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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인학의 우리명산 답산기-인수봉에 서린 성스러운 기상과 우리나라의 미래

    인수봉

    ● 인수봉과 우리 나라의 미래

     

    앞에서 필자는 서울의 산 중에서 인수봉이 가장 아름다우며, 인수봉에는 성자의 기상이 가득 감돈다고 했다.

     

    인수봉은 원래의 한양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인수봉에 서린 성스러운 기상이 한양땅으로 크게 뻗쳐오질 않았다. 이 때문에 성자들이 많이 나올 수가 없었다. 설령 그런 이들이 있다 해도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인수봉도 서울시내 복판으로 들어왔다. 인수봉 아래는 어느덧 시가지가 되었다. 이제 인수봉에 서린 성자의 기상이 활짝 피어난다.

     

    인수봉 아래에 시가지가 크게 들어선 것은 1970년대 일이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성자(聖者)들의 삶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인수봉의 정기가 크게 떨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1980년대는 또 우리 나라에서 소비풍조 · 물질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때이다. 한편에선 많이 갖고 쓰고 버리는 데서 기쁨을 찾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안 갖고 적게 쓰는 데서 참자유와 행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예언서 격암유록>에 이런 내용의 예언들이 들어 있다.

     

    을유년 (1945) 에 해방이 되고 나라가 둘로 쪼개진다.

     

    무자년 (1948) 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 (이승만) 이 권력을 잡는다. 이씨가 12년간 독재정치를 한다.

     

    인년 (1950) 에 남과 북이 서로 싸운다.

     

    계사년 (1953) 에 전쟁이 끝난다.

     

    경자년 (1960) 에 독재정권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다.

     

    신축년 (1961) 에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다. 그들도 이승만 정권처럼 독재정치를 한다. 국민들 입에 재갈을 물린다.

     

    군사독재정권이 물러갈 때가 되면 물질주의가 판친다. 종이돈이 세상을 지배하리라. 이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돈이면 못할 게 없다고 한다.

     

    물질주의가 사람들을 타락시키며 온 세상을 황폐하게 만든다. 물질주의로 인해 인류는 파멸의 위기를 맞는다. 자칫하면 천 사람 중 한 사람이 살아남을까 말까 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그때 성자들이 인류를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다. 물질주의에서 헤어나, 성스러운 마음을 기르고, 무소유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들은 성자들을 따라 성자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성자들의 세계.

     

    그곳은 오랫동안 인류가 꿈꿔온 낙원이며, 천국 · 극락 같은 이상향이다. 파멸의 위기가 사라진 다음에는 온 세계가 그 이상향으로 변한다. 갈등과 투쟁으로 얼룩진 암흑의 시대가 가고, 모든 사람·모든 생명이 찬란한 자유와 평화를 함께 누리는 광명시대가 밝아온다.

     

    인수봉은 지금 이 광명시대의 여명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다가오는 성자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또 물질주의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깨어나라' 외치며, 가슴에 품고 있는 성스러운 기상을 보내고 또 보낼 것이다.(계속)
     

  • 류인학의 우리명산 답산기-서울의 한복판에 흐르는 한강

    북한강


    ● 상처투성이가 된 서울의 지맥 (地脈)

    지금 서울의 산줄기들은 성한 것이 거의 없다.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찼고, 길을 내느라 파헤쳐진 곳이 많다. 터널도 많이 뚫었다. 온통 상처투성이다. 주산인 북악산 꼭대기까지 차도를 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백호인 인왕산 능선에도 차도가 생겼고 청룡인 낙산은 집들이 꽉 들어섰다. 청룡·백호가 이렇게 상처를 심하게 입으면 사고로 불의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아진다.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기도 어렵다.

     

    지금 우리 나라가 그렇다. 갖가지 사고로 죽는 사람이 일 년에 수십만명은 될 것이다. 낙태로 죽어가는 아기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해마다 백오십만 명이나 되는 아기들이 죽는다고 한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얘기다.

     

    형제간에 남남처럼 무정하게 지내는 사람도 점차 늘어간다. 이혼율도 해마다 급증한다. 어제까지 살을 섞으며 부부로 살던 사람들이 돌아서면 남남이 되고 만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은 억울하게 온갖 슬픔과 고통을 겪는다.

     

    이 모두가 산천을 함부로 망가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비극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참 가난하게 살았다. 그 시절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데 불과 30년 사이에 엄청나게 부유해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풍수학에선 물을 재물로 본다. 원래의 한양땅에는 물이 적었다. 도읍지 한복판으로 청계천 하나가 흘렀을 뿐이다. 게다가 청계천은 수량이 너무 빈약했다. 도읍지의 수세 (水勢)가 이러니 물산(物産)이 풍부해질 수가 없었다. 청계천의 수량이 풍부했으면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서울은 급격히 넓어졌다. 어느덧 한강변까지 집들이 들어찼고, 곧 시가지는 강을 건너 영등포 쪽으로 계속 확대되었다. 그 바람에 한강이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한강은 청계천보다 백 배는 더 큰 물이다. 이 한강물에 서린 물산의 기운이 활짝 꽃피면서 우리 나라가 갑자기 부유해졌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경제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물은 모름지기 안아주듯 휘감아돌아야 좋다. 휘도는 안쪽에 좋은 정기가 모인다. 바깥쪽은 정기가 흩어져버린다.

     

    한강의 전체적인 모습은 덕소 근방에서 임진강과 만나는 지점까지 반원형이다. 북한산을 멀리서 휘감아도는 형상이다.

     

    한강은 서울 복판에서 두 번 크게 휘돈다. 지세가 한강에 휘감긴 것처럼 생긴 데가 세 곳이 있다. 성동구 자양동 일대와 용산구 이촌동 일대, 그리고 강남의 압구정동 일대가 그곳들이다.

     

    압구정동 앞에서는 중량천과 한강이 합류한다. 그래서 물산의 기운이 더욱 커진다. 압구정동에 부자들이 모여 살고 소비문화가 극성을 떠는 것도 이 한강의 수세(水勢) 때문이다.

     

    그런데 압구정동에서 보면, 한강물이 정동방(正東方)인 묘방 (卯方)에서 흘러와 정서방 (正西方)인 유방 (酉方)으로 빠져나간다. 이게 참 안 좋다. 물이 묘유방 (卯酉方)이나 자오방(子午方; 정북방과 정남방)으로 직통하면 음란한 기운이 창성해진다. 압구정의 소비문화, 압구정의 성풍속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한강에 서린 물산의 기운이 활짝 피어나면서 물질주의가 온 나라를 휩쓸었다. 투기 바람이 기승을 부렸고, 투기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나라의 풍속을 타락시켰다. 사람들의 정신은 옛날 가난했던 시절보다 훨씬 더 빈곤해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 나라 뿐이랴. 온 세계가 물질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우는 나라들은 왕성한 물산의 기운으로 강국이 되었다. 영국은 런던 한복판에 흐르는 테임즈 강의 기운이 크게 발하여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일본은 동경 앞바다에 서린 물산의 기운으로 엄청난 부국이 되었다. 미국은 뉴욕 앞바다의 기운, 프랑스는 세느 강, 독일은 라인 강의 기운을 받아 재물을 모았다.

     

    물질주의, 자본주의는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시켰다. 부유한 나라는 더욱 부유하게, 가난한 나라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온 세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물질주의의 포로가 되어 허덕인다.

     

    물질주의를 극복하고 세계 인류 전체가 골고루 복을 누리는 길은 없을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 희망은 있다. 무소유(無所有)의 기쁨, 그 찬란한 자유와 행복을 누린 성자들의 정신에 한가닥 희망이 남아있다.(계속)
     

  • 호랑이도 따른 정암 스님, 무소유 자비행 한평생

    

    조선시대 정암스님(1738~1794)은 무상의 자비심을 실천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동사열전>의 ‘정암선사전’에는 그의 보시행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정암스님 이름의 ‘정’(晶)은 ‘맑다’ ‘밝다’ ‘빛나다’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청정한 마음으로 무소유를 실천하며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9세부터 미황사에 있는 재심스님의 손에서 자란 스님은 16세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20세 때부터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깨달음을 구했고 송파 스님과 연담 스님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30세에 송파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스님에게는 유난히 학문을 배우겠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기록에는 제자가 구름처럼 안개처럼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설법을 하면서도 마음은 오로지 곤궁한 대중들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정작 자신은 늘 찌그러진 모자에 해진 옷을 입고 다니고 팔꿈치가 보이기 일쑤여서, 춥고 배고픈 거지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친척이나 제자들이 비단옷을 선물하면 밖으로 나가서 헌 옷으로 바꿔 입고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시봉하는 스님이 이유를 물어보면 추워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 벗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절에 거지가 찾아왔습니다. 머리는 온통 헝클어지고 더덕더덕 때가 낀 몸에 너무 오래 입어 시커멓게 미어진 옷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거지의 몸에 이가 많은 것을 보고 문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꼴을 하고는 절에 발을 들여놓다니, 어서 썩 나가거라!”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오던 정암스님이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얼른 그 걸인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잘 먹인 후에 밤이 되자 함께 이불을 덮고 잤습니다. 스님에게 이런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스님에게 아쉬운 형편을 말하면 누구에게나 즉시 내어주므로 스님의 옷 궤짝에는 남은 옷이 없고, 배고픈 사람이 찾아오면 몽땅 내주어 항아리에는 남아나는 곡식이 없었습니다. 스님이 오히려 끼니를 굶을 지경이라는 소식을 듣고, 거지들 수십 명이 시장에 모여 약속하였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든지 정암스님이 계시는 방에 가서 곡식을 얻어 오면, 우리가 다 같이 그를 쫓아내고 우리 축에 끼지 못하게 하자.”

     

    날이 저물어 정암스님이 산사로 돌아오는데 숲속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와 스님의 옷자락을 발로 거머잡고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가 집주인을 반갑게 맞이하듯 하였습니다.

     

    “이 녀석아, 길을 비키거라.”

     

    스님이 지팡이를 휘둘러 쫓아오지 못하게 했지만, 호랑이는 계속 스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어서 돌아가거라, 사람들이 놀라겠구나.”

     

    호랑이는 절 문 앞에 이르러서야 꼬리를 흔들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정암스님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신은 추워 떨면서도 남을 입히시고

    당신은 배고파도 남을 먹이셨네.

    맹수도 순종하고 걸인들도 자비심을 내었거늘

    아아, 편한 길 제쳐두고 험한 길 가시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