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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 명상수필

Contents List 3

  • 초간단 명상

    혼자 있을 때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일상에서 종종 생깁니다. 

     

    예전에는 휴대폰을 보거나 책을 펴 들고 읽곤 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길어질 수도 짧을 수도 있겠으나 개의치 않고 잠시 눈을 감고 저 아랫배에서부터 깊게 심호흡을 합니다. 

    내쉬고 들이쉬고를 반복하며… 

     

    내쉬는 숨과 함께 축복이 나를 통과하도록 합니다. 

    들어오는 숨에도 축복이 나를 통과하도록 합니다. 

     

    내쉬는 숨과 함께 평화가 나를 통과하도록 합니다. 

    들어오는 숨과 함께 평화가 나를 통과하도록 합니다. 

     

    호흡을 할 때는 의식의 밝기가 높은 언어를 선택합니다.  

    쇠가 불을 통과하여 보석이 되듯이 마음이 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내내 이런 상상을 하면 마음이 잘 비워집니다. 감정의 찌꺼기와 잡념들이 물이 흘러가듯 내 안에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재잘대는 뇌가 쉬면서 에너지가 충전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대신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둡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사랑이 느껴집니다.

  • 하늘이 하늘을 봅니다

    꽃을 봅니다

    내가 꽃이 됩니다


    나비를 봅니다

    내가 나비입니다

     

    물을 봅니다

    내가 물입니다

     

    하늘을 봅니다

    하늘이 하늘을 봅니다

  • 꼬마들의 명상(귀여움 주의)

    명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할 때 가만히 앉아 고요히 머물러야 하는 만큼 잠잘 때 말고는 뛰노는 게 일인 아이들은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서너 살로 보이는 꼬마들이 명상을 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물론 집중이 쉽지 않습니다. 주위를 돌아보거나 눈을 뜨고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도 그렇지 않나요? 비록 눈을 감고 앉아 있지만 마음의 눈으로 세계를 여행하고 시공을 넘나들지 않는가요?

     

    이 꼬마들은 의젓하고 잘 참습니다. 앞줄 왼쪽 빨간 티셔츠를 입은 꼬마의 ‘내공’은 대단해 보입니다. ^^

  • 선한 사람이 되는 길

    이미지 : 픽사베이

    바람이 자신을 감출 수 없듯이 

    어떠한 것도 환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달팽이가 천천히 기는것도 

    강물이 한곳으로 모두 연결되어 흐르는 것도 

     

    사람들이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웃는사람 보면 덩달아 웃음이 나오고 

    우는 사람보면 덩달아 눈물이 나오고 

     

    그것은 모두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끈임없이 밝음, 행복,사랑을 선택할때 

    비로서 가슴이 환해지는것을 

     

    다른이들의 행복을 기뻐할때 

    다른이들을 축복할때 

    다른이들의 선함을 칭찬할때 

    다른이들의 아픔을 위로 할때 .

    스스로 어떠한 경우에도 자족함을 선택할때 

     

    내안이 따뜻해집니다.

    나도 비로서 善한자 됩니다. 

  • 가깝지만 잊고 지내는 친구, 숨

    이미지 : 픽사베이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먼 거리에 있듯이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숨쉬기입니다.

     

    태어나서 저절로 쉬었던 복식호흡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사용하지 않으면 내재되어 있는 많은 기능들은 퇴화하고 맙니다.

     

    호흡이 얕아지고 거칠어지기 전에 부드럽고 깊고 풍부하고 가늘어서 고요해 있는 듯 없는듯한 좋은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좋지만 마음을 기울이면 더 좋은 친구가 되듯이 주의를 기울이면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숨을 쉴 수 있다고 봅니다. 느껴보고 지켜 바라보는 것으로요.

     

    친구와 함께할 시간을 비워 두듯이 숨이 들어오려면 공간이 필요합니다. 비워야 공간이 생깁니다.

     

    내 생각을 비워 아무것도 아닌 존재하게 하는 그것에 온전히 맡겨봅니다.

     

    숨에 마음이 따르도록 온전히 숨을 느껴봅니다. 숨과 숨 사이에 멈추어 봅니다.

     

    生(들숨)도 死(날숨)도 아닌 그 순간의 틈이 생기도록요.

     

    친구와 친할 때는 한 몸인 것처럼 편안합니다. 숨도 친하면 더 깊고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친구가 나를 따르고 때로 나도 친구를 따르게 되는 사이가 될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이렇게 자연스럽다면 이상적인 관계일겁니다.

    

  • 별을 좋아하던 꼬마 철학자

    이미지 : 픽사베이

    어린 시절 무척 더운 지방에서 자랐다.

    비도 자주 오지 않는 곳이라 여름밤은 고통스러웠다. 선풍기 하나로 열대야를 나기는 쉽지 않았다. 낮에 달궈진 시멘트벽은 새벽까지 더위를 뿜어냈다.

     

    그런 여름날이면 옥상에 올라가 모기장을 쳤다.

    바닥에 물을 뿌려 열기를 날려 보낸 뒤 얇은 이부자리를 펴면 옥상은 훌륭한 피서지로 바뀌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자정이 지나면 밤공기는 서늘해졌다.

     

    ‘옥상 침실’에서는 별을 보다 잠이 들었다.

    하늘이 맑은 시절이었다. 봄날 황사는 있었지만 미세 먼지나 공기질과 같은 말 자체가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수많은 별이 자신을 드러냈다.

     

    여름날 잠자리에 누워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별은 너무 아름다웠다.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이라 불렀다)은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등 학교에서 배운 몇 안 되는 별자리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어느 여름밤 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됐다. 별 때문이었다. 죽은 뒤에도 저 별을 볼 수 있는 것인가? 사람은 죽으면 땅에 묻혀 흙이 된다는데, 그렇다면 저 별을 보는 내 생각(의식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었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은 뒤에는 저 아름다운 별들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건가?

     

    처음으로 영원이라는 단어가 체감됐다.

    저 별들은 언제까지나 저렇게 아름답게 빛날 것이지만 나는 영원히 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끝없이 계속된다고.

     

    슬프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밤이면 별을 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저 별을 보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중학교 때 옥상이 없는 집으로 이사 가면서 꼬마 ‘철학자’의 죽음에 대한 탐구는 막을 내렸다. 죽음을 그렇게 가까운 실체로 느꼈었다는 생각조차 잊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나이 서른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죽음을 그때처럼 실감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신도 죽는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어린 꼬마가 별을 보며 죽음을 어떤 사람보다 진지하게 생각했었다는 기억조차도.

  • 사랑도 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이미지 : 픽사베이

    사랑도 저 물과 같아서 

    한곳에 고여 있으면 썩는 법이지요. 

      

    물이 흐르듯 사랑도 흘러야 합니다. 

    물이 파인 곳을 채우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듯 

    사랑도 아픈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자꾸 아래로 낮은 자리로 흘러야 합니다. 

      

    물이 흐르며 뭇 생명들에게 밥이 되고 숨이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되듯 

    우리의 사랑도 뭇 생명 안에 스며 들어 온기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가 되고 밥이 되고 눈물이 되고 웃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썩어 독이 되는 사랑! 

    내 아이, 내 부모, 연인, 그 사람과 그곳에만 고여 있으면 

    집착이 되고 맹목이 되어 

    뭇 생명을 괴롭게 하는 화가 되는 사랑! 

      

    고맙게도 생각만으로도 시공을 뛰어넘어 퍼져가는 사랑! 

    우리의 미소만으로도, 말투만으로도, 손끝으로도 전해지는 사랑! 

    소박한 한 끼 밥으로도 충분히 스며드는 사랑! 



    일 년 매일매일이, 매 순간이 이런 순간이기를...... 

    우리 마음이 늘 그때이기를, 맑은 물이기를, 그 같은 사랑이기를......

  • 한순간도 너를 혼자 두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1985년 영세를 받은 뒤 곧바로 발길을 끊었으니 성당 용어로 냉담자로 지낸 지 34년 만이다.

    냉담 생활의 자발적 청산은 아니다. 개그콘서트 한 코너의 대사를 빌면 그냥 '그렇게 됐다'.

     

    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지만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하기 어렵다.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이 사실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있었고, 그럼에도 이런 점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가 더 낫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정말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근본에서는 하나라고 믿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불편했다. 때로 '맞춤형' 답변도 하곤 했다.

    성당에 다니는 분을 만나면 영세 받았음을 밝혔고, 절에 다니는 분을 만나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다며 어쭙잖게 경전 얘기를 하기도 했다. 세례명과 법명이 있으니 필요할 때 꺼내 쓰면 됐다.

     

    아무튼 요즈음 주말이면 미사에 참석한다.

    가끔 눈물이 난다. 아니 울지 않았던 때가 거의 없었다. 열 번에 아홉 번은 눈물을 흘렸으니...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어 관찰을 시작했다.

     

    주기도문을 노래할 때 가장 눈물이 자주 났다.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다.

    신부님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두 팔을 뻗은 모습을 볼 때면 예외 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곤 했다.

    한때 찬송가를 따라 부르다 목이 멨는데 책을 보니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에 붙인 찬송가였다.

     

    5월 19일 일요일.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 같다.

    주기도문을 노래할 때였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는 주기도문을 노래로 외운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참기가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자칫 목놓아 울 수도 있어 울음을 참고 또 참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노래를 따라 부를 수도 없었다. 가사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그때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단 한순간도 너를 혼자 둔 적이 없다."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앞서 가신 분들의 말씀과 글을 통해 그 얘기를 수없이 들었지만 진심으로 믿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래 걱정할 일이 없었구나. 안심이라는 말의 뜻이 느껴졌다. 깊고 깊은 한숨이 쉬어졌다.

  • 나이듦에 관하여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지금보다 젊었던 때, 

    얼른 나이 들길 원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행동과 몸은 돌멩이보다 단단하고 정확했으며 

    언어는 가시보다 날카로워 

    그 말과 행동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이웃 형제들을 상처 내고 재단하고 

    그것이 정직하게 제 스스로에게 날아와 스스로를 무너뜨리던 

    지치고 아프고 암울했던 시절. 

     

    나일 먹으면 

    부드러워지고 관대해질 줄 알았습니다. 

    저절로 온화해지고 깊어질 줄 알았던 거지요. 

    어서 나일 들었으면.... 

     

    이제 압니다. 

    세월만으론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세월의 경험만으론 오히려 저를 더 완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성찰하고 헌신하며 전체와 내면을 통찰하도록 돕는 

    그 어떤 노력들이 수반되지 않고는 

    그러한 노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여행과 독서, 고요한 명상 혹은 기도, 몸으로 사는 삶. 

    이런 것들이 모이고 쌓여 제 영혼과 의식의 결을 이루고 

    착한 행실과 따뜻한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다 보면, 

     

    어쩌면 언젠가는 그냥 제자리에서 제 스스로 빛나는 

    맑고 지혜로운 노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는지.... 

     

    새봄 이런 꿈을 함께 나눕니다. 

    그대, 그 자리에 계셔 참 고맙습니다.

  • 시한부 암환자에 찾아온 기적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어느 스님이 법문에서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

     

    한 티베트 사람이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게다가 3개월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고 몸에 좋다는 온갖 것을 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에 분노하고 죽음에 두려워 떨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분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굳이 애쓰지 않고 차분히 죽음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곡식가루를 준비해 하루에 한번씩 공동묘지를 찾아가서 물에 타서 먹었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묘지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자신은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니 암에 걸린 다른 사람들의 질병을 모두 자신이 안고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3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점점 좋아지는 듯했습니다. 병원을 찾아 검사를 했더니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