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심사 주지 지현 스님>
개심사(開心寺)는 관음봉 서쪽 기슭에 오롯이 깃들여 있었다. 개심사 쪽에서 본 관음봉의 형상은 신선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풍수가들은 개심사 터를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 ; 신선이 책을 읽는 형국)의 명당이라고 했다. 개심사 바로 앞에는 네모 반듯한 봉우리가 솟아 있다. 이것은 책을 올려놓는 서대(書臺)였다. 서대 뒤에는 꼭 책을 펼쳐 놓은 것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다. 또, 그 뒤쪽에는 여러 겹의 산줄기가 30리 밖까지 펼쳐져 있다. 이 산줄기들의 생김새는 구름과 흡사했다. 그러나 개심사 터는 신선이 구름 위에 앉아 책을 읽는 형국이 분명했다. 옛날에 어느 풍수의 달인이 개심사에 들러 무릎을 치며 이런 얘길 했다고 한다. " 천하의 보배가 여기에 숨어 있구나. 보물 중의 보물이로다. 신선이 책을 익는 형국이니 훌륭한 도인들이 쏟아져 나올 명당이다. 때가 되어 아름다운 지기가 활짝 피어나면 수천 수만의 도인이 구름처럼 몰려와 모두 크게 깨우치리라. " 혜원이 개심사 가까이에 다다르자 전과는 아주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개심사 일대의 지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난 겨울보다 몇 배 더 청정했다. 산굽이를 돌아 막 경내로 들어서서 보니 개심사 건물들이 은은한 광채에 휩싸여 있었다. " 아, 참으로 좋은 정기가 활짝 피어나는구나. " 그녀의 심안에 숱한 사람들이 깨달음의 길을 찾아 개심사로 오는 광경이 스쳐 갔다. 머지 않아 드디어 옛 사람의 예언이 실현될 것이었다.
개심사 주변에는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느티나무, 팽나무. 굴참나무 등이 커다란 숲을 이뤄 햇빛을 막아 주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는 갖가지 새들이 지저귀고 다람쥐들이 뛰어놀았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흘러내렸다. 걔심사 주지 지현 스님은 채소밭에 잇었다. " 언니, 뭐하세요? " 지현 스님은 혜원이 보다 몇 살 위였다. 그들은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 어! 동생! 어쩐 일이야? " " 스승님께서 보내셨어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 혜원이 지현 스님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 덕분에 잘 지내. 정말 반갑다. 식전에 까치들이 울어대더니만 동생이 오려고 그랬나 보네. " " 밭에서 뭘 하셨어요? " " 배추하고 무를 갈았는데 병이 심해. 병균도 살아 있는 중생이니 농약을 뿌릴 수도 없고..... 올해 채소 농사는 실패하겠어. 어려운 신도들한테도 나눠 주려고 많이 심었는데 우리 김장 담기도 어렵겠네. " " 어떻게 병들었나 한번 볼까요? " 혜원인 채소밭으로 들어가 보았다. 손바닥만한 배추들이 대부분 병들어 있었다. 잎새마다 누런 점이 얼룩얼룩 보였다. 병균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 언니, 좋은 방법이 있어요. 약을 안 주고도 살릴 수 있겠어요. " 혜원이 뭔가 잠깐 생각해 보고 말했다. " 어떻게? " " 물만 있으면 돼요. " " 그냥 물로? " " 네. 이따가 해볼게요. " " 그럼, 그래 봐. "
지현 스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혜원에게 무슨 묘방이 있나 보다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절 쪽으로 갔다. 혜원인 먼저 대웅전에 들러 참배를 한 다음 요사채로 내려왔다. 절에는 지현 스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 모두 어디 갔어요 ? " 내일 불공이 있어서. 참, 동생 아침 공양 들었어? " 지현 스님은 혜원이 아무것도 안 먹고 진기만 마시며 사는 줄 아직 몰랐다. " 전 안 먹어도 돼요. " " 안 먹어도 돼다니. 가서 차려 올게." 지현 스님은 밥상을 차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괜찮아요, 언니. 전 요새 아무것도 안 먹어요. 그런 지 꽤 됐어요. " " 그래? 벽곡을 하는구나. 동생, 공부가 아주 잘됐나 보다. 크게 깨우쳤나 봐." 지현 스님은 눈을 크게 뜨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외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혜원을 쳐다보았다. " 깨우치기는 요. 아직 멀었어요. 기운이 좀 찼을 뿐이에요. " " 아무나 벽곡하나. 이제 보니 동생 얼굴이 더욱 맑아졌네. 환해. 빛이 서려 잇어. 서기(瑞氣)가 뿜어 나오네. 도가 아주 높아진 게 틀림없어. 지현 스임은 머리까지 설레설레 흔들며 감탄했다. 도반이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 그녀를 무척 기쁘게 만들었다. " 부끄러워요. 자꾸 그러지 마세요, 언니. " 혜원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 " 그럼 차나 끓일까? " 그만두세요. " " 마시지도 않는구나." " 언니, 여기 큰일들은 거의 다 끝났죠? " " 기와 불사와 대웅전 단청은 마무리했어. 요사채 수리도 모두 끝냈고. 크게 손볼 곳은 없어. " " 이제 일을 놓고 용맹정진하실 때가 됐나 봐요. 스승님께서 언니를 백학봉으로 데려오라 하셨어요. " " 그래? 어제? " " 아흐레 후에요. 저더러 그때까지 여기서 지내라 했어요. " " 아이고, 바라고 바라던 소원이 이워졌네. "
지현 스님은 너무나 좋아했다.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지현 스님의 상호(相好)는 보살상이었다. 너부죽하면서 상이 아주 복스럽게 붍어 있었다. 눈빛은 맑고 온화했다. 활짝 웃으니 틀림없는 보살상이었다. 그녀는 발써부터 수행에만 전념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중(門中)의 사형제들이 놓아주질 않았다. 사형제들은 포용력이 커서 모든 사형제들한테 사랑받는 그녀가 주지직을 맡아 주길 워했다. 개심사와 청련사는 종단에 속한 절이 아니고, 지현 스님네 문중에서 세운 도량이었다. 지현 스님의 사조(師祖) 스님이 창건했다. 그후 계속 지현 스님네 문중에서 관리해 왔다. 지현스님은 문중을 위해 자신의 공부를 뒤로 미뤘다. 대신 사형제들이 수행에 전면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잘했다.
벽운 선생도 그걸 바랐다. 먼저 공덕을 충분히 닦은 다음에 용맹정진하라는 것이었다. 공덕이 원만해야 공부에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 |
ALL : 참나
Contents Lis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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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드
성자들의 시대17-공덕이 원만해야 공부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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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온 에디터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
가깝게 지내는 어느 목사님이 자신을 온전히 품고 긍정하는 것이 수행의 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진정으로, 온전하게 사랑하기가 어려운 탓이겠지요.
또한 나 자신을 진정으로 온전히 사랑한다면 세상 만물도 그와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수행의 끝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오늘도 자신을 찬찬히 바라보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오늘까지 제출하기로 한 과제를 못해 쩔쩔매고 있고, 하루 1시간 걷기운동 하기로 했는데 그것도 하지 못했고, 아이에겐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며 잔소리하고 화만 냈으니까요.
만약 내 안의 완전한 사랑 그 자체라는 ‘참나’가 있다면 이런 나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먼저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감하고 봐줄 것 같습니다. “과제를 기한 내에 제출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 “하루 1시간 걷기운동을 못 해서 자괴감이 들고 있구나.” “쓸데없는 잔소리로 아이에게 화를 낸 자신이 수치스럽구나.” “그렇구나!”
그러고 나서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어깨를 토닥토닥해주며 위로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판단하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과 공감에 저 자신은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오늘 명상 중에 가슴에 두 손을 포개 얹고 진심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네가 무엇이고 어떻든,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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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온 에디터
내 안의 부처님을 만났던걸까?
십 년 전쯤 명상수련에 아주 몰입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책에서, 어느 도인이 수련을 열심히 하다가 자신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눈부시게 환한, 금빛 찬란한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더랍니다. 누구나 수련을 아주 열심히 하면 자신 안에 있는 참나, 부처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매일 인시(새벽 3시 반 ~ 5시 반) 수련과 자기 전 명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하였습니다. 그만큼 내 안의 부처를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컸던 것지요.
여러 날 단식도 하며 열심히 수련하던 어느 날, 저녁 명상 중 기이한 체험을 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드디어 금빛 찬란한 부처님이 나타났습니다. 참고로 저는 그 때 이전 이후로 이렇게 선명한 형상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잘생기고 금빛으로 환한 부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놀랍고 기쁜 일이었죠!
'드디어 보았네, 보았어! 내 안의 부처를!'
그런데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형상! 그것은 교과서에 실렸던 석굴암 석가여래좌상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었던 몇 년 후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과연 저는 내 자신 안의 부처를 만났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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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비우면 채워지는 신비
노자는 위학일익(爲學日益) 이요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고 했습니다.
학문은 하루하루 지식을 쌓아 나가는 것이요, 도를 닦는다는 것은 나날이 자신을 비워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갖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갖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욕망을 멈추면 괴로움은 더 이상 늘지 않습니다. 나아가 욕망을 버리기 시작하면 괴로움은 줄어듭니다. 도리어 마음속에서 즐거움이 샘솟습니다.
어려운 때입니다. 갖지 못해서 괴로워하기보다 줄이고 버리고 비우는 데서 기쁨을 찾아보세요.
몸을 보십시오. 속이 편할 때는 비어 있을 때입니다. 집안에도 가재도구가 적으면 청소나 정리할 일이 줄어듭니다. 편안하게 쉬거나 여가 생활하기에 더 좋습니다.
마음은 더욱 그렇습니다. 노자의 말처럼 나날이 욕망을 비우면 도에 가까워집니다.
도란 특별한 게 아닙니다 도(道)라는 한자를 파자하면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야 하는 길이 도입니다. 그 길은 행복에 이르는 길일 것입니다.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하기 싫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하기 싫어하는 마음도 없어지면 행복해질 것입니다.
비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만 길은 있습니다. 다른 이를 섬기면 됩니다. 다른 존재를 하늘처럼 받들면 자신이 비워집니다.
가까운 사람부터 섬겨 보십시오. 자녀가 자신보다 더 위대해지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이 자신보다 더 빛나는 존재가 된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들, 지구상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연약한 존재들이 하늘의 축복을 받아 어떤 존재보다 더 빛나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마음을 자꾸 연습하면 내 안의 자아가 비워집니다. 그 빈 공간에 하늘의 성품이 들어차고, 내 안의 참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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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명상의 시작과 끝, 믿음
명상은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믿음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명상의 목적은 다양합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사는 누구가 아닌 진짜 ‘나’ 말입니다.
물론 명상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 안에 불성이, 부처의 씨앗이 있다고 하지요.
이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반야심경의 구절처럼 불생불멸, 부증불감, 불구 부정한 존재이지요.
요가에서는 이를 진아라고 합니다.
선도에서는 참나, 하늘사람, 진인, 금선 등으로 불렸구요.
제가 아는 목사님 말씀으로는 기독교에서도 우리 안에 우리의 참모습이 있는데 이를 그리스도라 부른다고 합니다.
종교나 수행 문파는 다르지만 우리 안에 ‘진짜 나’가 있다는 가르침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자들과 성현들이 이를 체험하고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불교에서는 불상을 금빛으로 단장합니다.
금이 귀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의 ‘참나’가 금빛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성화에도 성인들 주변에 황금빛 오라가 보입니다.
요가에서는 이를 ‘황금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명상은 마음 근육을 단련시키는 훈련이라고 합니다.
그 시작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지구를 다녀간 성인들이 설마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셨겠습니까?
매일 자고 일어나 거울을 보면서, 아니면 틈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말씀해주세요.
내 안에 ‘참나’가 있다. 나는 오늘 ‘참나’로 살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 나는 지금부터 그리스도의 삶을 살 것이다.
내 안에 부처가 있다. 내가 부처다. 나는 오늘부터 부처로 살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명상의 시작은 이런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이 확고하면 굳이 명상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에 따라 그저 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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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woods
우리 안의 참나
명상을 할 때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그건 다름 아닌 우리 안에 하늘을 닮은 참나(True Self)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에도 하늘의 참모습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는 똑같이 위대합니다.
참나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부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 요가나 힌두 철학에서는 이를 진아(아트만), 선도에서는 진인 또는 하늘사람이라 일컫습니다.
참나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참나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나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표현하는 순간 실체에서 멀어집니다. 노자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고 한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참나는 하늘을 닮은 존재를 말합니다. 하늘의 마음, 하늘의 정신, 하늘의 생명력으로 이뤄진 존재가 참나입니다. 하늘의 마음, 정신, 생명력도 마찬가지로 말로 설명이 어렵습니다.
하늘의 마음은 무한한 하늘처럼 그렇게 넓고 평화롭습니다. 한없이 고요하고 자유롭습니다. 무한히 넓기 때문에 수많은 별들과 우주 만물을 모두 품어 안고 사랑합니다.
하늘의 정신은 티끌 하나 없는 거울처럼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춰줍니다. 선입견이나 판단에 따라 대상물을 왜곡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정신은 이처럼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하늘의 생명력은 무한합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고 삼라만상을 움직입니다. 우주를 지탱하는 근본 에너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참나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보이는 모습으로 참나를 묘사했습니다.
참나는 빛으로 이뤄진 존재입니다. 그 빛은 아주 밝은 황금빛에 가깝습니다. 이 빛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영적인 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예수님은 물론이고 많은 성인들을 그린 그림을 보면 그분들 주위에 밝은 황금빛이 어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나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불상에 도금을 하는 것도 금이 귀해서 만은 아닙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안에 있는 참나, 부처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가에서는 참나를 보이는 그대로 ‘황금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동양의 선도에서는 참나를 금선(金仙)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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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좁쌀명상 - 괴롭힘 탈출법
우리의 참모습은 참나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지구에 소풍 온 사람입니다. 삶이 끝나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돌아갑니다. 지구에서 지내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를 보살피고 최선의 길로 안내하십니다. 주위에는 수호천사가 늘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겉모습과 달리 우리 안에는 하늘나라에 있을 때의 모습인 참나가 있습니다. 예전의 성인들은 참나를 그리스도, 부처, 진아 등으로 불렀습니다. 참나는 영원불멸합니다. 우리의 삶이 끝나면 우리 안의 참나는 하늘나라로 돌아갑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을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과 수호천사님에게 맡기십시오. 그 분들이 우리를 최선의 길로 안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명상을 위한 준비
조용한 장소를 찾아 자리에 앉습니다. 의자에 앉아도 되고, 바닥에 앉아도 됩니다. 바닥에 앉을 때는 벽을 등받이처럼 해서 앉으세요.
누워서 해도 괜찮습니다. 누울 때는 두 다리를 어깨 넓이처럼 벌리고 두 팔도 몸에서 15~30도 떨어지게 바닥에 내려 놓고 손바닥이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 자세가 우리 몸을 가장 이완시킬 수 있는 자세입니다. 불편하면 베개를 쓰셔도 괜찮습니다.
연습을 꾸준히 하면 시끄러운 지하철이나 서 있을 때도 할 수 있게 됩니다.
1. Relaxing
눈을 감고 다음과 같이 호흡을 합니다.
숨은 내쉬기부터합니다. 숨을 편안하고 길게 내쉽니다. 억지로 길게 내쉬면 가슴이 답답해지니 편안한 만큼만 내쉽니다. 들이마시는 숨은 저절로 들어오게 내버려 둡니다.
처음 몇 번은 숨이 거칠 수가 있습니다.
숨이 들어온 뒤 내쉴 때 길고 편안하게 내쉽니다. 숨을 내쉬면서 온몸에 힘을 뺍니다.
들이마시는 숨은 저절로 들어오게 두시고 내쉴 때 온몸에 힘을 뺀다고 생각하며 길고 편안하게 내쉽니다. 이 때 얼굴에는 미소를 짓습니다. 자신이 행복했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바라봤을 때, 아니면 아기의 웃는 모습이나 개나 고양이의 귀여운 모습을 봤을 때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습니다.
2. 참나 떠올리기
이제 우리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몸 참나가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닮은 하지만 황금빛으로 빛나는 몸이 우리 안에 있음을 생각하고 떠올려 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사에 찌든 나는 사라지고 참나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여러 번 속삭여 줍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온 천사다.”
이제 우리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하느님과 수호천사들이 우리에게 사랑과 축복을 쏟아부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 축복과 사랑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괴롭히거나 해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하늘에서는 눈부신 햇살같은 사랑과 축복의 에너지가 쏟아져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행복에 잠겨 봅니다.
3. 좁쌀 떠올리기
이제 눈을 감은 채로 한 손을 떠올립니다. 손바닥 안에 우리를 괴롭히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의 모습은 좁쌀만큼 작습니다. 그리고 그 색깔은 아주 새카맣습니다. 그의 존재는 너무 작아서 나 자신을 절대 해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은 하늘의 축복과 사랑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바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아주 작고 힘없는 작은 좁쌀만한 크기의 그 사람이 보입니다. 1분 동안 그 상태로 잠시 머뭅니다.
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함께 소풍 온 천사입니다. 그의 안에도 나와 똑같은 참나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두운 에너지에 물들어 그를 잊고 있을 뿐입니다.이제 아주 작은 좁쌀 같은 그의 몸 안에 있는 찬란히 빛나는 참나를 떠올려 봅니다. 그 빛이 점점 커져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어둠을 몰아내는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합니다. 1분 동안 그런 기쁨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4. 깨어나기
눈을 뜹니다. 눈을 뜬 채로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얘기합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온 천사다. 하느님과 수호천사들이 나를 보호하고 있고, 어느 누구도 나를 해치지 못한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천사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모든 존재들에게 축복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런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겠다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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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Woods
믿음이 주는 놀랍고 신비한 힘
명상은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믿음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명상의 목적은 다양합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사는 누구가 아닌 진짜 ‘나’ 말입니다.
물론 명상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 안에 불성이, 부처의 씨앗이 있다고 하지요.
이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반야심경의 구절처럼 불생불멸, 부증불감, 불구부정한 존재이지요.
요가에서는 이를 진아라고 합니다.
선도에서는 참나, 하늘사람, 진인, 금선 등으로 불렀구요.
제가 아는 목사님 말씀으로는 기독교에서도 우리 안에 우리의 참모습이 있는데 이를 그리스도라 부른다고 합니다.
종교나 수행 문파는 다르지만 우리 안에 ‘진짜 나’가 있다는 가르침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자들과 성현들이 이를 체험하고 우리게게 알려주셨습니다.
불교에서는 불상을 금빛으로 단장합니다.
금이 귀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의 ‘참나’가 금빛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성화에도 성인들 주변에 황금빛 오라가 보입니다.
요가에서는 이를 ‘황금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명상은 마음 근육을 단련시키는 훈련이라고 합니다.
그 시작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지구를 다녀간 성인들이 설마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셨겠습니까?
매일 자고 일어나 거울을 보면서, 아니면 틈날 때마다 마음 속으로 말씀해주세요.
내 안에 ‘참나’가 있다. 나는 오늘 ‘참나’로 살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 나는 지금부터 그리스도의 삶을 살 것이다.
내 안에 부처가 있다. 내가 부처다. 나는 오늘부터 부처로 살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명상의 시작은 이런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이 확고하면 굳이 명상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에 따라 그저 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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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Woods
비우면 채워지는 신비
노자는 위학일익(爲學日益) 이요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고 했습니다.
학문은 하루하루 지식을 쌓아 나가는 것이요, 도를 닦는다는 것은 나날이 자신을 비워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갖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갖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욕망을 멈추면 괴로움은 더 이상 늘지 않습니다. 나아가 욕망을 버리기 시작하면 괴로움은 줄어듭니다. 도리어 마음속에서 즐거움이 샘솟습니다.
어려운 때입니다. 갖지 못해서 괴로워하기보다 줄이고 버리고 비우는 데서 기쁨을 찾아보세요.
몸을 보십시오. 속이 편할 때는 비어 있을 때입니다. 집안에도 가재도구가 적으면 청소나 정리할 일이 줄어듭니다. 편안하게 쉬거나 여가 생활하기에 더 좋습니다.
마음은 더욱 그렇습니다. 노자의 말처럼 나날이 욕망을 비우면 도에 가까워집니다.
도란 특별한 게 아닙니다 도(道)라는 한자를 파자 하면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야 하는 길이 도입니다. 그 길은 행복에 이르는 길일 것입니다.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하기 싫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하기 싫어하는 마음도 없어지면 행복해질 것입니다.
비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만 길은 있습니다. 다른 이를 섬기면 됩니다. 다른 존재를 하늘처럼 받들면 자신이 비워집니다.
가까운 사람부터 섬겨 보십시오. 자녀가 자신보다 더 위대해지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이 자신보다 더 빛나는 존재가 된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들, 지구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존재들이 하늘의 축복을 받아 어떤 존재보다 더 빛나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마음을 자꾸 연습하면 내 안의 자아가 비워집니다. 그 빈 공간에 하늘의 성품이 들어차고, 내 안의 참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