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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묵조사 (6) - 저것이 바로 부처님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초의 선사가 편찬한 <진묵대사유적고>에 진묵스님이 입적할 무렵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진묵조사가 나이 72세 되는 해 10월이었습니다, 조사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시자를 데리고 시냇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물에 비친 스님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것이 바로 석가부처님이다.”

     

    물에 비친 그림자를 들여다본 시자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너는 나의 거짓 모습은 알면서 그 안에 부처님의 참모습은 모르는구나.”

    조사는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나서 대중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나는 오늘 세상을 떠나려고 한다. 부지런히 닦고 잘 깨우치거라.”

    “스님이 가시면 누가 법맥을 이어갑니까?”

    “수행자가 공부나 참되게 하면 되지, 그런 것은 왜 따지느냐?”

    그래도 제자들이 스님을 붙잡으며 재삼 청하자 조사는 마지못해 입을 떼었습니다.

    “명리승(名利僧)이기는 하나 서산스님이 정통을 이은 분이니 그쪽으로 해라.”

     

    말을 마친 진묵조사는 가부좌한 채 고요히 입적하였습니다. 대둔산에 있는 태고사에는 진묵조사의 풍모를 짐작하게 하는 시가 남아 전합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으로 자리하고 산은 베개 하며

    달을 촛불 삼고 구름으로 병풍치고 바다는 술통 삼네.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신나게 춤추니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저어할 뿐이라네.(끝)

  • 진묵조사(2) - 8년 정진 끝에 대각을 이루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terimakasih0)

    주지 스님과 희 노장은 어린 동자의 말에 껄껄 웃고 말았습니다.  

     

    원래 희 노장은 봉서사 주지를 지낸 스님이었는데 성격이 불같고 괴팍했습니다. 시봉하는 사미를 번번이 쫓아내는 바람에 겨울에 거처하는 방의 불도 손수 때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희 노장은 일옥을 자기 방에 데리고 들어가 저녁을 먹였고 그날 이후 일옥은 8년 동안 희 노장을 시봉하게 되었습니다. 

     

    주지스님은 일옥을 영리한 아이로 생각하고 신장을 모신 단에 향불을 올리고 예배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일을 맡기고 얼마 되지 않아 주지스님 꿈에 신장들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 모시는 것이 우리 신장의 할 일인데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향을 올리고 예배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발 다시는 아침저녁으로 예불하게 하지 마시고 우리가 마음 편히 지내도록 해 주십시오.” 

     

    봉서사 스님들은 어린 동자승을 남달리 보아 ‘작은 부처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희 노장이 입적하자 일옥은 삼년상을 지내고 난 후,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이름은 ‘진묵’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진묵이 200리 넘는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평야와 바다 사이에 우뚝 솟은 변산이었습니다. 봉래산 중턱에 자리 잡은 월명암은 신라시대(691년) 부설거사가 창건하여 가족이(묘화부인, 등운, 월명) 모두 수행하여 득도한 곳입니다. 월명사에서 진묵은 일체의 말을 끊고 묵언 정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8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오직 참선에 몰두했습니다. 

     

    낙조대에 앉아 수행을 하던 어느 날 석양 무렵이었습니다. 붉은 해가 서서히 내려오며 그 기운으로 바다를 시뻘겋게 물들이더니 진묵을 그대로 품어 안았습니다. 그 순간 진묵은 오랜 묵언 수행을 깨고 기뻐하며 소리치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습니다. 음력 칠월 보름 구순안거 해제 날 8년 적공 끝에 대각을 이룬 것입니다. 

     

    진묵은 깨달음을 얻은 뒤 궁벽하고 쇠락해가는 절을 주로 찾아다니며 민중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조선은 당파 싸움과 전쟁으로 극심한 혼란기였습니다. 진묵은 헐벗고 가난한 민중과 어울리며 그들의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부처님이라 불리며 그들의 의지처가 되었습니다. 초의선사가 쓴 <진묵대사유적고>에는 그와 관련된 신기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봉곡선생으로 불리던 유학자 김동준은 진묵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진묵스님에게 <주자강목>을 한 질을 빌려주며 사람을 딸려 보냈습니다. 스님은 걸어가면서 한 권씩 읽은 다음, 책을 떨어뜨리며 갔습니다. 따라가던 사람이 책을 모두 주워가지고 가서 봉곡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나중에 봉곡이 진묵을 만나 그 까닭을 묻자, 진묵이 대답했습니다. 

     

    “고기 잡은 뒤에는 고기 잡는 통발은 잊는 법이네.” 

     

    봉곡이 내용을 물어보니 진묵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내용을 꿰고 있었다고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