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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운조사(2) - 나이 아홉에 4번의 죽음을 겪은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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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개운조사만큼 신비로운 일화를 많이 남기신 고승도 없을 것입니다.  

     

    조사는 1790년 경상북도 상주군 개운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속성은 김 씨였고 모친의 성은 양 씨 셨는데, 조사께서 모친의 태에 들 때 부모님께서 ‘태양 같은 금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 합니다. 

     

    조사는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천애 고아가 됩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어요.  

     

    다행히도 조사는 외삼촌댁에 몸을 의탁하게 되는데, 자식이 없던 외삼촌 부부는 어린 조카를 친자식처럼 정성껏 기릅니다. 하지만, 외숙과 외숙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속세의 행복을 맛보는 것도 잠시, 외삼촌께서 갑자가 돌아가시고 외삼촌의 3년 상이 끝나자마자 외숙모마저 세상을 뜨게 되니 그때 겨우 조사의 나이 아홉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천지 아래 붉은 몸뚱이 하나, 혈혈단신이 되고 만 것이지요. 

     

    조사는 혼자서 외숙모의 3년 상을 치렀습니다. 산소 앞에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까지 했다고 해요. 이 모습을 본 이웃 사람들은 조사의 효심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조사를 ‘양효동(楊孝童)’이라 불렀습니다. 외삼촌의 성이 양 씨이니, 마을 사람들은 조사를 ‘양 씨의 효자 아들’로 여긴 것이지요. 

     

    채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부모님과, 부모님과 진 배 없었던 외숙부모님을 차례로 여읜 조사의 외로움과 슬픔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것이었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길은 없지만 삶은 참으로 무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없을까요. 조사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에끼 이놈!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호통뿐, 조사는 어느새 마을에서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조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답을 찾지 못한 의문을 가슴에 깊이 품곤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물었습니다. “죽지 않는 길은 없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스님 한 분이 대답을 해 주십니다. 먼 옛날 ‘싯다르타’라는 태자가 어느 날 왕궁의 동서남북 사대문 밖으로 유람 차 나갔다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삶을 직시하고는 왕의 자리도 버리고 출가하여 큰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출가가 뭐예요?”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 중이 되는 것을 말한다.” 

     

    스님의 대답에 조사의 마음은 두둥실 부풀어 올랐습니다. 비로소 앞길에 광명이 비치는 기분이었을까요? 얼마나 기뻤던지 마치 ‘새 장에서 벗어난 새’와 같았다 합니다.  

     

    외숙모의 제사를 마치지 마자 조사는 바로 문경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찾아갑니다. 혜암 선사(慧庵禪師)를 은사로 모시고 머리를 깎으니, 그때 조사의 나이 열세 살이었습니다. 

     

    봉암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의 하나로, 보우국사를 비롯한 수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한 수행도량입니다. 오늘날에도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면 일반인에게 산문을 열지 않고 철저하게 청정한 수행 기풍을 이어오고 있지요. 

     

    조사는 바쁜 행자 시절, 짬만 나면 봉암사 마애불을 찾았습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 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 가지를 받치신 마애불의 묵묵히 내려앉은 눈동자를 따라가노라면 유리알처럼 맑고 찬 계곡물이 햇빛에 찬란하게 부서졌습니다. 그 빛을 받아 환하게 밝으신 마애 부처님 앞에서 조사는 오랜만에 어버이의 품에 안긴 듯 다사로움을 느꼈습니다. 밝고 환한 마애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 마냥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연달아 어버이를 여읜 슬픔도 씻겨 가고, 그 물을 따라 흐르면 영원히 생사의 고락을 벗어나는 길이 보일 듯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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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운조사(1) - 바위에 주먹으로 새긴 글씨 '동천(洞天)'

    경북 상주군 화북면 우복동 길가에 ‘동천’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습니다. ‘동천’은 흔히 신선이 살 만큼 경치 좋은 곳을 이르는 말이지요.  

     

    신기하게도 이 바위에 새겨진 글자의 총 길이와 바위 둘레의 길이가 오장(五丈)으로 같아 ‘오장비(五丈碑)’라고도 불립니다. 

     

    동천 바위 아래 표지판의 설명에 의하면 이 글씨는 조선 4대 서예가 중의 한 분으로 특히 초서에 능통하셨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31-1586)이 각자한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 글씨는 또한 18세기 상주에서 태어난 고승 개운조사가 새기신 것이라 회자되기도 하지요.  

     

    아마도 그것은 바로 개운조사께서 주석하신 『유가심인 정본수능엄경 환해산보기(瑜伽心印正本首楞嚴經環解刪補記)』(이하 ‘정본수능엄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으로 ‘동천(洞天)’이란 글자를 쓰고 

    손톱으로 ‘한좌(閑坐)’라는 글귀를 새기니 

    돌이 물렁한 흙처럼 부드러워서 

    나의 현명(顯名)을 받아들이네 

    맑은 물 흐르는 반석(磐石) 위에 

    용자(龍子)를 놀게 했노라. 

     

    조사께서 바위를 물렁한 진흙처럼 주물러 ‘동천’ 두 글자를 새기고 맑은 물 흐르는 반석 위에 용으로 하여금 놀게 하였다는 이곳은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도장산 자락을 흐르는 쌍룡계곡을 말합니다.  

     

    충주에서 문경으로 가는 이화령 터널을 빠져나와 가은과 농암을 지나면 쌍룡계곡에 닿지요. 직진하여 쌍용터널을 지나면 상주 화북면이고, 터널 앞에서 왼쪽으로 용추교(龍椎橋)를 건너 도장산(道藏山)에 안기면 개운조사가 머물며 『능엄경』을 주석하신 심원사(深源寺)에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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