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들의 시대16 명천의 양신과 묘법대
초가을이었다. 아침 저녁에는 바람이 꽤 서늘했다. 벽운 선생은 명천을 운학산으로 데려왔다. 명천인 묘법대의 석굴에서 정진했다. 묘법대는 관음봉 중턱에 있었다. 하루는 벽운 선생이 혜원이에게 묘법대와 개심사엘 다녀오라 일렀다.
"지금 빨리 가서 명천일 만나고, 개심사에 들러 한 열흘 지내고 오너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혜원인 운학산 주능선을 타고 묘법대로 향했다. 발걸음이 바람처럼 가볍고 빨랐다. 발바닥이 채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강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위로 밀어 올리곤 했다.
혜원은 달려가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생각했다. 고요히 선정에 든 명천의 모습이 보였다. 네 사내가 개심사 쪽에서 묘법대로 올라오는 모습도 떠올랐다. 그들한테서 삿된 기운이 강하게 뿜어 나왔다. 그들은 무공을 닦는 사람들이었다. 공력이 대단했다.
명천은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는 묘법대로 온 이후 음식과 잠을 끊었다. 머지않아 양신이 완전한 형체를 갖고 태어날 참이었다.
이런 때에 심신이 흔들리면 공부가 허사로 돌아간다. 자칫 큰 위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주변이 번잡하지 않도록 누가 잘 지켜 줘야 한다.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석주와 필섭을 돌보느라 백학봉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혜원을 대신 보냈다.
묘벋대로 올라오는 사람을은 인상이 좋지 않았다. 앞장 선 사내는 눈빛이 매우 독했다. 또 두 번째는 음험했고, 세 번째 사람은 날카롭고 냉정해 보였다. 맨 뒤의 사내는 안광(眼光)이 아주 강렬했다. 번갯불같이 번쩍였다. 넷 중에서 공력이 첫째였다. 소주천이 열려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묘법대가 분명했다. 거기서 무공을 연마할 모양이었다. 각자 등에 배낭을 짊어진 것으로 보아 며칠 묵어 갈 것 같았다.
혜원이 묘법대에 이르렀다. 명천인 혜원이가 온 줄도 모르고 굴 안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혜원인 명천을 깨우지 않고 굴 앞 공터에 앉아 사방을 둘러봤다.
묘법대엔 새끼줄이 둘리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공부를 방해할까봐 출입을 금한 것이었다.
새끼줄 안쪽과 굴에는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진기가 물씬 감돌고 있었다. 혜원의 눈에 사방에서 이곳으로 맑은 정기가 뻗쳐 오는 게 보였다. 새끼줄 바깥쪽의 기운은 안쪽과 확연히 달랐다. 흉하고 탁한 기운이 넘실댔다.
묘법대에 충만한 진기는 끊임없이 명천의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 기운을 받아 명천의 마음과 정신과 몸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단에 잉태된 양신은 출신할 날 만을 기다렸다.
네 사내는 혜원이보다 20분쯤 늦게 올라왔다. 모두 20대로 보였다. 앞장선 사내가 다짜고짜 새끼줄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저어, 잠깐만요. 지금 저 안에서 수행하는 분이 계십니다. 여기는 수행 도량입니다. 그냥 돌아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혜원이 정중하게 제지했다.
" 뭐라고요? 우리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며칠 쉬었다 가려고 왔습니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사내의 말투가 곱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혜원을 향해 뻗쳐 왔다. 그러나 묘법대에 가득한 진기가 탁기를 밀어냈다. 이 탁기가 빛이 거울에 반사되듯 그한테 되돌아갔다. 그가 자신의 탁기를 맞고 어깨를 움찔했다.
"안 됩니다."
혜원이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 저 사람 무슨 공불 합니까? "
세 번째로 올라온 사내가 명천일 올려다보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 혜원인 명천이가 깨어날까봐 밖의 소리가 굴 안으로 못 들어가도록 얼른 자신의 기운을 보내 굴 입구를 막았다.
" 참선중이십니다. "
"우리도 조용히 사흘만 지내고 돌아갈 것입니다. 이 공터에서 지내면 됩니다. 굴에는 근처에도 안 가겠습니다."
네 번째 사내는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목소리엔 강한 공력이 실려 있었다. 이 공력도 그대로 사내한테 되돌아갔다.
헤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들이 새끼줄 안으로 들어오면 묘법대의 기운이 매우 혼탁해질 것이다. 그 혼탁해진 기운이 명천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 명천의 마음 밑바닥에는 아직도 번뇌의 뿌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군요. 다른 데 가서 쉬시지요. "
혜원이 온화한 음성으로 사정했다. 그리고 사내들이 왜 자뀨 묘법대에서 머물려고 하는지 헤아려 보았다. 사내들이 40 대의 다른 사내와 얘기하는 광경이 보였다.
' 지금 관음봉 묘법대의 정기가 활짝 피어나고 있다. 거기 가서 사흘 동안 좋은 정기를 받고 와라. 너희들의 공력이 크게 향상될 것이다. '
' 예, 스승님. 다녀오겠습니다.'
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두 번째 사내가 냅다 소리를 쳤다.
" 여기가 당신네 땅이오? "
" 개심사 땅이지요." 혜원의 음성은 여전히 온화했다.
" 보아하니 당신네는 스님도 아니잖아. 주인도 아니면서 왜 그래? " 사내는 반말로 나왔다.
" 주지 스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 우리도 오는 길에 허락을 받았다고. "
"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
" 당신이 어떻게 알아? 하여튼 우린 개심사 주지한테 얘기하고 왔어. 못 믿겠으면 가서 물어 봐. "
" 거짓말하지 마세요. "
" 거짓말? 내려가서 물어 보라니까. 자, 안으로들 들어가자고."
사내들이 막무가내로 새끼줄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했다. 혜원인 순식간에 양신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들의 눈에는 혜원의 양신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양신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사내들을 슬쩍슬쩍 앞으로 밀었다. 사내들은 두세 걸음씩 뒤로 밀려났다.
" 어어, 왜 이래! "
사내들은 당황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저희끼리 쳐다봤다. 네 번째 사내가 눈을 반쯤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눈을 번쩍 뜨고 혜원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 아하, 아가씨도 무공을 꽤 닦았나 보구먼요. 내공이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습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식으로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
사내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다른 세 사내는 혜원과 네 번째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혜원이한테 무슨 공력이 있다는 말인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
네 번째 사내는 말을 하면서 단전의 기운을 오른손에 끌어당겼다. 혜원의 눈에 기운이 움직이는 게 환히 보였다. 그러자, 묘법대에 가득 감도는 진기가 혜원일 보호막처럼 에워쌌다.
사내가 혜원일 향해 오른손을 날카롭게 뻗었다. 싸늘한 살기가 비수처럼 날아와 혜원일 둘러싼 진기와 부딪치더니 그대로 되돌아갔다.
사내는 자기가 보낸 살기를 맞고 뒤로 넘어졌다. 사내의 머리와 등이 땅바닥에 닿기 직전에 혜원이 자신의 기운을 보내 그를 부축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사내의 머리가 커다란 돌과 부딪칠 뻔했다. " 조심하세요. 그리고 괜한 짓 하지 마시고 어서들 돌아가세요. "
혜원이 쓰러진 사내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사내의 얼굴이 부끄러움과 분노로 흉하게 일그러졌다. 눈에는 사나운 독기가 서렸다.
사내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바로 그때였다. 사내의 스승이 보였다. 그가 자신의 제자한테 강한 기운을 보내 주었다. 엄청난 공력이 사내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내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자신감에 넘쳤다. 사내는 천천히 양손에 기운을 모았다가 동시에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벽운 선생이 혜원이 쪽으로 기운을 보내 주었다. 혜원일 둘러싼 진기의 막이 더욱 견고해졌다. 사내가 보낸 살기가 이번에도 사내한테로 되돌아갔다. 사내가 땅바닥에서 떼구르르 굴렀다.
사내의 도반들은 이 모습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감히 혜원일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얼른 사내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사내는 도반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일어났다. 혼자서는 서지도 못했다.
" 곧 괜찮아질 거예요. "
혜원이 사내한테 맑은 진기를 보내 주며 말했다. 그녀는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았다. 사도에 빠진 그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었다.
" 안 되겠어. 보통이 아니야. 그냥 돌아가자. 할 수 없어. "
쓰러졌던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반들에게 속삭였다. 사내들은 황급히 내려갔다.
" 잘들 가세요. 그리고 앞으론 싸움하는 술법일랑 닦지 말고 중생을 살리는 도를 닦도록 하세요. "
혜원이 그들의 등뒤에 대고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리고는 사내들이 저만치 내려간 뒤에 굴 입구를 막았던 기운을 거둬들였다. 명천인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선정에 들어 있었다.
혜원이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멀리 서해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의 정기가 묘법대를 향해 뭉클뭉클 밀려오는 것도 보였다. 밤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별들이 반짝였다. 바람도 잠들고 묘법대는 깊은 적막에 휩싸였다.
명천인 여전히 선정에 들어 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명천의 단전에 뜨거운 불기운이 움직였다. 단에 잉태된 원신이 성숙해져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삼매진화는 곧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붉은 광채가 굴 안을 가득 채웠다. 화광(火光)은 박으로도 치솟아 나왔다. 묘법대 일대가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이때는 차가운 기운으로 화기(火氣)를 잠재워야 한다. 그런데 명천인 그걸 깜박 잊고 있었다. 화기가 더욱 강성해지면 선태를 태워 버릴 판이었다. 원신의 태반인 단이 타버리면 이제까지 해온 공부가 허사로 돌아간다. 매우 위험했다.
" 도제, 불을 꺼야 해. 커다란 얼음덩이를 생각해. 그것을 떠올렸다가 단전으로 보내. "
혜원이 얼른 마음으로 이 말을 전했다. 명천이 혜원의 말을 알아듣고서 자기가 앉아 있는 굴이 얼음굴이라고 상상했다. 그러자 차가운 기운이 몸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냉기가 단전의 화기를 조금 식혀 주었다.
명천이 또 심안으로 둥그런 얼음덩이를 떠올렸다. 커다란 얼음덩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것을 또 단전에 끌어넣었다. 화기가 꽤 식었다.
" 한 번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해. " 혜원의 음성이 들려 왔다. 명천은 얼음덩이를 떠올리고 단전에 빨아들이기를 되풀이했다. 밖으로 뿜어 나오는 화광이 점점 엷어지더니 드디어 사라졌다. 명천은 그제서야 선정에서 깨어났다.
" 도제! "
" 어! 누님 언제 오셨습니까? "
" 낮에 왔어. " " 웬일이세요? " "스승님께서 보내셨지. 도제를 보살피라고. " " 아, 그럼 제가 아까 본 환상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나 보군요. "
" 누님께서 어떤 젊은이들과 다투는 걸 봤습니다. 무술하는 사람들 같던데..... " " 제가 정진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스승님께서 누님을 보내셨군요. " " 그렇지. "
" 한데, 왜 난데없이 무술 닦는 사람들이 여기로 몰려왔나요? " " 공력을 크게 얻으려고 왔었어. 이곳의 정기가 아주 빼어난 것을 알고서. " "무술인들이 그런 것까지 다 알아요? "
그는 여기 묘법대의 정기가 오늘 활짝 피어난다는 걸 알았어. "
명천인 좀 음산한 기운을 느꼈다. 삿된 사람들한테서 잘 풍겨나오는 기운이었다. 무술인들의 스승이란 자가 사도의 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제가 있는 것도 알았을가요? ' " 몰랐을 거야, 스승님께서 지켜 주시니까."
문득 명천의 눈에 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있는 곳도 보였다. 거기는 운학산 북쪽 기슭이었다. 40대로 보이는 사내의 지도를 받으며 젊은이 열댓 명이 내공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40대의 사내는 눈빛이 호랑이처럼 형형했다.
" 그 사람들도 운학산에서 사는군요. " " 보통이 아니야. 야심도 대단하고. " " 야심요? 무슨 야심을..... 무술계를 평정하려고요? "
명천이 재미잇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 아니, 그보다 훨신 더큰 야심이야. 어마어마한 신총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지. " " 정말요? " " 그럼. 그런 야심을 지닌 사람들이 꽤 많아. 운학산에도 몇 있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 운학산 정기가 워낙 빼어나니까. 그들은 운학산의 기운이 무척 탐나겠지. " " 우리가 공부하는 데 여러 가지 장애가 많겠군요. "
" 그래. 하지만 스승님께서 잘 막아 주실 거야. 우리도 더욱 열심히 정진해야 되고, 그들을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야." " 무엇이죠? "
우린 거꾸로 다 버려야지. 그들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해. 우린 낮은 사람이 되어 모두를 섬겨야지. "
" 결국 득도하는 수밖에 없군요. " " 그렇지. 무공이나 신총력으로 다툴 일도 아니고. "
명천은 자기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가슴이 뜨끔했다. 자기가 혜원이였다면 어찌하였을까 생각해 보았다. 젊은이들을 호되게 혼내 주고 싶었을 것 같았다.
" 스승님처럼 큰 도인들께서 사도의 무리를 일망타진 못 하나요? " 영계(靈界)의 사령(邪靈)들도 사람들 마음을 자꾸 탁하게 만들고, 훌륭한 도인들이 지금보다 몇 배 더 많이 나오면 달라지겠지. "
" 우리도 어서어서 부지런히 닦아야겠네요." 스승님을 만난 게 얼마나 큰 복이야. 동생, 이제 들어가서 정진해. "
" 누님은요? " 명천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만났는데 훌쩍 가려는 줄 알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명천에게 혜원인 친누나와 다름없었다.
" 나는 여기서 정진하다 아침에 개심사로 갈 거야. 열흘 동안 개심사에서 지내게 왰어. 종종 올라올게. "
혜원이 명천의 마음을 헤아리고 따뜻하게 말했다.
" 그러세요. 전 들어갈게요, 누님. "
명천인 다시 굴로 들어가 명상에 잠겼다. 혜원인 날이 환하게 밝은 뒤묘법대를 떠나 개심사로 향했다. 명천인 그때까지 선정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혜원이 개심사에서 1킬로쯤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웬 노루 한 마리가 길을 마고 엎드려 있었다. 노루는 혜원일 보더니 벌떡 일어나 머리를 주억거렸다.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혜원의 몸에 머리를 비비댔다.
혜워인 타심통(他心通)이 열려 잇어서 노루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노루한테 뭣 때문에 그러느냐고 심언법(心言法)으로 물었다. 노루가 혜원이 마음으로 전하는 말을 알아듣고 무어라 웅얼거렸다.
자기 새끼를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혜원의 심안에 어린 노루 두 마리가 보였다. 그중 한 마리가 덫에 걸려 있었다. 상처가 매우 깊어 보였다.
" 어휴, 굉장히 아프겠구나. 어서 가자. "
혜원인 어미 노루와 함께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덫에 걸린 새끼 노루는 고통스러워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어미가 혀로 새끼 노루의 등을 핥아 주었다. 너를 구해 줄 분이 오셨으니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혜원인 덫부터 풀어내고 상처를 살펴보았다. 피가 많이 엉켜 있었고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나쁜 병균에 감염되어 염증도 심했다. 염증 때문에 열도 높았다. 새끼 노루는 오한으로 몸을 떨었다. 상처 부위에 탁한 병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그것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혜원인 두 손에 진기를 모은 다음 상처 부위에 갖다댔다. 손에서 강한 진기가 뿜어 나와 탁한 병기(病氣)를 몸 밖으로 밀어냈다. 5분쯤 지났다. 새끼 노루가 신음을 그쳤다. 떨지도 않았다. 오한과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 이제 안 아프지? 상처도 곧 나을 게다. " 혜원이 어린 노루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어미 노루는 무척 좋아했다. 다른 새끼 노루도 그랬다. 그들은 혜원의 몸에 자꾸 머리를 비비댔다.
" 나는 이제 가야겠다. 잘들 지내거라. "
혜원이 노루들에게 심언법으로 작별 인사를 전했다. 노루들이 동시에 무러라고 중얼거렸다. 너무나 고맙다는 얘기였다. 어미 노루는 길에까지 와서 혜원일 배웅했다.
" 어린 새끼들 잘 길러라. 덫이나 독약을 조심하고. " 혜원이 헤어질 때 어미 노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루가 혜원의 말을 받아 또 뭐라고 웅얼거렸다. 다시 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 나는 기린봉에 있단다. 그리로 놀러 오렴. " 혜원이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어미 노루는 혜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새끼들한테로 돌아갔다.
산을 내려가는 혜원의 노리에 노루 가족이 자꾸 떠올랐다. 이렇게 만나 것도 예사 인연이 아닌 듯 싶었다. 전세에도 깊은 인연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혜원인 자신과 그들의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아득한 전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전세에 노루 일가는 사냥꾼이었다. 혜원인 스님이었다. 그녀는 만행을 떠났다가 깊은 산중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사냥꾼 일가가 부상당한 그녀를 구해 주었다.
사냥꾼 일가는 살생을 많이 한 응보로 몇 생에 걸쳐 짐승이 되었다. 짐승으로 환생을 거듭하면서 업보를 받아 왔다. 또 비록 살생을 많이 했지만 선량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 과보도 받았다. 혜원이 어린 노루를 구해 준 것도 인과응보였다.
이제 그들이 받아야 할 살생의 업보는 끝났다. 그러나 시련은 많이 남아 있었다. 혜원이 앞로 닥쳐올 시련에서 그들을 구해줘야 했다. 전세에 그들이 혜원일 보살펴 주었기 빼문이었다.
전세의 사냥꾼 일가는 혜원에게서 불법을 좀 배웠다. 그들은 언젠가 다음 세(世)에는 수도인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혜원이도 자기가 만약 크게 깨달으면 그들을 인도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들의 언약이 실현될 때가 가까웠다. 노루 일가도 머지 않아 백령자, 청령자처럼 수행자가 될 것이었다.
혜원인 무척 기뻤다. 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있는 곳을 한참 동안 올려다본 뒤에 다시 걸음을 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