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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명산답산기 북한산1 수도 서울을 호위하는 산

    수도 서울의 진산(鎭山)


    북한산(北漢山)은 우리 나라 수도인 서울의 진산(鎭山;뒤에서 호위해주는 산)이다. 또 한북정맥 (漢北正脈; 백두대간에서 한강 북쪽으로 뻗어내린 산맥)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산이다.

    한북정맥은 철령 근처에서 백두대간과 갈라진 산맥이다. 왼쪽에 한강을 끼고 계속 남하하여 북한산에 이르는데, 북한산을 빼놓고는 이렇다할 명산을 만들지 않았다. 헌걸찬 기상을 깊숙이 숨겨뒀다가 북한산에이르러 한꺼번에 모두 토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나무의 열매는 원줄기가 아니라 가지 끝에서 맺는다. 이와 마찬가지로산맥에 서린 기운도 그 끝자락에서 크게 떨친다. 이 때문에 대부분 산맥의 끝자락에 큰 도회지터, 도량(道場)터, 음택명당 (陰宅明堂, 묘지터)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 나라 뭇 산맥의 원줄기인 백두대간 끝자락에 지리산이 솟아 있다. 지리산은 삼신산 (三神山)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이라 불리우며 그안에 수많은 수도(修道) 터를 품고 있다.

     

    청남정맥 (淸南正脈; 백두대간에서 청천강 남쪽으로 뻗은 산맥)의 끝가라엔 평양이 있다. 평양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고, 지금은 북한의 수도다.

     

    해서정맥 (海西正脈;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황해도로 들어간 산맥)의 끝자락은 구월산이다. 구월산은 구아갈 단군께서 선인이 되셨다는 성산이다.
    예성남임진북정맥(禮成南臨津北正脈;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로 뻗은 산맥)은 끝자락에 송악산을 빚어올렸다. 송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개성은고려의 수도였다.

     

    한남정맥(漢南正脈; 한강 남쪽으로 뻗은 산맥)의 끝자락은 관악산과 마리산 (마니산)이다. 관악산 북쪽에 거대한 도회지 (서울 남부지역)가 생겼다. 또 남쪽 기슭에 정부 제2종합청사가 들어섰다.

     

    강화도의 마리산에는 단군성조께서 만드신 참성단이 있다. 참성단은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다. 단군성조의 자취가 뚜렷이 남은 곳으로 우리 겨레의 성지다.

     

    금북정맥 (錦北正脈; 백두대간에서 금강 북쪽으로 뻗은 산맥)의 끝자락엔가야산 (충남의 가야산)이 솟아 있다. 이 가야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 속에는 ‘자미원(紫微垣)’이라 알려진 음택대명당 (묘지대명당)이 깃들여 있다. 어떤 풍수가들은 이 자미원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택명당이라고 주장한다. 자미원에 서린 정기로 세계를 평화롭게 잘 다스릴 지도자가 곧 나오리라 예언하는 이들도 있다.

     

    금남정맥 (錦南正脈; 백두대간에서 금강 남쪽으로 들어간 산맥)의 끝자락엔 계룡산이란 명산이 솟아 있다. 옛 선지자들은 서울의 지기(地氣) 가 쇠약해지면 수도가 이 계룡산 밑으로 옮겨간다고 예언했다. 지금 그때가 얼마 안 남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또 계룡산에서 서쪽으로 뻗어간 산줄기 끝에 부여가 있다. 부여는 2백여 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호남정맥 (湖南正脈; 백두대간에서 호남지방으로 뻗어간 산맥)의 끝자락엔 두륜산, 승달산, 백운산 등이 솟아 있다. 두륜산은 삼재(三災;가뭄·홍수 · 전쟁으로 인한 재난)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복지(福地)다. 조선조 후기에는 이 두륜산에서 숱한 고승대덕이 배출됐다.

     

    승달산 서쪽에는 목포가 있다. 승달산의 기운으로 큰 항구가 생겨난 것이다. 또 백운산 아래에는 광양시가 있다. 광양시는 백운산 기운으로 세워진 도회지다.

     

    일설에는 호남정맥이 두륜산을 지나서 바다밑으로 들어가 한라산에 이어졌다고 한다. 한라산도 지리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다. 풍수가들 중에는 한라산에 아주 빼어난 영기(靈氣)가 서려 있어, 그 기운으로 대성인 (大聖人)이 배출되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낙남정맥 (洛南正脈; 백두대간 끝자락인 지리산에서 낙동강 남쪽으로 뻗어간 산맥)의 끝자락에 김해가 있다. 김해는 금관가야의 수도였다.

    낙동정맥 (洛東正脈 ; 백두대간에서 낙동강 동쪽으로 내려간 산맥)의 끝자락엔 금정산이 솟아 있다.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회지인 부산이 금정산 기운으로 생겨났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큰 산맥의 끝자락에 도읍터나 대수도장, 대도회지의 기상이 서린다. 북한산은 도읍터의 기상을 품고 있다. 그래서 북한산 아래 자리잡은 서울이 조선조 개국 이후 6백 년간 도읍지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계속)

  • 히말라야의 성산 마차푸차레

    마차푸차레는 네팔에 있는 해발 6993m의 산입니다. 봉우리가 물고기 꼬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Fish tail이라고도 불립니다.

     

    산악인들 사이에는 단 한 번이라도 마차푸차레를 보고 나면 평생 그 산을 잊을 수 없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하지만 성산으로 여겨져 등반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힌두교에서는 마차푸차레의 정상에 시바신이 산다고 믿습니다.

     

    1957년 영국 출신 5명의 산악인이 마차푸차레 원정대를 꾸려 네팔 정부로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식 등반 허가를 받아 등정에 나섰습니다. 네팔 국왕은 등반대장인 윌프레드 노이스가 힌두교 관습을 존중하고 산 정상을 밟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조건으로 등반을 허가했습니다. 

     

    윌프레드와 등반대는 정상에서 150피트 가까운 곳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폭설이 쏟아져 결국 정상 등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원정대는 등반 경험을 담은 책 을 펴냈습니다. 윌프리드 노이스는 마차푸차레에 대해 다름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인간이 오를 수 없는 산도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현지인들의 믿음을 받아들입니다. 마차푸차레의 정상에는 여신이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인간은 영원히 산 정상에 오를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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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표율사(1) - 개구리 울음 소리에 출가를 결심하다

    진표율사는 신라시대 고승으로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시조입니다. 처절한 수행을 통해 미륵보살의 수기(부처님의 예언)를 받은 이후 많은 이적과 법회를 통해 민중을 일깨우고 가르쳤습니다. 중국 <송고승전>에 전기가 실려 있고, <해동고승전>에 출가 당시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성덕왕 때(718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진표율사가 11살 때의 일입니다. 친구들과 놀던 소년은 논둑에서 개구리 30마리를 잡아 산 채로 버들가지에 꿰어놓고 물에 넣어둔 뒤 산으로 갔습니다.

     

    다음 해 봄날이었습니다.

     

    “개굴개굴, 개굴개굴…….”

     

    소년의 귀에 처연한 개구리울음소리가 들려와 가보니, 예전의 그 장소에서 개구리들이 꿰미에 묶인 그대로 살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산 생명을 해를 지나도록 괴롭혔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은 소년은 불도에 뜻을 두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진표율사는 12살에 출가하여 금산사에서 숭제 스님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숭제 스님이 혜안으로 보니 진표는 석가모니 부처 다음에 오실 미륵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수행자였습니다. 스님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10년 넘게 수행을 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당나라 선도스님 밑에서 공부하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현신께 직접 5계를 받았다. 너도 미륵보살께 지성으로 참회하고 용맹 정진하여 직접 계를 받도록 하여라.”

    “얼마나 부지런히 수행해야 스님처럼 그렇게 계를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이라도 되는 일이다.”

     

    진표스님은 자신도 그렇게 부처님의 계를 받고 싶다는 간절한 서원을 했습니다. 스님은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변산에 있는 불사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변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의상봉에 올라가면 깎아지른 절벽 아래 한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아슬아슬한 좁은 길이 있고 서너 평 될 만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앞이 탁 트여 마치 구름 속에 앉은 것 같고 신성한 기운이 어려 있는 이곳에서 진표율사는 자나 깨나 미륵부처님께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습니다.

     

    (계속)

    

  • 부설거사, 파계 또한 깨달음의 길

    부설 거사에 얽힌 이야기는 수행에 승속이 따로 없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신라 때 고승인 부설 거사의 삶과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북 부안 내변산 월명암에 전해오는 한문 필사본 <부설전>에 담겨 있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은이는 구전되던 부설 거사의 이야기를 소설체로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부설은 출가승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출가했다 파계한 승려입니다. 부설 스님은 신라 때 불국사의 승려였다고 합니다. 스님은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부설 스님에게 당혹스런 인연이 생겨납니다. 지리산, 천관산, 능가산 등지에서 수도하고 오대산으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묘법을 얻고자 만행을 떠나는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김제시 부근을 지나던 세 도반은 불심이 깊다는 집을 수소문해 하룻밤을 지내게 됐습니다. 구무원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하룻밤 신세지고 떠나려했지만 비가 몇 날을 계속해서 내려 하는 수 없이 며칠을 묵게 됐습니다.

     

    스님들이 머무는 동안 불심이 깊었던 구무원은 스님들에게 자주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에게는 재색을 겸비한 묘화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묘화 낭자도 스님들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며칠 뒤 비가 그치고 부설 거사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묘화 낭자가 부설 거사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부설 거사에게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득도를 위해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에게 혼인을 해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부설 거사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묘화 낭자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차 도통하여 많은 중생을 구하실 스님이 작은 계집 하나 구해 주지 못한다면 어찌 큰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묘화 낭자는 혼인을 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목숨을 끊겠다고 했습니다. 자살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 딸을 보고 구무원도 부설 스님에게 매달려 애원했습니다. 부설 스님은 묘화 낭자의 목숨을 건 호소에 하는 수 없이 그녀와 혼인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도반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때 부설 스님은 도부재치소(道不在緇素) 도부재화야(道不在華野) 제불방편(諸佛方便) 지재이생(志在利生)라는 게송을 들려주며 도반들을 떠나 보냅니다. 

     

    도라는 것는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하얀 옷에 있는 것이 아니며, 번화로운 거리와 초야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이 하고자 하신 뜻은 중생을 이롭게 제도하는 데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부설 스님은 거사가 됐습니다.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뒤 아들과 딸을 얻어 등운과 월명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비록 파계하고 집안을 이뤘지만 부설 거사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바닷가에 지은 초막에서 지낼 때나 나중에 내변산에 지은 암자에서 살 때나 늘 수행에 몰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