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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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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묵조사 (3) - 천 리 떨어진 해인사의 불을 끄다

    진묵이 길을 가다 냇가에서 소년들이 물고기를 잡아서 끓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진묵이 솥을 들여다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잘 놀던 물고기가 이렇게 죄 없이 삶아지는구나.”

    한 소년이 스님도 드셔보라고 내밀자 진묵은 솥을 들어 단숨에 마셨습니다. 소년들은 고기를 먹은 스님을 땡땡이 스님이라고 놀렸습니다.

     

    진묵조사가 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었습니다.

    “너희가 죽인 물고기를 내가 도로 살려주마.”

    시냇물을 등지고 앉아 힘을 주니 물고기들이 쏟아져 나와 헤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묵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물고기들아, 큰 강으로 가서 다시는 삶아지는 고통을 당하지 말거라.”

     

    진묵이 급하게 물을 찾은 날이 있었습니다. 더운 뜨물을 갖다 주자 그것을 입으로 머금고 동쪽으로 내뿜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합천 해인사에 큰불이 났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대중들이 해인사에 난 불을 끄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지요. 얼마나 불길이 세던지 우왕좌왕하는데 난데없이 서쪽에서 소나기가 몰려와 불을 껐어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빗방울이 희끄무레하고 묻은 곳에는 얼룩이 졌습니다.”
    그 말을 들은 스님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전주 송광사와 부여 무량사 두 절에서 스님들이 찾아왔습니다. 부처님 점안식을 한다며 진묵을 모셔가겠다고 온 것입니다. 진묵은 자기가 둘 다 갈 수 없다며 송광사에는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주었고, 무량사에는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주었습니다.

    송광사에서는 스님이 앉는 자리에 주장자를 세워 놓으니 밤낮으로 꼿꼿이 서 있었습니다. 무량사에서도 염주를 자리에 놓으니 저절로 돌아가며 점안식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스님과 대중들은 진묵의 도력에 탄복하며 불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 개운조사(5) - 스승의 가르침과 이적

    그날 밤 노인은 조사를 데리고 희양산 중턱에 올랐습니다. 노인이 발걸음을 멈춘 곳에는 넓은 마당만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달빛이 낮처럼 밝았는데 바위 앞이 훤하게 트여 쾌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바위를 가리키며 스승이 일렀습니다.  

     

    “인재가 땅의 기운을 받아 명당의 자리에서 나는 것처럼 수행도 그러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바위 위에 올라서자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담한 암자 하나가 저절로 생긴 것이었습니다.  

     

    조사는 이 암자에서 스승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신이한 이적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끼니때가 되면 먹거리가 저절로 생겼고, 목마르다 싶으면 물이 생겼습니다.  

     

    조사의 신심은 100배나 솟구쳤습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지복의 환희심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조사가 할 일은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에 전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다만 한 가지, 아만(我慢)에서 벗어나 마음을 조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고 아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용맹 정진한 지 7일째 조사는 마침내 간혜지(乾慧地)를 증득합니다.  

     

    간혜지는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이 공통으로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의 첫 번째 단계를 말합니다. 온갖 욕망이 겉으로 일어나지 않고 욕망에 따른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경지가 간혜지입니다.  

     

    욕망은 잠재의식 속에만 남습니다. 탐진치(貪瞋癡,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삼독의 습기는 다했으나 아직 지혜가 부족하기에 마른 지혜 즉 건혜지라 일컫는데, 선정으로 이 부족한 지혜를 보충합니다. 

     

    조사가 간혜지를 얻자 스승이 책 두 권을 내려 줍니다. 그것은 <정본수능엄경> 과 <유가심인록>이었습니다. 

     

    “내가 보현존사(寶賢尊師)에게 구결로 받은 신해수증(信解修證)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진중하게 받들어 간수하라.” 

     

    조사는 공경하게 삼배를 올리고 스승이 내리시는 책을 받잡아 정수리 위로 올렸습니다.  

     

    다시 좌복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스승께서 말씀으로 전해주시는 대승(大乘)의 오묘한 경지를 하나하나 터득해나갔습니다. 

     

    스승은 내리고 제자는 받들고……. 전승이 끝나자 조사는 다시금 공손히 일어나 스승 앞에 100배를 올렸습니다. 사은의 절을 마치자 스승이 제자의 손을 어루만지며 작별의 말을 합니다. 

     

    “나는 이제 간다.” 

     

    말을 마치자 스승은 몸을 솟구쳐 새처럼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조사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한 배 한 배 스승이 사라진 허공을 보며 조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경히 100배를 올렸습니다.  

     

    스승을 전송하고 돌아오니 그동안 머물던 암자도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 히말라야의 선인 라히리 마하사야(2)

    <<히말라야의 선인 라히리 마하사야가 보인 이적들>>

     

     

    히말라야의 대 성취자 마하사야(1828-1895)의 제자 중에 ‘아브호야’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브호야는 여덟 명의 아기를 출산했지만, 모두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었습니다. 그녀는 아홉 번째로 임신한 다음 스승을 찾아가 이 아이는 오래 살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 달라고 간곡한 요청을 올렸습니다. 마하사야는 쾌히 승낙하면서, “아기가 밤중에 태어날 테니 동이 틀 때까지 꼭 등잔불을 켜놓으라”라고 일렀습니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아브호야는 조산원에게 부탁해서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워 두었습니다. 한밤중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브호야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건강한 아기와, 아기를 안고 기뻐하는 산모의 모습을 지켜보는 조산원의 보람 역시 매우 컸겠지요.   

     

    조산원은 정성을 다해 아기를 씻기고 정결한 배냇저고리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산모의 뒷수발을 들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왔습니다. 그런데, 밤을 꼬박 새운 조산원과 아브호야는 새벽녘이 되자 그만 깜박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 어느덧 등잔의 기름이 거의 다 떨어져서 불꽃이 차츰차츰 희미해져 갔습니다. 꺼질락 말락 불꽃이 점점 사그라 드는데, 잠에 곯아떨어진 조산원과 아브호야는 일어날 기척이 없고…….  

     

    이때 와락 큰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렸습니다. 두 여인은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문간엔 스승 마하사야가 서 있었습니다. 스승은 다짜고짜 불꽃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브호야, 불이 꺼지지 않느냐”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조산원이 급히 일어나 기름을 채우니 불꽃이 다시 환하게 일었습니다. 스승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마하사야는 죽어서 숨이 끊긴 사람도 다시 살려 냈습니다. 하루는 제자 유크테스와르가 허겁지겁 스승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 라마가 콜레라에 걸려 죽게 됐다며 살려 달라고 스승에게 매달렸습니다. 마하사야는 미소를 머금고 “염려 말라.”라고 했습니다. 유크테스와르는 안심하고 돌아갔지만 친구 라마는 곧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유크테스와르는 엉엉 울면서 스승에게 되돌아갔습니다. 

     

    라마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마하사야는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속절없이 하루가 가고,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명상에서 깨어난 마하사야는 유크테스와르에게 자기 방에 있는 등잔의 기름을 조금 가져다가 라마의 입에 일곱 방울만 떨어뜨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미 죽은 친구의 입에 기름을 떨어뜨리라니, 유크테스와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라마는 어제 죽었습니다. 시체의 몸에 기름을 떨어뜨린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스승에게 물어보았지만 스승은 더 이상 가타부타 말씀이 없었습니다. 스승이 시키시는 일을 거역할 수가 없었던 유크테스와르는 마지못해 기름을 들고 죽은 친구에게 갔습니다. 라마의 시체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유크테스와르는 라마의 입술을 열고 스승의 말씀대로  기름을 떨어뜨립니다.  

     

    한 방울, 한 방울……. 드디어 마지막 일곱 번째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라마의 몸이 갑자기 후들후들 떨리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하사야님께서 찬란한 빛에 휩싸여 계셨어! 나한테 깨어나라고 명령하셨어! 그리고 너와 함께 집으로 오라고 하셨어!” 

     

    1895년 마하사야는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하사야가 열반에 든 이후에 어떤 사람은 강물 위를 걸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그를 보았다고 합니다. 마하사야를 직접 다시 만난 제자도 있었습니다.  

     

    마하사야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날이었습니다. 아침 열 시경, 마하사야의 제자 케샤 바난다의 방이 갑자기 환한 빛으로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빛 속에서 스승이 더욱 젊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빛은 스승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빛 속에서 장엄하게 스승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바난다여, 나를 보아라. 불에 타서 흩어진 원자(原子)들을 가지고 내 형체를 이렇게 부활시켰느니라. 나는 바바지님과 한동안 히말라야에서 지낼 것이다.” 

     

    마하사야는 이렇듯 시해선(尸解仙)이 되어 육신의 껍질을 벗어 버리고 선계(仙界)로 들어간 것입니다.

  • 타임지 표지 장식 음바페 “존중, 겸손, 평정이 좌우명"

    겸손한 천재 음바페(파리 셍제르망)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타임지는 12일 ‘축구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러시아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우승을 이끈 19살의 축구천재 킬리안 음바페를 표지에 실었습니다.

     

    축구 선수가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것은 리오넬 메시, 마리오 발로텔리, 네이마르 등 3명에 불과했고, 10대 축구선수로서는 음바페가 처음입니다. 

     

    재치 있고 의미 있는 제목을 다는 타임지는 메시에게는 ‘왕 레오(King Leo)’, 네이마르는 ‘제2의 펠레(The Next Pele)’라고 표시했습니다. 

     

    축구계 안에 만연한 인종 차별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표지에 실은 발로텔리의 경우엔 ‘마리오의 의미(The Meaning of Mario)’란 제목을 달았습니다.

     

    타임지는 음바페를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메시와 호날두 시대를 이을 차세대 리더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음바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타임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축구 인생을 이끌어 줄 좌우명이 존중, 겸손, 평정심이라고 밝혔습니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모두 겸손하고 사람들을 존중한다며 자신도 그런 선수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아프리카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 교외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음바페는 가진 것을 벌써부터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있기도 합니다.

     

    음바페는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하자 당초 약속대로 출전 수당과 보너스 전액인 30만 유로(약 4억 원)를 어린이를 위한 자선단체들에 기부했습니다. 


    그가 기부한 단체 가운데 하나인 프르미에 데 코르데 재단의 세바스티앙 뤼팽 대표는 프랑스 일간 르 파리지앵과의 인터뷰에서 음바페가 틈날 때마다 재단을 찾아와 어린이들과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습니다. 

     

    음바페는 아이들보다 더 즐겁게 노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뤼팽 대표는 덧붙였습니다.

     

    이 재단은 투병 중인 아동이나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의 스포츠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음바페는 자신이 나고 자란 파리 외곽 봉디의 청소년 25명을 러시아 월드컵에 자비로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카메룬 출신 아버지와 알제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지 가정 2세입니다. 저소득층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파리 외곽 봉디에서 유소년 축구클럽을 다니면서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겸손하고 가슴 따뜻한 천재 음바페는 축구사를 새로 쓰고 있습니다.

     

    16살에 프로에 데뷔한 음바페는 2016~2017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4경기 연속 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그로부터 올해까지 그는 프랑스 1부 리그 우승 2회, 컵대회 우승 2회를 경험했습니다. A매치를 포함한 개인 통산 득점은 68골로 같은 나이 때 메시의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무엇보다 세계 축구를 이끌고 있는 메시와 호날두도 못 이룬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습니다. 게다가 결승전에서 골까지 넣었지요. 10대 선수가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은 것은 1958년 펠레 이후 60년 만입니다.

     

    음바페가 속한 파리 생제르맹은 지난해 음바페 영입에 2400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축구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이적료입니다.

     

    생제르맹은 1조 원을 줘도 음바페를 팔지 않겠다며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음바페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내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음바페는 누구나 자신처럼 꿈을 이룰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꿈을 믿는다면 언젠가 여러분 중 누군가가 지금의 제 자리에 있을 겁니다.”

  • 그림자 없는 선사 수월스님 (3)

    "위대한 스승들 - 수월스님 (1)" 바로가기

    "위대한 스승들 - 수월스님 (2)" 바로가기 

     

    수월 스님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적에만 주로 관심을 갖자 마지막 거처인 오대산 상원사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수월 스님이 스승인 경허 스님을 찾아다녔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경허 스님은 박진사라는 이름으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와 술로 사람들을 만나며 스님도 속인도 아닌 것처럼 지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월 스님은 평안도 강계에서 스승 경허 스님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은 뵙기를 청하는 수월 스님을 만나 주지 않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인해주지도 않았고요.

     

    수월 스님은 정성 들여 삼은 짚신 몇 켤레를 스승이 계신 곳에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수월 스님은 그 뒤 함경북도 회령군의 두만강 부근에서 한동안 생활했습니다. 거기서도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습니다.

     

    가끔씩 강가에서 대비주를 외며 선정에도 들었다고 합니다. 수월 스님이 강가에서 대비주를 외고 있을 때면 물고기들이 물 밖으로 뛰어올라 장관을 이뤘다는 얘기가 전해 옵니다.

     

    수월 스님은 58세인 1912년에는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거처를 옮긴 뒤 3년 동안 소먹이 일꾼으로 일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길가 바위 위에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는 밤새워 만든 짚신을 매달아 뒀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위해 간도로 도망 오는 동포들의 주린 배를 잠깐이라도 채워주고 고단한 원행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월 스님이 살던 간도 지역에는 비적이 많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비적에 맞서기 위해 집집마다 사나운 개를 키웠다고 합니다. 비적을 물어 죽일 정도로 용맹한 개들도 수월 스님 앞에만 가면 순한 양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반겼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수월 스님은 간도 지역 동포들이 지어준 화엄사라는 작은 절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기에서도 누더기를 걸치고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잠을 자지 않았고 아픈 사람을 쉽게 고쳐줬으며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는 등 수월 스님과 관련한 신비한 얘기들은 지금도 그 지역에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수월 스님은 1928년 늦여름 화엄사가 자리한 송림산의 개울가에서 결가부좌를 한 채 입적했습니다. 바지저고리와 짚신 한 켤레를 머리 위에 얹은 채였습니다.

     

    수월 스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 7일 동안 송림산에서는 밤마다 방광의 기적이 일어났고 많은 짐승들이 무리 지어 울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