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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변에 휩쓸린 사람을 구한, 따뜻한 "인간 사슬"

    한순간에 생명을 잃을 뻔한 남성이 "인간 사슬"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영국의 남부 쥬라기 해안에서 한 남성이 파도에 휩쓸렸고, 해변에 있던 수많은 관광객들이 "인간 사슬"을 만들어 남성을 구출했습니다.

     

    사고 당시, 이 남성은 해변에 있다가 갑작스럽게 몰아친 큰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이를 본 한 관광객이 바디 보드를 던져 남성을 구조하려 했으나, 막상 바디 보드가 남성에게까지 가지 못해 구조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에 해변에 있던 관광객들이 서로의 손을 잡아 "인간 사슬"을 만들었고, 그 상태로 파도를 헤치며 바다에 빠진 남성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사슬의 앞에 위치한 사람이 그를 끌어당겨 안전하게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해변을 관광하던 에밀리 푸트 씨는 "몇 사람이 구조를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었다" 라며, 많은 사람들이 인간 사슬을 만든 후에야 그를 구조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 100만명 마음을 사로잡은 7살 소녀 춤꾼의 사연

    이미지 : 중국 인민망

    최근 중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영상이 있습니다.

    바로 한 소녀의 춤 영상인데요.

     

    영상에서 소녀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신나게 춤을 춥니다.

    그런 소녀의 익살맞으면서도 현란한 춤사위와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녀의 불편해보이는 왼쪽 다리와 발입니다. 

     

    영상의 주인공은 올해로 7살이 된 중국 산둥성에서 사는 양쥔시입니다.

    쥔시는 낭창성 지방층염이라는 면역체계 이상으로 생긴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이 질환 때문에 두 살 때부터 쥔시의 왼쪽 다리와 발이 점차 변형되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3년 뒤에야 겨우 쥔시의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쥔시를 치료하기 위해 쥔시의 부모님은 집을 팔기까지 했고, 지금도 타지로 나가 쥔시의 치료비를 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쥔시가 익살맞은 춤을 추게된 것은 작년 4월 어른들이 다같이 춤을 추는 광장무를 보면서였습니다.

    광장무를 보고 춤의 매력에 푹 빠진 쥔시는, 하루도 안 쉬고 매일 밝게 웃으며 춤을 췄고, 그것을 촬영해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이런 쥔시의 영상과 사연이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 점차 퍼지게 되었고, 어느덧 쥔시는 구독자 1백만 명의 인터넷 스타가 됐습니다. 

     

    쥔시는 "춤을 추면 다리를 단련할 수 있고, 다리가 더는 위축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힘든 상황에서도 웃으며 춤을 춥니다.

    그런 쥔시의 장래희망은 "돈을 많이 벌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중국의 네티즌들 또한 "꿈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라며 그녀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 ‘1000 고아의 어머니’ 신두타이 삽칼

    이미지 : Gulf News 유튜브

    인도 푸네에 살고 있는 신두타이 삽칼은 ‘1천 고아들의 어머니’로 불리며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1968년부터 지금까지 1500명의 고아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구걸도 마다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인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가정을 꾸리면서 그에게는 282명의 사위와 49명의 며느리가 생겼습니다.

     

    교수,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보육원을 지어 운영하며 ‘어머니’의 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삽칼은 1948년 인도의 가난한 마을인 마하라슈트라주의 작은 마을 핌프리 메게에서 태어났습니다. 찢어진 옷이라는 뜻의 친디가 그에게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가난한 목동이었지만 딸을 학교에 보내길 원했습니다. 아내가 반대하자 그는 함께 소를 돌보겠다며 데리고 나가 몰래 학교에 보냈습니다. 삽칼은 필기용 석판을 살 돈이 없어서 나뭇잎에 글자를 적어가며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공부는 초등학교 4학년을 끝으로 그만둬야 했습니다.

     

    대신 삽칼은 인도 풍습에 따라 열 살 때 서른 살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19세에 이미 아들 셋을 뒀고 또 임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칩니다.

     

    삽칼이 사는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숲속에서 소똥을 모아 지주에게 연료로 팔고 있었는데 그가 여성들에게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난폭한 지주가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삽칼은 지주가 자신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앞장서서 이 일을 문제 삼았고 지방 관청을 움직여 마을 여성들이 소똥 판매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상대로 지주는 복수를 위해 남편을 찾아가 거짓말을 합니다. 삽칼이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고 자신도 그랬다는 겁니다. 뱃속의 아기도 누구 아이인지 모른다는 말도 했습니다. 삽칼을 죽이지 않으면 남편을 죽이겠다는 협박도 했고요.

     

    남편은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와 임신 9개월째인 삽칼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쓰러져 바닥에 쓰러지자 발로 배를 걷어찼지요. 그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짐짝처럼 끌고 가 소 우리게 던져뒀습니다. 소에 밟혀 죽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 있던 소 한 마리가 삽칼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소의 접근을 막았을 뿐 아니라 그가 죽었는지 살펴보러 온 사람들까지 쫓아냈습니다.

     

    삽칼은 외양간에서 딸 맘타를 낳고 돌멩이로 탯줄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준 소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가장 절박할 때 도움을 받았으니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삽칼은 핏덩이를 안고 친정으로 갔지만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기찻길 옆이나 길에서 노래를 부르며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힌두 사원을 찾아 먹을 것을 얻기도 했습니다. 잠은 근처 공동묘지에서 잤고요. 한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딸을 안고 기차선로 위에 지나가는 기차에 치여 죽으려고도 했습니다.

     

    길에서 걸식을 하면서 삽칼은 부모에게서 버려져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많이 많이 만났습니다. 자신의 먹을 것을 그 아이들에게 나눠 주면서 간신히 연명해갔습니다.

     

    그러던 중 삽칼의 삶에 큰 전환점을 주는 일이 생깁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그를 찾아와 물 한 모금만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는 곧 죽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온몸이 열로 펄펄 끓었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삽칼은 물은 물론 자신이 갖고 있던 음식까지 모두 그 사람에게 줬습니다. 곧 죽을 것 같던 그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바로 그 순간 신두타이는 자신이 평생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사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거리에서 만난 버려진 아이들을 품어서 키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노래를 부르며 구걸을 했고 그렇게 얻은 돈과 음식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수가 빠르게 늘자 그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 마을을 찾아다니며 기부를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푸네 마하라슈트라 등 4곳에 보육원을 지어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삽칼이 운영하는 보육원은 여느 보육원과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보육원은 18세가 되면 아이들을 독립시키지만 그는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얻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지내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삽칼을 어머니라는 뜻의 ‘마이’라고 부릅니다. 테레사 수녀 앞에 마더라는 말을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그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어떤 부정적인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삽칼의 사랑 속에서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자라 어엿한 성인으로 인도 사회의 구성원이 됐습니다.

     

    삽칼은 남편이었던 슈리하리 삽칼이 70살에 용서를 구하러 찾아왔을 때 그를 용서했을 뿐 아니라 가난 때문에 굶주리던 그를 보호소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은 이제 그가 자신의 가장 큰 아들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삽칼은 방문객들에게 그를 “가장 큰 아이”로 소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남편을 용서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헌신으로 신두타이는 지난 40년 동안 마더 테레사 상, 아마디야 무슬림 평화상 등 750여 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상금은 모두 고아들을 위한 시설을 짓고 교육하는 데 쓰였습니다.

     

    신두타이 삽칼의 감동적인 삶은 2010년 영화 ‘미 신두타이 삽칼’로 만들어져 런던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습니다.

     

    삽칼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도움을 준 아이들은 나중에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 것”이라며 “그것이 내 삶에서 이뤄낸 가장 귀한 성과”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