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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 성자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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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소설 성자들의시대2-석주의 운명

"백령자, 이리 와." 석주는 두 팔을 치켜들고 백령자를 불렀다.

 

백령자는 반갑다는 표시로 목을 뽑고 한 번 길게 울더니, 석주한테 날아와 어깨위에 앉았다. "혜원 누이가 벌써 출발했니?" 백령자는 석주의 물음에 머리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렇다는 뜻이었다. 혜원이 벽운 선생과 함께 운학산을 향해 길을 떠나자, 백령자는 먼저 석주에게로 온것이었다.

 

석주는 백령자를 두팔로 안았다. 백령자한테서 봄바람처럼 따스한 기운이 뿜어나왔다.

 

석주는 백령자를 안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백령자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우주의 진기에 몸을 맡기고 깊은 명상에 잠겼다. 석주의 도반들 중에서 맨 처음 벽운 선생과 인연이 닿은 도반이 백령자였다. 석주는 벽운 선생한테서 백령자가 20 여년 전부터 벽운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는 얘길 들었다.

 

백령자는 벌써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3년 전부터 우주의 진기만으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석주는 시장기를 느꼈다. 구석에 놓인 비닐봉지에서 미숫가루를 꺼냈다. 백령자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소리 안 나게 조심조심 숟가락으로 퍼서 공기에 담았다. 그리고는 물을 붓고 잘 저은 다음 천천히 마셨다. 이것이 석주의 아침 식사였다. 석주가 먹는 미숫가루는 칡, 콩, 솔잎, 깨 등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석주는 처음 산에 들어왔을때부터 이 미숫가루만 먹고 지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석주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백령자처럼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방안은 지극히  고요했다. 백령자도 석주도 조각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백령자한테서 또 훈훈한 기운이 피어나와 석주를 에워쌌다. 석주의 마음은 한없이 아늑해졌다. 마치 어린아기로 돌아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것 같았다.

 

석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따스한 미소가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6.25 때, 끌려가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며 울어대던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아버지는 그 뒤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학살당했다는 소식만 들려 왔다.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석주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석주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파문은 곧 가라앉았다. 전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할 떄마다 가슴이 막힐 듯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와 이념이 달랐던 사람들이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던 일도 생겨났다. 그들이 몰려올 때마다 석주는 공포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머니는 석주 남매들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다. 석주는 그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이젠 그때의 두려움과 미움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석주는 평온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어서 초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석주는 초등학교에 다닐때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꼽추가 되었다. 그로 인해 다른 아이들한테 숱한 놀림을 받았다. 아이들이 편을 갈라 놀이를 할떄도 석주는 낄 수가 없었다. 석주가 자기네 편에 들면 불리하다고 따돌리기 일쑤였다. 석주는 뒷전에 서서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보습을 구경이나 해야 했다. 석주를 따돌리고 놀려대던 아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곱추라고 놀려대던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려왔다. 그때 느꼈던 슬픔과 외로움이 다시 일듯 하다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석주는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 하며 학교를 다녔다. 방학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그 두려움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그러니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

 

석주에겐 위로 누나와 형,그리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있다. 맏이인 누나는 학교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고 누나가 동생들을 길렀다. 동생들이 큰뒤에는 남의집 식모살이를 하여 살림을 보탰다. 석주의 형과 동생은 공부를 아주 잘했다.석주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게의 점원이 되었다. 형을 가르치기도 벅찼던 어머니는 공부를 못하는 석주까지 가르칠수가 없었던 것이다.

 

석주도 누나처럼 어머니를 도와 형과 동생 뒷바라지를 했다. 석주는 점원으로 있다가 시장에서 행상을 했다.석주가 번돈은 모두 형과 동생의 학비로 들어갔다. 동생이 대학을 졸업했을때 석주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석주는그제서야 자신을 위해서 돈을 모았다. 그때까지는 결혼도 하지 못했다.불구자에다 많이 배우지도 못한 석주에게 시집 오겠다는 여자가 없었던 것이다.

 

석주는 3년동안 돈을 모아 시장에다 작은 가게를 열었다. 가게는 제법 잘됐다.석주를 좋아하는 단골 손님이 꽤 많았다. 돈도 잘벌고 성품이 참좋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다. 석주는 서른네 살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다. 석주보다 세살 아래였는데 소박하고 성실한 여자였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2년 동안 별 탈없이 잘살았다.아기를 못가져 근심이 되기는 했지만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2년 후인 서른여섯이 되던해에 큰 불행이 닥쳐왔다. 석주가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던 친구의 보증을 섰는데,그만 그 친구가 부도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석주는 가게를 팔아서 그 친구의 빚을 갚았다.졸지에 빈털털이가 되었다.

 

석주는 다시 행상을 시작했다.생활이 어려웠다. 그러자 아내의 마음이 조금씩 변해갔다.남편한테 자주 불만을 터트리고 싸움을 걸었다. 아내의 불평불만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석주는 모두 자기 탓이다 싶어 참고 참았다.그럴수록 아내한테 잘해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내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아내는 결국 집을 나가고 말았다. 그것도 다른 남자와 눈이 맞은 것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석주는 어머니 죽음도 자기탓이라고 생각했다.자기가 가정을 잘못 꾸려나가 어머니께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다고 믿었다. 죄책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아내의 얼굴과 임종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서 떠올랐다. 아내를 향한 미움과 그리움,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잔잔히 일다가 사라졌다. 석주는 아주 고요한 마음으로 아내와 어머니를 지켜 보았다.

 

어머니 마저 돌아가신 뒤,석주는 절망에서 헤어날수 없었다. 입에 잘 대지도 않던 술로 세월을 보냈다.시장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며 위로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시장 사람들 중에 방헌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석주보다 몇 살위였고 난쟁이였다. 두사람은 성품도 비슷했으며 같은 불구자라 친형제 보다 훨씬 더 친하게 지냈다. 방헌수도 시장에서 행상을 했다.

 

 방헌수는 마음이 무척 넓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불구자였으나 의연했다.게다가 기품이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얕보지 못했다. 그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또, 묘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의 관상을 잘 보는 재주였다. 여간해선 남의 관상을 봐주지 않았는데, 그가 관상을 보고 하는 얘기는 언제나 적중했다.

 

석주가 친구로 인해 가게를 날리기 한달 전이었다. 하루는 장사를 마치고 나서 방헌수가 할말이 있다며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두 사람은 저녁밥을 먹은 다음, 다방으로 갔다. 할말이 있다던 방헌수는 선뜻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형님, 하실 말씀이 뭔가요?" 석주가 궁금해 하는 문밑으로 물은 뒤에야 방헌수는 입을 열었다.

"아우,내가 관상을 좀 보는 거 알지?"

"그럼요, 형님이 용하신 거 제가 한두 번 겪어 봤나요."

"그런데 내 여태까지 아우 관상을 한번도 안 봐줬어. 아우 역시 내게 뭘 물어 보지도 않았고."

"그동안 뭐 별로 어려운 일이 없었으니까 그랬지요."

"내 오늘은 아우 관상이나 봐주려고 하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한다. 석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방헌수와 가장 친하게 지내면서도 자기의 관상을 봐달라고 하지 못했다. 행여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불행이 다시 찾아오리라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방헌수는 석주의 관상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아우 관상은 참 특이하네. 보통 사람 상이 아닐세. 초년운과 말년운이 전혀 상반되는 사람은 처음 보네. 초년은 날개 부러진 봉황이요. 개천에 떨어진 용이나 마찬가지로구먼.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나. 알아주는 사람도 하나 없고. 아우는 만인을 가르치는 스승이 될 사람이야. 옛날 같으면 큰 도인이 됐을거야. 아우가 스님이 되었다면 아주 고명한 스님으로 많은 사람한테 존경을 받을 텐데…….

 

관상을 보는 법 중에 유년법이란 게 있다네. 몇 살에 어떻게 되는가 알아보는 법이지. 사람의 운은 열네 살까지는 주로 귀에 나타난다네. 열다섯부터 서른 네살까지는 이마가 큰 작용을 하지. 서른다섯부터 마흔까지는 눈과 간문이라는 데 나타나고. 간문이란 눈꼬리하고 귀 사이라네."

 

방헌수는 손가락으로 자기의 간문을 가리켜 보인 다음에 계속 말을 이었다.

 

"마흔한 살에서 쉰까지는 운이 코로 들어. 쉰 살부터는 쉰 아홉살까지 운은 코하고 입 사이로 오고. 예순 살부터는 입하고 턱에 있다네. 또 사람의 얼굴을 상정, 중정, 하정으로 나누지. 상정이란 이마야. 중정은 눈썹 아래에서 코끝까지라네. 하정은 코 아래, 입과 턱이야. 상정엔 초년운, 중정엔 중년운, 하정엔 말년운이 깃들지. 

 

자네 이마는 움푹 들어갔어. 귀는 너무 얇고. 그래서 초년에 고생이 많았다네. 한데, 중정과 하정은 매우 잘생겼어. 눈썹, 눈, 코, 입, 턱 모두 빼어나게 좋아. 간문이 좀 약한게 흠이지. 나머지는 특츨해. 서른일고 여덟 운은 눈동자에 있네. 자네 눈은 매우 귀한 눈이야. 게다가 번쩍번쩍 광채가 뿜어 나오고.

 

서른 일곱 살이 되면 자네 운이 크게 바뀔거네. 귀인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돼. 서른일곱에 맞는 대운은 정말 굉장해. 날개 부러진 봉황이 상처가 아물어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격이야. 개천에 엎드려 때를 기다리던 용이 풍운을 만나 승천하는 거와 같지. 그후로는 평생 큰 복을 누리게 되네. 자네 복은 여느 사람들 복하고 달라.

 

세상 사람들은 돈 잘 벌고, 출세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걸 대복으로 여기지. 자네 복은 그런 세간의 복이 아니네. 하늘이 내려 주시는 것이야. 그런데 아우, 호사다마라는 말 들어 봤지?  좋은 일에 마가 끼듯이, 큰 복이 올때도 흉화를 입는 경우가 있어, 혹 자네한테 한두달쯤 후에 나쁜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게나. 내 생각엔 머지 않아서 화를 입을것 같네. 그런 일이 있으면 마음 단단히 먹고 견뎌야 하네. 많이 괴롭겠지만, 그 고통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