뉴욕 앞바다의 기운, 프랑스는 세느 강, 독일은 라인 강의 기운을 받아 재물을 모았다.

     

    물질주의, 자본주의는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시켰다. 부유한 나라는 더욱 부유하게, 가난한 나라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온 세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물질주의의 포로가 되어 허덕인다.

     

    물질주의를 극복하고 세계 인류 전체가 골고루 복을 누리는 길은 없을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 희망은 있다. 무소유(無所有)의 기쁨, 그 찬란한 자유와 행복을 누린 성자들의 정신에 한가닥 희망이 남아있다.(계속)
     

  • 성자들의 시대11- 명천의 수행

    계룡산 보덕봉

    운학산을 떠난 백령자와 벽운 선생이 이리로 왔다. 보덕봉에도 그의 제자가 하나 있었다.

    홍명천이란 젊은이다.

    명천인 앞을 못 보는  맹인으로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어려서 백내장을 앓는 바람에 눈이 멀었다.

    혜원과 함께 지내다가 혜원이 운학산으로 간 뒤에는 줄곧 혼자 살아왔다.

    가끔 벽운 선생과 백령자가 다녀갈 뿐 찾아오는 이가 전혀 없었다.

    그가 머무는 초막은 보덕봉 정상에서 남쪽으로 백 미터쯤 아래쪽에 있었다.

    벽운 선생은 보덕봉 정상에 앉아 초막을 내려다보았다.

     

    명천인 마당에서 외공을 수련하고 있었다.권법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쭉쭉 내뻗고 휘두르며 가끔 기합 소리를 터뜨렸다.

    기합 소리가 호랑이의 포효보다 더욱 우렁찼다. 대단한 공력이 실려 있어

    온 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움직임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손발을 내뻗을 때에도 강한 기운이 뿜어 나갔다.

    단전에 가득 쌓인 진기가 경락을 타고서 손끝발끝으로 뻗쳐  가는 것이었다.

    명천인 권법 수련을 끝낸 다음, 커다란 돌을 집어 들었다.돌의 두께가 두어 자,

    길이가 석 자쯤 되었다. 이것을 공중에 집어 던졌다.

    돌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높이 솟구쳤다가 10미터쯤 앞쪽으로 떨어졌다.

    명천은 한 길 이상 몸을 날려 내려오는 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명천의 손끝이 돌에 채 닿기도 전에 단전에서 뿜어 나온 공력이 돌을 쳤다.

    돌은 굉음을 울리며 산산조각났다. 파편 조각들이 돌을 쳤다.돌은 굉음을 울리며 산산조각났다.

    파편 조각들이 총알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그러고 나서 명천인 땅바닥에 놓여 있던 목검을 집어 들었다. 검과 명천인 한몸이 되어 움직였다. 번개같이 움직이며 전후 좌우 상하로 검을 뻗었다.

    검을 내뻗을 때마다 단전에 충만한 진기가 손을 지나서 검 끝으로 뿜어 나갔다.

    잠시 후, 동작을 멈추고 심호흡을 하더니 땅바닥에서 왼손으로 나무 막대기들을 주워 들었다.

    길이가 30센티쯤 되고 지름이 1센티쯤 되는 막대기들이었다.

    명천은 이것들을 자기의 머리 위에 던졌다.

    나무들이 위로 올라갔다가 막 내려오기 시작하자, 명천의 몸이 두 길 가까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는 공중에 뜬 채로 칼을 휘둘렀다.

    칼이 막대기들한테 닿기 직전에 칼끝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뻗쳐 나와 나무들을 반쪽으로 갈랐다. 

    막대기들이 모두 두 쪽으로 갈라져서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졌다.

    명천인 막대기들이 다 떨어진 다음에야 사뿐히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또 먼저 것보다 조금 더 큰 돌을 집어 올렸다. 이것을 높이 던졌다.

    돌이 무게 때문에 먼저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내려왔다.

    명천이 위로 솟구치며 칼을 상하 좌우로 휘둘렀다. 돌은 칼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을 맞고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명천인 맹인이라 앞이 안 보였다. 그러나 물체의 움직임을 기운으로 감지했다.

    눈으로 보는 거와 다름없이 물체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냈다.  검술 수련이 끝났다.

     명천인 이어서 경신술 공부를 했다.

     

    초막 마당 한켠에 바위 두 개가 있었다. 높이가 한 길 가까이 되는 바위였다.

    두 바위의 간격은 4,5 미터쯤 되었다.

    명천인 가늘고 기다란 대나무 막대를 이 두 바위 위에다 걸쳐 놓았다.

    대나무의 굵기는 엄지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것만 했다.

    명천이 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라가 두 손을 합장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서서히 풀어져서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이 허공으로 변한다고 생각했다.

    상상 속에서 몸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뒤에는 장대를 떠올렸다.

    가느다란 장대가 쇠막대처럼 강해지고, 아름드리 통나무 만큼 굵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명천인 장대가 거대한 통나무로 변하는 모습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런 다음 대나무 뒤에 발을 올려놓았다.  한 발, 두 발,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명천이 가운데로 이르렸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앞으로 나갔다. 명천이 가운데로 이르렀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전혀 휘어지지 않았다. 진짜 통나무인 것처럼 명천의 몸무게를 잘 감당했다.  명천이 사뿐사뿐 걸어서

    반대편 바위로 올라섰다.

    명천인 대나무를 바꿨다. 이 대나무는 먼저 것보다 더 가늘었다.

    명천인 앞서와 똑같이,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변하고, 대나무가 통나무로 변하는

    상상을 한 뒤에 대나무 위로 올라섰다. 두 발이 모두 올라가자 대나무가 약간 휘어졌다.

    한발 한발 가운데로 갈수록 대나무는 점점 더 밑으로 내려왔다.

    명천이 대나무의 정중앙에 이르렀다. 대나무가 1미터 이상 휘어졌다. 다시 발을 옮기자

    조금씩 퍼졌다. 명천인 무사히 반대편 바위로 건너갔다.

     

    이때 벽운 선생의 모습이 정상에서 사라졌다. 그의 몸은 눈깜짝할 사이에 초막으로 옮겨졌다.

    명천인 스승이 온 것을 기운으로 알았다. 그의 뒤쪽에서 따스하고 평화로운 화기가 바람처럼

    밀려왔다.

    얼른 돌아서서 스승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동안 평안히 지내셨는지요?"

    "별고 없었다. 부지런히 닦았느냐?"

    "예, 형님들과 누님도 무고들 한가요?"

    "잘 있다."

    "공부는 잘들 되는지요?"

    명천인 도반들의 수행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궁금했다.

    "열심히 닦는다. 혜원인 한 경계 더 높아졌고, 석주와 필섭인 머지않아 단을 이룰 게다."

    "아, 그래요 !"

    명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너도 공부가 많이 됐구나. 살갗의 숨구멍이 꽤 열렸어, 공력이 예전 같지 않다."

    "아직은 완전치 못합니다. 피부의 숨이 자주 막힙니다."

    "네가 한을 품고 있어서 그렇다. 그게 없어져야 큰 도를 이루느니라."

    명천인 혜원이보다 조금 늦게 임독맥이 열렸다. 이제 피부 호흡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피부로 숨을 쉬노라면 온몸의 기공을 통해 우주의 진기가 쏴아쏴아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명천의 피부 호흡은 아직 불완전했다. 기공이 활짝 열렸다가도 곧 스르르 닫혔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 때문이었다.  그는 네 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날 한시에 죽었다. 그것도 처참하게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명천의 고향은 지리산 기슭이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1950년 9월 북한군이 후퇴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때 명천의 나이 겨우 한 살이었다.

    3년 후 어느 날 밤이었다. 명천인 잠을 자다가 가슴이 답답하여 잠깐 잠을 깼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그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는 명천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댔다.

     감촉이 꺼칠꺼칠했다. 무성한 수염 때문이었다. 명천인 깜짝 놀랐다.

    자기를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분명 아니었다. 명천인 엄마를 몇 번 부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명천인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걸레쪽 같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다.

    턱과 볼에는 기다란 수염이 무성했다. 어머닌 명천이더러 그가 먼데 사는 아저씨라고 했다.

     그는 명천일 무릎에 앉혀 놓고 이것저것 말을 시켰다. 또, 자꾸 머리를 쓰다듬고 꼬옥 껴안아

    주곤 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 그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명천인 그가 왜 비좁고 컴컴한 다락에 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날, 명천인 방안 에만 있어야 했다. 어머니가 밖으로 못 나가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도 갑자기 아프다며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명천에게 혹시 누가 오면 다락에 있는 아저씨 얘길 절대 하지 말라고 자꾸 다짐을

    주었다.

    아침나절이었다. 밖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머니는 질겁을 하며 명천일

    끌어안았다.

    "홍인규, 항복하라."

    총소리가 그치고 누군가 크게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숨어 있는 줄 알고 왔다. 나와서 항복하라."

    또 총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와라. 안 그러면 너희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

    다락에 숨어 있던 아저씨가 방으로 내려왔다. 그의 손엔 총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나가 봐야겠소. 어차피 죽을 목숨, 싸우다 죽겠소."

    그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여보! 자수하세요."

    어머니가 명천일 내려놓고 그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자수해도 결국 죽이고 말 게요."

    "명천이와 나는 어떻게 살라고요, 흐흑."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사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보, 미안하오. 명천아, 내가 네 아버지다."

    사내는 어머니와 명천일 꼭 끌어안았다.

    "항복하라. 홍인규, 항복하라."

    사내들의 거센 외침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왔다.

    "아버지."

    명천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그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그리운 낱말이었다.

    "여보, 명천아."

    아버지는 다시 한번 아내와 아들을 꼬옥 안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총을 집어든 다음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는 군복 입은 사내들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뛰어나가자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명천의 아버지는 열 걸음도 못 가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

    아버지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여보 !" 외치며 뛰어나갔다.

    군복 입은 사내들이 어머니를 향해 또 총을 쏘았다. 어머니는 아버니보다 조금 떨어져서 쓰러졌다.

    "엄마 !"

    명천이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가슴에

    엎어져 울었다.

    "명천아, 명천아아."

    어머니는 명천일 부르며 숨을 거뒀다.

     

    고아가 된 명천인 고모 집에서 자랐다. 고모는 명천일 자기 자식처럼 위해 주었다.

    그런데 고모부는 명천일 박대했다. 그는 난폭하고 매정한 사람이었다.

    고모부는 걸핏하면 명천이더러 빨갱이 새끼라고 했다. 명천이 조금만 잘못해도 매를 댔다.

     손찌검도 예사로 했다. 고모는 명천이 때문에 숱한 눈물을 흘렸다.

    명천인 초등학교 3학년 때 백내장을 앓았다. 그는 병원 한번 못 가보고 눈이 멀었다.

    고모부는 눈까지 먼 명천일 더욱 미워했다.

    결국, 명천인 유일한 피붙이인 고모와 헤어져 장애인 복지 시설로 가야 했다.

    명천이 고모 집을 떠난 지 3년 후에 웬 스님이 명천일 찾아왔다. 지관이란 스님이었는데,

    그 스님이 후원하여 명천인 맹아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지관 스님은 자기가 아버지의 친구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명천인 그를 아버지의 친구로만 알았다.

    명천이와 벽운 선생이 처음 만난 곳은  지관 스님이 주지로 있던 문수사였다.

    맹아 학교를 졸업한 뒤, 명천인 지관 스님한테서 한문과 불경을 배웠다.

    그때, 벽운 선생은 일년에 두세 차례 문수사엘 들렀다. 지관 스님의 은사 스님이 벽운 선생의

    친구였다.

    명천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단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총을 쏜 군복 입은

    사내들이 떠오르면 분노로 치가 떨렸다. 그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런데 지관 스님으로부터 불법을 배우면서 증오심이 서서히 사라졌다.

    인간사가 모두 인과려니 생각하며 분노를 떨쳐내려 애썼다.

    지관 스님은 60이 못 돼서 입적했다. 열반에 들던 날, 그가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지관 스님은 명천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명천아, 나는 오늘 간다. 업이 무거워 금세에는 도를 못이뤘다. 다음 세를 기약한다.

    너는 금세에 업을 다 벗고 성불하거라. 벽운 선생께서 앞으로 너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실게다.

    또, 떠나기 전에 너한테 꼭 밝혀야 할 일이 있다.

    나는 네 아버지의 친구가 아니다.

     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날, 네 아버지를 잡으러 갔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때 나는 경찰이었다.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네 어머니와 너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너를 찾아 나섰다.

    명천아, 부디 속세의 원한을 떨치고 해탈의 기쁨을 누리거라."

    지관 스님은 이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명천인 큰 충격을 받았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지관 스님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지관 스님은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명천인 지관 스님을 생각하며

    가슴에 품은 원한을 없애려고 애썼다.

    지관 스님이 입적한 지 얼마 안 되어 벽운 선생이 그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고모는 지관 스님보다 조금 뒤에 세상을 떴다.

    그녀는 죽기 전에 명천의 아버지를 누가 밀고했는지 알려 주었다. 밀고자는

    한동네에 살았던 김덕배라는 사람이라 했다.

    "김덕배란 놈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

    그놈은 면서기였는데 몹쓸 짓을 많이 했다. 명천아, 꿋꿋하게 살거라.

    장가를 가서 애들이라도 잘 길러라. 그놈보다 네가  잘살아야 한다.

    그놈 자손보다 네 자손이 더 잘되는 게 내 소원이다. 불구자라고 좌절해선 안 된다."

    고모의 말은 명천의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분노와 증오심에 불을 질렀다.

    김덕배.

    그를 죽이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처절한 죽음이 생각날 때마다 그의 이름이 함께 떠올랐다.

    벽운 선생이 그 증오심과 분노를 다시 가라앉혀 주었다.

    격렬한 증오심은 사라졌으나 가슴속의 응어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김덕배나 아버지, 어머니에게 총을 쏜 사내들을 만난다면 그 응어리가

    증오와 분노로 폭발할 것 같았다.

     

    벽운 선생은 이 한을 풀어 주기 위해 명천이한테 외공을 가르쳐 주었다.

    명천인 칼을 휘두르고, 공력으로 돌을 깨고, 공중에 날아오르면 가슴이 좀 후련해졌다.

    원수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의 뿌리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손발을 내뻗는 것이었다.

    그를 한스럽게 만드는 것은 부모의 비참한 죽음만이 아니었다.

    강한 자에게 짓밟히는 연약한 중생들의 고통이 가슴에 사무쳤다.

    부모형제가 없는 천애  고아로서, 앞을 못 보는 불구자로서 자신이 겪은 아픔 때문에

    동병상련의 정을 깊이깊이 느꼈다. 힘없는 중생들의 한이 곧 그의 한이었다.

    명천이가 기꺼이 벽운 선생을 좇아 수도인이 된 것도 연약한 중생들을 건져 주기 위해서였다.

    도를 이루어 그들을 돕고 싶었다. 자신의 한과 함께 그들의 한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벽운 선생은 다른 어느 제자보다 명천이와 많은 얘길 나눴다.

     어려서 따뜻한 정을 많이 못 받은 명천의 가슴 깊은 데 자리한 외로움을 없애 주려는 뜻이었다.

    명천인 벽운 선생을 스스럼없이 대했다. 시시콜콜한 신변 얘기도 잘했고,

    이것저것 여쭤 보는 것도 많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자상한 아버지와 활달한 아들 사이 같았다.

    벽운 선생과 함께 있으면 명천의 마음은 한없이 평화로워졌다.

    그토록 증오했던 사람들도 가슴을 활짝 열고 품어 안을 수 있었다.

    벽운 선생은 늘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라고 당부했다.

    "명천아, 땀을 뺐으니 폭포에 가서 목욕을 하거라. 나와 함께 가자."

    백령자를 초막에 남겨 두고 명천이와 벽운 선생은 계곡의 폭포로 갔다.

    높이가 두세 길쯤 되는 폭폭였다.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폭포 밑에는 깊은 못이 있었다. 깊이가 한 길쯤 되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물이 바위에 부딪쳐 분수처럼 치솟았다.

    폭포 주위엔 잠자리와  나비들이 떼지어 날아다녔다. 명천이 옷을 걸친 채 물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명천아, 못에 들어가 살갗으로 숨을 쉬어 보거라. 들어가기전에 마음과 정신을 잘 가다듬어라.

     네 몸도 물 떨어지는 소리도 모두 잊거라."

    벽운 선생이 폭포 옆 바위에 걸터앉아 말했다.  명천인 천천히 못 가운데로 들어갔다.

    물이 가슴께까지 닿는 곳에 멈춰 서서 합장을 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의 몸이 완전히 물 속에 잠겼다.

    코로 공기가 드나들 수 없으니 피부가 숨을 쉬었다. 물에 섞여 있던 공기가 기공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반시간쯤 지났다. 가슴이 좀 답답했다. 명천이 그제서야 물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자 시원한 공기와 함께 우주의 진기가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세찬 바람이

    살가죽을 뚫고 불어오는 것 같았다. 몸 안과 몸 밖의 경계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우주의 진기는 단전에 모였다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돌아다녔다.

    이 엄청난 진기에 밀려 몸 안에 조금 남아 있던 탁기가 밖으로 씻겨 나갔다.

    명천의 몸은 진기로 가득 채워졌다.   

  • 성자들의 시대10-혜원의 양신

    "저 새끼들 계집앤가 보다. 늙은 것들이 어떻게 조런 물건을 낚았지?"

    녀석들은 제각각 한마디씩 뱉어 냈다. 필섭과 석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자식들아, 빨리 꺼져!"

    필섭이 녀석들 앞으로 다가서며 외쳤다.

    "이게 그냥."

    한 녀석이 다짜고짜 필섭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필섭이 녀석의 팔목을 홱 잡아채며 앞으로 밀쳤다.

    녀석은 엉겹결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세 녀석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한 녀석은 석주한테 덤벼들었다.

    넘어졌던 녀석은 잽싸게 일어나더니 지팡이 삼아 짚고 왔던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순식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석주는 명치를 한 대 얻어맞고 꼼짝못했다. 필섭인 힘이 장사였으나

    넷이 한꺼번에 덤벼드니 중과부적이었다. 한 녀석을 번쩍 들어 메어치고는

    자신도 급소를 맞고 쓰러졌다.

    먼저  필섭이한테 당했던 녀석이 몽둥이로 필섭일 내리치려고 했다.

    그때 혜원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혜원인 필섭이 쪽으로 날아가는 몽둥이를

    잽싸게 낚아챘다. 녀석은 몽둥이를 빼앗기고 옆으로 나귕굴었다.

    혜원인 또 나머지 녀석들을 밀쳐냈다. 별로 힘도 안 들이고 슬쩍슬쩍 밀었는데도

    녀석들은 나무토막처럼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들은 땅바닥에 넘어져 꼼짝못했다.

    그 사이에 석주와 필섭이 기운을 차리고 혜원이 옆으로 왔다.

    녀석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혜원일 쳐다봤다. 모두들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혜원인 말없이 녀석들을 훑어보고 나서 두 손으로 몽둥이의 양끝을 잡았다.

    팔뚝만한 몽둥이가 조금씩 안으로 구부러지더니 딱 하고 부러졌다.

    무서운 괴력이었다. 녀석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런데 혜원인 부러진 두 몽둥이를 한꺼번에 잡았다. 모두들 혜원의 행동을 주시했다.

    잠시 후에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개의 몽둥이가 나무젓가락처럼 동시에 휘어지더니 뚝 부러지는 것이었다.

    "어서들 가십시오."

    혜원인 이 말을 남기고 다시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들은 기가 질려 석주와필섭에게 사과를 하고 허겁지겁 초막을 떠났다.

    벽운 선생과 백령자가 오랜만에 운학산으로 돌아왔다.

    벽운 선생은  세 제자에게. 백령자는 청령자에게 새로운 수행법을 가르쳤다.

    석주와필섭이 새로 배운 행공 자세는 먼저 배운 것보다 어려웠다.

    호흡법도 많이 달랐다. 숨을 들이쉬고 나서 잠시 멈췄다가 내쉬고,

    또 내쉬고 나서도 멈췄다가 다시 들이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쉬는 시간과 들이쉬는 시간, 멈추는 시간의 길이를 같게 했다.

    벽운 선생은 새로운 수련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공부는 천지의 기운이 너희 몸 속에 모이고, 또 몸 속에서 움직이게 만드는 공부다.

    숨을 멈추고 쉴 때 진기가 모이고 활발히 돌아간다. 한데 숨을 억지로 길게 하지 마라.

    그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들이쉬고 내쉬고 멈춰라. 그리고 마음과 정신을 먼저와같이

    항상 단전에 집중시켜야 한다."

    혜원이도 새로운 가르침을 받았다. 벽운 선생은 혜원일 따로 불렀다.

    "이제 살갗으로 숨쉬는 게 아주 수월해졌구나."

    "네, 피부의 기공이 자주 활짝 열립니다."

    "그럴 땐 살갗만으로 숨쉴 수 있지 않느냐?"

    "네, 한참씩 그래요."

    "이제 음식을 끊어도 되겠다. 곡기를 끊지 않으면, 몸 속에 탁기가 자꾸 생겨난다.

    이 탁기 때문에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질 않는다. "

    이튿날부터 혜원인 곡기를 끊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마음도 생각도 한 점 남김없이 모두 여의었다. 거울처럼 투명한 정신을 굳게 지키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혜원이의 의식은 오로지 안으로만 향하여 마음을 환히 비춰 주었다.

    벽운 선생은 한동안 운학산을 떠나지 않았다.

    석주와필섭일 데리고 운학산 이곳저곳을 둘러보거나 초막에서 선정에 들곤했다.

    백령자도 청령자를 지도하며 운학산에 머물렀다.

    혜원이 음식을 끊자 잠이 사라졌다. 피부의 기공도 활짝 열렸다.

    선정에 들면 몇 시간씩 피부로만 숨을 쉬었다.

    혜원인 밤 낮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피부 호흡이 완전하게 이뤄지니 항상 진기가 충만했다.

    몸에 가득한 진기 때문에 허기가 전혀 일지 않았다.

    또, 추위나 더위가 일절 침범하지 못했다. 가없이 화평한 기운이 몸을 에워쌌다.

    몸 속에도 몸 밖에도 화기(和氣)가 가득 감돌았다.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기쁨, 성냄, 애착, 미움, 싫어함, 두려움, 슬픔, 즐거움,

    안타까움, 괴로움 등 모든 감정이 씻은 듯 사라졌다. 가슴에는 따스한 화기만이 넘쳐흘렀다.

    감정이 사라지듯 몸의 감각도 없어졌다. 피부는 촉감에 끌리지 않았고,

    입은 맛에 이끌리지 않았다. 귀는 소리에 이끌리지 않고, 코는 냄새를 좇아가지 않았으며,

    눈은 색(色)과 형상에 끌려들지 않았다. 머리에는 잡념이 일지 않았다.

    모든 감각을 끊어 버리니 기운이 전혀 흩어지지않았다.

    감각 기관들은 이제 쓸데없이 기운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처럼 청허(淸虛)하게 비워졌다. 그러자 그 빈자리가 진기로 채워졌다.

    모든 감각 기관에서 지혜의 빛이 뿜어 나왔다.

    지혜의 빛으로 인해 눈은 더할 수 없이 밝아졌다. 깜깜한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보이고,

    땅속 깊은 곳이나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사물들도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천안통(千眼通)을 얻었던 것이다.

    천이통(千耳通)도 얻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그리고 전부터 지니고 있던 탁기는 진기에 밀려 밖으로 배출되었다.

    진기가 가득 쌓이자 몸이 극도로 가벼워졌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혜원인 자신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속이 텅 비워지고 거기에 맑은 공기만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잠시 뒤에 몸이 붕 떠올라 바닥에서 한 자쯤 떨어진 곳에 멈췄다.

    더 이상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혜원인 이상히 여겨 가부좌를 풀고서

    어떻게든 바닥으로 내려오려 했다.

    이때, 벽운 선생의 음성이 들려 왔다.

    "괜찮다. 그대로 앉아 있거라. 마음을 쓰지 말고 맑은 정신을 굳게 지켜라."

    혜원은 얼른 마음을 가다듬었다. 허공에 앉은 채, 그대로 다시 선정에 들었다.

    얼마 후에 몸이 도로 방바닥에 내려왔다.

    이날부터 자주 공중에 떠올랐다. 또,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

    한 길이 넘은 허공에 앉아서 수련할 때가 많았다.

    떠오르고 내려오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기도 했다.

     그후, 몸 움직임이 더욱 가벼워졌다. 산에 오를 때는 날개가 달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어떤 기운에 이끌려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촉도 느끼지 못했다.

    구름을 타고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늦게서야 장마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온 산의 초목군생들이 모처럼 생기를 얻었다.

    소나기가 퍼붓는 날이었다. 돌풍이 불고 천둥 번개가 쳤다.

    혜원인 방안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들어 있었다. 폭풍이 문고리를 흔들어대고 우르릉 쾅쾅

    천둥이 울렸지만, 혜원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티 하나 없이 맑디맑은 그녀의 의식은

    오직 내면의 한 점 빛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식 속에서는 이 내면의 불빛만이 홀로 반짝였다.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이 영원히 멈춰 버린것 같았다.

    한밤중이었다. 운학산 가까이에 벼락이 떨어졌다.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로 천둥이 울렸다.

    그 순간, 혜원의 내면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뿜어 나왔다. 혜원도 방안도 휘황한 빛에

    휩싸였다. 혜원의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형체를 잃고 빛으로 화했다.

    빛은 잠시 후에 사라졌다. 그런데 그 빛과 함께 혜원 자신의 몸도 어디론가 없어졌다.

    몸은 사라지고 맑은 정신만 남아 아득한 하늘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에는 오색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오색 구름은 혜원의 의식을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혜원인 자신의 몸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잃어버린 몸을 찾고 싶었다.

    혜원이 몸을 찾기 위해 막 고개를 돌리려 하는데, 벽운 선생이 혜원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혜원아, 두려워 마라. 네 몸은 제자리에 있다. 마음을 움직이지 말거라. 정신을 굳게 지키고,

    무엇이 나타나도 거기에 끌려선 안 된다."

    이 말을 마치자마자 벽운 선생의 모습이 사라졌다.

    혜원인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마음이 이 음악 소리에 끌려가려고 했다. 혜원인 밖으로 빠져 나가려는 마음을 돌이켜 세웠다.

    음악이 그쳤다. 이번에는 온갖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뻤다. 몸은 우리처럼 투명했다.

    옷에서는 빛이 뿜어 나왔다. 선계에 사는 선동들 같았다.

    아이들이 혜원일 향해 이리 오라 손짓했다. 혜원인 아이들한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갔다.

    얼마쯤 가니 화려한 왕궁이 보였다. 옥으로 만들어 놓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이 왕궁의 뜰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신하들이 모두 일어서서 절을 올리며 혜원일 맞이했다.

    혜원인 그들에게도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왕궁을 떠나 위로 위로 올라갔다.

    얼마를 더 올라가니 찬란한 빛의 세계가 나타났다. 빛을 뿜는 새들이 날아다녔다.

     빛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선인 선녀들 같았다.

    빛사람들 여럿이 혜원일 호위했다. 혜원인 그들도 돌아보지 않았다. 외부로 향하려는

    마음을 굳게 지키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 의식을 집중했다.

     곧 빛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혜원인 더 높이 올라갔다. 홀연히 붉은 노을 같은 광채가

    온 하늘을 가득 메웠다. 또 보랏빛 불꽃이 사방에서 일었다. 그리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이

    들렸다.

    그 순간, 모든 환상이 사라졌다. 혜원의 눈에 비로소 자신의 몸이 보였다. 환상에서 깨어나자

    혜원인 머리에 통증을 느꼈다.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불로 지지는 것처럼 화끈거리기도

     했다. 혜원인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혜원이 걱정하며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는데, 벽운 선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둥그런 원광이 벽운 선생을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벽운 선생은 혜원과 1 미터쯤 떨어져 앉았다. 혜원도 벽운 선생의 원광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통증이 약해졌다.

    "스승님, 갑자기 머리가 터질 듯 아프네요. 제가 수련을 잘못했나 봐요."

    혜원인 육신의 고통보다 행여 공부가 잘못되었을까 그게 더욱 걱정이었다.

    "아니다, 공부가 잘됐다. 너의 진신이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다. 가슴의 중단전에 잉태됐던

    진신이 갓 태어나 머리의 천궁으로 나오느라 그런다. 통증은 며칠만 지나면 없어진다."

    머리의 통증은 사흘 후에 없어졌다. 통증이 사라지자 빛의 응어리 같은 게

    가슴의 중단전에서 머리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혜원인 이 빛의 응어리에 대해

    벽운 선생에게 여쭤 보았다.

    "그것이 너의 진신이다. 진신이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늘에서 가지고 온 몸이다.

    이 진신이 너의 본 모습이며, 진신이 잘 자라서 성인이 돼야 하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진신을 양신이라고도 한다.순수한 양기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순양의 기운은 곧 하늘의 진기다. 이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양신에 모아라.

    앞으로 또 여러 가지 환상이 나타날게다. 부처님도 나타나고 신선도 나타난다.

    그들은 진짜가 아니다. 모두 헛것이니 마음을 뺏기지 마라. 생각과 마음을 일체 여의고 잊으면

    네 몸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 나온다. 그때 네 양신을 그 광채 앞으로 옮겨라.

    그런 다음 생각으로 광채를 끌어 모아라. 그리하면 광채가 엽전만해진다.

    이 광채를 양신 속에 집어 넣어라.

    그러면 양신이 네 가슴의 중단전으로 옮겨 간다. 이 진신을 다시 천궁으로 겨둬들이고 깊은

    선정에 들어라. 광채는 진신을 키우는 보약이다."

    혜원이 또 깊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의식을 천궁(상단전이라고도 함)으로 집중시켰다.

    천궁에 또 하나의 자기가 앉아 있는게 심안으로 보였다. 바로 벽운 선생이 말한 양신이었다.

    양신도 혜원의 육신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벽운 선생은 혜원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혜원이 이 관문을 무사히 넘기도록 가까이에서 보살폈다.

    혜원의 눈앞에 또 환상이 나타났다. 부처님, 예수님, 신선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느 신선은 책을 내밀기도 했다.

    혜원인 미동도 하지 않고 천궁의 양신만을 생각했다. 그러자 환상들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이틀이 지났다. 혜원인 이틀 내내 선정에 들어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오색 구름이 홀연히 혜원의 앞에 피어올랐다. 또, 혜원의 몸에서 한 줄기 광채가 뿜어 나와

    구름 속으로 뻗쳤다. 광채와 구름이 어우러져 둥그런 금빛 원광이 생겼다.

    혜원인 자기의 양신을 앞으로 내보냈다. 양신이 원광 속에 자리를 잡고 단정히 앉았다.

    그런 다음 마음으로 광채를 응축시켰다. 

    광채가 동전만해졌다. 이것을 양신 속으로 빨아들였다. 그리고 양신을 다시 거둬들였다.

    이러기를 몇 번 거듭했다. 그러자 양신의 형체가 더욱 뚜렷해졌다.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만큼

    형체가 분명했다. 안개처럼  하얀 빛깔에다 크기는 10센티쯤 되었다.

    장마가 물러갔다. 하늘이 푸르러지고 무더위가 몰려왔다. 햇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장마가 끝난 지 며칠 후였다. 벽운 선생은 혜원이더러 거처를 옮기라고 했다.

    혜원이 새로 옮긴 거처는 기린봉 중턱이었다. 기린봉은 초막의

    내 청룡(제일 가까운 왼쪽 산줄기) 끝에 솟아오른 봉우리다. 초막에서는 백 미터쯤 떨어져 있다.

    기린봉의 생김새는 기린의 머리와 흡사하다. 늘씬하게 솟아오른데다 꼭대기가 일자형이어서

    기린의 머리를 연상시킨다.

    기린봉 아래쪽은 사방이 절벽이다. 절벽의 높이가 여섯 길은 족히 넘었다. 절벽 사이사이에는

    소나무들이 자랐다.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라서 특수한 장비가 없이는 기린봉에 오르기

    어려웠다.

    하루는 벽운 선생이 혜원일 데리고 기린봉 아래로 갔다. 거기는 절벽이 제일 낮은 곳이었다.

    그래도 네 길은 충분히 되었다. 절벽 위쪽은 평평한 바위였다.

    "저 위로 올라가자. 혜원이 너부터 뛰어올라라."

    벽운 선생이 절벽 위쪽을 가리켰다. 혜원인 위를 올려다보았다.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걱정 마라. 너는 이미 그만한 힘을 지녔다. 어서 올라가라."

    벽운 선생이 재촉하자, 혜원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한데 놀랍게도 몸이 붕 떠올랐다.

    다섯 길이 넘게 솟구쳐 올랐다가 바위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어서 벽운 선생도 위로 올라왔다. 벽운 선생은 눈깜짝할 사이에 몸을 옮겼다.

    너무나 짧은 순간이라서 혜원인 위로 올라오는 스승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기린봉 중턱까지 올라갔다. 중턱에 스무 평쯤 되는 평지가 있었다. 평지 뒤쪽엔 바위굴도 있었다.

    오른쪽에는 아주 작은 샘이 있었다. 바위에 동그란 홈이 파였는데, 거기서 물이 솟아나왔다.

    크기는 지름이 한 자, 깊이가 반자쯤 되었다. 그동안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물이 철철 넘쳤다.

    벽운 선생은 혜원일 굴 안으로 데려갔다. 굴 입구는 문짝 하나만했다. 안은 굴 같지 않게 밝고

     습기가 없었다. 넓이는 두 평 남짓 되었다. 천장은 꽤 높았다.  3미터가 넘을 듯싶었다.

    이 굴은 자연굴이 아닌 것 같았다. 내부의 벽이 자로 재어 다듬은 것처럼 반듯반듯했다.

    입구도 직사각형이었다.  바닥은 흙이었다. 물기가 잘 빠지는 마사토가 깔려 있었다.

    벽운 선생은 바깥쪽을 향해거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혜원을 자기 옆에 나란히 앉혔다.

    입구를 통해 밖이 내다보였다.

    골짜기 맞은편에 관음봉, 세지봉, 수정봉, 보현봉, 문수봉, 이 다섯 봉우리가 가지런히

    솟아 있었다. 초막에서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그들의 자태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선인이나 보살이 형상과 흡사했다.

    다섯 봉우리 뒤편으로 또 수많은 산봉우리들과 서해 바다가 보였다.

    작은 산봉우리들이 볼록볼록 아스라하게 펼쳐진 모습이 꽃잎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하늘 가득 피어오른 구름송이 같기도 했다.

    "여기는 너처럼 양신이 몸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공부한 곳이다.

    갓 태어난 양신을 탈없이 키우기에 참 좋은 도량이다.

    임독맥이 열려 소주천이 이뤄진 사람을 인선이라고 한다.

     인선은 건강하게 무병장수를 누릴 수 있다.

    너와 같이 임독유통도 되고 또 양신이 태어난 사람을 지선이라 부른다.

    지선은 육신통을 깆추고 자기의 본성, 참모습을 찾은 사람이다.

    지선이 돼야 비로소 세속을 초월하여 성스러운 세계에 입문하는 것이다.

    지금 너의 양신은 막 태어난 아기와 마찬가지다.

    이제부터는 아기가 어른이 되도록 잘 키워야 한다.

    양신이 완전히 다 자라야 신성의 경지에 오은다. 그런 사람을 천선이라 부른다.

    천선은 불사불멸한다. 양신은 하늘과 하나이기 때문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양신을 어른으로 키우는 공부를 하거라,

    오로지 마음과 몸을 잊고 청허한 정신을 지켜야 양신이 자란다.

    선정에 들어 네 몸과 마음이 흩어져 허공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해라. 거울처럼 맑은 정신만 남기고 모두 잊어야 한다."

    벽운 선생은 양신을 키우는 방법과 함께 출입시키고 활동시키는 요령을 일러주었다.

    "아기들은 자꾸 움직여야 잘 자란다. 몸이 골고루 발달하고 힘이 붙으려면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 양신도 마찬가지다. 움직이고 활동해야 굳건해지며 자유자재한 능력을 얻는다.

    자, 한번 네 양신을 밖으로 내보냈다가 거둬들여 보자.

    깊은 선정에 든 다음 고요히 앉아 있으면 네 정수리가 열리고 한 줄기 빛이 밖으로 뻗쳐 나간다.

     그 빛을 좇아 양신을 내보내라.

    도로 거둬들이려면 빛을 먼저 양신 안으로 끌어 넣은 뒤에 갔던 길을 따라 돌아오게 하거라.

    처음부터 멀리 내보내면 위험하니 한 걸음 밖까지만 보냈다 얼른 거둬들여라."

    혜원은 곧 선정에 들었다.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경지에 이르러 한 줄기 광채가 정수리를 열고

    밖으로 뻗쳐 나갔다. 그런 다음에 양신을 내보냈다.

    양신은 50센티쯤 사이를 두고 혜원과 마주앉았다. 양신의 모습은 전보다 더 뚜렸했다.

    눈처럼 희고 은은한 광채가 감돌았다.

    혜원인 먼저 내뿜는 빛을 양신 안으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양신으로 하여금 되돌아오게 했다. 양신이 되돌아와 상단전 천궁에 자리를 잡았다.

    "잘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수리를 열고 광채가 뻗쳐 나가면, 즉시 양신을 출입시키거라.

    그런데 날씨가 나쁜 날이나 밤에는 내보내지 마라. 위험한 일이 생긴다.

    해가 쨍쨍 내리쬘때도 안 된다.

    갓 태어난 양신은 바람이 불면 넘어지고 강한 햇빛을 쬐면 말라 버린다.

    비가 오고 천둥 번개가 치면 놀라며 두려워한다.

    양신이 처음 출입할 때는 네 몸 주위에서만 움직이게 하고, 차츰차츰 더 멀리까지 내보내라.

    나중에는 천리 만리 밖에 보내도 괜찮다.

    양신이 다 자라면 온 우주가 양신의 집이 된다. 천하가 양신의 방이다.

    단걸음에 수만 리를 가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신을 나타낸다.

    삼천대천 세계가 꽉차게 분신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변화무쌍하여 못 해내는 게 없다.

    양신을 키우는 동안에도 도력이 일취월장 높아진다. 이미  얻은 육신통이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이 도력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꼭 필요할 때만 쓰거라."

    벽운 선생은 이 말을 남기고 운학산을 떠났다. 혜원인 다시 깊은 선정에 들었다. 

     
  • 성자들의 시대9-모기 천사들

    날씨가 따뜻해지자 초막에도 모기가 생겼다. 한번 비가 오더니 부쩍 많아졌다.

    산모기는 들판의 모기보다 한결 독했다. 물리면 무척 따가웠다.

    하루는 날이 저문 뒤, 세 사람이 밖에서 얘길 나누고 있었다.

    주변에 날아다니던 모기들이 윙윙거리며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석주와 필섭은 연신 두 손으로 모기들을 쫓았다. 그런데 혜원인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있었다. 이를 보고 필섭이 혜원에게 물었다.

    "도제, 모기 안타? 모기 물려도 괜찮은가?"

    "전 안 물려요."

    "응? 어떻게?"

    "모기들이 근처에서 윙윙대기만 해요. 물 생각이 없나 봐요."

    "도력이 있으니까 그렇구먼. 야, 모기 같은 미물도 도인을 알아보네."

    필섭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또, 그런 말씀. 자꾸 그러지 마세요. 저한테서 고약한 냄새가 나나 보지요."

    혜원이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아니, 아니야. 무슨 이유가 있을 게야. 도제한테 비방이 있으면 가르쳐주시게.

    엊저녁부터는 모기가 너무 많아져서 공부하기가 힘들어."

    "실은 방법이 있어요. 전에 스승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럼, 우리한테도 좀 가르쳐 주시게."

    "그냥 마음 푹 놓고 물리세요. 모기들한테 이리 와서 마음껏 잘 먹으라 하세요.

    아주 기쁜 마음으로요. 그렇게 하시면 달라질 거예요.

    한데 모기가 떼지어 윙윙대거나 몸에 달라붙어도 긴장하시면 안 돼요.

    마음을 완전히 열어 놔야 효과가 있어요."

    "야아, 그건 보살행이네. 훌륭한 공부가 되겠구먼., 오늘부터 당장 해보세, 아우."

    필섭이 또 무릎을 치고 나서 석주에게 동의를 구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형님. 도제한테 참 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도제, 고마워."

    석주는 혜원일 향해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였다. 혜원의 이야기가

    가슴 깊이 와닿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런 마음으로 살면, 이 세상이

    곧 극락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혜원인 잠시 후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석주와 필섭은 저녁 수련을 시작했다.

    체조를 할 때는 자꾸 몸을 움직이니까 모기들이 덤벼들지 않았다.

    행공에 들어가자 멀찍이 물러갔던 모기들이 다시 몰려왔다.

    윙윙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그만 두 사람의 살갗이

    무의식중에 바짝 긴장했다.

    필섭과 석주는 혜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모기들을 향해 마음으로

    '이라 와서 실컷 배를 불려라'고 했다. 그러나 기쁜마음은 들지 않았다.

    모기들은 사정없이 덤벼들었다. 모기에 물린 자리가 자꾸 따갑고 근지러웠다.

    그래도 기쁜 마음을 지녀 보려고 애썼다. 한데 진심으로 기뻐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갗이 저절로 굳어지며 모기들을 거부하려 했다.

    행공을 끝내고 고요히 선정 수행에 들어갔을 때였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흉년이 들어 굶기를 밥먹듯 하던 기억이었다.

    너무 배가 고파 물로 배를 채우던 자신들의 모습, 그 어린 자식들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어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두사람은 문득, 달려드는 모기들이 어린 시절의 자신들로 보였다.

    그저 하염없이 안쓰럽고 가여웠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마음이 동시에 확 열렸다. 긴장했던 몸도 완전히 풀렸다.

    두 사람은 가없이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모기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얼른 와서

    맘껏 먹으라'고 했다. 온 세상의 모기가 한꺼번에 달려든다. 해도 모두 다 품어 안을

    심정이었다.

    보기들은 두 사람 주위를 계속 맴돌며 윙윙거렸다.

    석주와필섭인 한없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기들을 불렀다.

    '나한테 오너라.'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의 가슴에 지극한 기쁨이 용솟음쳤다.

    또, 안개처럼 부드러운 기운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이 부드러운 기운은 잠시 뒤에 두 사람의 살갗을 통해 몸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따스하고 잔잔한 봄바람이 살 속으로 솔솔 불어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살갗이 베로 만든 헝겊인 양 술술 들어왔다.

    몸 속으로 들어왔던 기운은 곧 다시 몸 밖으로 나갔다.

    한편으론 들어오고 한편으론 나가길 계속했다. 모기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윙윙대는 소리가 저잣거리의 소음처럼 시끄러웠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한 마리도 몸에 달라붙지 않는 것이었다. 수백 수천 마리가 두 사람을 에워 싸고

    이리저리 맴돌 뿐이었다.

    필섭인 그 이유를 알았다. 안개처럼 부드러운 기운은 바로 우주에 가득한 진기였다.

    혜원이 일러준 대로 마음을 완전히 여니까, 이 우주의 진기가 두 사람을 에워싸며

    몸 속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랬다가, 모기들을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과 함께

    밖으로 뿜어 나갔고, 모기들은 진기에 휩싸여 저절로 허기가 사라진 것이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모기들은 여전히 한 마리도 달려들지 않았다.

    더욱 많은 모기들이 몰려와 두 사람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석주는 이렇게 신비로운 일이 왜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형님, 모기가 전혀 안 무네요. 형님도 그러세요?"

    "나도 그래."

    "이게 어찌 된 일이지요?"

    "자네 몸 속으로 뭐가 솔솔 들어오지 않았나?"

    "예, 마치 봄바람 같은 것이 살 속으로 자꾸 들어왔다 밖으로 나갑니다."

    "그게 진기야."

    "우리 마음이 크게 자비로워지니까 진기가 우리 몸을 둘러싸는게야,

    모기들도 이 진기를 먹어서 저절로 배가 불러진 것이고."

    "저번에 짐승들이 몰려왔을 때하고 같은 이치구먼요."

    "그렇지."

    "허, 참."

    석주는 감격에 겨워 더 이상 말을 잇지못했다. 마음 하나로 미물중생들의

    배를 불려 주다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이 엄청난 이치를 모든 사람이 알고

    실제로 행하면 이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생각하니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웠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혜원이 밖으로 나왔다. 혜원은 두 사람의 체험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도형들께서 큰 공부를 하셨어요."

    그녀는 무척 기뻐했다.

    "도제가 쉬한 가르침을 준 덕이네."

    "정말 고마워."

    석주와필섭인 혜원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아니에요, 도형들께서 근기가 좋으셔서 하루 만에 깨우치신 거예요.

    평소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자비행을 실천하셨기 때문이에요.

    아무나 그리 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도

    이레가 지나서야 깨우쳤어요."

    "여자들은 워낙 물것을 싫어하잖아. 벌레 한 마리가 몸에 붙어도 소스라쳐 놀라고.

    벌레나 지렁이. 뱀 등속을 너무 무서워 하지."

    필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처음엔 그 마음을 떨치기가 참 어려웠지요. 모기들이 윙윙대면 소름이 돋았어요.

    그들 몸이나 내 몸이나 겉모습만 다르지 똑같다는 생각을 자꾸 했더니 그 마음이

    점점 엷어지데요."

    하늘에는 별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릴 것처럼 총총히 빛났다. 뻐꾸기 울음소리,

    소쩍새 울음 소리가 간간이 골짜기를 타고 올라왔다. 청령자는 소나무 위에서

    자고 있었다. 세 사람은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이 해 여름은 무척 가물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초막의 샘물도 많이

    줄어들었다. 초막 마당가에는 샘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넓이가 사방 한자 가웃에 깊이가 반 자 조금 넘었다. 이 샘물은 아주 맑고

    맛이 좋아 식수로 썼다.

    다른 하나는 깊이가 석 자쯤 되었다. 이 샘물로는 설거지, 빨래, 목욕등을 했다.

    개숫물이 잘 스며들어가 좀 탁한 편이었다. 가뭄이 계속되자 두 샘물 모두 크게 줄었다. 빨래와목욕은 계곡으로 내려가서 했는데 물이 모자랐다. 바닥물까지 긁어서 쓸때가 많았다.

    어느 날, 석주와 필섭인 수련을 마치고 물을 마시러 샘으로 갔다.

    샘물은 바닥에서 한 치도 못 되게 있었다.

    석주가 표주박으로 바닥을 긁으니 표주박에 물이 3분의 2쯤 찼다.

    석주는 먼저 필섭에게 권했다. 필섭이 표주박을 건네 받아 막 입에 대려던 참이었다.

    "필섭아."

    난데없이 스승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필섭은 벽운 선생이 돌아온 줄 알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벽운 선생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필섭이 헛소리를 들었나 보다 하며 다시 물을 마시려 하는데,

    또 벽운 선생의 음성이 들렸다.

    "필섭아, 그 물은 그냥 두고, 저 아래 샘물을 마셔라. 곧 목마른 중생이 여기로 온다."

    바로 앞에서 하는 말같이 들렸다. 필섭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석주한테 이얘길 했다.

    "이상한 일이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난데없이 스승님의 음성이 들릴까.

    헛소리는 분명 아니고

    선연하게 들렸어. 참 희한하구먼."

    "스승님께서 도력으로 말씀을 전하신게 아닐까요?"

    석주가 자신의 체험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저쪽 샘으로 가지요."

    "그러세."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막 쓰는 샘물은 구정물처럼 흐릿했다.

    필섭은 물을 떠서 입에 대려다 좀 머뭇거렸다.

    물 속에 작운 티끌들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 물을 마시고 행여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한데 또 스승의 음성이 들려왔다.

    "기쁘게 마셔라. 너희로 인해 다른 중생들이 덕을 입지 않느냐.

    기쁜 마음으로 마시면, 이 더러운 물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수가 되느니라.

    근심하며 먹으면 독이 된다."

    이 말은 석주도 똑같이 들었다. 필섭은 얼른 물을 마셨다.

    그의 가슴은 모기들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었을 때처럼 기쁨이 충만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스처럼 싸아하고 시원한 기운이 위와 식도에서부터

    온몸으로 펴져 갔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물파스가 스며든 것처럼 시원했다.

    석주도 물을 마신 다음 필섭과 똑같은 체험을 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강하게 내리쪼였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덥지 않았다.

    차디찬 계곡물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시원했다. 그리고 입에는 자꾸 침이 고였다.

    평소보다 몇 배 빨리 고이는 것 같았다.

    "형님, 온몸이 시원해지고 침이 굉장히 많이 생기네요. 형님도 그러십니까?"

    석주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나도 그래."

    "왜 침이 자꾸 나오나요?"

    "침이 좀 단 것 같지 않아?"

    석주는 잠시 자기의 침맛을 음미해 보았다. 필섭의 말대로 약간 단맛이 느껴졌다.

    "예, 정말 그런데요."

    "이건 감로수야. 옥수라고도 하지.

    스승님께서 좀 전에 기쁘게 마시면 약이 된다 이르셨잖나.

    이 침은 약술세. 또 우리 몸이 시원한 것은 약 기운 때문이네.

    그 기운이 더위를 막아 준 게야. 스승님께서 오늘 너무 귀중한 가르침을 주셨구먼.

    스승님께 인사를 드리세."

    필섭과 석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스승께서 어디에계신지 몰라 초막 뒤편 백학봉을 향해 절을 바쳤다.

    한 번이 아니라, 거듭 수십 번을 되풀이했다.

    두 사람이 계속 절을 하는데 산 위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두 사람은 그제서야

    절을 멈췄다.

    잠시 뒤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셋이 산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약초를 캐러 다니는 심마니들이었다. 목이 심하게 말랐던지

    샘물을 바닥까지 긁어 마시고 골짜기 쪽으로 내려갔다.

    얼마 후, 혜원이 수련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혜원인 석주와 필섭이한테

    일어났던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도형들께서 오늘도 좋은 공부를 하셨네요."

    "알고 있었구먼. 한데 우리 둘 다 스승님의 말씀을 똑똑히 들었어.

    선정 닦는 공부를 처음 할 때도 이 경험을 했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지?"

    석주가 눈을 빛내며 혜원에게 물었다.

    "멀리 있는 사람한테 말을 전하는 것을 천리전음이라고 해요.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도 바로 옆에서 하는 얘기처럼 들을 수 있어요.

    스승님께선 도가 아주 높으시니까 우주 밖으로도 말씀을 전하실 거예요."

    "그래!"

    석주의 눈이 더욱 휘둥그래졌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르니 온몸이 파스를 바른 것처럼 시원해지데.

    지금도 내장까지 싸아하네. 이게 약 기운이 맞지?"

    필섭이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래요. 참 좋은 기운을 받으셨어요.

    아까 그 마음을 잃지 않으면 도형들 몸이 금방 깨끗해질 거예요."

    "침도 아주 많이 나와."

    "뱉지 말고 계속 삼키세요. 앞으론 배도 덜 고프고 목도 덜 마를 거예요.

    도형들께서 오늘 참으로 큰 공부를 하셨어요."

    혜원인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녀의 마음은 벌써 오래 전에 나와 남의

    분별을 거의 다 떨쳤던 것이다.

    세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소나무 위에 있던 청령자가 땅으로 내려왔다.

    쳥령자는 혜원이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다음,

    날갯짓을 몇 번 하고 뭐라 소리를 냈다.

    "청령자가 참 좋아하네요. 축하드리려고 내려왔나 봐요."

    혜원이 청령자의 뜻을 헤아리고 두 사람에게 전했다.

    "얘가 어떻게 알지?"

    필섭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그 동안 청령자도 공부가 많이 됐어요. 몸이 열려서 기운으로 주변의 변화를 알아채요. 도형들한테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오늘 새로워진 것을 몸으로 느낀 거예요."

    "청령자야, 고맙다. 너도 부지런히 닦아서 큰 도를 깨우쳐라.

    네가 우리보다 먼저 득도하걸랑 혜원이 도제처럼 우릴 이끌어다오."

    필섭은 청령자가 매우 대견스러워 보여 날개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백령자는 사람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지만. 청령자는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혜원이 필섭의뜻을 다시 전했다.

    청령자는 혜원의 말을 알아듣고 날갯짓을 했다.

    "고맙고 기쁘데요. 저도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겠대요."

    혜원이 또 청령자의 말을 대신 전해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점심나절에 낯선 청년들 다섯이 초막을 찾아왔다.

    모두 20대로 보였는데 얼굴이 하나같이 불량스러웠다. 깡패처럼 보였다.

    그들은 처막에 오자마자 샘에 가서 세수를 하며 소란을 피웠다.

    석주와 필섭일 거들떠보지도 않고 저희끼리 한참 떠들어대더니

    그중 하나가 필섭이한테 여기서 야영을 좀 하겠노라고 핶다.

    말투가 매우 불손했다. 필섭인 내키지 않아 계곡에 가서 놀다 가라고

    무뚝뚝하게 거절했다.

    "경치가 근사해서 그러는데 하루만 쉬자고."

    녀석은 대뜸 반말을 하며 시비조로 나왔다.

    "거 되게 딱딱하게 구네."

    "야, 말씨름 하지 말고 이리 와서 텐트나 치자."

    "인심 더럽구먼.":

    다른 자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필섭인 울컥 화가 치밀었다.

    "여긴 수도하는 데니까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어서 떠나."

    필섭이 언성을 높였다.

    "젊은이들, 어른한테 그 무슨 말툰가."

    석주도 점잖게 타일렀다.

    "어쭈 병신까지 나서네."

    '병신도 도닦냐?"

    "저것들 손 좀 봐줄까."

    녀석들의 말투가 더욱 거칠어졌다.

    "야, 이놈들아! 말조심해~"

    필섭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석주가 모욕을 달하자 감정이 더욱 격해진 것이었다.

    "뭐야, 이 새끼가! 맛 좀 볼래!"

    한 녀석이 눈에 불을 켜고 외쳤다. 분위기가 사뭇 험악해졌다.

    이때 혜원이 밖으로 나왔다. 혜원인 그림자처럼 조용히 마당으로 나섰다.

    녀석들의 눈길이 일제히 혜원에게 쏠렸다.

    "계집애도 있었네."

    "거 쓸 만하게 생겼는데."

    "야, 저거나 가지고 놀아 볼까."

    "어이, 아가씨. 너도 도닦냐?"

     
  • 성자들의 시대8 - 바른 숨쉬기

    "그렇겠지."

    필섭은 아득히 먼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의 눈앞에 어떤 환상이 떠올랐다.

    벽운 선생이 수많은 중생들을 모아 놓고 가르침을 펴는 환상이었다. 스승 앞에 벌레, 풀같은 미물중생에서부터 사람까지, 온갖 중생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그 무리에 끼여 있는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초막의 풍경은 평소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큰 축제가 끝난 뒤의 적막감과도 같은 것이 감돌았다. 간간이 들려 오는 산새들의 지저귐과 바람 소리만이 깊은 고요를 깨뜨렸다.

     

    석주와필섭은 오랜만에 시장기를 느꼈다. 그들은 다시 미숫가루를 먹기 시작했다. 청령자도 사냥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이전과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석주와필섭에게는 눈에 비치는 삼라만상이 모두 새롭게 다가왔다. 온갖 짐승들이 다 자기네와같은 수행자로 보였다. 짐승들만이 아니었다. 갖가지 풀과 나무들, 생명이 없는 돌과 물과 흙, 바람과구름 등도 그렇게 보였다. 만물중생이 다 함께 도를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며칠 후, 벽운 선생이 백령자를 데리고 초막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열심히 잘 닦았구나."

    벽운 선생이 제자들의 절을 받고 나서 흐뭇해 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 스승님의 은덕입니다. 저희뿐 아니라 수많은 짐승들까지 큰 감화를 입었습니다."

    필섭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드렸다.

     

    "오늘부터는 새로운 공부를 하자. 이제 숨쉬기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석주는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스승을 쳐다봤다. 숨쉬는 공부라니, 숨이야 그냥 쉬는 것인데 무슨 얘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석주야, 너는 무엇으로 숨을 쉬느냐?"

    석주의 마음을 읽고 벽운 선생이 석주에게 물었다.

     

    "코로 쉽니다."

    "공기를 마시느라 쉽니다."

    "숨은 어디로 들어가느냐?"

    "가슴으로 들어갑니다."

    벽운 선생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을 물었다.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석주에겐 의외의 말씀이었다. 왜 틀렸다고 하실까. 석주는 그 이우를 궁금히 여기며 다음 말씀을 기다렸다.

     

    "숨은 코로만 쉬는 게 아니다. 살갗으로도 쉰다. 숨쉴 때는 공기만 들어오는 게 아니다. 천지의 기운도 같이 들어온다. 또 코로 숨을 쉴 때 공기는 가슴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기운은 배꼽아래 단전이라는 곳까지 들어간다. 여기가 단전이다."

    벽운 선생은 손으로 석주의 단전을 만져 주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기들은 모두 살갗만으로 숨을 쉰다.

    세상 밖으로 나오면 숨이 코로 들어온다. 그래도 살갗의 숨구멍이 많이 열려 있어 그리로도 공기가 드나든다. 그리고 코를 통해 마시는 공기는 폐까지 들어오지만, 공기와 함께 들어온 천지의 기운은 단전까지 쑥쑥 내려간다. 그래서 아기들은 숨쉴 때마다 아랫배가 불룩불룩 나온다.

    또 살갗의 구멍들을 통해서도 천지의 기운이 들어온다. 아기들은 천지의 기운을 많이 받아서 몸이 매우 깨끗하다.

    한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온갖 번뇌에 시달리면서 살갗의 숨구멍이 조금씩 닫힌다.코로 들어오는 숨도 폐에서 멈춘다.숨을 따라 들어오는 기운이 단전까지 못 내려가게 된다.

    이때문에 어른들은 숨쉴 때 배가 나오는 사람이 드물다.

    "살갗의 구멍도 많이 닫혀 아주 적은 공기만이 드나든다. 이리하여 천지의 기운을 크게 못 받으니 자연히 몸이 탁해진다. 몸이 극도로 허약한 사람은 숨쉴 때 어깨가 오르내린다."

     

    석주는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숨을 살펴보았다. 숨을 쉴 때 배도 어깨도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배꼽 근처까지 내려가다 말았다. 벽운 선생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수행이 잘된 사람은 아기처럼 숨쉰다. 갓 태어난 아기같이 아랫배로 쉬다가, 나중엔 태아처럼 살갗만으로 숨쉴 수 있게 된다. 태아와 같이 쉬는 숨을 태식이라 부른다. 아기와 같이 숨쉬면 몸도 아기처럼 깨끗해진다. "

    석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얼굴이 갓난아이 처럼 맑았기때문이었다. 혜원이도 그랬다. 

     

    "숨은 마음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마음이 평안한 사람의 숨은 가지런하다. 숨을 깊고 가지런하게 쉬면 마음도 따라서 고요히 가라앉는다.

    정신이 산란하고 마음이 괴로우면 숨도 거칠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도는 마음 공부, 정신 공부와 함께 숨쉬는 공부를 한다. 숨은 모름지기 단전으로 쉬어야 한다. 그래야 천지의 좋은 기운을 많이 받는다. 또, 하늘의 진기가 몸에 가득 채워져야 하늘 사람 되는 길이 열린다."

     

    벽운 선생은 석주와 필섭에게 단전 호흡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단전이란 배꼽 아래 한 치쯤 되는 곳에 콩팥과 붙어 있는 것이다. 사람의 기운은 여기에 쌓였다가 온몸으로 퍼진다. 그러니까 단전은 바로 기운의 창고와 같은 것이다. 단전에 기운이 충만한 사람은 건강하다. 마음도 튼튼하다.기운이 허한 사람은 몸이 부실해진다.

    마음 역시 허약해진다. 한데 기운만 세고 마음과  정신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단전의 기운을 나쁜 일에 쓴다. 그러다가 결국 기운이 소진되고 몸도 망가진다. 마음과 정신이 올바르나 단전이 기운이 약한 사람은 그 올바른 마음과 정신을 굳게 지키기 어렸다. 자기의 올바른 뜻을 크게 펴지도 못한다.

    그러기에 수행을 바로하려면, 마음도 잘 닦고 단전의 힘도 길러야 한다.

    너희들도 한번 숨을 편안히 쉬어 보거라." 

     

    석주와 필섭이 자세를 가다듬고 숨을 쉬었다.

     

    "필섭아, 네 숨은 어디까지 내려가느냐?"

    잠시 후에 벽운 선생이 필섭에게 물었다.

     

    "아랫배까지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배꼽 윗배까지 오르내리지 않았느냐?"

    "그랬습니다."

    "그것은 단전 호흡이 아니다. 복식 호흡이다. 마음과 정신이 좀 들떠 있기 때문에 배꼽 위까지 움직이는 것이다. 단전 호흡은 배꼽 아래로만 내려가는 숨이다."

    "석주는 어떻더냐?"

    "숨이 배꼽 근처까지 밖에 안 내려갔습니다."

    "네 마음과 정신이 아직도 위축돼서 그렇다.오늘부터 단전으로 숨쉬는 공부를 하자.

    둘 다 바닥에 편안히 눕거라."

    석주와 필섭은 스승앞에서 벌렁 눕기가 죄스러워 좀 머뭇거렸다.

    "괜찮다. 어서 누워라."

    둘은 스승의 재촉을 받고서야 조심스레 나란히 누웠다.

     

    벽운 선생은 제자들의 두 손을 단전 부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일렀다.

    "눈을 감고 마음을 평안히 갖거라. 천지 우주 삼라만상과 너희가 한몸이라 여겨라. 또, 선정 공부를 할 때처럼 정신을 텅 비우거라. 그런 다음에 마음의 눈으로 단전을 바라보아라. 정신을 오로지 단전에만 집중시켜라."

     석주와 필섭은 스승의 가르침의 따라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혔다. 정신도 맑게 비웠다. 마음에는 아늑한 평화가 깃들였고, 정신은 거울처럼 깨끗했다.

     

    "자, 숨을 아주 천천히 깊게 쉬어라."

    필섭은 깊이 심호흡을 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배가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힘이 장사인 만큼 폐활량도 컸기 때문에 임신한 여인처럼 배가 불룩했다. 그런데 배꼽 위까지 올라왔다.

    "필섭아, 배꼽 아래로만 쉬어라. 그래야 좋은 기운이 단전에 잘 모인다."

    벽운 선생이 필섭의 호흡을 교정해 주었다.

    석주의 배는 그리 높게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이 이른 대로 배꼽 아래만 천천히 움직였다. 폐활량은 적지만 마음이 잘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벽운 선생은 두 사람에게 열흘 동안 단전 호흡만 하도록 시켰다. 열흘쯤 되자 숨이 제대로 단전까지 내려갔다. 앉아서도 서서도 단전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단전 호흡을 익힌 다음에는 몸푸는 도인 체조를 배웠다. 여러가지 독특한 자세를 취하고 단전호흡을 하는 법도 익혔다. 혜원이 체조 동작과 행공 자세를 먼저 시범으로 보여 주면, 두 사람이 그대로 따라서 했다. 체조와 행공 자세가 몸에 배는 데 또 며칠이 걸렸다. 이것들을 가르치며 벽운 선생이 이런 얘길 했다.

    "이 체조와 행공 자세는 마디마디 굳어진 몸을 부드럽게 풀어 준다. 동작을 제대로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관절이 다 풀린다. 또, 단전을 키워 주고 온몸에 기운을 보내 몸을 아주 튼튼하게 만든다. 몸이 풀리면 숨쉬기가 편하다. 반대로 몸이 굳어 있으면 숨이 잘 막힌다.

    몸이 굳었을 때 숨을 단까지 끌어 내리려면 힘이 들어간다. 단전 호흡하면서 무리하게 힘을 들이면 부작용이 생긴다.

    숨과 마찬가지로 정신과 마음 또한 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몸이 무거우면 정신도 마음도 어두워지기 쉽고, 몸에 힘이 넘치면 마음 역시 가뿐해진다. 이 때문에 우리의 도는 몸 공부 마음 공부 정신 공부 숨 공부를 같이하는 것이다."

     

    벽운 선생은 두 사람에게 단전 호흡 수련을 부지런히 하라 이르고 또 어디론가 떠났다. 제자들은 스승이 어디를 가는지 아무도 물랐다. 묻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백령자가 벽운 선생을 따라갔다.

    석주와 필섭은 하루에 세 번씩 벽운 선생이 가르쳐 준 행공법을 수련했다. 또 나머지 시간에는 틈틈이 선정을 닦으며 단전 호흡을 했다.

    벽운 선생의 말대로 체조로 몸을 풀고 나면 숨쉬기가 한결 더 편해졌다. 또, 여러 가지 행공 자세를 취하고 단전 호흡을 하고 나면 아랫배가 든든했다. 전신에 기운이 차오른 느낌도 들었다.

    청령자는 여전히 초막에서 지냈다. 전과 다름없이 하루에 한번씩 사냥을 나갔다. 그 외의 시간은 초막 주변에서 보냈다.

     

    그런데 석주와 필섭이 여러 가지 행공 자세를 배울 무렵부터 청령자도 특이한 몸짓을 자주 했다. 소나무 위나 땅바닥에서 여러 가지 날갯짓을 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기도 했다. 날갯짓이나 비트는 동작 모두 다양했고, 언제나 그 순서가 똑같았다. 파란 풀밭이나 소나무 위에서 하얀 학이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하루는 석주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혜원에게 물었다.

    "도제, 청령자가 왜 저러지? 날아오르지도 않으면서 자꾸 날개를 파닥이네. 이상한 날갯짓도 많이 하고. 날기 연습을 할 리도 없을 텐데. 몸은 또 왜 자꾸 비틀어댈까. 그리고 똑같은 순서대로 되풀이하네."

    "청령자도 도형들처럼 행공을 하는 거예요. 청령자의 동작은 도형들이 하는 도인 체조나 행공 자세와 마찬가지예요."

    "그래? 희한하구먼.  그 행공법은 백령자가 가르쳐 줬나 보지?"

    "맞아요. 그렇지만 백령자한테 행공법을 가르쳐 준 분은 우리 스승님이세요."

    "아, 그랬었구먼. 그런데 도제, 학도 단전이 있어? 단전으로 숨을 쉴 수 있나?"

    "그럼요. 짐승들도 다 단전이 있어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단전 호흡도 하고요. 짐승들은 번뇌가 적으니까 더 잘할 수도 있을거예요."

    "득도하는 것도 사람보다 빠르겠네."

    "그렇진 않아요."

    "왜?"

    "정신이 사람만큼 맑지 못해서 그래요. 사람은 삼라만상 온 우주를 생갈할 수 있지만 짐승들에겐 그만한 능력이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정신의 힘이 사람만 못하지요. 그러니까 크게 깨우치려면 정신의 힘을 많이 길러야 해요."

     

    어느덧 단전 호흡을 시작한 지 한달이 지났다. 석주와 필섭인 자신들의 몸이 좋아지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좀 이상한 체험도 하게 되었다.

    하루는 필섭이 행공을 끝낸 다음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단전 호흡을 하는데 갑자기 아랫배가 따뜻해졌다. 처음엔 은은하게 따스하더니 나중엔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필섭이 수련을 마친 뒤 혜원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앉아 있는데 난데없이 아랫배가 뜨거워지더군. 지금도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어. 왜 그러지?"

    "단전에 기운이 차고, 또 마음이 단전에 자리잡아서 그래요. 도형, 스승님께서 단전은 콩팥과 붙어 있다 하셨죠. 콩팥이 오행으로 무엇인지 아시죠?'

    "수(水)지, 물이야."

    "그래요. 단전의 기운도 수, 즉 물이에요. 그런데 마음은 어디에 의지해 있죠?"

    "염통, 심장이지."

    "염통은 오행으로 불, 화잖아요."

    "그렇지."

    "마음도 화예요. 그런데 정신을 단전에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도 따라서 단전으로 내려가요. 도형, 물은 어떤 성질을 지녔지요?"

    "밑으로 가라앉고 또 차갑지."

    "불은요?"

    "위로 치솟고 뜨겁지."

    "마음의 불성질이 기운의 차가운 물성질을 뜨겁게 달궈 주어서 아랫배가 후끈거린 거예요."

    "아하, 그랬었구먼!"

    필섭은 혜원의 설명을 듣고 나서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 도형도 곧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혜원이 석주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석주는 이틀 뒤에 필섭과 똑같은 체험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다. 후끈후끈한 기운이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고, 전기에 감전된 듯 휘청휘청 흔들이기도 했다.  아랫배가 마구 떨릴 때도 있었다.  혜원이 그런 현상들이 생기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단전에 기운이 차서 그래요. 단전이 채워지니까 온몸으로 퍼지는 기운도 평소보다 강하지요. 그 때문에 전기가 온 것처럼 찌릿찌릿해요. 벌레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스멀거리기도 하고요. 뜨거운 기운 대신 싸아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어요. 특히 전에 아팠던 곳이 뜨거워지거나 떨려요."

    그랬다. 필섭인 몇 년 전에 어깨를 크게 다쳤던 적이 있는데, 다친 곳이 특히 후끈거렸다. 석주는 무릎이 안 좋았었다. 한동안 관절염을 앓았었는데, 뜨거운 기운이 무릎으로 자주 내려왔다. 무릎이 자주 저절로 떨리기도 했다. 벽운 선생과 백령자는 달포 만에 돌아왔다. 벽운 선생은 제자들이 수행을 잘하고 있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똑같은 공부를 계속하라고 일렀다. 또, 이런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단전에 기운이 차면 정도 충만해진다. 정이 충만해지면 자칫 음욕에 빠지기 쉽다., 정은 생명력의 뿌리다. 정이 충만해야 생명력이 왕성해진다. 음욕에 빠져 정을 빼앗기면 기운이 크게 소모된다. 그저 음욕이 일기만 해도 정이 탁해진다. 탁한 정은 몸도 마음도 탁하게 만든다.

    정을 자꾸 배출라면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나 마찬가지다. 공부가 깊어지질 않는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음욕에서 온전히 헤어나야  참도인이 될 수 있다. 너희는 그래도 음욕을 많이 끊은 사람들이다. 하나 그 뿌리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음욕의 뿌리가 자라지 않도록 경계하거라. 음욕에서 헤어난다는 것은 억지로 참는 게 아니다. 훌훌 떨치고 넘어서는 것이니라.

    사람의 뇌신경 중에 송과선이란 게 있다. 송과선은 기맥을 따라서 기운이 잘 유통되게 만드는 일을 한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이 송과선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몸은 기운이 잘 유통되어 아주 부드럽다.한데 사춘기가 되면 송과선이 퇴화한다. 대신 뇌하수체라는 게 왕성히 활동한다.

    뇌하수체가 활발히 작용하면서 남자 여자의 몸이 크게 달라진다.  또, 난자와 정액이 생기고 음욕이 강해진다. 음욕은 또 온갖 번뇌를  불러온다. 음욕으로 인해 몸과 마음과 정신이 크게 약해진다. 수행을 잘하는 사람은 음욕을 승화시켜 삼라만상 모두를 품어 안는 크나큰 사랑으로 바꾼다.

    그리고 참수행자의 뇌하수체는 힘을 잃는다. 대신 송과선이 도로 소생하여 활발히 활동한다. 불현듯 여인을 향한 음욕이 생기거든 온 우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거라 마음으로 나를 남김없이 비우고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거라. 그리하면 음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게다."

     

    필섭은 애욕을 잊고 지낸 지 이미 오래였다.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여의고 절망 속에 헤매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그 괴로움 때문에 다시는 여자와 인연을 맺지 않고 살았다. 그래도 가끔 여자가 그리워졌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지만 절제를 잘해왔다. 자꾸 절제하다 보니 갈수록 애욕이 희미해졌다.

    석주 역시 아내한테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여자를 멀리하게 됐다. 또 상처를 입을까봐 더 이상 이성으로서 여자를 가까이하고 싶지가 않았다. 혜원과 함께 살지만, 혜원일 이성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동기간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애욕을 완전히 초월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간혹 여인의 따스한 체온이 아련하게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벽운 선생의 말대로 애욕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백령자는 청령자에게 새로운 행공 자세들을 가르쳐 주었다. 청령자는 백령자가 시범을 보이는 대로 똑같이 따라서 했다. 새로 배우는 동작들은 전에 하던 동작들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목, 날개, 다리 등을 쫙 뻗기도 하고, 휘휘 돌리기도 하고, 이리 저리 꼬기도 했다. 백령자가 청령자에게 새 행공법을 가르쳐 준 다음, 벽운 선생은 백령자를 데리고 다시 초막을 떠났다.

    6월이 되었다. 온 산이 초록빛으로 짙게 물들었다. 나무들마다 뜨거운 여름 햇빛을 받아서 산소를 물씬물씬 뿜어냈다. 운학산의 공기는 매우 싱그럽고 신선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시원한 공기가 쏴아쏴아 단전까지 밀려들어왔다. 

  • 성자들의 시대7-정기가 피어오르다

    "도형, 제가 깨우친 게 아니고 스승님 도력이었어요. 또, 이 터의 정기가 활짝 피어났고요. 스승님 도력하고 좋은 지기가 어우러져서 그런 일이 생긴 거예요."

    혜원이 필섭을 일으켜 세우고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 설명했다.  

    "스승님께선 여기에 계시지도 않잖아."

    필섭인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심쩍은 듯 말했다.

    "만리 밖인들 스승님께서 도력을 못 보내시겠어요. 시공을 초월하신 어른이신데요." 

    "하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지. 한데 이곳 지기가 활짝 피어 났다고?"

    필섭인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느낌이 그래요. 어젯밤부터 기운이 달라지는 것 같았어요."

    혜원의 짐작이 맞았다. 초막터의 지기는 전날 밤부터 크게 달라졌다.

    맑고 깨끗한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거기에 반비례해서 탁한 기운은 점점 줄어들었다. 아침나절에 혜원이 마당으로 나와서 수련할 무렵엔 초막 일대의 지기가 극도로 깨끗해져 있었다.

    바로 그 시간에 또 벽운 선생이 초막을 향해 지극히 맑은 진기를 보내 주었다. 혜원인 수련을 하면서 스승의 모습을 심안으로 보았다. 벽운 선생 바로 옆에는 백령자가 있었다.

    혜원의 심안에 나타난 백령자와 벽운 선생의 모습은 새하얀 빛의 응어리였다. 그들의 몸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뿜어 나왔다. 

    그리고 백령자와 벽운 선생이 혜원일 향해 미소를 보냈다. 그 순간, 수많은 빛줄기들이 혜원의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혜원인 스승과 백령자한테서 뿜어 나오는 빛으로 목욕을 하는 느낌이었다. 빛의 폭포가 몸 속의 때까지 말끔히 씻어 내는 것 같았다. 전신이 파스를 바른 듯이 시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부를 통해 시원한 공기가 쏴아쏴아 마구 밀려았다. 피부의 기공이 활짝 열려 피무 호흡이 되었던 것이다. 피부 호흡이 되자 또 엄청난 진기가 몸 속으로 들어왔다.

    몸 속에 진기가 차오르니, 몸이 깃털허럼 가벼워졌다. 몸이 없어지고 형체만 어렴풋하게 남은

    기분이었다. 또, 풍선처럼 둥실 떠올라 하늘 높이 날아갈 것 같았다.

    공기는 계속 피부를 통해 드나들었다. 코로는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거의 피부만으로 숨을 쉬었으나  조금도 답답하지 않았다.

    정신은 가없이 투명했다. 티끌만한 잡념도 침범하지 못했다. 번뇌의 그림자까지 말끔하게 씻겨 나간 듯 했다.

    얼마 후, 혜원인 자신의 몸이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투명한 의삭만 남고 몸은 허공으로 변해 버렸다. 아니, 온 우주, 삼라만상과 한몸이 된 기분이었다.

    백령자와 벽운 선생한테서 뿜어 나온 빛은 혜원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석주, 필섭, 초막에 몰려온 짐승들, 이들이 모두 그 빛에 휩싸였다.

    해가 서해 바다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노을이 마지막 잔광을 받아 더욱 붉어졌다.

    세 사람은 말없이 서서 노을을 바라보았다. 초막은 깊고 깊은 고요에 잠겼다. 잠자리에 드는 새들의 푸덕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없이 아늑한 평화가 세 사람의 마음을 감쌌다.

      곧이어 어둠이 내리고 하늘 가득 번졌던 노을이 스르르 지워졌다. 혜원이 먼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석주와 필섭은 굳어버린 듯이 그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둘다 침묵 속에서 이날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도 가슴은 진한 감동으로 뭉클거렸다.

    " 아우, 놀랍지?"

    이윽고 필섭이 침묵을 깼다.

    "참말 신기하네요. 짐승들이 모여들어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있는 모양이 정말로 희한하더군요. 말도 못 하는 짐승들이 어찌 그리 영검하지요? 스승님께서 도력을 보내신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짐승들이 사람보다 더 나을 때도 많아. 사람들이 전혀 몰라 보는 성인을 짐승들은 알아. 성인들의 마음을 몸으로 느낀다네. 자비로운 마음에서 뿜어나오는 좋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에 여기로 몰려든 게야."

    "사람들은 왜 못 느끼지요?"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래. 욕심이 가득하니 늘 번뇌 속에 빠져 살지. 번뇌에 휘감겨 몸이 굳어 버렸어."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석주는 의형 방헌수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지. 아주 극소수이지만 더러 있지. 하지만 그들도 번뇌가 많아. 근심 걱정이 떠나질 않고, 자꾸 뭘 생각하지. 마음도 정신도 편히 쉴 때가 없어. 번다한 생각도 몸을 굳게 만든다네."

    "그런데, 형님. 아까 보니까 혜원이 도제 힘이 대단하던데요.

    형님께서 꼼짝못하시는 거같더군요. 체구도 작은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지요? 전 깜짝 놀랐습니다."

    "나도 놀랐네. 보통 기운이 아니더라고. 도력이 틀림없어. 혜원이 도제의 임독이 벌써 열린 모양이야."

    "임독이라니요? 그게 뭐지요?"

    "사람의 원기는 단전에 있다는 거 알지?"

    "예."

    "그 단전에서 등뒤 척추를 타고 머리로 기운이 올라가는 길을 독맥이라고 한다네. 또, 머리에서 다시 단전으로 내려오는 길을 임맥이라 하지. 단전에 큰 기운이 모이면 뜨거운 기운덩이가 임독맥을 타고 오르내려. 그럴 임독유통이 된 사람은 기운이 엄청나다네."

    "임독이 어떻게 해서 열리지요."

    석주는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수행이 깊어지면 그리 된다네."

    석주의 뇌리에 방헌수와그의 큰아들 한솔이가 떠올랐다. 한솔이도 아버지처럼 난쟁이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친구들한테서 자꾸 놀림을 받았다. 한솔이가 임독유통이 된다면 괴로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형님, 어린아이들도 수도할 수 있나요?"

    "근기가 되고 인연이 닿으면 할 수 있지. 왜?"

    석주는 필섭에게 헌수의 가족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양반 도심이 깊은 분이구먼. 부인하고 아이들도 예사 사람들이 아닌 것 같네. 언젠가는 다 도인이 되겠네. 아우가 인도할지도 모르겠구먼."

    두 사람은 이야기를 좀더 나누다가 자기네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석주는 이날도 전날처럼 신기한 일이 일어날까 매우 궁금히 여기며 아침을 맞았다. 혜원은 전날보다 일찍 밖으로 나와 수련을 시작했다. 그러자 전날과 마찬가지로 짐승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에는 백학봉 근처에 살지 않는 짐승들도 있었다.

    토끼, 비둘기. 꾀꼬리 등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 후엔 노루 네 마리와 멧돼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멧돼지는 뒷다리를 절었다. 오른쪽 뒷다리에 상처가 있었다. 사냥꾼의 총에 맞았는지 허벅지에서 발등까지 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노루 중에도 다리를 저는 놈이 하나 있었다. 이놈 역시 뒷다리를 절룩거렸다.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뼈를 다친 모양이었다.

    멧돼지나 노루나 평소에는 백학봉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었다. 어디서 왔는지 이상했다. 그들도 작은 짐승들처럼 혜원이 앞에 다소곳이 엎드렸다.

    석주와 필섭은 잠시 후에 깊은 선정에 들었다. 혜원인 이날도 헤질녘에야 수련을 끝냈다. 짐승들은 그때까지 꼼짝 않고 엎드려 있었다. 혜원이 수련을 끝내자. 그제서야 꼼지락거리며 모두들 일어났다.

    그런데 또 희한한 일이 있었다. 아침에 절룩이며 왔던 노루와 멧돼지의 다리가 멀쩡해진 것이었다. 석주가 그걸 보고 깜짝 놀라며 필섭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형님, 저기 저 노루하고 멧돼지를 보십시오. 아침에는 절룩절룩 간신히 걸었는데 멀쩡해졌어요. 웬일이지요?"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아서 나은 게야."

    "기운으로 병을 고쳐요?"

    "하늘의 진기를 받으면 불치병도 다 나을 수 있지."

    "그 기운을 어떻게 받나요?"

    "수행이 잘된 사람은 몸이 진기로 채워진다네. 그 기운을 남에게 보내 줄 수도 있고."

    석주는 외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혜원이를 쳐다봤다. 석주의 뇌리에 문득 중병을 앓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내는 신음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 같았다. 석주는 자신도 수행을 잘하여 병고로 신음하는 중생들을 건져 주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은 혜원이 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짐승들이 몰려왔다. 초막 주변에 사는 다람쥐와 산새들은 동이 트자마자 마당으로 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침해가 백학봉 위로 떠오르기 전에 이미 전날보다 더 많은 짐승들이 모였다. 석주와 필섭인 수련도 미루고 짐승들을 지켜보았다.

    이날도 새로운 짐승들의 모습이 보였다. 뻐꾸기 두 마리와 함께 꿩 한 마리가 날아왔다. 뒤를 이어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났다.

    석주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뜨더니 족제비를 쫓으려 했다. 다람쥐나 산새들이 족제비한테 잡혀 먹힐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족제비들은 석주가 쫓을 사이도 없이 잽싸게 마당 한가운데로 달려갔다. 석주는 그들에게 작은 짐승들이 잡혀 먹힐까봐 몸을 움찔했다.

    한데 석주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족제비들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새와 다람쥐 또한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모두들 태평하게 그대로 앉아 있었다. 족제비들도 마당 한가운데에 이르러서는 다른 짐승들처럼 가만히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족제비에 이어 고양이 몇 마리가 나타났다. 고양이 역시 작은 짐승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누구보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쥐와 산새들도 도망칠 생각을 안 했다.

    그 다음엔 뱀들이 기어왔다. 능구렁이, 살무사, 까치독사 등 여러 마리가 미끄러지듯 마당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뱀을 보고 석주는 바짝 긴장했다. 소름까지 돋았다. 뱀들이 작은 짐승들을 잡아 먹으려고 초막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뱀들도 다른 짐승들과 똑같았다. 마당 한가운데로 오더니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석주의 눈이 더욱 휘둥그래졌다.

    " 극락 선경이 따로 없구먼. 고양이와 쥐가 함께 선정에 들다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고 극락일세."

    필섭이 짐승들을 바라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고양이가 다람쥐를 봐도 그냥 두네요. 족제비와 뱀도 그렇고요. 어찌 된 영문이지요?"

    "마음이 지극히 화평해져서 그래. 또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아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게야..

    "형님, 짐승들이 먹지 않고서 어떻게 배가 부릅니까? 이미 잔뜩 잡아먹어서 더 먹을 맘이 없는 게 아닌가요? 스승님이나 백령자처럼 크게 깨우쳤다면 몰라도요."

    석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우, 자네 요 며칠간 허기를 느껴 본 적 있나? 나는 한번도 안 그랬어. 끼니때가되면 그냥 습관적으로 미숫가루를 먹었지. 자네도 마찬가지일걸."

    필섭의 얘기가 맞았다. 2,3일 동안 석주도 시장기를 느껴 보지 못했다. 끼니때가 되면 필섭이처럼 그저 습관적으로 미숫가루를 먹었던 것이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숫가루만 먹으니 자주 속이 허했었다. 끼니때가 가까워 오면 배가 꽤 고팠다.

    "그럼 우리도 아주 좋은 기운으로 배를 채웠었구먼요."

    "맞아."

    "도를 조금도 깨우치지 못했는데 어찌 그럴 수 있지요?"

    "백령자와 스승님께서 도력으로 여기에다 좋은 기운을 듬뿍 보내신 거야. 또 기운이 우리 몸 속으로 들어왔고. 몸이 맑은 진기로 채워지니 허기도 안 지고 아픈 데도 없게 됐어. 어제 그 멧돼지하고 노루 좀 봐. 다리가 저절로 멀쩡해졌지. 또, 배부르고 마음이 화평해져서 싸울 생각도 안 해."

    "참 기막힌 일이구먼요. 이 얘길 다른 사람들한테 하면 누가 믿겠어요."

    "못 믿지. 이치를 모르니까. 이런 세계가 있다고 상상도 못 하지. 하나, 앞으로 달라진다는 게야.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아 성인이 된다더구먼. 머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 모두 큰 도인이 되는 시대가 온다는 게야. 그렇게 세상이 바뀌는 걸 후천개벽이라 하지."

    "형님, 정말 그리 될까요?"

    석주는 경이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옛날의 뛰어난 선지자들께서 다 그 말씀을 전하셨네. 우리가 스승님을 만나게 된 것도 그 때가 가까웠기 때문일 게야. 앞으론 우리 같은 사람이 참 많아지겠지. 그중에 스님처럼 크게 깨우치는 이들도 꽤 나올 게고. 옛 어른들께서 이르시길, 세계 방방곡곡에서 성자들이 쏟아져 나오리라 하셨어."

    "야, 그럼 굉장하겠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중생들이 그 은덕을 입겠구먼요. 스승님 한 분의 도력으로도 이 여러 중생들이 대복을 누리는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성인이 되면 어찌 되겠어요?"

    "이 세상이 곧 극락이요 선경이지."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 마음은 그저 화평하니 싸움이 없겠지요? 잡아먹고 먹히는 일도 없겠고요. 정말 태평성대가 오겠네요."

    "그렇고말고. 대평화의 시대지."

    "정말 그리 될까요, 형님?"

    "나는 확신하네. 옛 선지자들 말씀이 지금까지 하나도 안 틀렸어."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올까요?"

    "글쎄, 어느 선지자께선 앞으로 40년 후라 이르셨네. 두고 봐야지. 하지만 스승님께선 정확히 아실 거야."

    "40년요?  그럼 우리도 잘하면 보겠구먼요."

    석주는 기뻤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늘 남들한테 지기만 했던 석주에게 연약한 짐승들은 자기의 분신과도 같았다. 강한 짐승들에게   쫒기고 잡아멱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사람들이 짐승들을 무자비하게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학대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석주는 오래 전부터 육식을 끊었다. 이런 석주한테 필섭이 전한 선지자들이 예언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날 저녁 석주와 필섭은 식사를 하지 않았다. 허기를 느낄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말아 보자고 필섭이 제안했던 것이다. 석주는 그 제안에 쾌히 동의했다.

    짐승들은 그 후에도 닷세 동안 초막으로 몰려왔다. 갈수록 수가 불어났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닷새째 되는 날에는 마당이 꽉 찼다.

    병들고 상처받은 짐승들도 많이 왔다. 그들은 몰라보게  좋아져서 돌아갔다. 그들 중에 중병을 앓거나 상처가 깊은 짐승들은 며칠 동안 초막에 계속 머물렀다, 2,3일 지나자 그들 역시 병이 나았고, 상처가 아물었다.

    석주와 필섭은 닷새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장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처음 이틀간은 가끔 물만 마셨다. 사흘째부터는 물도 끊었다. 갈증까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때 청령자도 사냥을 나가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내내, 가지 위에 고요히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겨있었다.

    혜원이 밖에서 수련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이날은 짐승들이 모두 돌아갔다. 중병으로 시달리던 짐승들도 하루만에 씻은 듯이 병이 나았던 것이다.

    그 이튿날이었다. 이날도 석주는 짐승들이 몰려오는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거 동트기 전에 마당으로 나갔다. 오늘은 또 어떤 짐승들이 올까, 얼마나 많이 올까, 이런 생각을 하는 석주의 가슴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밖으로 나온 지 반시간쯤 지나서 동이 텄다. 다른 날 같으면 짐승들이 모여들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한 마리도 오지 않았다. 날이 환하게 밝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아무도 안 올까요? 이상하네요?"

    필섭이 밖으로 나오자 석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글쎄, 왜 그런지 모르겠네. 좀더 두고 보세."

    두 사람은 한 시간 가량 더 기다렸다. 산새 한마리 마당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초막의 마당은 썰물이 빠져 나간 바다처럼 공허하고 적막했다.

    혜원인 해가 백학봉 위로 떠오른 뒤에댜 마당에 나왔다.

    "도제, 오늘은 짐승들이 하나도 안 오네. 어찌 된 일일까?"

    석주가 혜원에게 물었다. 혜원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일을 끝내셨나 봐요. 인연이 닿는 중생들은 모두 다녀갔나 보군요."

    "스승님께서 하시는 일이 뭐지, 도제?"

    필섭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혜원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스승님께서 하시는 일은 전부 하늘의 도를 널리 펼치시는 게 아닐까요?"

     
  • 성자들의 시대 6-깨어 있으면서 비우라

    "무릇 참된 도는 마음 닦는 것을 수도의 주춧돌로 삼는다. 마음이 닦이면 정신이 환하게 밝아진다. 몸도 따라서 깨끗해진다. 흔히들 선도인은 몸만을 닦아서 불로장생을 누리고, 불도인은 마음만을 닦아서 해탈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과 몸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마음은 몸의 주인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다. 이들은 종이의 앞뒷면과 같다. 그래서 마음이 제대로 잘 닦이면 몸도 닦인다. 몸이 상하면 마음도 번거롭다. 마음이 탁하면 몸도 따라서 약해진다. 그러니 마음 닦는 게 곧 몸 닦는 것이요, 몸 닦는 게 마음 닦는 것이다.

     

    그런데 선도인 중에는 몸만을 중히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마음 닦기를 소홀히 한다. 거꾸로 불도인 중에는 마음만을 중히 여기고 몸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수도인들은 올바르게 수행하기 어렵다.

     

    우리 도는 마음과 몸을 똑같이 함께 닦는 도이다.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하늘몸, 하늘 마음, 하늘 정신으로 바꿔 놓는다. 우리 도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하늘의 도라 일컬을 수 있다. 석주와 필섭인 오늘부터 얼마간 마음과 정신을 닦는 공부에 전념하라.혜원인 그동안 해오던 공부를 계속하고."

     

    벽운 선생은 혜원일 방에 남겨둔 채 석주와 필섭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해는 백학봉 위로 불쑥 솟아올라 있었다. 햇살이 퍽 따스했다.

     

    따뜻한 햇살을 받고 눈이 마구 녹아 내렸다. 온 산에 봄기운이 가득 감돌았다. 벽운 선생은 눈이 모두 녹아 내린 마당가 너럭바위에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혔다. 그리고는 손으로 관음봉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저 관음봉만 쳐다보거라. 멀리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정신을 오로지 관음봉에 집중하거라. 잡념이 떠오르면 즉시 지워 버려야 한다. 눈길도 절대 딴 데로 돌리지 말고."

     

    벽운 선생은 이렇게 이르고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석주와 필섭은 서로 1미터쯤 떨어져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관음봉에 모았다.

     

    초막 위편 소나무 위에는 청령자와 백령자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소나무 가지 아래로는 눈녹은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필섭은 관음봉의 아름다운 자태에 찬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수려하구나! 예사 봉우리가 아니야. 신령스런 기운이 넘쳐흘려.'

     

    이런 생각을 하는 필섭의 머리에 문득 호산 스님이 떠올랐다.

     

    관음봉처럼 생긴 산봉우리를 그려 놓고, 이런 봉우리는 성현이나 선인, 대학자를 배출한다고 가르쳐 주던 모습이었다.

     

    이때 벽운 선생이 잔기침을 하더니,

     

    "필섭아, 왜 벌써 엉뚱한 생각을 하느냐"고 조용히 나무랐다.

     

    필섭은 흠찟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한데 벽운 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초막 안에 있으면서 음성만을 보냈던 것이다. 필섭은 스승의 기이한 도력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 초막 쪽을 향해 깊이 머리 숙여 사죄했다.

     

    잡념이 일기는 석주도 마찬가지였다. 관음봉을 뚫어지게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관음봉에 겹쳐 돌아가신 부모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석주는 스승의 분부를 생각하고 얼른 부모님의 모습을 마음에서 지워 버렸다.

     

    두 사람은 고삐를 바짝 죄듯 마음을 다잡고 관음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잡념이 일었다. 푸르른 하늘, 초막 아래 골짜기, 관음봉 너머 겹겹으로 펼쳐진 산줄기, 아스라이 보이는 서해 바다 등으로 눈길이 자꾸 옮겨 갔다. 바람이 불면 바람 소리가, 새가 울면 새소리가 의식을 어지럽혔다. 두 사람은 미끄러지듯 다른 곳으로 달려가려는 시선을 붙들어 매고, 머리에 떠오르는 잡념들을 생기는 대로 떨쳐 냈다.

     

    이것은 자신과의 지루한 싸움이었다. 쉴새없이 움직이려는 마음과 정신을 한곳에 잡아 매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힘든 노동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고행이었다.

     

    정신을 한곳에 모으는 것을 '응념'이라고 한다. 불가, 선가, 요가에서는 '응념'이 수행의 기초가 된다. '응념'은 모든 번뇌에서 해방되어 해탈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여러 관문 중 첫번째 것이다.

     

    두 사람이 관음봉과 씨름하는 사이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점심때가 되자 혜원이 초막에서 나와 두사람을 불렀다.

     

    "도형들, 스승님께서 그만 들어오시래요. 들어와 식사들 하세요."

     

    두사람은 그제야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석주는 다리가 굳어져서 잠시 주물러 준 다음에댜 일어설 수 있었다. 벽운 선생은 두 사람이 점심 식사를 한 다음에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수도란 본래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람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번뇌에 물든다. 태아 시절엔 그래도 번뇌가 적은 편이나, 세상에 태어난 뒤에는 온갖 번뇌로 시달린다. 번뇌에 물들어 살다가 자기의 본래 모습을 거의 다 잃게 된다.

     

    그러니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번뇌를 모두 끊어야 한다. 사람은 몸과 마음과 정신으로 이뤄졌다. 몸을 백이라고도 하고, 마음을 혼이라고도 하며, 정신을 영이라고도 한다. 번뇌가 침범하면 영·혼·백 모두가 탁해진다. 유리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것처럼 본래의 진면목을 잃어버린다.

     

    너희가 오늘 시작한 공부는 번뇌를 끊는 공부다. 번뇌는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번뇌를 뿌리까지 뽑아 없애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도가 아주 높아져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또, 뽑아 버릴 만한 힘을 길러야 한다."

     

    석주와 필섭은 보름 동안 관음봉을 바로 보며 응념 수련을 했다. 열흘쯤 지난 뒤에는 잡념을 모두 떨치고 시선을 집중할 수 있었다. 보름이 지난 후, 벽운 선생은 두 사람에게 새로운 공부를 시켰다.

     

    "오늘부터는 눈을 감고 앉아 있어라. 눈을 감은 채 관음봉을 떠올리거라. 양눈썹 사이 약간 위쪽에 마음의 눈이 있지 않느냐. 그 마음이 눈을 심안이라고도 하고, 천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심안으로 관음봉만을 보고 있어라."

     

    심안의 눈길을 한곳에 집중시키기는 육안의 눈길을 집중시키는 것보다 더욱 어려웠다. 관음봉의 모습이 자꾸 사라지고 엉뚱한 것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 했다. 석주와 필섭은 옅은 그림자처럼 희미한 관음봉의 모습을 심안에 잡아 두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하루하루 지나면서 이번 공부에도 차츰 익숙해졌다.

     

    열흘쯤 지나자 관음봉의 아름다운 모습이 심안에 불쑥 솟아올라 움직일 줄 몰랐다. 두 사람은 한번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몇 시간씩 심안의 관음봉만을 바라볼 수 있었다.

     

    또, 보름이 지났다.이제 산마루에도 완연한 봄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따스한 마파람이 몰려와 응달에 남았던 잔설을 모두 녹였다. 땅속에서는 씨앗들이 싹을 틔웠다.

     

    청령자는 여전히 백령자의 가르침을 받으며 백학봉에 머물렀다. 한 번 허기를 채우려고 산에서 내려갈 뿐, 나머지 시간은 석주네처럼 수련에 전념했다.     

     

    백령자는 거의 늘 청령자와 함께 지냈다. 청령자는 백령자한테서 어린 시절 어머니 품에 안겨 있을 때보다 더 큰 평화를 느꼈다. 백령자와 함께 지내는 동안엔 한번도 두려움이나 불안에 휩싸이지 않았다.

     

    알에서 깨어난 이후, 청령자가 이때 처럼 평안히 지내 본 적이 없었다. 자기를 해칠 적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서려 있었다. 그 때문에 늘 긴장했고, 불안해 했으며, 경계심을 풀기가 어려웠다.

     

    백령자를 만난 뒤,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 자리에 아늑한 평화가 대신 깃들였다 백령자의 도력이 청령자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령자는 청령자가 사냥을 나갈 때는 함께 따라가지 않았다.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청령자는 백령자와 떨어져 홀로 사냥을 나가면서도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먹이를 빨리 찾으려고 초조해  하지도 않았다. 운학산에서 가까운 영주천에 날아가 어슬렁거리다 물고기 몇마리를 잡아먹고 천천리 돌아오곤 했다,

     

    날씨가 아주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 청령자가 사냥을 나갔는데. 처음 보는 학 다섯 마리가 먼저 와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고요했던 청령자의 마음에 파문이 이렀다. 무리에서 떠난 외로움, 무리 속에서 지낼 때 느꼈던 흥겨움과 아늑함, 짝을 맺고 싶은 열망 등이 한데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청령자는 낯선 학들과 어우러져 사냥을 했다 그러면서 백령자와 같이 있을때는 느껴 보지 못했던 즐거움을 맛보았다.

     

    얼마 후, 낯선 학들이 저희 무리가 모여 사는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청령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갔다.

     

    청령자가 낯선 학들과 함께 5리쯤 날아갔을 때였다. 갑자기 백령자의 울름 소리가 들려 왔다. 청령자는 잠시 동안 어찌할까 망설였다. 청령자의 날갯짓이 점점 느려졌다. 낯선 학들은 청령자를 훨씬 앞질러 날라 갔다.

     

    드디어 청령자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청령자는 운학산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득히 먼 서해 바다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청령자가 개심사 입구에 이르자 백령자가 마중을 나와서 청령자와 함께 백학봉으로 갔다.

     

    석주와 필섭이 심안으로 관음봉만을 바라보는 수련을 시작한지 보름 만에, 벽운 선생은 두 사람에게 또 새로운 수련을 시켰다. 이번 공부는 마음과 정신을 텅 비워 허공과 같은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불가 선정(禪定) 수련과 똑같은 공부였다.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벽운 선생은 머릿속어 떠오르는 모든 상(象)을 먼지로 여기고 남김없이 떨쳐 버리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를 이루려면 마음과 정신이 잘 닦인 거울처럼 깨끗해야 한다. 심혼(心魂)을 바람 한 점 없는 바다같이 고요하게 가라앉히거라. 또, 정신은 또렷이 깨어 있으되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거라. 너희가 굳이 뭘 생각하지 않아도 눈을 감고 있으면 온갖 상념이 계속 떠오를 게다.머릿속에 무엇이 떠올라도 그것에 끌려가지 마라. 그냥 내버려두면 스스로 물러간다.

     

    또,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 잠이 잘 온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졸음이 몰려오는 수가 있다. 그러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잠에 떨어지면 영(靈)이 탁해진다."

     

    이번 수련은 지난번 수련보다 더욱 어려웠다.또렷이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환하게 비우기가 참 힘들었다. 머릿속에 갖가지 상념들이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필섭인 그래도 절간 생활을 하면서 더러 참선도 해봤던 터라 석주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석주는 한참 동안 온갖 잡념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경험한 일들, 갖가지 중생들과 물건들……, 별의별 상념들이 돌아가며 떠올랐다. 자신과 친했던 사람들이 떠오르면 마음이 자꾸 그들에게 끌려가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스승의 당부를 생각하고는 퍼뜩 놀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석주는 무엇보다 사람들한테 끌리는 마음을 끊어버리기가 어려웠다. 부모형제나 친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그들한테로 딸려 갔다. 특히, 많은 괴로움을 겪으며 사는 이들이 석주의 마음을 깊이 끌었다.

     

    자기와 같은 불구자들, 부모가 일찍 죽은 아이들,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 버려지는 아기들, 중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 이런 사람들이 자주 떠올랐다. 그들이 심안으로 보일 때마다 가슴이 무거웠다. 그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마음을 휘어잡았다. 한없이 애틋하고 안쓰러웠다.

     

    하루는 스승의 당부를 잊고 수련 시간 내내 그들을 생각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벽운 선생이 석주를 따로 불렀다. 석주는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게 죄스러워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벽운 선생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그리고는 스승께서 큰 꾸지람을 내리시길 기다렸다.

     

    "석주야."

     

    뜻밖에도 석주를 부르는 벽운 선생의 음성이 매우 부드러웠다.

     

    "예."

     

    석주는 송구스러워하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불쌍한 중생들이 그리도 안타까우냐?"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 사람들이 생각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저미고 안타깝습니다."

     

    벽운 선생은 그윽한 미소로 제자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자비심이 매우 깊어 그리 되는 것이다."

     

    벽운 선생의 음성이 더욱 따뜻해졌다. 봄바람처럼 온화한 기운이 석주의 마음을 감싸 주었다.

     

    벽운 선생은 잠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석주야, 윤회전생에 관해 들은 바가 있느냐?"

     

    석주는 방헌수를 떠올렸다.

     

    "예. 전에 제가 형님으로 모시던 분한테서 들었습니다."

     

    "중생들이 당하는 고통은 전생의 업보다. 자기가 뿌린 씨앗을 그대로 거두는 것이다.

     

    네가 도를 이루면 그 이치를 환히 알게 된다."

     

    "하나 전생의 업이라 해도 너무 안됐습니다."

     

    "그 업보를 네가 대신 받고 싶을 때도 자주 있지 않았더냐?"

     

    "예, 그랬습니다."

     

    석주는 자신이 과거에 지녔던 마음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모두 알고 있는 스승의 도력에 새삼 놀라면서 대답했다.

     

    "그게 보살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지녀야 바른 도를 깨우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대신 업보를 받지는 못한다. 다만,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길이 있다. 석주야, 네가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중생들의 고통이 사라지겠느냐?"

     

    "모릅니다."

     

    "네 힘으로 중생들을 윤회업보의 고통에서 건져 줄 수 있겠느냐?"

     

    "못 합니다."

     

    "그러니까 힘을 길러야 하느니라. 네가 도를 끼우치면 그 힘이 저절로 생긴다. 참된 도인이 될 때까지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놓도록 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석주는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돌아서는 석주의 가슴엔 환희로 가득 찼다. 벅찬 감동을 주채하기 어려웠다. 수행을 잘하면 언젠가 자신이 온갖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을 건져 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다.

     

    벽운 선생의 말씀을 들은 이후에도 며칠간은 정신을 깨끗이 비우기가 쉽지 않았다. 갖가지 상념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것들에 마음을 오래 빼앗기지는 않았다. 얼른얼른 지울 수가 있었다.

     

    선정 수련을 시작한 지 보름 가까이 되자 비로소 한참씩 맑은 정신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 시간 정도는 환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의식을 비워 둘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벽운 선생은 제자들을 초막에 남겨 두고 어디론가 떠났다 며칠 만에 돌아오곤 했다. 제자들은 스승이 어디에 가서 뭘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백령자는 더러 벽운 선생과 동행했다. 청령자는 백령자가 없어도 함께 있을 때와 똑같이 지냈다. 하루에 한 번 사냥을 나가고, 나머지 시간에는 수행에 몰두했다.

     

    이제 완연한 봄이 되었다. 새싹들이 땅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나비와 개미들도 분주히 돌아다녔다.

     

    다람쥐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쉴새없이 움직였다. 나뭇가지들은 물을 먹어 푸른빛을 진하게 띠었다.

     

    필섭과 석주가 선정 닦는 공부를 하는 사이에 혜원은 도인 체조를 하며 단전 수련을 했다. 그녀는 주로 방안에서만 수련했는데, 날씨가 풀리자 종종 밖에서도 수련했다.

     

    석주는 휴식 시간에 혜원이 수련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도인 체조를 하는 혜원의 모습은 참으로 우아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학의 날갯짓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힘이 넘쳐 보였다.

     

    체조를 마치면, 몇 가지 다른 자세를 취하고 단전 호흡을 했다. 한 가지 자세를 취하면 반시간 정도 꼼짝 않고 있다가 다시 새로운 자세로 바꿨다.

     

    혜원이 취하는 자세는 서 있는 것과 앉아 있는 것, 그리고 누워 있는 것, 세 가지였다. 누워 있는 자세는 엎드려 누운 자세와 옆으로 누운 자세, 둘이었다. 혜원은 이런 자세들을 취하고 선정에 들어 단전 호흡을 했다. 선정에 든 혜원의 모습은 잘 만들어 놓은 서고상 같았다.

     

    날씨가 아주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벽운 선생은 출타중었고, 혜원이는 이날도 밖에서 수련을 했다. 석주와 필섭은 마침 휴식 시간이라서 혜원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혜원이는 몸푸는 체조를 한 다음 단전 수련을 시작했다. 석주와 필섭이도 휴식을 마치고 수련에 들어가려던 차였다. 이때 다람쥐 한마리가 나타나 쪼르르 혜원이 앞으로 달려갔다. 다람쥐는 혜원이로부터 2미터 떨어진 곳에 쪼그리고 앉았다.

     

    채 1분도 안 되어 또 다람쥐 세 마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먼저 온 다람쥐 옆으로 달려가 나란히 앉았다. 다람쥐 네 마리가 나란히 엎드린 모습이 참 신기했다.

     

    석주와 필섭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수련도 잊고 다람쥐들을 지켜봤다. 다람쥐들은 마치 선정에 든 것처럼 꼼짝 않고 엎으려 있었다.

     

    조금 뒤에는 더욱 이상한 일이 생겼다. 초막 근처에 있던 새들 몇 마리가 혜원이 옆으로 날아든 것이었다. 또 새로운 다람쥐들이 달려왔다. 새들도 불어났다. 고슴도치와 들쥐까지 떼지어 혜원이 옆으로 다가왔다. 초막 주변에서 사는 길짐승과 날짐승들이 모두 모여드는 것 같았다.

     

    이들은 혜원을 둥글게 둘러싸고 앉았다. 그리고는 털끝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석주와 필섭인 숨을 죽이고 그 신기한 광경을 지켜봤다.

     

    한 시간쯤 지나서 혜원인 자세를 바꿨다. 혜원인 서 있던 자세에서 아주 천천히 몸을 낮춰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움직임이 어찌나 고요한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짐승들은 혜원이 자세를 바꿀 때도 그냥 그대로 있었다. 초막 뒤 왕소나무 위에는 청령자가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필섭인 문득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어 버린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없는 세계, 영원불변의 세계로 홀연히 들어선 기분이었다. 필섭 자신도 그 세계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았다. 육신과 정신의 활동이 한순간에 멎었다. 몸은 한없이 가벼웠고, 정신은 지극히 투명했다.

     

    석주도 필섭과 비슷한 체험을 했다. 더할 수 없이 아늑한 평화속으로 영원무궁한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 몸도 마음도 사라지고 맑디맑은 정신만 남았다. 자신이 투명한 거울로 화했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날, 혜원의 수련 시간은 매우 길었다. 평소의 두 배는 되었다. 한 가지 자세에 1시간 이상 걸렸다. 마지막에 가부좌를 틀고 수련하는 시간은 무척 길었다. 3시간 가량 되었다.

     

    아침나절에 수련을 시작했는데. 해가 거의 다 진 뒤에야 끝났다. 혜원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을 때는 이미 서편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숯덩이 처럼 빨간 저녁해가 서해 바닷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혜원이 수련을 끝내고 움직이자, 초막에 몰려들었던 짐승들도 눈을 뜨고 꼼지락거렸다. 길짐승들은 귀를 쫑긋 거리거나 몸을  흔들었다. 날짐승들은 앉은 채로 가볍게 날개짓을 했다. 석주와 필섭이도 선정에서 깨어났다.

     

    승들은 초막 마당에서 잠시 더 머문 뒤에 뿔뿔이 흩어져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갔다. 혜원인 한없이 자비로운 미소로 그들을 배웅했다. 그 순간

     

    필섭은 혜원이 보살이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석주가 보기에도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였다. 석주와 필섭은 잠시 동안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제, 크게 깨우쳤구만!"

     

    짐승들이 모두 돌아간 뒤, 필섭이 혜원에게 격한 어조로 말했다. 감격에 겨운 말투였다.

     

    "예? 도형,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혜원이 깜짞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짐승들까지 큰 은덕을 입지 않았나. 장하시네. 높은 도를 얻으셨구먼."

     

    필섭은 외경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혜원일 쳐다보며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는 갑자기 땅에 넙죽 엎으려 큰절을 올렸다. 

     

    "아유, 도형. 왜 이러세요. 잘못 아신 거예요."

     

    혜원인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손을 마구 내젓더니, 자기에게 자꾸 절을 바치는 필섭의 어깨를 부여 잡았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필섭인 절을 더 올리려 했다. 그러나 혜원의 손에 잡혀 꼼짝못했다.

     

    석주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필섭인 체격이 아주 다부졌다.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만큼 힘도 매우 좋았다. 키는 보통이었으나 기운이 장사였다. 그런 필섭이 갈대처럼 연약해 보이는 혜원이 한테 잡혀 꼼짝못하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석주는 저런 힘이 어떻게 나올까 매우 궁금했다.       

  • 성자들의 시대5 - 하늘사람되는 길에 들어서다

    예전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않았던 뭇 중생과 삼라만상의 이치가 백령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백령자에겐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신비롭기 그지 없었다. 또,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백령자는 온갖 세상사에 관해 의문을 품었다. 의문이 이는 대로 벽운 선생한테 물었다. 생명이 어찌하여 태어나고 왜 죽는지,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죽은 다음에는 또 무엇이 되는지, 왜 중생들은 갖가지 종류로 갈리었는지, 왜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혀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뭇 중생들이 짝을 찿아 헤매는지, 짝이 되고 어버이가 되고 자식이 되는 인연은 어찌해서 이루어지는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생겼다.

    벽운 선생은 일년여 동안 백령자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백령자의 정신은 무한한 우주를 향해 끝없이 넓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벽운 선생에게 백령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중생들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아귀다툼에서 헤어날 길은 없는지요?"

    "있다."

    벽운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하면 그리 될까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리 된다. 나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벽운 선생의 이 대답은 백령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그동안 백령자는 허기를 느낄 때마다 강이나 논으로 날아가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자기가 사냥을 나가 있는 동안 벽운 선생 역시 뭘 먹는 줄 알았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령자는 자신도 벽운 선생처럼 살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허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 싫어졌던 것이다. 자기로 인해 죽어 가는 물고기들이 너무 불쌍했고,깊은 술픔을 느끼곤 했었다.

    "저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지요?"

     "아무렴, 그리 할 수 있고 말고."

     벽운 선생의 얼굴에선 은은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하여 먹지 않고도 사는지요?"

    "다른 중생의 몸 대신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을 먹으면 된다. 그러면 먹지 않아도 배무르고 마시지 않아도 목이 안 마르다. 기운은 더욱 넘친다. 또, 몸에 땅 기운 하늘 기운이 가득 차면, 그 누구한테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 아무도 감히 해치려 들지 못한다. 걱정 근심 하나 없이, 오로지 불쌍한 중생들을 돌봐 주며 자유로이 살 수 있다."

     "저도 땅 기운 하늘 기운을 먹을 수 있는지요?"

    "목숨을 지닌 중생은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

     "땅 기운 하늘 기운을 어떻게 먹는지요?"

    "공부를 해야 한다. 네가 어버이한테서 날아다니는 법이나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우듯이 그 법을 배우면 된다."

    "어서 배우고 싶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가르쳐 주마."

     백령자는 이날부터 벽운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선도를 닦기 시작했다. 수행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수행을 시작한 지 일년도 안 되어 백령자의 식성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먹는 양이 줄었다. 조금씩 먹어도 배가 불렀고 기운이 넘쳤다.

     두 번째 변화는 육식이 싫어진 것이었다. 학은 육식성 동물이다. 그런데 수행을 시작한지 2년쯤 되자  육식이 싫어졌다. 몸에서 안 받았다.

     백령자는 자연히 육식을 끊고 열매나 풀을 먹었다. 식욕도 날이 갈수록 줄었다. 하루에 한 번 먹던 것이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꼴로 계속 줄어 갔다. 그러다가 10년쯤 후에는 곡기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우주의 진기가 몸 속에 충만해지니 먹고 마실 필요가 없었다. 

    곡기를 아주 끊자, 몸 속에 있던 노폐물이 모두 배출되었다. 몸이 정화되면서 마음은 더욱 고요해졌다. 정신도 한없이 맑아 졌다. 잠까지 사라졌다. 마음의 맨 밑바닥에 있던 번뇌의 뿌리도 남김없이 뽑혀 나갔다.

     백령자는 수행을 시작한 지 15년 후에 깨닭음을 얻었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환히 꿰뚫어 알게 되었다. 또,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삶을 누렸다.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새벽녘까지 백학봉 정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느덧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멀리 백두대간 쪽 동녘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갔다. 

    이때, 가없이 자비롭고 온화했던 벽운 선생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탁하고 흉흉한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모습이 심안으로 보였던 것이다. 특히 생명을 죽이는 살기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백령자도 세상 곳곳에 감도는 살기를 몸으로 느꼈다. 백령자의 마음 역시 짙은 어둠으로 덮였다.

    '가엾은 중생들…….' 

    벽운 선생은 그 흉흉하고 탁한 기운에 휩쓸려 온갖 고초를 당하는 중생들을 떠올렸다. 몇십 년 후 살기가 극성을 부릴때, 이세상의 중생들에게 닥쳐올 대환난도 심안으로 똑똑히 보았다. 무수히 많은 중생들이 참혹하게 죽어 갔다. 그들의 처참한 신음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려 왔다.

    살기는 온 세상 방방곡곡에 감돌았다. 산천에 감도는 살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흉포하게 만들었다. 흉포해진 사람들이 곳곳에 서 무자비하게 힘없는 중생들을 괴롭혔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뿜어 나온 살기가 또 산천의 기운을 더욱 탁하고 흉하게 만들었다.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악기.살기가 자꾸 쌓여 갔다. 명산 중의 명산이며 많은 성자들을 길러낼 운학산에도 그 흉흉한 기운이 곳곳에서려 있었다.

     벽운 선생의 심안에 상제봉과 천마봉이 나란히 떠올랐다. 곧이어 비룡봉, 장군봉도 보였다. 상제봉은 백학봉의 동남쪽에 솟아오른 봉우리다. 백학봉과 20여 리쯤 떨어져 있다. 천마봉은 백학봉 북쪽 시나리오쯤 떨어진 곳에 있는 봉우리다. 장군봉은 서남쪽으로 시오리쯤 떨어져 솟아있다.

     이 네 봉우리에는 제왕을 배출하는 대명당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풍수가들이 찾아왔다. 어떤 풍수가들은 그 유명한 천하명당을 한 번 구경이라도 해보려고, 또 어떤 풍수가들은 자신이 차지하려는 욕심에서 이곳을 드나들었다.

     상제봉에 있는 명당은 상제봉조형(하늘의 임금님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는 형국)이라 한다. 천마봉에는 천마사풍형( 하늘을 나는 천마가 바람을 내뿜는 형국)의 명단이, 비룡봉에는 비룡상천형(용이 하늘을 날으는 형국) 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또, 장군봉에는 장군대좌형(장군이 버티고 있는 형국)의 병장이 깃들여 있다고 한다.

    숱한 풍수가들이 드나들었지만, 누가 그 명당들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명당의 빼어난 지기를 입어 제왕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지금까지 전해 오지 않는다. 또, 그 명당들이 양택지지(집터)인지 음택지지(묘지 자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풍수가들이 찾아오면, 산신령께서 그들의 눈을 흐려지게 만들어 어디가 명당터인지 도저히 알 수 없게 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게 하거나, 안개나 구름으로 가려 버린다는,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들만 떠돈다.

    벽운 선생은 빼어난 대명당을 품고 있다는 그 네 봉우리에 엄청난 탁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봉우리마다 특정한 어느 한 장소에서 흉한 기운이 강하게 뿜어 나왔다. 그 기운은 매우 거칠고 음습했다. 흉한 기운들이 뿜어 나오는 곳에서 좀 떨어진데에는 숱한 풍수가들이 찾으려다 실패한 대명당들이 있다. 그곳들만은 아주 맑고 꺠꿋한 기운이 감돌았다. 숱한 생명을 살려 줄 좋은 기운이 었다.

     벽운 선생의 심안에 문득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네 봉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풍수가들이 아니었다.그들 무리에는 벽운 선생의 옛친구도 하나 끼여 있었다. 그들은 흉한 기운이 가득 감도는 곳으로 몰려왔다. 거기서 커다란 신통력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따르는 제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

    마음속으로 이렇게 탄식하는 벽운 선생의 표정이 어욱 어두워졌다.백령자 역시 앞으로 많은 사도의무리가 운학산 곳곳에 들어오리라는 걸 예견했다. 벽운 선생의 제자들이 그들로 인해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하는 모습이 심안으로 보이기도 했다. 백령자의 마음에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마 후에 백두대간 위로 붉은 아침해가 둥실 떠올랐다.아직 눈에 뒤덮인 뭇 산줄기들이 새하얀 자태를 드러냈다. 그 위로 아침 햇살이 퍼져 나갔다.

    벽운 선생의 심안에 새로운 사람들이 떠올랐다. 벽운 선생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좇아올 수행자들이었다.

    운학산뿐 아니라, 방방곡곡의 명산에 벽운 선생과 그의 도반들한테서 가르침을 받게 될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수행자들은 앞에서 보았던 사도의 무리들과 정반대되는 사람들이었다.그들의 발길은 자기도 모르게 아름다운 정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의 명당들로 향했다.거기서 빼어난 정기를 받아 참삶의 길을 깨우쳤다. 깨달음을 얻은 그들에게서 밝고 환한 빛이 뿜어 나왔다. 그 빛이 세상을 뒤덮은 살기를 정화시켰다. 많은 중생들이 그 덕을 입었다.

    처음엔 그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사도의 무리보다 훨씬 적었다. 백 명에 한 명꼴도 안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점덤 더 많아졌다. 그들이 사도의 무리보다 많아지는 몇십년 후의 광경이 벽운 선생의 심안에 떠올랐다.

    이때 어두워졌던 벽운 선생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가없이 온화한 미소가 얼굴 가득 감돌았다. 백령자의 마음도 아침 햇살처럼 환해졌다.

    벽운 선생은 자신과 인연이 닿을 모든 중생들을 향해 무한한 사랑을 보냈다. 그 사랑과 함께 지극히 맑고 깨끗한 기운, 성스러운 기운이 전해졌다. 백령자도 스승을 따라 자신과 인연이 닿을 이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보냈다.

    잠시 후 벽운 선생의 몸에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백령자의 몸에서도 빛이 번져 나왔다. 광채는 점점 더 환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눈부신 광채에 휩싸였다가 곧 모습이 사라졌다. 둘 다 빛으로 화해 버렸다. 또, 두개의 빛덩이가 하나로 합쳐졌다.이 빛의 응어리는 산산이 흩어져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는 빛의 응어리까지 사라져 버렸다. 백학봉 정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몇 분 후에 벽운 선생과 백령자의 모습이 허공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자마나 초막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초막에 당도하니, 소나무 위에 앉아 있던 청령자가 반갑게 맞이했다.

    벽운 선생이 초막으로 돌아오자 석주는 아침 식사를 차렸다. 식사라야 미숫가루뿐이었다. 벽운 선생은 음식을 끊은 지 오래되어 한 숟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제자들만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한 공기씩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제자들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 벽운 선생 앞에 나란히 앉았다. 벽운 선생이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필섭이와 석주도 혜원이처럼 본격적인 수도의 길로 들어설 때가 되었다. 내 그동안 뒤에서 너희를 항상 지켜봤다. 둘 다 마음을 잘 다스려 왔으니, 우리의 도를 전해 받을 자격이 있다."

    이 말을 듣는 필섭의 두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얼굴엔 밝은 기운이 가득 감돌았다. 석주의 얼굴도 발갛게 상기되었다.     

     " 우리의 도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의 도다. 하늘 뜻을 섬기며, 하늘 뜻 그대로 살아서, 하늘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을 밝힌 도이다. 하늘 사람이란 불가의 부처님. 보살님이요, 선가의 천상선과 같은 성인이다. 불도와 선도와 우리의 도는 수도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목표하는 바나 수도법의 중심 줄기는 별로 다르지 않다. 하늘 사람을 향해, 한단계 한단계 나아가면서 얻게 되는 것도 똑같다. 우리의 도가 중국에서는 선도로 알려졌고, 인도에서는 요가로 알려졌다. 불도의 뿌리는 또 바로 요가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도 역시 본래는 우리의 도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석주에겐 생소한 이야기였다. 석주와 도반들은 스승이 대도인이란 사실만 알았지, 그가 어느 도에 입문하여 깨닭음을 얻었는지 전혀 몰랐다. 누구는 그가 예전에 스님이었는데, 수행을 잘하여 큰 도력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또, 누구는 스승이 선도를 닦아 선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추측했다. 제자들이 궁금하게 여겨 물어 보면,벽운 선생은 한결같이 그런 걸 알아서 뭣에 쓰려느냐고 반문했다. 그게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닦고 또 닦으라고만 일렀다. 벽운 선생의 말씀이 계속 이어졌다.제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필섭은 5년 전, 벽운 선생과 처음 인연을 맺기 전에 벽운 선생의 도반인 호산 스님한테 풍수를 배웠다.호산 수님은 풍수의 비법을 전수해 주고는, 훗날 자신의 도반을 만나게 될테니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라 일렀다.

    그때 필섭은 청련사에 있었다. 청련사 주지였던 상지 스님이 필섭의 고모였다. 상지 스님은 지현 스님의 은사 스님이었고, 벽운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이였다.

    벽운 선생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5년간은 필섭에게 스승으로부터 도를 전해 받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동안 많은 시헙을 거쳤다. 이제 비로소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석주 역시 감개부량했다. 아내한테 배신당하고 자살까지 시도했는데, 벽운 선생을 만나 새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젠 자기가  하늘처럼 모시는 벽운 선생의 뒤를 좇는다 생각하니 지극한 기쁨이 용솟음쳤다. 또, 스승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게 느껴졌다

  • 구도소설 성자들의 시대 4-백두대간

    유필섭은 개심사에서 부목지기로 일했다. 그도 벽운 선생의 제자다. 지난 가을엔 계룡산에서 보름동안 석주네와 함께 지냈다. 그는 6년 전에 처음 벽운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벽운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직접 가르침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두 달 만에 만난 혜원의 얼굴은 더욱 좋아 보였다. 티 하나 없이 희고 깨끗했다. 옥을 다음어 놓은 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커다란 두 눈에서는 아침 이슬같이  서글서글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또, 한없이 그윽하고 온화한 미소가 잔잔하게 어려 있었다.

    '수행을 참 잘했구나!'

    석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찬탄했다. 혜원에겐서 풍겨 나오는 맑은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필섭은 석주보다 일곱 살이나 위인데도 오히려 더 젊어 보였다.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으나, 30대 초반 같았다. 체격이 다부져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고, 문에서는 번쩍이는 광채가 쏟아져 나았다. 네모난 얼굴, 단정한 입매, 짙은 눈썹이 필섭의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벽운 선생은 여기저기 너덜너덜 해진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기다란 얼굴은 구릿빛으로 그을렸고, 머리는 학처럼 눈부시게 희었다. 벽운 선생의 욤모와 옷차림은 수시로 변했다. 이날처럼 팔십이 넘은 나이에 맞게 백발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어느때는 4,50대 장년의 모습으로 나타나 석주를 놀라게 만들었다. 도반들은 석주에게, 스승께선 오래 전에 나이를 초월하셨으며 몸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경지에 오르셨다고 했다. 벽운 선생의 나이는 여든둘이다.

     

    네 사람은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백령자는 초막 뒤에 우뚝 선 소나무 가지에 앉아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겼다. 서쪽 하늘은 바다와 맞닿은 곳에서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숯불처럼 빨개진 저녁해가 천천히 기울어 갔다. 바다도 하늘도 물감이 번져 가듯 붉게 물들었다.

     

    그때, 노을을 헤치고 서편 하늘에 학한마리가 나타났다. 이 학은 동쪽을 향해 부지런히 날개를 퍼덕였다. 해가 막 바다에 잠길 무렵, 이 학이 운학산 상공에 이르렀다. 백령자가 그를 향해 길게 울었다. 이 학도 긴 울음으로 응답하고는 백령자가 있는 소나무 가지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백령자가 이제야 저희 무리 중에서 도반을 만났구나."

     벽운 선생니 초막안에서 두 학의 울음 소리를 듣고 말했다. 스승의 말씀에 모두들 신기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 궁금하지 않느냐, 가서들 보고 오너라."

     

    세 사람은 스승을 남겨 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백령자와 낯선 학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낯선 학이 잠시 뒤에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또 날개를 여러 모양으로 퍼덕였다. 낯선학의 몸짓이 끝나자, 이번엔 백령자가 머릴 움직이고 날개를 퍼덕였다.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도담을 나누는가 봐요."

    혜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거야. 자기 무리 중에서 도반을 얻었으니 백령자가 참 기쁘겠구먼."

    유필섭이 흐뭇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도 성현을 찾는데……."

     

    석주는 하물며 사람들이 성현의 가르침을 외면한다고 말하려다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사람이라 해서 학을 무시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던 것이다. 석주는 찬탄을 금치 못하며 경이로운 눈빛으로 두 학을 지켜보았다.

     

    붉은 해가 바다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노을 속에서 마자막 잔광이 부옇게 빛났다. 그 잔광마저 스러지고 어둠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낯선 학과 백령자는 이야기를 끝냈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낯선 학이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잠시후, 백령자가 푸드득 날아와 유필섭의 어깨 위에 앉았다.

     

    세 사람은 백령자와 함께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백령자는 벽운 선생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낯선 학에 관하여 뭘 아뢰려는 모양이었다. "알고 있다. 나도 매우 기쁘다. 앞으로 백령자 네가 새 도반을 잘 인도하거라." 벽운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니, 백령자는 머리를 몇 번 흔들어 대답했다.

     

    해가 지자 방안은 금방 어두워졌다. 석주는 초에다 불을 붙이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벽운 선생한테서 환한 빛이 뿜어 나왔다. 방안이 촛불을 켤때보다 훨씬 더 밝아졌다. 석주는 전에도 벽운 선생이 방광하는 모습을 보았던지라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번째는 석주가 약을 먹고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였다. 두 번째는 계룡산에서 함께 지내던 도반들과 해어지기 전날 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아주 다른 느낌을 받았다. 벽운 선생힌테서 번져 나오는 빛의 알갱이들이 자신의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 오는 것 같았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까지 그 빛에 쉽싸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벽운 선생이 그윽한 눈길로 석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석주야, 그동안 마음을 아주 잘 닦았구나. 네 가슴에 맺혔던 것들이 모두 풀렸다. 이제 새로운 곰부를 시작해야겠다."

    석주는 기뻤다. 자신이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게 무엇보다 기뻤다. 또 '새로운 공부'라는 말씀에 가슴이 설렜다.`성자들의 세계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생각하니 날아갈 듯 좋았다. 필섭과 혜원이도 석주와 마찬가지로 기뻤다. 석주가 그 참담한 고통을 이겨낸 것이 참으로 장해 보였다.

     

    벽운 선생은 제자들에게,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야기를 나누다  먼저 자라 이르고서 밖으로 나갔다. 백령자가 벽운 선생을 따라 나섰다. 벽운 선생과 백령자는 백학봉 정상으로 향했다.

     

    벽운 선생의 발걸음은 나는 것처럼 가벼웠다. 경신술을 써서 미끄러지듯 위로 올라갔다.백령자는 나무들 바로 위에  서 벽운 선생한테 딸려 가듯 그의 뒤를 좇았다.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순식간에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서 보니 동녘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교교한 달빛이 눈덮인 산봉우리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벽운 선생은 동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바람 한 줄기가 휘이 지나갔다. 벽운 선생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백령자는 벽운 선생과 두어 걸음 사이를 두고 자릴 잡았다. 백령자의 눈길도 벽운 선생처럼 동쪽으로 향했다. 둘은 수백  리 떨어진  백두대간 연봉들을 바라보았다.

    벽운 선생은 심안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흐르는 정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벽운 선생의 심안은 잠시 후 백두대간이 처음 출발한 백두산으로 옮겨 갔다. 다시 먼 길을 더듬어 히말라야에 이르렀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그 히말라야에 매우 성스러운 기운이 거대하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 기운은 우주의 중심인 하늘과 맞닿아 있는 기운, 성자들을 낳고 기르는 기운이었다.

     

    히말라야의 성스러운 정기는 산맥을 따라 사방으로 흘러갔다. 히말라야에서 뻗어 나간 여러 산맥 중에서 가장 힘차고 수려한 산맥은 동북쪽으로 뻗은 맥이었다. 그 산맥의 끝자락에 백두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백두산으로 뻗은 히말라야의 동북 지맥은 그 어느 지맥보다도 헌걸차고 수려했다. 그런 만큼 여기에 매우 웅혼한 성자들의 기상이 흘렀다.

    성스러운 정기가 거대한 강물처럼 백두산으로 도도히 흘러와 다시 사방으로 뻗쳐 갔다. 백두산에서 갈라져 나간  산맥들은 모두 이 아름다운 정기를 품고 의연하게 솟아 있었다.

     

    백두산의 여러 지맥 중에서 가장 헌걸차고 수려한 맥이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크게 굽이치며 뻗어 있다. 또, 곳곳에다 빼어난 명산들을 빚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백두대간에서 수많은 산맥들이 갈라져 나와 한반도 곳곳으로 뻗어 갔다. 이 백두대간의 지맥들 역시 방방곡곡에 훌륭한 명산들을 솟아 올렸다.

     

    히말라야의 성스러운 정기는 백두대간과 백두대간의 지맥들을 따라 한반도 곳곳에 흩어진 명산들 속으로 흘러들었다. 운학산에서 그 기운이 폭포처럼 밀려 왔다. 벽운 선생은 운학산으로 도도히 흘러오는 성스러운 정기를 바라보며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백령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때가 이르렀구나."

    백령자는 백운 선생이 말하는 뜻을 알아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이날은 갑자년(甲子年; 1984) 음력 정월 열하루.입춘날로부터 이레가 지났다. 계해년(1983) 가을 이후, 한반도의 지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수도인과 성자를 배출할 성스러운 기운이 크게 피어날 조짐을 보였다. 그 아름다운 기운은 갑자기 입춘날이 지나면서 뭉클뭉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이날은 더 한층 새로워졌다.

     

    벽운 선생, 그리고 그의 스승들과 도반들은 오래 전부터 이때를 기다려 왔다. 성스러운 기운이 활짝 피어나면 숱한 성자들이 배출된다. 그리하여 뭇 사람들이 성스럽게 살아가는 성자들의 시대가 열린다. 그 시대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태평성대다. 그 시대엔 사람뿐 아니라. 뭇 중생이 다 함께 대평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

     

    성자들의 시대가 열리는 대사건을 옛 사람들은 후천개벽이라 일렀다. 후천개벽. 벽운 선생의 스승들과 도반들은 지금 이날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중생들이 성자가 되어 무한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시대, 찬란한 광명시대로 가는 길을 열고 있는 사람들이다.

     

    벽운 선생은 심안으로 사부 운허 도인, 사백(사부의 사형) 석파도인, 사조(사부의 스승)운정도인, 그리고 여러 도형과 도제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각각 인도와 중국, 우리나라의 여러 명산에서 벽운선생처럼 활짝 피어오르기 시작한 성스러운 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사조 운정 도인은 히말라야에 계셨다. 세계 곳곳에서 온 대성자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 선계의 선인들 모습도 많이 보였다. 운정 도인 역시 선계와 속계를 자우로이 넘나드는 선인이었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는 눈부시게 찬란한 빛을 뿜었다. 그 빛이 온 세상으로 퍼져 갔다. 땅속, 바닷속까지 히말라야가 뿜어낸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석파도인도 선계에서 내려왔다. 석파 도인은 중국의 곤륜산에 계셨다. 거기에더 많은 선인과 성자들이 모여 있었다. 히말라야에 이어 곤륜산에서도 휘황한 빛이 장엄하게 뿜어 나왔다.

     

    사부 운허 도인은 백두산에 계셨다. 백두산 천지 위에 수십명의 선인과 성자들이 모여 있었다. 백두산에서도 찬란한 빛이 뿜어 나왔다.

     

    벽운 선생의 도반들은 우리 나라의 여러 명산에 흩어져 있었다. 묘향산, 금강산, 구월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지리산, 가야산, 계룡산, 두륜산, 소백산……, 방방곡곡의 명산마다 도반들이 한 사람씩 있었다. 그 명산들도 찬란한 빛을 뿜었다. 사방의 명산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서로 어우러져 한반도 전체가 광명 세계로 변했다.

     

    우리 나라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세계 도처에 솟아오르 명산들이 모두 엄청난 빛을 뿜었고, 온 세계가 찬란한 빛에 휩싸였다. 지상에 깃들여 있던 성스러운 기운이 난만하게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부터 벽운 선생과 도반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뒤를 좇아올 수도인들을 더욱 많이 길러내는 것이다. 이들은 몇 년 전부터 그 일을 위해 인연이 닿는 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이 들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제자들도 꽤 되었다.

     

    벽운 선생은 성혜원, 이석주, 유필섭, 홍명천, 지현 스님 등을 제자로 거두었다. 앞으로 이들 말고 더 많은 제자를 만나게 될 터였다. 벽운 선생의 심안에 새로 인연을 맺게 될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스쳐 갔다.

     

    이때, 백령자도 벽운 선생처럼 자기의 도반이 될 다른 학들을 생각했다. 많은 학들이 자기를 따라 도에 입문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백령자의 자슴에 지극한 기쁨이 샘물처럼 솟구쳤다. 이날은 처음으로 자신의 동족인 청령자와 도반이 되었으니 더욱 기뻤다.

     

    백령자가 벽운 선생을 처음 만난 지도 벌써 23년이 되었다. 당시 백령자의 나이는 세 살이었다. 벽운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시작한 지는 22년째다.

     

    백령자한테 벽운 선생은 생명의 은인이다. 23년 전 여름, 백령자는 독극물에 중독되어 죽은 물고기를 먹고 사경을 헤맸었다. 그때 벽운 선생이 나타나 백령자를 구해 주었다. 그 일이 있을 때까지 백령자는 여느 학들처럼 사람을 두려워했었다. 사람들이 자기네를 함부로 죽이거나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가까이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한테서 뿜어 나오는 살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접근하면 얼른 멀리 피했다.

     

    한데 벽운 선생에게서는 이 살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알에서 깨어나 엄마의 품에 안겼을 때 느꼈던 온화하고 아늑한 기운이 물씬물씬 느껴졌다. 그 평화로운 기운 때문에 백령자는 건강을 회복한 뒤에도 벽운 선생과 함께 지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자 다른 학들은 추위를 패해 모두 멀리 남쪽으로 날아갔다. 백령자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벽운 선생 곁을 떠나기가 싫었던 것이다.

     

    가을이 깊어져 나뭇잎이 지고 서리가 내렸지만, 백령자는 벽운 선생 곁에서만 맴돌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추위도 전혀 안탔다. 벽운 선생한테서 뿜어 나오는 진기가 늘 백령자를 감싸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마음으로 의사소통을 완전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의 의사를 마음으로 헤아려 알았다. 둘은 많은 얘기를 나눴다. 벽운 선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백령자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때부터 백령자는 본능에 따라 사는 여느 학이 아니었다. 백령자의 정신과 마음은 자꾸 새로운 세계를 향해 열려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