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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설거사, 파계 또한 깨달음의 길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unclelkt)

    부설 거사에 얽힌 이야기는 수행에 승속이 따로 없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신라 때 고승인 부설 거사의 삶과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북 부안 내변산 월명암에 전해오는 한문 필사본 <부설전>에 담겨 있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은이는 구전되던 부설 거사의 이야기를 소설체로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부설은 출가승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출가했다 파계한 승려입니다. 부설 스님은 신라 때 불국사의 승려였다고 합니다. 스님은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부설 스님에게 당혹스런 인연이 생겨납니다. 지리산, 천관산, 능가산 등지에서 수도하고 오대산으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묘법을 얻고자 만행을 떠나는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김제시 부근을 지나던 세 도반은 불심이 깊다는 집을 수소문해 하룻밤을 지내게 됐습니다. 구무원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하룻밤 신세지고 떠나려했지만 비가 몇 날을 계속해서 내려 하는 수 없이 며칠을 묵게 됐습니다.

     

    스님들이 머무는 동안 불심이 깊었던 구무원은 스님들에게 자주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에게는 재색을 겸비한 묘화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묘화 낭자도 스님들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며칠 뒤 비가 그치고 부설 거사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묘화 낭자가 부설 거사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부설 거사에게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득도를 위해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에게 혼인을 해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부설 거사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묘화 낭자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차 도통하여 많은 중생을 구하실 스님이 작은 계집 하나 구해 주지 못한다면 어찌 큰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묘화 낭자는 혼인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목숨을 끊겠다고 했습니다. 자살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 딸을 보고 구무원도 부설 스님에게 매달려 애원했습니다. 부설 스님은 묘화 낭자의 목숨을 건 호소에 하는 수 없이 그녀와 혼인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도반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때 부설 스님은 도부재치소(道不在緇素) 도부재화야(道不在華野) 제불방편(諸佛方便) 지재이생(志在利生)라는 게송을 들려주며 도반들을 떠나 보냅니다. 

     

    도라는 것는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하얀 옷에 있는 것이 아니며, 번화로운 거리와 초야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이 하고자 하신 뜻은 중생을 이롭게 제도하는 데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부설 스님은 거사가 됐습니다.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뒤 아들과 딸을 얻어 등운과 월명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비록 파계하고 집안을 이뤘지만 부설 거사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바닷가에 지은 초막에서 지낼 때나 나중에 내변산에 지은 암자에서 살 때나 늘 수행에 몰두했습니다.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1)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Alexa_photos)

    “온 힘을 다해 생명을 보살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응답합니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세요. 여러분 안에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창조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의 원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듯이 신성도 그렇게 만물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빙엔의 예언자로 불리는 힐데가르트가 한 말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한평생 수녀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삶을 산 그에게는 많은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예언자, 신비주의자, 생태주의자, 신학자, 의사, 치유가, 자연주의자, 작곡가, 미술가 등등.

     

    힐데가르트는 1098년 독일 라인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고, 교황권과 황제권이 맞서기 시작하며, 그런 혼란에 대한 대안으로 극단적 금욕을 주장하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형제자매들이 뛰어놀 때 어린 힐데가르트는 꽃과 식물을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모가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면 자신 안에 보이는 그림을 보는 게 재미있고 좋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가 3살 때부터 본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은 특별한 환시였습니다.

     

    부모님은 힐데가르트가 여덟 살일 때 한 수도원에 맡깁니다. 열 번째 아이를 십일조로 바치겠다고 했던 교회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 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신자들과 성직자들 안에 기초를 놓아 주신 불타는 정의가 희미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내가 태어났고 부모님은 탄식하며 나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보내진 곳은 일반 수녀원이 아닌 디시보덴베르크산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백작의 딸로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던 유타가 살고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유타로부터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수도원은 당시 어린 소녀들이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시편 암송, 악보 읽기, 악기 연주 등을 배우면서 수녀가 되기 위한 수련 기간을 거친 뒤 열다섯 살 때 수녀가 됐습니다. 1136년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힐데가르트는 수녀들의 만장일치로 수녀원장이 됩니다.

     

    수도원장으로 헌신하면서도 힐데가르트는 기도와 묵상을 지속했는데 그녀가 42세쯤이었을 때 신비한 환상을 겪게 됩니다.

     

     

    보러가기(클릭) : 빙옌의 예언자 힐데가르트(2)

  • 그림자 없는 선사 수월스님 (3)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terimakasih0)

    "위대한 스승들 - 수월스님 (1)" 바로가기

    "위대한 스승들 - 수월스님 (2)" 바로가기 

     

    수월 스님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적에만 주로 관심을 갖자 마지막 거처인 오대산 상원사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수월 스님이 스승인 경허 스님을 찾아다녔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경허 스님은 박진사라는 이름으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와 술로 사람들을 만나며 스님도 속인도 아닌 것처럼 지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월 스님은 평안도 강계에서 스승 경허 스님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은 뵙기를 청하는 수월 스님을 만나 주지 않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인해주지도 않았고요.

     

    수월 스님은 정성 들여 삼은 짚신 몇 켤레를 스승이 계신 곳에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수월 스님은 그 뒤 함경북도 회령군의 두만강 부근에서 한동안 생활했습니다. 거기서도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습니다.

     

    가끔씩 강가에서 대비주를 외며 선정에도 들었다고 합니다. 수월 스님이 강가에서 대비주를 외고 있을 때면 물고기들이 물 밖으로 뛰어올라 장관을 이뤘다는 얘기가 전해 옵니다.

     

    수월 스님은 58세인 1912년에는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거처를 옮긴 뒤 3년 동안 소먹이 일꾼으로 일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길가 바위 위에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는 밤새워 만든 짚신을 매달아 뒀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위해 간도로 도망 오는 동포들의 주린 배를 잠깐이라도 채워주고 고단한 원행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수월 스님이 살던 간도 지역에는 비적이 많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비적에 맞서기 위해 집집마다 사나운 개를 키웠다고 합니다. 비적을 물어 죽일 정도로 용맹한 개들도 수월 스님 앞에만 가면 순한 양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반겼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수월 스님은 간도 지역 동포들이 지어준 화엄사라는 작은 절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기에서도 누더기를 걸치고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잠을 자지 않았고 아픈 사람을 쉽게 고쳐줬으며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는 등 수월 스님과 관련한 신비한 얘기들은 지금도 그 지역에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수월 스님은 1928년 늦여름 화엄사가 자리한 송림산의 개울가에서 결가부좌를 한 채 입적했습니다. 바지저고리와 짚신 한 켤레를 머리 위에 얹은 채였습니다.

     

    수월 스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 7일 동안 송림산에서는 밤마다 방광의 기적이 일어났고 많은 짐승들이 무리 지어 울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