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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운조사(2) - 나이 아홉에 4번의 죽음을 겪은 효자

    "개운조사(1) 보러가기(클릭)"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개운조사만큼 신비로운 일화를 많이 남기신 고승도 없을 것입니다.  

     

    조사는 1790년 경상북도 상주군 개운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속성은 김 씨였고 모친의 성은 양 씨 셨는데, 조사께서 모친의 태에 들 때 부모님께서 ‘태양 같은 금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 합니다. 

     

    조사는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천애 고아가 됩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어요.  

     

    다행히도 조사는 외삼촌댁에 몸을 의탁하게 되는데, 자식이 없던 외삼촌 부부는 어린 조카를 친자식처럼 정성껏 기릅니다. 하지만, 외숙과 외숙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속세의 행복을 맛보는 것도 잠시, 외삼촌께서 갑자가 돌아가시고 외삼촌의 3년 상이 끝나자마자 외숙모마저 세상을 뜨게 되니 그때 겨우 조사의 나이 아홉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천지 아래 붉은 몸뚱이 하나, 혈혈단신이 되고 만 것이지요. 

     

    조사는 혼자서 외숙모의 3년 상을 치렀습니다. 산소 앞에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까지 했다고 해요. 이 모습을 본 이웃 사람들은 조사의 효심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조사를 ‘양효동(楊孝童)’이라 불렀습니다. 외삼촌의 성이 양 씨이니, 마을 사람들은 조사를 ‘양 씨의 효자 아들’로 여긴 것이지요. 

     

    채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부모님과, 부모님과 진 배 없었던 외숙부모님을 차례로 여읜 조사의 외로움과 슬픔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것이었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길은 없지만 삶은 참으로 무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없을까요. 조사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에끼 이놈!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호통뿐, 조사는 어느새 마을에서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조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답을 찾지 못한 의문을 가슴에 깊이 품곤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물었습니다. “죽지 않는 길은 없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스님 한 분이 대답을 해 주십니다. 먼 옛날 ‘싯다르타’라는 태자가 어느 날 왕궁의 동서남북 사대문 밖으로 유람 차 나갔다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삶을 직시하고는 왕의 자리도 버리고 출가하여 큰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출가가 뭐예요?”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 중이 되는 것을 말한다.” 

     

    스님의 대답에 조사의 마음은 두둥실 부풀어 올랐습니다. 비로소 앞길에 광명이 비치는 기분이었을까요? 얼마나 기뻤던지 마치 ‘새 장에서 벗어난 새’와 같았다 합니다.  

     

    외숙모의 제사를 마치지 마자 조사는 바로 문경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찾아갑니다. 혜암 선사(慧庵禪師)를 은사로 모시고 머리를 깎으니, 그때 조사의 나이 열세 살이었습니다. 

     

    봉암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의 하나로, 보우국사를 비롯한 수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한 수행도량입니다. 오늘날에도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면 일반인에게 산문을 열지 않고 철저하게 청정한 수행 기풍을 이어오고 있지요. 

     

    조사는 바쁜 행자 시절, 짬만 나면 봉암사 마애불을 찾았습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 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 가지를 받치신 마애불의 묵묵히 내려앉은 눈동자를 따라가노라면 유리알처럼 맑고 찬 계곡물이 햇빛에 찬란하게 부서졌습니다. 그 빛을 받아 환하게 밝으신 마애 부처님 앞에서 조사는 오랜만에 어버이의 품에 안긴 듯 다사로움을 느꼈습니다. 밝고 환한 마애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 마냥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연달아 어버이를 여읜 슬픔도 씻겨 가고, 그 물을 따라 흐르면 영원히 생사의 고락을 벗어나는 길이 보일 듯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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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말라야의 선인 라히리 마하사야(1)

    <<히말라야의 선인 라히리 마하사야와 그의 아내 이야기>>

     

     

    라히리 마하사야(Lahiri Mahasay, 1828-1895)를 아시나요? 마하사야는 전설의 요기 바바지의 가르침을 받은 히말라야의 선인(仙人)입니다. 

     

    오늘날 구도자들이 행하는 수행 방편 중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크리야 요가(Kriya-Yoga)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초반 출간된 파라마한사 요가난다(Paramahansa Yogananda, 1893-1952)의 자서전을 통해서 크리야 요가가 소개되지요. 그런데 마하사야는 바로 요가난다의 사조(師祖)입니다. 

     

    마하사야는 생전 20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이 유크테스와르(Swami Yukteswar Giri, 1855-1936)이고, 유크테스와르의 14명의 제자 중의 한 명이 요가난다입니다. 

     

    요가난다는 미국에서 진아실현회(SRF)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통신과정으로 크리야 요가를 배울 수 있게 하지요. 그런데 크리야 요가는 바바지가 전생에서 자신의 제자였던 라히리 마하사야를 히말라야 산속의 한 동굴로 이끈 뒤 그에게 전수해 준 것입니다. 

     

    마하사야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세속에서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스리마티 카시 모니’라는 여자와 결혼도 했습니다. 그런데 카시 모니는 자기 남편이 성자였다는 것을 전혀 몰랐어요. 단지 가난하게 살면서도 돈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남편이 늘 못마땅할 뿐, 그로 인해 바가지도 종종 긁었다고 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카시 모니는 남편과 함께 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납니다. 자기 머리 위에 아름다운 천사들이 떠 있는 꿈을 꾼 것이었어요.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더욱 놀라운 장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가부좌를 튼 채 방 한가운데에 떠 있고, 그를 둘러싼 천사들이 그를 향해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찬란한 광경에 넋이 나간 카시 모니는 여전히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하사야는 아내를 향해 “여인이여, 꿈이 아니다. 영원히 꿈을 깨라. 영원히”라고 말하며 서서히 방바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제서야 꿈이 아니고 현실임을 깨달은 아내는 감격에 겨워 남편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곤 그동안 남편을 구박해 온 자신의 행실에 대해 용서를 빌며 남편을 스승으로 모시겠노라 약조를 올리지요. 그러자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천사들도 오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날 이후 마하사야는 아내와 각방을 썼습니다. 매일 낮이나 밤이나 제자들과 같이 지내며 성자의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카시 모니는 남편을 빼앗긴 기분이었습니다. 비록 남편을 스승으로 모시겠노라 다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하사야는 스승이기 전에 자기의 남편이었습니다. 게다가 대 성취자와 함께 산다고 해서 먹고사는 모든 일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카시 모니 가슴엔 또다시 불만이 차곡차곡 싸여 갔고, 참다 참다 어느 날 그녀는 마하사야에게 또 이렇게 쏘아붙입니다. 

     

    “당신은 온종일 제자들하고만 함께 있어요! 처자식은 어떻게 할래요?! 제발 돈 좀 버세요!”

     

    마하사야는 한동안 아내를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추었어요. 아내는 순간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러다가 영영 남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과 회한에 떠는 카시 모니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때, 텅 빈 방 안에서 갑자기 커다란 음성이 울려 나옵니다.

     

    “그대는 그게 얼마나 헛된 일이라는 걸 모르는가? 또 나같이 형체가 없는 존재가 어떻게 재물을 모은단 말인가?”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겨우 정신을 차린 카시 모니는 제발 모습을 보여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남편의 모습을 다시는 못 볼까 봐 너무나도 두렵다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나는 여기 있네.”라는 말이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드니 남편의 모습이 보이는데,  남편의 머리는 천장에 닿아 있었고 눈은 타오르는 불길 같았습니다. 카시 모니는 또다시 남편의 발밑에 엎드려 하염없이 흐느꼈습니다. 마하사야는 흐느끼는 카시 모니에게 온화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내렸습니다. 

     

    “오직 성스러운 풍요만을 찾아라.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마라. 마음의 보화를 얻으면 필요한 물질은 저절로 생긴다.”

     

    그리고는 한 제자가 그녀에게 필요한 재물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정말로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들을 위해 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 부설거사, 파계 또한 깨달음의 길

    부설 거사에 얽힌 이야기는 수행에 승속이 따로 없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신라 때 고승인 부설 거사의 삶과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북 부안 내변산 월명암에 전해오는 한문 필사본 <부설전>에 담겨 있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은이는 구전되던 부설 거사의 이야기를 소설체로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부설은 출가승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출가했다 파계한 승려입니다. 부설 스님은 신라 때 불국사의 승려였다고 합니다. 스님은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부설 스님에게 당혹스런 인연이 생겨납니다. 지리산, 천관산, 능가산 등지에서 수도하고 오대산으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묘법을 얻고자 만행을 떠나는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김제시 부근을 지나던 세 도반은 불심이 깊다는 집을 수소문해 하룻밤을 지내게 됐습니다. 구무원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하룻밤 신세지고 떠나려했지만 비가 몇 날을 계속해서 내려 하는 수 없이 며칠을 묵게 됐습니다.

     

    스님들이 머무는 동안 불심이 깊었던 구무원은 스님들에게 자주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에게는 재색을 겸비한 묘화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묘화 낭자도 스님들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며칠 뒤 비가 그치고 부설 거사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묘화 낭자가 부설 거사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부설 거사에게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득도를 위해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에게 혼인을 해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부설 거사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묘화 낭자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차 도통하여 많은 중생을 구하실 스님이 작은 계집 하나 구해 주지 못한다면 어찌 큰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묘화 낭자는 혼인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목숨을 끊겠다고 했습니다. 자살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 딸을 보고 구무원도 부설 스님에게 매달려 애원했습니다. 부설 스님은 묘화 낭자의 목숨을 건 호소에 하는 수 없이 그녀와 혼인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도반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때 부설 스님은 도부재치소(道不在緇素) 도부재화야(道不在華野) 제불방편(諸佛方便) 지재이생(志在利生)라는 게송을 들려주며 도반들을 떠나 보냅니다. 

     

    도라는 것는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하얀 옷에 있는 것이 아니며, 번화로운 거리와 초야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이 하고자 하신 뜻은 중생을 이롭게 제도하는 데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부설 스님은 거사가 됐습니다.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뒤 아들과 딸을 얻어 등운과 월명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비록 파계하고 집안을 이뤘지만 부설 거사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바닷가에 지은 초막에서 지낼 때나 나중에 내변산에 지은 암자에서 살 때나 늘 수행에 몰두했습니다.
     

  • 부처님이 알려주신 욕 먹지 않는 법

    부처님께서 어느 날, 걸식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그날은 어떤 바라문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라문은 부처님을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너는 육신이 멀쩡하면서 왜 남의 집에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느냐? 네 힘으로 일을 해서 먹고 살아라. 나는 너에게 음식을 줄 수가 없다.”

     

    경전에는 이렇게 점잖은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쌍욕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 사람이 그렇게 거친 욕설을 하는데도 부처님께서는 그 바라문을 보며 빙긋이 웃기만 하셨습니다.

     

    욕하는 데 웃으면 욕하는 사람은 더 화가 나게 마련입니다. 그 바라문은 더 심한 욕을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 표현으로 하면 “웃어?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이 XX야” 수준의 폭언을 했겠지요.

     

    부처님은 잠자코 듣고 계시다가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질문과 바라문의 답변입니다.

     

    “당신 집에 가끔 손님이 오십니까?” “물론 온다”

    “그럼 손님이 올 때 가끔 선물을 갖고 오기도 합니까?” “그렇지”

    “만약에 그 손님이 가져온 선물을 당신이 받지 않으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당연히 선물을 가져온 사람 것이지”

     

    부처님은 다시 빙긋이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나를 욕했는데 내가 그 욕을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욕은 누구 것이 됩니까?”

     

    그 순간 그 바라문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무릎을 꿇고 “부처님 잘 알아 들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집안에 모시고 들어가 좋은 음식을 차려 극진하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2)

    "하늘이 열리면서 머리 위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밝은 광채가 쏟아져내렸습니다. 그 빛은 나의 심장 전체와 가슴을 불꽃처럼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시편서, 복음서, 그리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의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계시도 함께 받았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듣는 것을 말로 전하라"라는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계시를 무시했습니다.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심하게 앓아눕게 되자 신의 계시를 거역한 것 때문임을 깨닫고 자신이 본 환상을 글로 쓰기로 결심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디시보덴베르크의 수도원장인 쿠노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일생 동안 스승이며 조언자이자 친우였던 수도승 볼마르의 도움으로 26개의 묵시가 담긴 〈스키비아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키비아스는 ‘길을 알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책이지요.

     

    그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 천사 루시퍼의 타락, 아람과 이브의 원죄, 노아를 비롯한 유대 선지자들의 행적,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초대 교회 순교자들, 앞으로 일어날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 등을 책에 담았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저술을 시작한 지 얼마 뒤에 쿠노는 힐데가르트의 작업을 마인츠의 대주교 헨리에게 보고했고 이는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까지 알려져, 교황은 종교회의를 통해 힐데가르트의 환상에 대해 논의한 뒤 저술을 허락하게 됩니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깨달음을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은 불교의 만다라 못지않게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계시를 받은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고 보석치료와 자연치유에 대한 의학 관련 책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작 범위는 방대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수녀였으나 활동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불의한 일에 대한 비판에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부자들은 물론 교회 권력도 그의 날선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심지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에우제니오 3세 교황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 물어뜯으려고 으르렁대거나 닭처럼 바보같이 한밤중에 꼬꼬댁거리는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부자들에게 가진 것을 굶주린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수녀원을 찾아온 황제를 향해서도 잘못한 일을 꾸짖었습니다.

     

    수도공동체인 수녀원을 관리하는 일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두 개의 수녀원을 세웠고, 이 수녀원은 독립적으로 운영됐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각지에서 그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도왔습니다. 병자와 가난한 이들은 그에게서 특별한 돌봄을 받았습니다. 치유에 관심이 많아 약초 등을 활용한 자연요법을 연구했고, 보석을 통한 치료법도 만들었습니다. 음악도 주요한 치유 도구였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여성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였지만 그는 여성임을 자랑하라고 수녀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수녀들에게 하루에 한 잔씩 포도주를 마시라 고도 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서요. 

     

    힐데가르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디지보덴베르크 수녀원에 사는 수녀님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습니다. 수녀가 되어 함께 살고자 하는 여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녀원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힐데가르트는 새 수녀원을 짓기로 하고 루페르츠베르크라는 산에 새 수녀원을 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1)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3)

  • 그림자 없는 선사 수월스님 (2)

    "위대한 스승들 - 수월스님 (1)" 보러가기(클릭)

     

     

    수월스님의 출가 전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불교 사전에 따르면 수월 스님은 1855년에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겨 작은 벌레까지 함부로 괴롭힌 적이 없었으니 자신이 돌보던 소를 얼마나 끔찍이 아꼈을  것인지 짐작이 됩니다.

     

    탁발 나온 스님들이 날이 저물면 수월 스님이 있던 방에서 묵고 가곤 했는데 그 인연으로 출가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수월 스님은 당시로는 스물 아홉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홍성군에 있던 천장암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천장암은 경허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한동안 보림 수행을 했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불교 그리고 스승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때 천장암에는 경허 스님의 속가 친형인 태허 스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습니다. 수월 스님은 태허 스님을 만나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됐습니다.

     

    태허 스님은 경허 스님을 수월 스님의 법사로 지정해 가르침을 받도록 했습니다. 수월 스님은 절에서 말없이 일만 했다고 합니다. 다른 점은 법사인 경허 스님이 가르쳐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낮이나 밤이나 일할 때나 밥을 먹을 때도 수월 스님은 다라니를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태허 스님이 외출했다 밤늦게 천장암에 돌아오던 길에 신비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 때 천장암 입구에는 방앗간이 있었는데 불빛이 새나오는 것을 보니 누가 일을 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했습니다. 물레방아에 물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는데 방아 찧는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허 스님은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물레방아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지만 방앗공이는 위에서 멈춰 있었고, 그 아래 돌확 속에 수월 스님이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일을 하다 지쳐 잠이 든 것이지요. 태허 스님이 깜짝 놀라 수월 스님을 끌어내자 그제야 방앗공이가 확으로 떨어져 방아를 찧기 시작했습니다.

     

    태허 스님은 그로부터 얼마  뒤 수월 스님에게 절 일을 잠시 쉬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수월 스님은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이레째 되는 날 천장암이 있던 마을에서 갑자기 “불이야”하는 외침과 함께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습니다. 천장암 쪽에 불길이 보였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달려나와보니 불길은 천장암 쪽에서 솟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게 집을 불태우는 불이 아니라 수월 스님의 몸에서 뿜어나온 빛입을 알게 됐습니다.

     

    그 불은 수행자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빛, 방광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수월 스님은 3가지 특별한 힘을 얻게 됐다고 합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았으며, 잠을 자지 않아도 됐고, 아픈 사람을 금새 치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월 스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찾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수월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천장암을 떠나 금강산과 지리산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수월 스님의 삶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를 했고, 밤이면 고요히 선정에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월 스님을 찾았지만 눈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수월 스님은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IMAGE|73|center|수월스님 진영. 이미지 출처 : 불교닷컴]]

     

    "위대한 스승들 - 수월스님 (3)"로 이어집니다. 보러가기 (클릭)

  • 그림자 없는 선사 수월 스님 (1)

    수월 스님 이야기를 하려면 그 분의 스승이신 경허 스님 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경허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를 크게 일으킨 대 선승입니다. 경허 스님은 조선 시대 억불숭유로 선(禪)의 맥이 끊겼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해 선을 회복시킨 선불교의 중흥조라 평가받는 분입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은 깨달은 뒤에 홀연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생전에 주색잡기 소문 등으로 ‘원효’ 못지않은 일화를 많이 남겼던 그는 말년에 머리를 기른 채 이름을 ‘박난주’로 바꿔 6년간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둔해 서당 훈장 노릇을 하다가 입적했다.” (조현 휴심정)

     

    경허 스님에게는 세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 세 제자는 ‘경허 스님의 세 달’이라고 불렸습니다. 법명에 모두 달 월자가 들어간 수월, 혜월, 만공(법명은 월면) 세 스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수월 스님은 경허 스님의 세 달 가운데 첫번째 달 맏상좌입니다.

     

    만공 스님과 혜월 스님에 대한 기록은 많습니다. 하지만 ‘세 달’ 가운데 맏상좌인 수월 스님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는 게 거의 없습니다.

     

    수월 스님의 가르침을 전해받아 눈을 뜬 선승이 없지는 않겠지만 수월 스님의 가르침 가운데  전해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수월 스님의 행적을 추측이라도 해볼 수 있는 책이 한 권 있기는 합니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 1996년에 출간했고, 2004년에 다시 펴낸 <물 속을 걸어가는 달>(학고재)입니다.

     

    이 책에는 수월 스님이 남긴 깨달음에 이르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실려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수월 스님의 가르침의 정수라 볼 수 있는 그 법문을 소개합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해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 겨.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나는 순전히‘천수대비주’로 달통한 사람이여. 꼭 ‘천주대비주’가 아니더라도 ‘옴 마니 반메 훔’을 혀서라도 마음 모으기를, 워쩌깨나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혀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맨큼 혀야 되는 겨."(<물 속을 걸어가는 달> 16p)

     

    [[IMAGE|73|center|수월스님 진영. 이미지 출처 : 불교닷컴]]

     

    "그림자 없는 선사 수월스님 (2)"로 이어집니다. 보러가기 (클릭)

  • 명상의 목적

    많은 이들이 명상을 합니다.

    명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명상은 기도, 참선, 묵상, 마음공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예전엔 명상을 성직자나 종교인이 주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학교, 병원, 직장 등에서도 명상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학습 효과가 높아지고,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며, 직장의 업무 효율을 높여준다는 연구 결과들도 많습니다.

     

    물론 명상이 그런 효과를 갖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명상의 목적은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명상을 하는, 아니 명상을 해야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건 다름아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나아가 우리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이 세상의 존재자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명상의 목적은 깨달음에만 있지 않습니다. 명상의 진정한 목적은 그런 깨달음에 기반해 참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그런 존재로 살아가려 노력하다보면 깨닫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찌보면 최고의 명상법은 삶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로 명상입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명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할 때가 바로 명상 상태입니다.

     

    성경 에베소서에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도 신구의(身口意)로 선업을 지으라고 합니다. 인디언들은 우리 안에서 다투는 검은 늑대와 흰 늑대 가운데 흰 늑대에 먹이를 줘 키우라고 합니다. 그러니 명상을 할 시간이 없다고 안타까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뜻, 부드러운 말, 친절한 행동으로 하루를 지내는 노력을 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