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ALL : 환경운동_사례

Contents List 3

  • 베트남 한 초등학생의 놀라온 제안

    베트남 교육부가 환경문제를 낳는 학교의 관행을 없애자고 제안해 큰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베트남 언론에 따르면 하노이의 마리퀴리학교에 다니는 응우옌 응우옛 린(11) 양은 지난 25일 하노이 시내 40개 학교 교장들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올여름 6학년이 되는 린 양이 쓴 메일의 내용은 개학식 때마다 해 온 풍선 날리기 행사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린 양은 고무로 만든 풍선과 이것을 묶는 리본, 고무 밴드 등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특히 풍선이 터진 뒤 바닥에 떨어진 고무 제품을 동물들이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풍선 날리기를 당장 중단하기 어렵다면 풍선 개수라도 줄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린 양의 제안이 언론과 SNS를 통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호응했습니다. 베트남 교육훈련부, 천연자원환경부 등 정부 기관도 린 양의 제안을 지지했습니다. 

     

    응우옌 티 응이어 베트남 교육훈련부 차관은 6월 29일 린 양의 집을 찾아 홍 하 베트남 천연자원환경부 장관의 격려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응이어 차관은 “하노이는 물론 다른 지역에 있는 많은 학교들이 린 양의 훌륭한 제안을 알게 됐다"라며 “린의 제안을 알게 된 모든 곳에서 칭찬과 함께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각급 학교들이 풍선 날리기 대신 창조적이고 환경적인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 케냐의 자연과 여성을 살린 왕가리 마타이

    케냐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왕가리 무타 마타이. [이미지 : 플리커(https://www.flickr.com/photos/kingkongphoto/45588704754/), CC BY-SA 2.0]

    한 사람이 마음을 냈습니다.

    그 마음은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로 형상화됐습니다.

    그 나무로부터 큰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케냐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왕가리 무타 마타이 이야기입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40년 케냐의 중부 고원에 있는 산골 마을에서 리테에서 태어난 마타이는 학교에 다니는 두 오빠와 달리 집안일을 하며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어느 날 마타이가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왜 나는 학교에 가면 안 돼?”

    “그렇구나. 학교에 가도록 해보자”

     

    마타이는 어머니의 적극적 후원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가 1960년이었습니다.

     

    마타이는 미국에서 생물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고국 케냐로 돌아옵니다. 그는 1971년 케냐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나이로비 대학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76년 나이로비 대학의 교수로 강단에 섰습니다.

     

    1977년 그는 운명과도 같은 일을 시작합니다. 바로 나무 심기였습니다.

     

    마타이가 공부에 전념하는 동안 케냐는 물 부족과 영양결핍, 가난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집안일을 하는 여성들은 땔감과 식수를 얻기 위해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마타이의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같은 비극은 개발이익을 노린 부패한 정권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부패한 케냐 독재 정권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국유지나 공유지를 개발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커피 농사도 자연 훼손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커피는 돈이 되는 작물이었고 너도나도 나무를 베어 내고 커피나무를 심었습니다. 콩과 옥수수도 많이 재배했고요.

     

    나무가 사라지면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은 땔감 부족으로 조리가 필요 없는 간단한 음식을 해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나무가 사라지자 강물이 마르고 우물물도 바닥을 드러내 마실 물조차 부족해졌다는 겁니다. 지금도 케냐 인구 4500만 명 가운데 1700만 명 이상이 안전한 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왕가리 마타이는 케냐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로 인해 가장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케냐 여성들을 위해 나무를 심는 운동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나무들의 어머니, 마마 미티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지요.

     

    마타이는 그린벨트 운동을 시작하면서 무키마라는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이 나무는 기특하게도 아주 빨리 자라는 종입니다. 무키마는 땅 위에 녹색벨트를 만들었고 그린벨트 운동의 이름을 따 그레빌리아로 불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자는 너무나 당연한 운동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극단적 남성 중심의 나라에서 여성 환경운동가로 산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마타이의 그린벨트 운동은 국공유지를 개발해 막대한 이권을 챙기는 독재 정권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케냐가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던 때에 미국에 유학한 마타이를 배신자로 여기는 이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테러를 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권은 구속과 가택연금으로 그의 발을 묶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왕가리 마타이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마타이는 지역민 스스로 토종 나무와 모종을 키워 이를 직접 산과 들에 심도록 했습니다. 나무가 일정 정도 자라면 3센트 정도를 보상금으로 줘서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마타이는 그린벨트 운동의 성공을 위해 주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현장활동가가 중심이 되어 20~30명의 주민을 이끌고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행합니다. 현재 케냐에는 이런 그룹이 5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마타이가 시작한 이 운동은 케냐의 부패한 독재 정권에 대항하고 여성들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성격도 갖고 있었습니다.

     

    마타이의 그린벨트 운동이 부패한 독재 정권과 맞서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부패하지 않은 정부,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정부, 환경이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게 주는 혜택을 이해하는 정부가 없다면 우리의 운동은 소용이 없습니다.

    운동의 성과를 무의미하게 만드니까요.”

     

    마타이는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해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2002년에는 국회의원에 출마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됩니다.

     

    그가 시작한 그린벨트 운동은 40년 동안 아프리카 전역에 5000만 그루의 심는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왕가리 마타이는 환경 보호와 여성 인권 향상 등에 기여한 공로로 2004년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 16세 스웨덴 환경운동가 노벨평화상 후보에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매주 금요일마다 거리로 나서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운동을 진행한 16세 환경운동가로, 지난 14일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이미지 : 그레타 툰베리 트위터]

    스웨덴의 16세 환경운동가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14일 스웨덴 의회 앞에서 매주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고 전했습니다.

     

    노르웨이 의원 3명의 추천을 받아 후보가 된 툰베리는 자신의 트위터에 “영광”이라고 적었습니다.

     

    툰베리는 지난해 8월 스웨덴 의회 앞에서 첫 시위를 벌인 뒤 매주 금요일마다 거리로 나서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운동을 진행해 왔습니다.

     

    툰베리가 시작한 운동은 독일, 영국, 프랑스, 호주, 일본 등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학생들은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등교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15일에는 세계 100여 개 나라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등교거부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는 올해 1월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우리 모두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데 실패해왔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앞서 툰베리는 지난해 12월 폴란드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각국 정부와 정치권에 기후변화를 막는데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해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습니다.

     

    툰베리는 트위터에 자신을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16살 환경운동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발달장애의 한 종류로 비정상적인 사회적 상호작용과 제한되고 반복적 행동을 보이는 질환입니다.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한 노르웨이의 한 의원은 AFP 통신에 “우리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전쟁, 갈등, 난민 등의 문제를 낳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레타 툰베리를 추천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에는 개인과 단체를 대상으로 301건이 추천됐습니다.

     

    툰베리가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면 17세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말랄라 유사프자이 보다 1살 어린 최연소 수상자가 됩니다.

  • 다큐 사진의 거장, 황무지 된 고향에 ‘기적의 숲’ 복원

    살가두와 인스티튜토 테라의 노력으로 열대우림이 복원된 브라질의 미나스 제라이스 모습 [이미지 : 인스티투토 테라 홈페이지]

    브라질 다큐멘터리 사진의 거장 세바스티앙 살가두(75)가 황무지가 된 고향을 울창한 숲으로 바꿨습니다.

     

    살가두는 세계 각지를 다니며 촬영한 노동자와 이주민들에 대한 사회성 짙은 사진으로 지구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입니다.

     

    다큐 사진작가로 명성을 얻는 그는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의 대량학살을 고발한 사진 작업을 마친 뒤 얻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찾은 고향마을 미나스 제라이스에서 또 다른 충격을 받게 됩니다.

     

    고향 마을은 황무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어릴 적 뛰놀던 열대 우림은 다 사라졌고 자신이 보고 자란 악어와 새 등도 모두 자취를 감췄습니다.

     

    살가두는 영국 언론 가디언에 “모든 것이 나처럼 앓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됐고 나무가 자라는 땅은 0.5%에 불과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살가두는 아내 레일리아와 함께 고향 마을의 자연을 복원하기로 마음을 먹고 가족과 협력자를 모아 1998년 ‘인스티투토 테라(Instituto Terra)’를 설립하고 215만 평의 땅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살가두는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열대우림의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해 209종의 토종 나무 씨앗을 뿌렸습니다.

     

    재단의 노력으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무가 자라면서 토양 침식이 중단됐고 8개의 샘이 복원되면서 물이 생겨났고 숲이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 살가두의 고향 마을은 열대우림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170여 종의 조류와 30여 종의 포유류가 숲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10여 종의 파충류와 양서류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살가두는 지구온난화의 해법도 찾았습니다.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무입니다. 우리는 숲을 살려야 합니다. 토착 나무가 있는 숲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사와 흰개미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숲이 없으면 동물들도 오지 않습니다.”

     

    살가두는 산림 복원 및 보존의 필요성 등 환경 관련 인식을 깨우기 위한 교육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인스티튜트 테라는 2002년 환경교육과 복원 센터(CERA)를 만들어 70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모두 6만 500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황무지였던 살가두의 고향은 브라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그가 시작한 프로젝트는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자연은 지구이고 자연은 우리와 함께 사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지구에 일종의 영적 귀환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존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IMAGE|348|center|인스티투토 테라의 노력으로 브라질의 미나스 제라이스는 20년만에 황무지에서 열대우림으로 산림이 복원되었다. [이미지 : 인스티튜토 테라 홈페이지] ]]

  • 쓰레기 5300톤을 치우자 거북이 돌아왔다

    작년 9월, 인도에서 가장 더러운 해안가로 불리던 베르소바 해변에서 거북이가 발견되어 화제가 됐다. [이 이미지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지 : 픽사베이]

    한 사람의 작은 행동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인도 뭄바이의 한 젊은 변호사가 시작한 쓰레기 줍기가 해변을 살렸습니다. 해변이 깨끗해지자 사라졌던 거북이들이 나타났습니다. 20년 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인도 뭄바이 베르소바 해안선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인도에서 가장 더러운 곳이었습니다. 비닐봉지, 페트병, 건축 폐기물, 옷, 가구 등 쓰레기 더미가 해변가 모래사장을 뒤덮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고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2015년 베르소바 해변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 온 변호사 아프로즈 샤(Afroz Shah·33)는 해변을 둘러보다 이 같은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IMAGE|291|center|인도의 변호사 아프로즈 샤(33)는 베르소나 해변의 해양 쓰레기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해변을 깨끗하게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혼자 해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미지 : 아프로즈 샤 트위터] ]]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쓰레기 더미 높이가 1.67m나 됐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아프로즈 샤는 해변을 바꾸기 위해 혼자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틈날 때마다 해변을 찾아 쓰레기를 치웠습니다. 그는 이를 ‘바다와의 데이트’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해변 청소를 하기에는 힘이 부쳤습니다. 자원봉사단을 조직한 이유입니다.  

     

    그를 시작으로 지역 주민과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합류했고 정치인과 발리우드의 유명인들까지 나섰습니다. 1000여 명의 봉사자들이 2.5km의 해안선에서 2년 가까이 치운 쓰레기만 530만 kg이 넘는다고 합니다. 

     

    자원봉사자들은 해변가의 공중화장실 52개도 말끔히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 더미가 있던 곳에 코코넛 나무 50그루를 심었습니다. 아프로즈 샤의 꿈은 5000개의 코코넛 나무를 심어 ‘코코넛 해변’으로 불렸던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지난 5월 20일 샤는 깨끗하게 변한 베르소바 해변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했는데요. 사진은 즉시 6000번 이상 리트윗 되고 1만 3000개 ‘좋아요’를 받았습니다.  

     

    [[IMAGE|292|center|SNS에 올라온 2015년도의 베르소바 해변과 2018년의 베르소바 해변. 2015년에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비롯한 각종 해양 쓰레기들 때문에 모래사장을 볼 수 없었지만, 아프로즈 샤와 자원봉사자들이 해안을 청소한 후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볼 수 있게 됐다. [이미지 : 에코로직스 트위터] ]]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프로즈 샤와 자원봉사자들이 2년 가까이 해변에서 땀을 흘린 데 하늘이 보상을 해준 것일까요.  

     

    지난해 9월 베르소바 해변에 거북이들이 찾아왔습니다. 쓰레기가 쌓이면서 자취를 감췄던 바다거북이들이 20년 만에 돌아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