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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3)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Fotorech)

    힐데가르트는 농사와 가축 기르기 뿐 아니라 산과 들에 나는 식물과 관련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식물을 가꾸고 거둬들이며 말리고 보관하는 방법을 일일이 수녀들에게 알려줬고, 식물을 통한 치료법도 연구개발했습니다. 

     

    수녀원에는 약초를 보관하는 방도 만들었습니다. ‘수녀원 약방’이라 불린 그 방에서 힐데가르트는 약초의 효능과 질병 치료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어느 날 한 여성이 끓는 물에 데여 심각한 화상을 입은 아이를 안고 수녀원을 찾아왔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약초로 만든 연고가 담긴 주머니를 상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쳤고 몇 시간이 지나자 상처도 아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보석도 치료에 썼습니다. 보석의 성분이 사람이 지닌 생명에너지(비리디타스 Viriditas)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병이 있으면 그 병을 고치는 방법이 자연 속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양한 곡식은 물론 산과 들에 피어 있는 풀과 꽃과 약초들이 지닌 치유능력을 하느님의 섭리로 봤습니다.

     

    그는 탁월한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쓴 시에 곡을 붙여 찬송을 하고 음악극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만도 120편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힐데가르트는 서양 음악 최초의 작곡가로 꼽히기도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여든의 나이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한 귀족이 세상을 떠난 뒤에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마인츠의 주교성에서 전령이 찾아와 그 귀족이 생전에 나쁜 짓을 저질렀다며 그 사람이 축복받은 땅에는 묻힐 수 없기 때문에 시신을 파내 수녀원 밖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그가 죽기 전에 고해성사를 해 교회로부터 사면되었음을 들어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무덤을 모두 평평하게 만들어 그 사람의 무덤을 찾지 못하게 했습니다.

     

    수녀원에는 영성체 성사 금지 등의 징계가 내려졌지만 힐데가르트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잇따른 탄원서와 그를 아끼던 몇몇 대주교의 도움으로 금지령은 해제됐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쯤 뒤에 힐데가르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에대해서도 자신과 함께 한 수녀들에게 미리 말했다고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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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2)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LoveToTakePhotos)

    "하늘이 열리면서 머리 위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밝은 광채가 쏟아져내렸습니다. 그 빛은 나의 심장 전체와 가슴을 불꽃처럼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시편서, 복음서, 그리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의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계시도 함께 받았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듣는 것을 말로 전하라"라는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계시를 무시했습니다.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심하게 앓아눕게 되자 신의 계시를 거역한 것 때문임을 깨닫고 자신이 본 환상을 글로 쓰기로 결심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디시보덴베르크의 수도원장인 쿠노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일생 동안 스승이며 조언자이자 친우였던 수도승 볼마르의 도움으로 26개의 묵시가 담긴 〈스키비아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키비아스는 ‘길을 알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책이지요.

     

    그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 천사 루시퍼의 타락, 아람과 이브의 원죄, 노아를 비롯한 유대 선지자들의 행적,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초대 교회 순교자들, 앞으로 일어날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 등을 책에 담았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저술을 시작한 지 얼마 뒤에 쿠노는 힐데가르트의 작업을 마인츠의 대주교 헨리에게 보고했고 이는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까지 알려져, 교황은 종교회의를 통해 힐데가르트의 환상에 대해 논의한 뒤 저술을 허락하게 됩니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깨달음을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은 불교의 만다라 못지않게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계시를 받은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고 보석치료와 자연치유에 대한 의학 관련 책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작 범위는 방대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수녀였으나 활동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불의한 일에 대한 비판에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부자들은 물론 교회 권력도 그의 날선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심지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에우제니오 3세 교황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 물어뜯으려고 으르렁대거나 닭처럼 바보같이 한밤중에 꼬꼬댁거리는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부자들에게 가진 것을 굶주린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수녀원을 찾아온 황제를 향해서도 잘못한 일을 꾸짖었습니다.

     

    수도공동체인 수녀원을 관리하는 일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두 개의 수녀원을 세웠고, 이 수녀원은 독립적으로 운영됐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각지에서 그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도왔습니다. 병자와 가난한 이들은 그에게서 특별한 돌봄을 받았습니다. 치유에 관심이 많아 약초 등을 활용한 자연요법을 연구했고, 보석을 통한 치료법도 만들었습니다. 음악도 주요한 치유 도구였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여성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였지만 그는 여성임을 자랑하라고 수녀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수녀들에게 하루에 한 잔씩 포도주를 마시라 고도 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서요. 

     

    힐데가르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디지보덴베르크 수녀원에 사는 수녀님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습니다. 수녀가 되어 함께 살고자 하는 여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녀원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힐데가르트는 새 수녀원을 짓기로 하고 루페르츠베르크라는 산에 새 수녀원을 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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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빙엔의 예언자 힐데가르트 (1)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Alexa_photos)

    “온 힘을 다해 생명을 보살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응답합니다.”

     

    “자신을 잘 들여다보세요. 여러분 안에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창조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의 원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듯이 신성도 그렇게 만물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빙엔의 예언자로 불리는 힐데가르트가 한 말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한평생 수녀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삶을 산 그에게는 많은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예언자, 신비주의자, 생태주의자, 신학자, 의사, 치유가, 자연주의자, 작곡가, 미술가 등등.

     

    힐데가르트는 1098년 독일 라인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고, 교황권과 황제권이 맞서기 시작하며, 그런 혼란에 대한 대안으로 극단적 금욕을 주장하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형제자매들이 뛰어놀 때 어린 힐데가르트는 꽃과 식물을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모가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면 자신 안에 보이는 그림을 보는 게 재미있고 좋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가 3살 때부터 본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은 특별한 환시였습니다.

     

    부모님은 힐데가르트가 여덟 살일 때 한 수도원에 맡깁니다. 열 번째 아이를 십일조로 바치겠다고 했던 교회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 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신자들과 성직자들 안에 기초를 놓아 주신 불타는 정의가 희미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내가 태어났고 부모님은 탄식하며 나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보내진 곳은 일반 수녀원이 아닌 디시보덴베르크산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백작의 딸로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던 유타가 살고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유타로부터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수도원은 당시 어린 소녀들이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시편 암송, 악보 읽기, 악기 연주 등을 배우면서 수녀가 되기 위한 수련 기간을 거친 뒤 열다섯 살 때 수녀가 됐습니다. 1136년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힐데가르트는 수녀들의 만장일치로 수녀원장이 됩니다.

     

    수도원장으로 헌신하면서도 힐데가르트는 기도와 묵상을 지속했는데 그녀가 42세쯤이었을 때 신비한 환상을 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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