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보덕봉 운학산을 떠난 백령자와 벽운 선생이 이리로 왔다. 보덕봉에도 그의 제자가 하나 있었다. 홍명천이란 젊은이다. 명천인 앞을 못 보는 맹인으로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어려서 백내장을 앓는 바람에 눈이 멀었다. 혜원과 함께 지내다가 혜원이 운학산으로 간 뒤에는 줄곧 혼자 살아왔다. 가끔 벽운 선생과 백령자가 다녀갈 뿐 찾아오는 이가 전혀 없었다. 그가 머무는 초막은 보덕봉 정상에서 남쪽으로 백 미터쯤 아래쪽에 있었다. 벽운 선생은 보덕봉 정상에 앉아 초막을 내려다보았다.
명천인 마당에서 외공을 수련하고 있었다.권법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쭉쭉 내뻗고 휘두르며 가끔 기합 소리를 터뜨렸다. 기합 소리가 호랑이의 포효보다 더욱 우렁찼다. 대단한 공력이 실려 있어 온 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움직임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손발을 내뻗을 때에도 강한 기운이 뿜어 나갔다. 단전에 가득 쌓인 진기가 경락을 타고서 손끝발끝으로 뻗쳐 가는 것이었다. 명천인 권법 수련을 끝낸 다음, 커다란 돌을 집어 들었다.돌의 두께가 두어 자, 길이가 석 자쯤 되었다. 이것을 공중에 집어 던졌다. 돌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높이 솟구쳤다가 10미터쯤 앞쪽으로 떨어졌다. 명천은 한 길 이상 몸을 날려 내려오는 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명천의 손끝이 돌에 채 닿기도 전에 단전에서 뿜어 나온 공력이 돌을 쳤다. 돌은 굉음을 울리며 산산조각났다. 파편 조각들이 돌을 쳤다.돌은 굉음을 울리며 산산조각났다. 파편 조각들이 총알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그러고 나서 명천인 땅바닥에 놓여 있던 목검을 집어 들었다. 검과 명천인 한몸이 되어 움직였다. 번개같이 움직이며 전후 좌우 상하로 검을 뻗었다. 검을 내뻗을 때마다 단전에 충만한 진기가 손을 지나서 검 끝으로 뿜어 나갔다. 잠시 후, 동작을 멈추고 심호흡을 하더니 땅바닥에서 왼손으로 나무 막대기들을 주워 들었다. 길이가 30센티쯤 되고 지름이 1센티쯤 되는 막대기들이었다. 명천은 이것들을 자기의 머리 위에 던졌다. 나무들이 위로 올라갔다가 막 내려오기 시작하자, 명천의 몸이 두 길 가까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는 공중에 뜬 채로 칼을 휘둘렀다. 칼이 막대기들한테 닿기 직전에 칼끝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뻗쳐 나와 나무들을 반쪽으로 갈랐다. 막대기들이 모두 두 쪽으로 갈라져서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졌다. 명천인 막대기들이 다 떨어진 다음에야 사뿐히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또 먼저 것보다 조금 더 큰 돌을 집어 올렸다. 이것을 높이 던졌다. 돌이 무게 때문에 먼저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내려왔다. 명천이 위로 솟구치며 칼을 상하 좌우로 휘둘렀다. 돌은 칼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을 맞고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명천인 맹인이라 앞이 안 보였다. 그러나 물체의 움직임을 기운으로 감지했다. 눈으로 보는 거와 다름없이 물체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냈다. 검술 수련이 끝났다. 명천인 이어서 경신술 공부를 했다.
초막 마당 한켠에 바위 두 개가 있었다. 높이가 한 길 가까이 되는 바위였다. 두 바위의 간격은 4,5 미터쯤 되었다. 명천인 가늘고 기다란 대나무 막대를 이 두 바위 위에다 걸쳐 놓았다. 대나무의 굵기는 엄지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것만 했다. 명천이 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라가 두 손을 합장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서서히 풀어져서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이 허공으로 변한다고 생각했다. 상상 속에서 몸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뒤에는 장대를 떠올렸다. 가느다란 장대가 쇠막대처럼 강해지고, 아름드리 통나무 만큼 굵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명천인 장대가 거대한 통나무로 변하는 모습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런 다음 대나무 뒤에 발을 올려놓았다. 한 발, 두 발,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명천이 가운데로 이르렸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앞으로 나갔다. 명천이 가운데로 이르렀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전혀 휘어지지 않았다. 진짜 통나무인 것처럼 명천의 몸무게를 잘 감당했다. 명천이 사뿐사뿐 걸어서 반대편 바위로 올라섰다. 명천인 대나무를 바꿨다. 이 대나무는 먼저 것보다 더 가늘었다. 명천인 앞서와 똑같이,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변하고, 대나무가 통나무로 변하는 상상을 한 뒤에 대나무 위로 올라섰다. 두 발이 모두 올라가자 대나무가 약간 휘어졌다. 한발 한발 가운데로 갈수록 대나무는 점점 더 밑으로 내려왔다. 명천이 대나무의 정중앙에 이르렀다. 대나무가 1미터 이상 휘어졌다. 다시 발을 옮기자 조금씩 퍼졌다. 명천인 무사히 반대편 바위로 건너갔다.
이때 벽운 선생의 모습이 정상에서 사라졌다. 그의 몸은 눈깜짝할 사이에 초막으로 옮겨졌다. 명천인 스승이 온 것을 기운으로 알았다. 그의 뒤쪽에서 따스하고 평화로운 화기가 바람처럼 밀려왔다. 얼른 돌아서서 스승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동안 평안히 지내셨는지요?" "별고 없었다. 부지런히 닦았느냐?" "예, 형님들과 누님도 무고들 한가요?" "잘 있다." "공부는 잘들 되는지요?" 명천인 도반들의 수행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궁금했다. "열심히 닦는다. 혜원인 한 경계 더 높아졌고, 석주와 필섭인 머지않아 단을 이룰 게다." "아, 그래요 !" 명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너도 공부가 많이 됐구나. 살갗의 숨구멍이 꽤 열렸어, 공력이 예전 같지 않다." "아직은 완전치 못합니다. 피부의 숨이 자주 막힙니다." "네가 한을 품고 있어서 그렇다. 그게 없어져야 큰 도를 이루느니라." 명천인 혜원이보다 조금 늦게 임독맥이 열렸다. 이제 피부 호흡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피부로 숨을 쉬노라면 온몸의 기공을 통해 우주의 진기가 쏴아쏴아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명천의 피부 호흡은 아직 불완전했다. 기공이 활짝 열렸다가도 곧 스르르 닫혔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 때문이었다. 그는 네 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날 한시에 죽었다. 그것도 처참하게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명천의 고향은 지리산 기슭이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1950년 9월 북한군이 후퇴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때 명천의 나이 겨우 한 살이었다. 3년 후 어느 날 밤이었다. 명천인 잠을 자다가 가슴이 답답하여 잠깐 잠을 깼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그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는 명천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댔다. 감촉이 꺼칠꺼칠했다. 무성한 수염 때문이었다. 명천인 깜짝 놀랐다. 자기를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분명 아니었다. 명천인 엄마를 몇 번 부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명천인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걸레쪽 같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다. 턱과 볼에는 기다란 수염이 무성했다. 어머닌 명천이더러 그가 먼데 사는 아저씨라고 했다. 그는 명천일 무릎에 앉혀 놓고 이것저것 말을 시켰다. 또, 자꾸 머리를 쓰다듬고 꼬옥 껴안아 주곤 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 그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명천인 그가 왜 비좁고 컴컴한 다락에 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날, 명천인 방안 에만 있어야 했다. 어머니가 밖으로 못 나가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도 갑자기 아프다며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명천에게 혹시 누가 오면 다락에 있는 아저씨 얘길 절대 하지 말라고 자꾸 다짐을 주었다. 아침나절이었다. 밖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머니는 질겁을 하며 명천일 끌어안았다. "홍인규, 항복하라." 총소리가 그치고 누군가 크게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숨어 있는 줄 알고 왔다. 나와서 항복하라." 또 총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와라. 안 그러면 너희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 다락에 숨어 있던 아저씨가 방으로 내려왔다. 그의 손엔 총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나가 봐야겠소. 어차피 죽을 목숨, 싸우다 죽겠소." 그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여보! 자수하세요." 어머니가 명천일 내려놓고 그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자수해도 결국 죽이고 말 게요." "명천이와 나는 어떻게 살라고요, 흐흑."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사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보, 미안하오. 명천아, 내가 네 아버지다." 사내는 어머니와 명천일 꼭 끌어안았다. "항복하라. 홍인규, 항복하라." 사내들의 거센 외침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왔다. "아버지." 명천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그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그리운 낱말이었다. "여보, 명천아." 아버지는 다시 한번 아내와 아들을 꼬옥 안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총을 집어든 다음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는 군복 입은 사내들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뛰어나가자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명천의 아버지는 열 걸음도 못 가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 아버지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여보 !" 외치며 뛰어나갔다. 군복 입은 사내들이 어머니를 향해 또 총을 쏘았다. 어머니는 아버니보다 조금 떨어져서 쓰러졌다. "엄마 !" 명천이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가슴에 엎어져 울었다. "명천아, 명천아아." 어머니는 명천일 부르며 숨을 거뒀다.
고아가 된 명천인 고모 집에서 자랐다. 고모는 명천일 자기 자식처럼 위해 주었다. 그런데 고모부는 명천일 박대했다. 그는 난폭하고 매정한 사람이었다. 고모부는 걸핏하면 명천이더러 빨갱이 새끼라고 했다. 명천이 조금만 잘못해도 매를 댔다. 손찌검도 예사로 했다. 고모는 명천이 때문에 숱한 눈물을 흘렸다. 명천인 초등학교 3학년 때 백내장을 앓았다. 그는 병원 한번 못 가보고 눈이 멀었다. 고모부는 눈까지 먼 명천일 더욱 미워했다. 결국, 명천인 유일한 피붙이인 고모와 헤어져 장애인 복지 시설로 가야 했다. 명천이 고모 집을 떠난 지 3년 후에 웬 스님이 명천일 찾아왔다. 지관이란 스님이었는데, 그 스님이 후원하여 명천인 맹아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지관 스님은 자기가 아버지의 친구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명천인 그를 아버지의 친구로만 알았다. 명천이와 벽운 선생이 처음 만난 곳은 지관 스님이 주지로 있던 문수사였다. 맹아 학교를 졸업한 뒤, 명천인 지관 스님한테서 한문과 불경을 배웠다. 그때, 벽운 선생은 일년에 두세 차례 문수사엘 들렀다. 지관 스님의 은사 스님이 벽운 선생의 친구였다. 명천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단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총을 쏜 군복 입은 사내들이 떠오르면 분노로 치가 떨렸다. 그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런데 지관 스님으로부터 불법을 배우면서 증오심이 서서히 사라졌다. 인간사가 모두 인과려니 생각하며 분노를 떨쳐내려 애썼다. 지관 스님은 60이 못 돼서 입적했다. 열반에 들던 날, 그가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지관 스님은 명천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명천아, 나는 오늘 간다. 업이 무거워 금세에는 도를 못이뤘다. 다음 세를 기약한다. 너는 금세에 업을 다 벗고 성불하거라. 벽운 선생께서 앞으로 너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실게다. 또, 떠나기 전에 너한테 꼭 밝혀야 할 일이 있다. 나는 네 아버지의 친구가 아니다. 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날, 네 아버지를 잡으러 갔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때 나는 경찰이었다.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네 어머니와 너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너를 찾아 나섰다. 명천아, 부디 속세의 원한을 떨치고 해탈의 기쁨을 누리거라." 지관 스님은 이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명천인 큰 충격을 받았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지관 스님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지관 스님은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명천인 지관 스님을 생각하며 가슴에 품은 원한을 없애려고 애썼다. 지관 스님이 입적한 지 얼마 안 되어 벽운 선생이 그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고모는 지관 스님보다 조금 뒤에 세상을 떴다. 그녀는 죽기 전에 명천의 아버지를 누가 밀고했는지 알려 주었다. 밀고자는 한동네에 살았던 김덕배라는 사람이라 했다. "김덕배란 놈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 그놈은 면서기였는데 몹쓸 짓을 많이 했다. 명천아, 꿋꿋하게 살거라. 장가를 가서 애들이라도 잘 길러라. 그놈보다 네가 잘살아야 한다. 그놈 자손보다 네 자손이 더 잘되는 게 내 소원이다. 불구자라고 좌절해선 안 된다." 고모의 말은 명천의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분노와 증오심에 불을 질렀다. 김덕배. 그를 죽이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처절한 죽음이 생각날 때마다 그의 이름이 함께 떠올랐다. 벽운 선생이 그 증오심과 분노를 다시 가라앉혀 주었다. 격렬한 증오심은 사라졌으나 가슴속의 응어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김덕배나 아버지, 어머니에게 총을 쏜 사내들을 만난다면 그 응어리가 증오와 분노로 폭발할 것 같았다.
벽운 선생은 이 한을 풀어 주기 위해 명천이한테 외공을 가르쳐 주었다. 명천인 칼을 휘두르고, 공력으로 돌을 깨고, 공중에 날아오르면 가슴이 좀 후련해졌다. 원수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의 뿌리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손발을 내뻗는 것이었다. 그를 한스럽게 만드는 것은 부모의 비참한 죽음만이 아니었다. 강한 자에게 짓밟히는 연약한 중생들의 고통이 가슴에 사무쳤다. 부모형제가 없는 천애 고아로서, 앞을 못 보는 불구자로서 자신이 겪은 아픔 때문에 동병상련의 정을 깊이깊이 느꼈다. 힘없는 중생들의 한이 곧 그의 한이었다. 명천이가 기꺼이 벽운 선생을 좇아 수도인이 된 것도 연약한 중생들을 건져 주기 위해서였다. 도를 이루어 그들을 돕고 싶었다. 자신의 한과 함께 그들의 한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벽운 선생은 다른 어느 제자보다 명천이와 많은 얘길 나눴다. 어려서 따뜻한 정을 많이 못 받은 명천의 가슴 깊은 데 자리한 외로움을 없애 주려는 뜻이었다. 명천인 벽운 선생을 스스럼없이 대했다. 시시콜콜한 신변 얘기도 잘했고, 이것저것 여쭤 보는 것도 많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자상한 아버지와 활달한 아들 사이 같았다. 벽운 선생과 함께 있으면 명천의 마음은 한없이 평화로워졌다. 그토록 증오했던 사람들도 가슴을 활짝 열고 품어 안을 수 있었다. 벽운 선생은 늘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라고 당부했다. "명천아, 땀을 뺐으니 폭포에 가서 목욕을 하거라. 나와 함께 가자." 백령자를 초막에 남겨 두고 명천이와 벽운 선생은 계곡의 폭포로 갔다. 높이가 두세 길쯤 되는 폭폭였다.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폭포 밑에는 깊은 못이 있었다. 깊이가 한 길쯤 되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물이 바위에 부딪쳐 분수처럼 치솟았다. 폭포 주위엔 잠자리와 나비들이 떼지어 날아다녔다. 명천이 옷을 걸친 채 물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명천아, 못에 들어가 살갗으로 숨을 쉬어 보거라. 들어가기전에 마음과 정신을 잘 가다듬어라. 네 몸도 물 떨어지는 소리도 모두 잊거라." 벽운 선생이 폭포 옆 바위에 걸터앉아 말했다. 명천인 천천히 못 가운데로 들어갔다. 물이 가슴께까지 닿는 곳에 멈춰 서서 합장을 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의 몸이 완전히 물 속에 잠겼다. 코로 공기가 드나들 수 없으니 피부가 숨을 쉬었다. 물에 섞여 있던 공기가 기공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반시간쯤 지났다. 가슴이 좀 답답했다. 명천이 그제서야 물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자 시원한 공기와 함께 우주의 진기가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세찬 바람이 살가죽을 뚫고 불어오는 것 같았다. 몸 안과 몸 밖의 경계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우주의 진기는 단전에 모였다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돌아다녔다. 이 엄청난 진기에 밀려 몸 안에 조금 남아 있던 탁기가 밖으로 씻겨 나갔다. 명천의 몸은 진기로 가득 채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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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성자들의 시대11- 명천의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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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현 에디터
아메리카 인디언이 믿는 4가지 영적 법칙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삶에서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믿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그 일을 겪고 나서야 그 일이 일어난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다음과 같은 4가지 믿음 속에서 자신에 겪는 모든 일 속에 어떤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지를 생각하며 감사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호기심 속에 기다렸다고 합니다.
제1 법칙. 네가 만나는 사람은 네게 꼭 필요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삶 속에 등장하는 사람 가운데 우연히 만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도움이 되거나 해로움을 끼치거나 모두 필요해서 찾아온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제2 법칙. 네게 일어난 일은 네게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우리는 흔히들 내가 다른 전공을 했더라면, 내가 다른 직장에 들어갔더라면,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하고 생각하면서 아쉬워하고 때로 후회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내가 한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가장 바르고 빠르게 성장시켰다는 것도요. 물론 아직 그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도 많지만 말입니다.
제3 법칙. 무언가를 시작하는 그때가 최적의 시간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시작할 때 언제가 가장 좋은 때인지 고민합니다.
하지만 인디언은 그런 걱정 대신 믿음을 갖습니다. 지금이 최적의 시간이라고. 하늘은 우리에게 늘 최선의 조건을 마련해 주신다고.
제4 법칙. 끝난 것은 끝난 것이다.
지난 일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일이나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면 그것이 우리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가정으로 미련을 갖는 대신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 페이스북 계정 Sacred Dreams에 올라온 조금 각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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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수 에디터
이탈리아 신부가 한국에서 만난 기적
경기도 성남시에서 노숙인 급식소를 운영하는 김하종 신부가 책을 냈습니다.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니케북스 펴냄)입니다.
김 신부의 본명은 빈첸시로 보르도입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사제가 된 그는 1990년 한국에 와서 김대건 신부의 성을 따 김하종이라는 이름으로 빈민과 노숙인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맡고 있는 ‘안나의집’은 노숙인 무료급식소와 노숙인 쉼터, 노숙인 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안나의 집은 “안아주고 나눠주고 의지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김 신부가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을 낸 것은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뒤 자신이 경험한 기적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면서 특히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뒤 두 가지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매일 오후 1시에 무료급식을 함께 하는 봉사자가 모이는데 한 번도 봉사자 숫자가 적어 차질을 빚은 적이 없다는 겁니다. 두 번째 기적 매일 650명의 식사 준비를 하는데 음식재료가 부족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김 신부는 그런 기적을 더욱 실감했다고 합니다. 안나의집은 성남동성당 맞은 편에서 월~토요일 오후4시부터 저녁7시까지 무료급식소를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휴일 저녁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식당을 폐쇄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가난한 거리의 500여 명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이 폐쇄된다면, 이중 70%는 ‘안나의 집’에서 제공하는 식사가 하루의 유일한 한 끼인데, 문을 닫아버린다면…”(책 중에서)
논의 끝에 도시락으로 급식을 대체하기로 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더 많은 비용이 들고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도시락을 제공하면서 ‘안나의 집’을 찾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다른 무료급식소가 문을 닫아서입니다.하지만 코로나19 전파를 우려한 주민들은 김 신부와 안나의집이 무료 급식을 지속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어떤 주민은 시청에 무료 급식을 막아달라고 민원을 냈고 어떤 주민은 김 신부에게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구두를 벗어 집어 던지기도 했습니다.
무료 급식을 계속 하기로 한 데 대해 김 신부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분들은 제 가족입니다. 가족은 버릴 수 없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안나의집을 찾는 이들 가운데 70%가 이곳에서 먹는 한끼가 하루 식사의 전부라는 사실도 김 신부가 도시락 제공이라는 힘든 결정을 하게 한 이유입니다. 안나의집마저 문을 닫으면 그 사람들은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안나의집 무료급식소에는 자원봉사자가 끊이지 않습니다. 가톨릭 수도자와 신자 뿐 아니라 교회 목사와 신자, 스님과 불자 등 다양한 종교를 믿는 이들이 함께 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안나의집의 기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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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울 에디터
로저 페더러, 말라위, 그리고 100만 명의 아이들
로저 페더리가 자신이 도운 아프리카 말라위의 어린이들과 함께 놀이를 하고 있다. [이미지 : BBC News 유튜브 캡처]로저 페더러는 역사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2019년 3월 남자 프로 테니스(ATP) 투어 단식에서 미국의 지미 코너스에 이어 두 번째로 통산 100번째 우승을 달성한 선수입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237주 동안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역대 최장 연속 랭킹 1위를 기록했고 302주 동안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페더러가 써나가는 위대한 테니스 역사를 알고 있지만 아프리카 말라위의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그의 담대한 프로젝트를 아는 이들은 적습니다.
페더러의 어머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입니다. 페더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아프리카를 자주 찾았는데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됐다고 합니다.
페더러는 2004년 아프리카 말라위에 로저 페더러 재단을 만들어 아이들의 교육과 급식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2018년까지 100만 명의 아이들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고, 이를 달성했습니다.
로저 페더러 재단을 이끌고 있는 제니 핸델 CEO는 목표를 달성한 뒤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결과를 달성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로저 페더러가 늘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100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 유치원 등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다 나은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로저 페더러는 BBC와 인터뷰에서 “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환상적인 일”이라며 “테니스 선수가 된 뒤에 늘 이곳이 내가 돌아와서 도와야 할 곳이라고 늘 생각했고 그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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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에디터
추방 난민 구하려 기내 시위 벌인 대학생
추방 위기에 놓인 난민을 구하기 위해 처벌을 감수하고 항공기 안에서 ‘시위’를 벌인 대학생이 있습니다.
2018년 6월 23일 스웨덴 대학생 엘린 에르손(Elin Ersson)은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터키 이스탄불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망명 신청자 2명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르손은 비행기에 올라 자리에 앉지 않고 페이스북 라이브로 현장을 생중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선 이유를 알리며 다른 승객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승객이 자리에 앉지 않으면 이륙할 수 없다는 항공기 운항 규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르손은 해당 비행기에 탄 2명의 아프가니스탄인이 자국으로 추방된다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승객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신 때문에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고 있다고 짜증을 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거친 말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엘리슨은 눈물을 흘리며 담담히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생명입니까 시간입니까? 이들에게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영국인으로 보이는 한 승객은 화를 내며 에르손의 휴대폰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승무원이 그 승객으로부터 휴대폰을 받아 되돌려 줘서 에르손은 중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연을 들은 승객들이 하나둘씩 그를 지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분이라도 서 계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일어선다면 비행기는 이륙하지 못합니다. 추방을 막을 수 있습니다. “
그때 승무원 한 명이 추방 위기에 놓인 승객이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에르손은 추방 위기에 놓인 승객이 내리는 것을 확인한 뒤 자신도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스웨덴은 2017년 난민 심사를 엄격하게 하고 1만 2500명의 망명 신청자를 추방했다고 합니다.
에르손은 검찰이 자신을 기소하자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 사람들을 추방하는 것은 그들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전쟁이 진행 중인 곳으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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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우즈
유일한 박사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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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에디터
행복해진다는 것
우리는 자주 삶에 대해 고민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헤르만 헤세가 그런 질문에 시로 답을 했습니다.
행복해진다는 것
헤르만 헤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단 한 가지 의무는 행복하라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라네.
온갖 의무, 온갖 도덕률, 온갖 계명에도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반드시 행복해진다네
우리가 행복하기만 하면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
다른 말로 사랑을 하는 한 말일세.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남긴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헤겔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생명을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Being happy
Hermann Hesse
There is no other mission in the life
There is only one mission : to be happy.
It is our only reason for being in this world.
With all our mission, all our morals, all our commandments,
we seldom make one another happy, because these do not make us happy.
A person’ll surely be happy
If he or she do a good
As long as we are happy
and find the balance in the hearts,
in other words, as long as we love …
It is the only lesson that the world has left,
thus taught Jesus; thus taught Buddha; thus taught Hegel.
The most important one thing for all human is the ability to love his or her deepest site,
he or her soul,
he or her capacity for love.
Eat barley gruel or delicious bread,
Put a tattered or jewels,
As long as the ability to love lives,
The world rang pure harmony of spirits
It will be a good world, a world going on in proper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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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경 에디터
술에 취한 청년들이 아기 새를 살리는 법
술에 취한 청년들이 길에서 ‘아기’ 새를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위험에 처한 새를 동물 보호센터에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모두 술에 취해 운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이들은 우버 택시를 불렀습니다. 새만 태워서 가까운 야생동물 재활센터에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호출을 받고 도착한 우버 운전사 크리스티 구인은 손님이 아기 새라는 말을 듣고 순간 당황했습니다.
택시를 호출한 청년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어서 처음에는 이들이 장난을 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의 설명을 듣고는 기꺼이 ‘작은 손님’을 태워 북유타 야생동물 자활센터에 데려다줬습니다.
이들의 사연은 북유타 야생동물 재활센터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야생동물 재활센터 관계자는 “새가 도착한 뒤 술에 취한 한 남성이 전화를 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라며 “치료에 필요한 새가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라고 청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술에 취한 청년들 가운데 한 명인 팀 크라울리는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처음 우버를 불렀을 때 손님이 새인 걸 알자 그냥 가버렸는데 다행히 다음에 온 택시가 기꺼이 새를 손님으로 태워 줬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북유타 야생재활센터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우버 택시가 센터에 도착했을 때 유일한 승객이 작은 쇠황금방울새였습니다. 우리가 아기 새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주조해준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음주운전 대신 우버를 불러 자신은 물론 도로 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안전까지 지켜준 것에도 감사드립니다.”
술 취한 청년들이 아기 새를 구한 사연은 현지 언론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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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경 에디터
세계 최고 레이서가 시한부 5살 꼬마 팬에 준 선물
루이스 해밀턴과 그의 5살 꼬마 팬 해리 쇼의 특별한 인연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미지 출처 : Ryan Bayona(https://www.flickr.com/photos/ryanbayona/7109416681/) 및 루이스 해밀턴 SNS, CC BY-SA 2.0]루이스 해밀턴은 세계 최고의 레이서 가운데 한 명입니다.
포뮬러원(F1) 최초의 흑인 선수이자 영국인 최초로 4차례 월드 챔피언에 오른 인물입니다. 지난해 그가 받은 연봉만도 500억 원입니다.
루이스 해밀턴은 얼마 전 SNS를 통해 영국에 사는 5살 꼬마팬으로부터 영상 응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해밀턴은 그 영상을 지난 1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습니다.
“안녕 해밀턴, 스페인 경기에서 우승하기를 바래요.”
이 영상을 보낸 5살 꼬마팬의 이름은 해리 쇼입니니다. 쇼는 안타깝게도 희귀암을 앓고 있는데 자동차 경주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해밀턴의 열렬한 팬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제임스 쇼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해리는 자동차를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자동차를 너무너무 좋아해요. 루이스 해밀턴은 우리 해리가 아는 유일한 유명인이고 스포츠 선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해리 쇼는 상당도 못했던 깜짝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해밀턴이 F1 월드챔피언십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우승할 때 탔던 경주용 자동차와 우승컵을 볼 수 있도록 집으로 보내준 것입니다.
[[IMAGE|447|center|희귀암을 앓고 있는 해리 쇼(5)의 사연을 들은 루이스 해밀턴이 F1 월드챔피언십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우승할 때 탔던 경주용 자동차와 우승컵을 볼 수 있도록 해리의 집으로 보내줬다. [이미지 : 제임스 쇼 페이스북] ]]
해밀턴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해리를 격려하는 글도 남겼습니다.
“해리, 이 메시지가 내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넌 모를 거야. 정말 고마워. 너는 오늘 내게 큰 감동을 줬어. 해리, 난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너는 참으로 강한 아이야. 나도 너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 세상 사람들이 네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알고 너를 위해 기도하기를 바라. 하느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기. 친구 루이스가”
루이스 해밀턴을 통해 해리 쇼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해리의 부모가 JustGiving에서 진행 중인 희귀암 연구를 위한 모금(Harry’s Giant Pledge)에는 23일 현재 6천여 명 참여해 20만 파운드를 넘는 기금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해리의 이야기가 영국 왕립 마스덴 암 자선재단(The Royal Marsden Cancer Charity)을 위한 모금에 도움을 주기를 바랍니다. 연구만이 이 무서운 질병을 멈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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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현 에디터
다큐 사진의 거장, 황무지 된 고향에 ‘기적의 숲’ 복원
살가두와 인스티튜토 테라의 노력으로 열대우림이 복원된 브라질의 미나스 제라이스 모습 [이미지 : 인스티투토 테라 홈페이지]브라질 다큐멘터리 사진의 거장 세바스티앙 살가두(75)가 황무지가 된 고향을 울창한 숲으로 바꿨습니다.
살가두는 세계 각지를 다니며 촬영한 노동자와 이주민들에 대한 사회성 짙은 사진으로 지구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입니다.
다큐 사진작가로 명성을 얻는 그는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의 대량학살을 고발한 사진 작업을 마친 뒤 얻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찾은 고향마을 미나스 제라이스에서 또 다른 충격을 받게 됩니다.
고향 마을은 황무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어릴 적 뛰놀던 열대 우림은 다 사라졌고 자신이 보고 자란 악어와 새 등도 모두 자취를 감췄습니다.
살가두는 영국 언론 가디언에 “모든 것이 나처럼 앓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됐고 나무가 자라는 땅은 0.5%에 불과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살가두는 아내 레일리아와 함께 고향 마을의 자연을 복원하기로 마음을 먹고 가족과 협력자를 모아 1998년 ‘인스티투토 테라(Instituto Terra)’를 설립하고 215만 평의 땅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살가두는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열대우림의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해 209종의 토종 나무 씨앗을 뿌렸습니다.
재단의 노력으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무가 자라면서 토양 침식이 중단됐고 8개의 샘이 복원되면서 물이 생겨났고 숲이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 살가두의 고향 마을은 열대우림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170여 종의 조류와 30여 종의 포유류가 숲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10여 종의 파충류와 양서류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살가두는 지구온난화의 해법도 찾았습니다.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무입니다. 우리는 숲을 살려야 합니다. 토착 나무가 있는 숲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사와 흰개미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숲이 없으면 동물들도 오지 않습니다.”
살가두는 산림 복원 및 보존의 필요성 등 환경 관련 인식을 깨우기 위한 교육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인스티튜트 테라는 2002년 환경교육과 복원 센터(CERA)를 만들어 70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모두 6만 500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황무지였던 살가두의 고향은 브라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그가 시작한 프로젝트는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자연은 지구이고 자연은 우리와 함께 사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지구에 일종의 영적 귀환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존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IMAGE|348|center|인스티투토 테라의 노력으로 브라질의 미나스 제라이스는 20년만에 황무지에서 열대우림으로 산림이 복원되었다. [이미지 : 인스티튜토 테라 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