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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재희씨가 버스 기사로 사는 법

    이미지 출처 : 유튜브 캡쳐

    대구 우주교통 소속 706번 버스를 운행하는 곽재희(48) 기사는 자신의 일터를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분입니다.

     

    곽 기사님는 버스에 올라오는 승객들에게 늘 웃으며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그가 승객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아들과 함께 거울을 보면서 연습까지 했다고 합니다.

     

    승객들에게 잠깐이라도 행복한 느낌을 주고자 버스에 캐릭터 인형을 가져다 놓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크면서 더 이상 갖고 놀지 않게 된 인형들을 버스 안에 달아 놓았는데 승객들의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버스 내부를 장식중인 곽재희 기사. [이미지 : 유튜브 캡처]

     

    성탄절에는 버스 안을 트리로 꾸미고 자신은 산타 모자를 쓰고 승객을 맞는 ‘이벤트’도 했습니다.

     

    ‘특별한’ 기사님이 모는 706번 버스 이야기는 SNS를 통해 널리 알려져 곽 기사님은 대구에서는 나름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2016년에는 대구 시민이 뽑은 ‘올해의 친절기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난 5월에는 곽 기사님의 아름다운 행동이 찍힌 사진이 SNS를 타고 널리 퍼져 감동을 줬습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폐지를 가득 싣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고 그 옆에 중년 남성이 함께 수레를 밀고 있는 사진입니다. 중년 남성이 바로 곽 기사님이었습니다.

     

    곽 기사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그때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좌회전하려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할머니가 지나가셨습니다. 보행신호는 빨간 불로 바뀐 상태였고 반대편에서 직진 신호가 떨어지는 등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에서 내려 할머니를 도와드렸습니다.”

  • 英 초등생, 맥도날드에 “플라스틱 장난감 없애달라”청원

    이미지 : 맥도날드 인스타그램

    영국의 초등학생 2명이 거대 패스트푸드 기업에 플라스틱 장난감을 없애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영국 언론에 따르면 엘라(9)와 카이틀린(7) 자매는 글로벌 청원 사이트 체인지(Change.org)에 맥도날드와 버거킹의 어린이용 세트에 더 이상 플라스틱 장난감을 포함시키지 말라고 청원했습니다.

     

    “환경을 살려야 합니다. 어린이용 패스트푸드 세트에 더 이상 플라스틱 장난감이 제공되지 않도록 해주세요.”

     

    엘라와 카이틀린은 자신들이 버거킹과 맥도날드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면서도 잠깐 갖고 놀다 버리는 플라스틱 장난감이 동물을 해치고 바다를 요염시킨다고 적었습니다.

     

    돈이 많은 거대 기업들은 더 이상 플라스틱 장난감을 만들어서는 안된다고도 밝혔습니다.

     

    엘라와 카이틀린은 50만 명의 서명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12일 오전 현재 현재 이 청원에는 지금까지 3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했습니다.

     

    어린이용 세트인 맥도날드의 ‘해피밀’과 버거킹의 ‘키즈밀’은 햄버거, 음료 등과 함께 새로 출시한 영화나 인기 애니메이션의 장난감을 제공하는 것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두 어린이의 청원이 반향을 일으키자 맥도날드와 버거킹은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영국 맥도날드는 지속 가능한 장난감 개발을 위해 팀을 구성했다고 밝혔고 최근 플라스틱 장난감을 책으로 바꿔주기도 했습니다.

     

    버거킹 또한 일부 매장에서 ‘킹 주니어’ 세트의 장난감을 없앴고 대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 말기암 40살 백만장자 의사의 마지막 강의

    이미지 : 페이스북

    부와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의사가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젊은 의학도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아보는 강의를 했습니다.

     

    싱가포르의 의사 리차드 테오 컹 시앙씨는 성형외과 의사로 30대에 부와 명예를 함께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2011년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됐습니다.

     

    그가 했던 강의가 유튜브에 올라온 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내 인생 최고의 강의” “당신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놀라운 강의”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다음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의대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요약한 것입니다.

     

    오늘 인생에 대한 저의 생각을 나누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를 초대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이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 생각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저는 현대 사회가 만든 전형적인 상품이었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꽤 성공적인 상품이었지요.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면서 저는 미디어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행복은 성공에서 오는 것이고 그 성공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갖게 되면서 저는 어려서부터 남들과 치열하게 경쟁을 하게 됐습니다. 학교에서 1등을 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운동경기나 달리기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했습니다.

     

    저는 의대에 진학해 안과 의사가 됐고 의료기기와 레이저 관련 특허를 두 개나 보유했지만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안과 의사는 돈을 많이 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형외과에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갈 때는 20 싱가포르 달러(1만 7100원)도 아까워하던 사람들이 성형수술에는 1만 싱가포르 달러(855만 원)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성형외과는 아주 잘 됐습니다. 환자들이 계속 늘어 처음에 1주일씩 기다리던 환자들이 3개월까지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환자가 밀려들자 의사도 4명이나 고용했습니다.

     

    1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수백만 싱가포르 달러(수십억 원)를 벌 수 있었습니다. 단 1년 만에 말입니다.

     

    저는 거기에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부유층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망설임 없이 인도네시아로 병원을 확장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차고 넘치는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러 경주용 자동차 동호회에 가입했습니다. 주말이면 레이싱을 하러 말레이시아에 갔고 경주용 차량을 사 모으기도 했습니다. 페라리도 샀습니다.

     

    차를 산 다음에는 저택을 마련했습니다. 각계각층의 유명인들, 부자들, 그리고 미인들과 파티를 즐겼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때가 제 삶의 정점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3월 등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요. 의대를 같이 다닌 친구에게 찾아가 디스크가 아닌지 MRI를 찍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날 밤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등뼈에서 다발성 골수종이 발견됐다고 했습니다. 친구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지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다음날 PET를 했습니다. 의사들은 제가 폐암 4기라고 진단했습니다. 암세포는 척추는 물론 뇌와 간 등 여러 장기에 전이되어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항암치료를 해도 3~4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제 삶은 박살이 났습니다. 저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성공, 트로피, 차, 집 이 모든 것이 내게 행복을 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어떤 것도 나를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소유한 어떤 것도 단 한순간 위로를 주지 못했습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저를 기쁘게 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웃고 울었습니다.

     

    저는 설날에 고급차를 몰고 가 친구나 친척들을 태우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들과 기쁨을 나눌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부러워하고 질투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저를 증오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지난 얘기를 하나 해드리려고 합니다. 학창시절에 제니퍼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지요.

     

    제니퍼와 함께 걸을 때 땅바닥에 달팽이가 있으면 제니퍼는 달팽이를 집어서 풀밭에 내려줬습니다. 저는 “왜 그러는 거야? 손이 더러워지잖아. 달팽이일 뿐인데”라고 핀잔을 주곤 했습니다.

     

    제니퍼는 달팽이에 공감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에게는 달팽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저는 그냥 달팽이일 뿐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때 저는 자비심과 공감능력을 가진 의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종양학과를 거칠 때 거의 하루 건너 한 번씩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환자들이 겪는 고통도 다 봤지요.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몇 분마다 모르핀을 맞는 것도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건 그저 일이었습니다. 매일 출근해 병동에 갔지만 그건 제게 와닿는 현실이 아니라 그저 일일뿐이었습니다. 의사로서 처치를 하고 병동에서 나와 곧바로 집으로 갔지요.

     

    물론 환자들이 느끼고 겪는 상황을 묘사하는 의학 용어는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환자가 되기까지 저는 그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 제가 오래 살 수 있게 된다면 이전과 다른 의사가 될 수 있게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환자들이 겪는 것을 진짜 느낄 수 있게 됐으니까요.

     

    여러분들도 의사가 되기 위해 힘들게 공부해야 할 겁니다. 치과의사가 되기 위한 첫해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는 개업을 하게 될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부를 쌓을 수 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임플란트 시술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놀랄만한 돈을 벌 것이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실 겁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우리가 얻는 부를 다룰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제가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자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고 더 탐욕스럽게 되더라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더 많이 소유하는 방식으로 성공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것뿐이었습니다.

     

    오로지 성공에만 매달렸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환자는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었고, 환자들로부터 1원이라도 더 쥐어짜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자신밖에 모르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의료인 동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우리는 지금이라도 환자들에게 굳이 치료받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 있다고 조언해야 한다는 겁니다. 불필요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의료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옹호하고 지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만을 섬기다 도덕이라는 나침반을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은 그 나침반을 잃지 마시라는 겁니다.

     

    저는 (암이라는) 힘든 과정을 통해 그를 깨달았지만 여러분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대부분의 의사들이 진료를 할 때 환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공립병원이나 민간병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병원에 있을 때 환자의 진료기록을 수많은 폴더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빨리 삭제하려고 했습니다. 환자들에 대한 상담을 가능하면 빨리 종결짓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환자들과의 상담은 그저 늘상 반복되는 일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대할 때 환자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겪을 고통과 걱정을 제가 진정으로 이해했을까요? 제가 암에 걸릴 때까지는 몰랐습니다.

     

    저는 의료인 교육 시스템에 큰 결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료인들이 전문가로만 길러지기 때문에 환자들과 공감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라는 게 아닙니다. 전문가로서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다음으로 부탁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언제나 환자들의 입장을 생각하시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실감하지 못하지만 환자들이 느끼는 고통, 걱정, 두려움은 현실입니다.

    저는 지금 5회차 항암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치료를 받을 때마다 두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들은 심지어 원수라도 그런 일을 겪기를 바라서는 안됩니다.

     

    저는 여력이 없지만 다른 암 환자들에게 다가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늦었습니다.

     

    여러분은 밝은 미래가 앞에 있습니다. 자원도 에너지도 갖고 있습니다. 눈앞의 환자를 넘어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들만 힘들어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은 처음부터 가진 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만족합니다. 그분들이 여러분이나 저보다 더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재정적으로 그리고 여러 이유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외면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 큰 변화를 줄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저는 지금 그런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고 그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돌보고 힘을 주는 사람들이 저를 많이 바꾸고 있습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에 있는 글로 오늘 강의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만약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겁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죽을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미디어가 하는 말대로 살지 마십시오.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시길 빕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을 섬기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 케냐의 자연과 여성을 살린 왕가리 마타이

    이미지 출처 : 플리커(https://www.flickr.com/photos/kingkongphoto/45588704754/), CC BY-SA 2.0

    한 사람이 마음을 냈습니다.

    그 마음은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로 형상화됐습니다.

    그 나무로부터 큰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케냐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왕가리 무타 마타이 이야기입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40년 케냐의 중부 고원에 있는 산골 마을에서 리테에서 태어난 마타이는 학교에 다니는 두 오빠와 달리 집안일을 하며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어느 날 마타이가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왜 나는 학교에 가면 안 돼?”

    “그렇구나. 학교에 가도록 해보자”

     

    마타이는 어머니의 적극적 후원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가 1960년이었습니다.

     

    마타이는 미국에서 생물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고국 케냐로 돌아옵니다. 그는 1971년 케냐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나이로비 대학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76년 나이로비 대학의 교수로 강단에 섰습니다.

     

    1977년 그는 운명과도 같은 일을 시작합니다. 바로 나무 심기였습니다.

     

    마타이가 공부에 전념하는 동안 케냐는 물 부족과 영양결핍, 가난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집안일을 하는 여성들은 땔감과 식수를 얻기 위해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마타이의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같은 비극은 개발이익을 노린 부패한 정권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부패한 케냐 독재 정권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국유지나 공유지를 개발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커피 농사도 자연 훼손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커피는 돈이 되는 작물이었고 너도나도 나무를 베어 내고 커피나무를 심었습니다. 콩과 옥수수도 많이 재배했고요.

     

    나무가 사라지면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은 땔감 부족으로 조리가 필요 없는 간단한 음식을 해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나무가 사라지자 강물이 마르고 우물물도 바닥을 드러내 마실 물조차 부족해졌다는 겁니다. 지금도 케냐 인구 4500만 명 가운데 1700만 명 이상이 안전한 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왕가리 마타이는 케냐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로 인해 가장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케냐 여성들을 위해 나무를 심는 운동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나무들의 어머니, 마마 미티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지요.

     

    마타이는 그린벨트 운동을 시작하면서 무키마라는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이 나무는 기특하게도 아주 빨리 자라는 종입니다. 무키마는 땅 위에 녹색벨트를 만들었고 그린벨트 운동의 이름을 따 그레빌리아로 불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자는 너무나 당연한 운동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극단적 남성 중심의 나라에서 여성 환경운동가로 산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마타이의 그린벨트 운동은 국공유지를 개발해 막대한 이권을 챙기는 독재 정권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케냐가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던 때에 미국에 유학한 마타이를 배신자로 여기는 이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테러를 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권은 구속과 가택연금으로 그의 발을 묶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왕가리 마타이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마타이는 지역민 스스로 토종 나무와 모종을 키워 이를 직접 산과 들에 심도록 했습니다. 나무가 일정 정도 자라면 3센트 정도를 보상금으로 줘서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마타이는 그린벨트 운동의 성공을 위해 주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현장활동가가 중심이 되어 20~30명의 주민을 이끌고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행합니다. 현재 케냐에는 이런 그룹이 5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마타이가 시작한 이 운동은 케냐의 부패한 독재 정권에 대항하고 여성들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성격도 갖고 있었습니다.

     

    마타이의 그린벨트 운동이 부패한 독재 정권과 맞서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부패하지 않은 정부,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정부, 환경이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게 주는 혜택을 이해하는 정부가 없다면 우리의 운동은 소용이 없습니다.

    운동의 성과를 무의미하게 만드니까요.”

     

    마타이는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해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2002년에는 국회의원에 출마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됩니다.

     

    그가 시작한 그린벨트 운동은 40년 동안 아프리카 전역에 5000만 그루의 심는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왕가리 마타이는 환경 보호와 여성 인권 향상 등에 기여한 공로로 2004년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 걸어서 출근하며 장학금 만든 한남대 총장

    이미지 출처 : 한남대학교

    이덕훈 한남대 총장은 매일 걸어서 출퇴근합니다.
     

    날씨가 궂을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꿋꿋이 4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학교로 향합니다.

     

    대학 총장들은 대부분 운전기사가 딸린 차량을 이용합니다. 한남대의 경우 총장 차량 유지비가 1년에 1억5천만 원 가량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총장은 2016년 취임 뒤 총장 전용차를 없애며 절약한 예산으로 ‘다니엘 장학금’을 만들었습니다.

     

    ‘다니엘 장학금’은 한남대 최고의 장학금으로 학생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등록금 전액은 물론 연간 400만 원의 도서구입비와 기숙사비도 지원합니다. 장학생이 일반대학원에 진학하면 또 학비를 대줍니다.

     

    이 총장이 매일 4만보씩 걸으며 아낀 예산 가운데 일부는 이 학교 환경미화원이 단체복을 마련하는 데 쓰이기도 했습니다.

     

    도보 출근이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날씨가 더우면 온몸이 땀에 흥건하게 젖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총장은 배낭에 여분의 옷 한 벌을 넣어 다닙니다.

     

    이 총장은 하루 40분 가량 걸리는 출근시간이 더없이 유용하다고 합니다. 학교 정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10년 전쯤 건강에 이상신호가 오자 걷기 운동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걸어서 출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총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침에 출근할 때 학생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때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 진다”고 말했습니다. 

  • 배우 봉태규의 가족에 대한 성찰

    이미지 출처 : 유튜브 캡쳐

    연애, 취직, 결혼, 육아 등 살면서 겪는 일을 자신을 성찰하는 훌륭한 도구로 쓴다면 이 세상은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

     

    배우 봉태규 씨는 지난 4월 낸 두 번째 책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더 퀘스트 펴냄)에서 육아를 계기로 가족과 자신의 삶을 성찰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살면서 정말 필요한 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실생활과 무관해 보이고 평생 쓸 것 같지 않은 여러 과목을 배우지만 남녀 차이, 육아, 건강 등 정작 필요한 내용을 제대로 배울 기회는 적습니다.

     

    봉 씨는 아내가 임신하면서부터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육아 관련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유럽식 육아법도 통달할 정도가 됐지만 우리나라 현실과는 맞지 않아 도움이 크게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는 “다만 유럽에서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오랜 기간 교육하고 쌓아온 만큼 남다른 부분이 많았고 아직까지도 감명 깊게 남아 있다. 아이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신뢰하며 아껴준다는 자세는 내가 아버지가 된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합니다.

     

    핑크색을 좋아하는 아들 시하에 대한 주위의 경직된 시선에 대해서도 ‘남자아이, 여자아이’라는 글에서 말합니다.

     

    “난 우리 시하를 남자 혹은 여자라는 이분법에 가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시하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지지하고 응원하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래야 시하가 좋은 사람이 될 테니까요. 물론 저도요.”

     

    “머리가 길든 옷이 핑크색이든 뭐든 시하가 좋아하면 나는 만족합니다. 성별은 부모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타고나는 겁니다. 그렇지만 편견은 누군가가 억지로 부여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주 폭력적이고요."

     

    결혼 뒤 여성들의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가부장제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습니다.

     

    “왜 우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데 엄마가 요리를 하는 거지? 봉 씨 조상님들께 정성을 보일 거라면 나나 아버지가 하는 게 나은 거 아닐까? 준비는 조 씨 성을 가진 우리 엄마가 다 하고 절은 나와 아버지만 한다…

     

    각자의 조상은 각자 챙기는 건 어떨까? 명절이 가족과 함께 보내는 날이라면 여자도 남자도 본인들 집에서 보내면 어떨까?”

     

    봉 씨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더 가족들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그때 되게 신기한 것을 발견했어요. 개인적인 일이 개인적인 일이 아닐 수가 있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아내가 임신한 것은 개인 일이고 집안일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개인적인 일이 사회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담론이 될 수 있구나 생각을 했어요.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얘기할 수 있다고 하면 훨씬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저는 그런 것을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지극히 제 개인적인 얘기가 사회적인 담론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그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거대한 얘기가 아니더라도 개개인이 좀 더 자기 얘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했으면 좋겠어요. 개개인이 한 얘기를 많은 사람이 나누고 공유하고 생각하고 그래야 좀 더 우리가 살 고 있는 곳이 좀 더 괜찮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런 개개인의 힘이 모여야 엄청난 변화를 이끄는 큰 힘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 ‘막내형’ 이강인, 메시 이은 차세대 축구 스타로

    이미지 : FIFA 공식 홈페이지

    이강인 선수가 2019 U-20 월드컵에서 골든볼을 수상하며 차세대를 이끌 축구 스타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U-20의 골든볼은 최우수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현재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가 받은 상입니다.

     

    게다가 만 18세의 나이에 이 상을 받은 것은 2005년 메시가 18세 때 수상한 뒤 15년 만에 처음입니다.

     

    축구는 기량은 물론 체력이 중요한 경기입니다. 경험을 통해 경기를 읽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린 선수는 모든 면에서 불리합니다.

     

    특히 특히 U20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18~20세 사이의 청소년들이라 아직 성장기에 있기 때문에 나이에 따른 체력 차이도 큽니다. 18세에 골든볼을 받은 것이 대단한 이유입니다.

     

    게다가 이 선수는 우승 팀이 아니라 준우승팀 선수여서 세계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스페인 언론들은 결승전이 끝난 뒤 “이강인은 이미 그 나이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극찬했습니다..

     

    현재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뛰고 있는 이 선수의 몸값은 이번 대회를 거치는 동안

    1천만 유로(133억 원)까지 뛰었고 이적료는 8천만 유로(1068억 원)를 웃돈다고 합니다.

     

    이강인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골 2개, 도움 4개를 올리며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는데 어린 나이에도 겸손함까지 갖췄습니다.

    그는 U-20 월드컵을 거치면서 ‘막내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형들' 못지않은 실력에다 리더십도 있어서 그런 별명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골든볼을 받은 뒤에도 공을 다른 선수들과 코치진에 돌렸습니다.

     

    그는 “골든볼을 받은 것은 다 형들과 코치진 덕분”이라며 “골든볼은 내가 아니라 팀이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선과 토너먼트를 치르면서도 인터뷰할 때마다 “경기에 뛴 형들은 물론 뛰지 못한 형들까지 다 열심히 했고 형들의 도움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실력과 인품에 찬사가 쏟아지면서 그의 ‘슛돌이’ 시절도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2007년 7살 때 KBS의 예능 프로그램 ‘날아라 슛돌이’ 3기로 출연해 또래 아이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축구 기량을 보여줬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이 선수의 어린 시절 영상들은 최근 보는 사람이 크게 늘어 몇몇 영상들은 조회 수가 300만 회에 이르기도 합니다.

  • 한센인 50년 섬긴 강칼라 수녀

    이미지 : 고창군청

    강칼라 수녀는 한센인의 친구이자 어머니로 불립니다.

     

    ‘작은자매 관상수녀회’ 소속으로 1968년 한국에 파견된 강칼라 수녀는 그로부터 50년 동안 한센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줬습니다.

     

    강칼라 수녀가 반평생을 산 전북 고창의 호암마을(옛 동혜원마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센인들이 살기 시작한 곳입니다.

     

    강칼라 수녀는 이곳에서 한센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돼지를 키우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카를라라는 그의 세례명을 발음하기 어려워 칼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한센인을 돌보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에서 소외된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한센인 치료를 위해 스페인에 있는 병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간호보호사 자격을 따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는 몸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골방만을 허락했습니다.

     

    한때 200명 가까운 한센병 환자와 가족이 살았지만 지금은 10여 명만이 살고 있습니다. 강칼라 수녀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공동체 사업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호암마을 도자기는 꽤 이름난 제품이라고 합니다.

     

    한센인을 대신해 고무신을 신고 매일 자전거로 읍내를 오가는 젊은 수녀는 이제 반백의 할머니가 됐습니다.

     

    속명이 탈로네 리디아인 강칼라 수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9세에 ‘작은 자매 관상 수녀회’에 입회했습니다. 전쟁고아를 돌보던 그는 1968년 한국 파견을 자원해 지구 반대쪽의 작은 나라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강칼라 수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센인과 함께 한 지난 50년은 매 순간이 행복이었다며 “대신 아파 줄 수 없는 게 가장 힘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은 호암상을 수상한 강칼라 수녀의 삶을 소개한 글입니다.

     

    강칼라 수녀는 사회에서 격리되고 외면당한 한센인의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평생을 바친 한센인의 친구이자 어머니다. 이탈리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달로네 리디아는 25세이던 1968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전북 고창 호암마을의 한센인 정착촌 동혜원에 도착하여 강칼라 수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50년 동안 한센인의 곁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다.

     

    한국에서 한센인은 감염 우려와 불편한 외모, 편견으로 인해 차갑게 외면당했다. 어디에도 그들의 자리는 없었고, 비참한 삶은 2세들에게 대물림됐다. 하지만 강칼라 수녀에게 한센인은 똑같이 고귀한 인간이자 가족이었다. 그는 가족조차 감당하기 힘든 한센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환자와 그 가족들을 가장 귀한 사람들로 섬기며 평생을 함께 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바쳤다.

     

    1916년 소록도 자혜병원 설립 이후 한센병 치료와 관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삶의 문제는 항상 뒷전이었다. 강칼라 수녀는 외롭고 구석진 개인의 삶에 다가갔다. 고통스러운 일상을 위로하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희망의 불씨를 살리며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 치유했다. 한센인들은 그가 절망의 순간을 견디게 해 준, 존재만으로도 희망이 되어 준 사람이라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강칼라 수녀의 삶은 한국 사회가 기억해야 할 실천적 사랑의 귀감이다.

     

    강칼라 수녀는 한센인 외에도 성매매 여성과 자녀들, 거리의 윤락여성과 그 아이들, 노숙자들, 병들고 가난한 이들처럼 가장 낮고 비참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돌봤다. 생활과 의료, 교육 사업을 통해 절망 대신 희망을, 좌절보다 용기를 줄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꿈꿨다. 50년 동안 자신을 바쳐 헌신해 온 ‘푸른 눈의 천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검소하고 묵묵하게 어려운 이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 이강인 선수의 감동 인터뷰

    이미지 : 이강인 선수 페이스북

    이강인 선수의 인터뷰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세네갈과의 U20 월드컵 4강전에서 드라마 같은 승리를 따낸 뒤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면서 한 인터뷰 내용은 놀라웠습니다.

     

    늘 자신을 낮추고 모든 이를 배려하는 인터뷰에서 그가 이제 겨우 18세의 청소년이라는 걸 잊게 만듭니다.

     

    “이렇게 좋은 경기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형들과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쁘고 진짜 경기 안 뛴 형들도 그렇고 경기 뛴 형들도 그렇고 코칭 스태프 분들도 그렇고 한국에서 응원해주신 분, 여기까지 와주셔서 응원 크게 해주신 분들한테 너무 감사하고 이제 4강 잘 준비해서 더 열심히 해서 꼭 결승까지 가고 싶어요”

     

    자신이 교체된 뒤에 무승부가 되면서 자신이 승부차기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저는 제가 교체 당하기 전부터 제가 경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 팀을 믿었고, 모든 형들 또는 코칭스태프분들 경기 안 뛴 형들 다 믿었고 꼭 이렇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후반전에서 활약이 돋보였다는 질문에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췄습니다.

     

    “다른 것보다는 최대한 팀에 도움이 되려고 열심히 한 것 같고, 이렇게 좋은 성적 낼 수 있어서 매우 기쁘고 이렇게 제가 잘 할 수 있는 건 진짜 형들이 많이 옆에서 도와주고 많이 응원해주셔서 진짜 너무 잘한 것 같고 다음 경기도 진짜 잘 준비해서 꼭 좋은 성적 내고 싶어요.”

     

    이강인 선수는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상대팀인 세네갈에게도 감사한다는 말을 하는 걸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네티즌들은 이강인 선수의 사려 깊은 인터뷰 내용에 대해 ‘막내형’이라고 부르며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 그림자로 더욱 빛난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미지 : 미디어 SK

    28일 서울 광장동 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사회적 가치의 경험과 비전을 공유하고 알리기 위한 ‘소셜밸류커넥트2019(Social Value Connect 2019 SOVAC)'입니다.

     

    올해 처음 열린 이 행사에는 기업인, 비영리단체 회원, 대학생, 일반인 등 4천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참석자 수만으로 보면 첫 행사임에도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당초 SOVAC 사무국은 최대 2천 명 정도의 참여를 예상하고 행사를 준비했는데 21일 홈페이지를 통해 등록한 참가 신청자만 5천 명을 넘자 등록창구를 닫아야 했을 정도입니다.

     

    ‘패러다임 전환, 사회적 가치의 시대가 온다’를 주제로 열린 SOVAC는 사실 최태원 회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행사입니다. 4천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는 행사의 경비를 대부분 부담하고 많은 도움을 준 것도 SK그룹입니다.

     

    하지만 이날 행사에서 최 회장은 그늘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는 최대 규모의 행사를 조용히 지켜보며 응원했습니다.

     

    이른바 재벌그룹 회장이 하루를 꼬박 내어 특정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이날 하루 종일 행사장을 지켰습니다. 점심시간에도 샌드위치를 먹으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최 회장은 행사 내내 무대 아래에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주제는 휴대폰으로 직접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행사에서 최 회장을 향해 쓴소리를 하는 이도 있었지만 최 회장은 묵묵히 들습니다.

     

    쓴소리를 뱉은 이는 중증 장애인을 고용해 회사를 꾸려가는 베어베터의 김정호 대표였습니다. 그는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SK가 장애인 의무 고용률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말에 대한 최 회장의 반응은 행사가 끝난 뒤에 나왔습니다. 이날 행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묻자 최 회장은 장애인 고용 문제에 대해 답했습니다.

     

    “(장애인 고용 문제는) 열심히 하려고 애를 썼는데 왜 안됐을까 당황했습니다. 무조건 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SK는 이번 행사 준비에서부터 비용 대부분을 부담했지만 참가자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에 그룹이 드러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습니다. 행사장은 물론 팸플릿에도 SK라는 문구조차 적지 않았습니다.

     

    최 회장은 이날 행사가 끝난 뒤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 과정도 비교적 소상하게 밝혔습니다. 언론에 난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21년 전 어려운 시기에 회사를 물려받고는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이 살아남는 것이었고 살아남았습니다. 십 년 전쟁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착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고 공감능력이 제로였으며 사람을 보지 않고 어떻게 돈을 벌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저와 반대인 사람을 만났습니다. 돈에 관심이 없고 힘든 이들에게 다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나와 어떻게 다를까 가만히 관찰해보니 내가 잘못 살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공감능력을 배워서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고민하다 사회적 기업을 알게 됐고 영리 기업도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주주도 꼭 돈만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장애인 고용을 덜 했다고 야단을 맞았는데 예전 같으면 화를 냈겠지만 이제는 어떤 분은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SOVAC은 사회적 가치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맺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회가 지속 가능해야 회사도 지속 가능하고 개인의 행복도 담보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