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심사 주지 지현 스님>
개심사(開心寺)는 관음봉 서쪽 기슭에 오롯이 깃들여 있었다. 개심사 쪽에서 본 관음봉의 형상은 신선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풍수가들은 개심사 터를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 ; 신선이 책을 읽는 형국)의 명당이라고 했다. 개심사 바로 앞에는 네모 반듯한 봉우리가 솟아 있다. 이것은 책을 올려놓는 서대(書臺)였다. 서대 뒤에는 꼭 책을 펼쳐 놓은 것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다. 또, 그 뒤쪽에는 여러 겹의 산줄기가 30리 밖까지 펼쳐져 있다. 이 산줄기들의 생김새는 구름과 흡사했다. 그러나 개심사 터는 신선이 구름 위에 앉아 책을 읽는 형국이 분명했다. 옛날에 어느 풍수의 달인이 개심사에 들러 무릎을 치며 이런 얘길 했다고 한다. " 천하의 보배가 여기에 숨어 있구나. 보물 중의 보물이로다. 신선이 책을 익는 형국이니 훌륭한 도인들이 쏟아져 나올 명당이다. 때가 되어 아름다운 지기가 활짝 피어나면 수천 수만의 도인이 구름처럼 몰려와 모두 크게 깨우치리라. " 혜원이 개심사 가까이에 다다르자 전과는 아주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개심사 일대의 지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난 겨울보다 몇 배 더 청정했다. 산굽이를 돌아 막 경내로 들어서서 보니 개심사 건물들이 은은한 광채에 휩싸여 있었다. " 아, 참으로 좋은 정기가 활짝 피어나는구나. " 그녀의 심안에 숱한 사람들이 깨달음의 길을 찾아 개심사로 오는 광경이 스쳐 갔다. 머지 않아 드디어 옛 사람의 예언이 실현될 것이었다.
개심사 주변에는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느티나무, 팽나무. 굴참나무 등이 커다란 숲을 이뤄 햇빛을 막아 주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는 갖가지 새들이 지저귀고 다람쥐들이 뛰어놀았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흘러내렸다. 걔심사 주지 지현 스님은 채소밭에 잇었다. " 언니, 뭐하세요? " 지현 스님은 혜원이 보다 몇 살 위였다. 그들은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 어! 동생! 어쩐 일이야? " " 스승님께서 보내셨어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 혜원이 지현 스님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 덕분에 잘 지내. 정말 반갑다. 식전에 까치들이 울어대더니만 동생이 오려고 그랬나 보네. " " 밭에서 뭘 하셨어요? " " 배추하고 무를 갈았는데 병이 심해. 병균도 살아 있는 중생이니 농약을 뿌릴 수도 없고..... 올해 채소 농사는 실패하겠어. 어려운 신도들한테도 나눠 주려고 많이 심었는데 우리 김장 담기도 어렵겠네. " " 어떻게 병들었나 한번 볼까요? " 혜원인 채소밭으로 들어가 보았다. 손바닥만한 배추들이 대부분 병들어 있었다. 잎새마다 누런 점이 얼룩얼룩 보였다. 병균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 언니, 좋은 방법이 있어요. 약을 안 주고도 살릴 수 있겠어요. " 혜원이 뭔가 잠깐 생각해 보고 말했다. " 어떻게? " " 물만 있으면 돼요. " " 그냥 물로? " " 네. 이따가 해볼게요. " " 그럼, 그래 봐. "
지현 스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혜원에게 무슨 묘방이 있나 보다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절 쪽으로 갔다. 혜원인 먼저 대웅전에 들러 참배를 한 다음 요사채로 내려왔다. 절에는 지현 스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 모두 어디 갔어요 ? " 내일 불공이 있어서. 참, 동생 아침 공양 들었어? " 지현 스님은 혜원이 아무것도 안 먹고 진기만 마시며 사는 줄 아직 몰랐다. " 전 안 먹어도 돼요. " " 안 먹어도 돼다니. 가서 차려 올게." 지현 스님은 밥상을 차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괜찮아요, 언니. 전 요새 아무것도 안 먹어요. 그런 지 꽤 됐어요. " " 그래? 벽곡을 하는구나. 동생, 공부가 아주 잘됐나 보다. 크게 깨우쳤나 봐." 지현 스님은 눈을 크게 뜨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외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혜원을 쳐다보았다. " 깨우치기는 요. 아직 멀었어요. 기운이 좀 찼을 뿐이에요. " " 아무나 벽곡하나. 이제 보니 동생 얼굴이 더욱 맑아졌네. 환해. 빛이 서려 잇어. 서기(瑞氣)가 뿜어 나오네. 도가 아주 높아진 게 틀림없어. 지현 스임은 머리까지 설레설레 흔들며 감탄했다. 도반이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 그녀를 무척 기쁘게 만들었다. " 부끄러워요. 자꾸 그러지 마세요, 언니. " 혜원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 " 그럼 차나 끓일까? " 그만두세요. " " 마시지도 않는구나." " 언니, 여기 큰일들은 거의 다 끝났죠? " " 기와 불사와 대웅전 단청은 마무리했어. 요사채 수리도 모두 끝냈고. 크게 손볼 곳은 없어. " " 이제 일을 놓고 용맹정진하실 때가 됐나 봐요. 스승님께서 언니를 백학봉으로 데려오라 하셨어요. " " 그래? 어제? " " 아흐레 후에요. 저더러 그때까지 여기서 지내라 했어요. " " 아이고, 바라고 바라던 소원이 이워졌네. "
지현 스님은 너무나 좋아했다.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지현 스님의 상호(相好)는 보살상이었다. 너부죽하면서 상이 아주 복스럽게 붍어 있었다. 눈빛은 맑고 온화했다. 활짝 웃으니 틀림없는 보살상이었다. 그녀는 발써부터 수행에만 전념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중(門中)의 사형제들이 놓아주질 않았다. 사형제들은 포용력이 커서 모든 사형제들한테 사랑받는 그녀가 주지직을 맡아 주길 워했다. 개심사와 청련사는 종단에 속한 절이 아니고, 지현 스님네 문중에서 세운 도량이었다. 지현 스님의 사조(師祖) 스님이 창건했다. 그후 계속 지현 스님네 문중에서 관리해 왔다. 지현스님은 문중을 위해 자신의 공부를 뒤로 미뤘다. 대신 사형제들이 수행에 전면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잘했다.
벽운 선생도 그걸 바랐다. 먼저 공덕을 충분히 닦은 다음에 용맹정진하라는 것이었다. 공덕이 원만해야 공부에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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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Lis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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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드
성자들의 시대17-공덕이 원만해야 공부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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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드
성자들의 시대15-임독이 열리다
"됐다. 이제 중단전의 옥로를 하단전으로 내려보내라."
석주는 스승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것을 다시 몸통 왼쪽으로 올려보냈다가 오른쪽으로 내려보내라.
그런 다음 또 선정에 들어라. 정신을 오로지 중단선에 붙들어내라."
석주는 스승의 인도에 따라 깊은 선정에 잠겼다.
석주의 정신은 중단전에 자리잡은 단만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마음은 죽은 고목나무처럼 일체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밝고 밝은 정신만이 성성하게 께어서 단을 비췄다.
며칠이 지났다. 석주의 중단전에서 단이 견고하게 응결됐다.
벽운 선생이 그제서야 석주를 깨웠다.
단이 맺어지자 몸 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몸 전체가 혀공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그 허공 속에서 바람이 쏴아쏴아 불어댔다. 그것은 우주의 진기였다.
진기가 크게 움직이며 황홀한 쾌감으로 몸이 떨렸다.
또,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등뒤의 독맥이 거대한 빛기둥으로 보였다.
임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로 보였다. 하단전.중단전은 광막한 하늘로 화했다.
그 하늘 곳곳에 별천지가 펼쳐졌다.
은빛 찬란한 새들이 날아다니고 오묘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 안에서는 단침이 샘솟듯 솟아나왔다. 마셔도 마셔도 마르지 않았다.
진기가 온몸에 충만해서 뭘 먹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잠도 줄어 자는 듯 마는 듯했다.
필섭인 석주보다 열흘 늦게 단을 이뤘다.
보화로 인해 번뇌에 빠져 공력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그만큼 늦어진 것이었다.
벽운 선생은 필섭이 단을 얻은 뒤, 지금까지 해온 공부와 앞으로 할 공부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줬다.
"사람에겐 정, 기, 신이란 게 있다.
정은 몸이 되고, 기는 몸을 움직이는 힘이며, 신은 정신이 되어 기를 다스린다.
사람은 하늘에서 나올 때 신 하나를 지니고 왔다.
하늘에서부터 받아온 신을 원신이라고 한다.
원신은 기.정과 합쳐져 사람으로 잉태된다.
잉태할 때 원신과 합쳐진 기를 원기라한다. 정은 원정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면서 온갖 번뇌에 빠져 허덕인다.
번뇌로 인해 원정, 원기, 원신이 자꾸 소모된다.
애욕 때문에 정을 배출하여 원정이 줄어들고, 무리하게 힘을 써서 원기가 소진된다.
그리고 번다한 생각으로 원신이 허약해진다. 그러다가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른다.
너희는 그동안 번뇌를 씻어내고 원정을 보양했다. 이원정이 기로 화하여 원기도 충만해졌다.
잡다한 생각을 떨치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 원신도 기력을 되찾았다.
단은 충만한 원정이 원기로 변한 것이다.
원정으로 원기를 만드는 공부를 선가에선 연정화기라 일컫는다.
또, 단이 맺히면 임독맥이 열린다. 임독맥이 열려 그리로 기가 돌아가는 것을 임독유통이라 한다.
소주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단은 원신이 머무는 집이다.
단이 생기면 그 안에서 원신이 자란다. 단이 처음 생겼을 때, 원신은 아직 갓 잉태된 태아와 마찬가지다.
잉태된 아기는 어머니의 탯속에서 열 달간 자란다.
열 달이 지나야 비로소 사람의 형체를 온전하게 갖춘다.
원신도 그렇다. 단 속에 머물며 잘 길러야 온전한 모습을 얻는다.
그러니까 단은 원신의 태다. 선가에선 단을 성태라 부른다.
성인은 하늘 사람이다. 하늘과 한몸이 된 이다. 선인도 그렇다.
하늘 사람이 되려면 하늘에서 처음 나올 때의 본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본모습이 바로 원신이다.
마음과 정신과 몸이 모두 원신으로 화할 때 비로소 참하늘 사람이 된다.
원신이 자라면 자랄수록 하늘 사람에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다.
단을 얻은 사람을 선가에선 인선(人仙)이라 부른다. 인선만 돼도 큰 도력이 생긴다.
기이한 신통력도 얻으며 엄청난 기운이 용솟음친다. 또, 병에 안 걸리고 무변장수를 누린다.
그래서 인선 중에는 자기가 크게 득도한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도를 모두 이룬 줄 안다.
자기가 성인, 신선이 된 양 방자해져서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다.
하나, 도를 완성하려면 앞으로 창창하다.
이제 겨우 도로 들어가는 문턱 근처에 이른 것이다.
인선(人仙) 위에 지선(地仙)이 있고, 지선 위에 천선(天仙)이 있다.
또 천선 위에는 금선(金仙)이 있다. 금선이 돼야 비로소 도를 다 이룬다.
그러니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참 멀고 멀다.
이제부터 너희는 단에 갓 잉태된 원신을 잘 양육해야 한다. 원신은 원기를 먹고 자란다.
원기가 원신으로 화하는 것을 연기화신(煉氣化神)이라 일컫는다.
태아를 기르는 일과 마찬가지라서 중성 양태(中性養胎)라고도 한다.
임신한 여자들은 몸가짐 마음가짐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유산하기 십상이다. 몸이나 마음이 온전치 못한 아기가 태어날 수도 있다.
원신도 마찬가지다. 수행을 잘못하면 태아가 유산되듯 사라지고 만다.
마음과 정신을 더욱 깨끗이 닦고 원신을 잘 보양하거라.
이제부터는 너희 심신을 중단전의 단에 꼭꼭 붙들어매라.
너희 맑은 정신에서 뿜어 나오는 광채로 오로지 단만을 비춰 주거라.
정신을 단에 집중시키고,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 성성히 깨어 있어야 한다.
가만히 선정에 들어 있으면 하단전에서 불덩이가 생길 게다.
이 불덩이를 독맥을 통해 머리로 올려보내라.
그러면 입천장에서 또 옥로(玉露)가 방울방울 내려온다.
이것을 단이 머무는 중잔전에 보내라. 이 옥로는 원신을 기르는 자양분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단전에서 천둥치는 소리도 들릴 게다.
그리고 아랫배가 끊어지는 듯 아프다가
뜨거운 불덩이가 생겨나 저절로 머리에 치솟아 오를 것이다.
그런 다음 정수리에서 폭풍이 일며 눈앞에 둥근 광채가 보인다.
이 광채가 싸아하고 시원한 기운으로 변하여 입으로 들어온다.
그 기운을 삼켜 중단전으로 보내라. 선가에선 그것을 금액(金液)이라 부른다.
금액 역시 옥로처럼 원신을 기르는 양분이다. "
단이 생긱고 임독맥이 열리자, 석주와 필섭의 기력은 이전보다 몇 배 강해졌다.
식사량과 잠이 반으로 줄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며칠 후, 벽운 선생의 말대로 하단전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두 사람은 이 열기를 마음으로 이끌어 정수리까지 올려보냈다.
그러자 청량한 기운이 방울방울 입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옥액(玉液)이었다. 이것을 삼켜 중단전으로 보냈다.
옥액은 며칠 동안 계속 생겨났다. 두 사람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삼켰다.
그런 다음에 옥액을 온몸으로 두루 돌렸다. 그러고 나서 단 속으로 거둬들였다.
또, 얼마가 지났다. 하루는 하단전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단전 주위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또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가 생겨나 독맥을 타고 정수리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정수리 속에서 거세게 일었다. 인당(양 눈썹 사이) 주위에 둥그런
광채가 솟아올랐다. 입 안으로는 싸아하고 시원한 기운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며칠 동안 그 기운을 받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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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드
성자들의 시대14-불구슬
"도형, 일분만 참았다 주무세요."
눈이 도로 감기고 잠이 쏟아졌다. 필섭은 잠들지 않기 위해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간신히 백까지 센 다음 깊은 잠에 빠졌다.
이튿날, 필섭인 날이 훤하게 밝은 뒤에야 잠을 깼다.
눈을 뜬 뒤에도 기운이 너무 없어 한참 뒤척거린 다음에야 일어났다.
몸이 천근 만근은 되는 것 같았다. 밖에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머리가 핑 돌며 앞이 깜깜해졌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필섭인 아침 식사를 걸렀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필섭인 아침 식사를 걸렀다. 속이 메스꺼워 미숫가루도 토할것 같았다.
빈 속으로 가만히 누워서 단전 호흡만 했다. 너무 지쳐서 행공을 하기 어려웠다.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고 숨을 쉬면서 지난밤 일을 생각했다.
심안으로 보였던 그 노인은 누구인지, 자기가 왜 갑자기 이처럼 탈진했는지, 혜원이 왜 자기더러
1분만 깨어 있으라 소리쳤는지 궁금했다.
또, 보화이 얼굴이 떠올랐다. 이때, 혜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형, 마음을 흩뜨리지 마세요."
필섭인 심안에 떠오른 보화의 얼굴을 얼른 지웠다. 그리고 단전에 의식을 모았다.
단전이 둥그런 빛의 응어리로 보였다.
정신을 집중해서 두어 시간 단전 호흡을 하니 기력이 좀 회복되었다.
보화네는 10시쯤 초막을 떠났다.
보화는 작별 인사를 하며 두사람더러 상제봉 아래 자기네 수도장으로 꼭 놀러 오라고 했다.
필섭인 보화네를 배웅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보화 일행이 떠난 뒤, 얼마 안 있어 혜원이 초막으로 내려 왔다.
그녀는 필섭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침침한 방으로 들어가자 훤한 광채가 그녀를 둘러쌌다. 필섭인 눈이 부셔서 그녀를 정면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도형, 고생이 많으시네요. 큰일날 뻔하셨어요."
혜원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이런지 모르겠네.
기운이 쭉 빠져 버렸어. 몸이 바윗덩이처럼 무겁고. 참, 도제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어.
도제가 나한테 천리전음법으로 말을 전했나?"
"네."
필섭인 혜원의 도력이 한층 높아진 걸 확인하고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제 아니었으면 깜박 큰 실수를 할 뻔했어.
낯선 사람들한테 나고 모르게 스승님 얘길 밝히려고 했네.
내가 어떤 여자들과 같이 있는 걸 다 보았구먼."
'어쩌다 저절로 보게 되었어요."
필섭과 석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벽운 선생은 혜원의 도력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천안통을 얻은 것을 알고 두 사람은 그제야 깜짝 놀랐다.
"그런데 밤중엔 나더러 왜 깨어 있으라고 했지?"
"도형의 기운을 모조리 빼앗으려는 사람이 있었어요."
"기운을 빼앗아? 어떻게?"
"사도인들이 그런 짓을 잘해요.
신통력을 크게 얻으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기운을 훔쳐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래! 세상에 참, 희한한 일이 다있네. 한데 누가 내 기운을 뺏으려 했지?"
"도형도 심안으로 보셨을 텐데요."
"그 노인이?"
"네"
"그 사람이 누구야?"
"그 여자분들의 스승이에요."
"아니 ! 그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나를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그 사람은 천안통, 천이통 등 신통력을 꽤얻었어요.
제자들이 공부를 잘하는가 둘러보다가 도형을 발견했어요.
도형이 자기 제자들과 함께 있는 걸 발견하고 유심히 살펴봤어요.
도형의 근기가 대단한걸 알고 두려움을 느낀 거예요."
"왜 날 두려워해?"
"도형은 자기 제자가 될 사람이 절대 아니니까요.
도형이 도력을 얻으면 자기 일에 큰 장애가 되리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도형의 기운을 남김없이 빼앗가 가려 했어요."
"그런데 왜 석주 아우는 그냥 내버려뒀지?
아우의 근기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데. 아우가 그 사람 수하에 들어갈 리도 없고."
"그 사람은 석주 도형을 못 봤어요. 봤다면 석주 도형도 크게 다쳤겠죠."
"왜 못 봤을까?"
"스승님께선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방비를 하셨어요.
석주 도형은 번뇌가 없었기 때문에 감춰질 수 있었지요.
그런데 도형은 그 여자분을 보고 번뇌에 빠지셨어요.
그래서 스승님의 방비도 쓸모없게 되었지요."
필섭이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필섭은 고개를 푹 숙였다.
명색이 수도인이요, 사십이 넘은 사람이 여자로 인해 번뇌에 빠지다니, 너무나 창피했다.
"스승님께 큰 죄를 지었네. 도제들한테도 면목없구먼.
혜원이 도제는 나 때문에 정진도 제대로 못 했겠어.
나잇살이나 먹었는데 내가 왜 이리 못난 짓을…….부끄럽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스승님께서도 다 이해하실 거예요.
도형께서 그 여자분한테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해요."
"당연하다니, 왜?"
"두 분게선 전세에 깊은 인연이 있었어요."
"어떤 인연인가?"
"몇 생에 걸쳐 아주 가까운 사이였어요. 부부였던 적도 있었고요.
또, 도반이었지요.
머지않아 도형께서 스스로 아시게 될거예요."
"도제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런가 보네. 생전 처음 보는 여자한테 마음이 쏠리는게 참 이상했어.
한데 보화씨도 도심이 깊어 보이더니만 어째서 사도에 빠졌을까?"
필섭인 보화가 못내 안타까웠다
"그것도 인연이겠지요. 보화 씨와 그 스승도 전세에 아주 가까운 사이였어요!
그러나 보화씨와 스승은 뜻이 달라요.
보화씨는 불쌍한 중생들을 도와주려는 마음 하나고, 스승이란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을 가졌어요."
"그럼 보화 씨의 훌륭한 자비심도 못된 스승한테 이용당하지 않겠어?"
"지금은 그런 셈이지요. 하지만 언젠가 보화 씨도 우리처럼 정도로 들어올 거예요.
자기 스승이 가짜라는 걸 알아차리고요. 나중엔 우리 도반이 돼요.
이번에 스승님께서 그 인연을 맺어 놓으신 거지요."
"보화 씨 스승 같은 사도의 무리를 우리 스승님 도력으로 물리칠 수 없나?"
"스승님이나 큰스승님 같은 분들의 수가 너무 적어요. 사도인은 부지기수고요.
또, 스승님들께서 하시는 일이 너무 많아요."
"하긴 그래. 비결에도 말세엔 사도가 창궐한다는 얘기가 나와.
많은 불도인, 선도인, 예수 도인들도 정도에서 벗어난다고 했어.
앞으로 사도의 무리가 더욱 날뛰겠구먼."
"그럴 거예요."
"한데 스승님께선 무슨 일들을 하시나?'"
필섭이 오래 전부터 매우 궁금히 여기던 것이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스승님들께서 하시는 일을 감히 헤아리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세상에 쌓인 살기, 탁기를 거두시는 것 말예요."
"그 악한 기운 때문에 뭇 사람들이 마음이 거칠어지고 온갖 흉흉한 일들이 일어나지.
비결에 이르기를, 말세 때엔 탁한 기운이 창성하여 사람들이 재물에 혼을 뺏긴다고 했어.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때가 온다고 일렀지. 그때, 인간 세상에 온갖 흉사가 생겨난다는 게야.
거짓 구세성인들이 벌떼처럼 나오고 잘못하면 천 명의 할아버지에 한 손자만 살아남는 비운이
닥친다네. 십 리에 한 사람 살아남기 어렵다더군."
"스승님 같으신 성자들께서 일하시니 그리는 안 되겠지요."
"큰 성인들께서 악기를 없애고 사람들이 도심을 기르면 한 할아버지에 열 손자가 살아남는
호운이 온다고도 했어."
"그럴 거예요. 선인의 경지에 오른 성인들께서 온 세상을 다니시며 악기를 거두시니까요."
문득 필섭의 심안에 벽운 선생과 백령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른 성자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들은 깊고 깊은 어둠의 한가운데 서서 도도히 밀려오는 어둠을 거둬 내고 있었다.
그들 주변에서는 밝은 광채가 뿜어 나왔다.
그 광채가 점점 더 멀리까지 비췄다.
어둠 속에 갇혔던 사람들이 광명 속으로 나와 환호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튿날 벽운 선생이 돌아왔다. 필섭이 보화와의 일을 사죄드리자,
벽운 선생은 개의치 말고 좀더 열심히 정진하라 일렀다.
필섭인 평온을 되찾고 수련에 전념했다.
가끔 보화가 생각났지만,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석주는 바깥 세계를 까맣게 잊고 온종일 적정에 드는 날이 많았다.
유리처럼 투명한 의식을 오로지 단전에만 집중시켰다.
그러면 단전의 정기가 후끈후끈 달아올라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갔다.
하루는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단전에 채워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곧 단전을 가득 채우더니 독맥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머리까지 오른 다음에 다시 임맥을 따라 단전으로 내려왔다.
한번에 끝나지않고 계속 되풀이되었다. 나중에는 여러 경락을 타고서 손끝 발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자 몸과 마음이 더할 수 없이 가뿐해졌다. 몸이 저절로 떠오를 것처럼 들썩였다.
구름 위에 앉아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수련을 마친 뒤, 석주는 벽운 선생꼐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씀드렸다.
"단전에 하얀 안개가 생겨서 온몸으로 돌아다닙니다. 이게 뭔지요?"
"진기가 그리 보이는 게다. 이제 곧 단이 생긴다.
아주 중요한 때이니 마음을 태산처럼 갖고, 생각을 절대 흩트리지 말거라.
잘못하면 지금까지 한 공부가 허사로 돌아간다.
머지않아 네 음근과 고환이 아주 작아져서 바짝 오르라붙는다. 그러면서 원정이 원기로 화한다."
석주는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한 점 흔들림이 없도록 견고하게 지켰다.
의식은 단전으로 드나드는 호흡만을 꽉 껴안고 있었다. 호흡과 의식이 혼연일체가 되었다.
며칠 후였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살갗의 기공들이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근질거렸다.
단전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정수리를 통해서 싸아한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금 뒤에는 단전이 크게 떨렸다. 또, 갑자기 단전에서 천둥같은 굉음이 여러 번 울렸다.
굉음이 울린 다음에는 몸이 텅 비워지는 것 같았다.
단전이 광막한 허공으로 화했다.
단전 안에 또 하나의 우주가 생긴 기분이었다.
석주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호흡은 더욱 깊어졌다. 코로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숨이 직접 단전으로 드나드는 것 같았다.
마음은 지극히 황홀했다.
얼마 후 의식이 다시 명료해졌다.
그리고 단전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뿜어 나왔다.
단전의 광채는 연거푸 세 차례 치솟아 올랐다.
이때 벽운 선생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벽운 선생은 석주와 마주보고 앉았다.
석주는 더욱 깊은 선정에 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석주는 꼼짝 않고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숨조차 끊어진 것 같았다.
벽운 선생은 석주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석주의 의식은 자신의 단전으로만 향했다.
바깥으로 향한 모든 감각 기관의 문이 굳게 닫혔다.
한 점의 진기도 몸 밖으로 세어 나갈 수 없었다.
또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단전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쇳물을 녹이는 것 같이 펄펄 끓었다.
몸이 크게 떨리고 머릿속에서 굉음이 울렸다. 눈, 코, 입, 귀 등이 저절로 움직였다.
무엇이 이것들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몸이 들썩거리다가 앉은 채 튀어오르기도 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나도 석주는 마음을 흩뜨리지 않았다.
고요히 자기의 깊은 곳에 있는 한 점 불빛만을 지켜보았다.
얼마 후, 잠시 진정됐던 단전에서 진기가 빙빙 돌며 움직였다.
이튿날엔 둥근 구슬 같은 것이 단전에서 나와 단전 주위를 떠돌아다녔다.
이 구슬은 매우 뜨거웠다. 불덩이가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불구슬은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자꾸 돌아다녔다.
심장 쪽으로 올라가려다가 길이 막혀 도로 내려왔고,음근 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오곤 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다 결국 단전에 자리를 잡고 움직임을 멈췄다.
이때, 벽운 선생이 석주에게 말을 했다.
"그 불구슬이 바로 단이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거라.
잠시 기다리면 또 움직이다 멈출 게다. 세 번째 다시 움직이거들랑 독맥을 환히 열어 놓거라.
그리고 구슬을 마음으로 끌어당겨서 독맥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게 하여라.
끌어당기고 올려보낼때 서두르지 마라.
고요히 지켜보며 그것이 조금씩 위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불구슬이 세 번째 움직였다 석주는 마음으로 그것을 꼬리뼈까지 끌어왔다.
그런 다음 서서히 위로 올려보냈다. 불구슬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뼛속을 통해 나아갔다.
그것이 지나가는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화끈화끈한 열기가 불구슬을 에워싸고 함께 움직였다.
불구슬이 척추를 지나 머리로 올라왔다. 이때 벽운 선생이 또 주의를 주었다.
"머리에 계속 머무르게 해라. 그러면 시원한 옥로가 머리에서 입 안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 옥로를 삼켜서 가슴의 중단전으로 내려보내거라."
잠시 후 벽운 선생의 말대로 시원한 기운이 입 안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석주는 이것을 삼켜 중단전으로 보냈다.
머리에 있던 불구슬이 옥로로 화하여 모두 가슴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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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성자들의 시대13-정도와 사도
"아니에요. 구세주는 이 세상 분이세요.
하늘의 천신들과 선인들도 모두 우리 스승님을 공경하며 따릅니다.
스승님의 가르침도 받습니다."
보화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말을 할 때, 보화의 눈에서 번쩍이는 광채가 뿜어 나왔다.
눈빛이 매우 날카롭고 강렬했다. 전형적인 광신자의 눈빛과 비슷했다.
"아아, 그러시구먼요. 도력이 대단하시겠네요."
필섭인 미심쩍었다. 산에서 지내는 동안 스스로 구세주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만났었다.
그들은 대개 한두 가지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신통력을 이용해서 혹세무민했다.
보화의 스승도 그런 무리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도력을 지니셨죠. 우주 삼계를 손바닥 안에 놓고 들여다보세요.
기운이 천하장사시고,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려내세요. 저도 죽을 몸이었는데 스승님의
크나크신 도력으로 소생했지요. 여기 이 동생들도 그랬어요."
보화의 도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들이 몹시 안 좋으셨던 모양이지요?"
"우리 셋다 불치병으로 고생했어요. 저는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요.
한달 넘기기도 어렵다고 했어요. 식구들은 각오하고 있었지요.
그때 스승님을 처음 되었어요. 한달 안에 죽는다는 사람이 열흘리 못 돼 다 나았지요."
"스승님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스승님께서 저를 환히 보시고서 저희 집을 손수 찾아 주셨어요.
저희 집 대문 앞에서 어머니더러 이 집에 오늘 내일 하는 중환자가 있지 않느냐고
물으시더래요.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당신께서 고쳐 주겠다고 하시더래요.
당시 저희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얼른 저를 스승님께 맏겼죠. 스승님께서 열흘 만에 고쳐 주셨어요."
"도력이 굉장하시구먼요."
"그럼요. 저희 스승님은 겉모습만 사람이지, 사람이 아니세요. 하느님의 분신이십니다.
하느님꼐서 권능을 주셨지요. 못하시는 일이 없어요.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도 다
들으실 수 있어요."
"천이통을 얻으셨나 보지요?"
"천이통, 천안통, 숙명통, 신족통, 누진통, 타심통 다 얻으셨어요.
도가 높다 하는 사람 중에 이렇게 육신통을 두루 갖춘 이가 있나요?
고승대덕이라 추앙받는 스님들도 지식이나 좀 얻었지 도력을 지닌 도인은 없잖아요."
필섭인 보화가 자기네 스승한테 푹 빠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보화의 스승보다 훨씬 못한 가짜 구세주들도 신도들한테 하느님처럼 추앙받았다.
보화의 스승 같은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 숱한 사람들이 그의 문하로 몰려들 것이었다.
어쨌든 보화의 스승은 정도를 가는 이가 아님이 분명했다. 더구나 구세성인이라니
어이없는 얘기였다.
보화와 그녀의 도반들이 안돼 보였다.
왠지 모르게 보화가 삿된 스승은 만난 게 너무 안타까웠다.
보화의 인상은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선하고 맑았다.
정도를 닦으면 크게 깨우칠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저씨들꼐선 여기서 무슨 공부를 하세요?"
보옥이란 여자가 필섭에게 물었다.
"저희는……."
필섭인 저희 스승님이야말로 도인 중에 도인이시며,
그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는 중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스승님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갑자기 혀가 마비되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혜원의 음성이 귓전에서 울렸다.
"말하지마세요."
벽운 선생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한 얘기를 때가 이를 때까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엄히 일렀었다. 필섭은 아차 했다. 스승께 큰 누를 끼칠 뻔했던 것이다.
"저희는 뭐 그저 마음이나 좀 닦아서 사람답게 살려고………."
필섭인 혜원이가 천리전음법을 써서 말을 전해 준 것을 신기해 하며 적당히 둘러댔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서 사시는데. 큰 뜻이 있지 않으시겠어요? 그냥 쉬러 오신 분들은 아닌
것 같네요. 두 분한테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보통 사람들과 아주 달라요. 수도하시죠?
요즘엔 선도 공부하는 분들이 많던데. 선도를 닦으세요?"
보화가 매우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불도, 선도, 모두 조금씩 공부합니다. 성현들의 가르침이야 모두 귀중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가르침도 참 좋고요."
필섭인 참된 도가 어떤 것인지 빙 돌려서 말하고자 했다.
"예수, 석가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나요?" 후천시대가 곧 열리는데 수도를 하려면
후천시대에 맞는 도를 닦아야지요."
보연이란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끼여들었다. 눈빛이 좀 차디차고 날카로웠는데
목소리도 딱딱했다.
"진법이야 우주가 다 무너진다 해도 올바른게 아닐까요. 참성인들의 가르침은 다 진법에
뿌리를 두었겠지요."
필섭이 부드럽게 응수했다.
"선천시대에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나왔어요.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을 구하지 못했어요.
또 예수의 제자들, 석가의 제자들을 보세요. 진짜 도인이 몇이나 되겠어요.
백 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예요. 중들은 절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목사들은 서로 신도들을 많이 잡으려고 난리들이지요."
"그건 성현님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 경우이지요."
석주가 모처럼 끼여들며 보연의 말에 이의를 달았다.
"타락한 제자들이 생긴 것은 스승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에요.
잘못된 도는 빨리 없어져야 해요. 그래야 세상이 좋아져요. 우리……."
"그만해."
보연이 우리 도야말로 선천시대의 잘못된 도를 바로잡기 위해 나온 도라고 말하려 했으나,
보화가 나서서 막았다. 자칫 말다툼을 벌이게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서였다.
그건 호의를 베풀어 준 필섭이네한테 큰 결례라고 생각했다.
또, 보화는 두 사람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처음 만나 순간, 이들이 인상이 너무 좋게 보였다.
한없이 평화롭고 자비로운 기운이 얼굴 가득 넘쳐흘렀다.
두 사람에게서 맑고 온화한 기운이 뭉클뭉클 전해져 오기도 했다.
수행이 참 잘된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보화의 도반들은 3백 명이 넘었다. 남자가 2백여 명, 여자가 백여 명이었다.
보화는 자신의 도반들과 두 사람을 견주어 보았다. 두사람은 격이 다른 것 같았다.
공부가 꽤 잘됐다고 스승이 인정해 주는 사람들도 두 사람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보화는 이들이 무슨 도를 어떻게 닦았길래 이처럼 맑고 자비로운 모습을 지녔을까가
궁금했다. 또, 만난 지 몇 시간밖에 안됐지만, 오랫동안 함께 지낸 도반들 못지않게
친밀감이 느껴졌다. 필섭이한테는 더욱 그랬다. 필섭이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언제 어디선가 아주 가까이 지낸 사람처럼 느꼈듯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문에 자꾸 필섭에게 말을 걸었다.
"두 분께선 여기 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보화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이 친구는 일년 가까이 됐고, 저는 반년쯤 됐습니다."
"여긴 전망이 탁 트여서 참 좋네요. 앞을 보면 가슴이 확 열리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보화네와 필섭이네는 잠시 더 얘길 나누고는 각자 수련을 시작했다.
필섭이와 석주는 방으로 들어갔고, 보화 일행은 텐트 안에서 정진했다.
필섭인 행공을 마치고 선정에 들려 했으나 어쩐지 정신을 한곳으로 모으기가 어려웠다.
보화 때문이었다. 보화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의식을 단전에 집중하려고 애쓰니, 그녀의 모습이 단정에서 아른거렸다.
가슴에 훈훈한 기운이 감돌며 애틋한 감정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보화도 마찬가지였다. 필섭이와 석주의 모습이 그녀의 의식을 꽉 채웠다.
필섭의 얼굴은 아주 또렷하게, 석주의 얼굴은 좀 흐릿하게 떠올랐다.
심안으로 필섭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왠지 가슴이 설레고 미묘한 환희심이 솟아났다.
그것은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첫사랑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보화는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본 낯선 사내에게 자기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욕을 끊고 이성을 잊고 지낸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는데, 기막힌 일이었다.
스스로 너무 부끄러웠다. 행여 스승께서 자기를 보고 있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얼른 필섭의 모습을 떨쳐 내려 했다. 필섭이 대신 스승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곧 필섭의 얼굴이 또렷이나타났다.
저녁때가 되었다. 보화네는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필섭이와 석주는 미숫가루를 먹고 밖에 나가 쉬었다.
해가 지려 했다. 서편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머! 저 해 좀 봐!"
"어휴, 굉장하네."
여자들은 넋을 잃고 낙조을 감상했다. 서편 하늘에는 뭉게 구름이 떠 있었다.
노을이 뭉게구름으로 번져 갔다. 태양과 가까운 쪽은 빨갛게 물들었고,
바깥쪽은 연분홍빛이었다. 구름이 엷은 곳으로는 태양의 마지막 잔광이 뿜어 나왔다.
참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보화는 한없이 깊은 평화를 느꼈다.
온 우주와 자신이 붉은 노을 속으로 함께 녹아 드는 느낌이었다.
해가 졌다. 석주는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필섭은 좀더 있고 싶었다. 보화 때문이었다.
"언니, 이제 수련을 해야죠."
노을이 조금씩 스러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보연이 보화에게 말했다.
"응?"
보화는 막 잠에서 깨어난 표정으로 보연을 돌아봤다.
"뭘 그리 생각하세요? 들어가서 공부해야죠."
"으응."
보화의 눈에 필섭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노을을 향해 앉아 있는 필섭이가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왠지 자꾸 필섭에 대해, 그가 하는 공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먼저 들어가, 난 좀더 있다 갈게."
모화는 도반들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필섭에게 다가갔다.
"저어, 선생님."
보화는 조용히 필섭일 불렀다.
"예?"
돌아보는 필섭의 눈에서 별빛처럼 투명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저어, 선생님과 말씀 좀 나누고 싶어서요."
"여기 앉으시죠."
보화는 필섭이와 마주보고 앉았다.
"선생님께선 왜 이런 깊은 산중에서 수도하세요? 뭘 얻으려고 그러시죠?"
"얻으려는 게 아니라 버리려는 거지요?"
필섭인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여 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보화에겐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도력을 얻는다든지, 구제창생의 뜻을 편다든지 하는
등의 대답을기대했었다.
"뭘 버리시려고요?"
"남김없이 다요. 번뇌, 지식, 마음, 버릴 게 많지요. 내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싶습니다."
"그래도 뜻하시는 바가 있지 않겠어요? 모두 버린 다음에 어떻게 되지요?"
"글쎄요. 아직 그렇게 되어 보지 못했으니까, 다음 일은 전혀 모릅니다."
"뭔가 추구하는 게 있으실 것 같은데요."
"보화 씨, 아까 노을 감상하실 때 뭘 느끼셨어요?"
"아주 평화로웠어요."
"굳이 따지자면 그런 평화를 얻자는 겁니다."
필섭의 얼굴에 노을 같이 평화로운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보화는 참으로 아름다운 미소라고 생각했다. 왠지 그녀의 가슴에 봄바람처럼 훈훈한
기운이 일었다.
"보화 씬 뭘 얻기 위해 수도하시지요?"
이렇게 물어 보는 필섭의 음성이 매우 따스했다.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듯한 어조였다.
"저흰 후천시대를 맞이하려고 수도해요. 후천의 선경에서 살려고요.
스승님 말씀으론 후천시대가 오기 전에 숱한 사람이 죽는대요. 백에 하나 살까 말까래요.
말세의 환난이죠. 수도자만이 이 환란을 피한다고 하셔요. 또 한가지 저희가 하려는 일은
구제창생이에요. 수도를 잘하면 스승님께서 저희에게 큰 능력을 주신대요.
지금도 많이들 받고 있어요. 도통군자가 되어 구제창생하는 게 제 도반들의 희망이지요."
"큰 포부들을 지니고 계시구먼요. 그런데 짐이 무거우시겠습니다."
필섭인 그동안 구제창생의 뜻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꽤 만났다. 가짜 구세주들은 오로지
자기만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건질 수 있노라고 큰소리쳤다. 그들은 그 짐 때문에 온갖
번뇌에 빠졌다.
보화와 그녀의 도반들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필섭이 전 같으면 그 허황된 꿈을 버리라고 했을 터였다. 그런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이 또한 번뇌라 생각했다.
"선생님,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하는 게 수도인의 도리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도 구제창생의
대업에 동참해 보시지요. 큰일을 하셔야 될 분 같아요. 한번 저희 스승님을 만나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한달 후면 스승님께서 상제봉으로 오세요. 스승님께서도 선생님을 보시면
참 좋아하실 것 같아요."
보화는 간곡히 권했다.
"저는 제 몸 하나도 바르게 못 닦는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제 한 몸이나 제대로 닦아도
원이 없겠습니다. 구제는 보살님들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엄두를
내겠습니까."
필섭인 완곡하게 사양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저희들은 다 엉터리예요.
하지만 저희 스승님께선 다르세요. 저희가 반딧불이라면 스승님께선 태양이지요.
그분께서는 일체 사욕이 없으세요. 오로지 구제창생 일념뿐이세요. 스승님을 뵈면
큰 힘을 얻으시겠어요."
필섭이 지금까지 만나 본 가짜 구세주들이 대부분 보화의 스승 같았다.
그들에겐 다른 욕심이이 없었다. 오로지 세상을 구하겠다는 마음 하나였다.
한데,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가 구해야 한다는 게 무서운 욕망이었다.
"인연이라면 만나지겠지요, 허허."
"오늘 뵌 게 어쩐지 큰 인연 같아요. 선생님을 처음 뵙는 순간 보통 어른이 아니시라
생각했어요. 또, 전에 어디선가 많이 뵌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언젠가 아주 가까이 지냈던 분 같았어요."
"보화 씨도 그러셨습니까? 실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상하군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모르겠는데."
"저도 자꾸 옛날을 회상해 봤어요."
두 사람은 자신들의 과거를 맞춰 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차례로 맞춰 봤는데,
과거에 둘이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서로의 과거를 알면서 왠지
더욱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텐트에서 이상한 주문 소리가 새어 나왔다.
"궁궁을을 천기지기 궁궁을을 천기지기……."
보연과 보옥이 똑같은 주문을 거듭 되풀이하여 읊조렸다.
"무슨 주문입니까?"
필섭이 잠시 귀기울여 듣다가 물었다.
"하늘과 땅의 정기를 받는 주문입니다. 저 주문을 잘 공부하면 큰 힘을 얻어요."
두 사람은 좀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반들한테로 돌아갔다.
각자 수련에 들어갔으나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한밤중이었다. 필섭이 보화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데, 낯선 노인의 얼굴이 보화의 얼굴과
겹쳐서 나타났다. 그 순간,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방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또다시, 보화의 얼굴이 사라지고 노인의 얼굴만 뚜렷이 보였다.
노인의 얼굴은 길고 좁았다.눈에서는 형형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눈빛이 매우 날카롭게 보였다. 눈썹은 굵고 짙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선명했다.
노인이 뚫어져라 필섭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때, 필섭인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에 끌려가듯, 몸 속의 기운이 바깥으로 쭈욱쭈욱 빨려 나갔다.
필섭인 금방 탈진했다.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쓰러지듯 벌렁 누웠다.
몸이 바위처럼 무러워졌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기 어려울 만큼 까라졌다.
나중엔 정신도 가물가물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사방이 깜깜했다.
또, 뭔가에 의해 온몸이 짓눌렸다. 목이 졸려 숨쉬기도 어려웠다.
필섭인 석주를 불러 보려고 했다. 그러나 혀가 굳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석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선정에 들어 있다.
"도형, 도형!"
필섭이 막 의식을 잃으려는 찰나 혜원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형! 정신차리세요~"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혜원의 얼굴이 보였다. 필섭인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떴다.
혜원인 방안에 없었다. 그런데 혜원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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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성자들의 시대12 -명천의 개안
그는 힘이 용솟음쳤다. 거대한 분수처럼 솟구치는 힘을 어디엔가 써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하늘 높이 뛰어오르고 산봉우리를 번쩍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승께서 옆에 계시니 함부로 힘자랑을 하지 못했다.
"명천아, 폭포물이 못 떨어지게 한번 막아 보거라."
명천의 마음을 헤아리고 벽운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예, 스승님."
명천은 못을 사이에 두고 폭포와 정면으로 마주섰다. 그리고 단전으 진기를 손으로 보낸 다음
서서히 팔을 앞으로 뻗었다. 명천의 손에서 강한 공력이 뿜어 나와 폭포수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물줄기가 반으로 끊겼다. 아랫부분은 못으로 떨어져 내리고 윗부분은 얼어붙은 듯이
그대로 있었다.
명천은 또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그와 동시에 물줄기도 거꾸로 올라갔다.
손을 내리자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물줄기가 도로 내려왔다.
"됐다. 잘했다. 공력이 크게 좋아졌구나."
명천이 손을 거둬들였다.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굉음이 울렸다.
'초막으로 돌아가자."
두 사람은 초막으로 올라왔다. 백령자는 초막의 지붕 위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었다.
백령자의 몸에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그 광채는 한 줄기로 모아져서 명천이한테로 뻗쳐 갔다. 명천의 마음은 더욱 아늑해졌다.
자신이 우주 삼라만상과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자기가 우주의 품안에 안겨 있으면서
동시에 온 우주를 품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때였다. 벽운 선생의 눈에 보덕봉의 맑은 정기가 활짝 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빛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보덕봉의 왼쪽에 솟아오른 선인봉과 오른쪽의 옥녀봉에서도 빛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세 빛기둥에서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양이 초막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초막의 앞쪾에는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가물가물 펼쳐져 있었다.
정남쪽으로 아득히 먼 곳에 지리산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 지리산에서도 찬란한 빛이 뿜어 나와 초막으로 뻗쳐 왔다.
초막 일대는 사방에서 밀려온 맑디맑은 정기에 휩싸였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도 진기가 충만해 있었다.
지극히 청정한 기운이 명천의 몸 속으로 쏴아쏴아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이 명천의 마음 깊은 데 깃들인 번뇌의 찌꺼기들을 말끔하게 닦아 냈다.
벽운 선생과 명천이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명천아, 너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느냐?"
벽운 선생이 다정하게 물었다.
"예?'
명천이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먹기 전처럼 삼라만상을 보고 싶지 않느냐?"
"그럴 수 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
명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 될 수 있다. 오늘부터 그 공부를 하자."
"스승님, 정말 제 눈이 다시 떠질 수 있습니까?"
"아무렴, 되고말고."
"어떻게 하면 그리 되는지요?"
"삼라만상은 하늘에서 나왔다. 하늘은 형체가 없는 세계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진공이다.
네 마음과 정신이 진공으로 돌아가면 곧 하늘과 하나가 된다. 하늘은 우주 삼라만상을 낳았으니,
만물 안에 하늘이 깃들여 있다. 하늘의 빛은 만물중생을 환히 비춰 준다.
하늘 마음을 길러라. 네 마음이 진공으로 화할 때, 너는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천리 만리 밖, 우주 저쪽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천안통을 얻는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다. 이제 그때가 되었느니라. 오늘부터는 오로지 몸과 마음을 진공으로 만드는 공부에
전념해라. 외공은 그만해도 되겠다. 자, 지금 시작해 보자."
명천이 벽운 선생 앞에서 선정에 들었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상념들을 떨쳐내고
가슴의 중단전에 의식을 모았다.
"살갗으로 숨을 쉬면서 네 몸과 마음이 서서히 흩어져 진공으로 화한다고 생각해라.
먼지처럼 흩어져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모여 형체를 갖춘다고 상상하거라. 이것을 되풀이해라."
명천인 밖으로 향했던 감각 기관의 문을 닫고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이깊이 잠겨들었다.
어느결에 코로 쉬던 숨이 끊겼다. 피부의 기공들이 활짝 열리며 그리로 공기가 드나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조금씩 희미해져 허공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처음엔 구름이나 안개로 뭉쳐 놓은 것처럼 보였다가, 작은 입자들이 풀어지면서 형체가 없어졌다.
나중엔 몸이 있던 자리가 푸르른 하늘의 일부로 변해 버렸다.
그런 뒤에 또 몸이 나타나는 광경을 상상했다. 먼저 푸르른 허공에서 먼지 같은 입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한데 엉기어 사람의 형체를 갖췄다. 형체가 살과 뼈로 이뤄진 몸이 되었다.
명천인 상상 속에서 거듭거듭 자신의 몸을 없앴다가 다시 만들어 내곤 했다.
벽운 선생과 함께 있으니 한 점의 번뇌도 범접하지 않았다. 일체이 흐트러짐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명천이 상상으로 자신의 몸을 허공에 흩뿌린 다음이었다.
명천의 의식 속에는 티 하나 없이 푸르른 허공만 남아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명천아, 눈을 떠라."
벽운 선생의 음성이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려 왔다.
명천이 화들짝 놀라며 퍼뜩 눈을 떴다.
마주 앉은 벽운 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방바닥, 벽,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안통을 얻은 것이었다. 벽운 선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명천인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30년 가까이 암흑 속에서 살았는데, 갑자기 몰 수 있게 되다니
영 믿기지 않았다.
"뭐가 보이느냐?"
"스승님이 보입니다. 스승님께서 웃고 계십니다. 맞는지요?"
"그렇다."
"스승님 옷이 누더기로 보이네요. 맞는지요?"
"맞다."
"스승님!"
명천은 감격에 겨워 벌떡 일어나 벽운 선생한테 큰절을 올렸다.
'됐다. 그만 앉거라. 이제 너는 천안통이 열렸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볼 수 있다.
지금 해가 어디에 있는지 보거라."
명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니다. 그럴 것 없다. 여기 그냥 앉아서 보거라."
명청은 해를 생각했다. 옥녀봉 위로 막 해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옥녀봉 위에 있습니다."
"옥녀봉은 어떻게 생겼느냐?"
"타원형의 꼭대기가 둥그렇습니다."
"선인봉은 어떻게 생겼느냐?"
옥녀봉과 똑같은데 그보다 약간 큰 봉우리가 보였다.
"옥녀봉하고 똑같습니다. 옥녀봉보다는 조금 더 높고 큽니다."
"보덕봉은?"
"네모 반듯합니다."
"보덕봉 맞은편에는 무엇이 있느냐?"
"아, 엄청나게 많은 산줄기가 줄줄이 늘어서 있습니다. 까마득하게 먼 곳까지 보입니다.
맨 뒤에 왼쪽으로 높은 산이 있고요."
"그 산이 지리산이다."
"예? 정말입니까?"
명천인 감개무량했다.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앉아서 자신의 고향 지리산을 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자, 나가서 다시 보거라."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명천인 마당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안에서 본 것과 똑같은 훙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붕 위에 앉아 이쓴 백령자의 모습도 보였다.
백령자가 명천을 향해 날아왔다. 명천이 백령자를 품어 안났다.
백령자의 날개를 쓰다듬어 주면서 자신이 천안통을 얻은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명천아, 이제부턴 오로지 네 몸을 진공으로 변회시키는 공부만 하거라.
번뇌를 떨치고, 오로지 네 중단전만을 지켜봐라. 그만 하거라. 번뇌를 떨치고,
오로지 네 중단전만을 지켜봐라. 그리고 신통력은 꼭 필요할 때만 써야 한다.
함부로 쓰면 삿된 기운이 침범하여 사도에 빠진다. 명심해라."
벽운 선생은 이 말을 남기고 계룡산을 떠났다.
닷새 만에 운학산으로 돌아온 벽운 선생은 백학봉 초막에서 한동안 필섭이네와 함께 지냈다.
백령자도 초막을 떠나지 않았다.
청령자는 백령자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련에 전념했다. 행공을 하거나 명상에 잠기는 게 일과였다.
사냥을 나가는 횟수는 반으로 줄었다. 이제 이틀에 한 번씩만 나갔다.
석주와 필섭이도 식욕이 점차 줄어들었다.
단전에 진기가 충만해져서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되었다.
두 사람은 심신의 변화를 많이 겪었다.
단전에서 후끈후끈한 열기가 생겨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돌아다녔다.
몸이 떨리기도 하고 전에 앓았던 곳이 무척 아프기도 했다. 한번 통증을 느끼고 나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여러 가지 환상도 보였다. 자기 몸 속이 환하게 들여다보일 때도 있었다.
어떤 날은 바깥 세상 모습이 영화처럼 눈앞에 스쳐갔다.
벽운 선생은 그런 현상들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일렀다.
"수행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이상한 일들이 다 생긴다. 마음, 정신, 몸의 변화가 기기묘묘하다.
신통한 능력도 많이 얻게 된다. 하나, 그런 것에 빠지면 안 된다.
정도는 오직 하나,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여의는 것이다.
어느 날, 벽운 선생은 아침 일찍 청령자와 백령자를 데리고 어디론가 출타했다.
초막에는 석주와
필섭이 둘만 있었다.
점심나절이었다. 행공을 마치고 잠시 쉬는 참인데 낯선 여자들 셋이 백학봉에서 내려왔다.
티셔츠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제법 큰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여자들은 초막 마당으로 내려오자마자 손을 합장하고 사방을 향해 허리굽혀 절을 올렸다.
평범한 등산객이 아닌 것 같았다. 운학산에는 등산하러 오는 이가 별로 없었다.
한달에 두세 팀이 올까말까 했다. 산이 깊고 길도 좋지 않아서 여자들끼리 온 적은 더구나 없었다.
필섭인 이 여자들이 혹 무당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여자들의 얼굴에선 무당들 특유의 신기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합장 배례를 마친 다음 석주와 필섭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두 분께선 여기서 사시나 보지요?"
얼굴이 갸름하고 하얀 셔츠를 입은 여자가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그녀가 말할 때 강한 기운이 풍겨 왔다. 필섭인 가슴께가 후끈 달아올랐고,
석주의 등허리는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예, 그렇습니다. 어디서들 오셨습니까?"
필섭이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상제봉 밑에서 왔습니다. 두 분께선 수도하시는 분들이지요?"
여자의 얼굴은 아주 맑았다.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잡티가 전혀 없었다.
크고 아름다운 눈에서는 서글서글한 빛이 뿜어 나왔다.
'글쎄, 수도랄 것까진 없고, 그냥 수양이나 하면서 지냅니다."
필섭인 처음 보는 이 여자가 왠지 무척 낯익게 느껴졌다.
언젠가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보기만 한게 아니라,
가까이 지낸 사람 같았다.
"실은 저희도 수도하는 사람인데요, 여기서 한 이틀 쉬어 갔으면 하고 왔거든요,
몇 년 전에 여길 한번 와봤는데 참 좋더라고요, 야영 준비를 다 해왔어요.
두 분 공부하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허락해 주세요."
"그렇게 하십시오."
필섭인 망설이지 않고 쾌히 승낙했다.
수도하는 사람들이라니 반가웠고, 왠지 이 여자한테 친밀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석주의 의사를 묻지는 않았으나 석주도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여자들은 마당 한켠에다 텐트를 쳤다. 필섭이와 석주가 도와주었다.
야영 준비를 끝내고 짐을 정리한 뒤 필섭이네와 여자들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여자들의 이름은 보화, 보연, 보옥이라 했다.
필섭이네한테 맨 먼저 말을 걸었던 여자는 보화였다.
"보자 돌림이시군요. 그럼 모두 자매간 되십니까? 보화 씨가 막내신가요?"
필섭이 보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보화는 다른 두 여자보다 대 여섯 살 아래로 보였다.
"친자매는 아니지만, 자매나 마찬가지예요. 우린 도반들이고 오랫동안 같이 살았어요.
그리고 제가 제일 위예요. 얘들은 동생들이에요."
보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제일 앳되게 보이시는데요. 실례지만 지금 몇이세요?"
"호호, 저 나이 많아요. 서른넷이에요."
"그러세요?"
필섭인 깜짝 놀랐다. 스물대여섯쯤으로 짐작했는데,
10년은 더 젊어 보이니 수행이 깊은 모양이라 생각했다.
"공부를 참 많이 하셨나 봅니다. 수도를 시작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스물한 살 때부터니까 벌써 만 13년 됐네요."
"동생분들은요?"
"저보다 5년 늦게 입도했어요."
"무슨 도를 닦으십니까? 불도를 닦으시나요, 선도를 공부하시나요?
"저희는 후천대도에 입문했습니다."
"후천대도요? 처음 들어 보는데요."
필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천시대, 후천개벽이란 말은 많이 들어 봤지만,
후천대도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후천개벽 얘긴 들어 보셔겠죠?"
"그런 얘기 가끔 들었습니다."
"우리 도는 후천시대를 여는 큰 도예요.
저희 스승님께서 천명을 받아 세상에 널리 펼치고 계십니다."
보화는 자신있게 말했다. 평소 후천개벽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지내던 터라 필섭인
호기심이 생겼다.
"저희 스승님께선 하늘 같으신 어른이세요. 하늘과 한몸이라고나 할까요.
말세의 구세성인에 관해서도 많이 들어보셨겠네요?"
"예, 구세주가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있더군요."
"사람들은 말세의 구세주를 정도령, 자하진주라 부르지요. 미륵이 하강한다고도 하고요.
자기가 정도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모두 가짜예요. 저희 스승님 한 분만이
바로 진짜지요."
"예?"
필섭이 또 깜짝 놀랐다. 그의 눈에 강한 의혹의 빛이 감돌았다.
석주도 눈을 크게 뜨고 보화를 쳐다보았다.
필섭인 언젠가 벽운 선생한테 말세의 구세주가 어떤 분인지 여쭤 본 적이 있었다.
벽운 선생은 그분이 선계의 대성자라고 했다. 그분께서 언제 세상에 나오시느냐고 재차 물으니까
너희 생전에는 나오실 거라며 그런데 너무 마음을 쓰지 말라 일렀다.
지금은 오로지 마음과 몸을 닦는 데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벽운 선생 말씀으로는 구세 성인을 한번 뵙는 것만도 무한한 광영이었다.
그런데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화 씨의 스승이 구세성인이시라고요? 그분께선 언제 선계에서 나오셨습니까?"
"선계라니요?"
"제가 듣기로는 구세성인께선 선계의 큰 스승이시라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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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성자들의 시대10-혜원의 양신
"저 새끼들 계집앤가 보다. 늙은 것들이 어떻게 조런 물건을 낚았지?"
녀석들은 제각각 한마디씩 뱉어 냈다. 필섭과 석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자식들아, 빨리 꺼져!"
필섭이 녀석들 앞으로 다가서며 외쳤다.
"이게 그냥."
한 녀석이 다짜고짜 필섭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필섭이 녀석의 팔목을 홱 잡아채며 앞으로 밀쳤다.
녀석은 엉겹결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세 녀석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한 녀석은 석주한테 덤벼들었다.
넘어졌던 녀석은 잽싸게 일어나더니 지팡이 삼아 짚고 왔던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순식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석주는 명치를 한 대 얻어맞고 꼼짝못했다. 필섭인 힘이 장사였으나
넷이 한꺼번에 덤벼드니 중과부적이었다. 한 녀석을 번쩍 들어 메어치고는
자신도 급소를 맞고 쓰러졌다.
먼저 필섭이한테 당했던 녀석이 몽둥이로 필섭일 내리치려고 했다.
그때 혜원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혜원인 필섭이 쪽으로 날아가는 몽둥이를
잽싸게 낚아챘다. 녀석은 몽둥이를 빼앗기고 옆으로 나귕굴었다.
혜원인 또 나머지 녀석들을 밀쳐냈다. 별로 힘도 안 들이고 슬쩍슬쩍 밀었는데도
녀석들은 나무토막처럼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들은 땅바닥에 넘어져 꼼짝못했다.
그 사이에 석주와 필섭이 기운을 차리고 혜원이 옆으로 왔다.
녀석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혜원일 쳐다봤다. 모두들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혜원인 말없이 녀석들을 훑어보고 나서 두 손으로 몽둥이의 양끝을 잡았다.
팔뚝만한 몽둥이가 조금씩 안으로 구부러지더니 딱 하고 부러졌다.
무서운 괴력이었다. 녀석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런데 혜원인 부러진 두 몽둥이를 한꺼번에 잡았다. 모두들 혜원의 행동을 주시했다.
잠시 후에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개의 몽둥이가 나무젓가락처럼 동시에 휘어지더니 뚝 부러지는 것이었다.
"어서들 가십시오."
혜원인 이 말을 남기고 다시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들은 기가 질려 석주와필섭에게 사과를 하고 허겁지겁 초막을 떠났다.
벽운 선생과 백령자가 오랜만에 운학산으로 돌아왔다.
벽운 선생은 세 제자에게. 백령자는 청령자에게 새로운 수행법을 가르쳤다.
석주와필섭이 새로 배운 행공 자세는 먼저 배운 것보다 어려웠다.
호흡법도 많이 달랐다. 숨을 들이쉬고 나서 잠시 멈췄다가 내쉬고,
또 내쉬고 나서도 멈췄다가 다시 들이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쉬는 시간과 들이쉬는 시간, 멈추는 시간의 길이를 같게 했다.
벽운 선생은 새로운 수련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공부는 천지의 기운이 너희 몸 속에 모이고, 또 몸 속에서 움직이게 만드는 공부다.
숨을 멈추고 쉴 때 진기가 모이고 활발히 돌아간다. 한데 숨을 억지로 길게 하지 마라.
그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들이쉬고 내쉬고 멈춰라. 그리고 마음과 정신을 먼저와같이
항상 단전에 집중시켜야 한다."
혜원이도 새로운 가르침을 받았다. 벽운 선생은 혜원일 따로 불렀다.
"이제 살갗으로 숨쉬는 게 아주 수월해졌구나."
"네, 피부의 기공이 자주 활짝 열립니다."
"그럴 땐 살갗만으로 숨쉴 수 있지 않느냐?"
"네, 한참씩 그래요."
"이제 음식을 끊어도 되겠다. 곡기를 끊지 않으면, 몸 속에 탁기가 자꾸 생겨난다.
이 탁기 때문에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질 않는다. "
이튿날부터 혜원인 곡기를 끊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마음도 생각도 한 점 남김없이 모두 여의었다. 거울처럼 투명한 정신을 굳게 지키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혜원이의 의식은 오로지 안으로만 향하여 마음을 환히 비춰 주었다.
벽운 선생은 한동안 운학산을 떠나지 않았다.
석주와필섭일 데리고 운학산 이곳저곳을 둘러보거나 초막에서 선정에 들곤했다.
백령자도 청령자를 지도하며 운학산에 머물렀다.
혜원이 음식을 끊자 잠이 사라졌다. 피부의 기공도 활짝 열렸다.
선정에 들면 몇 시간씩 피부로만 숨을 쉬었다.
혜원인 밤 낮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피부 호흡이 완전하게 이뤄지니 항상 진기가 충만했다.
몸에 가득한 진기 때문에 허기가 전혀 일지 않았다.
또, 추위나 더위가 일절 침범하지 못했다. 가없이 화평한 기운이 몸을 에워쌌다.
몸 속에도 몸 밖에도 화기(和氣)가 가득 감돌았다.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기쁨, 성냄, 애착, 미움, 싫어함, 두려움, 슬픔, 즐거움,
안타까움, 괴로움 등 모든 감정이 씻은 듯 사라졌다. 가슴에는 따스한 화기만이 넘쳐흘렀다.
감정이 사라지듯 몸의 감각도 없어졌다. 피부는 촉감에 끌리지 않았고,
입은 맛에 이끌리지 않았다. 귀는 소리에 이끌리지 않고, 코는 냄새를 좇아가지 않았으며,
눈은 색(色)과 형상에 끌려들지 않았다. 머리에는 잡념이 일지 않았다.
모든 감각을 끊어 버리니 기운이 전혀 흩어지지않았다.
감각 기관들은 이제 쓸데없이 기운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처럼 청허(淸虛)하게 비워졌다. 그러자 그 빈자리가 진기로 채워졌다.
모든 감각 기관에서 지혜의 빛이 뿜어 나왔다.
지혜의 빛으로 인해 눈은 더할 수 없이 밝아졌다. 깜깜한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보이고,
땅속 깊은 곳이나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사물들도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천안통(千眼通)을 얻었던 것이다.
천이통(千耳通)도 얻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그리고 전부터 지니고 있던 탁기는 진기에 밀려 밖으로 배출되었다.
진기가 가득 쌓이자 몸이 극도로 가벼워졌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혜원인 자신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속이 텅 비워지고 거기에 맑은 공기만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잠시 뒤에 몸이 붕 떠올라 바닥에서 한 자쯤 떨어진 곳에 멈췄다.
더 이상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혜원인 이상히 여겨 가부좌를 풀고서
어떻게든 바닥으로 내려오려 했다.
이때, 벽운 선생의 음성이 들려 왔다.
"괜찮다. 그대로 앉아 있거라. 마음을 쓰지 말고 맑은 정신을 굳게 지켜라."
혜원은 얼른 마음을 가다듬었다. 허공에 앉은 채, 그대로 다시 선정에 들었다.
얼마 후에 몸이 도로 방바닥에 내려왔다.
이날부터 자주 공중에 떠올랐다. 또,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
한 길이 넘은 허공에 앉아서 수련할 때가 많았다.
떠오르고 내려오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기도 했다.
그후, 몸 움직임이 더욱 가벼워졌다. 산에 오를 때는 날개가 달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어떤 기운에 이끌려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촉도 느끼지 못했다.
구름을 타고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늦게서야 장마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온 산의 초목군생들이 모처럼 생기를 얻었다.
소나기가 퍼붓는 날이었다. 돌풍이 불고 천둥 번개가 쳤다.
혜원인 방안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들어 있었다. 폭풍이 문고리를 흔들어대고 우르릉 쾅쾅
천둥이 울렸지만, 혜원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티 하나 없이 맑디맑은 그녀의 의식은
오직 내면의 한 점 빛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식 속에서는 이 내면의 불빛만이 홀로 반짝였다.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이 영원히 멈춰 버린것 같았다.
한밤중이었다. 운학산 가까이에 벼락이 떨어졌다.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로 천둥이 울렸다.
그 순간, 혜원의 내면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뿜어 나왔다. 혜원도 방안도 휘황한 빛에
휩싸였다. 혜원의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형체를 잃고 빛으로 화했다.
빛은 잠시 후에 사라졌다. 그런데 그 빛과 함께 혜원 자신의 몸도 어디론가 없어졌다.
몸은 사라지고 맑은 정신만 남아 아득한 하늘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에는 오색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오색 구름은 혜원의 의식을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혜원인 자신의 몸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잃어버린 몸을 찾고 싶었다.
혜원이 몸을 찾기 위해 막 고개를 돌리려 하는데, 벽운 선생이 혜원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혜원아, 두려워 마라. 네 몸은 제자리에 있다. 마음을 움직이지 말거라. 정신을 굳게 지키고,
무엇이 나타나도 거기에 끌려선 안 된다."
이 말을 마치자마자 벽운 선생의 모습이 사라졌다.
혜원인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마음이 이 음악 소리에 끌려가려고 했다. 혜원인 밖으로 빠져 나가려는 마음을 돌이켜 세웠다.
음악이 그쳤다. 이번에는 온갖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뻤다. 몸은 우리처럼 투명했다.
옷에서는 빛이 뿜어 나왔다. 선계에 사는 선동들 같았다.
아이들이 혜원일 향해 이리 오라 손짓했다. 혜원인 아이들한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갔다.
얼마쯤 가니 화려한 왕궁이 보였다. 옥으로 만들어 놓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이 왕궁의 뜰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신하들이 모두 일어서서 절을 올리며 혜원일 맞이했다.
혜원인 그들에게도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왕궁을 떠나 위로 위로 올라갔다.
얼마를 더 올라가니 찬란한 빛의 세계가 나타났다. 빛을 뿜는 새들이 날아다녔다.
빛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선인 선녀들 같았다.
빛사람들 여럿이 혜원일 호위했다. 혜원인 그들도 돌아보지 않았다. 외부로 향하려는
마음을 굳게 지키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 의식을 집중했다.
곧 빛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혜원인 더 높이 올라갔다. 홀연히 붉은 노을 같은 광채가
온 하늘을 가득 메웠다. 또 보랏빛 불꽃이 사방에서 일었다. 그리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이
들렸다.
그 순간, 모든 환상이 사라졌다. 혜원의 눈에 비로소 자신의 몸이 보였다. 환상에서 깨어나자
혜원인 머리에 통증을 느꼈다.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불로 지지는 것처럼 화끈거리기도
했다. 혜원인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혜원이 걱정하며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는데, 벽운 선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둥그런 원광이 벽운 선생을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벽운 선생은 혜원과 1 미터쯤 떨어져 앉았다. 혜원도 벽운 선생의 원광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통증이 약해졌다.
"스승님, 갑자기 머리가 터질 듯 아프네요. 제가 수련을 잘못했나 봐요."
혜원인 육신의 고통보다 행여 공부가 잘못되었을까 그게 더욱 걱정이었다.
"아니다, 공부가 잘됐다. 너의 진신이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다. 가슴의 중단전에 잉태됐던
진신이 갓 태어나 머리의 천궁으로 나오느라 그런다. 통증은 며칠만 지나면 없어진다."
머리의 통증은 사흘 후에 없어졌다. 통증이 사라지자 빛의 응어리 같은 게
가슴의 중단전에서 머리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혜원인 이 빛의 응어리에 대해
벽운 선생에게 여쭤 보았다.
"그것이 너의 진신이다. 진신이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늘에서 가지고 온 몸이다.
이 진신이 너의 본 모습이며, 진신이 잘 자라서 성인이 돼야 하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진신을 양신이라고도 한다.순수한 양기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순양의 기운은 곧 하늘의 진기다. 이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양신에 모아라.
앞으로 또 여러 가지 환상이 나타날게다. 부처님도 나타나고 신선도 나타난다.
그들은 진짜가 아니다. 모두 헛것이니 마음을 뺏기지 마라. 생각과 마음을 일체 여의고 잊으면
네 몸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 나온다. 그때 네 양신을 그 광채 앞으로 옮겨라.
그런 다음 생각으로 광채를 끌어 모아라. 그리하면 광채가 엽전만해진다.
이 광채를 양신 속에 집어 넣어라.
그러면 양신이 네 가슴의 중단전으로 옮겨 간다. 이 진신을 다시 천궁으로 겨둬들이고 깊은
선정에 들어라. 광채는 진신을 키우는 보약이다."
혜원이 또 깊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의식을 천궁(상단전이라고도 함)으로 집중시켰다.
천궁에 또 하나의 자기가 앉아 있는게 심안으로 보였다. 바로 벽운 선생이 말한 양신이었다.
양신도 혜원의 육신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벽운 선생은 혜원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혜원이 이 관문을 무사히 넘기도록 가까이에서 보살폈다.
혜원의 눈앞에 또 환상이 나타났다. 부처님, 예수님, 신선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느 신선은 책을 내밀기도 했다.
혜원인 미동도 하지 않고 천궁의 양신만을 생각했다. 그러자 환상들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이틀이 지났다. 혜원인 이틀 내내 선정에 들어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오색 구름이 홀연히 혜원의 앞에 피어올랐다. 또, 혜원의 몸에서 한 줄기 광채가 뿜어 나와
구름 속으로 뻗쳤다. 광채와 구름이 어우러져 둥그런 금빛 원광이 생겼다.
혜원인 자기의 양신을 앞으로 내보냈다. 양신이 원광 속에 자리를 잡고 단정히 앉았다.
그런 다음 마음으로 광채를 응축시켰다.
광채가 동전만해졌다. 이것을 양신 속으로 빨아들였다. 그리고 양신을 다시 거둬들였다.
이러기를 몇 번 거듭했다. 그러자 양신의 형체가 더욱 뚜렷해졌다.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만큼
형체가 분명했다. 안개처럼 하얀 빛깔에다 크기는 10센티쯤 되었다.
장마가 물러갔다. 하늘이 푸르러지고 무더위가 몰려왔다. 햇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장마가 끝난 지 며칠 후였다. 벽운 선생은 혜원이더러 거처를 옮기라고 했다.
혜원이 새로 옮긴 거처는 기린봉 중턱이었다. 기린봉은 초막의
내 청룡(제일 가까운 왼쪽 산줄기) 끝에 솟아오른 봉우리다. 초막에서는 백 미터쯤 떨어져 있다.
기린봉의 생김새는 기린의 머리와 흡사하다. 늘씬하게 솟아오른데다 꼭대기가 일자형이어서
기린의 머리를 연상시킨다.
기린봉 아래쪽은 사방이 절벽이다. 절벽의 높이가 여섯 길은 족히 넘었다. 절벽 사이사이에는
소나무들이 자랐다.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라서 특수한 장비가 없이는 기린봉에 오르기
어려웠다.
하루는 벽운 선생이 혜원일 데리고 기린봉 아래로 갔다. 거기는 절벽이 제일 낮은 곳이었다.
그래도 네 길은 충분히 되었다. 절벽 위쪽은 평평한 바위였다.
"저 위로 올라가자. 혜원이 너부터 뛰어올라라."
벽운 선생이 절벽 위쪽을 가리켰다. 혜원인 위를 올려다보았다.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걱정 마라. 너는 이미 그만한 힘을 지녔다. 어서 올라가라."
벽운 선생이 재촉하자, 혜원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한데 놀랍게도 몸이 붕 떠올랐다.
다섯 길이 넘게 솟구쳐 올랐다가 바위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어서 벽운 선생도 위로 올라왔다. 벽운 선생은 눈깜짝할 사이에 몸을 옮겼다.
너무나 짧은 순간이라서 혜원인 위로 올라오는 스승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기린봉 중턱까지 올라갔다. 중턱에 스무 평쯤 되는 평지가 있었다. 평지 뒤쪽엔 바위굴도 있었다.
오른쪽에는 아주 작은 샘이 있었다. 바위에 동그란 홈이 파였는데, 거기서 물이 솟아나왔다.
크기는 지름이 한 자, 깊이가 반자쯤 되었다. 그동안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물이 철철 넘쳤다.
벽운 선생은 혜원일 굴 안으로 데려갔다. 굴 입구는 문짝 하나만했다. 안은 굴 같지 않게 밝고
습기가 없었다. 넓이는 두 평 남짓 되었다. 천장은 꽤 높았다. 3미터가 넘을 듯싶었다.
이 굴은 자연굴이 아닌 것 같았다. 내부의 벽이 자로 재어 다듬은 것처럼 반듯반듯했다.
입구도 직사각형이었다. 바닥은 흙이었다. 물기가 잘 빠지는 마사토가 깔려 있었다.
벽운 선생은 바깥쪽을 향해거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혜원을 자기 옆에 나란히 앉혔다.
입구를 통해 밖이 내다보였다.
골짜기 맞은편에 관음봉, 세지봉, 수정봉, 보현봉, 문수봉, 이 다섯 봉우리가 가지런히
솟아 있었다. 초막에서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그들의 자태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선인이나 보살이 형상과 흡사했다.
다섯 봉우리 뒤편으로 또 수많은 산봉우리들과 서해 바다가 보였다.
작은 산봉우리들이 볼록볼록 아스라하게 펼쳐진 모습이 꽃잎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하늘 가득 피어오른 구름송이 같기도 했다.
"여기는 너처럼 양신이 몸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공부한 곳이다.
갓 태어난 양신을 탈없이 키우기에 참 좋은 도량이다.
임독맥이 열려 소주천이 이뤄진 사람을 인선이라고 한다.
인선은 건강하게 무병장수를 누릴 수 있다.
너와 같이 임독유통도 되고 또 양신이 태어난 사람을 지선이라 부른다.
지선은 육신통을 깆추고 자기의 본성, 참모습을 찾은 사람이다.
지선이 돼야 비로소 세속을 초월하여 성스러운 세계에 입문하는 것이다.
지금 너의 양신은 막 태어난 아기와 마찬가지다.
이제부터는 아기가 어른이 되도록 잘 키워야 한다.
양신이 완전히 다 자라야 신성의 경지에 오은다. 그런 사람을 천선이라 부른다.
천선은 불사불멸한다. 양신은 하늘과 하나이기 때문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양신을 어른으로 키우는 공부를 하거라,
오로지 마음과 몸을 잊고 청허한 정신을 지켜야 양신이 자란다.
선정에 들어 네 몸과 마음이 흩어져 허공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해라. 거울처럼 맑은 정신만 남기고 모두 잊어야 한다."
벽운 선생은 양신을 키우는 방법과 함께 출입시키고 활동시키는 요령을 일러주었다.
"아기들은 자꾸 움직여야 잘 자란다. 몸이 골고루 발달하고 힘이 붙으려면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 양신도 마찬가지다. 움직이고 활동해야 굳건해지며 자유자재한 능력을 얻는다.
자, 한번 네 양신을 밖으로 내보냈다가 거둬들여 보자.
깊은 선정에 든 다음 고요히 앉아 있으면 네 정수리가 열리고 한 줄기 빛이 밖으로 뻗쳐 나간다.
그 빛을 좇아 양신을 내보내라.
도로 거둬들이려면 빛을 먼저 양신 안으로 끌어 넣은 뒤에 갔던 길을 따라 돌아오게 하거라.
처음부터 멀리 내보내면 위험하니 한 걸음 밖까지만 보냈다 얼른 거둬들여라."
혜원은 곧 선정에 들었다.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경지에 이르러 한 줄기 광채가 정수리를 열고
밖으로 뻗쳐 나갔다. 그런 다음에 양신을 내보냈다.
양신은 50센티쯤 사이를 두고 혜원과 마주앉았다. 양신의 모습은 전보다 더 뚜렸했다.
눈처럼 희고 은은한 광채가 감돌았다.
혜원인 먼저 내뿜는 빛을 양신 안으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양신으로 하여금 되돌아오게 했다. 양신이 되돌아와 상단전 천궁에 자리를 잡았다.
"잘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수리를 열고 광채가 뻗쳐 나가면, 즉시 양신을 출입시키거라.
그런데 날씨가 나쁜 날이나 밤에는 내보내지 마라. 위험한 일이 생긴다.
해가 쨍쨍 내리쬘때도 안 된다.
갓 태어난 양신은 바람이 불면 넘어지고 강한 햇빛을 쬐면 말라 버린다.
비가 오고 천둥 번개가 치면 놀라며 두려워한다.
양신이 처음 출입할 때는 네 몸 주위에서만 움직이게 하고, 차츰차츰 더 멀리까지 내보내라.
나중에는 천리 만리 밖에 보내도 괜찮다.
양신이 다 자라면 온 우주가 양신의 집이 된다. 천하가 양신의 방이다.
단걸음에 수만 리를 가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신을 나타낸다.
삼천대천 세계가 꽉차게 분신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변화무쌍하여 못 해내는 게 없다.
양신을 키우는 동안에도 도력이 일취월장 높아진다. 이미 얻은 육신통이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이 도력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꼭 필요할 때만 쓰거라."
벽운 선생은 이 말을 남기고 운학산을 떠났다. 혜원인 다시 깊은 선정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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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성자들의 시대 6-깨어 있으면서 비우라
"무릇 참된 도는 마음 닦는 것을 수도의 주춧돌로 삼는다. 마음이 닦이면 정신이 환하게 밝아진다. 몸도 따라서 깨끗해진다. 흔히들 선도인은 몸만을 닦아서 불로장생을 누리고, 불도인은 마음만을 닦아서 해탈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과 몸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마음은 몸의 주인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다. 이들은 종이의 앞뒷면과 같다. 그래서 마음이 제대로 잘 닦이면 몸도 닦인다. 몸이 상하면 마음도 번거롭다. 마음이 탁하면 몸도 따라서 약해진다. 그러니 마음 닦는 게 곧 몸 닦는 것이요, 몸 닦는 게 마음 닦는 것이다.
그런데 선도인 중에는 몸만을 중히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마음 닦기를 소홀히 한다. 거꾸로 불도인 중에는 마음만을 중히 여기고 몸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수도인들은 올바르게 수행하기 어렵다.
우리 도는 마음과 몸을 똑같이 함께 닦는 도이다.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하늘몸, 하늘 마음, 하늘 정신으로 바꿔 놓는다. 우리 도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하늘의 도라 일컬을 수 있다. 석주와 필섭인 오늘부터 얼마간 마음과 정신을 닦는 공부에 전념하라.혜원인 그동안 해오던 공부를 계속하고."
벽운 선생은 혜원일 방에 남겨둔 채 석주와 필섭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해는 백학봉 위로 불쑥 솟아올라 있었다. 햇살이 퍽 따스했다.
따뜻한 햇살을 받고 눈이 마구 녹아 내렸다. 온 산에 봄기운이 가득 감돌았다. 벽운 선생은 눈이 모두 녹아 내린 마당가 너럭바위에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혔다. 그리고는 손으로 관음봉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저 관음봉만 쳐다보거라. 멀리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정신을 오로지 관음봉에 집중하거라. 잡념이 떠오르면 즉시 지워 버려야 한다. 눈길도 절대 딴 데로 돌리지 말고."
벽운 선생은 이렇게 이르고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석주와 필섭은 서로 1미터쯤 떨어져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관음봉에 모았다.
초막 위편 소나무 위에는 청령자와 백령자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소나무 가지 아래로는 눈녹은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필섭은 관음봉의 아름다운 자태에 찬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수려하구나! 예사 봉우리가 아니야. 신령스런 기운이 넘쳐흘려.'
이런 생각을 하는 필섭의 머리에 문득 호산 스님이 떠올랐다.
관음봉처럼 생긴 산봉우리를 그려 놓고, 이런 봉우리는 성현이나 선인, 대학자를 배출한다고 가르쳐 주던 모습이었다.
이때 벽운 선생이 잔기침을 하더니,
"필섭아, 왜 벌써 엉뚱한 생각을 하느냐"고 조용히 나무랐다.
필섭은 흠찟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한데 벽운 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초막 안에 있으면서 음성만을 보냈던 것이다. 필섭은 스승의 기이한 도력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 초막 쪽을 향해 깊이 머리 숙여 사죄했다.
잡념이 일기는 석주도 마찬가지였다. 관음봉을 뚫어지게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관음봉에 겹쳐 돌아가신 부모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석주는 스승의 분부를 생각하고 얼른 부모님의 모습을 마음에서 지워 버렸다.
두 사람은 고삐를 바짝 죄듯 마음을 다잡고 관음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잡념이 일었다. 푸르른 하늘, 초막 아래 골짜기, 관음봉 너머 겹겹으로 펼쳐진 산줄기, 아스라이 보이는 서해 바다 등으로 눈길이 자꾸 옮겨 갔다. 바람이 불면 바람 소리가, 새가 울면 새소리가 의식을 어지럽혔다. 두 사람은 미끄러지듯 다른 곳으로 달려가려는 시선을 붙들어 매고, 머리에 떠오르는 잡념들을 생기는 대로 떨쳐 냈다.
이것은 자신과의 지루한 싸움이었다. 쉴새없이 움직이려는 마음과 정신을 한곳에 잡아 매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힘든 노동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고행이었다.
정신을 한곳에 모으는 것을 '응념'이라고 한다. 불가, 선가, 요가에서는 '응념'이 수행의 기초가 된다. '응념'은 모든 번뇌에서 해방되어 해탈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여러 관문 중 첫번째 것이다.
두 사람이 관음봉과 씨름하는 사이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점심때가 되자 혜원이 초막에서 나와 두사람을 불렀다.
"도형들, 스승님께서 그만 들어오시래요. 들어와 식사들 하세요."
두사람은 그제야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석주는 다리가 굳어져서 잠시 주물러 준 다음에댜 일어설 수 있었다. 벽운 선생은 두 사람이 점심 식사를 한 다음에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수도란 본래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람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번뇌에 물든다. 태아 시절엔 그래도 번뇌가 적은 편이나, 세상에 태어난 뒤에는 온갖 번뇌로 시달린다. 번뇌에 물들어 살다가 자기의 본래 모습을 거의 다 잃게 된다.
그러니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번뇌를 모두 끊어야 한다. 사람은 몸과 마음과 정신으로 이뤄졌다. 몸을 백이라고도 하고, 마음을 혼이라고도 하며, 정신을 영이라고도 한다. 번뇌가 침범하면 영·혼·백 모두가 탁해진다. 유리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것처럼 본래의 진면목을 잃어버린다.
너희가 오늘 시작한 공부는 번뇌를 끊는 공부다. 번뇌는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번뇌를 뿌리까지 뽑아 없애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도가 아주 높아져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또, 뽑아 버릴 만한 힘을 길러야 한다."
석주와 필섭은 보름 동안 관음봉을 바로 보며 응념 수련을 했다. 열흘쯤 지난 뒤에는 잡념을 모두 떨치고 시선을 집중할 수 있었다. 보름이 지난 후, 벽운 선생은 두 사람에게 새로운 공부를 시켰다.
"오늘부터는 눈을 감고 앉아 있어라. 눈을 감은 채 관음봉을 떠올리거라. 양눈썹 사이 약간 위쪽에 마음의 눈이 있지 않느냐. 그 마음이 눈을 심안이라고도 하고, 천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심안으로 관음봉만을 보고 있어라."
심안의 눈길을 한곳에 집중시키기는 육안의 눈길을 집중시키는 것보다 더욱 어려웠다. 관음봉의 모습이 자꾸 사라지고 엉뚱한 것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 했다. 석주와 필섭은 옅은 그림자처럼 희미한 관음봉의 모습을 심안에 잡아 두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하루하루 지나면서 이번 공부에도 차츰 익숙해졌다.
열흘쯤 지나자 관음봉의 아름다운 모습이 심안에 불쑥 솟아올라 움직일 줄 몰랐다. 두 사람은 한번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몇 시간씩 심안의 관음봉만을 바라볼 수 있었다.
또, 보름이 지났다.이제 산마루에도 완연한 봄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따스한 마파람이 몰려와 응달에 남았던 잔설을 모두 녹였다. 땅속에서는 씨앗들이 싹을 틔웠다.
청령자는 여전히 백령자의 가르침을 받으며 백학봉에 머물렀다. 한 번 허기를 채우려고 산에서 내려갈 뿐, 나머지 시간은 석주네처럼 수련에 전념했다.
백령자는 거의 늘 청령자와 함께 지냈다. 청령자는 백령자한테서 어린 시절 어머니 품에 안겨 있을 때보다 더 큰 평화를 느꼈다. 백령자와 함께 지내는 동안엔 한번도 두려움이나 불안에 휩싸이지 않았다.
알에서 깨어난 이후, 청령자가 이때 처럼 평안히 지내 본 적이 없었다. 자기를 해칠 적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서려 있었다. 그 때문에 늘 긴장했고, 불안해 했으며, 경계심을 풀기가 어려웠다.
백령자를 만난 뒤,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 자리에 아늑한 평화가 대신 깃들였다 백령자의 도력이 청령자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령자는 청령자가 사냥을 나갈 때는 함께 따라가지 않았다.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청령자는 백령자와 떨어져 홀로 사냥을 나가면서도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먹이를 빨리 찾으려고 초조해 하지도 않았다. 운학산에서 가까운 영주천에 날아가 어슬렁거리다 물고기 몇마리를 잡아먹고 천천리 돌아오곤 했다,
날씨가 아주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 청령자가 사냥을 나갔는데. 처음 보는 학 다섯 마리가 먼저 와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고요했던 청령자의 마음에 파문이 이렀다. 무리에서 떠난 외로움, 무리 속에서 지낼 때 느꼈던 흥겨움과 아늑함, 짝을 맺고 싶은 열망 등이 한데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청령자는 낯선 학들과 어우러져 사냥을 했다 그러면서 백령자와 같이 있을때는 느껴 보지 못했던 즐거움을 맛보았다.
얼마 후, 낯선 학들이 저희 무리가 모여 사는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청령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갔다.
청령자가 낯선 학들과 함께 5리쯤 날아갔을 때였다. 갑자기 백령자의 울름 소리가 들려 왔다. 청령자는 잠시 동안 어찌할까 망설였다. 청령자의 날갯짓이 점점 느려졌다. 낯선 학들은 청령자를 훨씬 앞질러 날라 갔다.
드디어 청령자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청령자는 운학산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득히 먼 서해 바다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청령자가 개심사 입구에 이르자 백령자가 마중을 나와서 청령자와 함께 백학봉으로 갔다.
석주와 필섭이 심안으로 관음봉만을 바라보는 수련을 시작한지 보름 만에, 벽운 선생은 두 사람에게 또 새로운 수련을 시켰다. 이번 공부는 마음과 정신을 텅 비워 허공과 같은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불가 선정(禪定) 수련과 똑같은 공부였다.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벽운 선생은 머릿속어 떠오르는 모든 상(象)을 먼지로 여기고 남김없이 떨쳐 버리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를 이루려면 마음과 정신이 잘 닦인 거울처럼 깨끗해야 한다. 심혼(心魂)을 바람 한 점 없는 바다같이 고요하게 가라앉히거라. 또, 정신은 또렷이 깨어 있으되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거라. 너희가 굳이 뭘 생각하지 않아도 눈을 감고 있으면 온갖 상념이 계속 떠오를 게다.머릿속에 무엇이 떠올라도 그것에 끌려가지 마라. 그냥 내버려두면 스스로 물러간다.
또,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 잠이 잘 온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졸음이 몰려오는 수가 있다. 그러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잠에 떨어지면 영(靈)이 탁해진다."
이번 수련은 지난번 수련보다 더욱 어려웠다.또렷이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환하게 비우기가 참 힘들었다. 머릿속에 갖가지 상념들이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필섭인 그래도 절간 생활을 하면서 더러 참선도 해봤던 터라 석주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석주는 한참 동안 온갖 잡념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경험한 일들, 갖가지 중생들과 물건들……, 별의별 상념들이 돌아가며 떠올랐다. 자신과 친했던 사람들이 떠오르면 마음이 자꾸 그들에게 끌려가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스승의 당부를 생각하고는 퍼뜩 놀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석주는 무엇보다 사람들한테 끌리는 마음을 끊어버리기가 어려웠다. 부모형제나 친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그들한테로 딸려 갔다. 특히, 많은 괴로움을 겪으며 사는 이들이 석주의 마음을 깊이 끌었다.
자기와 같은 불구자들, 부모가 일찍 죽은 아이들,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 버려지는 아기들, 중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 이런 사람들이 자주 떠올랐다. 그들이 심안으로 보일 때마다 가슴이 무거웠다. 그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마음을 휘어잡았다. 한없이 애틋하고 안쓰러웠다.
하루는 스승의 당부를 잊고 수련 시간 내내 그들을 생각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벽운 선생이 석주를 따로 불렀다. 석주는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게 죄스러워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벽운 선생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그리고는 스승께서 큰 꾸지람을 내리시길 기다렸다.
"석주야."
뜻밖에도 석주를 부르는 벽운 선생의 음성이 매우 부드러웠다.
"예."
석주는 송구스러워하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불쌍한 중생들이 그리도 안타까우냐?"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 사람들이 생각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저미고 안타깝습니다."
벽운 선생은 그윽한 미소로 제자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자비심이 매우 깊어 그리 되는 것이다."
벽운 선생의 음성이 더욱 따뜻해졌다. 봄바람처럼 온화한 기운이 석주의 마음을 감싸 주었다.
벽운 선생은 잠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석주야, 윤회전생에 관해 들은 바가 있느냐?"
석주는 방헌수를 떠올렸다.
"예. 전에 제가 형님으로 모시던 분한테서 들었습니다."
"중생들이 당하는 고통은 전생의 업보다. 자기가 뿌린 씨앗을 그대로 거두는 것이다.
네가 도를 이루면 그 이치를 환히 알게 된다."
"하나 전생의 업이라 해도 너무 안됐습니다."
"그 업보를 네가 대신 받고 싶을 때도 자주 있지 않았더냐?"
"예, 그랬습니다."
석주는 자신이 과거에 지녔던 마음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모두 알고 있는 스승의 도력에 새삼 놀라면서 대답했다.
"그게 보살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지녀야 바른 도를 깨우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대신 업보를 받지는 못한다. 다만,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길이 있다. 석주야, 네가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중생들의 고통이 사라지겠느냐?"
"모릅니다."
"네 힘으로 중생들을 윤회업보의 고통에서 건져 줄 수 있겠느냐?"
"못 합니다."
"그러니까 힘을 길러야 하느니라. 네가 도를 끼우치면 그 힘이 저절로 생긴다. 참된 도인이 될 때까지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놓도록 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석주는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돌아서는 석주의 가슴엔 환희로 가득 찼다. 벅찬 감동을 주채하기 어려웠다. 수행을 잘하면 언젠가 자신이 온갖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을 건져 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다.
벽운 선생의 말씀을 들은 이후에도 며칠간은 정신을 깨끗이 비우기가 쉽지 않았다. 갖가지 상념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것들에 마음을 오래 빼앗기지는 않았다. 얼른얼른 지울 수가 있었다.
선정 수련을 시작한 지 보름 가까이 되자 비로소 한참씩 맑은 정신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 시간 정도는 환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의식을 비워 둘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벽운 선생은 제자들을 초막에 남겨 두고 어디론가 떠났다 며칠 만에 돌아오곤 했다. 제자들은 스승이 어디에 가서 뭘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백령자는 더러 벽운 선생과 동행했다. 청령자는 백령자가 없어도 함께 있을 때와 똑같이 지냈다. 하루에 한 번 사냥을 나가고, 나머지 시간에는 수행에 몰두했다.
이제 완연한 봄이 되었다. 새싹들이 땅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나비와 개미들도 분주히 돌아다녔다.
다람쥐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쉴새없이 움직였다. 나뭇가지들은 물을 먹어 푸른빛을 진하게 띠었다.
필섭과 석주가 선정 닦는 공부를 하는 사이에 혜원은 도인 체조를 하며 단전 수련을 했다. 그녀는 주로 방안에서만 수련했는데, 날씨가 풀리자 종종 밖에서도 수련했다.
석주는 휴식 시간에 혜원이 수련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도인 체조를 하는 혜원의 모습은 참으로 우아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학의 날갯짓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힘이 넘쳐 보였다.
체조를 마치면, 몇 가지 다른 자세를 취하고 단전 호흡을 했다. 한 가지 자세를 취하면 반시간 정도 꼼짝 않고 있다가 다시 새로운 자세로 바꿨다.
혜원이 취하는 자세는 서 있는 것과 앉아 있는 것, 그리고 누워 있는 것, 세 가지였다. 누워 있는 자세는 엎드려 누운 자세와 옆으로 누운 자세, 둘이었다. 혜원은 이런 자세들을 취하고 선정에 들어 단전 호흡을 했다. 선정에 든 혜원의 모습은 잘 만들어 놓은 서고상 같았다.
날씨가 아주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벽운 선생은 출타중었고, 혜원이는 이날도 밖에서 수련을 했다. 석주와 필섭은 마침 휴식 시간이라서 혜원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혜원이는 몸푸는 체조를 한 다음 단전 수련을 시작했다. 석주와 필섭이도 휴식을 마치고 수련에 들어가려던 차였다. 이때 다람쥐 한마리가 나타나 쪼르르 혜원이 앞으로 달려갔다. 다람쥐는 혜원이로부터 2미터 떨어진 곳에 쪼그리고 앉았다.
채 1분도 안 되어 또 다람쥐 세 마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먼저 온 다람쥐 옆으로 달려가 나란히 앉았다. 다람쥐 네 마리가 나란히 엎드린 모습이 참 신기했다.
석주와 필섭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수련도 잊고 다람쥐들을 지켜봤다. 다람쥐들은 마치 선정에 든 것처럼 꼼짝 않고 엎으려 있었다.
조금 뒤에는 더욱 이상한 일이 생겼다. 초막 근처에 있던 새들 몇 마리가 혜원이 옆으로 날아든 것이었다. 또 새로운 다람쥐들이 달려왔다. 새들도 불어났다. 고슴도치와 들쥐까지 떼지어 혜원이 옆으로 다가왔다. 초막 주변에서 사는 길짐승과 날짐승들이 모두 모여드는 것 같았다.
이들은 혜원을 둥글게 둘러싸고 앉았다. 그리고는 털끝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석주와 필섭인 숨을 죽이고 그 신기한 광경을 지켜봤다.
한 시간쯤 지나서 혜원인 자세를 바꿨다. 혜원인 서 있던 자세에서 아주 천천히 몸을 낮춰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움직임이 어찌나 고요한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짐승들은 혜원이 자세를 바꿀 때도 그냥 그대로 있었다. 초막 뒤 왕소나무 위에는 청령자가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필섭인 문득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어 버린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없는 세계, 영원불변의 세계로 홀연히 들어선 기분이었다. 필섭 자신도 그 세계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았다. 육신과 정신의 활동이 한순간에 멎었다. 몸은 한없이 가벼웠고, 정신은 지극히 투명했다.
석주도 필섭과 비슷한 체험을 했다. 더할 수 없이 아늑한 평화속으로 영원무궁한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 몸도 마음도 사라지고 맑디맑은 정신만 남았다. 자신이 투명한 거울로 화했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날, 혜원의 수련 시간은 매우 길었다. 평소의 두 배는 되었다. 한 가지 자세에 1시간 이상 걸렸다. 마지막에 가부좌를 틀고 수련하는 시간은 무척 길었다. 3시간 가량 되었다.
아침나절에 수련을 시작했는데. 해가 거의 다 진 뒤에야 끝났다. 혜원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을 때는 이미 서편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숯덩이 처럼 빨간 저녁해가 서해 바닷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혜원이 수련을 끝내고 움직이자, 초막에 몰려들었던 짐승들도 눈을 뜨고 꼼지락거렸다. 길짐승들은 귀를 쫑긋 거리거나 몸을 흔들었다. 날짐승들은 앉은 채로 가볍게 날개짓을 했다. 석주와 필섭이도 선정에서 깨어났다.
승들은 초막 마당에서 잠시 더 머문 뒤에 뿔뿔이 흩어져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갔다. 혜원인 한없이 자비로운 미소로 그들을 배웅했다. 그 순간
필섭은 혜원이 보살이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석주가 보기에도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였다. 석주와 필섭은 잠시 동안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제, 크게 깨우쳤구만!"
짐승들이 모두 돌아간 뒤, 필섭이 혜원에게 격한 어조로 말했다. 감격에 겨운 말투였다.
"예? 도형,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혜원이 깜짞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짐승들까지 큰 은덕을 입지 않았나. 장하시네. 높은 도를 얻으셨구먼."
필섭은 외경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혜원일 쳐다보며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는 갑자기 땅에 넙죽 엎으려 큰절을 올렸다.
"아유, 도형. 왜 이러세요. 잘못 아신 거예요."
혜원인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손을 마구 내젓더니, 자기에게 자꾸 절을 바치는 필섭의 어깨를 부여 잡았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필섭인 절을 더 올리려 했다. 그러나 혜원의 손에 잡혀 꼼짝못했다.
석주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필섭인 체격이 아주 다부졌다.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만큼 힘도 매우 좋았다. 키는 보통이었으나 기운이 장사였다. 그런 필섭이 갈대처럼 연약해 보이는 혜원이 한테 잡혀 꼼짝못하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석주는 저런 힘이 어떻게 나올까 매우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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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성자들의 시대5 - 하늘사람되는 길에 들어서다
예전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않았던 뭇 중생과 삼라만상의 이치가 백령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백령자에겐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신비롭기 그지 없었다. 또,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백령자는 온갖 세상사에 관해 의문을 품었다. 의문이 이는 대로 벽운 선생한테 물었다. 생명이 어찌하여 태어나고 왜 죽는지,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죽은 다음에는 또 무엇이 되는지, 왜 중생들은 갖가지 종류로 갈리었는지, 왜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혀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뭇 중생들이 짝을 찿아 헤매는지, 짝이 되고 어버이가 되고 자식이 되는 인연은 어찌해서 이루어지는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생겼다.
벽운 선생은 일년여 동안 백령자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백령자의 정신은 무한한 우주를 향해 끝없이 넓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벽운 선생에게 백령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중생들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아귀다툼에서 헤어날 길은 없는지요?"
"있다."
벽운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하면 그리 될까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리 된다. 나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벽운 선생의 이 대답은 백령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그동안 백령자는 허기를 느낄 때마다 강이나 논으로 날아가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자기가 사냥을 나가 있는 동안 벽운 선생 역시 뭘 먹는 줄 알았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령자는 자신도 벽운 선생처럼 살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허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 싫어졌던 것이다. 자기로 인해 죽어 가는 물고기들이 너무 불쌍했고,깊은 술픔을 느끼곤 했었다.
"저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지요?"
"아무렴, 그리 할 수 있고 말고."
벽운 선생의 얼굴에선 은은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하여 먹지 않고도 사는지요?"
"다른 중생의 몸 대신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을 먹으면 된다. 그러면 먹지 않아도 배무르고 마시지 않아도 목이 안 마르다. 기운은 더욱 넘친다. 또, 몸에 땅 기운 하늘 기운이 가득 차면, 그 누구한테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 아무도 감히 해치려 들지 못한다. 걱정 근심 하나 없이, 오로지 불쌍한 중생들을 돌봐 주며 자유로이 살 수 있다."
"저도 땅 기운 하늘 기운을 먹을 수 있는지요?"
"목숨을 지닌 중생은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
"땅 기운 하늘 기운을 어떻게 먹는지요?"
"공부를 해야 한다. 네가 어버이한테서 날아다니는 법이나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우듯이 그 법을 배우면 된다."
"어서 배우고 싶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가르쳐 주마."
백령자는 이날부터 벽운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선도를 닦기 시작했다. 수행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수행을 시작한 지 일년도 안 되어 백령자의 식성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먹는 양이 줄었다. 조금씩 먹어도 배가 불렀고 기운이 넘쳤다.
두 번째 변화는 육식이 싫어진 것이었다. 학은 육식성 동물이다. 그런데 수행을 시작한지 2년쯤 되자 육식이 싫어졌다. 몸에서 안 받았다.
백령자는 자연히 육식을 끊고 열매나 풀을 먹었다. 식욕도 날이 갈수록 줄었다. 하루에 한 번 먹던 것이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꼴로 계속 줄어 갔다. 그러다가 10년쯤 후에는 곡기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우주의 진기가 몸 속에 충만해지니 먹고 마실 필요가 없었다.
곡기를 아주 끊자, 몸 속에 있던 노폐물이 모두 배출되었다. 몸이 정화되면서 마음은 더욱 고요해졌다. 정신도 한없이 맑아 졌다. 잠까지 사라졌다. 마음의 맨 밑바닥에 있던 번뇌의 뿌리도 남김없이 뽑혀 나갔다.
백령자는 수행을 시작한 지 15년 후에 깨닭음을 얻었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환히 꿰뚫어 알게 되었다. 또,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삶을 누렸다.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새벽녘까지 백학봉 정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느덧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멀리 백두대간 쪽 동녘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갔다.
이때, 가없이 자비롭고 온화했던 벽운 선생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탁하고 흉흉한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모습이 심안으로 보였던 것이다. 특히 생명을 죽이는 살기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백령자도 세상 곳곳에 감도는 살기를 몸으로 느꼈다. 백령자의 마음 역시 짙은 어둠으로 덮였다.
'가엾은 중생들…….'
벽운 선생은 그 흉흉하고 탁한 기운에 휩쓸려 온갖 고초를 당하는 중생들을 떠올렸다. 몇십 년 후 살기가 극성을 부릴때, 이세상의 중생들에게 닥쳐올 대환난도 심안으로 똑똑히 보았다. 무수히 많은 중생들이 참혹하게 죽어 갔다. 그들의 처참한 신음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려 왔다.
살기는 온 세상 방방곡곡에 감돌았다. 산천에 감도는 살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흉포하게 만들었다. 흉포해진 사람들이 곳곳에 서 무자비하게 힘없는 중생들을 괴롭혔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뿜어 나온 살기가 또 산천의 기운을 더욱 탁하고 흉하게 만들었다.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악기.살기가 자꾸 쌓여 갔다. 명산 중의 명산이며 많은 성자들을 길러낼 운학산에도 그 흉흉한 기운이 곳곳에서려 있었다.
벽운 선생의 심안에 상제봉과 천마봉이 나란히 떠올랐다. 곧이어 비룡봉, 장군봉도 보였다. 상제봉은 백학봉의 동남쪽에 솟아오른 봉우리다. 백학봉과 20여 리쯤 떨어져 있다. 천마봉은 백학봉 북쪽 시나리오쯤 떨어진 곳에 있는 봉우리다. 장군봉은 서남쪽으로 시오리쯤 떨어져 솟아있다.
이 네 봉우리에는 제왕을 배출하는 대명당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풍수가들이 찾아왔다. 어떤 풍수가들은 그 유명한 천하명당을 한 번 구경이라도 해보려고, 또 어떤 풍수가들은 자신이 차지하려는 욕심에서 이곳을 드나들었다.
상제봉에 있는 명당은 상제봉조형(하늘의 임금님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는 형국)이라 한다. 천마봉에는 천마사풍형( 하늘을 나는 천마가 바람을 내뿜는 형국)의 명단이, 비룡봉에는 비룡상천형(용이 하늘을 날으는 형국) 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또, 장군봉에는 장군대좌형(장군이 버티고 있는 형국)의 병장이 깃들여 있다고 한다.
숱한 풍수가들이 드나들었지만, 누가 그 명당들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명당의 빼어난 지기를 입어 제왕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지금까지 전해 오지 않는다. 또, 그 명당들이 양택지지(집터)인지 음택지지(묘지 자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풍수가들이 찾아오면, 산신령께서 그들의 눈을 흐려지게 만들어 어디가 명당터인지 도저히 알 수 없게 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게 하거나, 안개나 구름으로 가려 버린다는,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들만 떠돈다.
벽운 선생은 빼어난 대명당을 품고 있다는 그 네 봉우리에 엄청난 탁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봉우리마다 특정한 어느 한 장소에서 흉한 기운이 강하게 뿜어 나왔다. 그 기운은 매우 거칠고 음습했다. 흉한 기운들이 뿜어 나오는 곳에서 좀 떨어진데에는 숱한 풍수가들이 찾으려다 실패한 대명당들이 있다. 그곳들만은 아주 맑고 꺠꿋한 기운이 감돌았다. 숱한 생명을 살려 줄 좋은 기운이 었다.
벽운 선생의 심안에 문득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네 봉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풍수가들이 아니었다.그들 무리에는 벽운 선생의 옛친구도 하나 끼여 있었다. 그들은 흉한 기운이 가득 감도는 곳으로 몰려왔다. 거기서 커다란 신통력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따르는 제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
마음속으로 이렇게 탄식하는 벽운 선생의 표정이 어욱 어두워졌다.백령자 역시 앞으로 많은 사도의무리가 운학산 곳곳에 들어오리라는 걸 예견했다. 벽운 선생의 제자들이 그들로 인해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하는 모습이 심안으로 보이기도 했다. 백령자의 마음에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마 후에 백두대간 위로 붉은 아침해가 둥실 떠올랐다.아직 눈에 뒤덮인 뭇 산줄기들이 새하얀 자태를 드러냈다. 그 위로 아침 햇살이 퍼져 나갔다.
벽운 선생의 심안에 새로운 사람들이 떠올랐다. 벽운 선생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좇아올 수행자들이었다.
운학산뿐 아니라, 방방곡곡의 명산에 벽운 선생과 그의 도반들한테서 가르침을 받게 될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수행자들은 앞에서 보았던 사도의 무리들과 정반대되는 사람들이었다.그들의 발길은 자기도 모르게 아름다운 정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의 명당들로 향했다.거기서 빼어난 정기를 받아 참삶의 길을 깨우쳤다. 깨달음을 얻은 그들에게서 밝고 환한 빛이 뿜어 나왔다. 그 빛이 세상을 뒤덮은 살기를 정화시켰다. 많은 중생들이 그 덕을 입었다.
처음엔 그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사도의 무리보다 훨씬 적었다. 백 명에 한 명꼴도 안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점덤 더 많아졌다. 그들이 사도의 무리보다 많아지는 몇십년 후의 광경이 벽운 선생의 심안에 떠올랐다.
이때 어두워졌던 벽운 선생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가없이 온화한 미소가 얼굴 가득 감돌았다. 백령자의 마음도 아침 햇살처럼 환해졌다.
벽운 선생은 자신과 인연이 닿을 모든 중생들을 향해 무한한 사랑을 보냈다. 그 사랑과 함께 지극히 맑고 깨끗한 기운, 성스러운 기운이 전해졌다. 백령자도 스승을 따라 자신과 인연이 닿을 이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보냈다.
잠시 후 벽운 선생의 몸에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백령자의 몸에서도 빛이 번져 나왔다. 광채는 점점 더 환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눈부신 광채에 휩싸였다가 곧 모습이 사라졌다. 둘 다 빛으로 화해 버렸다. 또, 두개의 빛덩이가 하나로 합쳐졌다.이 빛의 응어리는 산산이 흩어져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는 빛의 응어리까지 사라져 버렸다. 백학봉 정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몇 분 후에 벽운 선생과 백령자의 모습이 허공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자마나 초막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초막에 당도하니, 소나무 위에 앉아 있던 청령자가 반갑게 맞이했다.
벽운 선생이 초막으로 돌아오자 석주는 아침 식사를 차렸다. 식사라야 미숫가루뿐이었다. 벽운 선생은 음식을 끊은 지 오래되어 한 숟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제자들만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한 공기씩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제자들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 벽운 선생 앞에 나란히 앉았다. 벽운 선생이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필섭이와 석주도 혜원이처럼 본격적인 수도의 길로 들어설 때가 되었다. 내 그동안 뒤에서 너희를 항상 지켜봤다. 둘 다 마음을 잘 다스려 왔으니, 우리의 도를 전해 받을 자격이 있다."
이 말을 듣는 필섭의 두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얼굴엔 밝은 기운이 가득 감돌았다. 석주의 얼굴도 발갛게 상기되었다.
" 우리의 도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의 도다. 하늘 뜻을 섬기며, 하늘 뜻 그대로 살아서, 하늘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을 밝힌 도이다. 하늘 사람이란 불가의 부처님. 보살님이요, 선가의 천상선과 같은 성인이다. 불도와 선도와 우리의 도는 수도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목표하는 바나 수도법의 중심 줄기는 별로 다르지 않다. 하늘 사람을 향해, 한단계 한단계 나아가면서 얻게 되는 것도 똑같다. 우리의 도가 중국에서는 선도로 알려졌고, 인도에서는 요가로 알려졌다. 불도의 뿌리는 또 바로 요가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도 역시 본래는 우리의 도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석주에겐 생소한 이야기였다. 석주와 도반들은 스승이 대도인이란 사실만 알았지, 그가 어느 도에 입문하여 깨닭음을 얻었는지 전혀 몰랐다. 누구는 그가 예전에 스님이었는데, 수행을 잘하여 큰 도력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또, 누구는 스승이 선도를 닦아 선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추측했다. 제자들이 궁금하게 여겨 물어 보면,벽운 선생은 한결같이 그런 걸 알아서 뭣에 쓰려느냐고 반문했다. 그게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닦고 또 닦으라고만 일렀다. 벽운 선생의 말씀이 계속 이어졌다.제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필섭은 5년 전, 벽운 선생과 처음 인연을 맺기 전에 벽운 선생의 도반인 호산 스님한테 풍수를 배웠다.호산 수님은 풍수의 비법을 전수해 주고는, 훗날 자신의 도반을 만나게 될테니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라 일렀다.
그때 필섭은 청련사에 있었다. 청련사 주지였던 상지 스님이 필섭의 고모였다. 상지 스님은 지현 스님의 은사 스님이었고, 벽운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이였다.
벽운 선생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5년간은 필섭에게 스승으로부터 도를 전해 받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동안 많은 시헙을 거쳤다. 이제 비로소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석주 역시 감개부량했다. 아내한테 배신당하고 자살까지 시도했는데, 벽운 선생을 만나 새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젠 자기가 하늘처럼 모시는 벽운 선생의 뒤를 좇는다 생각하니 지극한 기쁨이 용솟음쳤다. 또, 스승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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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구도소설 성자들의 시대 4-백두대간
유필섭은 개심사에서 부목지기로 일했다. 그도 벽운 선생의 제자다. 지난 가을엔 계룡산에서 보름동안 석주네와 함께 지냈다. 그는 6년 전에 처음 벽운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벽운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직접 가르침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두 달 만에 만난 혜원의 얼굴은 더욱 좋아 보였다. 티 하나 없이 희고 깨끗했다. 옥을 다음어 놓은 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커다란 두 눈에서는 아침 이슬같이 서글서글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또, 한없이 그윽하고 온화한 미소가 잔잔하게 어려 있었다.
'수행을 참 잘했구나!'
석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찬탄했다. 혜원에겐서 풍겨 나오는 맑은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필섭은 석주보다 일곱 살이나 위인데도 오히려 더 젊어 보였다.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으나, 30대 초반 같았다. 체격이 다부져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고, 문에서는 번쩍이는 광채가 쏟아져 나았다. 네모난 얼굴, 단정한 입매, 짙은 눈썹이 필섭의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벽운 선생은 여기저기 너덜너덜 해진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기다란 얼굴은 구릿빛으로 그을렸고, 머리는 학처럼 눈부시게 희었다. 벽운 선생의 욤모와 옷차림은 수시로 변했다. 이날처럼 팔십이 넘은 나이에 맞게 백발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어느때는 4,50대 장년의 모습으로 나타나 석주를 놀라게 만들었다. 도반들은 석주에게, 스승께선 오래 전에 나이를 초월하셨으며 몸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경지에 오르셨다고 했다. 벽운 선생의 나이는 여든둘이다.
네 사람은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백령자는 초막 뒤에 우뚝 선 소나무 가지에 앉아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겼다. 서쪽 하늘은 바다와 맞닿은 곳에서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숯불처럼 빨개진 저녁해가 천천히 기울어 갔다. 바다도 하늘도 물감이 번져 가듯 붉게 물들었다.
그때, 노을을 헤치고 서편 하늘에 학한마리가 나타났다. 이 학은 동쪽을 향해 부지런히 날개를 퍼덕였다. 해가 막 바다에 잠길 무렵, 이 학이 운학산 상공에 이르렀다. 백령자가 그를 향해 길게 울었다. 이 학도 긴 울음으로 응답하고는 백령자가 있는 소나무 가지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백령자가 이제야 저희 무리 중에서 도반을 만났구나."
벽운 선생니 초막안에서 두 학의 울음 소리를 듣고 말했다. 스승의 말씀에 모두들 신기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 궁금하지 않느냐, 가서들 보고 오너라."
세 사람은 스승을 남겨 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백령자와 낯선 학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낯선 학이 잠시 뒤에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또 날개를 여러 모양으로 퍼덕였다. 낯선학의 몸짓이 끝나자, 이번엔 백령자가 머릴 움직이고 날개를 퍼덕였다.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도담을 나누는가 봐요."
혜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거야. 자기 무리 중에서 도반을 얻었으니 백령자가 참 기쁘겠구먼."
유필섭이 흐뭇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도 성현을 찾는데……."
석주는 하물며 사람들이 성현의 가르침을 외면한다고 말하려다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사람이라 해서 학을 무시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던 것이다. 석주는 찬탄을 금치 못하며 경이로운 눈빛으로 두 학을 지켜보았다.
붉은 해가 바다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노을 속에서 마자막 잔광이 부옇게 빛났다. 그 잔광마저 스러지고 어둠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낯선 학과 백령자는 이야기를 끝냈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낯선 학이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잠시후, 백령자가 푸드득 날아와 유필섭의 어깨 위에 앉았다.
세 사람은 백령자와 함께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백령자는 벽운 선생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낯선 학에 관하여 뭘 아뢰려는 모양이었다. "알고 있다. 나도 매우 기쁘다. 앞으로 백령자 네가 새 도반을 잘 인도하거라." 벽운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니, 백령자는 머리를 몇 번 흔들어 대답했다.
해가 지자 방안은 금방 어두워졌다. 석주는 초에다 불을 붙이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벽운 선생한테서 환한 빛이 뿜어 나왔다. 방안이 촛불을 켤때보다 훨씬 더 밝아졌다. 석주는 전에도 벽운 선생이 방광하는 모습을 보았던지라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번째는 석주가 약을 먹고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였다. 두 번째는 계룡산에서 함께 지내던 도반들과 해어지기 전날 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아주 다른 느낌을 받았다. 벽운 선생힌테서 번져 나오는 빛의 알갱이들이 자신의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 오는 것 같았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까지 그 빛에 쉽싸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벽운 선생이 그윽한 눈길로 석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석주야, 그동안 마음을 아주 잘 닦았구나. 네 가슴에 맺혔던 것들이 모두 풀렸다. 이제 새로운 곰부를 시작해야겠다."
석주는 기뻤다. 자신이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게 무엇보다 기뻤다. 또 '새로운 공부'라는 말씀에 가슴이 설렜다.`성자들의 세계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생각하니 날아갈 듯 좋았다. 필섭과 혜원이도 석주와 마찬가지로 기뻤다. 석주가 그 참담한 고통을 이겨낸 것이 참으로 장해 보였다.
벽운 선생은 제자들에게,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야기를 나누다 먼저 자라 이르고서 밖으로 나갔다. 백령자가 벽운 선생을 따라 나섰다. 벽운 선생과 백령자는 백학봉 정상으로 향했다.
벽운 선생의 발걸음은 나는 것처럼 가벼웠다. 경신술을 써서 미끄러지듯 위로 올라갔다.백령자는 나무들 바로 위에 서 벽운 선생한테 딸려 가듯 그의 뒤를 좇았다.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순식간에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서 보니 동녘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교교한 달빛이 눈덮인 산봉우리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벽운 선생은 동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바람 한 줄기가 휘이 지나갔다. 벽운 선생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백령자는 벽운 선생과 두어 걸음 사이를 두고 자릴 잡았다. 백령자의 눈길도 벽운 선생처럼 동쪽으로 향했다. 둘은 수백 리 떨어진 백두대간 연봉들을 바라보았다.
벽운 선생은 심안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흐르는 정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벽운 선생의 심안은 잠시 후 백두대간이 처음 출발한 백두산으로 옮겨 갔다. 다시 먼 길을 더듬어 히말라야에 이르렀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그 히말라야에 매우 성스러운 기운이 거대하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 기운은 우주의 중심인 하늘과 맞닿아 있는 기운, 성자들을 낳고 기르는 기운이었다.
히말라야의 성스러운 정기는 산맥을 따라 사방으로 흘러갔다. 히말라야에서 뻗어 나간 여러 산맥 중에서 가장 힘차고 수려한 산맥은 동북쪽으로 뻗은 맥이었다. 그 산맥의 끝자락에 백두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백두산으로 뻗은 히말라야의 동북 지맥은 그 어느 지맥보다도 헌걸차고 수려했다. 그런 만큼 여기에 매우 웅혼한 성자들의 기상이 흘렀다.
성스러운 정기가 거대한 강물처럼 백두산으로 도도히 흘러와 다시 사방으로 뻗쳐 갔다. 백두산에서 갈라져 나간 산맥들은 모두 이 아름다운 정기를 품고 의연하게 솟아 있었다.
백두산의 여러 지맥 중에서 가장 헌걸차고 수려한 맥이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크게 굽이치며 뻗어 있다. 또, 곳곳에다 빼어난 명산들을 빚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백두대간에서 수많은 산맥들이 갈라져 나와 한반도 곳곳으로 뻗어 갔다. 이 백두대간의 지맥들 역시 방방곡곡에 훌륭한 명산들을 솟아 올렸다.
히말라야의 성스러운 정기는 백두대간과 백두대간의 지맥들을 따라 한반도 곳곳에 흩어진 명산들 속으로 흘러들었다. 운학산에서 그 기운이 폭포처럼 밀려 왔다. 벽운 선생은 운학산으로 도도히 흘러오는 성스러운 정기를 바라보며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백령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때가 이르렀구나."
백령자는 백운 선생이 말하는 뜻을 알아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이날은 갑자년(甲子年; 1984) 음력 정월 열하루.입춘날로부터 이레가 지났다. 계해년(1983) 가을 이후, 한반도의 지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수도인과 성자를 배출할 성스러운 기운이 크게 피어날 조짐을 보였다. 그 아름다운 기운은 갑자기 입춘날이 지나면서 뭉클뭉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이날은 더 한층 새로워졌다.
벽운 선생, 그리고 그의 스승들과 도반들은 오래 전부터 이때를 기다려 왔다. 성스러운 기운이 활짝 피어나면 숱한 성자들이 배출된다. 그리하여 뭇 사람들이 성스럽게 살아가는 성자들의 시대가 열린다. 그 시대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태평성대다. 그 시대엔 사람뿐 아니라. 뭇 중생이 다 함께 대평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
성자들의 시대가 열리는 대사건을 옛 사람들은 후천개벽이라 일렀다. 후천개벽. 벽운 선생의 스승들과 도반들은 지금 이날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중생들이 성자가 되어 무한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시대, 찬란한 광명시대로 가는 길을 열고 있는 사람들이다.
벽운 선생은 심안으로 사부 운허 도인, 사백(사부의 사형) 석파도인, 사조(사부의 스승)운정도인, 그리고 여러 도형과 도제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각각 인도와 중국, 우리나라의 여러 명산에서 벽운선생처럼 활짝 피어오르기 시작한 성스러운 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사조 운정 도인은 히말라야에 계셨다. 세계 곳곳에서 온 대성자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 선계의 선인들 모습도 많이 보였다. 운정 도인 역시 선계와 속계를 자우로이 넘나드는 선인이었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는 눈부시게 찬란한 빛을 뿜었다. 그 빛이 온 세상으로 퍼져 갔다. 땅속, 바닷속까지 히말라야가 뿜어낸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석파도인도 선계에서 내려왔다. 석파 도인은 중국의 곤륜산에 계셨다. 거기에더 많은 선인과 성자들이 모여 있었다. 히말라야에 이어 곤륜산에서도 휘황한 빛이 장엄하게 뿜어 나왔다.
사부 운허 도인은 백두산에 계셨다. 백두산 천지 위에 수십명의 선인과 성자들이 모여 있었다. 백두산에서도 찬란한 빛이 뿜어 나왔다.
벽운 선생의 도반들은 우리 나라의 여러 명산에 흩어져 있었다. 묘향산, 금강산, 구월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지리산, 가야산, 계룡산, 두륜산, 소백산……, 방방곡곡의 명산마다 도반들이 한 사람씩 있었다. 그 명산들도 찬란한 빛을 뿜었다. 사방의 명산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서로 어우러져 한반도 전체가 광명 세계로 변했다.
우리 나라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세계 도처에 솟아오르 명산들이 모두 엄청난 빛을 뿜었고, 온 세계가 찬란한 빛에 휩싸였다. 지상에 깃들여 있던 성스러운 기운이 난만하게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부터 벽운 선생과 도반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뒤를 좇아올 수도인들을 더욱 많이 길러내는 것이다. 이들은 몇 년 전부터 그 일을 위해 인연이 닿는 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이 들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제자들도 꽤 되었다.
벽운 선생은 성혜원, 이석주, 유필섭, 홍명천, 지현 스님 등을 제자로 거두었다. 앞으로 이들 말고 더 많은 제자를 만나게 될 터였다. 벽운 선생의 심안에 새로 인연을 맺게 될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스쳐 갔다.
이때, 백령자도 벽운 선생처럼 자기의 도반이 될 다른 학들을 생각했다. 많은 학들이 자기를 따라 도에 입문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백령자의 자슴에 지극한 기쁨이 샘물처럼 솟구쳤다. 이날은 처음으로 자신의 동족인 청령자와 도반이 되었으니 더욱 기뻤다.
백령자가 벽운 선생을 처음 만난 지도 벌써 23년이 되었다. 당시 백령자의 나이는 세 살이었다. 벽운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시작한 지는 22년째다.
백령자한테 벽운 선생은 생명의 은인이다. 23년 전 여름, 백령자는 독극물에 중독되어 죽은 물고기를 먹고 사경을 헤맸었다. 그때 벽운 선생이 나타나 백령자를 구해 주었다. 그 일이 있을 때까지 백령자는 여느 학들처럼 사람을 두려워했었다. 사람들이 자기네를 함부로 죽이거나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가까이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한테서 뿜어 나오는 살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접근하면 얼른 멀리 피했다.
한데 벽운 선생에게서는 이 살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알에서 깨어나 엄마의 품에 안겼을 때 느꼈던 온화하고 아늑한 기운이 물씬물씬 느껴졌다. 그 평화로운 기운 때문에 백령자는 건강을 회복한 뒤에도 벽운 선생과 함께 지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자 다른 학들은 추위를 패해 모두 멀리 남쪽으로 날아갔다. 백령자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벽운 선생 곁을 떠나기가 싫었던 것이다.
가을이 깊어져 나뭇잎이 지고 서리가 내렸지만, 백령자는 벽운 선생 곁에서만 맴돌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추위도 전혀 안탔다. 벽운 선생한테서 뿜어 나오는 진기가 늘 백령자를 감싸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마음으로 의사소통을 완전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의 의사를 마음으로 헤아려 알았다. 둘은 많은 얘기를 나눴다. 벽운 선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백령자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때부터 백령자는 본능에 따라 사는 여느 학이 아니었다. 백령자의 정신과 마음은 자꾸 새로운 세계를 향해 열려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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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학
우리명산 답산기-북한산3 산 기운과 우리 역사
● 한양 천도와 북한산의 기운
이성계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한양땅을 둘러보았다. 북한산의 한 지봉(支峯)인 북악산 아래 자리잡은 한양땅은 도읍터가 될 만한 곳이었다. 북한산, 북악산의 기상은 매우 웅장했다. 만백성을 다스리는 왕자(王者)의 위용을 연상케 했다. 이성계는 곧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한양땅이 조선조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양땅의 지기가 우리 겨레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우리 겨레가 겪은 불행과 행복, 고통과 평안, 슬픔과 기쁨 대부분이 한양땅의 지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럼 한양땅에 서린 지기는 어떤 것일까.
한양땅의 지기를 논할 때는 가장 먼저 북한산에 관해서 얘기해야 한다. 북한산은 한양땅의 주산(主山)인 북악산의 모산(母山)이기 때문이다.
북한산의 주맥(主脈)은 정상인 인수봉과 백운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뻗었다. 이 주맥을 따라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치솟아올랐는데, 대부분 바위봉우리다. 그 바위빛이 백설처럼 새하얘서, 푸르른 하늘 초록빛 나무들과 선명히 대조를 이룬다. 이 모습이 참 깨끗하고아름답다.
북한산 연봉들은 거의가 다 끝이 뾰족하고 몸통이 날렵하다. 붓이나불꽃처럼 생긴 봉우리가 많다. 인수봉 하나만이 중후하게 생겼는데, 인수봉의 형상은 선비나 도인이 쓰는 굴건 (모자)이다.
남산 쪽에서 북한산 연봉들을 바라보면 완연한 불꽃의 형상을 하고 있다. 흡사 커다란 불길이 너울너울 타오르는 모습이다. 북한산처럼 이렇게 불꽃같이 생긴 산을 풍수학에선 화성(火星)이라 부른다.
화성의 산이 맑고 수려하게 생기면 학문, 문필, 예능의 기운이 크게감돈다. 이 기운으로 훌륭한 관리, 학자, 문인, 예술가들을 배출한다.총명하고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도 많이 나오게 된다.
한데 화성의 산이 흉하게 생기면 전쟁, 투쟁, 화재, 전염병 등의 악기(惡氣)가 서린다. 이 악기가 흉악한 사람들을 배출한다. 또 갖가지 흉한화를 불러온다.
그럼 어떻게 생긴 산이 수려하고, 어떤 모양이 흉한 것일까. 풍수학에서는 산봉우리가 반듯하고 단정해야 수려하다고 본다. 모양이 비뚤어지면 흉하게 여긴다. 깨진 데가 있거나, 우악스럽게 생겼어도 흉하게 본다.
북한산 연봉 중에서 제일 수려하게 생긴 봉우리는 인수봉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수봉은 매우 중후하고 온화하며 후덕한 자태를 지녔다.반듯하게 우뚝 서 있는 형상이 성현군자나 대도인의 풍모를 연상하게 한다.
인수봉은 그 색깔도 새하얗다. 마치 하얀 옥(玉)으로 다듬어 놓은 조각품 같다. 이렇게 빛깔이 곱고 깨끗하며 생김새가 단아하니, 인수봉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 넘친다.
인수봉의 형상은 타원형에 가깝다. 타원형의 봉우리를 풍수학에선 목성(木星)이라 부른다. 곧게 자란 나무처럼 훤칠하게 생겼기 때문이다.목성의 산봉우리가 수려하면, 그 기상으로 현군(賢君)과 성현(聖賢),훌륭한 학자와 도인 등이 나온다. 선인 (仙人)도 배출한다. 도읍지에 이런 봉우리가 있으면, 현인군자와 빼어난 수도인들이 많이 나와 그들이 나라의 풍속을 아름답게 가꾼다.
한데 인수봉은 원래의 한양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그 아름다운 기운을 크게 떨치지 못했다. 참 아쉬운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얘기하겠다.
북한산 연봉(連峯) 중에서 인수봉 다음으로 잘생긴 봉우리는 백운대다. 백운대는 모양이 반듯하며, 끝이 뾰족한 삼각형의 봉우리다.
백운대처럼 삼각형으로 생긴 봉우리를 풍수학에선 자기성 (紫氣星) 이라 부르며 매우 귀하게 여긴다. 자기성에도 군자의 기상, 대학자, 문필가의 기상이 감돈다. 이 기상으로 현군과 고인달사(高人達士), 깨끗한 선비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런데 백운대 역시 인수봉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한양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백운대에 서린 빼어난 기운이 한양땅으로 크게 뻗치질 못했다. 그 점이 아쉽다.
북한산의 다른 봉우리들은 백운대나 인수봉에 비해 수기 (秀氣 ; 수려한기운)가 너무 부족하다. 모양새가 하나같이 비뚤어졌는데 그게 가장 큰흠이다. 뾰족뾰족한 봉우리들이 쓰러질 듯 기우뚱한 자세로 서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또 이 불안감만큼 흉한 기운을 내뿜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끝이 뾰족한 화성의 산이 흉하게 생기면 전쟁·투쟁 · 화재로 인한 재난을 불러온다. 그로 인한 화도 생겨나며,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 거칠고 난폭한 사람들을 배출한다.
도습지의 진산(鎭山)이 이렇게 생겼으니 포악한 자들이 득세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게 된다. 더구나 이 흉한 봉우리들은 원래의 한양땅 바로 뒤에 있다. 그래서 백운대나 인수봉 기운보다 이 봉우리들의 기운이 한양 땅으로 훨씬 강하게 뻗쳐온다.
이 흉한 기운 때문에 우리 겨레는 오랫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부덕한 압제자가 자주 백성을 억압했고, 권세가들이 횡포를 부렸다. 때론 외적이 침노하여 우리 강토와 겨레를 짓밟았다.
사악한 무리가 강성한 기세를 떨치니 참된 사람, 정인군자(正人君子)는 숨어지낼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는 밝은 임금, 지혜로운 신하가 드물었다. 그러니 백성들이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