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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성자들

우화등선한 선인 김가기

작성자 : 피스우즈

우리 말속에는 수련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 보이는 말이 많습니다. ‘기가 막힌다’, ’기분이 좋다’ ‘기운이 난다’ 등등. 말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우리말 곳곳에 녹아있는, 기와 관련한 말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선도수련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됩니다. 당연히 높은 경지에 이른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분들의 삶을 담은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조선조 초기 고대 역사 특히 단군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역사 책을 갖고 있을 경우 엄벌에 처했을 정도로 관련 서적을 모두 거둬들여 불태웠고, 일제도 식민통치를 위해 민족정기를 북돋울 수 있는 서적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들어 주목을 받고 있는 김가기(金可記) 선인에 대한 기록은 소중한 자료로 생각됩니다. 

 

물론 그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중국의 선도 관련 서적인 <속열선전> 당나라 때 심분이 쓴 <속선전>, 원나라 조도일이 편찬한 <역세진선체도통감람> 등에 김가기 선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지난 2001년에는 중국 섬서성(陜西省) 종남산 자오곡에서 김가기 선인의 삶을 담은 석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자오곡은 김가기 선인이 살던 곳으로 중국 산서성 종남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계곡인데 절경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계곡은 현지인들이 금선봉이라고 불리는 산봉우리 아래에 있으며 소나무 숲이 해를 가릴 정도로 우거져 일반인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곳이라고 합니다.

 

속열선전과 비석에 담긴 글에 따르면 김가기 선인은 신라 사람으로 38대 원성왕 때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인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한 뒤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최치원 선생도 빈공과를 통해 당나라 관리가 됐지요. 

 

김가기 선인은 성품이 침착하고 도를 닦는 것을 좋아했으며 사치스러운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박학다식해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용모는 단정하고, 말과 행동거지에서는 깊은 멋이 풍겼다고 전해옵니다.

 

김가기 선인은 그렇게 3년을 살다 사신으로 본국인 신라로 돌아갑니다. 고향 땅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김가기 선인은 얼마 뒤 다시 당나라로 돌아와 종남산으로 들어가 황제가 불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찾지 않는 깊은 산중에 띠풀로 엮은 집을 짓고 손수 꽃을 심고 과수를 많이 길렀습니다.

 

기록을 보면 김가기 선인은 남몰래 덕을 베푸는데 힘썼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청하는 게 있으면 거절한 적이 없었으며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도 매사에 정확했다고 합니다. 

 

김가기 선인의 삶은 결국 수행이라는 게 주위 사람에, 자신을 길러준 만물을 이롭게 하는 일을 힘써하는 것임을 나타내주는 것 같습니다.

 

선인으로 칭송받은 분인 만큼 수련도 하셨을 것입니다. 기록에는 복기(服氣)를 통해 몸을 단련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복기란 기를 먹는다는 뜻으로 호흡수련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늘 향불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때가 많았으며 도덕경과 신선경을 외우고 익히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짓고 남을 돕는 일에 힘쓰던 김가기 선인은 당나라 선종 11년(867년) 3월 당나라 황제에게 소를 올립니다. 황제는 그분이 올린 글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신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자와 영문대의 시랑이 되어 내년 2월 25일에 하늘로 올라가야 하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종은 이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내시를 보내 그에게 궁에 들어올 것을 권했으나 김가기 선인은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옥황상제의 조서를 보자고 해도 다른 신선이 관장하므로 인간 세상에는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선종은 김가기 선인이 고집을 꺾지 않자 궁녀 네 명과 내시 두 명을 보내 시중들게 하였으나 김가기 선인은 이를 물리치고 혼자 생활하며 그들을 바깥채에 살도록 했다고 합니다.

 

내시와 궁녀들은 혼자 사는 김가기 선인의 방에서 밤마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창문 틈으로 몰래 들여다보니 김가기 선인이 용과 봉황 위에 앉은 선관(仙官), 선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점차 나라 안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김가기 선인이 말한 2월 25일이 다가왔습니다.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조정의 여러 사대부를 비롯해 상인, 공인 등 온갖 사람들이 산골 계곡인 자오곡을 가득 메웠습니다. 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오색구름이 피어나고 학이 길게 울었습니다. 계곡 주위에는 봉황이 날고 생황이나 퉁소 소리 같은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펴졌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많은 선인들이 내려와 김가기 선인은 모시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김가기 선인의 삶 특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 그대로 우화등선했다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가기 선인의 신비한 삶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분의 삶의 태도입니다. 

 

기록에 짧게 나타나 있지만 사람들이 찾아와 청하는 게 있으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는 구절은 만나는 사람, 대하는 사물을 끊임없이 분별하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만나는 사람, 접하는 사물 모두에 깃든 하늘을 보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모두가 이로운 방향으로 아낌없는 도움을 줬을 김가기 선인의 삶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삶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