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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밥을 덜게 하소서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교육받아야 합니다.“

     

    나눔 단체 JTS의 생각입니다.

    아, 진실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무슨 군더더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신영복 교수의 말씀도 떠오릅니다.

    “…창 밖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달콤한 잠을 잘 권리가 없다……“

     

    ARS라도 누르는 마음, 그것이 사랑 자비의 실천이겠지요.

    나눔의 평화!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제 밥을 덜어 그들과 나누게 하소서.”

  • ‘괜찮아’는 미래의 언어입니다

    '괜찮아'라는 말은 상대방을 신뢰하고 기대한다는 아름다운 언어이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괜찮아’는 미래의 언어입니다.

     

    ‘왜 그랬니?’

    ‘이거 어떻게 할 거야?’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추궁과 질책을 담고 있는

    과거의 언어라면

     

    ‘괜찮아’는

    그 존재에 대한 신뢰와 기대의 언어이며,

    기다림의 언어입니다.

     

    제가 한 잘못된 일에 잔뜩 주눅 들어있는 아이에게, 자녀에게, 친구에게

    가장 다정한 말투로, 표정으로, 눈길로 말해줍니다.


    “얘야, 괜찮아.”

    “야, 괜찮아, 임마!”

    “아빠, 괜찮아요.”

    “여보, 괜찮아.”

     

    그리고

     

    눈을 맞춥니다.

    꼬옥 안아줍니다.

    따뜻하게 손을 잡아줍니다.

                     .

                     .

                     .

    자주 쓸수록 참 괜찮은 말

    ‘괜 ․ 찮 ․ 아’

  • 아이들의 좋은 심성을 기르는 법

    미국의 작가이자 육아상담가로 활동했던 도로시 로 놀테는 시와 글, 강연 등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자녀를 기르는 데 영감을 줬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배운다(Children learn what they live)’는 시는 특히 유명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criticism, they learn to condemn.

    야단맞으며 자라는 아이는 비난하는 것을 배웁니다.

     

    If children live with hostility, they learn to fight.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는 싸움을 배웁니다.

     

    If children live with fear, they learn to be apprehensive.

    두려움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pity, they learn to feel sorry for themselves.

    동정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자기 연민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ridicule, they learn to feel shy.

    놀림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는 수치심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jealousy, they learn to feel envy.

    질투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시기심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shame, they learn to feel guilty.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라는 아이들은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encouragement, they learn confidence.

    격려를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tolerance, they learn patience.

    관대함 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인내심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praise, they learn appreciation.

    칭찬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acceptance, they learn to love.

    포용하는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approval, they learn to like themselves.

    무엇이든 허용되는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recognition, they learn it is good to have a goal.

    인정받으면서 자라는 아이들은 목표를 갖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sharing, they learn generosity.

    나눔을 보며 자라는 아이들은 관대함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honesty, they learn truthfulness.

    정직함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진실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fairness, they learn justice.

    공정함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정의를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kindness and consideration, they learn respect.

    친절과 배려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다른 이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security, they learn to have faith in themselves and in those about them.

    안정감을 느끼며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friendliness, they learn the world is a nice place in which to live.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 세상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 실리콘벨리의 컴퓨터 없는 학교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컴퓨터와 아이패드가 없는 학교가 있습니다. 그린우드 학교가 그곳입니다. 

     

    이 학교 학부모 가운데는 구글이나 애플과 같은 세계 최고의 IT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부모들이 컴퓨터와 IT 관련 도구가 차단된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셈이지요. 

     

    그린우드의 교육 목표는 여느 학교와 조금 다릅니다. 

     

    “상상력, 자연에 대한 사랑, 탐구심을 길러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와 조화로운 태도로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을 기르는 것”이 이 학교의 교육 목표입니다. 

     

    이 학교가 추구하는 가치도 다른 학교와 많이 다릅니다. 물론 배우는 즐거움과 성취는 당연히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학교의 특별함은 다양한 영적, 문화적 전통의 경험, 다른 이를 존중하고 공감, 자연과 지구에 대한 경외심, 한교 안팎의 공동체에 대한 봉사 등에 높은 가치를 두는 데 있습니다. 

     

    아이들을 지적, 감성적, 사회적, 육체적,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모든 교과가 맞춰져 있습니다.  

     

    그린우드는 아이들에게 특히 부, 명성, 지위와 같은 가치가 아니라 연결, 공감, 정직, 봉사 등을 강조합니다.  

     

    그린우드 학교는 특히 아이들이 컴퓨터, 아이패드, 휴대폰 등에 접근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너무 일찍 컴퓨터 기기를 접하는 것이 아이들의 성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린우드 교사들은 태블릿이나 휴대폰을 갖고 노는 것보다 보디페인팅이나 그림 그리기, 무용 등과 같은 예술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배우는 게 아이들의 성장에 훨씬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린우드 학교에 가보면 아이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며, 수공예품을 만들고, 시와 소설을 쓰는 등의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IT 기기의 사용을 무조건 막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나이에 맞게 아이들이 그런 도구를 접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는 미국의 IT 산업을 이끌고 있는 많은 리더들의 생각과도 비슷합니다. 페이스북을 만든 마이크 저커버그도 자신의 딸에게는 13살까지 페이스북을 접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린우드 학교는 8학년제입니다.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합쳐진 곳이지요. 

     

    이 학교는 발도르프 교육을 하는 학교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이 어떤 것이냐고요? 

     

    청계자유발도르프학교의 홈페이지에는 발도르프 교육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919년 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루돌프 슈타이너에 의해 시작된 발도르프 학교 혹은 슈타이너 학교는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조화롭게 발달하도록 돕는 것을 교육 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이와 같은 교육 이념 위에 현재 전 세계 800여 개 학교가 설립 운영되고 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이 일정한 주기를 거쳐 성장함을 믿으며, 어린이들이 천성적으로 부여받은 모든 능력을 고르게 발달시킬 수 있도록 모든 감각들을 자극하는 총체적이고 예술적인 경험들을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성과도 좋습니다. 

     

    북미발도르프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발도르프식 수업을 받은 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94%나 됩니다. 북미지역 전체 평균(65%)에 비해 30% 가까이 높습니다.

  • 티베트의 탁월한 자녀 교육법 3가지

    나라마다 아이들을 올바로 키울 수 있는 훌륭한 교육 전통이 있습니다.

     

    그 전통은 출세를 목표로 하는 현대 교육과는 아주 다릅니다.

     

    티베트의 자녀교육법이 그렇다고 합니다. 대한 불교조계종 대원사 현장 스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전하고자 합니다. 

     

    티베트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기를 세 단계로 나눈다고 합니다. 7세까지가 1단계, 14세까지가 2단계, 21세까지가 3단계입니다.

     

    처음 7세까지는 암탉이 알을 품듯이 키우라고 합니다. 그저 사랑하고 보살피기만 하라는 것이지요. 

     

    아이는 이때 부모로부터 받은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게 아닐까 합니다. 

     

    다음으로 14세 까지는 원수처럼 키우라고 합니다. 선악을 구분할 줄 알고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도록 엄격히 교육한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단계인 21세까지는 친구처럼 키우라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 돌보고 의지하고, 주고받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지낸다는 것이지요. 부모가 자녀를 독립적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다면 세상 어느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 이태석 신부의 수단 제자, 한국에서 의사됐다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뒤를 이을 의사가 탄생했습니다.  

     

    이 신부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도왔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한국에 와서 의사가 됐습니다.  

     

    인제대 의대 졸업생인 토마스 타반 아콧(33) 씨는 올해 초 이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21일 제83회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해 의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토마스는 2019년부터 인제대 부산백병원에서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과정을 거친 뒤 남수단으로 돌아가 이 신부님처럼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토마스와 한국과의 인연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토마스는 교육과 의료봉사를 위해 남수단의 가난한 마을에 온 이 신부를 만났고 복사단원(천주교에서 사제의 미사 집전을 돕는 평신도)으로 미사 집전을 도왔습니다.  

     

    [[IMAGE|173|center|'남수단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故 이태석 신부. 토마스씨는 故 이태석 신부를 만나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캡쳐]]

     

    이 신부가 진료를 다닐 때도 곁에서 도왔습니다. 붕대를 감아주거나 상처를 소독할 때 환자를 잡아주는 등 보조 역할도 했습니다.  

     

    이 신부는 그런 토머스를 눈여겨보다 2008년 한국에 귀국한 뒤 한국에서 공부할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제안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언어 장벽을 넘을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부모님의 격려에 힘입어 토마스는 2009년 12월 한국에 왔고 연세대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 공부에 힘을 쏟았습니다. 

     

    토마스는 한국어 가운데 특히 속담이 재미있었다고 말합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속담으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를 꼽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국에 온 지 한 달쯤 뒤에 이 신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토마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었습니다. 임종 하루 전 병실을 찾았을 때 산소마스크에 의지해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이 신부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이 신부가 선종한 뒤 토마스는 그의 뜻을 이어 2012년 김해시에 있는 인제대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한자까지 섞인 의학 용어를 익히는 것은 외국인인 토마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농구를 하며 땀을 흘리거나 개그콘서트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학업 스트레스를 날려보냈다고 합니다.  

     

    의사 고시도 한 번에 붙은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낙방했을 때 잠깐 힘들기도 했지만 스스로 ‘노력파’라고 부를 정도로 끈기 있게 공부해 올해 마침내 의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토마스는 외과 전문의가 되려고 합니다. 수단에 가장 필요한 의사가 바로 외과 의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엄마, 친구가 하늘나라 갔대”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 코너에 12월10일에 실린 글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금요일 오후였다. 다른 것이라고는 늘 비가 오는 이곳 캐나다 밴쿠버의 겨울답지 않게 무척이나 화창하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처럼 비가 갠 주말을 어떻게 즐길까 고민하며 아들을 맞으러 학교에 갔다. 학교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학부모들. 멀찍이 바라봤을 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때 학교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활짝 웃으며 다가가는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평소 금요일이라면 주말에 놀 생각에 더 활짝 웃으며 나오던 아이가 아니었던가. 아들은 나를 보자마자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진짜 슬픈 소식이었어. 진짜, 진짜, 진짜 슬픈 소식이야. 그 친구가 하늘 나라에 갔대."

     

     

     

    [[IMAGE|228|center|caption]]

     

    느닷없는 비보

     

     

    그 친구라 함은, 지난 학년부터 아들과 한 반이었던, 9월에 시작된 새로운 학년에 첫 짝궁이었던 그 친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근무력증을 앓고 있어 휠체어에서 생활했고, 옆에는 장애학생 지원 선생님이 늘 함께 했지만, 아들의 그 친구는 학교생활에 대부분 참여했었다.

     

    통합교육이 원칙인 이곳 캐나다에서 아이들은 조금 더 몸이 불편한 학생들과 생활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이 친구도 학급 활동에 늘 함께 했다. 지난해 그 친구의 생일 땐 반 전체에서 작은 축하파티도 열었었다. 반에서는 혼자 책을 읽기 힘든 이 친구에게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읽어주곤 했는데 두어 달 전 아들은 자신이 책 읽어줄 차례라며 영어발음을 연습해 갔었다. 몇 주 전 자원봉사로 따라간 현장학습 때도 장애학생 지원 선생님과 함께 참가했던 아이였다.

     

    내게도 충격이었다. 순간 눈물이 쏟아졌고, 먹먹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주친 선생님들의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아들과 같은 반 친구들 중 몇몇도 눈가가 촉촉했다. 아이를 픽업하러 온 부모들 중 몇 명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마음이 조금 추스러지자, 아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들에게는 처음 겪는 상실. 그것도 2년 동안 같은 반을 했던 친구가 10살의 나이에 하늘나라에 간 것을 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아들에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담임선생님이 건넨 종이

     

     

    아들이 비보를 접한 것은 등교하자마자였다. 교실에 들어온 담임선생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몇몇 친구들은 곧바로 눈물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어 담임선생님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종이를 꺼내며 아이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 종이를 둘게요. 수업 도중에라도 마음이 힘들고 슬픈 기분이 들면 언제든지 가져다가 쓰고 싶은 것을 아무 거나 쓰세요. 그림을 그려도 되고, 하늘나라에 간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도 되고, 너무 슬퍼서 화가 나면, 화나는 마음을 표현해도 돼요. 그리고 수업 중에 갑자기 눈물이 나거나, 도저히 수업에 집중이 안 될 땐 도서관에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울고 와도 돼요."

     

    아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이날 그 어떤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수업에 집중하라거나, 이럴 때일수록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도, 그 친구를 위해서 우리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느꼈을 심리적 충격을 이해해주고 그 슬픔을 충분히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함께 울어줄 뿐이었다. 선생님들 역시 슬픔을 숨기지 않았다.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오늘은 마음이 너무 슬퍼서 수업하기가 힘들다"고 아이들에게 털어 놓았고, 지원 나온 대체교사가 이날 수업시간에 함께 했다.

     

    상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심리적으로 깊은 충격과 슬픔을 남기는 경험이다. 특히, 어린 시절 생애 처음으로 겪는 상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여러 차례 맞닥뜨리게 될 또 다른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해 준다.

     

    상실을 맞닥뜨릴 때 정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슬픔을 충분히 표현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 안에서 밀려오는 슬픔을 힘들다고 해서 부인하거나 '괜찮다'고 포장해 버리면, 그 슬픔은 마음 더 깊은 곳으로 꽁꽁 숨어들어간다. 숨어든 슬픔은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오랫동안 일상을 방해하곤 한다.

     

    이런 면에서 선생님의 대처를 듣자 안심이 되었다. 이날 아들과 반 친구들은 수시로 종이를 가져다가 슬픔을 표현했고, 도서관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한바탕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IMAGE|229|center|caption]]

     

    교장선생님의 메일 한 통

     

     

    그리고 그날 오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교장선생님은 전체 학부모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다시 한 번 비보를 공식적으로 전했다. 그리고 당부했다.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이 다른 이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뜻을 존중해 달라고. 유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말이다. 

     

    이어 교장선생님은 학교는 신속히 밴쿠버 교육청의 위기지원팀(VSB Critical Support Team)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교육청의 위기지원팀은 학교 공동체에서 재난이나 구성원의 죽음 등 정신적인 상처를 남기는 일이 발생했을 경우, 심리적 문제를 비롯한 각종 어려움들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한다.

     

    학생뿐 아니라 슬픔에 빠진 선생님들도 돕고, 때로는 대체 인력을 파견하기도 한다. 충격과 슬픔에 빠진 학교를 체계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제든 아이들이 들를 수 있도록 상담센터를 열어 두었고, 학교와 교육청 소속의 상담사들이 도움을 제공할 채비를 마쳤다고 알렸다.

     

    또한 교장선생님은 강조했다. 이번 일로 인해 아이들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물을 때 주의 깊게 들어주고 정직하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나아가 학교에서도 언제든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 묻고 이야기 하며, 슬픔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집에서도 함께 해달라고 당부했다.

     

    교장 선생님이 보낸 메일을 보니 여전히 먹먹한 나의 마음이 조금은 따스해지는 듯 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터부시하지 않고, 삶의 일부분으로 죽음을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자세, 상실을 경험할 때 생기는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 유가족들을 존중하는 태도, 공동체 차원에서 상처를 극복해 가려는 노력. 아들의 학교는 가슴 아픈 상실을 경험할 때 반드시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차근차근 해내며 애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모습들은 친구를 잃은 경험이 나와 내 아이를 비롯, 그 친구와 가까워 충격과 슬픔이 더 큰 몇몇만이 스스로 감당해내야 할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은 시린 마음 한 켠에 훈훈함과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물론, 아무리 함께하고 서로 위로하더라도 상실을 경험해내는 것은 분명 힘들고 아픈 일일 것이다. 그 충격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육청까지 나서 함께 슬픔을 나누고 도우려는 모습들을 보니 이를 통해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그리고 학부모들도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애써 축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며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분명 이 슬픔을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친구가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길, 유가족들에게도 평화가 함께 하길 기도드린다.
     

  • 다시 몬드라곤을 생각한다

    청년 실업률이 높다고 합니다. 

    바늘구멍만 한 취업의 문을 통과한다고 해도 평탄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년의 직장인들 가운데 일부는 기업 경영이 어려워지면 정리해고됩니다. 

    노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정부의 보조금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세상이 됐습니다. 

     

    모두가 생존의 두려움을 느끼는 시대라서 그런지 협동조합의 ‘롤모델’로 여겨지는 몬드라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 신부님이 가난한 이들의 자립을 위해 시작한 몬드라곤은 지금 스페인의 10대 기업 집단에 속할 정도로 큰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100개가 훨씬 넘는 협동조합 120개가 넘는 자회사 등 260여 개의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는 곳이지요. 3만 5천여 명의 노동자 조합원의 평균 연봉도 우리 돈으로 7000만 원이 넘습니다. 해마다 출자금을 쌓아 퇴직할 때 거액의 ‘퇴직금 ‘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업을 운영하지만 몬드라곤에는 해고가 없습니다. 몬드라곤이 설립된 1956년 이래로 단 한 명의 해고자도 없습니다.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로 수많은 은행과 기업이 파산하고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지만 몬드라곤은 급여의 80%를 지급하며 노동자를 재교육해 다시 취직시켰습니다. 그때 몬드라곤은 오히려 1만 4938명을 새로 채용해 고용을 늘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몬드라곤의 기업 목표가 고용 확대이기 때문입니다. 

     

    몬드라곤을 설립한 이는 돈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 아리에타 신부입니다. 그가 1941년 주임신부로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시골마을에 왔을 때 전쟁으로 마을은 폐허 상태였습니다. 사람들도 다 떠나고 없었습니다. 

     

    돈 호세 신부는 지역민들의 가난 극복을 위해 기술학교를 설립하고 졸업생과 지역민이 중심이 되어 석유난로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몬드라곤의 첫 협동조합 울고(ULGOR)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하나씩 회사를 만들어 지금 몬드라곤에서 운영하는 회사는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 4개 부문에서 260개가 넘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변함없는 단 하나의 원칙은 바로 고용 확대입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도 기업이므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또한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어려울 때 함께 나누고 실패한 이들에게도 또 다른 기회를 주며 공동운명체로 살아갑니다. 

     

    창립자인 돈 호세 신부는 몬드라곤에 대해 다름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정직성을 제도화하는 것, 나아가 인간의 위대성을 제도화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상입니다.” 

      

    몬드라곤의 성공은 이런 가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옛 ‘국민 신발’ 고무신, 동티모르 아이들의 희망이 되다

    고무신은 한때 ‘국민 신발’이었습니다. 

     

    종류는 그리 다양하지 않았지요. 검정 고무신, 흰 고무신,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동 고무신 정도가 종류의 전부였습니다.  

     

    운동화가 생산되면서 고무신은 한동안 가난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 아이들에 운동화를 사줄 때 가난한 집 아이들은 고무신을 신어야 했습니다.  

     

    그런 고무신이 동티모르 빈곤층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신발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동티모르는 산골마을로 갈수록 환경이 열악합니다. 고산지대의 아이들은 맨발로 산길을 다니며 커피콩을 줍고 두 시간을 걸어 등하교를 합니다. 발을 다치는 아이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이런 아이들을 돕기 위해 대구의 사회복지법인 가정복지회가 동티모르 어린이들에게 고무신을 보내는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착한고무신 보내기 프로젝트입니다. 

     

    도움을 주고 싶은 분은 월 1만 원씩 정기후원을 하거나 1켤레 당 3~5천 원 하는 고무신을 직접 사서 가정복지회로 보내주면 됩니다. 

     

    ‘착한고무신’은 동티모르 현지의 비영리 알롤라재단을 통해 어린이에게 전달됩니다.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린 이우영 작가는 착한 고무신을 손에 든 ‘기영이’를 캐릭터로 기부했고 대구에 본사를 둔 베트남 음식 프랜차이즈 ‘더포’는 계산서에 ‘기영이’ 스티커를 붙이면 1000원을 더 결재해 그렇게 모은 돈으로 ‘착한고무신’을 사서 보내고 있습니다. 

     

    고무신을 받은 아이들은 너무 좋아한다고 합니다. 가정복지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고무신을 신고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정복지회는 착한고무신 프로젝트를 아이들의 교육사업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입니다. 

     

    동티모르는 우리나라 강원도 크기의 작은 섬나라입니다. 인구 절반이 하루 0.88달러로 생활하고 5세 이하 어린이 절반이 체중미달을 겪고 있으며 초등학교에 다니는 비율도 56%에 불과한 곳입니다. 

  • 故 이태석 신부, 남수단 교과서에 실리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인술을 펼치다 세상을 떠난 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남수단의 국정교과서에 실렸습니다. 

     

    남수단 교육부는 지난 9월 이 신부님의 삶을 수록한 교과서를 펴냈는데 2019년 새 학기부터 일선 학교에 보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슈바이처’라고 불린 이 신부님의 삶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3쪽, 중학교 시민권 과목에 교과서에 2쪽에 걸쳐 소개됐습니다. 

     

    교과서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사제가 되어 남수단의 가난한 이웃들과 사랑을 나눈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그는 남수단에서도 열악한 지역인 톤즈에 작은 병원을 세웠고, 하루 300명의 환자를 돌봤다. 학교를 지어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80여 개의 마을에 백신을 공급하기도 했다”  

     

    “그의 병원은 가톨릭과 개신교, 무슬림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을을 파괴한 군인들도 치료를 받았다”  

     

    남수단 정부는 이 신부님을 기리기 위해 2015년부터 신부님의 삶을 교과서에 싣는 것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뎅뎅 호치 야이 남수단 교육부 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교과서에 실을 수 있어 큰 영광”이라며 “의사·음악가·선교사로서 10년 넘게 희생과 봉사를 몸소 실천하신 이 신부님의 삶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산이 고향인 이 신부님은 어릴 적 집 근처의 성당을 놀이터로 삼아 자랐습니다.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셨다고 합니다.  

     

    이 신부님은 성당에서 벨기에 출신 다미안 신부를 다룬 영화를 보고 사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부근의 한 섬에서 한센인을 돌보다 자신도 같은 병에 걸려 49세에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인제대 의대에 진학한 이 신부님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졸업 뒤 사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2001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이 신부님은 곧바로 남수단 톤즈로 떠났습니다.  

     

    이 신부님은 그곳에서 전쟁으로 인해 다치고 굶주리고 병에 걸린 이들을 치료하고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