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아래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요,
그 곳이 바로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불교라네.
- 서암 큰 스님 -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아래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요,
그 곳이 바로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불교라네.
- 서암 큰 스님 -
“신은 나에게 손과 발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치어리더의 정신을 주셨지요.”
사노 아미는 태어날 때 한쪽 다리와 발가락 3개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노 아미에게 장애는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발가락 3개로 젓가락질을 하고 화장을 하며 피아노를 칩니다. 수영도 합니다. 고교 시절에는 ‘휠체어를 탄 치어리더’로 이름이 났습니다. 졸업 뒤에는 강연으로 자신의 삶을 전하고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노 아미의 꿈입니다.
사노 아미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는 손발없는 치어리더입니다>의 표지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습니다.
“어깨동무를 못해도 이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노 아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듯이 나에게도 넘어야 할 벽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삶에서 넘어야 할 벽이 있습니다. 사노 아미는 웃는 얼굴과 친절한 마음으로 그 벽을 넘으며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온 힘을 다해 생명을 보살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응답합니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세요. 여러분 안에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창조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의 원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듯이 신성도 그렇게 만물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빙엔의 예언자로 불리는 힐데가르트가 한 말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한평생 수녀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삶을 산 그에게는 많은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예언자, 신비주의자, 생태주의자, 신학자, 의사, 치유가, 자연주의자, 작곡가, 미술가 등등.
힐데가르트는 1098년 독일 라인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고, 교황권과 황제권이 맞서기 시작하며, 그런 혼란에 대한 대안으로 극단적 금욕을 주장하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형제자매들이 뛰어놀 때 어린 힐데가르트는 꽃과 식물을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모가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면 자신 안에 보이는 그림을 보는 게 재미있고 좋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가 3살 때부터 본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은 특별한 환시였습니다.
부모님은 힐데가르트가 여덟 살일 때 한 수도원에 맡깁니다. 열 번째 아이를 십일조로 바치겠다고 했던 교회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 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신자들과 성직자들 안에 기초를 놓아 주신 불타는 정의가 희미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내가 태어났고 부모님은 탄식하며 나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보내진 곳은 일반 수녀원이 아닌 디시보덴베르크산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백작의 딸로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던 유타가 살고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유타로부터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수도원은 당시 어린 소녀들이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시편 암송, 악보 읽기, 악기 연주 등을 배우면서 수녀가 되기 위한 수련 기간을 거친 뒤 열다섯 살 때 수녀가 됐습니다. 1136년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힐데가르트는 수녀들의 만장일치로 수녀원장이 됩니다.
수도원장으로 헌신하면서도 힐데가르트는 기도와 묵상을 지속했는데 그녀가 42세쯤이었을 때 신비한 환상을 겪게 됩니다.
오드리 햅번이 출연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는 지금까지 세계인이 좋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드리 햅번이 창가에서 기타 반주와 함께 부르는 ‘문리버’이지요. ‘문리버’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가 보여준 아름다운 삶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드리 햅번은 배우 활동을 그만둔 뒤 유니세프 친선대사를 맡아 세계 5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전쟁, 가난, 질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직장암 판정을 받고 남은 3개월을 가족과 보낸 것이 인생 후반부의 삶 가운데자신을 위해 쓴 전부였습니다.
오드리 햅번은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돕는 이유를 질문 받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은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위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생 이 아니라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오드리 햅번은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 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라고 도 말했습니다.
오드리 햅번이 자신의 그런 생각을 자녀들에게 심어주려고 애썼습니다. 다음은 오드리 햅번이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줬다는 시입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오드리 햅번 자서전 뒤 표지에는 또 다른 멋진 말이 적혀 있습니다.
"사과는 빠르게
키스는 천천히
사랑은 진실하게
웃음은 조절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너를 웃게 만든 것에 대해서
절대 후회하지 말 것"
오드리 햅번의 ‘문리버’를 들으며 그가 남긴 아름다운 말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맨발 걷기가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고, 다리근육을 많이 이용하기 돼 운동효과가 높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맨발로 걷는 것이 혈액순환 뿐만 아니라 염증, 면역반응, 상처의 치유, 만성염증 및 자가 면역 질환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h at Titusvile)의 제임스 오슈만 박사(James L. Oschman) 연구팀은 2015년 3월 “맨발이나 손 등의 신체가 지구 표면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으로 염증, 면역반응, 상처치유, 만성염증 및 자가면역질환의 예방 또는 치유에 도움이 된다”고 국제학술지 인플라메이션 리서치(Journal of Inflammation Research)를 통해 발표했습니다.
연구팀은 건강한 남성 8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복부 근육과 발의 바닥에 전도성 접지(接地) 패치를 부착하고 수면 또한 전도성 접지 시트에서 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두 그룹 모두 익숙하지 않은 운동을 하도록 해 복부근육에 지연성 근육통을 유발한 뒤 통증이 치유되는 과정을 MRI, 혈액검사, 혈압커프 등으로 계속 모니터링했습니다.
그 결과, 접지가 이루어진 그룹은 다른 그룹에 비해 통증의 정도가 2배 낮았으며, 혈압커프를 통한 압력 또한 다른 그룹에 비해 2배 이상 버틸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혈액검사 결과 호중구의 수가 평균 11% 낮았습니다.
호중구는 백혈구 중 하나로, 체내의 손상된 부위로 이동하여 손상된 세포를 분해하고 복구 프로세스를 조절하는 기능을 합니다. 손상이 클수록 호중구의 수가 증가합니다. 문제는 호중구가 인접한 건강한 세포가 손상되는 “산화적 파열”도 발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호중구 수치가 적은 이유를 “지표면의 전자”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구의 표면에는 엄청난 양의 전자가 존재하는데, 접지를 통해 이 전자들이 체내에 유입되면서 건강한 세포들을 손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종의 “자연 산화 방지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이 실험을 통해 접지를 통해 지구의 전자가 유입되면서 세포 손상이 더 신속하게 해결되고, 호중구로 인한 부수적인 손상 또한 감소하여 회복과정이 가속화되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지구의 전자가 건강한 세포를 보호하면서 면역체계를 향상시키고, 상처를 치유하면서 일어나는 부수적인 손상을 최소화해, 염증유발 및 만성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맨발 걷기로 인한 접지가 학습능력 향상, 스트레스성 질환의 치유 등 정신과 관련된 부분에도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들도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게단 슈발리에 박사(Gaétan Chevalier)의 연구팀은 2012년 1월 “지구 표면의 전자가 수면장애, 신경증 등에도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국제학술지 환경 및 공중보건(journal of environmental and public health)를 통해 발표했습니다.
연구팀은 수면장애와 신경증 등을 앓고 있는 30명의 성인남녀에게 전도성 접지 패치를 부착했습니다. 이후 시간에 따른 두 그룹의 코티솔 수치 및 심박변이도(HRV)를 8주간 모니터링했습니다. 코티솔은 수면, 통증 및 스트레스와 상관관계가 있는 호르몬입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상한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지만 너무 자주 많이 분비되면 비만이나 피로 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접지 패치를 부착한 그룹은 최대 70을 넘어가던 코티솔 수치가 최대 50 정도로 줄었으며, 부착 전에는 개인마다 천차만별이었던 그래프의 형태가 8주 후에는 거의 비슷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심박변이도 또한 편히 휴식할 때 이상으로 개선이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노스 플로리다 대학(University of North Florida)의 트레이시 알로웨이 교수(Tracy Packiam Alloway)의 연구팀은 2016년 5월 “맨발로 달리는 운동을 통해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이 향상된다.”는 연구결과를 학술지 SAGE(SAGE Journal)에 발표했습니다. 연구팀은 72명의 성인남녀 중 한 그룹에게 맨발로 16분 정도 달리기를 시키고, 다른 한 그룹에는 신발을 신고 달리게 한 다음, 작업 기억 테스트(Working memory test)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맨발로 달리게 한 그룹만 평균 16% 작업 기억 능력이 향상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맨발로 걷기가 좋은 점들이 많지만, 유의해야 할 점들도 있습니다.
맨발로 걷다 보면, 발바닥의 자극이 지속되기 때문에 오히려 피로가 가중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30분 이상 맨발로 걷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체중이 발바닥에 실리게 되어 발에 상당한 충격이 가게 되는데, 이로 인해 골절이나 여러 가지 손상 위험이 높습니다. 따라서 발바닥에 날 수 있는 상처나 골절에 주의해야 하며, 특히 습관성 염좌, 발목손상, 퇴행성 관절염, 혈액순환 장애, 당뇨 등의 환자는 맨발운동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자가 어린 양과 뛰논다는 얘기는 성경에 나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채식하는 사자로 알려진 리틀 타이크 이야기입니다.
리틀 타이크는 동물원에서 태어났지만 어미로부터 죽임을 당할 뻔 했습니다. 어미 사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전에 3마리의 새끼를 태어나자 마자 죽였습니다.
네 번째 새끼가 태어나자 사육사와 수의사들이 나서 아기 사자를 간신히 구했고, 동물원장의 친구이자 목장을 운영하던 웨스트보 부부에게 보내졌습니다. 그 아기 사자에 붙여진 이름이 리틀 타이크였습니다.
리틀 타이크는 아주 특별한 사자였습니다. 고기는 물론 피냄새조차 맡기 싫어했고 풀을 먹고 자랐습니다.
웨스트보 부부는 동물의 자연스러운 생활을 존중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리틀 타이크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어린 사자는 고기를 거부했습니다. 차츰 육식에 적응하도록 부부는 우유에 피를 섞어 주기도 했지만 리틀 타이크는 입조차 대지 않았습니다.
리틀 타이크가 가장 좋아했던 식사는 익힌 곡물, 날달걀, 우유 등이었다고 합니다. 부부는 리틀 타키크가 영양 부족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걱정했지만 아무 문제없이 쑥쑥 자라 4살 때는 160kg이 나가기도 했습니다.
채식 탓인지 리틀 타이크는 농장의 다른 동물들과도 잘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웨스트보 부부가 운영하는 미국 워싱턴 주의 히든밸리 목장에서 리틀 타이크는 개, 고양이, 양, 말, 사슴 등 다른 동물들과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습니다.
웨스트보 부부는 리틀 타이크를 자식처럼 길렀습니다. 차를 타고 여행할 때도 데리고 갔고 여행지에서는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채식하는 사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이었을까요. 리틀 타이크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 건강이 나빠져 결국 태어난 지 9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채식하는 사자 리틀 타이크>는 자신의 의지로 고기를 거부하고 채식을 했던 한 사자의 9년 동안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의 기록을 담은 책입니다.
웨스트보 부부가 쓴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생명이든 자기가 원하는 삶의 방향대로 살 권리가 있다. 그게 비록 인간이 아닌 사자라고 해도 말이다."
수월 스님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적에만 주로 관심을 갖자 마지막 거처인 오대산 상원사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수월 스님이 스승인 경허 스님을 찾아다녔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경허 스님은 박진사라는 이름으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와 술로 사람들을 만나며 스님도 속인도 아닌 것처럼 지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월 스님은 평안도 강계에서 스승 경허 스님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은 뵙기를 청하는 수월 스님을 만나 주지 않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인해주지도 않았고요.
수월 스님은 정성 들여 삼은 짚신 몇 켤레를 스승이 계신 곳에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수월 스님은 그 뒤 함경북도 회령군의 두만강 부근에서 한동안 생활했습니다. 거기서도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습니다.
가끔씩 강가에서 대비주를 외며 선정에도 들었다고 합니다. 수월 스님이 강가에서 대비주를 외고 있을 때면 물고기들이 물 밖으로 뛰어올라 장관을 이뤘다는 얘기가 전해 옵니다.
수월 스님은 58세인 1912년에는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거처를 옮긴 뒤 3년 동안 소먹이 일꾼으로 일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길가 바위 위에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는 밤새워 만든 짚신을 매달아 뒀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위해 간도로 도망 오는 동포들의 주린 배를 잠깐이라도 채워주고 고단한 원행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월 스님이 살던 간도 지역에는 비적이 많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비적에 맞서기 위해 집집마다 사나운 개를 키웠다고 합니다. 비적을 물어 죽일 정도로 용맹한 개들도 수월 스님 앞에만 가면 순한 양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반겼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수월 스님은 간도 지역 동포들이 지어준 화엄사라는 작은 절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기에서도 누더기를 걸치고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잠을 자지 않았고 아픈 사람을 쉽게 고쳐줬으며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는 등 수월 스님과 관련한 신비한 얘기들은 지금도 그 지역에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수월 스님은 1928년 늦여름 화엄사가 자리한 송림산의 개울가에서 결가부좌를 한 채 입적했습니다. 바지저고리와 짚신 한 켤레를 머리 위에 얹은 채였습니다.
수월 스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 7일 동안 송림산에서는 밤마다 방광의 기적이 일어났고 많은 짐승들이 무리 지어 울었다고 합니다.
수월스님의 출가 전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불교 사전에 따르면 수월 스님은 1855년에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겨 작은 벌레까지 함부로 괴롭힌 적이 없었으니 자신이 돌보던 소를 얼마나 끔찍이 아꼈을 것인지 짐작이 됩니다.
탁발 나온 스님들이 날이 저물면 수월 스님이 있던 방에서 묵고 가곤 했는데 그 인연으로 출가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수월 스님은 당시로는 스물 아홉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홍성군에 있던 천장암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천장암은 경허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한동안 보림 수행을 했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불교 그리고 스승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때 천장암에는 경허 스님의 속가 친형인 태허 스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습니다. 수월 스님은 태허 스님을 만나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됐습니다.
태허 스님은 경허 스님을 수월 스님의 법사로 지정해 가르침을 받도록 했습니다. 수월 스님은 절에서 말없이 일만 했다고 합니다. 다른 점은 법사인 경허 스님이 가르쳐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낮이나 밤이나 일할 때나 밥을 먹을 때도 수월 스님은 다라니를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태허 스님이 외출했다 밤늦게 천장암에 돌아오던 길에 신비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 때 천장암 입구에는 방앗간이 있었는데 불빛이 새나오는 것을 보니 누가 일을 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했습니다. 물레방아에 물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는데 방아 찧는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허 스님은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물레방아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지만 방앗공이는 위에서 멈춰 있었고, 그 아래 돌확 속에 수월 스님이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일을 하다 지쳐 잠이 든 것이지요. 태허 스님이 깜짝 놀라 수월 스님을 끌어내자 그제야 방앗공이가 확으로 떨어져 방아를 찧기 시작했습니다.
태허 스님은 그로부터 얼마 뒤 수월 스님에게 절 일을 잠시 쉬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수월 스님은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이레째 되는 날 천장암이 있던 마을에서 갑자기 “불이야”하는 외침과 함께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습니다. 천장암 쪽에 불길이 보였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달려나와보니 불길은 천장암 쪽에서 솟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게 집을 불태우는 불이 아니라 수월 스님의 몸에서 뿜어나온 빛입을 알게 됐습니다.
그 불은 수행자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빛, 방광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수월 스님은 3가지 특별한 힘을 얻게 됐다고 합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았으며, 잠을 자지 않아도 됐고, 아픈 사람을 금새 치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월 스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찾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수월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천장암을 떠나 금강산과 지리산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수월 스님의 삶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를 했고, 밤이면 고요히 선정에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월 스님을 찾았지만 눈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수월 스님은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IMAGE|73|center|수월스님 진영. 이미지 출처 : 불교닷컴]]
수월 스님 이야기를 하려면 그 분의 스승이신 경허 스님 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경허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를 크게 일으킨 대 선승입니다. 경허 스님은 조선 시대 억불숭유로 선(禪)의 맥이 끊겼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해 선을 회복시킨 선불교의 중흥조라 평가받는 분입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은 깨달은 뒤에 홀연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생전에 주색잡기 소문 등으로 ‘원효’ 못지않은 일화를 많이 남겼던 그는 말년에 머리를 기른 채 이름을 ‘박난주’로 바꿔 6년간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둔해 서당 훈장 노릇을 하다가 입적했다.” (조현 휴심정)
경허 스님에게는 세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 세 제자는 ‘경허 스님의 세 달’이라고 불렸습니다. 법명에 모두 달 월자가 들어간 수월, 혜월, 만공(법명은 월면) 세 스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수월 스님은 경허 스님의 세 달 가운데 첫번째 달 맏상좌입니다.
만공 스님과 혜월 스님에 대한 기록은 많습니다. 하지만 ‘세 달’ 가운데 맏상좌인 수월 스님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는 게 거의 없습니다.
수월 스님의 가르침을 전해받아 눈을 뜬 선승이 없지는 않겠지만 수월 스님의 가르침 가운데 전해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수월 스님의 행적을 추측이라도 해볼 수 있는 책이 한 권 있기는 합니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 1996년에 출간했고, 2004년에 다시 펴낸 <물 속을 걸어가는 달>(학고재)입니다.
이 책에는 수월 스님이 남긴 깨달음에 이르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실려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수월 스님의 가르침의 정수라 볼 수 있는 그 법문을 소개합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해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 겨.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나는 순전히‘천수대비주’로 달통한 사람이여. 꼭 ‘천주대비주’가 아니더라도 ‘옴 마니 반메 훔’을 혀서라도 마음 모으기를, 워쩌깨나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혀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맨큼 혀야 되는 겨."(<물 속을 걸어가는 달> 16p)
[[IMAGE|73|center|수월스님 진영. 이미지 출처 : 불교닷컴]]
다른 생명을 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동물은 다른 생명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다른 생명을 해치는 게 싫어 육식을 거부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교사로 살다 정년 퇴직을 한 한 여성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텃밭을 가꾸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자란 식물을 가져다 먹을 때에도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식물의 생명을 취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게 늘 부담스러웠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식물을 뜯으러 가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밭에서 상추를 뜯을 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주위에 누가 있는지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잠시 뒤 그는 상추가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상추가 한 말에 너무나 감동했습니다.
“나를 먹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합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 생명을, 내 몸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 너무 기쁩니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해주세요. 당신이 저를 먹고 얻은 생명력으로 제가 당신을 사랑하듯이 다른 존재를 사랑하면서 살아가 주세요. 당신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저는 너무나 기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