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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탄소년단 만든 방시혁 대표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

    지난 26일, 방시혁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동문 자격으로 축사를 하고 있다. 방 대표는 이 축사에서 자신의 행복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미지 출처 : 서울대학교]

    방탄소년단을 키워낸 방시혁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졸업 축사가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방 대표는 26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동문 자격으로 축사를 했습니다. 방 대표는 이 학교 미학과 출신입니다.

     

    많은 언론에서 방 대표의 축사 내용을 부조리에 대한 분노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실제 그는 이날 축사에서 부조리에 분노하고 맞서 싸워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바란다고 졸업생에게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방 대표의 행복론입니다. 방 대표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이 행복이라고 정의한 소소한 일상의 한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다음은 방 대표가 후배들에게 주는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여러분 스스로가 어떨 때 행복한지 먼저 정의를 내려보고, 그러한 상황과 상태에 여러분을 놓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정의하지 않은, 남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정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시간에 소소한 일상의 한순간 한순간들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무엇이 진짜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지 고민하십시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남이 정해준 여러 가지 기준들을 좇지 않고, 일관된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십시오. 본인이 행복한 상황을 정의하고, 이를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소명이 되어 여러분의 앞길을 끌어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여러분의 행복이 상식에 기반하길 바랍니다.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고 본인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 바깥세상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유지하고, 자신과 주변에 대해 애정과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관심 속에서 여러분의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것들을 해결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상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자신의 행복을 좇는 것은 세상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학교의 졸업생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방시혁 대표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 전문입니다. 

     

    존경하는 오세정 총장님, 여러 교수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이신 졸업생 여러분들과 가족, 친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 방시혁입니다.

     

    오늘은 날씨조차 여러분들의 졸업을 축하하듯 화창한 것 같습니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교의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다는 건 무한한 영광이기에 총장님의 축사 제안을 덜컥 수락해 버렸지만 사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정할 수 없는 기성세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또 무엇보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첫걸음을 내딛는 여러분께 해드릴 유의미한 이야기가 제게 있는지 우려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졸업 축사란 것은 결국 연사가 졸업생에게, 혹은 선배가 후배에게, 자신이 인생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꼰대’스러움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오늘은 최대한 솔직한 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제 자랑도 좀 하게 될 것 같고, 제 삶의 여정 중 여러분과 맞닿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198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공부를 조금 한다고 하면 법대를 가는 게 당연히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1지망도 법대였습니다. 법학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때의 저는, 어떤 열정도 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목표와 성공의 요건에, 별 자의식 없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력고사는 다가오고, 점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재수를 각오하고 법대를 쓰느냐, 법대를 포기하고 안전하게 서울대를 가느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습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렸듯 법학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재수는 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법대 다음으로 커트라인이 높은 과를 가려니까, 뭔가 되게 없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과들을 뒤지다가 미학과를 발견했습니다. 법대를 기대하셨던 어른들의 반대는 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떨어지면 재수는 없다’라고 반 협박조로 (대응해) 무사히 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미학과가 저와 너무 잘 맞았다는 것입니다. 미학이 뭘 하는 학문인지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수업들이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원래 예술도 좋아했었고 탁상공론을 좋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미학과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중학교 때부터 해왔던 음악은 뒷전으로 밀렸고 음악을 직업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게 됐습니다.

    그랬던 제가 어쩌다 음악 프로듀서가 되었을까요? 사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많은 분들께서 서울대생이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까지는 대단한 에피소드나 굉장한 결단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시는데, 사실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런 결정적인 순간은 없었습니다. 그냥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음악을 하고 있었다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정말 허무하죠?

    저는 그렇게 허무하게, 뭔가에 홀린 듯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1997년부터 직업 프로듀서의 길에 들어서 박진영 씨와 함께 JYP라는 회사를 창업하고, 그 후 독립해서 지금은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프로듀서로 살고 있습니다. 우스운 게, 독립한 후에도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왜 회사를 차리겠다고 생각했는지 선택한 이유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서두부터 제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제 인생에 있었던 중요한 결정들, 훗날 보면 의미심장해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것. 때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사실 큰 그림을 그리는 야망가도 아니고,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도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구체적인 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에 따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저와 방탄소년단,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행보를 보면 이런 말이 믿기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에서 2년 연속 톱 소셜 아티스트상을 수상했고, 4만 석 규모의 뉴욕 시티필드 공연을 순식간에 매진시켰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래미 어워드에 시상자로 초청받으면서 또 하나의 ‘최초’ 기록을 세웠습니다. 외신에서는 감히 ‘유튜브 시대의 비틀즈’라는 과찬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재 전 세계 주요 지역 스타디움에서 월드투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까지 올라가게 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저는 영광스럽게도 빌보드가 뽑은 25인의 혁신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저희 회사 역시 엔터테인먼트 업계 혁신의 아이콘이자 유니콘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마 뉴스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접하셨을 때 이런 성공 뒤에는 분명 원대한 꿈이 있었거나, 방시혁은 엄청난 야심가여서 큰 미래를 그려놓고 이를 차근차근 실현해가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야심은 둘째치고 꿈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실 겁니다. 매번 하고 싶은 것들을 아무렇게나 하고 그렇게 선택하다 보니 어쩌다 이 자리까지 왔다? 물론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잠깐 바꿔 볼게요.

    여러분! 저는 꿈은 없지만 불만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이 표현을 찾아냈는데 이게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 같습니다. 오늘의 저와 빅히트가 있기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분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불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는 타협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 더 잘 할 방법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튀기 싫어서, 일 만드는 게 껄끄러우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게 싫어서, 혹은 원래 그렇게 했으니까, 갖가지 이유로 입을 다물고 현실에 안주하는데요. 전 태생적으로 그걸 못 하겠습니다. 제 일은 물론, 직접적으로 제 일이 아닌 경우에도 최선이 아닌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게 되고 그럼에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만이 분노로까지 변하게 됩니다.

    아마도 ‘위대한 탄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의 멘토로 저를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참가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분노를 폭발시키는 제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굉장히 많이 비호감이었죠? 그때 이후 그런 형태의 분노 표출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고, 이제는 그렇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지만 그 모습이 제가 ‘불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설명하기에 좋은 예인 거 같아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그런 저의 성정은 제 작업과 제가 만든 회사의 일에도 똑같이 발휘됐습니다. 최고가 아닌 차선을 택하는 ‘무사안일’에 분노했고, 더 완벽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데 여러 상황을 핑계로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는 관습과 관행에 화를 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를 가장 불행하게 한 것은 음악 산업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산업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불공정과 불합리가 팽배한 곳이었습니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이 세계를 알아가면서 점점 저의 분노는 더 커졌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이용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곡가로 시작해 음악 산업에 종사한 지 21년째인데, 음악이 좋아서 이 업에 뛰어든 동료와 후배들은 여전히 현실에 좌절하고 힘들어합니다. 음악 산업이 안고 있는 악습들, 불공정 거래 관행, 그리고 사회적 저평가. 그로 인해, 업계 종사자들은 어디 가서 음악 산업에 종사한다고 이야기하길 부끄러워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여전히 음악 회사를 일은 많이 시키면서 보상은 적게 주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객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케이팝 콘텐츠를 사랑하고, 이를 세계화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팬들은 지금도 ‘빠순이’로 비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아이돌 음악을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업계와 사회가 나서서 찬양하고 최고의 예우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왜 이런 대우를 하는지, 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고 화가 납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며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우리 아티스트들은 근거 없는 익명의 비난에 힘들어하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우리 피, 땀, 눈물의 결실인 콘텐츠 역시 부당하게 유통되거나 저평가되며 부도덕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수단이 되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분노하게 되고 이런 문제들과 싸워 왔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저는 혁명가는 아닙니다. 다만, 음악 산업의 불합리, 부조리에 대해서 저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외면하고 안주하고 타협하는 것은, 제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닙니다. 원대한 꿈이 있거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제 눈앞에 있고 저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그 분노가 제 소명이 됐다고 느낍니다. 음악 산업 종사자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온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화를 내는 것. 아티스트와 팬들에 대해 부당한 비난과 폄하에 분노하는 것. 제가 생각하는 상식이 구현되도록 싸우는 것. 그것은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 한 음악에 대한 저의 예의이기도 하고, 팬들과 아티스트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이기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제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 같습니다.

     

    저는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일 학업과 업무에 시달리던 고단한 몸을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뽀송뽀송한 이불 속에 들어갈 때 행복하지 않나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복한 것들도 있지만,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행복한 상황도 있을 겁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여러분 스스로가 어떨 때 행복한지 먼저 정의를 내려보고, 그러한 상황과 상태에 여러분을 놓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저의 경우는, 두 번째 행복의 정의에 입각해서, 저의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특히 우리의 고객인 젊은 친구들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더 나아가 산업적으로는,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킴으로써 음악 산업을 발전시키고 종사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하는 것.” 그래서 그 변화를 저와 우리 빅히트가 이뤄내는 게 저의 행복입니다.

     

    자, 이제 돌아갑시다.

    제가 앞에서, 저는 구체적이거나, 커다란 꿈이 없다고 했죠? 맞습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어떤 기업이 될지, 방탄소년단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심지어는 제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에 대해서도 그림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저의 모습을 외부에서 보면 커다란 꿈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듯 보일 겁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저와 제 주변 사람들, 제가 봉사해야 하는 고객들의 행복까지 빚어낸 매우 이상적인 상황으로 보일 겁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듯, 이런 시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저는 별다른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니 많은 분들께 위로와 행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제 꿈이 아니라 제 불만이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꿈 없이 살 겁니다. 알지 못하는 미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쓸 바에, 지금 주어진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음악 산업이 처한 수많은 문제들을 개선하는 데 매진할 것이며, 방탄소년단은 아시아 밴드, 혹은 케이팝 밴드의 태생적 한계라고 여겨지는 벽을 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겁니다. 저 역시 이런 일을 수행하는 데 부끄럽지 않게 끊임없이 반성하고 제 자신을 갈고닦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큰 꿈이 없다고 구체적인 미래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정의하지 않은, 남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정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시간에 소소한 일상의 한순간 한순간들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무엇이 진짜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지 고민하십시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남이 정해준 여러 가지 기준들을 좇지 않고, 일관된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십시오. 본인이 행복한 상황을 정의하고, 이를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이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소명이 되어 여러분의 앞길을 끌어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여러분의 행복이 상식에 기반하길 바랍니다.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고 본인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 바깥세상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유지하고, 자신과 주변에 대해 애정과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관심 속에서 여러분의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것들을 해결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상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자신의 행복을 좇는 것은 세상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학교의 졸업생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두서없는 저의 축사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대학이라는 일생에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정을 잘 마무리하신 여러분, 다시 한 번 격하게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될 인생의 다음 단계들을 행복 속에 잘 살아내시고 10년 후, 20년 후에, “내가 제법 잘 살아왔구나”라고 자평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제 묘비에 “불만 많던 방시혁, 행복하게 살다 좋은 사람으로 축복받으며 눈 감음”이라고 적히면 좋겠습니다. 상식이 통하고 음악 콘텐츠와 그 소비자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그날까지, 저 또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갈 겁니다. 격하게 분노하고, 소소하게 행복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 빌 게이츠가 지혜를 얻는 비밀 ‘씽크 위크’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 [이미지 출처 : 플리커 Steve Jurvetson (www.flickr.com/photos/jurvetson/4368494308), CC BY 2.0 라이센스]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로 20년 이상 세계 1위 부자에 올랐습니다. 

     

    30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출연해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을 만들어 세계 최고의 공익사업가 반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생각하는 주간(Think week)을 갖는 이로도 이름이 나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1년에 한 두 번씩 북서 태평양에 인접한 삼나무 숲 속의 작은 2층 집에 머물며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시간을 보냅니다. 

     

    이 때만큼은 가족과도 떨어져 지냅니다. 빌 게이츠 판 무문관이라고 할까요.

     

    씽크 위크를 통해 빌 게이츠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회사 경영과 관련한 생각을 정리한다고 합니다. 회사나 재단을 통해 세계로부터 쏟아지는 수많은 제안도 검토합니다.

     

    [[IMAGE|260|center|빌 게이츠의 아이디어 비결 중 하나는 바로 1년에 1~2회 갖는 '생각주간(Think week)'이다. 이 기간에 그는, 문명과 고립된 숲 속의 작은 집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나 회사 경영 등에 대해 생각한다. [이미지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지 출처 : 게이츠노트] ]]

     

    빌 게이츠는 1995년의 씽크 위크에서 IT 기업 역사상 가장 통찰력 있는 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짧은 글 인터넷 물결(Internet Tidal Wave)을 씁니다.

     

    그는 이 글을 토대로 마이크로소프트 임직원들에게 다가오는 인터넷 서비스 물결이 기술과 산업 전반에 지각 변동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브라우저를 개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태블릿PC도 씽크 위크에서 구상했다고 합니다.

     

    [[IMAGE|261|center|마이크로소프트사의 태블릿PC는 빌 게이츠의 '생각주간'에서 나온 아이디어 중 하나이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

     

    빌 게이츠가 생각주간을 보내는 공간은 특별한 게 없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한 빌 게이츠의 ‘무문관’은 특별한 게 없습니다. 자신에게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책들이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고, 다른 벽에는 빅토르 위고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다이이트 음료가 들어 있는 작은 냉장고가 거의 유일한 전자제품이구요. 하루 두 끼를 먹으며 빌 게이츠가 하는 일은 생각하고 읽고 쉬는 것입니다. 

     

    빌 게이츠는 씽크 위크의 효과를 깨달은 뒤 마이크로소프트의 간부들도 1년에 2주씩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 ‘카페 교회’ 운영하는 목사님

    서울 상일동 주택가 골목에는 에클레시아라는 작은 카페가 있습니다.

     

    이 카페의 주인이자 바리스타이며 유일한 직원은 양광모 목사님(바로세움정립교회) 입니다.

     

    양 목사님은 일주일에 6일은 카페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미사리의 공장 건물 2층에 있는 15평 남짓한 예배당에서 20여 명의 교인들과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어로 ‘밖으로 불러 모으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교회를 가리킬 때 씁니다.

     

    양 목사님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분입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양 목사님의 목회 생활은 순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서울 이문동 동안교회와 지구촌교회 수석 무목사를 거쳐 교인수 1000명이 넘는 정릉제일교회 담임목사를 맡았습니다. ‘잘 나가는 목사’라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양 목사님은 늘 괴로웠습니다.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교회에 손가락질하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자체가 불신받고 있었습니다.

     

    양 목사님은 2012년 부임 2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내려놨습니다. 대안이 될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를 찾아가는 5년의 여정을 담은 책 ‘고백 에클라시아’(선율 펴냄)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떠오르는 행복의 시작이었지만 위기의 현실을 극복하고 어두운 미랠르 밝게 비출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

     

    올바른 목회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고 영성을 고양시켰습니다.

     

    양 목사님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건강한 교회”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서점 겸 카페의 형태로 출발한 미국의 세이비어 교회를 모델로 삼아 카페 교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2012년 카페 에클레시아의 문을 열었고 같은 해 바로세움정립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들른 사람 가운데 바리스타인 목회자의 말 한 마디가 필요한 이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페 운영을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과 커피 품질 평가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목회자 이기 전에 자영업자로 시장 조사와 매장 운영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2012년 문을 연 카페의 운영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수입은 카페를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해 결국 택시 운전대를 잡는 ‘투잡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는 자신이 섬겼던 교회의 교인을 만날까 노심초사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목사와 택시운전사를 대하는 것은 너무도 다름을 뼈저리게 느꼈겠지요.

     

    양 목사님은 택시 운전을 통해 모든 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섬기는 법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또 낮췄을 것입니다.

     

    2년 쯤 시간이 지나자 카페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페운영을 하면서도 당연히 주일 예배는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은 불교신자인 한 단골손님의 도움으로 2015년에 마련했습니다. 

    그 손님이 자신이 운영하는 미사리 식품공장 건물 2층에 15평 짜리 예배당을 마련해준 겁니다. 

     

    가수 노영심씨는 카페 에클레시아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저에게 카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공간입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여전히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제게 하나님과의 끈만은 놓지 않게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표현도 못하고 말도 예쁘게 하지 못하고 투정만 부리는 저지만, 마음속에 목사님과 사모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항상 느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버티며 이겨 내고 있습니다. - 단톡방 에클레시아 멤버 노영심." (<고백 에클레시아>, 37쪽)

  • 어둠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빛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 마르틴 루터 킹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1)

    “온 힘을 다해 생명을 보살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응답합니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세요. 여러분 안에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창조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의 원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듯이 신성도 그렇게 만물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빙엔의 예언자로 불리는 힐데가르트가 한 말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한평생 수녀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삶을 산 그에게는 많은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예언자, 신비주의자, 생태주의자, 신학자, 의사, 치유가, 자연주의자, 작곡가, 미술가 등등.

     

    힐데가르트는 1098년 독일 라인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고, 교황권과 황제권이 맞서기 시작하며, 그런 혼란에 대한 대안으로 극단적 금욕을 주장하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형제자매들이 뛰어놀 때 어린 힐데가르트는 꽃과 식물을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모가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면 자신 안에 보이는 그림을 보는 게 재미있고 좋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가 3살 때부터 본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은 특별한 환시였습니다.

     

    부모님은 힐데가르트가 여덟 살일 때 한 수도원에 맡깁니다. 열 번째 아이를 십일조로 바치겠다고 했던 교회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 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신자들과 성직자들 안에 기초를 놓아 주신 불타는 정의가 희미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내가 태어났고 부모님은 탄식하며 나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보내진 곳은 일반 수녀원이 아닌 디시보덴베르크산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백작의 딸로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던 유타가 살고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유타로부터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수도원은 당시 어린 소녀들이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시편 암송, 악보 읽기, 악기 연주 등을 배우면서 수녀가 되기 위한 수련 기간을 거친 뒤 열다섯 살 때 수녀가 됐습니다. 1136년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힐데가르트는 수녀들의 만장일치로 수녀원장이 됩니다.

     

    수도원장으로 헌신하면서도 힐데가르트는 기도와 묵상을 지속했는데 그녀가 42세쯤이었을 때 신비한 환상을 겪게 됩니다.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