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들의 시대14-불구슬
"도형, 일분만 참았다 주무세요." 눈이 도로 감기고 잠이 쏟아졌다. 필섭은 잠들지 않기 위해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간신히 백까지 센 다음 깊은 잠에 빠졌다. 이튿날, 필섭인 날이 훤하게 밝은 뒤에야 잠을 깼다. 눈을 뜬 뒤에도 기운이 너무 없어 한참 뒤척거린 다음에야 일어났다. 몸이 천근 만근은 되는 것 같았다. 밖에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머리가 핑 돌며 앞이 깜깜해졌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필섭인 아침 식사를 걸렀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필섭인 아침 식사를 걸렀다. 속이 메스꺼워 미숫가루도 토할것 같았다. 빈 속으로 가만히 누워서 단전 호흡만 했다. 너무 지쳐서 행공을 하기 어려웠다.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고 숨을 쉬면서 지난밤 일을 생각했다. 심안으로 보였던 그 노인은 누구인지, 자기가 왜 갑자기 이처럼 탈진했는지, 혜원이 왜 자기더러 1분만 깨어 있으라 소리쳤는지 궁금했다. 또, 보화이 얼굴이 떠올랐다. 이때, 혜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형, 마음을 흩뜨리지 마세요." 필섭인 심안에 떠오른 보화의 얼굴을 얼른 지웠다. 그리고 단전에 의식을 모았다. 단전이 둥그런 빛의 응어리로 보였다. 정신을 집중해서 두어 시간 단전 호흡을 하니 기력이 좀 회복되었다.
보화네는 10시쯤 초막을 떠났다. 보화는 작별 인사를 하며 두사람더러 상제봉 아래 자기네 수도장으로 꼭 놀러 오라고 했다. 필섭인 보화네를 배웅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보화 일행이 떠난 뒤, 얼마 안 있어 혜원이 초막으로 내려 왔다. 그녀는 필섭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침침한 방으로 들어가자 훤한 광채가 그녀를 둘러쌌다. 필섭인 눈이 부셔서 그녀를 정면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도형, 고생이 많으시네요. 큰일날 뻔하셨어요." 혜원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이런지 모르겠네. 기운이 쭉 빠져 버렸어. 몸이 바윗덩이처럼 무겁고. 참, 도제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어. 도제가 나한테 천리전음법으로 말을 전했나?" "네." 필섭인 혜원의 도력이 한층 높아진 걸 확인하고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제 아니었으면 깜박 큰 실수를 할 뻔했어. 낯선 사람들한테 나고 모르게 스승님 얘길 밝히려고 했네. 내가 어떤 여자들과 같이 있는 걸 다 보았구먼." '어쩌다 저절로 보게 되었어요." 필섭과 석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벽운 선생은 혜원의 도력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천안통을 얻은 것을 알고 두 사람은 그제야 깜짝 놀랐다. "그런데 밤중엔 나더러 왜 깨어 있으라고 했지?" "도형의 기운을 모조리 빼앗으려는 사람이 있었어요." "기운을 빼앗아? 어떻게?" "사도인들이 그런 짓을 잘해요. 신통력을 크게 얻으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기운을 훔쳐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래! 세상에 참, 희한한 일이 다있네. 한데 누가 내 기운을 뺏으려 했지?" "도형도 심안으로 보셨을 텐데요." "그 노인이?" "네" "그 사람이 누구야?" "그 여자분들의 스승이에요." "아니 ! 그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나를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그 사람은 천안통, 천이통 등 신통력을 꽤얻었어요. 제자들이 공부를 잘하는가 둘러보다가 도형을 발견했어요. 도형이 자기 제자들과 함께 있는 걸 발견하고 유심히 살펴봤어요. 도형의 근기가 대단한걸 알고 두려움을 느낀 거예요." "왜 날 두려워해?" "도형은 자기 제자가 될 사람이 절대 아니니까요. 도형이 도력을 얻으면 자기 일에 큰 장애가 되리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도형의 기운을 남김없이 빼앗가 가려 했어요." "그런데 왜 석주 아우는 그냥 내버려뒀지? 아우의 근기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데. 아우가 그 사람 수하에 들어갈 리도 없고." "그 사람은 석주 도형을 못 봤어요. 봤다면 석주 도형도 크게 다쳤겠죠." "왜 못 봤을까?" "스승님께선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방비를 하셨어요. 석주 도형은 번뇌가 없었기 때문에 감춰질 수 있었지요. 그런데 도형은 그 여자분을 보고 번뇌에 빠지셨어요. 그래서 스승님의 방비도 쓸모없게 되었지요."
필섭이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필섭은 고개를 푹 숙였다. 명색이 수도인이요, 사십이 넘은 사람이 여자로 인해 번뇌에 빠지다니, 너무나 창피했다. "스승님께 큰 죄를 지었네. 도제들한테도 면목없구먼. 혜원이 도제는 나 때문에 정진도 제대로 못 했겠어. 나잇살이나 먹었는데 내가 왜 이리 못난 짓을…….부끄럽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스승님께서도 다 이해하실 거예요. 도형께서 그 여자분한테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해요." "당연하다니, 왜?" "두 분게선 전세에 깊은 인연이 있었어요." "어떤 인연인가?" "몇 생에 걸쳐 아주 가까운 사이였어요. 부부였던 적도 있었고요. 또, 도반이었지요. 머지않아 도형께서 스스로 아시게 될거예요." "도제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런가 보네. 생전 처음 보는 여자한테 마음이 쏠리는게 참 이상했어. 한데 보화씨도 도심이 깊어 보이더니만 어째서 사도에 빠졌을까?" 필섭인 보화가 못내 안타까웠다 "그것도 인연이겠지요. 보화 씨와 그 스승도 전세에 아주 가까운 사이였어요! 그러나 보화씨와 스승은 뜻이 달라요. 보화씨는 불쌍한 중생들을 도와주려는 마음 하나고, 스승이란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을 가졌어요." "그럼 보화 씨의 훌륭한 자비심도 못된 스승한테 이용당하지 않겠어?" "지금은 그런 셈이지요. 하지만 언젠가 보화 씨도 우리처럼 정도로 들어올 거예요. 자기 스승이 가짜라는 걸 알아차리고요. 나중엔 우리 도반이 돼요. 이번에 스승님께서 그 인연을 맺어 놓으신 거지요." "보화 씨 스승 같은 사도의 무리를 우리 스승님 도력으로 물리칠 수 없나?" "스승님이나 큰스승님 같은 분들의 수가 너무 적어요. 사도인은 부지기수고요. 또, 스승님들께서 하시는 일이 너무 많아요." "하긴 그래. 비결에도 말세엔 사도가 창궐한다는 얘기가 나와. 많은 불도인, 선도인, 예수 도인들도 정도에서 벗어난다고 했어. 앞으로 사도의 무리가 더욱 날뛰겠구먼." "그럴 거예요."
"한데 스승님께선 무슨 일들을 하시나?'" 필섭이 오래 전부터 매우 궁금히 여기던 것이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스승님들께서 하시는 일을 감히 헤아리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세상에 쌓인 살기, 탁기를 거두시는 것 말예요." "그 악한 기운 때문에 뭇 사람들이 마음이 거칠어지고 온갖 흉흉한 일들이 일어나지. 비결에 이르기를, 말세 때엔 탁한 기운이 창성하여 사람들이 재물에 혼을 뺏긴다고 했어.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때가 온다고 일렀지. 그때, 인간 세상에 온갖 흉사가 생겨난다는 게야. 거짓 구세성인들이 벌떼처럼 나오고 잘못하면 천 명의 할아버지에 한 손자만 살아남는 비운이 닥친다네. 십 리에 한 사람 살아남기 어렵다더군." "스승님 같으신 성자들께서 일하시니 그리는 안 되겠지요." "큰 성인들께서 악기를 없애고 사람들이 도심을 기르면 한 할아버지에 열 손자가 살아남는 호운이 온다고도 했어." "그럴 거예요. 선인의 경지에 오른 성인들께서 온 세상을 다니시며 악기를 거두시니까요." 문득 필섭의 심안에 벽운 선생과 백령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른 성자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들은 깊고 깊은 어둠의 한가운데 서서 도도히 밀려오는 어둠을 거둬 내고 있었다. 그들 주변에서는 밝은 광채가 뿜어 나왔다. 그 광채가 점점 더 멀리까지 비췄다. 어둠 속에 갇혔던 사람들이 광명 속으로 나와 환호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튿날 벽운 선생이 돌아왔다. 필섭이 보화와의 일을 사죄드리자, 벽운 선생은 개의치 말고 좀더 열심히 정진하라 일렀다. 필섭인 평온을 되찾고 수련에 전념했다. 가끔 보화가 생각났지만,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석주는 바깥 세계를 까맣게 잊고 온종일 적정에 드는 날이 많았다. 유리처럼 투명한 의식을 오로지 단전에만 집중시켰다. 그러면 단전의 정기가 후끈후끈 달아올라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갔다. 하루는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단전에 채워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곧 단전을 가득 채우더니 독맥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머리까지 오른 다음에 다시 임맥을 따라 단전으로 내려왔다. 한번에 끝나지않고 계속 되풀이되었다. 나중에는 여러 경락을 타고서 손끝 발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자 몸과 마음이 더할 수 없이 가뿐해졌다. 몸이 저절로 떠오를 것처럼 들썩였다. 구름 위에 앉아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수련을 마친 뒤, 석주는 벽운 선생꼐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씀드렸다. "단전에 하얀 안개가 생겨서 온몸으로 돌아다닙니다. 이게 뭔지요?" "진기가 그리 보이는 게다. 이제 곧 단이 생긴다. 아주 중요한 때이니 마음을 태산처럼 갖고, 생각을 절대 흩트리지 말거라. 잘못하면 지금까지 한 공부가 허사로 돌아간다. 머지않아 네 음근과 고환이 아주 작아져서 바짝 오르라붙는다. 그러면서 원정이 원기로 화한다." 석주는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한 점 흔들림이 없도록 견고하게 지켰다. 의식은 단전으로 드나드는 호흡만을 꽉 껴안고 있었다. 호흡과 의식이 혼연일체가 되었다. 며칠 후였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살갗의 기공들이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근질거렸다. 단전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정수리를 통해서 싸아한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금 뒤에는 단전이 크게 떨렸다. 또, 갑자기 단전에서 천둥같은 굉음이 여러 번 울렸다. 굉음이 울린 다음에는 몸이 텅 비워지는 것 같았다. 단전이 광막한 허공으로 화했다. 단전 안에 또 하나의 우주가 생긴 기분이었다. 석주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호흡은 더욱 깊어졌다. 코로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숨이 직접 단전으로 드나드는 것 같았다. 마음은 지극히 황홀했다. 얼마 후 의식이 다시 명료해졌다. 그리고 단전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뿜어 나왔다. 단전의 광채는 연거푸 세 차례 치솟아 올랐다.
이때 벽운 선생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벽운 선생은 석주와 마주보고 앉았다. 석주는 더욱 깊은 선정에 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석주는 꼼짝 않고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숨조차 끊어진 것 같았다. 벽운 선생은 석주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석주의 의식은 자신의 단전으로만 향했다. 바깥으로 향한 모든 감각 기관의 문이 굳게 닫혔다. 한 점의 진기도 몸 밖으로 세어 나갈 수 없었다.
또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단전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쇳물을 녹이는 것 같이 펄펄 끓었다. 몸이 크게 떨리고 머릿속에서 굉음이 울렸다. 눈, 코, 입, 귀 등이 저절로 움직였다. 무엇이 이것들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몸이 들썩거리다가 앉은 채 튀어오르기도 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나도 석주는 마음을 흩뜨리지 않았다. 고요히 자기의 깊은 곳에 있는 한 점 불빛만을 지켜보았다. 얼마 후, 잠시 진정됐던 단전에서 진기가 빙빙 돌며 움직였다. 이튿날엔 둥근 구슬 같은 것이 단전에서 나와 단전 주위를 떠돌아다녔다. 이 구슬은 매우 뜨거웠다. 불덩이가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불구슬은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자꾸 돌아다녔다. 심장 쪽으로 올라가려다가 길이 막혀 도로 내려왔고,음근 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오곤 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다 결국 단전에 자리를 잡고 움직임을 멈췄다. 이때, 벽운 선생이 석주에게 말을 했다. "그 불구슬이 바로 단이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거라. 잠시 기다리면 또 움직이다 멈출 게다. 세 번째 다시 움직이거들랑 독맥을 환히 열어 놓거라. 그리고 구슬을 마음으로 끌어당겨서 독맥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게 하여라. 끌어당기고 올려보낼때 서두르지 마라. 고요히 지켜보며 그것이 조금씩 위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불구슬이 세 번째 움직였다 석주는 마음으로 그것을 꼬리뼈까지 끌어왔다. 그런 다음 서서히 위로 올려보냈다. 불구슬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뼛속을 통해 나아갔다. 그것이 지나가는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화끈화끈한 열기가 불구슬을 에워싸고 함께 움직였다. 불구슬이 척추를 지나 머리로 올라왔다. 이때 벽운 선생이 또 주의를 주었다. "머리에 계속 머무르게 해라. 그러면 시원한 옥로가 머리에서 입 안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 옥로를 삼켜서 가슴의 중단전으로 내려보내거라." 잠시 후 벽운 선생의 말대로 시원한 기운이 입 안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석주는 이것을 삼켜 중단전으로 보냈다. 머리에 있던 불구슬이 옥로로 화하여 모두 가슴으로 내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