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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선, 세상을 바꾸는 특별한 재벌 3세

    주식회사 에이치지이니셔티브의 정경선 대표(33). 그는 재벌 3세임에도 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돕고자 하는 '체인지메이커'이다. [이미지 : KBS News 유튜브 캡처]

    정경선(33) 씨는 현대그룹을 만든 고 정주영 회장의 손자입니다. 아버지는 현대해상화재보험의 정몽윤 회장이고요. 재벌 3세이지요. 

     

    하지만 그는 재벌가의 ‘돌연변이’로 ‘딴짓’을 하는 특별한 사람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기업을 물려받기 위한 경영 수업 대신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돕는 게 그의 본업입니다. 

     

    클 경(京), 베풀 선(宣)이라는 이름에서 그의 인생이 짐작된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정경선 씨는 2012년 비영리사단법인 루트임팩트를 만들어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나이 26살 때였습니다. 2년 뒤에는 사회의 혁신적 변화를 추구하는 벤처기업을 도우려 소셜 벤처 투자회사 HGI를 만들었습니다. 

     

    정 씨의 공식 직함은 루트임팩트의 최고상상책임자이자 HGI의 대표입니다. 

     

    HGI 홈페이지에는 “모든 사람들이 가치 기반의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고 적혀 있습니다. “가치 기반의 라이프스타일을 위해 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소셜벤처를 돕는” 것이 미션입니다. 

     

    HGI는 체인지메이커를 지원하는 일을 주로 합니다. 체인지메이커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이 돌봄 매칭 플랫폼 ‘째깍악어’, 공유 주방 위쿡, 친환경 플라스틱 원료 개발 기업 ‘테코플러’, 위안부 할머니와 연결된 디자인 및 소품 제조 회사 ‘마리몬드’ 유아 전문 UX 디자인 회사 ‘키두(KIDU)’ 등이 HGI가 투자한 곳들입니다. 

     

    정경선 씨는 그 자신이 체인지메이커이지만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관심이 많습니다. 2018년 12월에는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체인지메이커 20명을 인터뷰한 책 <당신은 체인지메이커입니까?>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저자인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체인지메이커를 돕는 재벌 3세로 화제가 된 체인지메이커. 대학에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아산나눔재단 창립 멤버 및 NPO 사업팀장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헌신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체인지메이커들이 행복하게 일해야 사회가 조금 더 빠르게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2012년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를, 2014년 임팩트 투자사 HGI를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음과 동시에 루트임팩트의 CIO(Chief Imagination Officer)이자 HGI의 대표로 일하며 국내외 다양한 파트너들과 함께 임팩트 생태계 확장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정 씨가 성수동에 세운 8층 건물 헤이그라운드는 체인지메이커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스타트업이 모여들고 있고 소셜 벤처의 ‘메카’가 됐습니다. 80여 개 회사가 입주해 있고 상주하는 인구만 500명이 넘습니다.

     

    [[IMAGE|284|center|정경선 대표가 성수동에 세운 헤이그라운드. 체인지메이커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는 소셜 벤처의 ‘메카’이다. [이미지 : 루트임팩트 홈페이지] ]]

     

    금수저 중의 금수저로 태어난 정경선 씨는 어떤 생각으로 체인지메이커가 된 것일까요? 언론을 통해 알려진 그의 생각을 모아봤습니다. 

     

    “저는 남들이 평안해야 나도 평안하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선의로 대하면 상대방도 선의로 갚는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군대에서 흔들렸습니다. 카투사로 군 생활을 했는데 선임장교가 저를 무척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그때 사회적 선의를 지닌 청년들이 홀대받는 현실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체인지메이커는 대단한 게 아닙니다. 신념이 굳은 사람이 사실 가장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거창한 일을 하기보다 일회용 컵 좀 덜 쓰고 공정무역 제품 구매하는 그런 분들이 중요한 체인지메이커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인 정주영 회장님은 저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할아버지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았는데 그때 많이 배웠어요. 할아버지는 지역사회교육협의회라는 비영리단체 이사장을 하셨는데 아무리 바빠도 꼭 챙기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말씀 중에 꼭 새기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나는 자본가가 아니라 부의 청지기다. 개인이 100억 원을 가지면 자기 재산일 수도 있지만 1000억 원이 넘어가면 그 사람 재산이 아니다. 사회가 그에게 맡긴 거다.” 

     

    집안에서는 처음에는 제가 하는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최근에는 너 같은 애가 있어서 좋다고들 하십니다. 

     

    행복은 지속 가능한 감정이 아니라 집착하면 불행해집니다. 친구들과 두루 잘 지내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와인 마시면 만족감이 커집니다. 

     

    제가 하는 일을 재벌 3세의 딴짓을 가식이나 위선으로 오해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되묻고 싶습니다. 모든 재벌 3세는 다 똑같을까요? 

     

    저는 재벌 3세가 아니라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정경선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꿈꿉니다.  

     

    그 사회는 우리를 쓸모로 평가하고 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고 다양한 개성을 존중받으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신의 꿈을 만들어가는 사회입니다.”

  • 아이들의 좋은 심성을 기르는 법

    미국의 작가이자 육아상담가로 활동했던 도로시 로 놀테는 시와 글, 강연 등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자녀를 기르는 데 영감을 줬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배운다(Children learn what they live)’는 시는 특히 유명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criticism, they learn to condemn.

    야단맞으며 자라는 아이는 비난하는 것을 배웁니다.

     

    If children live with hostility, they learn to fight.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는 싸움을 배웁니다.

     

    If children live with fear, they learn to be apprehensive.

    두려움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pity, they learn to feel sorry for themselves.

    동정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자기 연민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ridicule, they learn to feel shy.

    놀림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는 수치심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jealousy, they learn to feel envy.

    질투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시기심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shame, they learn to feel guilty.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라는 아이들은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encouragement, they learn confidence.

    격려를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tolerance, they learn patience.

    관대함 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인내심을 갖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praise, they learn appreciation.

    칭찬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acceptance, they learn to love.

    포용하는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approval, they learn to like themselves.

    무엇이든 허용되는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recognition, they learn it is good to have a goal.

    인정받으면서 자라는 아이들은 목표를 갖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sharing, they learn generosity.

    나눔을 보며 자라는 아이들은 관대함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honesty, they learn truthfulness.

    정직함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진실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fairness, they learn justice.

    공정함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정의를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kindness and consideration, they learn respect.

    친절과 배려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다른 이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security, they learn to have faith in themselves and in those about them.

    안정감을 느끼며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If children live with friendliness, they learn the world is a nice place in which to live.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 세상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 “엄마, 친구가 하늘나라 갔대”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 코너에 12월10일에 실린 글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금요일 오후였다. 다른 것이라고는 늘 비가 오는 이곳 캐나다 밴쿠버의 겨울답지 않게 무척이나 화창하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처럼 비가 갠 주말을 어떻게 즐길까 고민하며 아들을 맞으러 학교에 갔다. 학교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학부모들. 멀찍이 바라봤을 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때 학교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활짝 웃으며 다가가는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평소 금요일이라면 주말에 놀 생각에 더 활짝 웃으며 나오던 아이가 아니었던가. 아들은 나를 보자마자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진짜 슬픈 소식이었어. 진짜, 진짜, 진짜 슬픈 소식이야. 그 친구가 하늘 나라에 갔대."

     

     

     

    [[IMAGE|228|center|caption]]

     

    느닷없는 비보

     

     

    그 친구라 함은, 지난 학년부터 아들과 한 반이었던, 9월에 시작된 새로운 학년에 첫 짝궁이었던 그 친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근무력증을 앓고 있어 휠체어에서 생활했고, 옆에는 장애학생 지원 선생님이 늘 함께 했지만, 아들의 그 친구는 학교생활에 대부분 참여했었다.

     

    통합교육이 원칙인 이곳 캐나다에서 아이들은 조금 더 몸이 불편한 학생들과 생활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이 친구도 학급 활동에 늘 함께 했다. 지난해 그 친구의 생일 땐 반 전체에서 작은 축하파티도 열었었다. 반에서는 혼자 책을 읽기 힘든 이 친구에게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읽어주곤 했는데 두어 달 전 아들은 자신이 책 읽어줄 차례라며 영어발음을 연습해 갔었다. 몇 주 전 자원봉사로 따라간 현장학습 때도 장애학생 지원 선생님과 함께 참가했던 아이였다.

     

    내게도 충격이었다. 순간 눈물이 쏟아졌고, 먹먹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주친 선생님들의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아들과 같은 반 친구들 중 몇몇도 눈가가 촉촉했다. 아이를 픽업하러 온 부모들 중 몇 명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마음이 조금 추스러지자, 아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들에게는 처음 겪는 상실. 그것도 2년 동안 같은 반을 했던 친구가 10살의 나이에 하늘나라에 간 것을 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아들에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담임선생님이 건넨 종이

     

     

    아들이 비보를 접한 것은 등교하자마자였다. 교실에 들어온 담임선생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몇몇 친구들은 곧바로 눈물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어 담임선생님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종이를 꺼내며 아이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 종이를 둘게요. 수업 도중에라도 마음이 힘들고 슬픈 기분이 들면 언제든지 가져다가 쓰고 싶은 것을 아무 거나 쓰세요. 그림을 그려도 되고, 하늘나라에 간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도 되고, 너무 슬퍼서 화가 나면, 화나는 마음을 표현해도 돼요. 그리고 수업 중에 갑자기 눈물이 나거나, 도저히 수업에 집중이 안 될 땐 도서관에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울고 와도 돼요."

     

    아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이날 그 어떤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수업에 집중하라거나, 이럴 때일수록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도, 그 친구를 위해서 우리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느꼈을 심리적 충격을 이해해주고 그 슬픔을 충분히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함께 울어줄 뿐이었다. 선생님들 역시 슬픔을 숨기지 않았다.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오늘은 마음이 너무 슬퍼서 수업하기가 힘들다"고 아이들에게 털어 놓았고, 지원 나온 대체교사가 이날 수업시간에 함께 했다.

     

    상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심리적으로 깊은 충격과 슬픔을 남기는 경험이다. 특히, 어린 시절 생애 처음으로 겪는 상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여러 차례 맞닥뜨리게 될 또 다른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해 준다.

     

    상실을 맞닥뜨릴 때 정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슬픔을 충분히 표현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 안에서 밀려오는 슬픔을 힘들다고 해서 부인하거나 '괜찮다'고 포장해 버리면, 그 슬픔은 마음 더 깊은 곳으로 꽁꽁 숨어들어간다. 숨어든 슬픔은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오랫동안 일상을 방해하곤 한다.

     

    이런 면에서 선생님의 대처를 듣자 안심이 되었다. 이날 아들과 반 친구들은 수시로 종이를 가져다가 슬픔을 표현했고, 도서관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한바탕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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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장선생님의 메일 한 통

     

     

    그리고 그날 오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교장선생님은 전체 학부모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다시 한 번 비보를 공식적으로 전했다. 그리고 당부했다.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이 다른 이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뜻을 존중해 달라고. 유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말이다. 

     

    이어 교장선생님은 학교는 신속히 밴쿠버 교육청의 위기지원팀(VSB Critical Support Team)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교육청의 위기지원팀은 학교 공동체에서 재난이나 구성원의 죽음 등 정신적인 상처를 남기는 일이 발생했을 경우, 심리적 문제를 비롯한 각종 어려움들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한다.

     

    학생뿐 아니라 슬픔에 빠진 선생님들도 돕고, 때로는 대체 인력을 파견하기도 한다. 충격과 슬픔에 빠진 학교를 체계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제든 아이들이 들를 수 있도록 상담센터를 열어 두었고, 학교와 교육청 소속의 상담사들이 도움을 제공할 채비를 마쳤다고 알렸다.

     

    또한 교장선생님은 강조했다. 이번 일로 인해 아이들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물을 때 주의 깊게 들어주고 정직하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나아가 학교에서도 언제든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 묻고 이야기 하며, 슬픔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집에서도 함께 해달라고 당부했다.

     

    교장 선생님이 보낸 메일을 보니 여전히 먹먹한 나의 마음이 조금은 따스해지는 듯 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터부시하지 않고, 삶의 일부분으로 죽음을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자세, 상실을 경험할 때 생기는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 유가족들을 존중하는 태도, 공동체 차원에서 상처를 극복해 가려는 노력. 아들의 학교는 가슴 아픈 상실을 경험할 때 반드시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차근차근 해내며 애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모습들은 친구를 잃은 경험이 나와 내 아이를 비롯, 그 친구와 가까워 충격과 슬픔이 더 큰 몇몇만이 스스로 감당해내야 할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은 시린 마음 한 켠에 훈훈함과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물론, 아무리 함께하고 서로 위로하더라도 상실을 경험해내는 것은 분명 힘들고 아픈 일일 것이다. 그 충격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육청까지 나서 함께 슬픔을 나누고 도우려는 모습들을 보니 이를 통해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그리고 학부모들도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애써 축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며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분명 이 슬픔을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친구가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길, 유가족들에게도 평화가 함께 하길 기도드린다.
     

  • 떼제, 청년들의 영혼의 쉼터

    떼제공동체에서 기도 중인 청년들. 이미지 출처 : 플리커 (TaizéBirmingham), 퍼블릭 도메인

    “우리가 지금 온 대륙의 젊은이들과 함께 신뢰의 순례를 해 나가는 것은 평화가 얼마나 시급히 필요한지를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물음에 답하려고 노력할 때 평화를 이룩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사는 곳에서 신뢰를 간직하고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이해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떼제공동체 창설자 로제 수사)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분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하늘색 십자가를 본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둘기가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상징한 이 십자가가 공동체의 상징 떼제 십자가입니다. 

     

    [[IMAGE|198|center|떼제공동체를 상징하는 푸른 십자가. 출처 : 위키미디어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roix_de_Taiz%C3%A9.jpg), CC BY-SA 라이센스]]

     

    1940년 8월 한 청년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동부 프랑스 부르고뉴 남부 지방의 작은 마을 떼제(Taize)를 찾았습니다. 그 해 6월 14일 프랑스 파리가 함락된 지 두 달쯤 되는 때였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청년 로제는 전쟁이라는, 사람이 벌인 가장 잔인한 행위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화해와 일치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꿨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해 전쟁을 막고 인류가 한 가족처럼 지내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떼제를 찾은 이유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바로 그곳에 그런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도망자를 숨겨주는 일이었습니다.  

     

    로제에게 가장 먼저 눈에 뜨인 사람들은 나치 독일의 점령지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껴 도망 나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반대의 처지에 놓인 독일군 포로들을 맞았습니다. 젊은이들의 영성 공동체 떼제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떼제가 공동체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9년입니다. 로제와 뜻을 함께 하는 일곱 명의 청년들이 찾아와 독신 생활과 물질적 영적 재산의 공유 등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종신서원을 하면서 공동체 식구들이 생겼고 1952년에는 떼제의 규칙이 만들어집니다. 어떤 기부나 헌금도 받지 않고, 가족의 상속도 받지 않으며, 스스로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하고 나눔을 실천한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평생 단순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차츰 그들의 뜻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공동체에는 지금 공동체에는 20여 개 나라에서 온 1백 명가량의 수사들이 살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출신도 있고, 개신교회 출신도 있습니다. 

     

    떼제에는 1950년대 말부터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로제 수사를 비롯한 공동체 식구들은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이 머물면서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 정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때부터 손님맞이는 떼제의 주요한 부분이 됐습니다.  

     

    지금은 1년 내내 유럽은 물론 다른 대륙에서 찾아온 젊은이들이 떼제를 찾습니다. 한 주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요일에서 다음 일요일까지 1주일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떼제의 정신을 경험합니다.  

     

    이들은 1962년 세워진 ‘화해의 교회’에서 하루 세 차례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기도를 하고 소그룹으로 나눠 대화하는 시간도 갖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아지자 몇 해 전부터 가톨릭 국제공동체인 성 안드레아 수녀회와 폴란드의 우술라 수녀회에서 ‘젊은 순례자’들을 맞는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젊은이들과의 모임은 떼제공동체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사들은 유럽은 물론 다른 대륙을 찾아다니며 크고 작은 모임을 이끕니다. 이는 지구촌에 믿음에 바탕한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신뢰의 순례’입니다. 이들 모임에서 떼제공동체 수사들은 젊은이들이 자기가 사는 바로 그곳에서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도록 돕고 격려합니다. 

     

    가장 큰 모임은 떼제공동체가 매년 말 유럽에서 여는 ‘테제 유럽 젊은이 모임’(Taize European Youth Meeting)입니다. 하지만 이 행사에는 유럽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만 명의 젊은이들 참여합니다. 2004년 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행사에는 8만 명의 젊은이들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올해 행사는 12월 28일부터 2006년 1월 1일까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립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오지만 떼제는 자신을 중심에 두는 법이 없습니다. 떼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직은 하나도 없습니다. 대신 동네, 마을, 도시, 교회, 성당 등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속한 곳에서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떼제공동체가 세계 곳곳을 찾아가며 벌이고 있는 ‘신뢰의 순례’는 그런 젊은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획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1979년 다섯 분의 수사들이 파견되어 서울 화곡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26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한국의 교회와 젊은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화해와 일치의 지구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떼제공동체. 이들의 꿈이 자랄수록 지구촌에는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 20대에 '수백명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다.

    "전 우리 모두가 이 세계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 하나로 20대에 '수백 명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블링크나우(BlinkNow) 재단의 창립자인 매기 도인(Maggie Doyne)은 네팔의 내전으로 고아가 된 49명의 아이들의 법적 후견인입니다. 

    또한, 네팔에 코필라 벨리 스쿨(Kopila Valley School)이란 학교를 세워, 380명 이상의 아이들을 무료로 교육시키는 등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도인이 자신의 삶을 네팔의 아이들을 돕는 데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2006년, 네팔을 여행하다 두 소녀를 만난 것이 계기였습니다.

     

    당시 18살이었던 도인은 장래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도인은 자신의 미래를 찾기 위해, 자아성찰 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세계를 여행하기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도인은 네팔에서 라코라(Lacora)라는 매우 어린 소녀를 만납니다.

     

    라코라는 네팔의 고아 중 한명이었습니다.

    라코라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하루종일 무거운 짐을 버스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머리에 이고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은 겨우 하루에 1~2달러였습니다. 

    네팔 고아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그는 "이 아이들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같은 인류로서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도인은 히마(Hema)라는 소녀도 만납니다.

    당시 6살이었던 히마는 마른 강바닥에서 돌을 깨고 그것을 팔아서 얻은 몇 루피의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고아였습니다.

    "전 세계의 고아는 도울 수 없겠지만, 이 아이 한명은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도인은 히마의 학비, 교복, 교재비 등을 지불하면서 그녀가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히마를 도우면 도울수록, 도인의 마음속에는 다른 고아들도 돕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싹텄습니다. 

    날이 갈 수록 도인은 고아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집, 마음껏 배울 수 있는 학교,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마을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7년, 도인이 19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블링크나우(BlinkNow) 재단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12살부터 18살까지 6년간 용돈으로 조금씩 모아뒀던 5000달러와 함께, 전 세계에서 기부를 받아 코필라 벨리(Kopila valley)의 땅을 일부 구입했습니다.

     

    그 해에 도인은 그곳에 '코필라 벨리 어린이의 집(Kopila Valley Children's Home)'을 열었으며, 네팔의 고아들을 한명 두명 입양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에는 코필라 벨리 스쿨(Kopila Valley School)을 세웠으며, 이후 병원, 자매의 집 등 아이들이 질병, 범죄 등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시설들을 차례로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도인의 노력은 조금씩 전 세계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에는 '25 세 이하의 젊은이들이 지역 사회와 세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사람'을 선정하는 두 섬씽 어워즈(Do Something Awards)에서 대상을 받아 10만 달러를 수상했으며, 2013년에는 포브스(Forbes)의 교육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2014년에는 달라이 라마가 선정하는 '알려지지 않은 자비의 영웅(Unsung Hero of Compassion)'으로 선정됐고, 2015년에는 CNN에서 선정한 '올해의 영웅(Hero of the Year)'에 뽑혔습니다. 

     

    "이 아이들을 만났음에도 아이들을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사는 것 보다는, (아이들의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서든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 당시에 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방법인지,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등등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이러한 삶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인은 자신의 집에서 49명의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도 재밌고, 그 곳이 자신을 위한 조그마한 파라다이스라로 합니다.

     

    도인은 현재의 코필라 벨리 캠퍼스를 대체할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엔지니어, 건축가, 개발자 및 환경 전문가 팀이 지속 가능한 녹색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고 있으며, 그 넓이는 1만 2140 제곱미터 (약 3672평)에 달합니다. 새로운 캠퍼스의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직업 센터까지 있으며, 500명의 학생들을 위한 18개의 강의실로 이뤄집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음식을 식량을 제공할 농장과 과수원도 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아이들을 도우려는 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 수록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와 사람을 돕는 데 있어서는 모든 이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인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교육을 잘 받았고, 자유롭고, 능력이 있고, 안전하다면, 당신의 힘을 당신과는 달리 가지지 못한 우리 인류 가족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전 우리 모두가 이 세계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기독교 성자 썬다 싱(4) - 신비체험을 남기고 사라지다

    썬다 싱은 22세인 1911년부터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합니다.

     

    기독교 전통이 거의 없는 인도와 티베트에서 썬다 싱의 전도 활동은 쉽지 않았습니다. 복장을 보고 사두로 여겨 존경을 표하던 사람들도 그가 기독교인임을 알고 나면 외면했습니다. 

     

    굶주림이 일상이었습니다. 추위에 몸이 얼고 더위에 지쳐 주저 앉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썬다 싱은 인도 대륙을 횡단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박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경찰이 그를 감옥에 가둔 채 거머리 때를 풀어 놓기도 했고, 시체가 썪고 있는 우물에 던져져서 팔이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썬다 싱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발길은 티베트로도 향했습니다. 서른살이 될 때까지 티베트 방문을 위해 열 번이나 히말라야를 넘었습니다. 

     

    썬다 싱은 기독교의 본고장이던 서구 여러 나라에도 전도를 위해 방문했습니다. 1920년과 1922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아일랜드,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을 다니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썬다 싱은 기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기도 중에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체험도 했다고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썬다 싱이 경험한 상태를 입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썬다 싱이 신비현상을 체험한 것은 1922년 티베트에 가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눈으로 길이 막혀 꼼짝 못하게 되어 기도를 하던 중 자신이 천사들 무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자신이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에 온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썬다 싱은 이를 시작으로 이런 신비 체험을 자주 하게 됐습니다. 

     

    썬다 싱은 영안으로 보이는 존재에게 궁금한 점을 묻기도 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며 영혼은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썬다 싱이 영안으로 본 존재들로부터 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죽음은 잠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질병이 없다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오는 데 아무런 고통도 없습니다. 마치 몹시 피곤한 사람이 깊이 잠드는 것처럼 인간은 죽음이라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죽음은 너무나 뜻밖에 찾아오기 때문에 죽은 이들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들어간 것을 알아채기조차 힘듭니다. 그들은 충분히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이 육체가 아니라 영체이며 자신이 물질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옮겨온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죽을 때 무지각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죽은 뒤에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사납고 무서운 악마들의 얼굴을 보고 말도 못하고 공포에 떨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이들의 죽음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을 맞으려고 오는 천사들과 거룩한 영들을 보고 극도의 행복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때 먼저 죽은 사람들도 그를 영계로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썬다 싱은 1924년 또 다시 티베트로 향했으나 얼마가지 못해 돌아오게 됩니다.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영양실조 상태였고 폐결핵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2년 동안의 서구 전도 여행으로 피로도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의사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썬다 싱은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몸을 추스리면서 글과 편지를 통해 전도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28년 썬다 싱은 다시 티베트로 향합니다. 하지만 며칠 뒤 길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다 상인들에 구출돼 돌아옵니다.

      

    이듬해인 1929년 그는 다시 티베트에 가겠다면서 길을 나섭니다. 그 뒤로 썬다 싱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으러 나섰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썬다 싱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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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성자 썬다 싱(2) - 성자 마하리쉬 만나다

    예수님의 현현은 썬다 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습니다. 썬다 싱은 그 순간부터 평생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시크교도인 아버지와 가족 친지들은 썬다 싱의 그런 변신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해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은 썬다 싱에게 싸준 점심밥에 독약을 넣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썬다 싱은 성공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 일을 도우며 틈날 때마다 고요히 묵상을 했습니다.

     

    그렇게 33일이 지난 뒤 썬다 싱은 사두로서 길을 나섰습니다. 사두는 인도에서 집을 떠나 길에서 생활하는 수행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듬해 썬다 싱은 코드갈이라는 곳에서 스토크스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청빈한 삶을 살고자 인도에 온 사람이었습니다. 썬다 싱은 그와 2년 동안 동행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가르침을 알게 됐고 이를 통해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습니다.

     

    썬다 싱은 전도 여행 중에 귀한 만남을 가집니다. 그가 힌두신들이 자주 나타난다고 알려진 성산 카일라스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돌십자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힌두교의 성산에 십자가라니.

     

    그는 십자가의 ‘주인'을 찾아 주변을 다니다 몸의 균형을 잃고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지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얼마를 지났을까 의식을 되찾고 보니 큰 동굴 입구에 백발로 전신이 뒤덮인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노인의 모습은 기괴했습니다. 머리카락과 수염과 눈썹이 길게 자라 온몸과 얼굴을 덮고 있어서 얼핏 봐서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야생 곰이나 전설의 히말라야 설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마하리쉬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성자는 당시 자신의 나이를 318세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원래 이슬람교도였으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수회 신부인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조카  제르나우스자비에르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첫 만남에서 그는 썬다 싱에게 함께 기도하자면서 자비에르가 줬다는 양피지 신약성경을 꺼내더니 썬다 싱에게 산상수훈을 읽어줬습니다. 마하리쉬는 이 양피지 성경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썬다 싱에게 선물로 줍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하리쉬는 그동안 썬다 싱이 겪은 일들을 직접 본 듯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표범과 함께 밤을 지낸 일, 산길에서 굴러떨어진 일 등등.

     

    마하리쉬는 썬다 싱에게 천국과 지옥, 삶과 죽음, 죽음 뒤의 세계 등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썬다 싱은 마하리쉬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웠고 텅 빈 마음에 사랑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베푸는 일에는 머뭇거림이 없었습니다.

     

    썬다 싱이 열 번째 히말라야를 넘을 때였습니다. 티베트 사람 한 명과 길을 가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폭설로 산길이 모두 막힌 데다 눈보라가 쳤습니다.

     

    두 사람은 길을 가다 눈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사람은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썬다 싱은 그 사람을 업고 가자고 했지만 동행인은 그러다가 우리도 함께 죽는다며 혼자 길을 재촉했습니다.

     

    썬다 싱은 그 사람을 들쳐 업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길을 헤쳐나갔습니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몇 시간을 지났을까 길에서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봤습니다. 얼어 죽은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함께 길을 갔던 티베트 사람이었습니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사람을 업은 썬다 싱은 힘이 들어 몸에 열이 났고 그 열기가 얼어서 죽어가던 사람에게 전달되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썬다 싱도 힘은 들었지만 몸에서 나온 뜨거운 열기로 히말라야의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이지요.(계속)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1)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3)

  • 기독교 성자 썬다 싱(1) - 예수님의 현현

    이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 없는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썬다 싱은 인도와 티벳 등지에서 복음을 전한 기독교의 성인입니다.

     

    썬다 싱은 예수님이 전한 가르침이 빛을 잃고 많은 교회와 성직자가 제국주의의 조력자로 전락한 시절에 말씀만을 가슴에 품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인도의 사두(수행자)처럼 머리에는 터빈을 쓰고 몸에는 누런 가사를 걸치고 맨발로 걸식하며 인도 전역과 티베트에서 복음을 전한 그가 한평생 의지한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었습니다.

     

    썬다 싱은 1889년 인도 북부 펀잡주 람풀에 있는 부유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시크교도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집안을 돌보고 자녀를 키우는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썬다 싱은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학교는 바로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를 존경했습니다.

     

    종교적 분위기가 충만한 가정에서 썬다 싱은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사원에 다니며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를 외웠으며 베다를 익혔습니다. 요가도 배우고 이슬람 경전인 꾸란도 읽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영국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면서 성경도 접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썬다 싱이 14살 이 되었을 때 그의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썬다 싱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경험한 어떤 종교도 위로가 되지 않자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학교에 다니던 썬다 싱은 믿음을 강조하는 학교와 교사들이 싫어졌고 성서읽기를 거부하고 수업에도 빠지는 등 ‘문제 학생’이 됐습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공립학교로 전학시켰지만 그는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했습니다. 전도를 하던 이들에게 돌이나 오물을 던지기도 하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가량 살던 썬다 싱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고 하늘을 향해 마지막 기도를 시작합니다. “신이 계시다면 나타나 바른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아니면 저는 첫 열차가 지나갈 때 레일 위에 누워 자살할 것입니다.”

     

    썬다 싱은 죽을 결심을 하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죽음의 시간이 조금씩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고 첫 열차가 오면 그는 세상을 떠날 것이었습니다.

     

    새벽 4시쯤 됐을 때 갑자기 방안이 눈부신 빛으로 가득찼습니다. 썬다 싱은 처음에 불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빛나는 광채 속에서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썬다 싱은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마음은 환희심으로 가득찼고 평화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얼마나 엎드려 있었을까 썬다 싱은 고개를 들었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계속)

     

     

     

    바로가기(클릭) : 기독교 성자 썬다 씽(2)

  • 1000일 동안 친절을 베푼 사업가에 찾아온 변화

    무려 1000일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친절한 행동’을 해온 여성이 있습니다.

     

    영국의 다니 세이브커(Dani Saveker)는 2016년 1월 1일부터 ‘누군가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행동’을 1000일 동안 꾸준히 했습니다. 

     

    세이브커가 1000일 동안 베푼 친절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날은 지인의 출산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보내기도 했고, 어떤 날은 모르는 사람의 차 문에 과자와 좋은 말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 두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SNS에서 처음 본 불행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물을 보내기도 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그들을 도우러 가기도 했습니다. 어린이 병원을 비롯한 다양한 기관에 기부도 했습니다.

     

    1000일 동안 친절을 베푸는 일을 이어갔지만 처음부터 진심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소기업 컨설팅 회사 GLAS(Global Life Alignment System)의 대표인 그는, 우연히 ‘친절함이 성공적인 리더십의 핵심요소’라는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사회에서 친절함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매일 빠짐없이 친절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연구를 위해 시작한 행동이었지만 그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고 사심 없이 베푼 친절이 누군가에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1년 후, 그는 ‘단순한 연구’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베풀기로 결심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친절’은 예외 없이 모두에게, 어떤 기대도 없이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을, ‘자신이 먼저 시작하는 것’입니다. 친절은 나이, 성별 및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비즈니스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세이브커는 자신의 친절이 다른 이들에게 ‘나와는 다른 누군가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최고로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친절을 받은 사람이 그 결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세 자녀도 친절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면서 그것은 시험 결과가 좋은 것보다더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세이브커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매일 친절함을 베푸는 행동’을 하기를 바라며 한가지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지난 9월 26일, 그녀가 친절을 베푼 지 1000일째를 기념해 ‘친절함을 격려하는 팩(Inspire Kindness Packs)’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팩에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 같은 ‘친절을 베풀 때 매우 유용한 아이디어’가 포함된 키트가 두 개 들어있습니다. 두 개의 키트 중 하나는 구매자 가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수 있습니다. 팩의 구입 비용은 6.95파운드(한화 약 1만 300원)이며, 수익은 모두 정신건강 자선단체인 헤드 투게더(Head Together)에 기부됩니다.

  • 성 안토니오 “곧 죽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라”

    “사람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업적이나 기적을 통해서도 아니고, 더욱이 일차적으로 금욕을 통해서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겸손을 통해서입니다.”


    성 안토니오(또는 안토니우스)는 사막의 성인, 은수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분입니다. 수도 생활의 창시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251년쯤에 이집트 중부 나일 강가에 자리한 도시 헤라클레오폴리스 근처의 코오마(Cooma)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무엇보다 혼자 조용히 있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성인이 스무 살쯤 됐을 때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으나 어느 날 교회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접하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합니다.


    청년 안토니오는 부모님으로부터 상속받은 100헥타르(약 30만 평)의 기름진 땅을 고향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줬습니다. 남은 재산도 처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습니다. 

     

    한 가지 걱정은 여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그조차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여동생을 수녀회에 맡기고 은수자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라는 말씀을 듣고 옷감 짜는 기술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고향 마을 근처의 빈 무덤 동굴에 머물며 노동과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이어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위해 자신이 머물러 있었던 마을 부근의 처소를 떠나 6개월치 식량을 가지고 마귀들의 본거지라고 여겨졌던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버려진 성곽이 있던 피스피르산이 그의 거처가 됐습니다.

     

    성인은 이곳에서 하루 한 줌의 빵과 물 만으로 살았습니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찾아오는 이들조차 만나지 않고 홀로 지냈습니다.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밥 먹듯이 금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은수자로 산 지 2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됐다고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금식이 아니라 겸손”이라는 그의 말처럼 안토니오 성인을 하느님께 이끈 것은 모든 존재에게 친절하고 그런 존재를 자신보다 드높인 겸손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혼자 숨어 지냈지만 그의 신앙과 그가 행한 기적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아픈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줬는데 많은 이들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딸이 사탄에게 시달려 고통스러워한다고 말하자 성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도 당신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서 믿음을 갖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 보니 딸이 나아있었습니다.

     

    312년쯤 안토니오 성인은 더 깊은 사막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곳이 나중에 성 안토니오 수도원이 되는 곳입니다. 

     

    성인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습니다. 언젠가는 들짐승이 와서 농사지은 것을 망쳤는데 성인이 타이르니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인은 어느 날 기도 중에 자신의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봤습니다. 사탄들이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인을 보호하는 빛의 성자들의 도움으로 사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105세인 356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에 앞서 성인은 두 명의 제자를 불러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고 합니다.

     

    “수행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처럼 하라. 사탄을 무서워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숨 쉬고 그분을 믿으며 곧 죽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살라. 나는 이제 떠난다.”

     

    안토니오 성인의 이야기는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성 아타나시오가 쓴 <성 안토니오의 생애>라는 책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이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이 이집트 동부 사막의 와디 아라바 오아시스에 세워져 있는 성 안토니오 수도원입니다. 콥트 정교회의 수도원인 이곳은 성인의 제자들이 세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집트의 그리스도교 수도원 가운데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