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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년째 시각장애인 마라토너의 눈이 되주는 사람

    이미지 출처 : 현대 모비스 TV 캡쳐

    안기형씨는 두 개의 직함을 갖고 있습니다. 공식 직함은 현대모비스 모듈품질보증팀 차장이고, 비공식 직함은 시각장애인 마라톤 코치입니다. 

     

    안 차장은 토요일이면 서울 남산 산책로에서 2시간 동안 마라톤을 하는 시각장애인의 ‘눈’이 됩니다. 17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마라톤 마니아로 2002년 4월 사하라사막 마라톤에 참가한 그는 특별한 모습의 참가자를 보게 됩니다. 

     

    서로의 팔에 줄을 묶고 함께 호흡을 맞춰 달리는 두 사람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들은 한국에서 온 시각장애인과 도우미였습니다. 

     

    안 차장은 도우미로 온 분에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어렵지 않으세요? 

    “어려울 것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더 보람되고 즐겁습니다.” 

     

    그분의 환한 얼굴을 보면서 존경심이 생겼다고 합니다. 

     

    레이스 마지막 날 시각 장애인이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한국에 자신 외에도 마라톤을 하고 싶어 하는 장애인이 많으니 지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안 차장은 매주 토요일 남산을 찾아 시각장애인의 도우미 구실을 시작했습니다. 

     

    쉽지는 않았지요. 국가대표 출신이 마라톤 코치를 한다고 하니 첫날 11명의 시각장애인들이 왔다고 합니다. 안 씨는 준비체조부터 가르쳤는데 따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연했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따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주일 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조각상을 만지면서 느낌을 얻는다는 데 착안해 시각장애인들에게 자신의 몸을 만지면서 스트레칭 자세를 배우도록 했습니다. 

     

    노하우도 쌓였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트레칭법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고, 시각장애인과 동반주자를 이어주는 끈의 길이를 1m 이하로 줄였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의 실력이 늘어가자 안 차장은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모두들 망신만 당할까 자신 없어 했습니다. 

     

    180개 동호회가 참여했는데 시각장애인임에도 19등을 했다고 합니다. 

     

    안 차장은 1977년 성남 성일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육상부를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2000m 달리기에 참가해 1위로 선발되면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1985년 경부역전마라톤 대회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현대모비스 실업팀에 들어와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되기도 했지만 1987년 동아마라톤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이 나오지 않자 은퇴를 선택했습니다.  

     

    직장인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 평범하게 살다 2002년 '나를 찾는 달리기'를 다시 시작해 이듬해 열린 '제18회 사하라 사막 마라톤 대회'에서 아시아 참가자 중 최고 기록을 내기도 했습니다. 2004년 <243㎞ 사하라를 달린다>는 책도 펴냈습니다. 

     

    요즘에도 가끔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는데 강연 또한 마라톤 자원봉사와 마찬가지로 돈을 받지 않고 합니다. 봉사를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 이재철 100주년기념교회 목사의 아름다운 ‘버림’

    이미지 출처 : 이재철 목사 마지막 설교 영상 캡쳐

    이재철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 기념교회 목사의 퇴임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이 목사는 지난달 11월 17일 주일예배를 끝으로 경남 거창군 시골마을로 낙향했습니다. 2005년 7월 100주년기념교회 초대 담임목사를 맡아 13년 4개월 동안 사역했는데 정년을 7개월 앞두고 조기 퇴임 한 것입니다. 

     

    이 목사는 퇴임식, 이취임식, 감사예배 등 일체의 행사를 열지 않았습니다. 그날 1~4부 예배에서 4차례 설교한 뒤 짐을 정리해 아내와 함께 표표히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 목사는 교회로부터 퇴직금 한 푼 받지 않았습니다. 남은 삶은 국민연금으로 생활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설교는 울림이 컸습니다. 이 목사는 버림을 강조했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침없이 버려야 깊은 영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을 거침없이 버려야 새로운 내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낡은 부대를 거침없이 버려야 새 포도주를 담그고, 새 부대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 자신부터 버림을 실천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유익을 취하기 위해 100주년기념교회 담임이 된 게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른 마르튀스(증인)와 휘페르테스(종)의 소임을 다한 뒤에 100주년기념교회를 떠나기 위해 담임이 됐고,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신도들에게 오랫동안 이끌어온 목사인 자신도 당연히 버림의 대상임을 일깨웠습니다. 자신의 버림은 신도들의 버림으로 완성된다고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임 공동 담임목사님들을 통해 거침없이 내려주실 새로운 차원의 은혜를 얻기 원하신다면 교우님들은 이제부터 이재철을 버리셔야 합니다. 이재철을 버리시되 적당히가 아니라 철저하게 버리셔야 합니다. 이재철을 크게 버리면 크게 버릴수록 후임 공동 담임목사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침없이 내려주실 새로운 차원의 은혜를 더 크게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목사는 자신이 시골로 낙향하는 이유도 설명했습니다. 

     

    “후임자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양화진에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희 부부를 위해 택정해 놓으신 땅으로 낙향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이재철 목사의 자취는 특별합니다. 교계에서는 이 목사가 한국 교회에 남긴 가장 큰 공로는 예수님의 자리에 결코 자신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주기도문을 외우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일부 목회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예수님의 자리에 놓는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자신이 키운 교회라는 왕국의 제왕이 되어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목사는 버림을 잊지 않음으로써 그런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 목사는 1988년 서울 강남에 주님의교회를 개척했으나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의 약속대로 10년 임기가 끝나자 곧바로 사임한 뒤 파송 선교사로 스위스 제네바 한인교회를 맡았습니다.  

     

    3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서울의 한 작은 교회에서 중고등부 교사로 일하다 초기 선교사들의 무덤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2005년 양화진에  100주년기념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개척했다는 얘기가 퍼져나가면서 100주년 기념교회에 신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신도 수가 1만 6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는 또 다른 버림을 준비했습니다. 은퇴 3년 전인 2016년부터 퇴임 준비를 위해 교회 안에 미래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정관 개정과 후임자 인선 등을 추진한 것이지요. 목사 신임투표제를 도입하고 장로와 권사를 직분에서 호칭으로 바꿨습니다. 장로와 권사를 교회 안의 직급이 아니라 존경할만한 연장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쓰도록 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목사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많은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나 권사와 같은 직분이 목사의 수족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도들에게 군림하기도 합니다.  

     

    이 목사는 자신의 뒤를 이어 4명의 목사가 교회를 이끌어 가는 시스템도 만들었습니다. 제왕적 목회자의 탄생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100주년기념교회는 정한조(영성 총괄), 이영란(교회학교 총괄), 김광욱, (목회 총괄), 김영준(대외 업무 총괄) 4명의 목사가 사역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인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성탄절을 되새기게 됩니다. 

  • 배우 하정우의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

    이미지 출처 : 하정우 페이스북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걷는 사람, 하정우> 291~292쪽)

     

    '신과 함께’ 두 편과 ‘암살’로 1000만 관객을 세 번이나 모은 ‘삼 천만 배우’하정우. 감독이자 그림 그리는 사람 등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그가 걷기와 관련한 책을 냈습니다. <걷는 사람, 하정우>

     

    배우나 아이돌을 다룬 TV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의 인기 연예인들은 잠잘 시간조차 부족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대 배우로 스케줄이 꽉 차 있을 것 같은 하정우 씨가 걷기 책을 냈다는 게 조금은 의아합니다.

     

    책의 띠지가 그런 궁금증에 답을 합니다.

    “그에게 걷기란, 두 발로 하는 간절한 기도, 나만의 호흡과 보폭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아무리 힘들어도 끝내 나를 일으켜 계속해보는 것”

     

    하정우 씨에게 걷기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이 책에는 "자연인 하정우가 실제로 두 발로 땅을 밟으며 몸과 마음을 달랜 걷기 노하우와 걷기 아지트"가 담겨 있고, 걷기가 가져다준 몸과 마음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배우는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입니다. 연기가 잘 안될 때도 있고 특히 출연한 영화가 관객의 외면을 받을 때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늘 따라다닙니다. 하정우 씨는 그럴 때면 운동화를 싣고 길을 나선다고 합니다.

     

    하정우 씨는 걸어서 출퇴근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 3만 보씩은 기본이고 어떤 때는 10만 보를걷기도 합니다. 집이 있는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서 약속 장소인 홍대까지 13km를 걸어서 가고 김포공항까지 8시간을 걸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손목에는 걸음수를 체크하는 피트니스 밴드를 차고 있고 주변 연예인들에게도 걷기의 즐거움과 효용을 알리고 있어 ‘걷기교 교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가 감독한 영화 <577 프로젝트>는 공효진 등 16명의 배우들과 함께 577km를 걷는 과정을 담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하정우 씨가 2011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지난해 수상자로서 말하면서 연속 수상하면 국토대장정을 하겠다는 ‘호언’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기획됐습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 하정우 씨의 걷기 예찬입니다. 

  • 캐나다 10달러 신권에 새겨진 첫 여성흑인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캐나다가 여성 흑인 인권운동가를 새긴 10달러 새 지폐를 만들었습니다. 

     

    캐나다 중앙은행인 캐나다은행은 19일 스티븐 폴로즈 총재가 참석한 가운데 위니펙에 있는 캐나다 인권 박물관에서 10달러 신권 발매 기념행사를 열었습니다. 

     

    지폐에 새겨진 인물은 캐나다 흑인 인권운동의 선구자인 고 비올라 데스몬드 여사입니다. 그는 1946년 11월 8일 한 극장에서 백인 전용 좌석에 앉은 채 자리를 옮겨달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흑인 인권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데스몬드 여사는 화장품을 만들어 방문판매했는데 하룻밤 머물게 된 노바스코샤주 헬리팩스에서 극장을 찾았다가 백인 전용석에 앉게 됐습니다. 

     

    직원이 흑인석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출동한 경찰에 체포돼 12시간 구류와 함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데스몬드 여사의 행동은 노바스코샤주에 만연하던 인종차별에 정면으로 맞선 불복종 운동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데스몬드 여사가 살던 노바스코샤주 정부는 데스몬드 여사를 탈세 혐의로 기소하면서 보복을 했습니다. 극장에서 흑인들이 앉는 발코니석과 백인 전용 좌석의 가격차이 1센트에 대한 세금포탈을 시도했다는 게 죄명이었습니다. 1센트 비싼 좌석에 앉았으니 1센트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게 기소 이유였습니다.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데스몬드 여사에게 26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2010년 노바스코샤주 정부와 법원은 그녀의 1센트 탈세에 대해 사후 무죄를 판결했고 공식 사과했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2012년 데스몬드 여사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데스몬드 여사는 캐나다은행이 지폐에 새길 여성을 선정하기 위해 실시한 공모와 여론조사를 거쳐 지난 3월 선정됐습니다.  데스몬드가 새겨진 10달러 신권은 캐나다 지폐 가운데 처음으로 세로 디자인으로 만들어졌으며 뒷면에는 그의 고향인 핼리팩스 북부의 흑인 밀집 지역 지도가 담겼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이날 열린 행사에 참석한 데스몬드 여사의 여동생 완다 롭슨(91)은 "인권과 평등을 위한 위대한 전진의 날"이라며 감격해 했습니다. 

     

    데스몬드의 얼굴이 새겨진 10달러 지폐는 11월 26일부터 시중에 유통됩니다.  

  • 농민빚 대신 갚는 인도 영화배우

    이미지 출처 : 아미타브 바찬 페이스북

    인도의 인기 영화배우가 농민의 은행 빚을 대신 갚아줬습니다.

     

    영화 <블랙>과 <위대한 캣츠비> 등에 출연한 인도의 인기 영화배우 아미타브 바찬(76)은 사재를 털어 1398명의 은행 빚을 갚았습니다. 

     

    그가 농민의 빚을 갚기 위해 쓴 돈은 4000만 루피, 우리 돈으로 약 6억 4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바찬이 도와준 농민들은 바찬의 고향인 인도 북부의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찬은 올해 초에도 자신이 살고 있는 마하라슈트라 주 농민 350명의 빚을 갚아줬습니다.

     

    그는 블로그를 통해 “농민들이 겪고 있는 부담 중 일부를 덜어주고 싶다”면서 “그 바람이 이뤄질 때 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온다"라고 선행의 이유를 밝혔다.

     

    인도는 수십 년간 가뭄, 지하수 고갈, 시설 부족, 생산성 저하 등으로 농업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수만 명의 농민이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빚을 내야 하는 농민이 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어려움 때문에 1995년 이후 최소 30만 명 이상의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찬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가운데 한 명으로 19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는 지난 2015년 8월 미국 경제지 포브스에 ‘세계에서 소득이 가장 많은 남자배우’ 7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포브스가 당시 밝힌 그의 1년 수입은 약 3350만 달러(약 378억 4500만 원)였습니다. 

  • 故 이태석 신부, 남수단 교과서에 실리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캡쳐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인술을 펼치다 세상을 떠난 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남수단의 국정교과서에 실렸습니다. 

     

    남수단 교육부는 지난 9월 이 신부님의 삶을 수록한 교과서를 펴냈는데 2019년 새 학기부터 일선 학교에 보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슈바이처’라고 불린 이 신부님의 삶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3쪽, 중학교 시민권 과목에 교과서에 2쪽에 걸쳐 소개됐습니다. 

     

    교과서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사제가 되어 남수단의 가난한 이웃들과 사랑을 나눈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그는 남수단에서도 열악한 지역인 톤즈에 작은 병원을 세웠고, 하루 300명의 환자를 돌봤다. 학교를 지어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80여 개의 마을에 백신을 공급하기도 했다”  

     

    “그의 병원은 가톨릭과 개신교, 무슬림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을을 파괴한 군인들도 치료를 받았다”  

     

    남수단 정부는 이 신부님을 기리기 위해 2015년부터 신부님의 삶을 교과서에 싣는 것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뎅뎅 호치 야이 남수단 교육부 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교과서에 실을 수 있어 큰 영광”이라며 “의사·음악가·선교사로서 10년 넘게 희생과 봉사를 몸소 실천하신 이 신부님의 삶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산이 고향인 이 신부님은 어릴 적 집 근처의 성당을 놀이터로 삼아 자랐습니다.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셨다고 합니다.  

     

    이 신부님은 성당에서 벨기에 출신 다미안 신부를 다룬 영화를 보고 사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부근의 한 섬에서 한센인을 돌보다 자신도 같은 병에 걸려 49세에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인제대 의대에 진학한 이 신부님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졸업 뒤 사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2001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이 신부님은 곧바로 남수단 톤즈로 떠났습니다.  

     

    이 신부님은 그곳에서 전쟁으로 인해 다치고 굶주리고 병에 걸린 이들을 치료하고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 방청객 모두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판사

    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퍼블릭 도메인)

    미국 대공황 때 있었던 일입니다. 

     

    1935년 1월 어느 추운 겨울밤에 뉴욕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나이 든 여성이 법정에 나와 판사 앞에 섰습니다. 빵 한 덩이를 훔쳐 절도죄로 기소된 그 여성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떨군 채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판사가 그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빵을 훔친 것이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절도죄라는 것을 모르셨나요?"

     

    그 여성은 고개를 들고 판사를 보며 답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습니다. 사위가 가족을 버렸고 딸은 병이 들어  어린 두 손자가 굶고 있습니다. 너무 어린아이들입니다"

     

    나이 든 여성이 말을 마치자 법정이 술렁였습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빵 가게 주인은 단호했습니다. 

    “판사님,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저 여성을 처벌해야 합니다.”

     

    판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잠시 후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본 법정은 10달러의 벌금형에 처합니다."

     

    판결을 마친 뒤 판사는 주머니에서 10달러 지폐를 꺼내 자신의 모자에 담았습니다.

     

    “이 돈은 벌금입니다. 그리고 나는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여성처럼 가난한 이웃이 빵을 훔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함에도 무관심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무관심에 대한 벌입니다.”

     

    순간 방청석은 침묵에 쌓였습니다.

    판사의 모자가 방청객들에 넘겨졌고 모두가 기꺼이 벌금을 냈습니다. 

    판사는 10달러의 벌금을 뺀 나머지 돈을 그 여성에게 전달했습니다.

     

    재판정을 나서는 여성의 빰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판결을 내린 판사가 피오렐로 헨리 라과디아입니다.  그는 공정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우호적인 명판결을 많이 내린 판사로 이름났습니다. 

     

    후에 시민들의 추대로 뉴욕시장이 돼 세 번이나 연임하며 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고 합니다. 시장 시절에는 뉴욕의 지하경제를 주무르고 있던 마피아 소탕작전을 성공적으로 벌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그가 사망하자 뉴욕시는 퀸스에 설립된 공항을 라과디아 공항으로 이름 지어 그를 기렸습니다. 

  • 피스우즈 창간 일러스트 축전

      

  • 피터 노먼, 올림픽보다 더 위대한 선수

    이미지 출처 : 피터 노먼 페이스북

    이미지 출처 : 올림픽 유튜브 캡쳐

     

    1968년 멕시코에서 열린 올림픽을 전설로 만든 것은 단 한 장의 사진이었습니다.

     

    육상 200m 시상식 사진입니다. 1등과 3등을 차지한 흑인 선수는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치켜 올렸습니다.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항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두 사람이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며 곧바로 선수촌에서 쫓아냈습니다.

    시상대에 섰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그 때부터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이 됐습니다.

     

    하지만 두 선수 옆에 얌전하게 서 있던 백인 선수를 기억하는 사람은없습니다.

    은메달을 받았던 호주 출신의 백인 선수 피터 노먼이 그의 이름입니다. 

     

    시상식 전에 두 사람이 퍼포먼스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한 노먼은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밝히고 두 선수에게 까만 장갑을 구해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함께 팔을 들지 않았지만 노먼은 정의를 상징하는 올림픽 배지를 착용했습니다.

     

    호주는 백인 우월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가 득세하던 곳이었습니다. 백인이 아닌 사람의 이민을 제한하는 정책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나라를 조국으로 둔 피터 노먼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지만 칭찬 대신 혹독한 ‘응징’을 당했습니다. 호주는 그에게 상을 주는 대신 차기 올림픽 출전권 박탈이라는 징계를 했습니다.

    노먼은 백호주의를 저버린 ‘배신자’로 낙인찍혀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간신히 학교 체육 교사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흑인 인권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노먼은 함께 시상대에 섰던 두 흑인을 비판하면 복권시켜주겠다는 제안도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대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에 삶을 바쳤습니다.

     

    노먼은 200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도 호주 정부는 그를 외면했습니다.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장례식에 참석해 관을 들고 애통해했습니다.

    카를로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두 사람은 약간의 좌절을 맛봤지만 노먼은 자신의 조국인 한 나라와 맞서 고독한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라고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피터 노먼(가운데)이 토미 스미스, 존 카를로스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이미지 출처 : 피터 노만 페이스북

     

    노먼이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난 2012년 호주 올림픽 위원회는 드디어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했고 그의 인권운동에 대한 공헌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노먼의 이런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흑인인권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인 멕시코 올림픽 시상식 사진에서 그저 “위대한 흑인 선수 옆에 있는 백인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노먼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시상식 사진이 조형물로 만들어질 때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비워두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섰던 자리에서 “위대한 흑인 선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두 흑인 선수 못지 않게 노먼도 위대한 선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68 멕시코 올림픽 당시의 시상식을 본떠 만든 조형물. 노먼의 의사를 존중해 2등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있다. 이미지 출처 : San Jose State University 홈페이지

  • 20대에 '수백명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캡쳐

    "전 우리 모두가 이 세계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 하나로 20대에 '수백 명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블링크나우(BlinkNow) 재단의 창립자인 매기 도인(Maggie Doyne)은 네팔의 내전으로 고아가 된 49명의 아이들의 법적 후견인입니다. 

    또한, 네팔에 코필라 벨리 스쿨(Kopila Valley School)이란 학교를 세워, 380명 이상의 아이들을 무료로 교육시키는 등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도인이 자신의 삶을 네팔의 아이들을 돕는 데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2006년, 네팔을 여행하다 두 소녀를 만난 것이 계기였습니다.

     

    당시 18살이었던 도인은 장래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도인은 자신의 미래를 찾기 위해, 자아성찰 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세계를 여행하기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도인은 네팔에서 라코라(Lacora)라는 매우 어린 소녀를 만납니다.

     

    라코라는 네팔의 고아 중 한명이었습니다.

    라코라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하루종일 무거운 짐을 버스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머리에 이고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은 겨우 하루에 1~2달러였습니다. 

    네팔 고아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그는 "이 아이들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같은 인류로서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도인은 히마(Hema)라는 소녀도 만납니다.

    당시 6살이었던 히마는 마른 강바닥에서 돌을 깨고 그것을 팔아서 얻은 몇 루피의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고아였습니다.

    "전 세계의 고아는 도울 수 없겠지만, 이 아이 한명은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도인은 히마의 학비, 교복, 교재비 등을 지불하면서 그녀가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히마를 도우면 도울수록, 도인의 마음속에는 다른 고아들도 돕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싹텄습니다. 

    날이 갈 수록 도인은 고아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집, 마음껏 배울 수 있는 학교,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마을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7년, 도인이 19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블링크나우(BlinkNow) 재단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12살부터 18살까지 6년간 용돈으로 조금씩 모아뒀던 5000달러와 함께, 전 세계에서 기부를 받아 코필라 벨리(Kopila valley)의 땅을 일부 구입했습니다.

     

    그 해에 도인은 그곳에 '코필라 벨리 어린이의 집(Kopila Valley Children's Home)'을 열었으며, 네팔의 고아들을 한명 두명 입양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에는 코필라 벨리 스쿨(Kopila Valley School)을 세웠으며, 이후 병원, 자매의 집 등 아이들이 질병, 범죄 등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시설들을 차례로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도인의 노력은 조금씩 전 세계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에는 '25 세 이하의 젊은이들이 지역 사회와 세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사람'을 선정하는 두 섬씽 어워즈(Do Something Awards)에서 대상을 받아 10만 달러를 수상했으며, 2013년에는 포브스(Forbes)의 교육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2014년에는 달라이 라마가 선정하는 '알려지지 않은 자비의 영웅(Unsung Hero of Compassion)'으로 선정됐고, 2015년에는 CNN에서 선정한 '올해의 영웅(Hero of the Year)'에 뽑혔습니다. 

     

    "이 아이들을 만났음에도 아이들을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사는 것 보다는, (아이들의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서든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 당시에 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방법인지,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등등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이러한 삶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인은 자신의 집에서 49명의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도 재밌고, 그 곳이 자신을 위한 조그마한 파라다이스라로 합니다.

     

    도인은 현재의 코필라 벨리 캠퍼스를 대체할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엔지니어, 건축가, 개발자 및 환경 전문가 팀이 지속 가능한 녹색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고 있으며, 그 넓이는 1만 2140 제곱미터 (약 3672평)에 달합니다. 새로운 캠퍼스의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직업 센터까지 있으며, 500명의 학생들을 위한 18개의 강의실로 이뤄집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음식을 식량을 제공할 농장과 과수원도 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아이들을 도우려는 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 수록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와 사람을 돕는 데 있어서는 모든 이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인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교육을 잘 받았고, 자유롭고, 능력이 있고, 안전하다면, 당신의 힘을 당신과는 달리 가지지 못한 우리 인류 가족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전 우리 모두가 이 세계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