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소설 성자들의 시대1 - 운학산
운학산에는 밤새 눈이 내렸다.
온세상을 덮어버릴 기세로 함박눈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눈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쳤다.
먹구름이 동녘 하늘 멀리 몰려갔다.
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총총히 빛났다.
운학산 주능선의 한가운데 솟아오른 백학봉,이 백학봉의 정상 부근에
작은 초막이 하나 있었다.
먼동이 트기 전에 이 초막에서 한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곱추였다.나이는 서른여덟,이름은 이석주다.
석주는 초막 앞마당에 서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백학봉 정상을 향해 눈을 헤치고 걸음을 옮겼다.
키가 작아서 허벅지까지 눈 속에 빠졌다.
석주가 백학봉 정상에 오르니 동녘 하늘이 부옇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동이 트면서 어둠은 서쪽으로 몰려갔다.
별똥별 하나가 꼬리를 끌며 날아가다 곧 스러졌다.
석주가 두팔을 벌리면서 심호흡을 했다.차갑고 맑은 공기가
가슴깊이 밀려 들어왔다.아랫배까지 시원했다.
잠시후 하늘이 붉게 물들고 이어서 숯불처럼 빨간 태양이
백두대간 위로 솓아오르기 시작했다.석주는 태양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계속했다.
숨을 들이 쉴때마다 태양의 붉은 기운이 밀물 처럼 쏴아쏘아 밀려와
온갖 번뇌를 녹여주었다.
가슴 깊은 곳에 잠들어있는 집착과 욕망,분노와 미움,슬픔까지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석주는 아내와 정부情夫를 떠올렸다.그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도 분노가 일지 않았다.붉은 태양이 아내의 모습을 지웠다.
그 사내의 모습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스승 벽운선생의 음성이 귓전에 울렸다.
"욕망을 남기없이 비워라 그러면 온 우주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욕망은 고통의 씨앗이다.
집착은 너를 얽매는 사슬이다.
아내에 대한 집착을 끊어라.
그래야 네 마음이 미움에서 헤어난다.
아내에 대한 집착을 우주 삼라만상을 향한 자비심으로 바꿔라"
어느덧 태양이 아득히 먼 백두대간 위로 불쑥 떠올랐다.
운학산에서 백두대간까지는 2백여리가 넘는다.
속리산에서 지리산으로 뻗어간 백두대간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모습은 거대한 용이 약동하며 치달리는 것과 흡사했다.
운학산과 백두대간 사이에는 수많은 산줄기들이 겹겹으로 펼쳐져있다.
눈에덮인 그 산줄기들의 모습은 하늘에 떠있는 흰 구름처럼 보였다.
새하얀 산봉우리들 위로 아침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푸르렀다.
푸르른 하늘과 새하얀 산줄기들.
하늘에도 대지에도 티끌하나 눈에 뜨지 않았다.하얀색과
파란색,그리고 붉은 태양의 선명한 대비가 무척 아름다웠다.
석주는 아스라이 펼쳐진 산들과 태양을 바라보았다.
혜원의 얼굴이 태양에 겹쳐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에서 한없이 자비롭고 평화로운 미소가 번져나왔다.
삼라만상을 모두 품어 줄 듯한 미소였다.
혜원의 미소가 눈부신 햇살과 함께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것 같았다.
오늘은 혜원이 벽운 선생과 운학산으로 온다고 한 날이다.
석주는 지난여름 계룡산에서 여러도반들과 함께 지냈다.
그들은 모두 벽운선생의 문하생들이었다.
혜원은 그들중 한 사람으로 수행이 깊었다..
그녀는 석주보다 두 살 아래였다.
해가 꽤 높이 떠올랐다.운학산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눈덮인 운학산은 완연한 학이었다.
백학봉,청학봉,관음봉,보현봉,미륵봉,기린봉...봉우리마다 학이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은 온통 새하얬다.
산도 강도 들녘도 모두 눈에 파묻혀 청량한 기운을 품었다.
석주는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초막으로 돌아왔다.
초막은 방 둘에 부엌 하나가 딸린오두막 집이었다.
집에 비해 터는 꽤 넓었다.3백평은 족히 되었다.
초막 뒤에는 백학봉이 솟아 올랐다.
오른쪽과 왼쪽에는 백학봉에서 뻗어 온 기린봉과
문필봉이 우뚝 서있다.
세 봉우리 다 타원형으로 생겼는데,그중에서 백학봉이 제일 높고 중후하다.
기린봉,문필봉은 높이와 생김새가 거의 똑같은데 정상부분만
약간 다르다.기린봉 꼭대기는 뭉툭하고 문필봉 머리는 날렵하다
초막 바로 앞은 계곡이다.계곡 건너편에는 수정봉,관음봉,세지봉,
보현봉,문수봉, 이 다섯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있다.
봉우리 뒤에는 아득히 2백여리 밖까지 수천 수만의 산봉우리들이
구름처럼 펼쳐졌다.또 그 너머에는 서해 바다가 아득하게 보인다.
옛날,어는 유명한 풍수객이 여기 들렸다가 무릎을 치며
이런 얘기를 했다.
"천하명당이로다.여덟명의 신선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등천하는
형국이다.
누가 이 터와 인연이 닿아 그 정기를 받을것인가.
뭇 중생이 그 은덕을 크게 입으리라"
석주는 세수를 하려고 샘으로 갔다. 마당의 가장자리,석주보다
조금 더 큰 바위 밑에 샘이 있었다.
사방 두어자쯤 되는 옹달샘 이었는데 물이 아주 잘 나왔다.
여름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솟아 나오는 샘이었다.
거울처럼 잔잔하고 맑은 수면위에서 김이 모락 모락 피어나왔다.
석주는 세수를 마치고 막 일어설 때였다.
서북쪽 하늘에 하얀 학한마리가 나타났다.학은 천천히 날아서
백학봉쪽으로 다가왔다.
백학봉 상공에서 몇바퀴 맴돌더니 초막뒤쪽의 소나무에 내려 앉았다.
백령자!
석주가 학을 발견하고 반갑게 소리쳤다.
백령자는 학의 이름이다.
벽운 선생이 그 이름을 붙여주었다.
백령자도 벽운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있다..벽운선생의 제자들 중에서
백령자의 도가 가장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