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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G의인상에 95세 정 안나 할머니

    이미지 : LG복지제단

    역대 최고령 LG 의인상 수상자가 탄생했습니다.

     

    LG의인상은 LG복지재단이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에게 수여해 온 상입니다. 올해부터 시상 범위를 우리 사회와 이웃을 위한 선행과 봉사로 귀감이 된 시민들로 확대했습니다

     

    주인공은 무료급식소에서 35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정희일 안나 할머니입니다.

     

    정 할머니는 올해 95세로 2015년 LG 의인상이 제정된 뒤 지금까지 수상한 117명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정 할머니는 1986년 서울 영등포구에 무료급식소 토마스의 집이 문을 연 후 지금까지 급식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토마스의 집은 염수정 추기경이 1986년 천주교 영등포동성당 주임신부를 맡았을 때 성당 인근 노숙인들에게 점심 한 끼를 제공하기 위해 신자들과 뜻을 모아 설립한 국내 최초의 노숙인 무료급식소입니다.

     

    하루 평균 400~450명, 연간 13만 명의 가난한 이웃이 이곳에서 한 끼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정 안나 할머니는 토마스의 집이 문을 열 때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는 염 추기경의 말에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토마스의 집이 재정난 등으로 세 번이나 자리를 옮기는 동안에도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정 안나 할머니는 토마스의 집이 문을 여는 날이면 언제나 새벽에 서울 당산동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나와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고령으로 음식 조리와 배식 봉사가 어려워 오전 8시부터 식탁을 닦고 수저와 물컵을 놓고 식사를 마친 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는 일을 합니다.

     

    LG의인상도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 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정 할머니는 2014년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로부터 제31회 가톨릭 대상 사랑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 MLB 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선수 로베르토 클레멘테

    이미지 : Biography 유튜브 캡쳐

    메이저리거들은 모두 최우수 선수를 꿈꿉니다. 한 해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주어지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투수들의 꿈은 사이 영 상이고, 신인 선수들은 평생 한 번 기회가 있는 신인상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수상자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상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입니다.

     

    류현진 선수의 팀 동료인 LA다저스의 클레이튼 커소는 2011년, 2013년, 2014년 투수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사이영상을 수상했습니다. 2012년에도 14승에 평균자책점 2.53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지만 사이영상 수상을 놓쳤습니다.

     

    하지만 그 해 클레이턴 커쇼는 더욱 값진 상을 받았습니다. 바로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입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 메이저리스에서 활약했던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이름을 딴 상입니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투수인 존 스몰츠는 사이영상, MVP 8회 선정 등 많은 상을 받았지만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상을 꼽으라면 바로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듭니다.

     

    수상한 선수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흑인 선수입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1934년에 태어나 1972년 세상을 떠난 그가 활약한 때는 메이저리그에서 인종차별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통산 3000안타를 달성한 그가 거둔 성적은 말 그대로 눈부셨습니다. 올스타 12회, 골든글러브 12회, 최고 타격상 4회, 리그 MVP 1회, 월드시리즈 MVP 1회, 월드시리즈 우승 2회 등이 그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로베르토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주위와 나누고자 늘 애썼던 삶입니다. 그는 많은 돈과 시간을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썼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바꿀 기회가 있는데도 행동하지 않으면 그건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아이들을 좋아했습니다. 고향집은 늘 아이들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만남 요청은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1972년 12월 31일 대지진이 발생한 니카라과를 돕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현지로 향하다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해 서른여덟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부패한 소모사 정권의 공무원들이 구호품을 빼돌리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입니다. 그는 네 번째 구호물품을 실은 비행기를 타고 현지에 가서 구호품이 제대로 전달되는지를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속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는 그의 등번호 21번을 영구 결번 처리했고 그는 이듬해인 1973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그를 기려 해마다 선행과 기부 등의 사회 공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선수를 뽑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평소에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난 선수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 이영표 전 국가대표 선수가 양말 사업을 하는 이유

    이미지 : 유튜브 캡쳐

    이영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가운데 한 명입니다. ‘헛다리짚기’ 드리블로 전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요.

     

    그 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독일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 캐나다 밴쿠버 화이트캡스 등 세계 유명 축구 클럽에서 활약했습니다.

     

    은퇴한 뒤에는 KBS 축구 해설위원으로 경기 결과를 족집게처럼 맞히는 ‘예언’으로 시청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축구가 삶 그 자체였던 이영표 씨는 지금 전혀 낯선 분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의 일터는 하는 곳은 사회적 기업들의 성지인 서울 성수동 소셜 벤처 빌딩입니다. 스타트업인 ‘삭스 업(Socks up)’의 대표가 그의 직함입니다. 삭스 업은 양말이나 풋 크림과 같은 풋 웨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삭스 업’은 축구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넘어졌다 일어날 때 혹은 프리 킥이나 코너킥을 차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양말을 끌어올리는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이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이들을 돕고 ‘삭스 업’ 시키고 싶었는데 기부를 받아서 하는 것은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삭스 업은 홈페이지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양말을 끌어올리게 되는 인생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이 순간들을 ‘SOCKSUP MOMENT’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SOCKSUP MOMENT는 당신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순간일 수도 있고,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묻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삭스 업 모멘트는 언제인가요? 누군가의 SOCKSUP MOMENT를 한 켤레의 양말로 구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단순한 양말 한 켤레를 넘어, 여러분의 일상 속 크고 작은 ‘순간’들을 일깨워주는 작은 상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의 글처럼 삭스 업은 누군가의 스토리를 한 켤레의 양말로 만들어 그 양말을 신는 사람에게 힘과 위안을 주고 한 사람의 SOCKSUP MOMENT가 다른 사람의 SOCKSUP MOMENT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탄생한 상품이 유명 힙합 아티스트 코드쿤스트의 편지로 디자인한 양말입니다.

     

    코드쿤스트는 무명 시절 자신을 알리고 싶어 미국의 유명 래퍼인 조이 베데스에게 메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당연히 답장이 없었지요.

     

    그는 실망하지 않고 베데스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등 주변 인물들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편지를 읽은 매니저가 그의 음악을 베데스에게 들려줬고 그는 코드쿤스트를 당장 로스앤젤레스로 초청했습니다. 그렇게 코드쿤스트는 유명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삭스 업은 코드쿤스트가 베데스에게 보낸 편지로 디자인 한 양말을 만들었습니다.

     

    삭스업에서 제작한 코드쿤스트가 베데스에게 보낸 편지로 디자인한 양말 [이미지 : 삭스업 홈페이지]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올라 있는 ‘SOCKSUP MOMENT - Footprint Project VOL1’은 누군가에게 SOCKSUP MOMENT를 주기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사는 17세 소년 사킬레 미콴다입니다. 그는 축구가 자신의 인생이라고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고 프로 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년입니다.

     

    그가 사는 우스터는 케이프타운에서 동쪽으로 130km 떨어진 작고 가난한 마을입니다. 우스터는 꿈도 희망도 없이 깡패가 되거나 마약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서 프로 입단 테스트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삭스 업에 100통 가까운 편지를 보냈습니다.

     

    2018년 5월 삭스 업은 그를 초청해 테스트 기회를 줬습니다. 안타깝게도 불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미콴다의 표정은 밝았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회가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는 억울함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미콴다는 자신도 남에게 기회를 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고 합니다.

     

    이 대표는 독실한 기독교 인으로 다른 이들을 돕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는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인 컴패션의 한국 홍보대사도 맡고 있습니다. 컴패션은 1952년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한국의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만든 국제기구입니다. 그 자신도 여섯 가정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에 삭스 업을 시작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건 여러 가지가 있어요. 먹고, 자고, 입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어요. 사람은 영적 존재니까 희망이 있어야 해요. 먹는 것은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만,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희망이에요. 저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절망에 빠진 누군가,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삭스업 무브먼트’의 기본 취지예요."

    

  • 지미 카터 “죽음에 대해 완전히 마음 편해”

    이미지 : 카터 센터 홈페이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올해 95세입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장수 기록을 써가고 있지요.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지만 카터는 한평생을 지구촌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죽음과 관련한 발언으로 또 한번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CNN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은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죽음에 대해 완전히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밝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는 이들도 거의 없으며,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들조차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다고 얘기한다는 점에서 카터 전 대통령의 말은 놀라움을 줍니다.
     
    다음은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의 마라나타 침례교회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이타적 행동으로 자신의 삶을 헌신한 이의 지혜가 가슴을 울립니다.
     
    “나는 빨리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신에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 적절한 태도를 갖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죽음에 대해 절대적이고 완벽하게 편안함을 갖게 됐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더 이상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가족과 카터 센터에서 했던 일, 주일학교에서의 아이들을 가르쳤던 일 등 저를 기쁘게 했던 일들은 그리울 겁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이 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는 일에 가장 힘이 센 나라라면 좋지 않을까요? 미국이 환경 정책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초강대국이 되는 것은 어떤가요? 미국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는 데 가장 뛰어난 강국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친구가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면 미국은 더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더 평화로운 나라가 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평생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중동 평화를 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2015년 암세포가 뇌까지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그때도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느낀다”라며 “멋진 인생이었고 흥분되고 모험에 가득 찬 감사한 삶이었다”라고 자신의 삶을 회고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날 밤에도 “이제 몇 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놀랍게도 아주 편안하게 느껴졌다”라고 말해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줬습니다.

  • 하루 100원으로 묵을 수 있는 호텔

    이미지 : THANHNIEN

    베트남 호찌민에서 사업을 하는 응웬 탄 응웬 씨는 남부 껀토시의 한 병원을 찾았다가 가슴이 아픈 광경을 목격합니다.

     

    장기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은 가난한 사람들이 머물 곳이 없어 병원 복도와 벤치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루 8만 동(4천 원)~15만 동(7500원) 하는 숙박비를 장기간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응웬 씨는 가난한 이들이 비용 부담 없이 오래 머물면서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숙박시설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끼엔 안 레지던트(Kien An Residence)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응웬 씨는 지금 레지던트로 운영되고 있는 건물을 월 700만 동(한화 약 35만 원)에 임대한 뒤 4천만 원 가까운 돈을 들여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지난 7월 끼엔 안 레지던트는 15개의 객실과 객실별로 이층 침대 2개씩을 갖춘 어엿한 숙박시설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객실에는 에어컨과 선풍기도 달았습니다. 와이파이도 됩니다.

     

    베트남 기준으로 중급 호텔 수준의 시설로 숙박료는 하루에 1500동(한화 약 75원)~2만 2000동(1600원)입니다. 숙박료는 숙박객의 처지에 따라 값이 달라집니다. 장애, 노인, 어린이는 1500동, 학생은 6000동, 보통 사람은 2만 2000동 등입니다.

     

    탄 린 매니저는 베트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료로 숙박할 수 있는 공동주택 개념이지만 전기와 수도료를 내도록 했습니다. 숙소 유지비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끼엔 안 레지던트에는 현재 2명의 직원이 청소, 빨래, 숙소 관리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봉사자들입니다.

     

    ‘고객'들은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응웬 씨와 직원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정직하고 선하다고 믿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믿어줌으로써 그들이 가진 선의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 녹색문학상 받은 이병철 시인

    이미지 : 이병철 시인 페이스북

    이병철 시인이 녹색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아동문학가와 정두리님과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녹색문학상은 (사)한국산림문학회가 산림청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상으로 숲사랑, 생명존중, 녹색환경보전의 가치를 담은 작품에 주는 상입니다.

     

    이 시인은 농부이자 영성가로 전국귀농운동본부를 만들어 이끌었고 지금은 지리산 생태영성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상을 받은 시집 <신령한 짐승을 위하여>는 시인이 “틈틈이 메모한 생태 관련 노래들”이고 "그가 본래 정체성이 신령한 짐승이라는 자각과 다시 신령한 짐승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부른 노래이자 비명”입니다.

     

    시인은 시집의 신령한 짐승에 대해 “본시 우리는 숲속에 둥지 튼 한 마리 짐승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여느 짐승들과 달리 땅에 서서 두 손을 모으며 하늘의 신령함을 가슴에 품어왔던 짐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풀이했습니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존재라고도 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뜬금없는 소식”이라고 놀라워하면서 “내 노래가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가 하고 간절하게 외치는 청소년들과 다음 세대들에게 힘을 보탤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수상 소감을 적었습니다.

     

    다음은 이병철 시인이 추천한 자신의 시입니다.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며>

     

    오늘 한그루 나무를 심으며

    내가 숲속의 사람이었던 때를 생각한다.

    그 숲에서

    나무 위에 새들과 어울려 둥지 틀고

    이 나무와 저 나무를 건너 오가던

    한 마리 숲속의 짐승이었음을 생각한다.

    가을 숲속에서 넉넉히 먹이를 얻었고

    봄의 향기로 가득한 숲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지.

    나무 위에서 바라보는 별들이 어찌 아름다웠든지

    새벽에 일어나며 노래하고

    숲에서 솟아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셨지.

    오늘 심는 이 나무들 서로 기대어

    언젠가 여기 다시 숲 일구어지면 그때

    잊었던 고향, 그 시원의

    첫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리

    숲으로 돌아가

    한 마리 짐승으로 살아야 하리.

    뽑혔던 뿌리 다시 깊게 내리고

    왜소함 감추려 치장했던 모든 겉치레 벗고

    땅 위에 발 굳건히 디디며

    맨몸으로 당당한 부끄럼 없는 짐승으로,

    하늘 우러러 소통하여

    스스로 피어나 봄을 열며

    저절로 익어 가을을 거두는

    한 마리 신령한 짐승으로 다시 살아야 하리.

    오늘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며

    내 떠나온 곳,

    내 다시 돌아갈 고향을 생각한다.

    목마르지 않던

    그 생명의 숲을 생각한다.

  • 100인분 나눔 요리 만들던 ‘그랜파’ 영면에 전 세계 눈물바다

    이미지 : 그랜파 키친

    음식 기부를 위해 100인분 요리를 하던 나라야나 레디(73)가 2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운영하던 유튜브 채널 ‘그랜파 키친(Granpa Kichen)’은 31일 동영상을 통해 “할아버지가 27일 자신의 마지막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곁에 없지만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라는 글을 올려 레디의 부고를 전했습니다.

     

    영상에는 그의 생전 모습과 가족과 많은 이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치러진 장례식 장면들이 담겼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 각지에서 슬픔을 가득 담은 추모의 글이 쏟아졌습니다.

     

    그랜파 키친의 유튜브 채널에만 12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고 SNS에도 추모글이 이어졌습니다.

     

    네티즌들은 “사랑하고 나누고 돌보자"라는 그의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한 네티즌은 트위터에 “그랜파 안녕히 가시길, 사랑이 가득 담긴 요리를 보여줘서 정말 고마워요. 사랑하고 나누고 돌보자”라고 적었습니다.

     

    다른 네티즌은 “우리는 인도의 작은 마을에 사는 세계의 가장 큰 어른을 잃었습니다.”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레디는 ‘가난한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자’면서 한 번에 100인분 이상의 요리를 직접 만들어 불우한 처지의 아이들에게 기부했습니다.

     

    2017년 8월부터는 햄버거, 피자, 치킨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요리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이를 통해 나오는 수익금으로는 보육원에 책가방이나 학용품을 사서 보냈습니다.

     

    레디가 요리하는 장면은 네티즌들에게 ‘힐링 영상’으로 알려져 널리 퍼졌고 그가 운영한 유튜브 채널 ‘그랜파 치킨’은 구독자만 610만이 넘습니다.

     

    레디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가족들에게 평소에 강조했던 “지구에 머무르는 동안은 남을 도와야 한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 로저 페더러, 말라위, 그리고 100만 명의 아이들

    이미지 : BBC News 유튜브 캡처

    로저 페더러는 역사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2019년 3월 남자 프로 테니스(ATP) 투어 단식에서 미국의 지미 코너스에 이어 두 번째로 통산 100번째 우승을 달성한 선수입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237주 동안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역대 최장 연속 랭킹 1위를 기록했고 302주 동안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페더러가 써나가는 위대한 테니스 역사를 알고 있지만 아프리카 말라위의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그의 담대한 프로젝트를 아는 이들은 적습니다.

     

    페더러의 어머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입니다. 페더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아프리카를 자주 찾았는데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됐다고 합니다.

     

    페더러는 2004년 아프리카 말라위에 로저 페더러 재단을 만들어 아이들의 교육과 급식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2018년까지 100만 명의 아이들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고, 이를 달성했습니다.

     

    로저 페더러 재단을 이끌고 있는 제니 핸델 CEO는 목표를 달성한 뒤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결과를 달성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로저 페더러가 늘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100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 유치원 등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다 나은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로저 페더러는 BBC와 인터뷰에서 “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환상적인 일”이라며 “테니스 선수가 된 뒤에 늘 이곳이 내가 돌아와서 도와야 할 곳이라고 늘 생각했고 그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라고 말했습니다.

  • 베트남 오지 마을에서 인술 펴며 20명 입양한 의사

    이미지 : tuoi tre 유튜브 캡처

    오지 마을에서 20년째 인술을 베푸는 의사가 있습니다.

     

    진 덕 티엔(51)은 1998년 후에 의약학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베트남 중부 꽝찌 근처의 어 바오로 갔습니다. 어 바오는 600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입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도시 다낭이 있었지만 그는 돈이나 명예 대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마음이 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20년 넘게 살고 있는 어 바오에 처음 간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베트남과 라오스 국경 근처의 어 바오에 가기 위해 흙먼지 날리는 길 8km를 걸어서 갔고 도중에 강도 건너야 했습니다.

     

    환경은 더 열악했습니다. 마을 보건소 건물은 나뭇조각으로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이어서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기에는 너무 허술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몸이 아픈 것이 악령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생각해 기도를 하면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진 덕 티엔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처음 2주 동안 아무도 보건소를 찾지 않아 할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 덕 티엔은 이 마을의 임산부들이 가장 큰 위험에 처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마을의 임산부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강가에 세워진 텐트에서 혼자 아이를 낳아야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집에서 아이를 낳으면 가정에 불행이 찾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 마을의 신생아 사망률은 무척 높았습니다.

     

    그는 치료에 앞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에 나섰습니다. 그는 출산을 앞둔 임산부의 가족들을 설득해 텐트로 가서 여성의 출산을 도왔습니다. 보건소 옆에 임산부가 의료지원을 받으며 출산할 수 있도록 판잣집도 지었습니다.

     

    이와 함께 마을의 지도자들을 찾아가 의료의 중요성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이어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보건소에서 치료받으면 병이 낫는다는 확신을 갖는 데 무려 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임산부들이 이전과 달리 별 탈 없이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경우가 늘어나자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출산일이 가까워지면 보건소를 찾는 여성들이 늘었고 아플 때 치료를 받으러 오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지방 정부의 지원을 받아 보건소 건물도 세웠습니다. 판잣집을 허물고 지은 2층 콘크리트 보건소 건물에는 진료실과 함께 14개의 병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보건소가 자리를 잡자 진 덕 티엔은 다음으로 마을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이었습니다. 어 바오에 사는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려면 반나절이나 걸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와 논의해 그런 아이들을 입양하기로 했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터라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부부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용기를 냈습니다.

     

    부부는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집 근처에 밭을 일궜습니다. 학기기 시작되기 2개월 전부터는 부근 도시의 자선단체를 찾아가 옷가지와 학용품 교재 등을 얻어오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부부가 입양해 키운 아이들은 20여 명이나 됩니다.

     

    진 덕 티엔의 아내 호앙 티 후옹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남편과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에 개의치 않았어요. 우리는 그저 아이들이 자라면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 물속 미세 플라스틱 제거법으로 구글 사이언스 페어 우승한 소년

    이미지 : 페레이라 유튜브

    아일랜드 출신 10대 소년이 미세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오염을 막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찾았습니다.

     

    CNN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아일랜드 출신의 피온 페레이라(18)는 8월 열린 ‘구글 사이언스 페어 2019’에서 물속의 미세 플라스틱 제거 방안을 제시해 우승과 함께 5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습니다.

     

    미세 플라스틱은 5mm 이하의 플라스틱을 통칭하는 말로 물, 공기, 토양 등에 스며들어 사람은 물론 동물의 체내에 들어가 건강에 위협을 주는 물질입니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나이나 성별에 따라 먹고 마시고 숨 쉬는 과정에서 한 해 7만 4천~12만 1천 개의 미세 플라스틱을 체내에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페레이라는 액체 자석인 페로 플로이드를 활용해 물속의 미세 플라스틱을 끌어모으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액체 자석은 강한 자성을 띠는 입자를 나노 크기로 만들어 액체화한 것입니다.

     

    페레이라는 액체 자석을 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된 용액에 넣는 실험을 950차례 이상 진행했습니다. 그가 고안한 방법은 다양한 미세 플라스틱을 88%까지 제거했습니다. 

     

    그는 고향인 밸리드홉 바닷가에서 기름과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돌을 보면서 해양오염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페레이라는 프로젝트 제안서에서 “수많은 미세 플라스틱이 하수에 유입돼 바다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라고 적었습니다. 그가 수중 미세 플라스틱 제거 방법을 연구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는 올가을 네덜란드의 한 대학에 진학해 관련 연구를 이어갈 생각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