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좋아하던 꼬마 철학자
어린 시절 무척 더운 지방에서 자랐다.
비도 자주 오지 않는 곳이라 여름밤은 고통스러웠다. 선풍기 하나로 열대야를 나기는 쉽지 않았다. 낮에 달궈진 시멘트벽은 새벽까지 더위를 뿜어냈다.
그런 여름날이면 옥상에 올라가 모기장을 쳤다.
바닥에 물을 뿌려 열기를 날려 보낸 뒤 얇은 이부자리를 펴면 옥상은 훌륭한 피서지로 바뀌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자정이 지나면 밤공기는 서늘해졌다.
‘옥상 침실’에서는 별을 보다 잠이 들었다.
하늘이 맑은 시절이었다. 봄날 황사는 있었지만 미세 먼지나 공기질과 같은 말 자체가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수많은 별이 자신을 드러냈다.
여름날 잠자리에 누워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별은 너무 아름다웠다.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이라 불렀다)은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등 학교에서 배운 몇 안 되는 별자리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어느 여름밤 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됐다. 별 때문이었다. 죽은 뒤에도 저 별을 볼 수 있는 것인가? 사람은 죽으면 땅에 묻혀 흙이 된다는데, 그렇다면 저 별을 보는 내 생각(의식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었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은 뒤에는 저 아름다운 별들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건가?
처음으로 영원이라는 단어가 체감됐다.
저 별들은 언제까지나 저렇게 아름답게 빛날 것이지만 나는 영원히 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끝없이 계속된다고.
슬프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밤이면 별을 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저 별을 보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중학교 때 옥상이 없는 집으로 이사 가면서 꼬마 ‘철학자’의 죽음에 대한 탐구는 막을 내렸다. 죽음을 그렇게 가까운 실체로 느꼈었다는 생각조차 잊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나이 서른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죽음을 그때처럼 실감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신도 죽는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어린 꼬마가 별을 보며 죽음을 어떤 사람보다 진지하게 생각했었다는 기억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