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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성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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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네딕토 성인(2) - 3년 동안의 동굴 ‘면벽’

    이미지 : 픽사베이

    베네딕토 성인은 유모와 함께 살던 엔피데(지금의 아필레)를 떠나 수비아코에서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성인은 좁고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 바위산 꼭대기에 있는 동굴에서 3년 동안을 지냈는데 그 시절 로마노 수사라는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성인이 수비아코로 가기 위해 산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성인은 로마노 수사와 우연히 마주치게 됩니다.

     

    근처의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던 로마노 수사는 성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어디로 가는지를 물은 뒤 은수자 수도복 한 벌을 주고 정기적으로 먹을 것을 가져다줬습니다.

     

    성인이 머무는 곳은 가파른 낭떠러지에 있는 동굴이어서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로마노 수사는 방울을 매단 줄을 달아 놓고 빵을 가져다 묶은 뒤 줄을 흔들어 방울소리를 듣고 성인이 줄을 끌어올려 빵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려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3년 동안 성인을 성심성의껏 뒷바라지했습니다.

     

    성인의 동굴 생활에 대해 전해지는 얘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베네딕토 성인은 동굴 속에서 하느님과 대면하며 지내는 삶이 무엇보다 행복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부활절을 앞둔 어느 날 수비아코 근처에 사는 한 신부의 꿈에 하느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수비아코의 낭떠러지에 있는 큰 동굴에 나의 종이 굶주리고 있으니 좋은 음식을 가져다 주어라”

     

    신부는 곧바로 부활절 대축일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싸 들고 낭떠러지를 향했고 동굴을 찾았습니다. 그 안에는 베네딕토 성인이 기진맥진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베네딕토 성인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나왔고 많은 이들이 성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동굴을 찾았습니다.

  • 베네딕토 성인 (1) - 첫번째 기적

    이미지 : 픽사베이

    얼굴 없는 성인으로 알려진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분입니다. 유럽의 수호성인이기도 하지요.

     

    베네딕토 성인은 로마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20살 전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은수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독수가로 살고자 했지만 다른 수도자들의 거듭된 요청으로 그들을 이끌며 이탈리아 수비아코에 12개의 수도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말년에 이탈리아 남부 몬테카시노 산에 세운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은 서방 수도원의 발상지가 됐고 베네딕토 수도회의 총본부로 쓰이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즈음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누르시아에서 로마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문학에 심취한 그는 방탕한 삶을 사는 친구들을 보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다 귀족 신분을 포함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게 됩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처음부터 은수자의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저 퇴폐한 로마를 떠나고 싶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시골로 갔을 때 곁에는 자신을 키워준 유모가 함께 갔기 때문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처음 정착한 곳은 성 베드로 성당이 있던 작은 시골마을이었습니다.

     

    시골 마을 사람들은 지체가 높은 그를 경계하고 어려워했습니다. 그럴수록 베네딕토 성인은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모든 이들을 친절히 대했다고 합니다. 그즈음 베네딕토 성인이 첫 번째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날 베네딕토 성인을 돌보던 유모가 밀을 빻아 거르기 위해 이웃집에서 빌려온 채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습니다. 유모는 남의 집에서 쓰던 채를 망가뜨린 것이 걱정도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에서 부유하게 살던 때를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유모가 우는 것을 보고 흩어진 조각을 모아 놓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채는 원래 모양대로 돌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 진묵조사 (6) - 저것이 바로 부처님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초의 선사가 편찬한 <진묵대사유적고>에 진묵스님이 입적할 무렵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진묵조사가 나이 72세 되는 해 10월이었습니다, 조사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시자를 데리고 시냇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물에 비친 스님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것이 바로 석가부처님이다.”

     

    물에 비친 그림자를 들여다본 시자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너는 나의 거짓 모습은 알면서 그 안에 부처님의 참모습은 모르는구나.”

    조사는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나서 대중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나는 오늘 세상을 떠나려고 한다. 부지런히 닦고 잘 깨우치거라.”

    “스님이 가시면 누가 법맥을 이어갑니까?”

    “수행자가 공부나 참되게 하면 되지, 그런 것은 왜 따지느냐?”

    그래도 제자들이 스님을 붙잡으며 재삼 청하자 조사는 마지못해 입을 떼었습니다.

    “명리승(名利僧)이기는 하나 서산스님이 정통을 이은 분이니 그쪽으로 해라.”

     

    말을 마친 진묵조사는 가부좌한 채 고요히 입적하였습니다. 대둔산에 있는 태고사에는 진묵조사의 풍모를 짐작하게 하는 시가 남아 전합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으로 자리하고 산은 베개 하며

    달을 촛불 삼고 구름으로 병풍치고 바다는 술통 삼네.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신나게 춤추니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저어할 뿐이라네.(끝)

  • 진묵조사 (5) - 복을 걷어찬 조카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한 번은 누이동생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끼니를 잇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진묵조사는 7월 칠석날 조카 내외를 찾아갔습니다.

     

    “오늘 밤 자정까지 일곱 개의 밥상을 차려라. 특별히 칠성님들을 모셔다가 복을 지을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주마.”

     

    조카는 삼촌의 신통력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아는지라 그 말을 믿고 음식을 장만하여 일곱 개의 밥상을 차렸다고 합니다.

     

    밤 12시가 되자 진묵조사가 일곱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보니 자기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같이 땟국물에 절은 지저분한 옷에 눈에는 눈곱이 달렸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한 명은 언청이요, 한 명은 곰보, 나머지는 절름발이, 곰배팔이, 장님, 귀머거리였습니다.

     

    ‘어떻게 저런 거지 영감들만 데리고 왔담?’

     

    조카 내외는 덕을 보기는 틀렸다고 생각하여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내외가 부엌에 들어가 탕탕 그릇 소리를 내며 소란을 피우자, 밥상 앞에 앉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사람까지 일어서려고 하자 진묵조사가 붙잡았습니다.

     

    “저를 봐서 한 숟갈이라도 드시고 가십시오.”

     

    그 말을 들은 마지막 사람은 밥 한술, 국 한 숟갈, 반찬 한 젓가락을 집어먹고 떠났습니다.

     

    모두 떠나 버리자 진묵조사가 안타까워하면서 혀를 찼습니다.

     

    “쯧쯧, 복 지을 인연을 이렇게 차버리다니 참 한심한 사람들일세. 그나마 마지막 분이 세 숟갈이라도 잡수셔서 앞으로 3년은 잘 살 수 있을 거다.”

     

    다음날 조카가 돼지 한 마리를 사게 되었는데 시세보다 많이 싸게 사 왔습니다. 그 돼지가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고, 몇 달이 지나자 집안에는 돼지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부유하게 잘 살던 조카는 어느 날 돼지우리에 불이 나서 모든 재산이 몽땅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인연을 귀하게 여기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는 일화입니다.

  • 진묵조사 (4) - 모기도 감동한 지극한 효심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진묵조사가 일출암에 머물 때의 일화입니다.  

     

    진묵조사는 어머니를 일출암 아랫마을 왜막촌으로 모셔왔습니다. 출가한 수행승의 처지로 한 집에 모실 수는 없으나 절 가까이에서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에는 어머니가 밤잠을 제대로 못 주무실 정도로 모기가 많았습니다. 그때 진묵조사는 모기를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 그 뒤로는 마을에서 모기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조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정성스럽게 장례를 모시고 제문을 지어 올렸습니다. 

     

    "열 달 동안 태중에 품으신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슬하에 삼 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도 잊을 수 없습니다. 

     

    만 년에 또 만 년을 더하여도 자식 마음에는 부족한데 

    백 년 생애도 못 채우셨으니 어머니 수명은 어찌 이다지도 짧습니까? 

     

    표주박 하나로 걸식하는 이 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규중에 혼자 남은 누이는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제단에 올라 불공을 마친 스님들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앞산 뒷산 첩첩한 이 산중에 어머니 혼은 어디로 떠나셨습니까? 

     

    아! 애달프기 한이 없습니다.” 

     

    진묵조사는 만경들판에 어머니 묘를 모셨는데 마침 근처에 사는 논 주인이 오가며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해 풍년이 들어 농사가 잘 되자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모두 함께 나서서 어머니 묘를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진묵조사의 어머니 묘에 향불을 올리면 소원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 하여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하며, 후손이 없어도 향불이 꺼지지 않는 자리라 하여 풍수가들이 들르는 코스라고 합니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지극했던 진묵조사의 효심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 진묵조사 (3) - 천 리 떨어진 해인사의 불을 끄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unclelkt)

    진묵이 길을 가다 냇가에서 소년들이 물고기를 잡아서 끓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진묵이 솥을 들여다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잘 놀던 물고기가 이렇게 죄 없이 삶아지는구나.”

    한 소년이 스님도 드셔보라고 내밀자 진묵은 솥을 들어 단숨에 마셨습니다. 소년들은 고기를 먹은 스님을 땡땡이 스님이라고 놀렸습니다.

     

    진묵조사가 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었습니다.

    “너희가 죽인 물고기를 내가 도로 살려주마.”

    시냇물을 등지고 앉아 힘을 주니 물고기들이 쏟아져 나와 헤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묵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물고기들아, 큰 강으로 가서 다시는 삶아지는 고통을 당하지 말거라.”

     

    진묵이 급하게 물을 찾은 날이 있었습니다. 더운 뜨물을 갖다 주자 그것을 입으로 머금고 동쪽으로 내뿜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합천 해인사에 큰불이 났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대중들이 해인사에 난 불을 끄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지요. 얼마나 불길이 세던지 우왕좌왕하는데 난데없이 서쪽에서 소나기가 몰려와 불을 껐어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빗방울이 희끄무레하고 묻은 곳에는 얼룩이 졌습니다.”
    그 말을 들은 스님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전주 송광사와 부여 무량사 두 절에서 스님들이 찾아왔습니다. 부처님 점안식을 한다며 진묵을 모셔가겠다고 온 것입니다. 진묵은 자기가 둘 다 갈 수 없다며 송광사에는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주었고, 무량사에는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주었습니다.

    송광사에서는 스님이 앉는 자리에 주장자를 세워 놓으니 밤낮으로 꼿꼿이 서 있었습니다. 무량사에서도 염주를 자리에 놓으니 저절로 돌아가며 점안식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스님과 대중들은 진묵의 도력에 탄복하며 불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 동방정교회의 대수도자 시소이스 성인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시소이스 성인은 동방정교회의 수도자로 겸손을 강조한 수도자로 유명했습니다.  

     

    이집트 출신인 시소이스는 사막의 성자로 불리는 안토니우스 성인의 뒤를 따라 한평생 금욕주의 수도자로 겸손되게 살았습니다.  

     

    그가 머문 곳은 안토니우스 성인이 일궈놓은 수행터로 이집트 사막의 한 동굴이었습니다. 성인은 이곳에 머물며 60년에 걸친 수도 생활을 통해 높은 영적 성취를 이뤘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많은 이의 병을 낫게 했으며 영혼을 정화했습니다. 죽은 아이를 기도로 살려냈다고도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했지만 늘 자비와 친절로 다른 이를 대했고 사랑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특히 겸손을 강조했습니다.  

     

    한 수도자가 어떻게 하느님을 항상 기억하며 살 수 있겠느냐고 묻자 시소이스 성인은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낮은 자리에 둔다면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겸손을 지닌 사람은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충족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회개의 중요성도 거듭 언급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죄를 지은 이가 회개하는 데 일 년이면 되느냐고 묻자 시소이스 성인은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형제가 온 마음으로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사흘 만에 받아주실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은 자신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세상을 떠날 때조차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시소이스 성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리에 누웠을 때 주위에 몰려온 제자들은 성인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는 것을 봤습니다.  

     

    수도사들은 성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성인은 안토니오스 성인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들이 보인다고 답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인의 얼굴은 더 빛이 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수도사들은 누구와 말씀을 나누고 계시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성인은 자신의 영혼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온 천사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간청하고 있노라고 답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신부님은 회개할 일이 없지 않느냐고 묻자 성인은 나는 회개를 시작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마치자 성인의 얼굴은 더욱 빛났고 주위 사람들은 눈이 부셔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어 번개와 같은 빛이 번쩍이더니 아름다운 향기가, 그러고 나서 번개와 같은 빛이 번쩍이면서 성인은 세상을 떠났고 아름다운 향기가 그곳을 감쌌다고 합니다.

  • 진묵조사(2) - 8년 정진 끝에 대각을 이루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terimakasih0)

    주지 스님과 희 노장은 어린 동자의 말에 껄껄 웃고 말았습니다.  

     

    원래 희 노장은 봉서사 주지를 지낸 스님이었는데 성격이 불같고 괴팍했습니다. 시봉하는 사미를 번번이 쫓아내는 바람에 겨울에 거처하는 방의 불도 손수 때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희 노장은 일옥을 자기 방에 데리고 들어가 저녁을 먹였고 그날 이후 일옥은 8년 동안 희 노장을 시봉하게 되었습니다. 

     

    주지스님은 일옥을 영리한 아이로 생각하고 신장을 모신 단에 향불을 올리고 예배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일을 맡기고 얼마 되지 않아 주지스님 꿈에 신장들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 모시는 것이 우리 신장의 할 일인데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향을 올리고 예배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발 다시는 아침저녁으로 예불하게 하지 마시고 우리가 마음 편히 지내도록 해 주십시오.” 

     

    봉서사 스님들은 어린 동자승을 남달리 보아 ‘작은 부처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희 노장이 입적하자 일옥은 삼년상을 지내고 난 후,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이름은 ‘진묵’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진묵이 200리 넘는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평야와 바다 사이에 우뚝 솟은 변산이었습니다. 봉래산 중턱에 자리 잡은 월명암은 신라시대(691년) 부설거사가 창건하여 가족이(묘화부인, 등운, 월명) 모두 수행하여 득도한 곳입니다. 월명사에서 진묵은 일체의 말을 끊고 묵언 정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8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오직 참선에 몰두했습니다. 

     

    낙조대에 앉아 수행을 하던 어느 날 석양 무렵이었습니다. 붉은 해가 서서히 내려오며 그 기운으로 바다를 시뻘겋게 물들이더니 진묵을 그대로 품어 안았습니다. 그 순간 진묵은 오랜 묵언 수행을 깨고 기뻐하며 소리치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습니다. 음력 칠월 보름 구순안거 해제 날 8년 적공 끝에 대각을 이룬 것입니다. 

     

    진묵은 깨달음을 얻은 뒤 궁벽하고 쇠락해가는 절을 주로 찾아다니며 민중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조선은 당파 싸움과 전쟁으로 극심한 혼란기였습니다. 진묵은 헐벗고 가난한 민중과 어울리며 그들의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부처님이라 불리며 그들의 의지처가 되었습니다. 초의선사가 쓴 <진묵대사유적고>에는 그와 관련된 신기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봉곡선생으로 불리던 유학자 김동준은 진묵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진묵스님에게 <주자강목>을 한 질을 빌려주며 사람을 딸려 보냈습니다. 스님은 걸어가면서 한 권씩 읽은 다음, 책을 떨어뜨리며 갔습니다. 따라가던 사람이 책을 모두 주워가지고 가서 봉곡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나중에 봉곡이 진묵을 만나 그 까닭을 묻자, 진묵이 대답했습니다. 

     

    “고기 잡은 뒤에는 고기 잡는 통발은 잊는 법이네.” 

     

    봉곡이 내용을 물어보니 진묵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내용을 꿰고 있었다고 합니다. (계속)

  • 진묵조사(1) - 부처가 되려 절에 왔다는 일곱살 아이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진묵조사는 조선의 대 선승으로 민중들이 살아있는 부처로 믿으며 따랐으며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진묵은 1562년 김제군 만경면 불거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일옥입니다.  

     

    일옥이 태어날 무렵 3년 동안이나 풀과 나무들이 시들자 사람들은 큰 인물이 날 징조라 했습니다. 일옥은 어릴 때부터 비린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마음이 어질고 총명하여 마을에서는 불거촌에 생불이 태어났다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5살에 여읜 일옥은 7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전주 서방산에 있는 봉서사로 출가했습니다. 서방산은 ‘서방정토’ 즉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라는 뜻입니다. 그 서방산 산봉우리들이 양쪽으로 휘감은 자락 안에 봉황이 깃든다는 봉서사가 자리했습니다. 

     

    어느 날 봉서사 주지 대월 화상이 칠순을 갓 넘긴 희 노장에게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밤에 석가모니불께서 천 이백 대중을 거느리시고 우리 절에 올라오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허, 아주 좋은 꿈을 꾸셨소. 귀한 손님이 오실 것이오.” 

     

    이 말을 들은 대중들은 마음이 설레어 도량을 쓸고 대웅전 큰 법당에서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나오는데 대웅전 마당에 칠팔 세 되는 동자가 서 있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이름은 일옥이고 일곱 살 먹었습니다.” 

    “어디서 온 동자인고?” 

    “네, 저의 집에서 왔지요.” 

     

    대중들은 웃으며 겨우 일곱 살 된 아이가 왔다고 떠들며 뿔뿔이 자기 자리로 흩어졌습니다. 그 자리에 주지스님과 희 노장만 남았습니다. 

     

    “어떻게 왔느냐?” 

    “어머니가 일주문까지 데려다주셨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고?” 

    “부처가 되려고 왔습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느냐?” 

    “스님은 숨 쉬는 것을 누구한테 배우고 아셨는지요?”(계속)

     

     

    진목조사(2)에서 이어집니다.

  • 개운조사(5) - 스승의 가르침과 이적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그날 밤 노인은 조사를 데리고 희양산 중턱에 올랐습니다. 노인이 발걸음을 멈춘 곳에는 넓은 마당만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달빛이 낮처럼 밝았는데 바위 앞이 훤하게 트여 쾌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바위를 가리키며 스승이 일렀습니다.  

     

    “인재가 땅의 기운을 받아 명당의 자리에서 나는 것처럼 수행도 그러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바위 위에 올라서자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담한 암자 하나가 저절로 생긴 것이었습니다.  

     

    조사는 이 암자에서 스승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신이한 이적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끼니때가 되면 먹거리가 저절로 생겼고, 목마르다 싶으면 물이 생겼습니다.  

     

    조사의 신심은 100배나 솟구쳤습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지복의 환희심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조사가 할 일은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에 전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다만 한 가지, 아만(我慢)에서 벗어나 마음을 조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고 아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용맹 정진한 지 7일째 조사는 마침내 간혜지(乾慧地)를 증득합니다.  

     

    간혜지는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이 공통으로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의 첫 번째 단계를 말합니다. 온갖 욕망이 겉으로 일어나지 않고 욕망에 따른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경지가 간혜지입니다.  

     

    욕망은 잠재의식 속에만 남습니다. 탐진치(貪瞋癡,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삼독의 습기는 다했으나 아직 지혜가 부족하기에 마른 지혜 즉 건혜지라 일컫는데, 선정으로 이 부족한 지혜를 보충합니다. 

     

    조사가 간혜지를 얻자 스승이 책 두 권을 내려 줍니다. 그것은 <정본수능엄경> 과 <유가심인록>이었습니다. 

     

    “내가 보현존사(寶賢尊師)에게 구결로 받은 신해수증(信解修證)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진중하게 받들어 간수하라.” 

     

    조사는 공경하게 삼배를 올리고 스승이 내리시는 책을 받잡아 정수리 위로 올렸습니다.  

     

    다시 좌복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스승께서 말씀으로 전해주시는 대승(大乘)의 오묘한 경지를 하나하나 터득해나갔습니다. 

     

    스승은 내리고 제자는 받들고……. 전승이 끝나자 조사는 다시금 공손히 일어나 스승 앞에 100배를 올렸습니다. 사은의 절을 마치자 스승이 제자의 손을 어루만지며 작별의 말을 합니다. 

     

    “나는 이제 간다.” 

     

    말을 마치자 스승은 몸을 솟구쳐 새처럼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조사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한 배 한 배 스승이 사라진 허공을 보며 조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경히 100배를 올렸습니다.  

     

    스승을 전송하고 돌아오니 그동안 머물던 암자도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