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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인학의 우리명산 답산기-새 시대를 여는 곳 계룡산

    계룡산

    계 룡 산

     

    ● 새 시대를 여는 곳

     

    계룡산 (鷄龍山). 
    이 산은 세상을 구하고 새 시대를 열어줄 대성자(大聖者), 구세성인 (救世聖人)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의 간절한 꿈이 가득 서려 있는 산이다. 옛 선지자들은 조선조의 도읍인 한양(서울) 땅의 지기(地氣)가 쇠약해지면 계룡산이 나라의 중심지가 되리라고 예언했다.


    예언서 〈삼한산림비기 (三韓山林秘記)》에 이런 얘기들이 나온다.


    계룡산 아래에 서울이 될 만한 땅이 있다. 정씨(鄭氏)가 여기에다 서울을 세우리라. 계룡산 시대는 한양 시대보다 짧을 것이나, 밝고 훌륭한 임금과 올바른 신하가 연이어 나오리라.

     

    또 때를 맞아 불교가 크게 일어난다. 어진 재상, 슬기로운 장수, 훌륭한 종교인과 문인들이 무수히 출현한다. 이들이 아름다운 문화(풍속)를 활짝 꽃피우리니 보기 드문 일이로다.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

     

    나라의 도읍터로는 (계룡산 아래) 금강(錦江)이 가장 좋고 송악(개성)이 그 다음이다. 한양(서울) 땅은 셋째요, 넷째는 평양, 다섯째는 경주다. 한데 경주는 바다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 그 다음은 원주인데 터가 너무 좁다.

     

    강화도의 마리산은 비록 바다 한가운데에 있으나 반드시 왕이 머물 땅이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가서 떠나게 된다.

     

    〈감결 (艦))이라는 예언서에는 또 이런 얘기들이 들어 있다.

     

     곤륜산에서 뻗어온 산맥이 백두산에 다다랐다. 곤륜산 · 백두산 정기(精氣)가 평양에 뻗치었으나, 평양의 천년운(千年運)이 이미 끝났다.

    (이에) 그 정기가 송악 (개성)으로 옮기어 송악땅이 (고려) 5백 년 도습지가 되었다……. 곤륜산·백두산 정기가 다음엔 한양(서울) 땅으로 옮아갔다….

     

    한양의 운수가 다한 다음에는 도읍지의 기운이 금강산,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계룡산으로 들어온다. 이에 정씨(鄭氏)가 계룡산 밑에 도습을 세우니 계룡산 시대는 8백 년을 간다.

     

    그 다음엔 가야산이 조씨(趙氏)의 천 년 도읍터가 된다. 이어서 범씨(范氏)가 전주에 도읍을 세우니 그 시대는 6백 년간 이어진다. 전주의 지기가 다하면 왕씨(王氏)가 다시 일어나 송악을 도읍으로 삼는다.

     

    옛 선지자들은 왜 계룡산을 우리 나라 최고의 도읍터로 꼽았을까. 계룡산에 서린 정기가 그만큼 빼어나기 때문이리라.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남으로 내려오던 백두대간은 태백산을 빚어올린 다음 거기서 방향을 서남쪽으로 튼다. 소백산을 거쳐 삼남(三南) 지방을 동서(東西)로 가르며 계속 남하한다. 월악산, 속리산, 덕유산 등을 솟아올린 다음에 마지막으로 지리산에 이르러 크게 용틀임한 다음 긴 여정을 마친다.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이르기 전, 백운산 어름에서 큰 산맥 하나가 백두대간과 갈라져 서쪽으로 뻗어간다. 이 산맥을 금남호남정맥 (錦南湖南正脈)이라 부른다.

     

    금남호남정맥은 덕대산에서 다시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향하며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 등을 솟아올린다. 마이산에서는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남북으로 향한다. 여기서 북쪽으로 뻗는 산맥은 금남정맥 (錦南正脈), 남쪽으로 뻗는 산맥은 호남정맥 (湖南正脈)이라 불리운다.

     

    계룡산은 금남정맥의 끝자락에 솟아오른 명산이다. 금남정맥은 마이산을 지나 운장산, 대둔산 등을 빚어올리며 계속 북상하다가 금강에 이르러 긴 여정을 마치면서 남은 기운을 모두 떨쳐 우뚝 일어서니 바로 계룡산이 된다.

     

    백운산에서 출발하여 계룡산에 이르기까지, 금남정맥은 태극(太極) 형상으로 굽이치며 뻗는다. 그래서 계룡산을 산태극(山太極)이라 부르기도 한다.

     

    금남정맥이 백두대간과 갈라진 곳은 또 금강의 발원지(發源地)다. 금강은 금남정맥의 동쪽 기슭을 따라 굽이굽이 흐르다가 계룡산을 북쪽에서 휘감아주며 서해바다로 들어간다. 금강 또한 금남정맥처럼 태극 형상으로 흐른다. 이에 수태극(水太極)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풍수가들은 계룡산을 산태극·수태극이 어우러진 천하명산이라 높이 예찬하며 우러른다.

     

    <주역>에 따르면 태극은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태극에서 만물(萬物).만상(萬像)이 갈라져 나왔다. 산맥도 강물도 태극 형상으로 굽이쳐 왔기 때문에 계룡산을 극히 귀하게 평가한 것이다.

     

    계룡산은 최고봉이 해발 845미터 밖에 안 된다. 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곳곳에 수두룩하게 솟아오른 우리 나라에서 계룡산은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한데 계룡산 최고봉인 천황봉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엄청나게 넓은 시야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맑은 날, 계룡산 정상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소백산 어름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연봉(連峯)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백두대간의 모습은 흡사 거대한 용과 같다.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금북정맥 (錦北正脈)과 서해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경기도로 뻗어간 한남정맥(漢南正脈)이, 남쪽으로는 내장산 ·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湖南正脈)이 보인다.

     

    전망이 이렇게 탁 트여 그 시야가 남북 천여 리, 동서 5백여 리에 이르니 과연 엄청난 기상을 품고 있는 산이다. 계룡산만큼 전망이 넓은 산은 우리 나라에 몇 안 된다.(계속)

  • 성자들의 시대16 명천의 양신과 묘법대

    초가을이었다. 아침 저녁에는 바람이 꽤 서늘했다.

    벽운 선생은 명천을 운학산으로 데려왔다. 명천인 묘법대의 석굴에서 정진했다.

    묘법대는 관음봉 중턱에 있었다.

    하루는 벽운 선생이 혜원이에게 묘법대와 개심사엘 다녀오라 일렀다.

     

    "지금 빨리 가서 명천일 만나고, 개심사에 들러 한 열흘 지내고 오너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혜원인 운학산 주능선을 타고 묘법대로 향했다. 발걸음이 바람처럼 가볍고 빨랐다.

    발바닥이 채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강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위로 밀어 올리곤 했다.

     

    혜원은 달려가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생각했다.

    고요히 선정에 든 명천의 모습이 보였다.

    네 사내가 개심사 쪽에서 묘법대로 올라오는 모습도 떠올랐다.

    그들한테서 삿된 기운이 강하게 뿜어 나왔다. 그들은 무공을 닦는 사람들이었다.

    공력이 대단했다.

     

    명천은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는 묘법대로 온 이후 음식과 잠을 끊었다.

    머지않아 양신이 완전한 형체를 갖고 태어날 참이었다.

     

    이런 때에 심신이 흔들리면 공부가 허사로 돌아간다. 자칫 큰 위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주변이 번잡하지 않도록 누가 잘 지켜 줘야 한다.

     

    백령자와 벽운 선생은 석주와 필섭을 돌보느라 백학봉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혜원을 대신 보냈다.

     

    묘벋대로 올라오는 사람을은 인상이 좋지 않았다. 앞장 선 사내는 눈빛이 매우 독했다.

    또 두 번째는 음험했고, 세 번째 사람은 날카롭고 냉정해 보였다.

    맨 뒤의 사내는 안광(眼光)이 아주 강렬했다. 번갯불같이 번쩍였다.

    넷 중에서 공력이 첫째였다. 소주천이 열려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묘법대가 분명했다. 거기서 무공을 연마할 모양이었다.

    각자 등에 배낭을 짊어진 것으로 보아 며칠 묵어 갈 것 같았다.

     

    혜원이 묘법대에 이르렀다. 명천인 혜원이가 온 줄도 모르고 굴 안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혜원인 명천을 깨우지 않고 굴 앞 공터에 앉아 사방을 둘러봤다.

     

    묘법대엔 새끼줄이 둘리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공부를 방해할까봐 출입을 금한 것이었다.

     

    새끼줄 안쪽과 굴에는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진기가 물씬 감돌고 있었다.

    혜원의 눈에 사방에서 이곳으로 맑은 정기가 뻗쳐 오는 게 보였다.

    새끼줄 바깥쪽의 기운은 안쪽과 확연히 달랐다. 흉하고 탁한 기운이 넘실댔다.

     

    묘법대에 충만한 진기는 끊임없이 명천의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 기운을 받아 명천의 마음과 정신과 몸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단에 잉태된 양신은 출신할 날 만을 기다렸다.

     

    네 사내는 혜원이보다 20분쯤 늦게 올라왔다. 모두 20대로 보였다.

    앞장선 사내가 다짜고짜 새끼줄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저어, 잠깐만요. 지금 저 안에서 수행하는 분이 계십니다.

    여기는 수행 도량입니다. 그냥 돌아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혜원이 정중하게 제지했다.

     

    " 뭐라고요? 우리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며칠 쉬었다 가려고 왔습니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사내의 말투가 곱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혜원을 향해 뻗쳐 왔다.

    그러나 묘법대에 가득한 진기가 탁기를 밀어냈다.

    이 탁기가 빛이 거울에 반사되듯 그한테 되돌아갔다.

    그가 자신의 탁기를 맞고 어깨를 움찔했다.

     

    "안 됩니다."

     

    혜원이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 저 사람 무슨 공불 합니까? "

     

    세 번째로 올라온 사내가 명천일 올려다보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

    혜원인 명천이가 깨어날까봐 밖의 소리가 굴 안으로 못 들어가도록

    얼른 자신의 기운을 보내 굴 입구를 막았다.

     

    " 참선중이십니다. "

     

    "우리도 조용히 사흘만 지내고 돌아갈 것입니다. 이 공터에서 지내면 됩니다.

    굴에는 근처에도 안 가겠습니다."

     

    네 번째 사내는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목소리엔 강한 공력이 실려 있었다.

    이 공력도 그대로 사내한테 되돌아갔다.

     

    헤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들이 새끼줄 안으로  들어오면 묘법대의 기운이 매우 혼탁해질 것이다.

    그 혼탁해진 기운이 명천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

    명천의 마음 밑바닥에는 아직도 번뇌의 뿌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군요. 다른 데 가서 쉬시지요. "

     

    혜원이 온화한 음성으로 사정했다.

    그리고 사내들이 왜 자뀨 묘법대에서 머물려고 하는지

    헤아려 보았다. 사내들이 40 대의 다른 사내와 얘기하는 광경이 보였다.

     

    ' 지금 관음봉 묘법대의 정기가 활짝 피어나고 있다.

    거기 가서 사흘 동안 좋은 정기를 받고 와라. 너희들의 공력이 크게 향상될 것이다. '

     

    ' 예, 스승님. 다녀오겠습니다.'

     

    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두 번째 사내가 냅다 소리를 쳤다.

     

    " 여기가 당신네 땅이오? "

     

    " 개심사 땅이지요."

    혜원의 음성은 여전히 온화했다.

     

    " 보아하니 당신네는 스님도 아니잖아. 주인도 아니면서 왜 그래? "

    사내는 반말로 나왔다.

     

    " 주지 스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 우리도 오는 길에 허락을 받았다고. "

     

    "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

     

    " 당신이 어떻게 알아? 하여튼 우린 개심사 주지한테 얘기하고 왔어.

    못 믿겠으면 가서 물어 봐. "

     

    " 거짓말하지 마세요. "

     

    " 거짓말? 내려가서 물어 보라니까.  자, 안으로들 들어가자고."

     

    사내들이 막무가내로 새끼줄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했다.

    혜원인 순식간에 양신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들의 눈에는 혜원의 양신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양신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사내들을 슬쩍슬쩍 앞으로 밀었다.

    사내들은 두세 걸음씩 뒤로 밀려났다.

     

    " 어어, 왜 이래! "

     

    사내들은 당황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저희끼리 쳐다봤다.

    네 번째 사내가 눈을 반쯤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눈을 번쩍 뜨고 혜원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 아하, 아가씨도 무공을 꽤 닦았나 보구먼요. 내공이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습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식으로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

     

    사내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다른 세 사내는 혜원과 네 번째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혜원이한테 무슨 공력이 있다는 말인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저는 그런 거 모릅니다. "

     

    "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

     

    네 번째 사내는 말을 하면서 단전의 기운을 오른손에 끌어당겼다. 

    혜원의 눈에 기운이 움직이는 게 환히 보였다. 그러자, 묘법대에 가득 감도는 진기가

    혜원일 보호막처럼 에워쌌다.

     

    사내가 혜원일 향해 오른손을 날카롭게 뻗었다.

    싸늘한 살기가 비수처럼 날아와 혜원일 둘러싼 진기와 부딪치더니 그대로 되돌아갔다.

     

    사내는 자기가 보낸 살기를 맞고 뒤로 넘어졌다.

    사내의 머리와 등이 땅바닥에 닿기 직전에 혜원이 자신의 기운을 보내 그를 부축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사내의 머리가 커다란 돌과 부딪칠 뻔했다.

    " 조심하세요. 그리고 괜한 짓 하지 마시고 어서들 돌아가세요. "

     

    혜원이 쓰러진 사내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사내의 얼굴이 부끄러움과 분노로 흉하게 일그러졌다. 눈에는 사나운 독기가 서렸다.

     

    사내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바로 그때였다. 사내의 스승이 보였다.

    그가 자신의 제자한테 강한 기운을 보내 주었다.

    엄청난 공력이 사내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내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자신감에 넘쳤다.

    사내는 천천히 양손에 기운을 모았다가 동시에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벽운 선생이 혜원이 쪽으로 기운을 보내 주었다.

    혜원일 둘러싼 진기의 막이 더욱 견고해졌다.

    사내가 보낸 살기가 이번에도 사내한테로 되돌아갔다.

    사내가 땅바닥에서 떼구르르 굴렀다.

     

    사내의 도반들은 이 모습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감히 혜원일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얼른 사내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사내는 도반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일어났다.

    혼자서는 서지도 못했다.

     

    " 곧 괜찮아질 거예요. "

     

    혜원이 사내한테 맑은 진기를 보내 주며 말했다. 그녀는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았다.

    사도에 빠진 그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었다.

     

    " 안 되겠어. 보통이 아니야. 그냥 돌아가자. 할 수 없어. "

     

    쓰러졌던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반들에게 속삭였다. 사내들은 황급히 내려갔다.

     

    " 잘들 가세요.

    그리고 앞으론 싸움하는 술법일랑 닦지 말고 중생을 살리는 도를 닦도록 하세요. "

     

    혜원이 그들의 등뒤에 대고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리고는 사내들이 저만치 내려간 뒤에 굴 입구를 막았던 기운을 거둬들였다.

    명천인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선정에 들어 있었다.

     

    혜원이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멀리 서해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의 정기가 묘법대를 향해 뭉클뭉클 밀려오는 것도 보였다.

    밤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별들이 반짝였다. 바람도 잠들고 묘법대는 깊은 적막에 휩싸였다.

     

    명천인 여전히 선정에 들어 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명천의 단전에 뜨거운 불기운이 움직였다.

    단에 잉태된 원신이 성숙해져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삼매진화는 곧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붉은 광채가 굴 안을 가득 채웠다.

    화광(火光)은 박으로도 치솟아 나왔다. 묘법대 일대가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이때는 차가운 기운으로 화기(火氣)를 잠재워야 한다.

    그런데 명천인 그걸 깜박 잊고 있었다. 화기가 더욱 강성해지면 선태를 태워 버릴 판이었다.

    원신의 태반인 단이 타버리면 이제까지 해온 공부가 허사로 돌아간다. 매우 위험했다.

     

    " 도제, 불을 꺼야 해. 커다란 얼음덩이를 생각해. 그것을 떠올렸다가 단전으로 보내. "

     

    혜원이 얼른 마음으로 이 말을 전했다.

    명천이 혜원의 말을 알아듣고서 자기가 앉아 있는 굴이 얼음굴이라고 상상했다.

    그러자 차가운 기운이 몸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냉기가 단전의 화기를 조금 식혀 주었다.

     

    명천이 또 심안으로 둥그런 얼음덩이를 떠올렸다. 커다란 얼음덩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것을 또 단전에 끌어넣었다. 화기가 꽤 식었다.

     

    " 한 번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해. "

    혜원의 음성이 들려 왔다. 명천은 얼음덩이를 떠올리고 단전에 빨아들이기를 되풀이했다.

    밖으로 뿜어 나오는 화광이 점점 엷어지더니 드디어 사라졌다.

    명천은 그제서야 선정에서 깨어났다.

     

    " 도제!  "
    혜원이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 어! 누님 언제 오셨습니까? "
    명천이 반갑게 웃으며 밖으로 나와 혜원이 곁에 앉았다.

     

    " 낮에 왔어. "

    " 웬일이세요? "

    "스승님께서 보내셨지. 도제를 보살피라고. "

    " 아, 그럼 제가 아까 본 환상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나 보군요. "


    " 뭘 봤는데? "

    " 누님께서 어떤 젊은이들과 다투는 걸 봤습니다. 무술하는 사람들 같던데..... "
    " 맞아. 그런 일이 잇었지. "

    " 제가 정진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스승님께서 누님을 보내셨군요. "

    " 그렇지. "

     

    " 한데, 왜 난데없이 무술 닦는 사람들이 여기로 몰려왔나요? "

    " 공력을 크게 얻으려고 왔었어. 이곳의 정기가 아주 빼어난 것을 알고서. "

    "무술인들이 그런 것까지 다 알아요? "


    " 그 사람네 스승이 꽤 신통력을 얻었나 봐. 그가 제자들을 보냈어.

    그는 여기 묘법대의 정기가 오늘 활짝 피어난다는 걸 알았어. "

     

    명천인 좀 음산한 기운을 느꼈다. 삿된 사람들한테서 잘 풍겨나오는 기운이었다.

    무술인들의 스승이란 자가 사도의 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제가 있는 것도 알았을가요? '

    " 몰랐을 거야, 스승님께서 지켜 주시니까."

     

    문득 명천의 눈에 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있는 곳도 보였다.

    거기는 운학산 북쪽 기슭이었다.

    40대로 보이는 사내의 지도를 받으며 젊은이 열댓 명이 내공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40대의 사내는 눈빛이 호랑이처럼 형형했다.

     

    " 그 사람들도 운학산에서 사는군요. "
    " 그래."
    " 스승이란 사람, 공력이 대단해 보이네요. "

    " 보통이 아니야. 야심도 대단하고. "

    " 야심요? 무슨 야심을..... 무술계를 평정하려고요? "

     

    명천이 재미잇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 아니, 그보다 훨신 더큰 야심이야. 어마어마한 신총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지. "

    " 정말요? "

    " 그럼. 그런 야심을 지닌 사람들이 꽤 많아. 운학산에도 몇 있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 왜 하필 운학산으로 옵니까, 번잡하게? "

    " 운학산 정기가 워낙 빼어나니까. 그들은 운학산의 기운이 무척 탐나겠지. "

    " 우리가 공부하는 데 여러 가지 장애가 많겠군요. "

     

    " 그래. 하지만 스승님께서 잘 막아 주실 거야.

    우리도 더욱 열심히 정진해야 되고, 그들을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야."

    " 무엇이죠? "


    " 그 사람들은 뭘 얻으려는 욕심에 사로잡혔어.

     

    우린 거꾸로 다 버려야지.

    그들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해.

    우린 낮은 사람이 되어 모두를 섬겨야지. "

     

    " 결국 득도하는 수밖에 없군요. "

    " 그렇지. 무공이나 신총력으로 다툴 일도 아니고. "

     

    명천은 자기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가슴이 뜨끔했다.

    자기가 혜원이였다면 어찌하였을까 생각해 보았다.

    젊은이들을 호되게 혼내 주고 싶었을 것 같았다.

     

    " 스승님처럼 큰 도인들께서 사도의 무리를 일망타진 못 하나요? "
    " 아직은 어렵지. 삿된 기운이 매우 강하니까.

    영계(靈界)의 사령(邪靈)들도 사람들 마음을 자꾸 탁하게 만들고,

    훌륭한 도인들이 지금보다 몇 배 더 많이 나오면 달라지겠지. "

     

    " 우리도 어서어서 부지런히 닦아야겠네요."
    " 스승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야지.

    스승님을 만난 게 얼마나 큰 복이야. 동생, 이제 들어가서 정진해. "

     

    " 누님은요? "

    명천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만났는데 훌쩍 가려는 줄 알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명천에게 혜원인 친누나와 다름없었다.

     

    " 나는 여기서 정진하다 아침에 개심사로 갈 거야. 열흘 동안 개심사에서 지내게 왰어.

    종종 올라올게. "

     

    혜원이 명천의 마음을 헤아리고 따뜻하게 말했다.

     

    " 그러세요. 전 들어갈게요, 누님. "

     

    명천인 다시 굴로 들어가 명상에 잠겼다.

    혜원인 날이 환하게 밝은 뒤묘법대를 떠나 개심사로 향했다.

    명천인 그때까지 선정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혜원이 개심사에서 1킬로쯤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웬 노루 한 마리가 길을 마고 엎드려 있었다.

    노루는 혜원일 보더니 벌떡 일어나 머리를 주억거렸다.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혜원의 몸에 머리를 비비댔다.

     

    혜워인 타심통(他心通)이 열려 잇어서 노루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노루한테 뭣 때문에 그러느냐고 심언법(心言法)으로 물었다.

    노루가 혜원이 마음으로 전하는 말을 알아듣고 무어라 웅얼거렸다.

     

    자기 새끼를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혜원의 심안에 어린 노루 두 마리가 보였다. 그중 한 마리가 덫에 걸려 있었다.

    상처가 매우 깊어 보였다.

     

    " 어휴, 굉장히 아프겠구나. 어서 가자. "

     

    혜원인 어미 노루와 함께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덫에 걸린 새끼 노루는 고통스러워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어미가 혀로 새끼 노루의 등을 핥아 주었다. 너를 구해 줄 분이 오셨으니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혜원인 덫부터 풀어내고 상처를 살펴보았다. 피가 많이 엉켜 있었고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나쁜 병균에 감염되어 염증도 심했다.

    염증 때문에 열도 높았다. 새끼 노루는 오한으로 몸을 떨었다.

    상처 부위에 탁한 병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그것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혜원인 두 손에 진기를 모은 다음 상처 부위에 갖다댔다.

    손에서 강한 진기가 뿜어 나와 탁한 병기(病氣)를 몸 밖으로 밀어냈다.

    5분쯤 지났다. 새끼 노루가 신음을 그쳤다. 떨지도 않았다. 오한과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 이제 안 아프지? 상처도 곧 나을 게다. "

    혜원이 어린 노루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어미 노루는 무척 좋아했다. 다른 새끼 노루도 그랬다.

    그들은 혜원의 몸에 자꾸 머리를 비비댔다.

     

    " 나는 이제 가야겠다. 잘들 지내거라. "

     

    혜원이 노루들에게 심언법으로 작별 인사를 전했다. 노루들이 동시에 무러라고 중얼거렸다.

    너무나 고맙다는 얘기였다.

    어미 노루는 길에까지 와서 혜원일 배웅했다.

     

    " 어린 새끼들 잘 길러라. 덫이나 독약을 조심하고. "

    혜원이 헤어질 때 어미 노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루가 혜원의 말을 받아 또 뭐라고 웅얼거렸다. 다시 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 나는 기린봉에 있단다. 그리로 놀러 오렴. "

    혜원이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어미 노루는 혜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새끼들한테로 돌아갔다.

     

    산을 내려가는 혜원의 노리에 노루 가족이 자꾸 떠올랐다.

    이렇게 만나 것도 예사 인연이 아닌 듯 싶었다.

    전세에도 깊은 인연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혜원인 자신과 그들의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아득한 전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전세에 노루 일가는 사냥꾼이었다. 혜원인 스님이었다.

    그녀는 만행을 떠났다가 깊은 산중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사냥꾼 일가가 부상당한 그녀를 구해 주었다.

     

    사냥꾼 일가는 살생을 많이 한 응보로 몇 생에 걸쳐 짐승이 되었다.

    짐승으로 환생을 거듭하면서 업보를 받아 왔다.

    또 비록 살생을 많이 했지만 선량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 과보도 받았다.

    혜원이 어린 노루를 구해 준 것도 인과응보였다.

     

    이제 그들이 받아야 할 살생의 업보는 끝났다. 그러나 시련은 많이 남아 있었다.

    혜원이 앞로 닥쳐올 시련에서 그들을 구해줘야 했다.

    전세에 그들이 혜원일 보살펴 주었기 빼문이었다.

     

    전세의 사냥꾼 일가는 혜원에게서 불법을 좀 배웠다.

    그들은 언젠가 다음 세(世)에는 수도인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혜원이도 자기가 만약 크게 깨달으면 그들을 인도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들의 언약이 실현될 때가 가까웠다.

    노루 일가도 머지 않아 백령자, 청령자처럼 수행자가 될 것이었다.

     

    혜원인 무척 기뻤다.

    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있는 곳을 한참 동안 올려다본 뒤에 다시 걸음을 을 옮겼다

  • 성자들의 시대13-정도와 사도

    "아니에요. 구세주는 이 세상 분이세요.

    하늘의 천신들과 선인들도 모두 우리 스승님을 공경하며 따릅니다.

    스승님의 가르침도 받습니다."

    보화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말을 할 때, 보화의 눈에서 번쩍이는 광채가 뿜어 나왔다.

    눈빛이 매우 날카롭고 강렬했다. 전형적인 광신자의 눈빛과 비슷했다.

     

    "아아, 그러시구먼요. 도력이 대단하시겠네요."

    필섭인 미심쩍었다. 산에서 지내는 동안 스스로 구세주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만났었다.

    그들은 대개 한두 가지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신통력을 이용해서 혹세무민했다.

    보화의 스승도 그런 무리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도력을 지니셨죠. 우주 삼계를 손바닥 안에 놓고 들여다보세요.

    기운이 천하장사시고,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려내세요. 저도 죽을 몸이었는데 스승님의

    크나크신 도력으로 소생했지요. 여기 이 동생들도 그랬어요."

    보화의 도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들이 몹시 안 좋으셨던 모양이지요?"

     

    "우리 셋다 불치병으로 고생했어요. 저는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요.

    한달 넘기기도 어렵다고 했어요. 식구들은 각오하고 있었지요.

    그때 스승님을 처음 되었어요. 한달 안에 죽는다는 사람이 열흘리 못 돼 다 나았지요."

     

    "스승님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스승님께서 저를 환히 보시고서 저희 집을 손수 찾아 주셨어요.

    저희 집 대문 앞에서 어머니더러 이 집에 오늘 내일 하는 중환자가 있지 않느냐고

    물으시더래요.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당신께서 고쳐 주겠다고 하시더래요.

    당시 저희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얼른 저를 스승님께 맏겼죠. 스승님께서 열흘 만에 고쳐 주셨어요."

     

    "도력이 굉장하시구먼요."

     

    "그럼요. 저희 스승님은 겉모습만 사람이지, 사람이 아니세요. 하느님의 분신이십니다.

    하느님꼐서 권능을 주셨지요. 못하시는 일이 없어요.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도 다

    들으실 수 있어요."

     

    "천이통을 얻으셨나 보지요?"

     

    "천이통, 천안통, 숙명통, 신족통, 누진통, 타심통 다 얻으셨어요.

    도가 높다 하는 사람 중에 이렇게 육신통을 두루 갖춘 이가 있나요?

    고승대덕이라 추앙받는 스님들도 지식이나 좀 얻었지 도력을 지닌 도인은 없잖아요."

     

    필섭인 보화가 자기네 스승한테 푹 빠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보화의 스승보다 훨씬 못한 가짜 구세주들도 신도들한테 하느님처럼 추앙받았다.

    보화의 스승 같은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 숱한 사람들이 그의 문하로 몰려들 것이었다.

     

    어쨌든 보화의 스승은 정도를 가는 이가 아님이 분명했다. 더구나 구세성인이라니

    어이없는 얘기였다.

     

    보화와 그녀의 도반들이 안돼 보였다.

    왠지 모르게 보화가 삿된 스승은 만난 게 너무 안타까웠다.

    보화의 인상은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선하고 맑았다.

    정도를 닦으면 크게 깨우칠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저씨들꼐선 여기서 무슨 공부를 하세요?"

    보옥이란 여자가 필섭에게 물었다.

     

    "저희는……."

    필섭인 저희 스승님이야말로 도인 중에 도인이시며,

    그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는 중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스승님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갑자기 혀가 마비되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혜원의 음성이 귓전에서 울렸다.

     

    "말하지마세요."

     

    벽운 선생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한 얘기를 때가 이를 때까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엄히 일렀었다. 필섭은 아차 했다. 스승께 큰 누를 끼칠 뻔했던 것이다.

     

    "저희는 뭐 그저 마음이나 좀 닦아서 사람답게 살려고………."

    필섭인 혜원이가 천리전음법을 써서 말을 전해 준 것을 신기해 하며 적당히 둘러댔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서 사시는데. 큰 뜻이 있지 않으시겠어요? 그냥 쉬러 오신 분들은 아닌

    것 같네요. 두 분한테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보통 사람들과 아주 달라요. 수도하시죠?

    요즘엔 선도 공부하는 분들이 많던데. 선도를 닦으세요?"

    보화가 매우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불도, 선도, 모두 조금씩 공부합니다. 성현들의 가르침이야 모두 귀중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가르침도 참 좋고요."

    필섭인 참된 도가 어떤 것인지 빙 돌려서 말하고자 했다.

     

    "예수, 석가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나요?" 후천시대가 곧 열리는데 수도를 하려면

    후천시대에 맞는 도를 닦아야지요."

    보연이란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끼여들었다. 눈빛이 좀 차디차고 날카로웠는데

    목소리도 딱딱했다.

     

    "진법이야 우주가 다 무너진다 해도 올바른게 아닐까요. 참성인들의 가르침은 다 진법에

    뿌리를 두었겠지요."

    필섭이 부드럽게 응수했다.

     

    "선천시대에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나왔어요.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을 구하지 못했어요.

    또 예수의 제자들, 석가의 제자들을 보세요. 진짜 도인이 몇이나 되겠어요.

    백 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예요. 중들은 절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목사들은 서로 신도들을 많이 잡으려고 난리들이지요."

     

    "그건 성현님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 경우이지요."

    석주가 모처럼 끼여들며 보연의 말에 이의를 달았다.

     

    "타락한 제자들이 생긴 것은 스승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에요.

    잘못된 도는 빨리 없어져야 해요. 그래야 세상이 좋아져요. 우리……."

     

    "그만해."

    보연이 우리 도야말로 선천시대의 잘못된 도를 바로잡기 위해 나온 도라고 말하려 했으나,

    보화가 나서서 막았다. 자칫 말다툼을 벌이게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서였다.

    그건 호의를 베풀어 준 필섭이네한테 큰 결례라고 생각했다.

     

    또, 보화는 두 사람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처음 만나 순간, 이들이 인상이 너무 좋게 보였다.

    한없이 평화롭고 자비로운 기운이 얼굴 가득 넘쳐흘렀다.

    두 사람에게서 맑고 온화한 기운이 뭉클뭉클 전해져 오기도 했다.

    수행이 참 잘된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보화의 도반들은  3백 명이 넘었다. 남자가 2백여 명, 여자가 백여 명이었다.

    보화는 자신의 도반들과 두 사람을 견주어 보았다. 두사람은 격이 다른 것 같았다.

    공부가 꽤 잘됐다고 스승이 인정해 주는 사람들도 두 사람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보화는 이들이 무슨 도를 어떻게 닦았길래 이처럼 맑고 자비로운 모습을 지녔을까가

    궁금했다. 또, 만난 지 몇 시간밖에 안됐지만, 오랫동안 함께 지낸 도반들 못지않게

    친밀감이 느껴졌다. 필섭이한테는 더욱 그랬다. 필섭이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언제 어디선가 아주 가까이 지낸 사람처럼 느꼈듯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문에 자꾸 필섭에게 말을 걸었다.

     

    "두 분께선 여기 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보화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이 친구는 일년 가까이 됐고, 저는 반년쯤 됐습니다."

     

    "여긴 전망이 탁 트여서 참 좋네요. 앞을 보면 가슴이 확 열리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보화네와 필섭이네는 잠시 더 얘길 나누고는 각자 수련을 시작했다.

    필섭이와 석주는 방으로 들어갔고, 보화 일행은 텐트 안에서 정진했다.

     

    필섭인 행공을 마치고 선정에 들려 했으나 어쩐지 정신을 한곳으로 모으기가 어려웠다.

    보화 때문이었다. 보화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의식을 단전에 집중하려고 애쓰니, 그녀의 모습이 단정에서 아른거렸다.

    가슴에 훈훈한 기운이 감돌며 애틋한 감정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보화도 마찬가지였다. 필섭이와 석주의 모습이 그녀의 의식을 꽉 채웠다.

    필섭의 얼굴은 아주 또렷하게, 석주의 얼굴은 좀 흐릿하게 떠올랐다.

    심안으로 필섭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왠지 가슴이 설레고 미묘한 환희심이 솟아났다.

    그것은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첫사랑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보화는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본 낯선 사내에게 자기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욕을 끊고 이성을 잊고 지낸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는데, 기막힌 일이었다.

     

    스스로 너무 부끄러웠다. 행여 스승께서 자기를 보고 있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얼른 필섭의 모습을 떨쳐 내려 했다. 필섭이 대신 스승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곧 필섭의 얼굴이 또렷이나타났다.

     

    저녁때가 되었다. 보화네는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필섭이와 석주는 미숫가루를 먹고 밖에 나가 쉬었다.

     

    해가 지려 했다. 서편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머! 저 해 좀 봐!"

     

    "어휴, 굉장하네."

    여자들은 넋을 잃고 낙조을 감상했다. 서편 하늘에는 뭉게 구름이 떠 있었다.

    노을이 뭉게구름으로 번져 갔다. 태양과 가까운 쪽은 빨갛게 물들었고,

     바깥쪽은 연분홍빛이었다. 구름이 엷은 곳으로는 태양의 마지막 잔광이 뿜어 나왔다.

     

    참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보화는 한없이 깊은 평화를 느꼈다.

    온 우주와 자신이 붉은 노을 속으로 함께 녹아 드는 느낌이었다.

     

    해가 졌다. 석주는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필섭은 좀더 있고 싶었다. 보화 때문이었다.

     

    "언니, 이제 수련을 해야죠."

    노을이 조금씩 스러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보연이 보화에게 말했다.

     

    "응?"

    보화는 막 잠에서 깨어난 표정으로 보연을 돌아봤다.

     

    "뭘 그리 생각하세요? 들어가서 공부해야죠."

     

    "으응."

     

    보화의 눈에 필섭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노을을 향해 앉아 있는 필섭이가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왠지 자꾸 필섭에 대해, 그가 하는 공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먼저 들어가, 난 좀더 있다 갈게."

    모화는 도반들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필섭에게 다가갔다.

     

    "저어, 선생님."

    보화는 조용히 필섭일 불렀다.

    "예?"

    돌아보는 필섭의 눈에서 별빛처럼 투명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저어, 선생님과 말씀 좀 나누고 싶어서요."

     

    "여기 앉으시죠."

    보화는 필섭이와 마주보고 앉았다.

     

    "선생님께선 왜 이런 깊은 산중에서 수도하세요? 뭘 얻으려고 그러시죠?"

     

    "얻으려는 게 아니라 버리려는 거지요?"

    필섭인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여 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보화에겐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도력을 얻는다든지, 구제창생의 뜻을 편다든지 하는

    등의 대답을기대했었다.

     

    "뭘 버리시려고요?"

     

    "남김없이 다요. 번뇌, 지식, 마음, 버릴 게 많지요. 내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싶습니다."

     

    "그래도 뜻하시는 바가 있지 않겠어요? 모두 버린 다음에 어떻게 되지요?"

     

    "글쎄요. 아직 그렇게 되어 보지 못했으니까, 다음 일은 전혀 모릅니다."

     

    "뭔가 추구하는 게 있으실 것 같은데요."

     

    "보화 씨, 아까 노을 감상하실 때 뭘 느끼셨어요?"

     

    "아주 평화로웠어요."

     

    "굳이 따지자면 그런 평화를 얻자는 겁니다."

    필섭의 얼굴에 노을 같이 평화로운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보화는 참으로 아름다운 미소라고 생각했다. 왠지 그녀의 가슴에 봄바람처럼 훈훈한

    기운이 일었다.

     

    "보화 씬 뭘 얻기 위해 수도하시지요?"

    이렇게 물어 보는 필섭의 음성이 매우 따스했다.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듯한 어조였다.

     

    "저흰 후천시대를 맞이하려고 수도해요. 후천의 선경에서 살려고요.

    스승님 말씀으론 후천시대가 오기 전에 숱한 사람이 죽는대요. 백에 하나 살까 말까래요.

    말세의 환난이죠. 수도자만이 이 환란을 피한다고 하셔요. 또 한가지 저희가 하려는 일은

    구제창생이에요. 수도를 잘하면 스승님께서 저희에게 큰 능력을 주신대요.

    지금도 많이들 받고 있어요. 도통군자가 되어 구제창생하는 게 제 도반들의 희망이지요."

     

    "큰 포부들을 지니고 계시구먼요. 그런데 짐이 무거우시겠습니다."

    필섭인 그동안 구제창생의 뜻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꽤 만났다. 가짜 구세주들은 오로지

    자기만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건질 수 있노라고 큰소리쳤다. 그들은 그 짐 때문에 온갖

    번뇌에 빠졌다.

    보화와 그녀의 도반들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필섭이 전 같으면 그 허황된 꿈을 버리라고 했을 터였다. 그런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이 또한 번뇌라 생각했다.

     

    "선생님,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하는 게 수도인의 도리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도 구제창생의

    대업에 동참해 보시지요. 큰일을 하셔야 될 분 같아요. 한번 저희 스승님을 만나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한달 후면 스승님께서 상제봉으로 오세요. 스승님께서도 선생님을 보시면

    참 좋아하실 것 같아요."

    보화는 간곡히 권했다.

     

    "저는 제 몸 하나도 바르게 못 닦는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제 한 몸이나 제대로 닦아도

    원이 없겠습니다. 구제는 보살님들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엄두를

    내겠습니까."

     

     

     

    필섭인 완곡하게 사양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저희들은 다 엉터리예요.

    하지만 저희 스승님께선 다르세요. 저희가 반딧불이라면 스승님께선 태양이지요.

    그분께서는 일체 사욕이 없으세요. 오로지 구제창생 일념뿐이세요. 스승님을 뵈면

    큰 힘을 얻으시겠어요."

     

    필섭이 지금까지 만나 본 가짜 구세주들이 대부분 보화의 스승 같았다.

    그들에겐 다른 욕심이이 없었다. 오로지 세상을 구하겠다는 마음 하나였다.

    한데,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가 구해야 한다는 게 무서운 욕망이었다.

     

    "인연이라면 만나지겠지요, 허허."

     

    "오늘 뵌 게 어쩐지 큰 인연 같아요. 선생님을 처음 뵙는 순간 보통 어른이 아니시라

    생각했어요. 또, 전에 어디선가 많이 뵌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언젠가 아주 가까이 지냈던 분 같았어요."

     

    "보화 씨도 그러셨습니까? 실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상하군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모르겠는데."

     

    "저도 자꾸 옛날을 회상해 봤어요."

    두 사람은 자신들의 과거를 맞춰 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차례로 맞춰 봤는데,

    과거에 둘이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서로의 과거를 알면서 왠지

    더욱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텐트에서 이상한 주문 소리가 새어 나왔다.

     

    "궁궁을을 천기지기 궁궁을을 천기지기……."

    보연과 보옥이 똑같은 주문을 거듭 되풀이하여 읊조렸다.

     

    "무슨 주문입니까?"

    필섭이 잠시 귀기울여 듣다가 물었다.

     

    "하늘과 땅의 정기를 받는 주문입니다. 저 주문을 잘 공부하면 큰  힘을 얻어요."

     

    두 사람은 좀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반들한테로 돌아갔다.

    각자 수련에 들어갔으나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한밤중이었다. 필섭이 보화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데, 낯선 노인의 얼굴이 보화의 얼굴과

    겹쳐서 나타났다. 그 순간,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방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또다시, 보화의 얼굴이 사라지고 노인의 얼굴만 뚜렷이 보였다.

    노인의 얼굴은 길고 좁았다.눈에서는 형형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눈빛이 매우 날카롭게 보였다. 눈썹은 굵고 짙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선명했다.

     

    노인이 뚫어져라 필섭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때, 필섭인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에 끌려가듯, 몸 속의 기운이 바깥으로 쭈욱쭈욱 빨려 나갔다.

     

    필섭인 금방 탈진했다.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쓰러지듯 벌렁 누웠다.

    몸이 바위처럼 무러워졌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기 어려울 만큼 까라졌다.

    나중엔 정신도 가물가물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사방이 깜깜했다.

     

    또, 뭔가에 의해 온몸이 짓눌렸다. 목이 졸려 숨쉬기도 어려웠다.

    필섭인 석주를 불러 보려고 했다. 그러나 혀가 굳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석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선정에 들어 있다.

     

    "도형, 도형!"

    필섭이 막 의식을 잃으려는 찰나 혜원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형! 정신차리세요~"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혜원의 얼굴이 보였다. 필섭인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떴다.

    혜원인 방안에 없었다. 그런데 혜원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