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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삶, 신독(愼獨)

    이미지 : LG 공식 홈페이지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족은 ‘허례허식’을 삼가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도 비공개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빈소를 공개하지 않고 조문은 물론이고 조화까지 사양했지만 인연 있는 정재계 인사 수십 명이 굳이 빈소를 찾을 정도로 고인이 남긴 족적은 큰 것 같습니다.
     
    구 명예회장은 생전에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부자가 되기 위해 바르고 부끄러움 없는 생활 자세”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를 위해 고인은 서울 여의도 LG 사옥 집무실에 신독(愼獨)이라고 쓴 휘호를 걸어 놓고 늘 마음에 새겼습니다.
     
    신독은 대학에 나오는 군자필신기독야(君子必愼其獨也)의 줄임말입니다. 군자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늘 올바르게 처신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는 LG가 내세우는 ‘정도경영’의 바탕이 됐을 것입니다. 
     
    고인은 신독을 바탕으로 기업 경영의 원칙도 세웠습니다. 
     
    “사사로운 이해를 떠나 공사를 엄정히 구분하면서 기업을 이끌어 나가고, 항상 정당한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기업을 운영한다면 사회는 결코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근검절약하고 절제된 생활을 영위하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부는 이 사회로부터 점차 존경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신독이라는 삶의 철학은 구 명예회장의 검소하고 소탈한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의 검소함은 가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구 명예회장은 회고록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 “나는 주로 구태회 숙부의 옷을 대물림해 입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조부께선 학용품도 하나 다 써야 새것 하나를 꺼내 주셨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배우고 자라서인지 구 명예회장은 재벌의 총수이지만 어느 동네에서나 만날 수 있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구 명예회장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고동색 카디건과 검은 뿔테안경은 20년 쓴 물건들입니다. 은퇴한 뒤 사용할 컴퓨터도 계열사에서 쓰던 것을 가져다 쓸 정도로 근검절약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15일 자신의 트위터에 “회장님께서 1980년대 정부청사 인근 허름한 식당에서 일행과 수행원도 없이 혼자 비빔밥을 드시던 소박한 모습을 몇 차례나 봤다. 회장님의 그런 풍모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을 키웠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고인은 각지의 공장을 방문할 때도 불필요한 의전을 삼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LG그룹에서는 오너 경영인이 방문했을 때 간부들과 직원들이 도열해서 맞는 일이 없습니다. 
     
    구 명예회장은 가족에게도 엄격했습니다. 힘 있고 돈 많은 이들의 대다수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궁리할 때, 고인의 네 아들은 모두 육군에서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습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는 신독의 삶을 살았기에 구 명예회장은 물러날 때도 알았습니다.  그는 1995년 LG를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넘겨주고 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자연 속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에서 자식에게 경영을 물려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구 며예회장은 낙향한 곳에서도 버섯 재배를 연구하고 된장, 청국장, 만두 등 전통음식의 맛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에는 늘 마음을 썼습니다. 1991년 사재 2억 원을 출연해 LG복지재단을 만들어 소외계층을 지원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 상남이라는 호를 지은 것입니다.
     
    구 명예회장은 문중에서 항렬이 낮지만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습니다. 아저씨뻘 되는 이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이들이 자신을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남이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상남은 경남 진양군 지수면 고향집 앞에 있는 작은 다리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고인은 삶처럼 떠나는 길도 소탈했습니다. 
     
    유족은 빈소를 공개하지 않았고 화장 뒤 묻힐 장지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문상객도 2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화도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것만 받고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나라의 대표가 보낸 것이라 그마저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