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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 고승들의_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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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랑이도 따른 정암 스님, 무소유 자비행 한평생

    

    조선시대 정암스님(1738~1794)은 무상의 자비심을 실천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동사열전>의 ‘정암선사전’에는 그의 보시행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정암스님 이름의 ‘정’(晶)은 ‘맑다’ ‘밝다’ ‘빛나다’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청정한 마음으로 무소유를 실천하며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9세부터 미황사에 있는 재심스님의 손에서 자란 스님은 16세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20세 때부터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깨달음을 구했고 송파 스님과 연담 스님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30세에 송파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스님에게는 유난히 학문을 배우겠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기록에는 제자가 구름처럼 안개처럼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설법을 하면서도 마음은 오로지 곤궁한 대중들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정작 자신은 늘 찌그러진 모자에 해진 옷을 입고 다니고 팔꿈치가 보이기 일쑤여서, 춥고 배고픈 거지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친척이나 제자들이 비단옷을 선물하면 밖으로 나가서 헌 옷으로 바꿔 입고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시봉하는 스님이 이유를 물어보면 추워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 벗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절에 거지가 찾아왔습니다. 머리는 온통 헝클어지고 더덕더덕 때가 낀 몸에 너무 오래 입어 시커멓게 미어진 옷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거지의 몸에 이가 많은 것을 보고 문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꼴을 하고는 절에 발을 들여놓다니, 어서 썩 나가거라!”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오던 정암스님이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얼른 그 걸인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잘 먹인 후에 밤이 되자 함께 이불을 덮고 잤습니다. 스님에게 이런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스님에게 아쉬운 형편을 말하면 누구에게나 즉시 내어주므로 스님의 옷 궤짝에는 남은 옷이 없고, 배고픈 사람이 찾아오면 몽땅 내주어 항아리에는 남아나는 곡식이 없었습니다. 스님이 오히려 끼니를 굶을 지경이라는 소식을 듣고, 거지들 수십 명이 시장에 모여 약속하였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든지 정암스님이 계시는 방에 가서 곡식을 얻어 오면, 우리가 다 같이 그를 쫓아내고 우리 축에 끼지 못하게 하자.”

     

    날이 저물어 정암스님이 산사로 돌아오는데 숲속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와 스님의 옷자락을 발로 거머잡고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가 집주인을 반갑게 맞이하듯 하였습니다.

     

    “이 녀석아, 길을 비키거라.”

     

    스님이 지팡이를 휘둘러 쫓아오지 못하게 했지만, 호랑이는 계속 스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어서 돌아가거라, 사람들이 놀라겠구나.”

     

    호랑이는 절 문 앞에 이르러서야 꼬리를 흔들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정암스님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신은 추워 떨면서도 남을 입히시고

    당신은 배고파도 남을 먹이셨네.

    맹수도 순종하고 걸인들도 자비심을 내었거늘

    아아, 편한 길 제쳐두고 험한 길 가시었네.

  • 진묵조사 (6) - 저것이 바로 부처님이다

    초의 선사가 편찬한 <진묵대사유적고>에 진묵스님이 입적할 무렵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진묵조사가 나이 72세 되는 해 10월이었습니다, 조사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시자를 데리고 시냇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물에 비친 스님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것이 바로 석가부처님이다.”

     

    물에 비친 그림자를 들여다본 시자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너는 나의 거짓 모습은 알면서 그 안에 부처님의 참모습은 모르는구나.”

    조사는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나서 대중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나는 오늘 세상을 떠나려고 한다. 부지런히 닦고 잘 깨우치거라.”

    “스님이 가시면 누가 법맥을 이어갑니까?”

    “수행자가 공부나 참되게 하면 되지, 그런 것은 왜 따지느냐?”

    그래도 제자들이 스님을 붙잡으며 재삼 청하자 조사는 마지못해 입을 떼었습니다.

    “명리승(名利僧)이기는 하나 서산스님이 정통을 이은 분이니 그쪽으로 해라.”

     

    말을 마친 진묵조사는 가부좌한 채 고요히 입적하였습니다. 대둔산에 있는 태고사에는 진묵조사의 풍모를 짐작하게 하는 시가 남아 전합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으로 자리하고 산은 베개 하며

    달을 촛불 삼고 구름으로 병풍치고 바다는 술통 삼네.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신나게 춤추니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저어할 뿐이라네.(끝)

  • 진묵조사 (5) - 복을 걷어찬 조카

    한 번은 누이동생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끼니를 잇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진묵조사는 7월 칠석날 조카 내외를 찾아갔습니다.

     

    “오늘 밤 자정까지 일곱 개의 밥상을 차려라. 특별히 칠성님들을 모셔다가 복을 지을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주마.”

     

    조카는 삼촌의 신통력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아는지라 그 말을 믿고 음식을 장만하여 일곱 개의 밥상을 차렸다고 합니다.

     

    밤 12시가 되자 진묵조사가 일곱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보니 자기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같이 땟국물에 절은 지저분한 옷에 눈에는 눈곱이 달렸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한 명은 언청이요, 한 명은 곰보, 나머지는 절름발이, 곰배팔이, 장님, 귀머거리였습니다.

     

    ‘어떻게 저런 거지 영감들만 데리고 왔담?’

     

    조카 내외는 덕을 보기는 틀렸다고 생각하여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내외가 부엌에 들어가 탕탕 그릇 소리를 내며 소란을 피우자, 밥상 앞에 앉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사람까지 일어서려고 하자 진묵조사가 붙잡았습니다.

     

    “저를 봐서 한 숟갈이라도 드시고 가십시오.”

     

    그 말을 들은 마지막 사람은 밥 한술, 국 한 숟갈, 반찬 한 젓가락을 집어먹고 떠났습니다.

     

    모두 떠나 버리자 진묵조사가 안타까워하면서 혀를 찼습니다.

     

    “쯧쯧, 복 지을 인연을 이렇게 차버리다니 참 한심한 사람들일세. 그나마 마지막 분이 세 숟갈이라도 잡수셔서 앞으로 3년은 잘 살 수 있을 거다.”

     

    다음날 조카가 돼지 한 마리를 사게 되었는데 시세보다 많이 싸게 사 왔습니다. 그 돼지가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고, 몇 달이 지나자 집안에는 돼지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부유하게 잘 살던 조카는 어느 날 돼지우리에 불이 나서 모든 재산이 몽땅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인연을 귀하게 여기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는 일화입니다.

  • 진묵조사 (4) - 모기도 감동한 지극한 효심

    진묵조사가 일출암에 머물 때의 일화입니다.  

     

    진묵조사는 어머니를 일출암 아랫마을 왜막촌으로 모셔왔습니다. 출가한 수행승의 처지로 한 집에 모실 수는 없으나 절 가까이에서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에는 어머니가 밤잠을 제대로 못 주무실 정도로 모기가 많았습니다. 그때 진묵조사는 모기를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 그 뒤로는 마을에서 모기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조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정성스럽게 장례를 모시고 제문을 지어 올렸습니다. 

     

    "열 달 동안 태중에 품으신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슬하에 삼 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도 잊을 수 없습니다. 

     

    만 년에 또 만 년을 더하여도 자식 마음에는 부족한데 

    백 년 생애도 못 채우셨으니 어머니 수명은 어찌 이다지도 짧습니까? 

     

    표주박 하나로 걸식하는 이 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규중에 혼자 남은 누이는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제단에 올라 불공을 마친 스님들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앞산 뒷산 첩첩한 이 산중에 어머니 혼은 어디로 떠나셨습니까? 

     

    아! 애달프기 한이 없습니다.” 

     

    진묵조사는 만경들판에 어머니 묘를 모셨는데 마침 근처에 사는 논 주인이 오가며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해 풍년이 들어 농사가 잘 되자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모두 함께 나서서 어머니 묘를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진묵조사의 어머니 묘에 향불을 올리면 소원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 하여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하며, 후손이 없어도 향불이 꺼지지 않는 자리라 하여 풍수가들이 들르는 코스라고 합니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지극했던 진묵조사의 효심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 진묵조사 (3) - 천 리 떨어진 해인사의 불을 끄다

    진묵이 길을 가다 냇가에서 소년들이 물고기를 잡아서 끓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진묵이 솥을 들여다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잘 놀던 물고기가 이렇게 죄 없이 삶아지는구나.”

    한 소년이 스님도 드셔보라고 내밀자 진묵은 솥을 들어 단숨에 마셨습니다. 소년들은 고기를 먹은 스님을 땡땡이 스님이라고 놀렸습니다.

     

    진묵조사가 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었습니다.

    “너희가 죽인 물고기를 내가 도로 살려주마.”

    시냇물을 등지고 앉아 힘을 주니 물고기들이 쏟아져 나와 헤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묵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물고기들아, 큰 강으로 가서 다시는 삶아지는 고통을 당하지 말거라.”

     

    진묵이 급하게 물을 찾은 날이 있었습니다. 더운 뜨물을 갖다 주자 그것을 입으로 머금고 동쪽으로 내뿜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합천 해인사에 큰불이 났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대중들이 해인사에 난 불을 끄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지요. 얼마나 불길이 세던지 우왕좌왕하는데 난데없이 서쪽에서 소나기가 몰려와 불을 껐어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빗방울이 희끄무레하고 묻은 곳에는 얼룩이 졌습니다.”
    그 말을 들은 스님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전주 송광사와 부여 무량사 두 절에서 스님들이 찾아왔습니다. 부처님 점안식을 한다며 진묵을 모셔가겠다고 온 것입니다. 진묵은 자기가 둘 다 갈 수 없다며 송광사에는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주었고, 무량사에는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주었습니다.

    송광사에서는 스님이 앉는 자리에 주장자를 세워 놓으니 밤낮으로 꼿꼿이 서 있었습니다. 무량사에서도 염주를 자리에 놓으니 저절로 돌아가며 점안식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스님과 대중들은 진묵의 도력에 탄복하며 불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 진묵조사(2) - 8년 정진 끝에 대각을 이루다

    진묵조사는 불문에 귀의한 지 8년 만에 대각을 이루었다. [위 이미지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주지 스님과 희 노장은 어린 동자의 말에 껄껄 웃고 말았습니다.  

     

    원래 희 노장은 봉서사 주지를 지낸 스님이었는데 성격이 불같고 괴팍했습니다. 시봉하는 사미를 번번이 쫓아내는 바람에 겨울에 거처하는 방의 불도 손수 때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희 노장은 일옥을 자기 방에 데리고 들어가 저녁을 먹였고 그날 이후 일옥은 8년 동안 희 노장을 시봉하게 되었습니다. 

     

    주지스님은 일옥을 영리한 아이로 생각하고 신장을 모신 단에 향불을 올리고 예배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일을 맡기고 얼마 되지 않아 주지스님 꿈에 신장들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 모시는 것이 우리 신장의 할 일인데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향을 올리고 예배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발 다시는 아침저녁으로 예불하게 하지 마시고 우리가 마음 편히 지내도록 해 주십시오.” 

     

    봉서사 스님들은 어린 동자승을 남달리 보아 ‘작은 부처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희 노장이 입적하자 일옥은 삼년상을 지내고 난 후,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이름은 ‘진묵’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진묵이 200리 넘는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평야와 바다 사이에 우뚝 솟은 변산이었습니다. 봉래산 중턱에 자리 잡은 월명암은 신라시대(691년) 부설거사가 창건하여 가족이(묘화부인, 등운, 월명) 모두 수행하여 득도한 곳입니다. 월명사에서 진묵은 일체의 말을 끊고 묵언 정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8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오직 참선에 몰두했습니다. 

     

    낙조대에 앉아 수행을 하던 어느 날 석양 무렵이었습니다. 붉은 해가 서서히 내려오며 그 기운으로 바다를 시뻘겋게 물들이더니 진묵을 그대로 품어 안았습니다. 그 순간 진묵은 오랜 묵언 수행을 깨고 기뻐하며 소리치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습니다. 음력 칠월 보름 구순안거 해제 날 8년 적공 끝에 대각을 이룬 것입니다. 

     

    진묵은 깨달음을 얻은 뒤 궁벽하고 쇠락해가는 절을 주로 찾아다니며 민중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조선은 당파 싸움과 전쟁으로 극심한 혼란기였습니다. 진묵은 헐벗고 가난한 민중과 어울리며 그들의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부처님이라 불리며 그들의 의지처가 되었습니다. 초의선사가 쓴 <진묵대사유적고>에는 그와 관련된 신기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봉곡선생으로 불리던 유학자 김동준은 진묵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진묵스님에게 <주자강목>을 한 질을 빌려주며 사람을 딸려 보냈습니다. 스님은 걸어가면서 한 권씩 읽은 다음, 책을 떨어뜨리며 갔습니다. 따라가던 사람이 책을 모두 주워가지고 가서 봉곡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나중에 봉곡이 진묵을 만나 그 까닭을 묻자, 진묵이 대답했습니다. 

     

    “고기 잡은 뒤에는 고기 잡는 통발은 잊는 법이네.” 

     

    봉곡이 내용을 물어보니 진묵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내용을 꿰고 있었다고 합니다. (계속)

  • 진묵조사(1) - 부처가 되려 절에 왔다는 일곱살 아이

    우리나라의 고승 중 한 분인 진묵조사는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해 스님이 되었다. (이미지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출처 : 픽사베이)

    진묵조사는 조선의 대 선승으로 민중들이 살아있는 부처로 믿으며 따랐으며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진묵은 1562년 김제군 만경면 불거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일옥입니다.  

     

    일옥이 태어날 무렵 3년 동안이나 풀과 나무들이 시들자 사람들은 큰 인물이 날 징조라 했습니다. 일옥은 어릴 때부터 비린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마음이 어질고 총명하여 마을에서는 불거촌에 생불이 태어났다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5살에 여읜 일옥은 7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전주 서방산에 있는 봉서사로 출가했습니다. 서방산은 ‘서방정토’ 즉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라는 뜻입니다. 그 서방산 산봉우리들이 양쪽으로 휘감은 자락 안에 봉황이 깃든다는 봉서사가 자리했습니다. 

     

    어느 날 봉서사 주지 대월 화상이 칠순을 갓 넘긴 희 노장에게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밤에 석가모니불께서 천 이백 대중을 거느리시고 우리 절에 올라오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허, 아주 좋은 꿈을 꾸셨소. 귀한 손님이 오실 것이오.” 

     

    이 말을 들은 대중들은 마음이 설레어 도량을 쓸고 대웅전 큰 법당에서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나오는데 대웅전 마당에 칠팔 세 되는 동자가 서 있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이름은 일옥이고 일곱 살 먹었습니다.” 

    “어디서 온 동자인고?” 

    “네, 저의 집에서 왔지요.” 

     

    대중들은 웃으며 겨우 일곱 살 된 아이가 왔다고 떠들며 뿔뿔이 자기 자리로 흩어졌습니다. 그 자리에 주지스님과 희 노장만 남았습니다. 

     

    “어떻게 왔느냐?” 

    “어머니가 일주문까지 데려다주셨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고?” 

    “부처가 되려고 왔습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느냐?” 

    “스님은 숨 쉬는 것을 누구한테 배우고 아셨는지요?”(계속)

     

     

    진목조사(2)에서 이어집니다.

  • 개운조사(5) - 스승의 가르침과 이적

    그날 밤 노인은 조사를 데리고 희양산 중턱에 올랐습니다. 노인이 발걸음을 멈춘 곳에는 넓은 마당만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달빛이 낮처럼 밝았는데 바위 앞이 훤하게 트여 쾌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바위를 가리키며 스승이 일렀습니다.  

     

    “인재가 땅의 기운을 받아 명당의 자리에서 나는 것처럼 수행도 그러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바위 위에 올라서자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담한 암자 하나가 저절로 생긴 것이었습니다.  

     

    조사는 이 암자에서 스승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신이한 이적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끼니때가 되면 먹거리가 저절로 생겼고, 목마르다 싶으면 물이 생겼습니다.  

     

    조사의 신심은 100배나 솟구쳤습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지복의 환희심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조사가 할 일은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에 전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다만 한 가지, 아만(我慢)에서 벗어나 마음을 조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고 아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용맹 정진한 지 7일째 조사는 마침내 간혜지(乾慧地)를 증득합니다.  

     

    간혜지는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이 공통으로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의 첫 번째 단계를 말합니다. 온갖 욕망이 겉으로 일어나지 않고 욕망에 따른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경지가 간혜지입니다.  

     

    욕망은 잠재의식 속에만 남습니다. 탐진치(貪瞋癡,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삼독의 습기는 다했으나 아직 지혜가 부족하기에 마른 지혜 즉 건혜지라 일컫는데, 선정으로 이 부족한 지혜를 보충합니다. 

     

    조사가 간혜지를 얻자 스승이 책 두 권을 내려 줍니다. 그것은 <정본수능엄경> 과 <유가심인록>이었습니다. 

     

    “내가 보현존사(寶賢尊師)에게 구결로 받은 신해수증(信解修證)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진중하게 받들어 간수하라.” 

     

    조사는 공경하게 삼배를 올리고 스승이 내리시는 책을 받잡아 정수리 위로 올렸습니다.  

     

    다시 좌복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스승께서 말씀으로 전해주시는 대승(大乘)의 오묘한 경지를 하나하나 터득해나갔습니다. 

     

    스승은 내리고 제자는 받들고……. 전승이 끝나자 조사는 다시금 공손히 일어나 스승 앞에 100배를 올렸습니다. 사은의 절을 마치자 스승이 제자의 손을 어루만지며 작별의 말을 합니다. 

     

    “나는 이제 간다.” 

     

    말을 마치자 스승은 몸을 솟구쳐 새처럼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조사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한 배 한 배 스승이 사라진 허공을 보며 조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경히 100배를 올렸습니다.  

     

    스승을 전송하고 돌아오니 그동안 머물던 암자도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 개운조사(4) - 드디어 참 스승을 만나다

    봉암사로 돌아온 조사는 환적암(幻寂庵)에 머물며 불철주야 용맹 정진을 이어갑니다. 침식도 잊고 부처님께 오직 참 스승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기도나 참선 중에 온갖 이상한 현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납니다. 별의별 환상들이 다 나타났습니다. 환상은 현실처럼 생생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여자가 요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눈앞에 황금 덩이기 놓이기도 하고, 호랑이가 입을 딱 벌리고 다가오기도 하고,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기도 했습니다. 도적이 방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가 천상에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온갖 진귀한 음식들로 차려진 밥상이 불쑥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조사는 이러한 환상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리따운 여자의 요염한 자태를 보아도 무덤덤했습니다. 황금은 돌로 보였습니다. 호랑이가 나타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구렁이가 몸을 감아도 징그럽지 않았습니다. 도적들이 대갈통을 부수어버리겠다 호령하며 방망이를 휘둘러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산해진미를 보아도 먹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눈앞에서 온갖 환상들이 나타났다 스러지기 일 년여, 조사는 그저 고요한 마음으로 정진을 이어갈 뿐이었습니다. 

     

    어느 해 질 녘이었습니다. 웬 미치광이 중이 비틀걸음으로 환적암을 찾아왔습니다. 너덜너덜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온몸의 부스럼에서 진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옷과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부지깽이라도 들어 바로 쫓아냈겠지요? 하지만 조사는 이 비렁뱅이 노인을 안으로 맞아들여 극진히 봉양합니다. 

     

    그런데 이 거지 스님의 행패가 아주 고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툭하면 욕설을 퍼부으며 조사를 마구 때렸습니다. 조사는 그래도 화가 안 났습니다. 어떤 때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조사에게 칭찬의 말을 해댔습니다. 그래도 조사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조사의 마음은 그저 잔잔한 호수같이 고요할 뿐이었습니다. 

     

    거지 스님과 같이 지낸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밤중에 거지 스님이 조용히 조사를 불렀습니다. 

     

    “너는 정말 마음을 잘 비웠구나. 못살게 굴어도 화를 안 내고 칭찬을 해도 좋아하지 않으니 마음이 참으로 훌륭하게 닦이었구나. 틀림없이 크게 득도할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네가 부처님께 그토록 애타게 기원한 것이 무엇이더냐?" 

     

    조사는 이 노인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고 대답했습니다. 

    "참 스승님을 만나 부처님의 법을 잘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또 물었습니다. 

    “부처의 법을 배워 무엇 하려고?” 

     

    “생사를 뛰어넘는 대도를 이뤄 가없는 중생들을 구하고자 하옵니다.” 

     

    노인의 입에서 한없이 자비로운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내가 네 스승이 되면 어떻겠느냐?" 

     

    그 순간 조사는 이 노인이 자기가 그토록 만나옵기 간절히 바라던 큰 스승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조사는 거듭거듭 큰절을 올렸습니다. 

     

    “불감청이어든 고소원이외다. 부디 저를 제자로 삼아주소서.” 

     

    조사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렸습니다. 

     

    “일어나라. 너는 이미 내 제자다.” 

     

    노인이 따사롭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개운조사(3)-분주히 다니면서 신발만 닿게 하다

    "개운조사(2) 보러가기(클릭)"

     

     

    그러나, 자애로운 은사님 밑에서 연달이 피붙이들을 여의여야 했던 상처를 어루만지며 생사고락을 넘을 수행의 기초를 닦아나가는 것마저도 잠시, 조사가 입산한 지 1년 후 혜암 선사께서 열반에 드십니다. 참으로 조사의 삶에서 삶의 풍파를 막아주는 어른들의 안락함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요. 

     

    죽음을 이기는 방법을 배우고자 산으로 들어왔는데 이제 스승마저 돌아가시니 이제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은사 스님을 잃은 조사의 입에선 연신 장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 뼈 마디마디마다 무상함이 절절히 새겨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출가수행자의 몸으로 언제까지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조사는 그 후 다른 스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6년 동안 봉암사에서 경학과 참선 공부를 이어갑니다. 한 권 한 권 경학을 떼고 한 번 참선에 들면 밤을 넘기기가 일쑤……. 시간이 흐를수록 수행은 깊어갔지만 조사의 마음 한 켠 아쉬움은 달래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봉암사에서는 죽음을 초월한 스님도, 죽음을 이기는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스님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죽음을 넘어 자유자재한 삶에 이른 큰 스승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싶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러한 열망은 점점 더 깊어지고……, 조사는 마침내 스스로 스승을 찾아 봉암사를 떠납니다. 조사의 나이 19세 되던 해였습니다.

     

    조사는 이후 11년 동안 만행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조사가 찾던 스승은 없었습니다. 세월만 쉼 없이 흘러 어느덧 조사의 나이 서른, 어느 날 조사는 홀연 “공연히 쇠신만 닳게 하면서 분주히 돌아다니네.”라는 옛 선사의 시를 읽게 됩니다. 꼭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 길로 봉암사로 돌아옵니다.

     

     

    "개운조사(4)"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