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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아공 인권운동의 상징, 투투 대주교 별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던 투투 대주교가 타계했습니다.

     

    26일(현재시간),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재단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철폐에 앞장섰던 데스몬드 투투 성공회 대주교가 케이프타운의 요양소에서 향년 90세를 일기로 선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분리, 격리'를 뜻하는 아파르트헤이트는 냉전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있었던 백인과 유색인종에 대한 신분제도였습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유색인종은 대도시 중심가에 사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으며, 거주지를 옮기는 것도,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주권마저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각종 공공시설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고, 유색인종과 백인 간의 결혼 또한 금지되었습니다. 백인들 또한 언론, 문화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이유로 검열과 통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투투 대주교는 이런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없애기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1958년 세인트피터스 신학대에 입학해 성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75년 44세의 나이로 요하네스버그 대성당의 주임 사제에 올랐습니다. 이는 당시에 유색인종으로써 가장 높은 성직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흑인 빈민가에 살면서 흑인들을 위해 살았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백인들 중 일부가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운동은 단순히 유색인종 집회에 참석해 철폐운동을 독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인들도 인종차별의 종식에 동참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인종차별정책이 흑인 뿐만 아니라 백인에게도 인간성에 큰 손상을 입히고, 각종 검열을 정당화하는 등 다양한 악영향을 준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존 보스터에게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라는 공개서한을 보내, 아파르트헤이트의 문제점과 그로 인해 벌어질 유혈사태를 경고했으며, 일반 백인들에게 유색인종의 열악한 삶을 알리고 그들 또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해 남아공의 실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등, 전세계의 도움을 받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습니다.

     

    당시 백인 정권은 그의 활동을 보고 그를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올렸습니다. 1979년에는 그의 여권을 압수했으며, 다음 해에는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고 벌금형을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1981년 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해 인종차별 철폐에 대해 논의하자, 정부는 다시 그의 여권을 압수했습니다. 투투 대주교의 요청으로 서방국가가 약간의 경제제재를 취하자, 그에 대해 잘 모르던 백인들, 그리고 그를 따르던 흑인들도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기회로 삼아 정부는 그가 소속된 남아프리카 교회협의회를 표적조사해 투투 대주교를 압박했습니다.

     

    그러던 1984년 투투 대주교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투투 대주교의 노력은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투투 대주교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인간의 존엄과 우애,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남아프리카의 모든 개인과 단체에게 보내는 세계의 격려"라고 밝히면서 그의 운동을 지지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수많은 유명인사들로부터 축하가 쇄도했습니다. 그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남아공의 흑인들에게 힘을 실어줬으며, 나아가 아파르트헤이트가 세계적인 문제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1986년, 그가 케이프타운의 대주교로 선출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운동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1988년 유엔(UN)에서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는 나치즘 만큼 부도덕하고 사악한 것"이라고 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의 부당함을 세계에 더더욱 알리고자 했습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투투 대주교는 남아공 국가와 국민 통합을 위한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 운동을 제안했으며, 1995년에는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벌어졌던 인권침해를 조사히기 위한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약칭 TRC)'의 위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투투 대주교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에도 다양한 차별을 언급하며 인권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는 새롭게 등장한 흑인 엘리트들에게 너무 큰 권력과 부가 집중됐다고 말하면서, 대다수 민중의 빈곤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단의 동성애 차별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1996년 남아공 헌법의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 금지 명문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등 동성애와 관련된 차별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1997년 전립선암 등으로 투병생활을 이어갔고, 지난 2019년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한 자선재단 행사에 참석해 해리 영국 왕손 가족을 만난 후 공개 석상에서 모습을 감췄습니다.

     

    투투 대주교의 선종 소식에 세계의 수많은 인사들이 애도를 표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주교의 선종 소식을 듣고 가슴이 무너졌다면서, "그의 유산은 국경을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해 울려퍼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또한 "투투 대주교는 많은 이들에게 멘토이자 친구이자 도덕적 나침반이었다"라면서, 그에 대한 그리움과 애도를 표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딸 버나스 킹 또한 그의 선종 소식을 듣고 "전 지구적인 현자이자, 인권 지도자이자, 이 땅의 강력한 순례자였던 이의 죽음에 슬픔에 잠겼다"라며 애도를 표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과거사의 진실을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고자 했던 그의 삶은 인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길 기도한다고 밝혔습니다.

  • 구도소설 성자들의시대2-석주의 운명

    소나무 숲 licensed by Pixbay

    "백령자, 이리 와." 석주는 두 팔을 치켜들고 백령자를 불렀다.

     

    백령자는 반갑다는 표시로 목을 뽑고 한 번 길게 울더니, 석주한테 날아와 어깨위에 앉았다. "혜원 누이가 벌써 출발했니?" 백령자는 석주의 물음에 머리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렇다는 뜻이었다. 혜원이 벽운 선생과 함께 운학산을 향해 길을 떠나자, 백령자는 먼저 석주에게로 온것이었다.

     

    석주는 백령자를 두팔로 안았다. 백령자한테서 봄바람처럼 따스한 기운이 뿜어나왔다.

     

    석주는 백령자를 안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백령자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우주의 진기에 몸을 맡기고 깊은 명상에 잠겼다. 석주의 도반들 중에서 맨 처음 벽운 선생과 인연이 닿은 도반이 백령자였다. 석주는 벽운 선생한테서 백령자가 20 여년 전부터 벽운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는 얘길 들었다.

     

    백령자는 벌써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3년 전부터 우주의 진기만으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석주는 시장기를 느꼈다. 구석에 놓인 비닐봉지에서 미숫가루를 꺼냈다. 백령자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소리 안 나게 조심조심 숟가락으로 퍼서 공기에 담았다. 그리고는 물을 붓고 잘 저은 다음 천천히 마셨다. 이것이 석주의 아침 식사였다. 석주가 먹는 미숫가루는 칡, 콩, 솔잎, 깨 등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석주는 처음 산에 들어왔을때부터 이 미숫가루만 먹고 지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석주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백령자처럼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방안은 지극히  고요했다. 백령자도 석주도 조각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백령자한테서 또 훈훈한 기운이 피어나와 석주를 에워쌌다. 석주의 마음은 한없이 아늑해졌다. 마치 어린아기로 돌아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것 같았다.

     

    석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따스한 미소가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6.25 때, 끌려가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며 울어대던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아버지는 그 뒤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학살당했다는 소식만 들려 왔다.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석주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석주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파문은 곧 가라앉았다. 전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할 떄마다 가슴이 막힐 듯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와 이념이 달랐던 사람들이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던 일도 생겨났다. 그들이 몰려올 때마다 석주는 공포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머니는 석주 남매들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다. 석주는 그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이젠 그때의 두려움과 미움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석주는 평온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어서 초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석주는 초등학교에 다닐때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꼽추가 되었다. 그로 인해 다른 아이들한테 숱한 놀림을 받았다. 아이들이 편을 갈라 놀이를 할떄도 석주는 낄 수가 없었다. 석주가 자기네 편에 들면 불리하다고 따돌리기 일쑤였다. 석주는 뒷전에 서서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보습을 구경이나 해야 했다. 석주를 따돌리고 놀려대던 아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곱추라고 놀려대던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려왔다. 그때 느꼈던 슬픔과 외로움이 다시 일듯 하다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석주는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 하며 학교를 다녔다. 방학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그 두려움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그러니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

     

    석주에겐 위로 누나와 형,그리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있다. 맏이인 누나는 학교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고 누나가 동생들을 길렀다. 동생들이 큰뒤에는 남의집 식모살이를 하여 살림을 보탰다. 석주의 형과 동생은 공부를 아주 잘했다.석주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게의 점원이 되었다. 형을 가르치기도 벅찼던 어머니는 공부를 못하는 석주까지 가르칠수가 없었던 것이다.

     

    석주도 누나처럼 어머니를 도와 형과 동생 뒷바라지를 했다. 석주는 점원으로 있다가 시장에서 행상을 했다.석주가 번돈은 모두 형과 동생의 학비로 들어갔다. 동생이 대학을 졸업했을때 석주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석주는그제서야 자신을 위해서 돈을 모았다. 그때까지는 결혼도 하지 못했다.불구자에다 많이 배우지도 못한 석주에게 시집 오겠다는 여자가 없었던 것이다.

     

    석주는 3년동안 돈을 모아 시장에다 작은 가게를 열었다. 가게는 제법 잘됐다.석주를 좋아하는 단골 손님이 꽤 많았다. 돈도 잘벌고 성품이 참좋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다. 석주는 서른네 살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다. 석주보다 세살 아래였는데 소박하고 성실한 여자였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2년 동안 별 탈없이 잘살았다.아기를 못가져 근심이 되기는 했지만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2년 후인 서른여섯이 되던해에 큰 불행이 닥쳐왔다. 석주가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던 친구의 보증을 섰는데,그만 그 친구가 부도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석주는 가게를 팔아서 그 친구의 빚을 갚았다.졸지에 빈털털이가 되었다.

     

    석주는 다시 행상을 시작했다.생활이 어려웠다. 그러자 아내의 마음이 조금씩 변해갔다.남편한테 자주 불만을 터트리고 싸움을 걸었다. 아내의 불평불만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석주는 모두 자기 탓이다 싶어 참고 참았다.그럴수록 아내한테 잘해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내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아내는 결국 집을 나가고 말았다. 그것도 다른 남자와 눈이 맞은 것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석주는 어머니 죽음도 자기탓이라고 생각했다.자기가 가정을 잘못 꾸려나가 어머니께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다고 믿었다. 죄책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아내의 얼굴과 임종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서 떠올랐다. 아내를 향한 미움과 그리움,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잔잔히 일다가 사라졌다. 석주는 아주 고요한 마음으로 아내와 어머니를 지켜 보았다.

     

    어머니 마저 돌아가신 뒤,석주는 절망에서 헤어날수 없었다. 입에 잘 대지도 않던 술로 세월을 보냈다.시장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며 위로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시장 사람들 중에 방헌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석주보다 몇 살위였고 난쟁이였다. 두사람은 성품도 비슷했으며 같은 불구자라 친형제 보다 훨씬 더 친하게 지냈다. 방헌수도 시장에서 행상을 했다.

     

     방헌수는 마음이 무척 넓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불구자였으나 의연했다.게다가 기품이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얕보지 못했다. 그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또, 묘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의 관상을 잘 보는 재주였다. 여간해선 남의 관상을 봐주지 않았는데, 그가 관상을 보고 하는 얘기는 언제나 적중했다.

     

    석주가 친구로 인해 가게를 날리기 한달 전이었다. 하루는 장사를 마치고 나서 방헌수가 할말이 있다며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두 사람은 저녁밥을 먹은 다음, 다방으로 갔다. 할말이 있다던 방헌수는 선뜻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형님, 하실 말씀이 뭔가요?" 석주가 궁금해 하는 문밑으로 물은 뒤에야 방헌수는 입을 열었다.

    "아우,내가 관상을 좀 보는 거 알지?"

    "그럼요, 형님이 용하신 거 제가 한두 번 겪어 봤나요."

    "그런데 내 여태까지 아우 관상을 한번도 안 봐줬어. 아우 역시 내게 뭘 물어 보지도 않았고."

    "그동안 뭐 별로 어려운 일이 없었으니까 그랬지요."

    "내 오늘은 아우 관상이나 봐주려고 하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한다. 석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방헌수와 가장 친하게 지내면서도 자기의 관상을 봐달라고 하지 못했다. 행여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불행이 다시 찾아오리라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방헌수는 석주의 관상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아우 관상은 참 특이하네. 보통 사람 상이 아닐세. 초년운과 말년운이 전혀 상반되는 사람은 처음 보네. 초년은 날개 부러진 봉황이요. 개천에 떨어진 용이나 마찬가지로구먼.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나. 알아주는 사람도 하나 없고. 아우는 만인을 가르치는 스승이 될 사람이야. 옛날 같으면 큰 도인이 됐을거야. 아우가 스님이 되었다면 아주 고명한 스님으로 많은 사람한테 존경을 받을 텐데…….

     

    관상을 보는 법 중에 유년법이란 게 있다네. 몇 살에 어떻게 되는가 알아보는 법이지. 사람의 운은 열네 살까지는 주로 귀에 나타난다네. 열다섯부터 서른 네살까지는 이마가 큰 작용을 하지. 서른다섯부터 마흔까지는 눈과 간문이라는 데 나타나고. 간문이란 눈꼬리하고 귀 사이라네."

     

    방헌수는 손가락으로 자기의 간문을 가리켜 보인 다음에 계속 말을 이었다.

     

    "마흔한 살에서 쉰까지는 운이 코로 들어. 쉰 살부터는 쉰 아홉살까지 운은 코하고 입 사이로 오고. 예순 살부터는 입하고 턱에 있다네. 또 사람의 얼굴을 상정, 중정, 하정으로 나누지. 상정이란 이마야. 중정은 눈썹 아래에서 코끝까지라네. 하정은 코 아래, 입과 턱이야. 상정엔 초년운, 중정엔 중년운, 하정엔 말년운이 깃들지. 

     

    자네 이마는 움푹 들어갔어. 귀는 너무 얇고. 그래서 초년에 고생이 많았다네. 한데, 중정과 하정은 매우 잘생겼어. 눈썹, 눈, 코, 입, 턱 모두 빼어나게 좋아. 간문이 좀 약한게 흠이지. 나머지는 특츨해. 서른일고 여덟 운은 눈동자에 있네. 자네 눈은 매우 귀한 눈이야. 게다가 번쩍번쩍 광채가 뿜어 나오고.

     

    서른 일곱 살이 되면 자네 운이 크게 바뀔거네. 귀인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돼. 서른일곱에 맞는 대운은 정말 굉장해. 날개 부러진 봉황이 상처가 아물어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격이야. 개천에 엎드려 때를 기다리던 용이 풍운을 만나 승천하는 거와 같지. 그후로는 평생 큰 복을 누리게 되네. 자네 복은 여느 사람들 복하고 달라.

     

    세상 사람들은 돈 잘 벌고, 출세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걸 대복으로 여기지. 자네 복은 그런 세간의 복이 아니네. 하늘이 내려 주시는 것이야. 그런데 아우, 호사다마라는 말 들어 봤지?  좋은 일에 마가 끼듯이, 큰 복이 올때도 흉화를 입는 경우가 있어, 혹 자네한테 한두달쯤 후에 나쁜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게나. 내 생각엔 머지 않아서 화를 입을것 같네. 그런 일이 있으면 마음 단단히 먹고 견뎌야 하네. 많이 괴롭겠지만, 그 고통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걸세."

  • 조용필, 바람의 노래

    조용필은 자신이 깨달은 순간을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바람의 노래>입니다.

    40년 이상 노래의 한 길을 걸어온 그가 전하는 ‘깨달음’을 소개합니다.

     

    - 바람의 노래 -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바람에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 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